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명칭 : 포르투갈공화국(Portuguese Republic)
인구 : 10,524,000
면적 : 92,152 ㎢
수도 : 리스본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총리
공식 언어 : 포르투갈어
화폐단위 : 유로(euro/??)
이곳은 대륙의 끝. 여기서부터 바다가 시작되다」라는 포루투갈의 대표적인 시인
까몽이쓰의 표현대로 유럽 대륙 최서단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나라. 포루투갈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포르투갈은 테주(타호) 강에 의해 대략 양분된다. 동쪽과 북쪽으로 스페인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 있다. 테주 강은 스페인과의 동쪽 국경선 중간 지점에서 포르투갈로 흘러 서쪽으로 포르투갈의 천연항 인 리스본에 이른다. 테주 강의 북쪽에는 국토의 12%가 채 안 되는 해발 700m 미만의 고지대가 북동쪽으로 스페인까지 펼쳐져 있다. 포르투갈의 최고봉은 해발 1,991m로 에스트렐라 산맥에 있다. 이 산맥의 북쪽에는 스페인의 메세타 고원의 서쪽 연장지대가 대서양의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 있는 연안지대이다 테주 강의 남쪽에는 해안저지대가 농촌지대를 이루고 있다. 남부의 저지대의 평균 해발은 150m에 불과하며 3%에 해당하는 지역만이 400m를 넘는다. 포르투갈에서 유일하게 지진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 바닷속에 잠겨 있는 지브롤터-아조레스 산맥을 따라 근해에 분포해 있다. 유럽 최악의 지진 가운데 하나가 1755년 이 산맥을 따라 일어났으며, 그결과 발생한 해일이 리스본을 덮쳐 최소한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겨울은 온난 습윤하고, 여름은 비교적 기후 변화가 없으면서 건조하다. 리스본에서 1일평균기온은 1월에 11℃, 7월 22℃이고, 연강우량은 700㎜이다. 포르투갈 전체면적의 1/3이 경작지이며, 그 가운데 1/3 이상이 밀·옥수수 같은 곡물재배지로 이용되고 있다. 건조한 6∼8월의 여름에는 연평균강우량의 4%만이 내리고 총농경지의 20%가량 관개 한다. 영구목초지가 전국토의 6%에 불과하지만 양·돼지·젖소의 사육을 장려함. 국토의 40%가 삼림이며 대부분 북부 고지대에 있다. 경작용 올리브림과 야생 올리브 숲이 전국 곳곳에 무성하다며 포르투갈은 천연자원이 부족한 편이나 텅스텐이 세계총생산량의 4%에 달한다. 포르투갈에서 발견된 독특한 최초의 문화는 약 BC 5500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 1385년 , 아비스 왕조의 군주정치하에 포르투갈은 유럽 최초의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아비스 왕조의 군주들은 탐험주의를 적극 권장하여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인도·인도네시아·중국·중동·남아메리카 인도양 대서양의 인근국가들을 수페인과 경쟁적으로 탐험하였다. 1986년 마리우 수아레스는 60년만에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이 되었으며 1991년 재선에 성공했다.
벨렘 탑 :- 16세기 초에 지어진 마누엘 양식의 테라스를 가진 탑으로, 귀부인이 드레스 자락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테주 강의 귀부인' 이라고 불린다.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3층은 왕족의 거실이며, 2층은 대포 자리, 1층은 우아한 여자의 숨겨진 잔인함을 나타내듯이 물 속의 감옥이다. 파노라마처럼 아름답다.
제로니무스수도원:- 포르투갈 리스본 벨렘 지구. 마누엘 1세가 엥리케 왕자의 위업과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를 기념하기 위해 16세기에 건립하였다.
상조르제성:- 이 성은 리스본에서 가장오래된 건축물로 성문 안쪽 전망대 광장에는 이 성을 함락시킨 포르투갈 초대 왕 엔리케의 동상이 있다. 리스본 시내전경
에두아르두 7세 공원 :- 1902년 영국의 에두아르두 7세가 리스본을 방문한 기념 만들었으며. 기하학 무늬의 화단이 아름다우며 정상에서 보는 리베르다데 대로와 테주 강의 전경은 훌륭하다. 열대식물로 뒤덮인 아름다운 이곳은 동굴과 폭포, 연못 등이 있고, 콘 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리스본 국립극장
아우구스타 거리 까보다로까 :- 유럽 대륙의 최서단(最西端)에 위치한 항구 마을로 하얀 등대가 대서양을 내려다보고 있다. 특히 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90년대 CF 촬영지로서 각광받았을 정도로 낭만적인 매력을 풍긴다. 이곳은 대륙의 끝. 여기서부터 바다가 시작되다」 라는 포루투갈의 대표적인 시인 까몽이쓰의 표현대로 유럽 대륙 최서단
유롭대륙의 최서부의 끝마을 까보다로까(Cabo Da Roca)에서 파티마(Fátima):- 포르투갈 중부 산타렘 주 빌라노바데오렘 자치체에 있는 마을이며 성지. 리스본에서 한시간 삼십문 거리에 떨어진 인구 1만명의 도시이며레이리아 남동쪽 29㎞ 지점의 코바다이리아 고원에 있다. 12세기에 무어 공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917년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큰 성모 마리아 성지가 되어 해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10월 13일 파티마에 참여한 군중들(7만 명 정도로 추산)은 성모 마리아가 세 어린이에게 나타난 직후 일어난 '기적적인 태양의 현상'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이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레이리아의 주교도 1930년 10월 13일 세 어린이의 환영을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공식 승인했다. 같은 해에 교황은 파티마 순례자들에게 면상(免償)을 주었다. 순례자들의 봉헌은 로사리오의 기도를 자주 외우고 은총이 가득한 성모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를 의심 없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전국적인 규모의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1928년에 바실리카가 건축되기 시작했고,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65m 높이의 탑 위에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있으며, 교회당의 양측면에는 병원과 피정(避靜)의 집이 있고, 정면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 출현 성당이 있는 거대한 광장이 있다. 기적적인 치유사건이 많이 보고 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1967년 5월 13일 첫 출현의 50주년 기념일에는 100만 명의 군중들이 교황 파울루스 6세가평화를 기원하며 집전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참석했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이 참나무 아래 3어린에게 성모님이 수차레 발현한곳. 오튼쪽의 루시아 두수 산투스, 프란시스쿠,히야진다 마루투 3명의 어린이에게 성모님의 발현:- 세 어린이에게 성모가 나타나 3가지의 예언을 들려주면서 앞으로 매달 13일에5번 더 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리자 사람들은 다음달 13일에 성모가 약속한 장소에 모여 성모의 발현을 본다. 마지막 6번재 나타난다고 약속한날 포루투갈 정부는 어린 목동들을 체포하고 순례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 후 레이리아의 주교가 이 사실의 신빙성을 인정하면서 ‘파티마의 로자리오 성모’에 대한 숭배는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대성당이 건립되어 해마다 수백만명의 순례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성모가 처음과 마지막으로 나타난 5월 13일과 10월 13일에는 거대한 횃불 행진이 벌어진다. 대성당에는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목격해파티마를 성지로 변모시켰던 세 어린이 목동 가운데 프란치스코(Francisco Marto, 1919년 사망)와 히야친따(Jacinta Marto, 1920년 사망)의 무덤이 있으며, 이들은 2000년에 시복(諡福)하였다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루치아 수녀(Sister Lucia de Jesus dos Santos)는 2005년 2월 13일 9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는 이 탑은 원래는 물 속에 세워졌으나, 테주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좁은 원형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 오르면 3층의 테라스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테주 강의 일대가
산책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65m 높이의 중앙 탑이 있는 네오 고딕 양식의 거대한 성당은 1928년 5월 13일에 건립되었다.
성모는 이들에게 무서운 지옥에 대한 비전과 1차대전의 종결, 2차대전의 발발과 러시아 공산주의의 몰락 등을 예언하는 20세기의 세 가지 계시를 전하였다.
교황은 세번째 게시를 믿었지만 2000년까지 이를 공표하지 않았으며, 2000년 5월 13일 공개된 메시지는 다름 아닌 교황 암살 기도였다.
성모 마리아 발현 대성당
이 성당은 (Basilica)3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대한 광장 북쪽에 있는 네오 클래식 양식의 대성당이다.
중앙에 64m높이의 탑이 있고, 좌우의 주랑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제단 왼쪽에는 자신타 마르투와 프란시스코 마르투의 묘가 있다.
5월 12~ 13일, 그리고 10월 12일에는 주변의 호텔이나, 펜션을 구할 수가 없을 정도로 순례객이모인다
성모발현 대성당의 내부
2000년 5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파티마 성지의 발현 제실(apparition chapel)에서
기도하기에 앞서 손을 흔들고 있다.(뒷쪽에 성모 마리아 상이 보인다.)
3 유라시아의 끝동네 까보다로까(Cabo Da Roca)
아침 8시에 리스본을 출발하여 유라시아 대륙 끝인 까보다로까[로까곶]를 찾는다. 초록숲 속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달려가는 길가에는 노란 민들레와 빨간 야생양귀비꽃 그리고 하얀 들꽃이 만발해있는 것이 희고 붉고 노란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기가 좋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바닷가에는 야자나무를 비롯한 아열대 나무들이 보기 좋게 늘어서 있다. 그 사이에 띄엄띄엄 서있는 집들은 모두 별장이란다. 하기야 바닷가 경치가 이처럼 아름다운데 거기에 별장을 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별장이 저렇게 많은 것을 보니 포르투갈의 부호들은 모두 이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땅 끝 마을은 좁다란 공간에는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다. 주위에다 담장을 둘러치고 그 안에다 작은 집을 짓고 몇 가지 화초를 심어서 가꾸고 있는 마을은 빈한해 보인다. 거기에다 좁은 경지를 마련하고 농작물을 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경사진 초원에서 양을 기르는 것이 주업이다. 까보다로까는 포르투갈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땅끝 마을 주위에는 빨강 노랑 하얀 들꽃들이 화원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황홀하게 한다. 그래서 나도 초동시절로 돌아가 깡충깡충 뛰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한다.
대서양의 파도가 끝없이 밀려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높다란 절벽위에는 빨간 등대 하나가 서있다. 대서양을 오가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까보다로까 등대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낮이라 등대는 밤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등대 부근에는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서있다. 거기에는 북위 38도47분 동경 9도30분, 고도 140m라는 좌표와 함께‘이곳에서 대륙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 된다’라는 민족시인 까몬의 말이 새겨져있다. 까보다로까는 까몬의 말처럼 유라시아 대륙이 끝나고 광활한 대서양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가마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이곳에 와보았겠지. 그래서 더 걸어 갈 땅이 없음을 확인하고 배를 타고 수평선이 아련한 저 대서양 너머로 육지를 찾아 나섰겠지.
그리하여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산타 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등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팔로스 항을 출발하여 61일간의 항해 끝에 10월 12일 서인도 제도의 산 살바도르'(San Salvador,성스러운 구세주) 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이나 신대륙을 왕래를 하면서도 끝내 그것이 신대륙임을 알지 못하고 죽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까보다로까에 와서 보니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한국의 부산에 사는 내가 비행기를 타고 불과 하루 만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온 내가 감개가 무량하고 과학문명의 발달은 참으로 놀랍다.
4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리스본은 13세기 국토회복에 성공한 아폰서 3세가 리스본 천도를 명하면서 포르투칼의 수도가 되었다. 15세기 대항해 시대에는 식민지에서 흘러든 각종 향신료와 귀금속이 리스본의 최대 번영기를 가져다주었다. 그 후 1755년 지진으로 시가지가 많이 파괴되었으나 동부의 알파마 지구에는 성 조지성이, 서부의 벨렘 지구에는 본래 성채였던 벨렘의 탑과 바스코 다 가마를 기념한 고딕양식의 수도원과 아주다 궁전 박물관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남아 있다.
상업과·행정기관이 집중해있는 중앙부는 본래 바이샤라고 부르는 저습지로 거의 전역이 지진 후에 재건되었고 동부는 본래 페니키아인·로마인의 거리였던 옛 시가지이며 서부는 신시가지인데 유럽공동체(EC)는 1994년도에 유럽문화도시로 지정했다.
이곳은 겨울에도 10도 이상이어서 해변공원에는 야자수와 소철 등 열대 식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속에 있는 고급주택들은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먼저 찾은 벨렘지구는 테주강과 대서양이 만나는 곳으로 옛날에 벨렘탑(Torre de Belem)을 세워놓고 배의 출입항을 감시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던 곳이다.
1519년에 건설된 벨렘탑은 마누엘 양식의 건축물로, 1층은 19세기 초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 상'이 서 있으며 테라스가 아름다운 3층은 옛날 왕족의 거실로 이용되었으며 지금은 옛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곁에 있는 공원에는 비행기 한대가 전시되어 있다. 1922년에 최초로 이곳 포르투갈에서 대서양을 횡단하여 브라질의 상 파울로까지 날아간 비행기란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비행기이지만 그 때에는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세계를 감동시킨 대단한 비행기가 아닌가.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는 커다란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가 우뚝 서 있다. 이 기념비는 1960년 엔리케 항해왕 사망 500주년을 기념하여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무려 53m이나 된다.
항해중인 범선 모양을 한 이 기념비에는 수많은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맨 앞 뱃머리에 서 있는 사람이 앤리케 항해왕이고, 그 뒤에는 신천지 발견에 공이 큰 모험가와 천문학자, 선교사들이 따르고 있다.
이 탑을 엘리베이터로 정상에 오르면 테주강과 대서양이 한눈에 들고 4월25일 다리와 아주다 언덕이 저만치 바라다 보인다. 지하에는 박물관이 있어서 항해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해 두고 있고.
발견기념비가 서 있는 넓은 광장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세계전도가 있다.
육지는 갈색, 바다는 흰색 대리석으로 세계지도를 그려 놓고 거기에다 항로를 개척한 년도를 기입해둔 것이다.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도항로는 희망봉은 1488년에 바스코 다가마 개척했고, 인도는 1498년에, 인도로 착각한 브라질은 1500년에, 중국과 일본 1541년에 개척하여 화약을 주고 간 것이 게기가 되어 일본은 우리나라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거기에는 우리나라도 그려져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에 제주도까지 뚜렷이 표시된 우리나라 지도가 있었지만 항로는 중국과 일본에 묻혀서 아무런 표시가 없다.
그 부근에 있는 제로니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onimos)은 포르투갈의 전성기 때에 마누엘 1세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을 찬양해서 세운 것이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서 섬세하고 눈부신 조각을 해놓은 이 건물은 외형부터가 아름다워서 눈이 부신다.
내부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포르투갈의 민족 최대시인 루이스 데 카몽에스의 석관이 있고 주위에 코끼리들이 받치고 있는 수많은 석관들은 모두 국왕과 그 가족들의 무덤이란다. 천정은 고딕양식으로 기둥이 높고 조각이 선명한데. 창문에는 성경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신다.
이 수도원은 제단부분이 지진으로 파괴되어 보수를 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면 원래대로 있는 강당부분과 새로 지은 제단부분의 건축양식이 확실히 구별이 된다. 성당 후면에는 십자가에 못이 박힌 예수님의 상이 있고 서문으로 나가면 정사각형 회랑으로 둘러싸인 안뜰의 회랑 기둥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이 참으로 좋다.
바이샤 지구의 아우구스타 거리를 남쪽으로 나가서 개선문을 지나면 떼주강과 마주하고 있는 광장이 나선다. 이것이 바로 리스본 최대인 코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nercio)으로 폼발 후작의 도시계획에 의해서 궁전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광장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은 군성, 정부관서, 우편전신국 등으로 고전적이고 통일된 아케이드 식으로 폼발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에는 18세기 말에 세워진 동 주제 1세의 기마상이 있다. 그는 바로 폼발 후작을 기용하여 리스본의 재건과 개혁을 추진했던 국왕이다.
로시우 광장(Rossio:독립광장)은 리스본 시가의 가장 중심에 해당하는 곳으로 리베르다데 대로와 바이샤 지구에 맞닿아 있다. 13세기부터 리스본의 중심지로 공식행사는 모두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으며 종교재판도 여기서 열렸다. 원래이름은 '동 페드루 4세 광장'인데 로시우로 더 많이 불린다. 바이샤 지구의 메인 광장으로 18-19세기의 건물이 대부분인 현재의 모습은 폼발 후작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중앙의 로터리에는 초대 총독 페드루 4세의 동상이 있고 그 양쪽의 분수 앞에는 로시우 광장의 풍물이라고 할 만한 꽃 파는 노점들이 많이 있다. 이곳 건물들은 외양을 함부로 바꾸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옛날의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광장에는 레스토랑과 여러 가지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관광객들이 많아서 그들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가 있다. 포르투갈은 예전에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탓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연속된 자유의 거리는 길이가 1,5km이고 폭이 93m인데 넓은 거리에는 가로수가 무성하고 노천카페와 통행인들을 위한 벤치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으며 이 나라를 빛낸 선각자들의 동상과 석상이 곳곳에 서있다.
그 끝에 있는 폼발 후작 광장은 자유의 거리 종점이자 리베르다데 대로의 기점이 되는 곳이다. 이곳은 18세기 후반에 포르투갈의 정치, 경제, 교육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 정치가인 폼발 후작을 기념하는 광장으로 중앙에는 폼발 후작의 동상이 높이 솟아있다. 좌대에는 여신상과 함께 마차들이 수레를 끄는 말들을 조각해놓고 높이 솟은 돌기둥위에는 커다란 사자를 몰고 가는 폼발 후작의 동상이 서서 리스본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다.
그 다음에 있는 에두아루도 7세 공원(Parque Eduardo VII)은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의 리스본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나무로 조성한 기하학 무늬의 이 화단은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으로 도심과 일직선상에 있어서 리스본 시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그 중심지에는 돌기둥이 높이 솟은 조형물이 설치되어있고 그 곁에 1755년 지진으로 이 도시가 파괴되었던 것을 형상화한 분수가 있다. 초여름이면 이곳은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는데 열대식물로 뒤덮인 아름다운 곳에는 폭포와 연못이 있다.
테주강에 걸린 4월25일 다리를 건넌다. 1966년에 완성된 서유럽 최장의 현수교인 이 다리는 처음으로 건너편 연안과의 사이를 연결하여 지역개발에 이바지 했다. 이 다리는 길이가 2,187m로 처음에는 "살라자르의 다리"라고 했으나 ‘4월25일 다리’라 이름 한 것은 1974년4월25일 혁신군부에 의한 구테타(리스본의 봄)로 독재자 살라자르가 실각하고 신정부가 들어섰는데 그때의 무혈혁명을 기념하는 뜻에서였다.
위에는 자동차, 아래는 기차가 다니는 2중교인 다리를 건너려니 테주강 건너 언덕에 높이가 109미터나 되는 거대한 그리스도 상이 서있다. 그것은 1960년대에 스페인의 프랑코 총독이 기증한 것으로 석상의 받침대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상 발밑의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가 있다고 한다.
고도 리스본은 비록 18세기에 지진과 화재로 많이 파괴되었다고는 하지만 숲 속에 싸인 고색이 창연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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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과 시내전경
제로니무스 수도원
보이타크의 뒤를 이어 주앙 데 카스티요가 건설 책임자로 취임했으며 그 외에도 레오나르도 바스, 펠리페 엔리케 등 많은 에스파냐 출신 예술가들이 작업에 종사했다. 흰 석회암이 자아내는 이 건물의 웅장하고 화려함은 영광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듯하다
수도원
야경
수도원
내부
내부
내부 제단
성당 내부 (출처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주앙 데 카스티요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성당의 익랑과 신랑의 높이를 같게 하려고 고딕 말기 건축 가운데 가장 참신한 둥근 천장 하나를 설계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각주 끝에서 교차 궁륭이 꽃이 핀 것처럼 퍼져 있고, 나아가 둥근 천장의 늑골 궁륭이 별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조각이 새겨진 아치의 요석이 아름다움을 더해 주어, 전체적으로 매우 우아한 장식 효과를 낸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회랑 (출처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매우 정교한 기둥으로 떠받친 거대한 삼심 아치 너머로 안뜰이 보인다. 회랑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하고 세련되며 지나치게 많은 장식은, 포르투갈의 고딕 말기 또는 르네상스 초기 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바탈랴 수도원보다 나중에 왕실 묘지가 된 제로니무스 수도원에는 국왕 마누엘 1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포르투갈을 해양국가로 이끈 엔리케 왕자가 세운 예배당에 미누엘 1세가 제로니모스 파 수도사들을 위해 수도원으로 건립하였다. 마치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과도 같다. 제로니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onimos)은 마누엘 양식의 화려하고 장엄한 건축물로 특히 수도원 안뜰의 2층 회랑은 아치와 기둥, 벽을 장식한 섬세한 조각이 너무나 아름답다. 벨렘 탑과 제로니모스 수도원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어 있다
포르투칼 리스본 1755년의 지진으로 리스본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다행히 벨렘 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 가마가 개척한 인도항로를 통해 유럽 최초로 동양과 교역을 시작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국왕 마누엘 1세는 선조인 항해 왕자 엔리케의 선견지명에 경의를 나타내려고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수도원 안에 있는 성당이나 회랑, 수도 생활에 필수적인 침실 주변이나 1층 부분은 1517년부터 수도원이 완공된 1551년까지 건축가 5명이 지었다. 이 건축물은 이슬람 양식과 비잔틴 양식을 본보기로 삼아 노르만 고딕 양식으로 지었으며, 한 변의 길이가 300m이다. 석회암으로 지은 이 건축물은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다. 주앙 데 카스티요의 작품이라는 산타마리아 성당의 남문 주랑에는 커다란 성인상과 고승상 24개가 있는데, 이것들은 고딕 후기의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파사드 중앙부에는 프랑스인 조각가 니콜라스 데 샹틀레느가 만든 마누엘 1세와 왕비 마리아, 그리고 성제로니무스와 세례 요한의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 이 여행기는 지난 4월 16일부터 4월 27일까지 12일간 스페인과 포르투갈, 모로코 3국을 여행한 것으로 앞으로 18회에 걸쳐서 게재할 예정입니다. 포르투갈 코임브라(Coimbra) 코임브라 시가지
1, 옛 도시 코임브라(Coimbra) 드디어 스페인과 포르투갈, 모로코 여행을 떠난다. 4월 16일 오후 2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1시간의 비행 끝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 착륙을 한다. 거기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2시간 30분 후인 밤 11시 30분이었다. 지구가 자전을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부산을 출발하여 온종일 비행기를 타고 하루 만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왔으니, 현대문명은 실로 놀랍다. 산타크루스 수도원 이번 여행은 포르투갈의 옛 도시 코임부라(Coimbra) 방문으로 시작했다. 리스본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가이드는 마이크를 잡고 포르투갈 안내에 열을 올린다. 국토면적이 9.2만km인 포르투갈은 농수산업 국가로 1974년 혁명으로 48년간의 독재 종결되고 1986년에 EU의 회원국이 된 이후부터 안정과 정치적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유럽연합 중에서 가장 가난하지만 EU의 원조와 무역으로 산업개발과 현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의 95%가 가톨릭이고 온난한 기후를 이용하여 관광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나라였다.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항롤 발견하고 동방항로를 개척하여 고아와 마카오 등을 거점으로 무역을 했으며 신대륙의 브라질도 이 나라의 식민지였으니 말이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린다. 커피 한 잔을 샀더니, 작은 컵에 물은 거의 없고 커피뿐인 것이 얼마나 독한지 먹을 수가 없다. 이곳 포르투갈 사람들은 커피를 진하게 마시는 모양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을 구성하여 점차 한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유럽연합에 가입한 나라들은 같은 통화인 유로화를 사용하고 여권 검사도 유럽연합 출입 때에만 하고 나라간의 이동에는 하지 않는다. 차창에는 초록빛 평원이 끝없이 전개되고 낮은 산지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산등성이에는 풍차가 한가롭게 돌아가고 초원에는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한없이 평화롭게 보인다. 산타크루스 수도원 정원에 있는 산타 이사벨 왕비 석상 11시에 도착한 코임부라(Coimbra)는 몬데고 강가에 발달한 옛 도시이다. 포르투갈의 3대도시이자 최초의 수도인 이 도시는 시가지의 집들이 모두 주황색 지붕에다 하얀 벽을 하고 있어서 참으로 산뜻하고 신선해 보인다. 코임브라는 포르투갈의 학술과·예술의 중심지로, 코임브라대학은 1290년 리스본에서 창건되어 1537년 코임브라로 옮겨졌으며 12세기에 건립된 산타크루스 수도원과 13세기에 세운 교회 등 옛날의 건물과 유적이 많다. 전차가 느릿느릿 지나가는 거리에는 그림타일로 장식을 해 놓았고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고색이 창연하다. 비좁은 시가지인데도 요소마다 작은 광장을 마련하여 휴식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먼저 찾은 산타크루스 수도원은 1131년 알폰소 1세 때 지은 것으로 16세기에 개축을 한 것이다. 고색창연한 수도원 내부에는 아름다운 타일로 벽면이 장식되어 있다. 설교단은 포르투갈 조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명성이 높고 제단 양쪽에는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조각으로 장식한 알폰소 1세와 그의 아들 산쇼 1세의 석관이 있다. 이 수도원은 정원에 서있는 석상의 주인공인 산타 이사벨 왕비로 인해서 더욱 빛이 난다. 왕비는 빈민들을 위해서 날마다 빵을 나누어 주는 자상한 분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빵을 가지고 빈민들을 찾아가다가 국왕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를 본 국왕이 빵 바구니 덮개를 낚아채자 빵은 예쁜 장미꽃으로 변해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왕비는 그 후에도 많은 선정을 베풀어서 죽은 후에는 성인으로 추증된 분이다. 그래서 오늘도 왕비의 석상은 정원에 서서 산타크루스 수도원을 지키고 있다. 코임브라대학을 창설한 다니스 국왕 석상
이 고도의 상징인 코임브라 대학(Universidade de Coimbra)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가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라가보면 전망이 그지없이 좋다. 1290년에 창설된 이 대학은 근래에 지은 새 건물과 옛날의 오래된 건물로 나뉘어져 있으며 특히 옛날의 대학이 유명하다. 이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가운데 하나로 교황 니콜라우스 4세의 인가로 디니스왕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처음에는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리스본에 설립했으나 1537년 코임브라로 옮겼으며 1911년 리스본대학이 창설될 때까지의 400년간 포르투갈에서 유일한 대학으로 예로부터 법과대학이 가장 유명하다.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자 정문에는 이 대학을 설립한 디니스왕(D, Dinis)의 동상이 우뚝 섰고 그 뒤에는 근래에 지은 시멘트 건물들이 늘어섰으며 옛날의 건물은 그 마지막에 있었다. 옛날의 왕궁 터에 13세기에 지었다는 옛 대학건물은 고색이 창연하고 종각이 높이 솟았는데 건물 안에는 황금빛 찬란한 왕실의 부속성당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넓은 정원 한 쪽 끝에 서서 옛 대학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석상은 이 왕궁 터를 대학에 기증한 주왕 3세(D, Joao 3:1502-1557)다. 국왕의 석상은 짧은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소탈해 보이고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것이 패기가 넘쳐흐른다. 분수광장 대학구경을 마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찾은 분수의 광장(5월8일 광장)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다. 분수를 중심으로 한 비스꼰데 거리는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길 맞은편에는 고색창연한 산타클라라 성당이 서서 분수를 굽어보고 있고 그 곁에는 코임브라 시청건물이 국기를 펄럭이고 있다. 작은 골목길이 수없이 많은 도시 코임브라는 시가지의 풍경마저 중세풍 그대로여서 마치 내가 몇 백 년 전의 세상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아늑한 도시의 분위기가 마치 옛 고향을 찾아온 느낌마저 들었다. 산타크루스 수도원 내부 13세기에 지은 코임브라대학 구문 코임브라대학 옛건물 왕궁 터를 대학에 기증한 주왕 3세(D, Joao 3:1502-1557) 석상 코임브라대학 옛 건물들 대학 옛건물 타일 벽화 고색창연한 산타클라라 성당
기적의 마을 파티마(Fatima)
대성당 입구에 있는 에수상
2 기적의 마을 파티마(Fatima) 평범한 촌락이었던 파티마에 기적이 일어난 것은 1917년이었다. 동정녀 마리아가 1917년 5월 13일과 10월 13일 사이에, 파티마 근처에서 3명의 목동 어린이들(프란치스코 9세, 히야친따 7세, 루치아 10세)에게 여섯 번에 걸쳐서 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는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7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가 세 어린이에게 나타난 직후 일어난 '기적적인 태양의 현상'을 목격했다.
파티마의 기적 처음에는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레이리아의 주교도 1930년 10월 13일 세 어린이의 환영을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공식 승인하고 같은 해 교황은 파티마 순례자들에게 면상(免償)을 주었다. 그 후로 교황들은 공식적인 순례 일정으로 파티마를 방문했다. 특히 1967년 5월 13일 첫 출현의 50주년 기념일에는 100만 명의 군중들이 교황 파울루스 6세가 평화를 기원하며 집전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동정녀는 우리 세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를 지니고 하느님에 의해서 파견되었다고 말했다. 전쟁과 유혈적 폭력에 의해서 문명이 처참하게 파괴되었던 시기에 와서, 성모님께서 요청하신 기도와 배상 그리고 봉헌이 받아들여지고 이행된다면 하느님은 온 세상에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메시지의 핵심은 성모님이 1917년 7월에 3명의 어린이들에게 알려주던‘비밀’ 이라고 불리게 된 메시지 안에 들어있다. 그 비밀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처음 두 부분은 이미 밝혀졌다. 그 첫째 부분은 불쌍한 죄인들의 영혼이 가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장면이었으며, 그 영혼들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와 희생의 행위에 대한 성모님으로부터의 긴급한 요청을 담고 있다. 둘째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예언하고 세계 평화의 조건으로서 러시아의 봉헌에 대한 하느님 어머니의 정중한 요청을 담고 있다. 그것은 또한 러시아의 봉헌에 뒤이은 티 없는 성모성심의 필연적인 승리와 그 불쌍한 국가의 가톨릭 신앙으로의 회두를 예고하고 있다. 세째 부분(제3의 비밀)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으나, 파티마의 환시자인 루치아 수녀에 의해서 1944년 쓰여 졌으며, 1957년부터 교황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소식통에 의하면, 제3의 비밀은 가톨릭교회 내부에 발생될 혼돈에 관한 것이고, 1960년대에 시작되는 신앙의 상실과 교회 내에 만연될 배교(변절)을 예고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28년에 바실리카가 건축되기 시작하여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5m 높이의 탑 위에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있으며, 교회당의 양 측면에는 병원과 피정의 집이 있고, 정면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이 있는 거대한 광장이 있다. 파티마 대성당
이 건물을 보고 있으면 바티칸시티의 광장을 모방했다는 것을 당장 알 수가 있다. 넓은 광장을 앞에 두고 서있는 건물들이 중앙 성당을 중심으로 반원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그렇고 그 양쪽으로 서있는 열주위에 서있는 18명의 성인상이 또한 그렇다. 양초를 불태우는 사람들
성당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양초를 사서 불태우고 있다. 이곳은 방문객이 하도 많아서 사람마다 심지에 불을 붙여 촛불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를 사서 활활 타오르는 촛불 속에 초를 묶음채로 던져서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30만 명이 모여서 미사를 볼 수 있다는 넓은 광장 끝에서 무릎으로 기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여인은 예수님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자 먼 거리를 기어오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고행
반원형으로 늘어선 성당의 구심점에는 예수님의 금빛상이 서서 세계에서 모여드는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그 어느 성당보다도 안정이 되어있다. 그리고 정원 한쪽 잔디밭에는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따, 루치아 세 목동과 동정녀의 발현을 소재로 형상화 해놓은 조각품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최신식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이 찬란히 빛나는데 거기에는 세계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다. 거기에는 엄청나게 큰 파이프오르간이 있는데 거기서 울려나오는 장엄한 노래 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 어린 목동 때 동정녀를 알현하고 코임부라 수녀원에서 평생을 보내다가 작년에 죽은 프란치스코 수녀의 무덤이 있다. 파티마 대성당은 참으로 장엄하고 훌륭했다. 그리고 이곳 파티마는 이미 기독교 성지로서 지위를 확고하게 갖추고 있다. 이 작은 마을에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년 3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온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종교의 힘은 이처럼 대단하다. 가이드 김은 이곳에 오면 무엇보다도 마음이 그를 수없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곳을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하기야 평생에 단 한 번 찾아온 내 마음이 이렇게 즐겁고 평안한데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나는 기적이 일어난 이곳 파티마에서 작은 기념품 몇 점을 샀다. 기독교를 착실히 믿고 있는 나의 지인들에게 주려고 산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나의 파티마 방문으로 해서 더욱 빛나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파티마 대성당
성당안의 조형물 평화로운 파티마 마을 예배를 들이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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