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우리나라 고대지도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5:01

도둑맞은지 30년, 국내 최고(最古) 세계지도가 예천으로 돌아왔다

입력 2022.07.06 17:49
우리나라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세계지도인 만국전도(萬國全圖)가 경북 예천박물관에 둥지를 틀었다. 만국전도는 조선시대 예천 용문면에서 태어나 승지(承旨)를 지낸 박정설(朴廷薛 1612∼1693)이 이탈리아 선교사 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가 편찬한 세계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실린 만국전도를 1661년에 채색하고 필사해 만든 지도다. 사진은 만국전도. /예천군

국내에서 가장 오래 전 그려진 서양식 세계지도가 골동품업자에게 도난당한지 약 30년만에 고향의 품으로 돌아왔다.

예천박물관은 조선 숙종대에 제작된 만국전도(萬國全圖·보물 1008호)를 기탁받았다고 6일 밝혔다. 만국전도는 예천군 용문면 출신으로 조선시대 승정원 승지를 지낸 박정설(1612~1693)이 만든 현존 국내 최고(最古)의 서양식 세계지도다. 박정설은 이탈리아 선교사 줄리오 알레니가 만든 세계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담긴 만국전도를 참조해 세계지도를 그렸다.

 

줄리오 알레니가 그린 원본 만국전도에서 우리나라는 ‘조선(朝鮮)’이라는 국명과 형태만 표시돼 있었다. 박정설은 여기에 경상·전라 등 당시 조선 8도와 탐라(제주)의 지명을 써넣고, 원본에는 없던 울릉도와 백두산을 그려넣었다. 세계지도답게 아시아 및 유럽·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남극과 북극 또한 그려져 있다.

앞서 지난 1989년 정부는 만국전도를 보물로 지정했다. 소유주는 박정설의 후손인 예천군 함양박씨 문중의 박정로씨였다. 그러던 1993년 박씨가 거주하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자택에 골동품업자 A씨가 침입해 만국전도를 훔쳐가면서 보물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도난 이후 20여 년이 흐른 2018년 11월 만국전도는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A씨가 만국전도 판매를 위해 업자를 물색하던 움직임이 경찰과 문화재청 문화재사범단속팀의 수사망에 걸려든 것이다. 수사 결과 만국전도는 A씨의 아내가 운영하는 경북 안동의 한 식당 벽지 안에 숨겨져 있었다. 경찰과 문화재청 등은 회수한 만국전도를 국립문화재연구원 보존과학센터에 보냈다. 이곳에서 만국전도는 보존 처리 후 보관됐다.

 

회수 이후 고향 예천으로 돌아오기까지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A씨는 “만국전도를 훔친게 아니라 돈을 주고 샀다”며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올해 초 대법원은 “A씨가 정당한 방법으로 문화재를 득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A씨의 상고를 기각했다. 지난 1일 함양박씨 미상고택 현소유주 박재문(49)씨는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임시 보관 중이던 보물 만국전도와 소장했던 고서적 116점을 예천박물관에 기탁했다. 도난된지 30년만에 만국전도가 고향 예천으로 돌아온 것이다. 예천박물관은 오는 10월 독도의 달에 만국전도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방침이다. 예천박물관은 만국전도를 포함해 국내 공립박물관 중 최대 규모인 2만 2000여점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김학동 예천군수는 “도난당한 문화재가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게 돼 기쁘다”며 “문화재 환수 기념식과 기획 전시 등을 개최해 군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예천 문화의 멋을 선물하겠다”고 말했다.

 

 

 

세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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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권근 외, 1402(태종2), 채색필사본(모사본), 158.0 * 168.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원본 : 일본 경도 용곡대학교 소장
 
 1402년(태종2)에 대사성 권근,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 검상 이회가 만든 세께지도를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 사이에 모사한 지도로 현존하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중국을 중앙에 배치하고 동쪽은 조선과 일본,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는 구대륙 전역을 포괄한 세계지도이다. 15세기 초의 세계지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 중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의 지도제작수준과 더불어 지도에 대한 국가의 관심,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세계인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천하지도  천하지도(天下地圖) 채색필사본. 18세기 중엽. 36.5 * 30.0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세계지도이다. 원형 천하도, 일본, 유구,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도와 도별도로 구성된 지도첩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민간에 유행했던 일반적인 지도책에는 원형의 세계지도를 <천하도>라는 이름으로 지도책의 첫부분에 수록하고 이어서 <중국도>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 이 지도는 원형의 세계지도를 <태극도(太極圖)>로 칭하고 별도의 사실적인 세계지도를 그려 <천하지도>라 칭한 것이 독특하다. 역사적인 사실들과 관련이 있는 지명등이 있어 역사부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천하도(天下圖<地圖>) 목판본. 18세기 중엽. 28.8 * 35.5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목판본 지도책에 실려 있는 원형의 천하도이다. 표현 양식과 수록 내용은 다른 지도책의 천하도와 비슷하나 해양과 하천을 청색으로 채색한 점이 다르다. 당시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지도로서, 원시 수목신앙, 도교, 불교, 유교적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다.

천하도  천하도(天下圖). 채색필사본. 18세기 후반. 51.2 * 53.4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17세기 이후 민간의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원형의 천하도로서 비교적 정교하게 그린 지도이다. 원형 천하도는 동아시아 중에서도 유독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세계지도로서 당시인들의 세계관을 보여주나 그 기원이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다.

 

천하산천맥락도  천하산천맥락도(天下山川脈絡圖<古地圖帖>) 채색필사본. 18세기 후반. 30.5 * 54.8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1첩 8절로 구성된 채색필사본 지도첩에 실려 있는 중국 중심의 세계지도로서 다른 중국도에 비해 우리나라의 모습이 매우 자세하며, 조선의 윤곽은 조선 초기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류의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산천의 맥락을 위주로 그렸기 때문에 산계를 다룬 지도와 달리 녹색의 연맥으로 그렸다. 이 같은 산계와 수계의 어울림은 중국보다는 우리나라 지도제작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 지역의 산천맥락을 북조대간(北條大幹), 중조대간(中條大幹), 중조소간(中條小幹), 남조대간(南條大幹), 남조소간(南條小幹) 등으로 구분하였다. 곤륜산에서 출발하여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북조대간으로 표현되고 있다. 대간(大幹)이란 용어가 쓰이고 있어 백두대간과의 연관성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지도이다.


 

여지전도
 여지전도(輿地全圖) 18세기 말, 목판본, 85.5 * 59.0cm, 개인 소장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제작된 세계지도로 남북로 남북 아메리카를 제외한 구대륙의 지도이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 한성(漢城)과 팔도관찰사영(八道觀察使營)의 북극고도, 즉 위도와 동서경도를 서울을 기준으로 하여 표시하였다. 이 지도의 중국 부분은 건륭연간(1736~1795)의 중국지도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유럽 등은 최한기가 1834년에 제작한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의 내용과 흡사하다. <지구전후도>는 평사도법을 이용한 반구도(半球圖)이나 이 지도는 중국, 한국, 일본을 상대적으로 크게 하고 경선과 위선이 직각으로 교차되는 원주도법으로 그린 지도에 가깝다. 서구식 세계지도를 조선에서 변형하여 그린 대표적인 지도이다.

 

천하도지도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 <여지도(輿地圖)>라고도 함.) 18세기 말, 채색필사본, 60.5 * 103.1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세기 말 정조 대에 편찬된 서구식 한역세계지도이다. 중국에 왔던 알레니가 쓴 『직방외기(職方外紀)』(1632년)에 수록된 <만국전도(萬國全圖)>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직방외기』에 실린 지도와는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지도의 윤곽, 도법, 지명 등에서 대부분이 일치한다.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와 같이 지도의 중앙경선을 태평양 중앙에 둠으로써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를 중앙 부분에 배치하였다. 남방 대륙은 미지의 땅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에 국가적 차원에서도 서양 지도 및 서양 세계에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지구전도지구후도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최한기, 1834년, 목판본, 37.0 * 37.5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34년에 최한기가 중국 장정부(莊廷敷)의 <지구도>를 목판으로 중간한 동서양반구도. <지구후도(地球後圖)>의 좌측 하단에 간기(刊記)와 제작자가가 표시되어 있는데 태연재(泰然齋)는 최한기의 당호(堂號)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도는 양반구도로 되어 있는 남회인(南懷仁, Verbiest, 1623 ~ 1688)의 <곤여전도(昆輿全圖)>와 다소의 차이가 있는데, 주변으로 가면서 경선 간격이 넓어지는 <곤여전도>와 달리 등간격의 경선으로 그려져 있다. 현재의 반구도에서는 볼 수 없는 24절기가 표시되어 있고, 적도와 황도, 남북회귀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곤여전도>와 달리 오세아니아 대륙이 남극대륙과 분리되어 있어 이 지역이 탐험된 이후의 지도임을 알 수 있다.

                     

 현전하는 한국의 옛 세계지도는 내용과 성격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동양에서 제작된 전통적인 방식의 세계지도이다. 이 유형의 세계지도는 중국을 중앙에 둔 중국과 동양 중심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도로서, 당시인들에게 알려진 세계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한 지도이다.

 둘째는 한국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상상적 세계지도인 원형(圓形) 천하도(天下圖)로서,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는 지도이다. 셋째는 서구에서 도입된 서구식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한 서양식 세계지도로서, 투영법과 경위선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근대적 세계지도이다.

 현존하는 지도를 보면, 조선 전기에는 전통적 동양식 세계지도만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세 가지 양식의 세계지도가 병존하였다.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당시까지 알려진 구대륙을 모두 포괄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세계지도로서, 조선 초기의 뛰어난 지도제작 능력을 보여준다.

 그 후 유교적 원리가 반영된 김수홍의 지도가 1666년에 간행되기도 했으며,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 및 민간신앙 등이 반영된 원형의 천하도가 널리 유포되었다.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서양식 세계지도는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여지전도(輿地全圖)>나 최한기의 <지구전후도> 등은 서구지도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대표적인 지도들이다.

 

<자료>『한국의 지도- 과거, 현재, 미래』 (국립지리원, 대한지리학회. 2000)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한영우 외, 효형출판, 1999)
              『한국의 옛지도』-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영남대학교 박물관. 1998) 

 
 
kanghan8님 블로그 > 내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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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7-04-26 16:07:26
 
조선시대에 유명한 세계지도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천하도와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입니다. 두 지도 모두 조선 전기에 만들어 졌는데 모두 중화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입니다.1. 천하도천하도의 가장 큰 특징은 동그란 원형의 도면 위에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내부의 대륙과 외부의 대륙이 두 겹의 바다로 둘러싸인 형상입니다. 천하도에 나타난 세계관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세계관 입니다. 그리고 중국이 전체 세계에서 아주 조그만 지역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빼고 대부분이 상상의 나라입니다. 상상의 나라의 지명들은 ‘회남자’나 ‘산해경’ 같은 도가적이고 신비적인 전통의 문헌들에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2.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김사형, 이무, 이회가 '성교광피도'와 '역대제왕 혼일강리도'를 합하여서 만든 세계지도입니다.
이 지도의 중국은 랴오둥 지방이 생략되고 그 대신 그 곳에 우리나라가 있지만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있고 굉장히 거대합니다. 우리나라 밑에 있는 지형은 일본의 쓰시마섬과 이키섬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왼쪽에 있는 것은 인도가 아니라 아프리카이고 아프리카 위에 유럽이 있습니다. 이 지도는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이며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유물이지만 현재 일본 류코쿠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402년(태종 2) 5월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李) 등이 작성한 세계지도.5×4 ft. 이러한 사실은 권근(權近)의 《양촌집(陽村集)》에 의해 전해지며,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龍谷]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촌집》 권2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와 그 밖의 사료(史料)에 의하면 이 지도는 1399년(정조 1) 김사형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나라의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1328~92)의 두 지도를 합하여 개정한 것이다. 이 두 지도에는 랴오둥[遼東]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된 대신 거기에 조선을 그려 넣고, 1401년(태종 1)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새 일본지도에 이키섬[壹岐島]과 쓰시마섬[對馬島] 등을 보충하고 참고하여 일본을 그려 넣어, 그 전보다 완전한 세계지도를 작성하고 ‘혼일강리대국지도’라고 이름붙였다. 이 지도는 1328년에 주사본(朱思本)이 작성한 ‘여도(輿圖)’와 지명이 똑같은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지도들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한 것으로 본다. 이 지도에 나타난 서방(西方)에는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포함되어 있으나 인도반도가 없고, 나일강 수원(水源)의 표현방법이, 특히 1267년에 베이징[北京]에 가지고 왔던 자말 알 딘의 지구의(地球儀)와 비슷하다는 점 등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슬람 과학의 영향을 받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작된 거의 유일한 세계지도로서 조선 전기의 세계지리학의 지식을 결산한 것이며, 17세기에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는 가장 훌륭하고, 사실상 유일한 세계지도였다.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다.


우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日本龍谷大學 模寫, 1402)의 거짓을 고발하려 한다. 이 지도는 지도책이라면 빠진 것이 없이 어느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매우 정교한 것 같다. 매우 인상적인 것 같다. 매우 흥미로운 것도 같다. 1400년대의 조상들의 지도개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선 <백과사전>에 설명된 것부터 무엇인지 찾아보자.

1402년(태종2) 5월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 등이 작성한 세계지도이다. 규모는 5×4 ft.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龍谷]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촌집》 권2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와 그 밖의 사료(史料)에 의하면, 이 지도는 1399년(정종1) 김사형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나라의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1330?)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 혼일강리 ’(1328∼1392)의 두 지도를 합하여 개정한 것이다. 이 두 지도에는 료동(遼東)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된 대신 거기에 "조선"을 그려 넣고, 1401년(태종 1)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새 일본지도에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對馬島) 등을 보충하고, 일본을 그려 넣어, 그 전보다 완전한 세계지도를 작성하여 ‘혼일강리대국지도’라고 이름붙였다. 이 지도는 1328년에 주사본(朱思本)이 작성한 ‘여도(輿圖)’와 지명이 똑같은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지도들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한 것으로 본다. 또 이 지도에 나타난 서방(西方)에는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포함되어 있으나 인도반도가 없고, 나일강 수원(水源)의 표현방법이, 특히 1267년에 북경(北京)에 가지고 왔던 자말 알 딘의 지구의(地球儀)와 비슷하다는 점 등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슬람 과학의 영향을 받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작된 거의 유일한 세계지도로서 조선 전기의 세계지리학의 지식을 결산한 것이며, 17세기에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는 가장 훌륭하고, 사실상 유일한 세계지도였다.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다.

이런 정도의 설명은 참으로 완벽할만큼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세계에서도 뛰어난 지도라고 평가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데, 우리는 설명만 보고 공부했다는 증거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지도의 윗부분에 적힌 글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필사했다는 데서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필사하는 사람의 성의/정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변명해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필사자는 원본에 있는 그대로를 그리기 때문이다. 첫째, "료동(遼東)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된 대신 거기에 "조선"을 그려 넣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 설명대로 보면, 물론 그래야 되지만, 본디 그림에는 한반도라는 곳에 조선이라는 그림이나 글이 없었다는 말이다. 둘째, 그것이 우리가 아는 중국이 나라이고, 그 중국의 지도라면, 한반도에 조선이라고 기록했으면, 대륙의 어디엔가, 시기로 보아, "明"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글자는 없다. "中國"이란 글자도 없다. 셋째, 맨 위쪽에 적힌 행정구역 명칭이 있는데, 이것은 한 지도임에도 "都城"라고 쓰인 곳에서 12번째에 "都城大都"이 적혀있고, 3번째에 "河南省"이 있는데, 13번째에 "河南行省"이 있고, 4번째에 "淮南省"이 있는데, 18번째에 淮南行省"이 적혀 있고, 5째에 "陝西省"이 있는데, 14번째에 "陝西行省"이 적혀있고, 6번째에 "甘肅省"이 있는데, 15번째에 "甘肅行省"이 적혀 있고, 7번째에 遼陽省"이 있는데, 16번째에 "遼陽行省"이 적혀 있고, 8번째에 "江浙省"이 있는데, 19번째에 "江浙省"이 또 적혀있고, 9번째에 "福建省"이 있는데, 20번째에 "福建行省"이 적혀있고, 10번째에 "西江省"이 있는데, 22번째에는 글자가 약간 바뀐 "江西行省"이 적혀 있고, 11번째에 泗川省"이 있는데, 23번째에 "泗川行省"이 적혀 있으며, 11번 이전에엔 적혀 있지 않던 것이 "行省"이 붙은 글자가 있는 부분에는 21번째에 "湖廣行省"과 24번째엔 "雲南行省"이 더 적혀 있다.
이것은 첫번째부터 11번째까지의 행정구역명칭이 13번부터 끝에가지의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설명도 없다.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江浙省"이란 이름은 앞쪽에도 뒷쪽에도 이름이 같기 때문이다. 다만 그 내용의 예속 고을 이름은 앞쪽엔 "杭州/建唐"이라고 했는데, 뒷쪽엔 "浙東/江東"이라 했다.

그래서 <백과사전>에서 설명된 것처럼 과연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다."하는 것이 마땅한 비평인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의 "중화적/중국/조선"이란 용어는 매우 적합하지 않다. 그 지도의 주인 나라가 무엇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찌 중화적 세계관이란 말이 성립되는가? 그 중화는 바로 조신인 것을!!! 그리고 처음에 그려져 있지도 않은 곳을 조선이라고 새겼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음부터 조선을 그린 그림인데 뒷날에, 그것도 20세기에 와서, 한반도를 그려넣고, 그것도 큼직하게 만들어서 오래된 지도인 양 필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무슨 보물인양 일본 龍谷(류코쿠)대학에 비밀스레 소장하고 아무나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날조한 것이 탄로날까 두려운 탓일 것이다. 중국의 지도라면 중국에는 어찌 없으며, 조선의 지도라면 조선에는 왜 그 지도의 원본이든 모사본도 없는가? 귀중하여 일본이 가져갔는가? 옹호나 변명을 하지 말자. 일본의 고대역사를 70만년이나 거슬러 올려놓은 날조의 유물조작이 탄로났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지금은 왜곡/날조하지 않을까? 우리의 역사학/고고학의 연구자세가 안일했고, 지식의 깊이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눈이 있으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큼직한 돋보기를 대고 똑똑히 보아주기를 권한다. 그러고 나서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지도에마다 영인해 넣어야 할 것인지, 빼야 할 것인지 결말이 나야 할 것이다. 다만 올바른 것은 <양촌집>에 적힌 설명의 글만이 옳다고는 보지만, 일단 그 지도(모사본)은 어떤 명분을 붙이더라도 분명히 거짓이다. 원본을 정말 찾아 보고 싶다. 언제 볼 수 있을런지!!

출처 : Tong - lydia98k님의 오천년 대한제국통




조선의 세계지도, 그 속에 담긴 세계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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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의 목마름 | 2006/05/03 (수)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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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세계지도, 그 속에 담긴 세계인식 -폄-
 
★ 세계지도는 전통 세계로 통하는 또 하나의 터널이다
「해동지도」의 천하도, 규장각 소장품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다. 중국의 본토 지역은 자세히 다루면서 한반도와 일본 등 주변 지역은 아주 간략하게 보여 주는 정도에 불과한 것에서, 오대주와 오대양을 포함하는 근대적인 세계 지도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다. 포함된 내용이 실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상상의 지역들이 대부분인 〈원형 천하도〉라는 세계 지도도 있다. 오히려 현존하는 지도의 수로 보면 이 상상의 세계 지도가 제일 많다.
 
물론 얼마나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자세하게, 그리고 넓은 세계를 담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보면 조선 후기에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된 서양식 세계 지도가 가장 과학적이며, 다른 세계 지도들은 비과학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세계 지도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현대인이 보기에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전통 세계 지도는 조선시대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어떠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다. 세계 지도라는 터널을 통해 전통 사회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직방 세계,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문명 세계
 
전통 시대 사람들은 세계 지리를 어떤 식으로 인식했을까.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세계라 하면 으레 ‘직방 세계(職方世界)’를 의미했다. 이른바 오랑캐가 아닌 문명인들이 사는 세계, 그래서 지도에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세계를 일컬어 ‘직방 세계’라 불렀다.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인식되던 주(周)나라에서 지도 제작을 맡아 하면서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받는 업무를 담당하던 관원이 직방씨였는데, 직방 세계란 바로 이 관원이 담당했던 영역을 말한다. 이러한 직방 세계는 다름 아닌 성인의 문명권에 들어오는 ‘중화(中華)’의 세계로서 중국 황제의 영향권 아래 문명의 혜택을 받는 지역을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직방 세계, 곧 중화 세계는 지도에 그려 넣을 만큼 의미 있는 세계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주 자세하게 세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도록 그려졌다.
 
중화 세계의 바깥 지역은 이민족의 거주지로서 ‘사해(四海)’라 불리기도 했는데, 세계 지도에서 생략하거나 포함시키더라도 아주 소략하게 그려 넣었을 뿐이다. 나아가 사해 바깥의 세계는 ‘사황(四荒)’ 또는 ‘대황’이라 불리는 미지의 세계였다. 이 미지의 사황 세계는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로서 불가지론적으로 ‘놔두고 논의하지 않는’ 세계였다. 그래서 세계 지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함부로 논의하는 것조차 이단시할 정도였다.
 
이렇게 동아시아인들이 지니고 있던 전통적인 세계 인식은 문명화된 세계인 중화가 세계의 중심에 그리고 야만에 불과한 이민족들의 오랑캐 세계가 주변에 배치되는 공간적 구도로 세계 지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도가 중국 송나라 때 제작된 〈화이도〉(1136년)이다. 이 세계 지도를 보면 철저하게 중국의 지역만을 자세하게 그려 넣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부분을 주목해 보아도 얼마나 소략하게 그렸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왼쪽 절반만 그려져 있으며, 그것도 서해안의 윤곽이 사실과 많이 다르게 개략적으로만 나타나 있어 도대체 반도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하기 힘들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는 19세기 말까지도 이러한 형태의 직방 세계 중심의 세계 지도가 대표적인 세계 지도로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만을 크게 그려 넣은 송나라 때의 <화이도>
 
★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건국 직후에 세계의 지도학계가 주목할 만한 훌륭한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다. 바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 모사본이 보관되어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이 지도는 원래 좌의정 김사형과 우의정 이무가 발의하고, 의정부의 검상(정5품직) 이회가 제작해서 1402년 8월 태종 임금에게 바쳤던 세계 지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후대에 제작된 네 개의 모사본이 전부 일본에 남아 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것은 모사본 중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일본 류코쿠대학교 소장본을 최근에 이찬 교수가 사람을 시켜 모사해 기증한 것이다. 이 류코쿠대학교 본은 1480년에서 1543년 사이에 조선에서 종이에 채색으로 모사되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하단에는 권근의 발문이 적혀 있어 제작 과정에 대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도설을 썼던 권근이 이 지도의 발문을 썼음이 매우 흥미롭다. 이 발문에 따르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 원나라의 세계 지도를 참고했으나, 한반도와 일본 부분이 너무 소략해 한반도 지도와 일본 지도를 첨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때 참고한 지도들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원대의 세계 지도를 살펴보자. 앞서 〈화이도〉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중국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는 중국과 그 주변국만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원나라가 거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면서 아라비아나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와 같은 머나먼 세계에 대한 지리 정보를 획득하면서 원나라에서 제작한 세계 지도에 처음으로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주사본의 〈여지도〉, 이택민의 〈성교광피도〉, 그리고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들 수 있다(이것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원대의 세계 지도들은 명대에 제작된 〈대명혼일도〉(1389)에서 더 한층 종합, 발전되었다.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바로 이러한 원대의 세계 지도와 그것을 계승 발전한 명대의 〈대명혼일도〉를 충분히 참고해서 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현존하는 〈대명혼일도〉와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비교해 보면 요동 땅 동쪽인 한반도 부분과 일본 부분을 제외한 중국 본토와 아랍, 아프리카, 유럽 부분은 거의 동일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권근의 발문에 적힌 대로 원대의 세계 지도가 한반도와 일본 부분이 매우 소략했다는 사실은 〈대명혼일도〉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한반도 부분은 거의 삼각형에 가까울 정도이며, 특히 〈화이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쪽 반절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불충분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신의 조선 지도와 일본 지도로 첨가해 넣었을 것이다.
 
한반도 부분은 제작자 이회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기 앞서 3개월 전에 〈팔도지도〉라는 한반도 지도를 제작해서 바치고 있는데, 이 〈팔도지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본 부분은 1397년(태조 6년)에 검교참찬 벼슬의 박돈지가 일본에 통신관으로 갔다가 1399년에 돌아오면서 일본 지도를 바쳤는데, 이 지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때의 일본 지도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행기도〉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 부분을 비교해 보면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규장각 소장품.
 
★ 1400년경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
 
결국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원나라 때 세계 지도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지도로서 직방 세계 중심의 좁은 세계 인식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와 유럽을 포함하는 확대된 세계 인식을 반영하는 지도였다고 할 수 있다. 또 14세기 당시까지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였던 〈대명혼일도〉의 지리 정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대명혼일도〉에서 심하게 왜곡되었던 한반도와 일본 부분을 비교적 정확하게 교정함으로써 그것을 능가하는 객관적 지리 정보를 담았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제작되던 시대에는 서양에서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같은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담은 훌륭한 세계 지도를 찾아볼 수 없다. 1402년경 유럽은 대항해와 탐험을 통해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획득하기 이전이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세계 지도 전통을 답습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가 부활하기 이전이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의 세계 지도는 종교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중세 유럽의 세계 지도와 근세의 해도(Portolano)가 결합된 형식의 지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14, 15세기에 제작된 세계 지도 중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지도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992년에 미국에서 개최된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 지도 전시회’에 출품되어 세계 지도학회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 확대된 세계의 외연과 조선의 자존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1400년경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였다고 하지만 역사적 시대성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전통적으로 〈화이도〉가 다루었던 직방 세계의 영역을 벗어나 유럽의 100여 개 지명과 아프리카의 35개 지명을 다루었지만 궁극적으로 직방 세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여전히 지도의 중심부 대부분을 중국 본토가 차지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는 좌측 주변부에 밀려나 있다. 또한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지리관을 반영해서 사각형으로 전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단지 직방 세계의 외연을 조금 더 확대한 세계 지도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원나라 이전의 〈화이도〉에서 볼 수 있었던 중화주의적 세계 인식이 상당 부분 퇴색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원나라의 세계 지도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곧,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원나라가 전통적인 중화주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를 수 없었던 것이 고려 말기 동아시아의 시대상이었으며, 이러한 시대상이 세계 지도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의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중화주의적 세계 인식이 퇴색했다고 이해하기는 좀 힘들다. 오히려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성장과 정착에 의해 조선의 사상계가 중화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기 이전의 세계상을 반영했다고 이해함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한반도 부분을 매우 크게 그린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반도의 크기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합친 것과 거의 엇비슷하다. 중국 본토와 비교해도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정치 외교적으로 조선은 건국과 함께 명나라에 사대 외교를 펼쳤지만, 중국에 못지않은 문명국이라는 자존심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회 한 사람이 사사로이 제작한 지도가 아니다. 좌의정과 우의정이 제안하고 의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추진한 국가적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사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 제작 사업과 함께 이루어진 조선 초의 국가적인 프로젝트였다. 둘 다 권근이 발문을 적고 있는 데에서 그러한 사정을 능히 엿볼 수 있다. 중국의 것을 능가하는 세계 지도와 천문도를 만들려는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의 염원과 자존심이 낳은 성과였던 것이다.
 
<화동고지도> 지도학적 측면에서는 발전했지만 직방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16세기 이후 축소된 시야의 세계 지도들
 
그러나 조선 초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드러났던 직방 세계에서의 일탈과 확대된 세계 인식은 그 이후에 사정이 달라진다. 오히려 세계 지도에서 다루는 영역이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비해서 축소되어 전통적인 직방 세계 중심의 〈화이도〉 계열로 복귀한다. 그러한 모습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화동고지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1526년에서 153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제작된 세계 지도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마찬가지로 규장각에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일본에 남아 있는데, 최근에 일본에 있던 것을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사들여 소장함으로써 일반인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에도 일본에 세 개가 더 남아 있어, 이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계열의 세계 지도는 모두 다섯 개가 현존하는 셈이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의 저본이 된 지도는 명나라의 학자 양자기의 발문이 붙어 있는 〈대명국지도〉로 추정된다. 원래 명나라에서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리 정보를 담아 낸 원나라 세계 지도의 전통을 계승한 〈대명혼일도〉라는 우수한 지도가 1389년에 제작된 이후 확대된 직방 세계의 전통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526년에 이르러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은 차원에서 〈대명혼일도〉를 극복하는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일명 ‘여지도’라고도 불리는 양자기의 〈대명국지도〉이다.
 
이 지도는 적어도 담아낸 부분에서는 정보가 풍부하고 윤곽이 정확하며 부호를 써서 지역을 표시하는 등 지도학적인 측면에서 〈대명혼일도〉보다 한 단계 수준 높은 지도였다. 그러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서역과 인도 지역도 지도에서 제외시키는 등 원나라의 세계 지도에서 담아 냈던 확대된 세계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중국 이외의 지역은 단순하게 부호로만 처리하는 등 과감하게 선택적으로 생략했다. 따라서 적어도 세계 인식의 차원에서 〈대명국지도〉는 원나라 이전의 전통적인 직방 세계 중심의 세계 지도로 복귀한 셈이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대명국지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이와 같은 〈대명국지도〉를 저본으로 조선에서 제작되었다. 두 지도를 비교해 보면 한반도 부분만 완전히 다를 뿐 나머지 지역은 거의 동일하다. 곧,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는 달리 중국과 한반도 이외의 지역은 거의 다루지 않은 중화주의적으로 축소된 세계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명국지도〉에서는 일본 유구 등과 함께 오랑캐에 불과한 조선을 단순한 삼각형 모양으로 처리해 버리는 정도였는데,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이를 따르지 않고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부분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중국과 조선만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그리고 최신의 지리 정보를 담아낸 세계 지도임을 알 수 있다. 16세기 말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의 〈화동고지도〉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이후에도 조선에서 〈대명국지도〉의 영향을 받은 세계 지도들이 다수 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화동고지도〉는 명대 양자기의 〈대명국지도〉가 그렇듯이 지도학적 차원에서 분명 발전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원나라 때의 직방 세계를 벗어나는 일탈의 세계 인식을 거부하고, 명나라 때의 중화주의적인 세계 인식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조선 초기의 개방적인 시야가 좁아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나타난 세계에 대한 시야의 변화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의 정착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세기 이후 조선의 학계는 성리학이라는 고급 학문의 성장으로 중화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조선을 오랑캐의 나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은 중국의 중화 문명을 완숙하게 수용한 소중화(小中華)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결국 원대의 세계 인식을 거부하고 직방 세계 중심의 축소된 시야의 세계 지도를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한반도 부분만은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지도로 보충해 넣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직방 세계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들
<천하여지도>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서양식 세계 지도의 유입과 함께 전통적인 지리적 세계관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로써 새로운 형태의 세계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직방 세계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들도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계속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직방 세계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에서 볼 수 있는 특성 중 하나는 조선중화주의라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조선중화주의란 중화 문명의 도통을 계승한 명나라가 오랑캐에 불과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서 1644년에 멸망하자, 이제 세계에서 유일한 중화 국가는 오직 조선뿐이라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형성된 사상을 말한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세계 지도는 지도에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문명 세계를 중심으로 포함되는 것이 전통적인 관념이었다. 그렇다면 오랑캐에 불과한 청나라를 세계 지도에 담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조선중화주의를 반영하는 세계 지도에서는 현재 청나라의 지리 정보를 담기보다는 과거 명나라의 지리 정보를 담은 세계 지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숭실대학교 소장의 필사본 〈천하여지도〉(1747)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 지도는 청나라가 세워진 뒤 1세기나 지난 1747년에 제작되었다. 그런데 지도 상단에 적혀 있는 행정 구역의 표시뿐 아니라 지도 안에 묘사된 행정 구역과 지명의 명칭이 모두 명나라의 것이었다.
 
김수홍의 〈천하고금대총편람도〉(1666)는 하나의 지도 안에 과거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이 섞여 있고, 역사적 사건을 그 발생지에 기록함으로써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관련 지역과 연결해서 표현해 놓은 매우 독특한 지도이다. 특히 명나라의 13성과 북경과 남경을 28수의 별자리와 연결지어 기록한 점도 매우 흥미롭다. 피상적으로 지도에 그려진 지역의 윤곽이나 담고 있는 지리 정보의 차원에서 보면 상당히 퇴보된 세계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지도 위에 담았다는 점에서 역사 지도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 주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중국 대륙 내부에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했다면, 중국 대륙을 벗어나는 일부 지역에는 상상의 지역들이 묘사되기도 했다. 바로 여인국, 소인국, 대인국 등 가상의 섬들이다. 이 지명들은 유가(儒家) 학자들에게는 이단의 서적으로 이해되던, 신뢰할 수 없는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 『회남자(淮南子)』라는 문헌에 나오는 전설적인 지명들이었다. 심지어 중국 대륙의 서북쪽 내몽고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구라파국 이마두(利瑪竇)’라는 기록이 적혀 있다. 이마두는 17세기 초에 북경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면서 서양 과학을 전해 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중국 이름이었다. 아마도 김수홍에게는 『회남자』에 나오는 전설적인 지명들과 구라파국 이마두가 마찬가지로 믿기 어려운 신비의 세계였을지 모른다.
 
전형적인 중화적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 지도에 그것과는 양립할 수 없는 지역의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로 조선 후기 서양식 세계 지도가 유입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중화적 세계관이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단적 세계관이 그 안에서 배태되고 있던 복잡했던 당시의 세계상을 보여 주는 한 예가 아닐까.
―「문중양 교수의 우리역사 과학기행」 중에서







Ptolemy world map     15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300년경에 다시 발견되었다. Ptolemy의 Geographia라는 책에 수록되었던 것.




Beatus Mappa Mundi     Beatus of Liebana라는 스페인의 승려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Beatus는 대략 730년에서 800년 사이에 살았던 인물이다. 이 지도는 1050년경 수도원장의 명에 의해 다시 복원된 것.




Al-Idrisi Mappa Mundi  1154년, 아랍의 지리학자 Al-Idrisi가 아프리카, 인도 등 아랍근방의 해역을 탐험 후 지도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고대에 만들어진 지도 가운데서는 꽤 정확한 지도에 속한다.




Vinland world map     Vinland map은 15세기 경의 지도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13세기에 있던 원래의 원형지도를 다시 그린 것. 특이할만한 점은 기존의 원형지도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지역만 표시되어 있던 것에 Vinland라 부르는 미대서양 연안이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지도를 통해 바이킹들이 1492년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먼저 발견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Hereford Mappa Mundi   1300년에 그려진 중세 세계지도로 검은 잉크로 그려져 있으며, 붉은색, 황금색, 파란색 등으로 지도를 표시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년 중국의 지도를 참조하여 조선에서 만든 지도로 김사형, 이무, 이회가 만들었다. 이 지도는 Fra Mauro map(베니스의 승려 Fra Mauro가 1459년에 만든)이 만들어지는데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Fra Mauro map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비교




De Virga world map     1411년에서 1415년 사이에 만들어진 세계지도.




Fra Mauro world map     베니스의 승려 Fra Mauro가 1457년에서 1459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세계를 원형으로 표시하고 있음. De Virga world map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을 참조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Cantino world map     Alberto Cantino가 이탈리아 페라라의 공작의 후원을 받아 항해하며 기록한 지도. 수많은 세계지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지도를 보고 참조하여 만든 것에 비해 이 지도는 직접 브라질 해안을 탐험하며 작성한 것이다. 1502년 만들어졌다.


고대의 지도들을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점이 많습니다. 오히려 아주 옛날에 만들어진 지도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지도보다 더 정확하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흔히 Mappa Mundi라 부르는 중세시대 지도를 보면 대략적인 위치를 비율 등은 상관없이 대충 끼워 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원인일 수도 있지만 고대 이집트 등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지도보다도 더 정확성이 없다라는 점에서 초고대문명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