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 10월 8일·을미사변)이 일본 내각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음을 보여 주는 물증이 발견됐다.
최문형(역사학) 한양대 명예교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 육군 대장이 1895년 7월 8일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1844∼1897) 외상에게 보낸 편지를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내 사본과 내용을 공개했다.
야마가타는 이 편지에서 “별첨한 글을 보고 실로 경악해 마지않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한 것은 세외(世外)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내 주신 가르침대로 내외(內外)에 대해 방관좌시(傍觀坐視)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각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단행하시기를 희망합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한자와 일본어 필기체로 쓰인 이 편지에서는 행간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면서 “일본 내각의 핵심 인사들이 명성황후에 대한 회유 정책을 포기하고 그를 제거하는 강경책으로 전환하게 된 당시의 심정과 이 같은 분위기가 일본 각의의 결정에 반영됐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편지는 총리를 지낸 거물로 당시 청일전쟁을 진두지휘해 승리로 이끈 뒤 일왕의 자문에 응하는 ‘겐로(元老)’였던 야마가타 대장이 폐병 요양차 지방에 머물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의 인사들과 서신 왕래를 통해 대외정책을 조언하던 무쓰 외상과 명성황후 제거 필요성을 논의했음을 보여 준다.
편지에 등장한 세외 백작은 당시 주한 일본공사로 조선 문제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던 거물 정치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를 가리킨다. 청일전쟁 기간에 주한공사를 자원했던 이노우에는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이에 대한 대책을 본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귀국해 있었다. 이 편지가 쓰인 직후인 7월 10일경 이노우에는 자신의 후임으로 외교에 무지한 무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6∼1926)를 추천했으며 9월 1일 미우라가 주한공사로 부임한 뒤 37일 만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최 교수는 “이 편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입을 부인하고 미우라-대원군 주모설을 주장해 오던 일본 측 주장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라고 말했다.
한영우(국사학) 한림대 특임교수도 “일본 정부가 사건 관련 자료를 송두리째 파기한 점을 감안할 때 일본 정부의 개입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만 한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인의 사진첩에 등장하는 4장의 사진. 아래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1.고종과 순종 2.명성황후 추정 사진 3.대원군 4.대원군. 명성황후 추정 사진의 설명에는 `Die Ermodete Konigin'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시해된 왕비'라는 뜻이다.
사진 (2)와 사진 (3)의 배경이 정확히 일치하는 점도 명성황후로 추정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다. 명성황후 추정 사진에 등장하는 여성은 지금까지 공개됐던 명성황후 추정 사진들이 유순한 외모였던 것과 달리 차가운 눈빛에 예지력을 갖춘 것임을 느낄 수 있어 명성황후를 접견하고 인상을 썼던 기록들과 일부분 일치한다고 학계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110년 전인 1895년(을미년) 10월 7일 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선 파티가 벌어졌다. 명성황후가 친정 조카인 민영준이 궁내부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해 베푼 자리였다. 조선왕조 500년 사상 가장 처참한 궁중 비극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일어났다. 일본 낭인 60여명이 새벽 6시쯤 국왕 부부의 처소인 건청궁에 난입,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운 것(을미사변)이다.
▶낭인 무리 중에 후지카쓰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8·15 광복 후 죽었을 때 집에서 길이 120㎝ 가량 되는 칼이 하나 발견됐다.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계속 ‘민비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떨고 있는 궁녀들 중 용모와 복장이 아름다운 두 명을 참살했다. 또 한 명의 머리카락을 잡아 옆방의 옥호루로 끌어내 살해했다.…’왕비의 관자놀이에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세 구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는 것이 확인됐다.”(쓰노다 후사코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
▶살아서는 외국 사신에게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던 지엄한 국모였다. 폭도들 중 하나였던 고바야가와는 “방 안에 들어가 쓰러진 부인을 보았다. 위에는 짧은 흰 속옷만 입고 있었고 아래는 흰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는 맨살이다”고 썼다. 또 한 사람의 폭도 이시즈카 에조는 “정말로 이것은 쓰기 어려우나…”하며 황후를 향해 말 못할 만행이 저질러졌음을 고백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전하는 또하나의 문서가 발견됐다. 당시 서울 주재 일본 영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옥호루 실내에서가 아니라 마당에 끌려가 여러 사람이 짓밟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것이다. 시해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황후가 누구인지 목표를 정하고 군사작전하듯 치밀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진실의 일부일 뿐이다. 폭도들 중에는 하버드대학과 도쿄대를 나온 지식인, 훗날 국회의원 장관 외교관을 지낸 인물들도 많았다. 시해의 주모자는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권력의 핵을 이루고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실무책임은 육군 중장 출신 주한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맡았다. 그러니 사실상 일본 정부가 저지른 범죄였다. 폭도들은 훗날 형식상으로 재판에 회부됐다가 모두 풀려나 영달의 길을 걸었다.
명성황후 사진을 논하지 말라
사진을 객관적으로 고증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그러나 역사 배경과 그시대의 풍속 과 그리고 촬영자의 신분을 알면 어떤 의도적으로촬영했는지 절반의 답이 나온다. 이런 상식도 모르고 사진을 함부로 해석한다는 것은 문자보다 위험성이 높다내가 30년동안 수집 발굴한 사진 중에는 지금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사진들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얼마전 명성황후사진을 발견했다고 언론에서 온통 대서 특집보도 했다 어떤학자는 논평도 부족하여 너문 감동적 사건이라 했다. 학자의 전문 지식과 올바른 상식을 겸한 교수라면 이런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명성황후 진본사진을 찾기위해 그간 유사한 사진들을 많이 발표 했으나 지금까지 확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국내 사학자들의 지식층을 가늠할 수가 있었다.
외국인 그사람(테리) 이 왜 미국에서 고증없이 발표했는지 나는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테리씨는 한국에 자주오고 인사동에서 사진을 수집하여 한국 관련 서적도 발간했다. 이때 사진몇점을 본인이 고증한 사실도 있다. 본인도 독일에서 동일 사진을 입수하고 9년전 발표 했을 때는 정경부인이라 소개 했었다.
지금 여성이 들고 있는 태극포선 (부채) 는 조선시대 서민층에서 많이 사용하고 마님 몸종들이 나들이 할 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대원군 중국식 복장은 유배시절 입던 옷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개량된 특이한 의상이다. 대원군의 서자(아들) 이재선 이도 같은 의자에 입고 있는옷은 대원군 옷과 동일하다.
대원군은 중국에 유배시절에도 한복과 망건을 쓰고 있었던 사진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번에 여러 사진을 공개하면서 사실접근을 시도했지 새로 발견된 사진은 없다. 복잡한 비교보다 배경. 복식에서도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원군의 흉배는 황금 거북으로 되어있어 오래살기위한 장식으로 해석된다. 이번 사진도 우리가 찾는 국모가 아닌 점에서 실망이 크지만 그러나 명성황후가 아닌 여인상을 보고 학계에서 흥분한 점은 우리모두에게 큰 실망을 주었다. 2006년 8월 8일 저자 정성길 |
[명성황후 사진 논란] 논란 속 세 사진
'명성황후다, 아니다'라는 논란이 일었던 사진은 크게 세 종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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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민영찬과 명성황후의 가까운 관계를 생각할 때 이 사진 속 주인공이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1930년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이 틀렸다면 민영찬이 분명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고 그 경우 1933년에 같은 사진이 다시 게재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명성황후의 사진이 맞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학자 문일평(1888~1939)이 1920년대에 쓴 '사외이문'(史外異聞)이라는 책에서 '이 사진을 알만한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아니라고 대답했다'고 적은 것을 보면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종류는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의 '대한제국멸망사'(1906) 등에 실린 사진이다. '독립정신'의 사진보다 옷이 화려하고 머리도 말아올려 치장을 많이 한 것이 특징이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머리 장식 등을 보면 당시 사람의 신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사진 속 여인은 일반 궁녀가 대개 비녀를 하나 꽂은 것과 달리, 비녀 두개를 꽂고 옷도 화려해 왕비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로 복식사를 전공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다. 이들은 사진 속 여인의 옷이, '독립정신'의 그것보다 화려하다고는 하나 왕비의 의복으로는 초라하다고 말한다. 머리도 어느 정도 장식은 했지만 왕비의 그것은 이보다 훨씬 화려하다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된 사진은 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이다. '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 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 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황후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과 함께 실린 사실이 확인돼 일단 이 사진은 궁녀로 가닥이 잡힌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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