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유명한 세계지도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천하도와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입니다. 두 지도 모두 조선 전기에 만들어 졌는데 모두 중화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입니다.1. 천하도천하도의 가장 큰 특징은 동그란 원형의 도면 위에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내부의 대륙과 외부의 대륙이 두 겹의 바다로 둘러싸인 형상입니다. 천하도에 나타난 세계관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세계관 입니다. 그리고 중국이 전체 세계에서 아주 조그만 지역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빼고 대부분이 상상의 나라입니다. 상상의 나라의 지명들은 ‘회남자’나 ‘산해경’ 같은 도가적이고 신비적인 전통의 문헌들에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2.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김사형, 이무, 이회가 '성교광피도'와 '역대제왕 혼일강리도'를 합하여서 만든 세계지도입니다. 이 지도의 중국은 랴오둥 지방이 생략되고 그 대신 그 곳에 우리나라가 있지만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있고 굉장히 거대합니다. 우리나라 밑에 있는 지형은 일본의 쓰시마섬과 이키섬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왼쪽에 있는 것은 인도가 아니라 아프리카이고 아프리카 위에 유럽이 있습니다. 이 지도는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이며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유물이지만 현재 일본 류코쿠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402년(태종 2) 5월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李) 등이 작성한 세계지도.5×4 ft. 이러한 사실은 권근(權近)의 《양촌집(陽村集)》에 의해 전해지며,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龍谷]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촌집》 권2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와 그 밖의 사료(史料)에 의하면 이 지도는 1399년(정조 1) 김사형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나라의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1328~92)의 두 지도를 합하여 개정한 것이다. 이 두 지도에는 랴오둥[遼東]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된 대신 거기에 조선을 그려 넣고, 1401년(태종 1)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새 일본지도에 이키섬[壹岐島]과 쓰시마섬[對馬島] 등을 보충하고 참고하여 일본을 그려 넣어, 그 전보다 완전한 세계지도를 작성하고 ‘혼일강리대국지도’라고 이름붙였다. 이 지도는 1328년에 주사본(朱思本)이 작성한 ‘여도(輿圖)’와 지명이 똑같은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지도들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한 것으로 본다. 이 지도에 나타난 서방(西方)에는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포함되어 있으나 인도반도가 없고, 나일강 수원(水源)의 표현방법이, 특히 1267년에 베이징[北京]에 가지고 왔던 자말 알 딘의 지구의(地球儀)와 비슷하다는 점 등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슬람 과학의 영향을 받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작된 거의 유일한 세계지도로서 조선 전기의 세계지리학의 지식을 결산한 것이며, 17세기에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는 가장 훌륭하고, 사실상 유일한 세계지도였다.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다.
우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日本龍谷大學 模寫, 1402)의 거짓을 고발하려 한다. 이 지도는 지도책이라면 빠진 것이 없이 어느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매우 정교한 것 같다. 매우 인상적인 것 같다. 매우 흥미로운 것도 같다. 1400년대의 조상들의 지도개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선 <백과사전>에 설명된 것부터 무엇인지 찾아보자.
1402년(태종2) 5월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 등이 작성한 세계지도이다. 규모는 5×4 ft.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龍谷]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촌집》 권2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와 그 밖의 사료(史料)에 의하면, 이 지도는 1399년(정종1) 김사형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나라의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1330?)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 혼일강리 ’(1328∼1392)의 두 지도를 합하여 개정한 것이다. 이 두 지도에는 료동(遼東)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된 대신 거기에 "조선"을 그려 넣고, 1401년(태종 1)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새 일본지도에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對馬島) 등을 보충하고, 일본을 그려 넣어, 그 전보다 완전한 세계지도를 작성하여 ‘혼일강리대국지도’라고 이름붙였다. 이 지도는 1328년에 주사본(朱思本)이 작성한 ‘여도(輿圖)’와 지명이 똑같은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지도들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한 것으로 본다. 또 이 지도에 나타난 서방(西方)에는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포함되어 있으나 인도반도가 없고, 나일강 수원(水源)의 표현방법이, 특히 1267년에 북경(北京)에 가지고 왔던 자말 알 딘의 지구의(地球儀)와 비슷하다는 점 등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슬람 과학의 영향을 받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작된 거의 유일한 세계지도로서 조선 전기의 세계지리학의 지식을 결산한 것이며, 17세기에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는 가장 훌륭하고, 사실상 유일한 세계지도였다.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다.
이런 정도의 설명은 참으로 완벽할만큼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세계에서도 뛰어난 지도라고 평가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데, 우리는 설명만 보고 공부했다는 증거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지도의 윗부분에 적힌 글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필사했다는 데서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필사하는 사람의 성의/정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변명해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필사자는 원본에 있는 그대로를 그리기 때문이다. 첫째, "료동(遼東)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된 대신 거기에 "조선"을 그려 넣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 설명대로 보면, 물론 그래야 되지만, 본디 그림에는 한반도라는 곳에 조선이라는 그림이나 글이 없었다는 말이다. 둘째, 그것이 우리가 아는 중국이 나라이고, 그 중국의 지도라면, 한반도에 조선이라고 기록했으면, 대륙의 어디엔가, 시기로 보아, "明"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글자는 없다. "中國"이란 글자도 없다. 셋째, 맨 위쪽에 적힌 행정구역 명칭이 있는데, 이것은 한 지도임에도 "都城"라고 쓰인 곳에서 12번째에 "都城大都"이 적혀있고, 3번째에 "河南省"이 있는데, 13번째에 "河南行省"이 있고, 4번째에 "淮南省"이 있는데, 18번째에 淮南行省"이 적혀 있고, 5째에 "陝西省"이 있는데, 14번째에 "陝西行省"이 적혀있고, 6번째에 "甘肅省"이 있는데, 15번째에 "甘肅行省"이 적혀 있고, 7번째에 遼陽省"이 있는데, 16번째에 "遼陽行省"이 적혀 있고, 8번째에 "江浙省"이 있는데, 19번째에 "江浙省"이 또 적혀있고, 9번째에 "福建省"이 있는데, 20번째에 "福建行省"이 적혀있고, 10번째에 "西江省"이 있는데, 22번째에는 글자가 약간 바뀐 "江西行省"이 적혀 있고, 11번째에 泗川省"이 있는데, 23번째에 "泗川行省"이 적혀 있으며, 11번 이전에엔 적혀 있지 않던 것이 "行省"이 붙은 글자가 있는 부분에는 21번째에 "湖廣行省"과 24번째엔 "雲南行省"이 더 적혀 있다. 이것은 첫번째부터 11번째까지의 행정구역명칭이 13번부터 끝에가지의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설명도 없다.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江浙省"이란 이름은 앞쪽에도 뒷쪽에도 이름이 같기 때문이다. 다만 그 내용의 예속 고을 이름은 앞쪽엔 "杭州/建唐"이라고 했는데, 뒷쪽엔 "浙東/江東"이라 했다.
그래서 <백과사전>에서 설명된 것처럼 과연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다."하는 것이 마땅한 비평인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의 "중화적/중국/조선"이란 용어는 매우 적합하지 않다. 그 지도의 주인 나라가 무엇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찌 중화적 세계관이란 말이 성립되는가? 그 중화는 바로 조신인 것을!!! 그리고 처음에 그려져 있지도 않은 곳을 조선이라고 새겼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음부터 조선을 그린 그림인데 뒷날에, 그것도 20세기에 와서, 한반도를 그려넣고, 그것도 큼직하게 만들어서 오래된 지도인 양 필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무슨 보물인양 일본 龍谷(류코쿠)대학에 비밀스레 소장하고 아무나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날조한 것이 탄로날까 두려운 탓일 것이다. 중국의 지도라면 중국에는 어찌 없으며, 조선의 지도라면 조선에는 왜 그 지도의 원본이든 모사본도 없는가? 귀중하여 일본이 가져갔는가? 옹호나 변명을 하지 말자. 일본의 고대역사를 70만년이나 거슬러 올려놓은 날조의 유물조작이 탄로났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지금은 왜곡/날조하지 않을까? 우리의 역사학/고고학의 연구자세가 안일했고, 지식의 깊이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눈이 있으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큼직한 돋보기를 대고 똑똑히 보아주기를 권한다. 그러고 나서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지도에마다 영인해 넣어야 할 것인지, 빼야 할 것인지 결말이 나야 할 것이다. 다만 올바른 것은 <양촌집>에 적힌 설명의 글만이 옳다고는 보지만, 일단 그 지도(모사본)은 어떤 명분을 붙이더라도 분명히 거짓이다. 원본을 정말 찾아 보고 싶다. 언제 볼 수 있을런지!!
출처 : Tong - lydia98k님의 오천년 대한제국통
조선의 세계지도, 그 속에 담긴 세계인식 -폄-
★ 세계지도는 전통 세계로 통하는 또 하나의 터널이다
「해동지도」의 천하도, 규장각 소장품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다. 중국의 본토 지역은 자세히 다루면서 한반도와 일본 등 주변 지역은 아주 간략하게 보여 주는 정도에 불과한 것에서, 오대주와 오대양을 포함하는 근대적인 세계 지도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다. 포함된 내용이 실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상상의 지역들이 대부분인 〈원형 천하도〉라는 세계 지도도 있다. 오히려 현존하는 지도의 수로 보면 이 상상의 세계 지도가 제일 많다.
물론 얼마나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자세하게, 그리고 넓은 세계를 담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보면 조선 후기에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된 서양식 세계 지도가 가장 과학적이며, 다른 세계 지도들은 비과학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세계 지도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현대인이 보기에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전통 세계 지도는 조선시대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어떠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다. 세계 지도라는 터널을 통해 전통 사회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직방 세계,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문명 세계
전통 시대 사람들은 세계 지리를 어떤 식으로 인식했을까.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세계라 하면 으레 ‘직방 세계(職方世界)’를 의미했다. 이른바 오랑캐가 아닌 문명인들이 사는 세계, 그래서 지도에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세계를 일컬어 ‘직방 세계’라 불렀다.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인식되던 주(周)나라에서 지도 제작을 맡아 하면서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받는 업무를 담당하던 관원이 직방씨였는데, 직방 세계란 바로 이 관원이 담당했던 영역을 말한다. 이러한 직방 세계는 다름 아닌 성인의 문명권에 들어오는 ‘중화(中華)’의 세계로서 중국 황제의 영향권 아래 문명의 혜택을 받는 지역을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직방 세계, 곧 중화 세계는 지도에 그려 넣을 만큼 의미 있는 세계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주 자세하게 세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도록 그려졌다.
중화 세계의 바깥 지역은 이민족의 거주지로서 ‘사해(四海)’라 불리기도 했는데, 세계 지도에서 생략하거나 포함시키더라도 아주 소략하게 그려 넣었을 뿐이다. 나아가 사해 바깥의 세계는 ‘사황(四荒)’ 또는 ‘대황’이라 불리는 미지의 세계였다. 이 미지의 사황 세계는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로서 불가지론적으로 ‘놔두고 논의하지 않는’ 세계였다. 그래서 세계 지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함부로 논의하는 것조차 이단시할 정도였다.
이렇게 동아시아인들이 지니고 있던 전통적인 세계 인식은 문명화된 세계인 중화가 세계의 중심에 그리고 야만에 불과한 이민족들의 오랑캐 세계가 주변에 배치되는 공간적 구도로 세계 지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도가 중국 송나라 때 제작된 〈화이도〉(1136년)이다. 이 세계 지도를 보면 철저하게 중국의 지역만을 자세하게 그려 넣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부분을 주목해 보아도 얼마나 소략하게 그렸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왼쪽 절반만 그려져 있으며, 그것도 서해안의 윤곽이 사실과 많이 다르게 개략적으로만 나타나 있어 도대체 반도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하기 힘들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는 19세기 말까지도 이러한 형태의 직방 세계 중심의 세계 지도가 대표적인 세계 지도로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만을 크게 그려 넣은 송나라 때의 <화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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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건국 직후에 세계의 지도학계가 주목할 만한 훌륭한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다. 바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 모사본이 보관되어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이 지도는 원래 좌의정 김사형과 우의정 이무가 발의하고, 의정부의 검상(정5품직) 이회가 제작해서 1402년 8월 태종 임금에게 바쳤던 세계 지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후대에 제작된 네 개의 모사본이 전부 일본에 남아 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것은 모사본 중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일본 류코쿠대학교 소장본을 최근에 이찬 교수가 사람을 시켜 모사해 기증한 것이다. 이 류코쿠대학교 본은 1480년에서 1543년 사이에 조선에서 종이에 채색으로 모사되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하단에는 권근의 발문이 적혀 있어 제작 과정에 대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도설을 썼던 권근이 이 지도의 발문을 썼음이 매우 흥미롭다. 이 발문에 따르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 원나라의 세계 지도를 참고했으나, 한반도와 일본 부분이 너무 소략해 한반도 지도와 일본 지도를 첨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때 참고한 지도들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원대의 세계 지도를 살펴보자. 앞서 〈화이도〉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중국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는 중국과 그 주변국만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원나라가 거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면서 아라비아나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와 같은 머나먼 세계에 대한 지리 정보를 획득하면서 원나라에서 제작한 세계 지도에 처음으로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주사본의 〈여지도〉, 이택민의 〈성교광피도〉, 그리고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들 수 있다(이것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원대의 세계 지도들은 명대에 제작된 〈대명혼일도〉(1389)에서 더 한층 종합, 발전되었다.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바로 이러한 원대의 세계 지도와 그것을 계승 발전한 명대의 〈대명혼일도〉를 충분히 참고해서 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현존하는 〈대명혼일도〉와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비교해 보면 요동 땅 동쪽인 한반도 부분과 일본 부분을 제외한 중국 본토와 아랍, 아프리카, 유럽 부분은 거의 동일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권근의 발문에 적힌 대로 원대의 세계 지도가 한반도와 일본 부분이 매우 소략했다는 사실은 〈대명혼일도〉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한반도 부분은 거의 삼각형에 가까울 정도이며, 특히 〈화이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쪽 반절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불충분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신의 조선 지도와 일본 지도로 첨가해 넣었을 것이다.
한반도 부분은 제작자 이회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기 앞서 3개월 전에 〈팔도지도〉라는 한반도 지도를 제작해서 바치고 있는데, 이 〈팔도지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본 부분은 1397년(태조 6년)에 검교참찬 벼슬의 박돈지가 일본에 통신관으로 갔다가 1399년에 돌아오면서 일본 지도를 바쳤는데, 이 지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때의 일본 지도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행기도〉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 부분을 비교해 보면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규장각 소장품.
★ 1400년경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
결국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원나라 때 세계 지도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지도로서 직방 세계 중심의 좁은 세계 인식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와 유럽을 포함하는 확대된 세계 인식을 반영하는 지도였다고 할 수 있다. 또 14세기 당시까지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였던 〈대명혼일도〉의 지리 정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대명혼일도〉에서 심하게 왜곡되었던 한반도와 일본 부분을 비교적 정확하게 교정함으로써 그것을 능가하는 객관적 지리 정보를 담았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제작되던 시대에는 서양에서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같은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담은 훌륭한 세계 지도를 찾아볼 수 없다. 1402년경 유럽은 대항해와 탐험을 통해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획득하기 이전이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세계 지도 전통을 답습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가 부활하기 이전이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의 세계 지도는 종교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중세 유럽의 세계 지도와 근세의 해도(Portolano)가 결합된 형식의 지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14, 15세기에 제작된 세계 지도 중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지도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992년에 미국에서 개최된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 지도 전시회’에 출품되어 세계 지도학회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 확대된 세계의 외연과 조선의 자존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1400년경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였다고 하지만 역사적 시대성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전통적으로 〈화이도〉가 다루었던 직방 세계의 영역을 벗어나 유럽의 100여 개 지명과 아프리카의 35개 지명을 다루었지만 궁극적으로 직방 세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여전히 지도의 중심부 대부분을 중국 본토가 차지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는 좌측 주변부에 밀려나 있다. 또한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지리관을 반영해서 사각형으로 전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단지 직방 세계의 외연을 조금 더 확대한 세계 지도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원나라 이전의 〈화이도〉에서 볼 수 있었던 중화주의적 세계 인식이 상당 부분 퇴색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원나라의 세계 지도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곧,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원나라가 전통적인 중화주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를 수 없었던 것이 고려 말기 동아시아의 시대상이었으며, 이러한 시대상이 세계 지도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의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중화주의적 세계 인식이 퇴색했다고 이해하기는 좀 힘들다. 오히려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성장과 정착에 의해 조선의 사상계가 중화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기 이전의 세계상을 반영했다고 이해함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한반도 부분을 매우 크게 그린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반도의 크기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합친 것과 거의 엇비슷하다. 중국 본토와 비교해도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정치 외교적으로 조선은 건국과 함께 명나라에 사대 외교를 펼쳤지만, 중국에 못지않은 문명국이라는 자존심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회 한 사람이 사사로이 제작한 지도가 아니다. 좌의정과 우의정이 제안하고 의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추진한 국가적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사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 제작 사업과 함께 이루어진 조선 초의 국가적인 프로젝트였다. 둘 다 권근이 발문을 적고 있는 데에서 그러한 사정을 능히 엿볼 수 있다. 중국의 것을 능가하는 세계 지도와 천문도를 만들려는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의 염원과 자존심이 낳은 성과였던 것이다.
<화동고지도> 지도학적 측면에서는 발전했지만 직방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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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이후 축소된 시야의 세계 지도들
그러나 조선 초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드러났던 직방 세계에서의 일탈과 확대된 세계 인식은 그 이후에 사정이 달라진다. 오히려 세계 지도에서 다루는 영역이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비해서 축소되어 전통적인 직방 세계 중심의 〈화이도〉 계열로 복귀한다. 그러한 모습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화동고지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1526년에서 153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제작된 세계 지도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마찬가지로 규장각에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일본에 남아 있는데, 최근에 일본에 있던 것을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사들여 소장함으로써 일반인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에도 일본에 세 개가 더 남아 있어, 이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계열의 세계 지도는 모두 다섯 개가 현존하는 셈이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의 저본이 된 지도는 명나라의 학자 양자기의 발문이 붙어 있는 〈대명국지도〉로 추정된다. 원래 명나라에서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리 정보를 담아 낸 원나라 세계 지도의 전통을 계승한 〈대명혼일도〉라는 우수한 지도가 1389년에 제작된 이후 확대된 직방 세계의 전통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526년에 이르러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은 차원에서 〈대명혼일도〉를 극복하는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일명 ‘여지도’라고도 불리는 양자기의 〈대명국지도〉이다.
이 지도는 적어도 담아낸 부분에서는 정보가 풍부하고 윤곽이 정확하며 부호를 써서 지역을 표시하는 등 지도학적인 측면에서 〈대명혼일도〉보다 한 단계 수준 높은 지도였다. 그러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서역과 인도 지역도 지도에서 제외시키는 등 원나라의 세계 지도에서 담아 냈던 확대된 세계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중국 이외의 지역은 단순하게 부호로만 처리하는 등 과감하게 선택적으로 생략했다. 따라서 적어도 세계 인식의 차원에서 〈대명국지도〉는 원나라 이전의 전통적인 직방 세계 중심의 세계 지도로 복귀한 셈이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대명국지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이와 같은 〈대명국지도〉를 저본으로 조선에서 제작되었다. 두 지도를 비교해 보면 한반도 부분만 완전히 다를 뿐 나머지 지역은 거의 동일하다. 곧,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는 달리 중국과 한반도 이외의 지역은 거의 다루지 않은 중화주의적으로 축소된 세계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명국지도〉에서는 일본 유구 등과 함께 오랑캐에 불과한 조선을 단순한 삼각형 모양으로 처리해 버리는 정도였는데,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이를 따르지 않고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부분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중국과 조선만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그리고 최신의 지리 정보를 담아낸 세계 지도임을 알 수 있다. 16세기 말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의 〈화동고지도〉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이후에도 조선에서 〈대명국지도〉의 영향을 받은 세계 지도들이 다수 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화동고지도〉는 명대 양자기의 〈대명국지도〉가 그렇듯이 지도학적 차원에서 분명 발전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원나라 때의 직방 세계를 벗어나는 일탈의 세계 인식을 거부하고, 명나라 때의 중화주의적인 세계 인식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조선 초기의 개방적인 시야가 좁아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나타난 세계에 대한 시야의 변화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의 정착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세기 이후 조선의 학계는 성리학이라는 고급 학문의 성장으로 중화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조선을 오랑캐의 나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은 중국의 중화 문명을 완숙하게 수용한 소중화(小中華)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결국 원대의 세계 인식을 거부하고 직방 세계 중심의 축소된 시야의 세계 지도를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한반도 부분만은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지도로 보충해 넣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선 후기 직방 세계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들
<천하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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