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스크랩] 홍길동과 허균과 손곡 이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5:10

고위관리 사칭한 강도 행각 실록에 남아… 당상관 등 비호세력 밝혀지며 조정이 시끌

 

신출귀몰(神出鬼沒)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인물이 홍길동(洪吉童)이다. 지금도 우리는 동사무소나 구청에 가서 각종 서류양식을 작성하려 할 때 표본서류에서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한국 사람이 가깝게 느끼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홍길동상(像)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이후부터 홍길동은 조선 백성들이 학정(虐政)에 시달릴 때마다 메시아처럼 갈구하는 인물로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사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은 소설 속 홍길동과 다르다. 광해군 때 허균은 세종 때를 배경으로 해서 홍길동을 썼지만 역사 속 홍길동은 연산군 때 인물이다. 신출귀몰했는지는 모르지만 홍길동은 한낱 도적떼의 두목에 불과했다. 폭정이 도적 떼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임꺽정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이 극에 달한 명종 때 도적이다.

 

숙종 시대를 폭정기(暴政期)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잦은 당파 교체로 지방 수령들에 대한 통제가 미약해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지방 수령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다는 점에서 장길산의 등장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실록에서 홍길동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연산군6년(1500년) 10월 22일이다.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이 홍길동을 체포했다며 “기쁨을 견딜 수 없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이때 3정승은 홍길동을 ‘강도(强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단순 강도라면 국왕과 3정승이 이처럼 흥분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에서 골치를 앓아야 했던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위관리 사칭이었다. “강도 홍길동은 옥(玉) 달린 모자를 쓰고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기탄 없는 행동을 자행했다.” 홍길동을 조사한 한치형의 보고서에 나오는 홍길동의 범죄 행각이다. 중추부 첨지면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홍길동의 활동 무대는 주로 충청도와 한양, 경기도 일대였다.


홍길동 체포로 그의 비호세력들이 속속 밝혀지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엄귀손이었다. 그는 실제로 무인 출신의 당상관이었다. 조사 결과 엄귀손은 홍길동이 도적질한 물건을 관리해주고 집도 사주었다. 조정에서는 약간의 논란도 있었다. 엄귀손의 홍길동 지원이 적극적인 것이었는지 소극적인 것이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어세겸 같은 인물은 “엄귀손이 홍길동의 음식물은 받아 먹었지만 그것은 인정상 흔하게 있는 일이니 허물할 것은 못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100대와 3000리 유배 그리고 고신(告身) 박탈이었다. 고신을 박탈한다는 것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빼앗는다는 뜻이었다. 이 형벌은 조선 때 사형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중한 처벌이었다.


실록만 놓고 본다면 홍길동 사건보다 엄귀손의 홍길동 비호사건이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결국 한 달여의 조사 끝에 엄귀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연산군은 3정승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당상관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은 당연히 3정승에게 있었다. 그들은 “엄귀손이 당상관이 된 것은 군공(軍功)이 있어서이지 조행(操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조행이란 조신한 행실을 뜻한다. 엄귀손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아래에서 우후(右候)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군공’이라고 함은 그때 국방의 공을 세웠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엄귀손은 품행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동래 현령으로 있을 때는 관물을 마음대로 도용하다가 파면된 일이 있었고, 평안도 우후 때도 공물을 훔쳤다가 퇴출되는 등 좋지 못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경우 분명 중앙조정에서 그로부터 뇌물을 받아 엄귀손을 비호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무관의 관직은 대부분 돈과 뇌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공보다 뇌물이 엄귀손을 당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게다가 원래는 노비와 재산이 없었는데 홍길동 사건과 관련되어 조사 받을 당시에는 한양과 지방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었고 곡식도 4000석이나 쌓아 두고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대도(大盜)’ 홍길동 덕택이었다고 봐야 한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 사건은 여기까지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 관한 처벌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형을 시켰다면 분명 기록되었을 텐데 홍길동을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엄귀손에 준하는 형벌로 남쪽 섬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정에서도 홍길동 문제보다 엄귀손 문제를 더 중하게 다룬 것을 보더라도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은 듯하다.

홍길동의 ‘증발’ 이후 그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조정 관리들은 누구를 욕할 때 ‘홍길동 같은 놈’이라고 할 정도였다. 선조 때의 기록이다. 조헌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홍길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정승을 잘못 골라 풍속이 탁해지고 강상의 윤리가 무너져 이제는 홍길동을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한마디로 홍길동보다 못한 인물이 정승에 올랐으니 굳이 홍길동을 욕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홍길동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당대의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고 있었다. 광해군 때 비운의 혁명아 허균이 조선의 계급적 모순을 정면으로 질타하는 국문소설의 주인공으로 홍길동을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 속 홍길동은 이조판서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였다. 실제 홍길동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지만 아버지가 이조판서와 같은 고위직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록 어느 한 구석에도 언급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허균의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은 ‘홍길동 그 후’이다. 현실 속 홍길동이 섬으로 유배를 갔다면 소설 속 홍길동은 체포된 후 병조판서직과 쌀 1000섬을 하사 받고 남쪽 저도라는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병사들을 훈련시켜 율도국을 공략해 율도국의 왕이 된다는 멋진 상상이다. 지금도 율도국이 실존하느냐는 논쟁이 있을 만큼 허균의 상상력은 그럴듯했다.

숙종 때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과 관련된 아주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겼다. 옛날에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주로 보부상을 습격하였기 때문에 보부상들이 홍길동이라는 이름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보부상들이 맹세를 할 때 홍길동의 이름을 걸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연산군 때의 홍길동,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을 꼽았다. 홍길동은 조선 때 허균을 만나, 임꺽정은 일제강점기에 홍명희를 만나, 그리고 장길산은 오늘날 황석영을 만나 되살아났다. 이들의 작품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균은 광해군 때의 폭정을 비판하며 역모를 꾸미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폭정의 시기였으며, 황석영이 장길산을 쓴 때도 군사정권이라는 폭정의 시대였다. 폭정은 평범한 백성을 도적 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도적을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타고난 재능에 비해 불우한 삶을 살았던 蓀谷(손곡) 李達(이달)


얼굴이 단정하지 못하고 성품이 호탕하여 예법에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성미라 가는 곳마다 업신여김을 당하며, 몸 붙일 데가 없는 비렁뱅이, 천덕꾸러기로  자유분방하여 한 곳에 정착해 있지를 못하고 유랑하면서 시와 술을 즐기면서 일생을 불우하게 보내었다.


아버지 이수함(李秀咸)과 홍주 관기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기생이었던 탓에 글재주가 뛰어나도 세상에 쓰이지 못했다.

한시의 대가로 문장과 시에 능하고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신분적 한계로  타고난 재능 세상에 발휘해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는 벼슬살이하던 知人들의 부임지를 떠돌며 비렁뱅이로 살았으나. 그의 몇 편의 빛나는 시로 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이름을 잃지 않고 있다


허균은 그를 추모하는「손곡산인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蓀谷(손곡)의 얼굴이 단아하지 못한데다가 性格이 또한 호탕하여 절제하지 않았고, 게다가 世俗의 禮法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입었다. 그는 古今의 모든 일과 自然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하기 즐겼으며, 술을 사랑하였다. 글씨는 진체(晉體)에 능하였다. 그의 마음은 가운데가 텅 비어서 아무런 한계가 없었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性品 때문에 그를 사랑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몸 붙일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방에 비렁뱅이 노릇을 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가난과 곤액 속에서 늙었으니, 이는 참으로 그 시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곤궁했지만 그의 시는 썩지 않을 것이다. 어찌 한때의 富貴로써 그 이름을 바꿀 수 있으리오.

허경진 역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시선』(평민사,2001) p.122


손곡(蓀谷)은 청아한 시편들을 많이 남겼다 그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 중 한 시골 늙은이가 어린 아이와 더불어 밭머리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작품 제총요(祭塚謠)는.


白犬前行黃犬隨   野田草際塚??

백견전행황견수   야전초제총류류


老翁祭罷田間道   日暮醉歸扶小兒

노옹제파전간도   일모취귀부소아



흰둥이가 앞서고 누렁이는 따라가는데

들밭머리 풀 섶에는 무덤이 늘어서 있네.

늙은이가 제사를 끝내고 밭 사이 길로 들어서자,

해 저물어 취해 돌아오는 길을 어린 아이가 부축하네.


「祭塚謠」제사를 끝내고 (허경진 역)



老人과 어린 아이가 어떤 사이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조손간(祖孫間)으로 짐작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노인의 아들, 그러니까 아이의 아버지일 것만 같다.

주인공은 젊은 나이에 원통하게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세상을 일찍 떴을까? 어쩌면 전쟁터에 끌려가서 전사한 것은 아닐까? 제2행에서 무덤들이 풀 섶에 늘어서 있다는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런 죽음이 한둘이 아닌 것 같다. 마을의 젊은이들을 한꺼번에 앗아간 전화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壬辰倭亂으로 말미암아 農村의 젊은이들은 징집되어 얼마나 많이 목숨을 잃었을 것인가. 그래서 마을엔 老人과 兒女子들뿐 젊은 사람은 없다. 죽은 아들의 기일을 맞아 노인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묘를 찾았으리라.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아 어린 손자를 바라다본 노인은 세상을 원망하며  한 잔 두 잔 기울인 술에 그만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팔을 붙들고 비틀거리면서 밭 사이 길을 들어서는 모습이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앞서 가는 두 마리의 무심한 개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구름 속에 파묻힌, 俗世와 멀리 떨어진 절은 평소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으니 문을 닫은 채 길도 쓸지 않는데, 쓸리는 것이 낙엽이 아니라 구름. 손님이 와서 비로소 문을 열어 보니 어느 듯 온 산에 松花로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채 自然과 함께 지내는 경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 글이다.



?佛日庵 因雲/ 불일암 인운 스님에게 -蓀谷(손곡) 李達(이달)


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

사재백운중   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   萬壑松花老

객래문시개   만학송화로


절집이라 구름에 묻혀 살기로

구름이라 스님은 쓸지를 않아

바깥 손 와서야 문 열어 보니,

온 산의 송화꽃 하마 쇠었네.


                    *출전: 손곡집(蓀谷集)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저녁에 먹을거리가 떨어졌다.

젊은 아낙은 빗속에 들로 나가서 보리를 베어 집으로 돌아온다.

어서 보리밥이라도 지어서 자식들 끼니를 해결해줘야 하는데 땔나무도 습기를 먹어서 불이 잘 붙지 않는다.

게다가 어린 딸은 어머니 옷을 붙잡고 울기까지 한다.

비와 습기에 젖은 땔나무 등의 소재들은 그 당시 백성들의 처량한 삶을 표현하고 있다.


손곡(蓀谷) 이달이 동산역(洞山驛)이라는 곳을 지나며 지었다는 시다. 실제로 본 것을 작품으로 옮겼다는 보리 베는 노래는



刈麥謠 (예맥요)보리 베는 노래 -손곡(蓀谷)이달

                   


田家少婦無夜食   雨中刈麥林中歸   

전가소부무야식   우중예맥림중귀


生薪帶濕煙不起  入門兒女啼牽衣    

생신대습연불기  입문아녀제견의



시골집 젊은 아낙이 저녁거리가 없어서

빗속에 보리를 베어 수풀 속을 지나 돌아오네.

생섶은 습기 머금어 불도 붙지 않고

문에 들어서니 어린 딸은 옷을 끌며 우는구나.


 

이달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비참하게 사는 민초들의 모습을 보고 그 정황을 곡진하게 그린 시를 여러 수 남겼는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입니다

 


獨鶴望遙空  夜寒擧一足 

독학망요공  야한거일족


西風苦竹叢   滿身秋露滴 

서풍고죽총   만신추로적


학 한 마리 먼 하늘 바라보며

밤도 추운데 다리 하나 들고 있구나.

서녘 바람은 대나무 숲을 괴롭히고

온몸을 가을 이슬이 적셨구나.



산사(山寺)/손곡 이달

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

사재백운중   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   萬壑松花老

객래문시개   만학송화노


절집은 흰구름 가운데 자리하고

그 흰 구름을 스님네는 쓸지도 않네.

손님이 찾아와서 문이 비로소 열리니

골짝마다 송화가 늙어 가누나.



박조요(撲棗謠) 대추따는 노래-손곡

隣家小兒來撲棗   老翁出門驅小兒

린가소아래박조   노옹출문구소아


小兒還向老翁道   不及明年棗熟時

소아환향노옹도   부급명년조숙시



이웃집 꼬마가 대추 따러왔는데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마를 쫓는구나.

꼬마 외려 늙은이 향해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는 살지도 못할걸요.


파란하늘 아래 빨갛게 대추가 익어가는 농촌의 가을 풍경을 소묘한 것 이웃집 대추가 먹고 싶어 서리를 하러 온 아이가 있고. 작대기를 들고 나서는 늙은이가 있다. 서슬에 졸라 달아나던 꼬마 녀석도 약이 올랐다. 달아나다말고 홱 돌아서더니 소리를 지른다. 영감 내년엔 뒈져라 그래야 내년엔 마음 놓고 대추를 따먹을 수 있을 테니 하는 심정...


습수요(拾穗謠) 이삭줍는 노래 -이달(李達)


田間拾穗村童語  盡日東西不滿筐

전간습수촌동어  진일동서불만광

      

今歲刈禾人亦巧  盡收遺穗上官倉

금세예화인역교  진수유수상관창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의 말이         

하루 종일 동서로 다녀도 바구니가 안 찬다네.   

올해에는 벼 베는 사람들도 교묘해져서          

이삭 하나 남기지 않고 관가 창고에 바쳤다네.    


당시 농촌의 수탈당하는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농민의 뼈아픈 아픔 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관리들의 수탈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이 시다.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들은 이삭줍기마저  어려워 바구니가 차지 않는다는 것은 관가의 수탈이 혹심하여 농민들의 마음까지도 빼앗아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화학(畵鶴)그림속에 학


獨鶴望遙空  夜寒擧一足

독학망요공  야한거일족


西風苦竹叢  滿身秋露滴

서풍고죽총  만신추로적


외로운 학이 먼 하늘 바라보며,

밤이 차가운지 다리 하나를 들고 있네.

가을 바람에 대숲도 괴로워하는데.

온 몸이 가득 가을 이슬에 젖었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슬픔, 모순적 현실을 차가운 밤으로 비유한 글은 자신을 둘러싼 짙은 어둠과, 발이 시린 추위 속에서도 학은 이슬로 제 몸을 씻으며 먼 하늘을 응시(요공 遙空)하고 있다. 그처럼 학이 어떤 현실의 질곡과 간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원대한 기상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대숲을 건너온 투명한 이슬, 이 가을밤 그토록 해맑은 정신이 있어 처참한 현실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移家怨 이사가는 도중에  (이달) 



老翁負鼎林間去   老婦携兒不得隨

로옹부정림간거   노부휴아부득수


逢人却說移家苦   六載從軍父子離

봉인각설이가고   육재종군부자리


영감은 솥을 지고

숲으로 사라졌는데,

할미는  아이를 끌고

따라가지를 못하는구나.

사람들 만날 때마다

집 떠난 괴로움을 하소연하는데,

여섯 해 동안 종군하노라

애비, 자식마저 헤어졌다네.

                          蓀谷集」卷6-4)


무거운 부역으로 인해 민중들이 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유리하는 괴로운 모

습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허균은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시를 보게 한다면, 근심하고 두려워하

여 깜짝 놀라서 깨달을 것이다. 그들이 병들어 파리해진 백성들을 살릴 수 있도

록 훌륭한 정치를 베푼다면,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니, 어찌

이것이 작은 일이겠는가? 글을 지으면서도 세상의 가르침에 벗어난다면, 이 또한

헛되게 글을 지을 뿐이게 된다. 이러한 글들을 짓는 거스장님이 글을 읽거나 공교

롭게 분간을 하는 것보다 어찌 현명하지 않겠는가?"



도망(悼亡) 죽은 아내를 애도 하며


손곡(蓀谷)이 자신(自身)의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지은 시(詩)로서 소동파(蘇東坡 : 1036~1101)의 시어(詩語)를 본받아 지은 작품(作品)인데, 교산 허균(蛟山 許筠)은『학산초담(鶴山憔談)』에서 “시(詩)가 너무 아름답고 정(情)을 끌기에 옛 사람의 말을 빌어다 쓴 것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평(評)을 하기도 했다.


羅?香盡鏡生塵   門掩桃花寂寞春  

나위향진경생진   문엄도화적막춘 

依舊小樓明月在   不知誰是捲簾人 

의구소루명월재   부지수시권렴인


깁 방장엔 향(香)내 사라지고 거울엔 먼지 가득한데

문은 닫히고 복사꽃 피어나 봄은 더욱 쓸쓸하구나

작은 누각(樓閣)엔 옛날처럼 달이 밝은데

누가 있어 저 주렴(珠簾) 걷을 것인고



그의 시는 방랑 생활에서 씌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만난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었고, 자신이 목격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시로 옮겼다.



'선산 가는 길(善山道中)'


西風吹葉 葉聲乾  長路悠悠 厭馬鞍 

서풍취엽 엽성건  장로유유 염마안


數口在京 家食窘  一身多病 旅遊難  

수구재경 가식군  일신다병 여유난


가을바람 불어와 잎새마다 마른 소리

먼길은 아득하여 말안장도 싫증나네

두어식구 서울에선 먹을것 없을테고

이 한 몸 병이 많아 여행길도 어렵구나



  또 다른 도망(悼亡) 추사 김정희 -죽은 아내를 애도 하며   

                                                                                 

悼亡(도망)죽은 아내를 애도 하며 金正喜


那將月老冥司  來世夫妻易地爲

나장월로송명사  내세부처역지위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我此心悲

아사군생천리외  사군지아차심비 


나중에 저승엘 가서 월하노인과 송사를 해서라도,

다음 세상에서는 부부의 지위를 바꾸어 놓으리라!

나는 죽고 그대는 천리 밖에 살아있어,

그대로 하여금 지금의 이 애통한 마음 절감케 하리라!


        

* 月下老人

진서(晉書) 예술전(藝術傳)과 속유괴록(續幽怪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 초기, 정관(貞觀) 2년에 위고(韋固)라는 청년이 여러 곳을 여행하던 중에 송성(宋城:지금의 허난 성)에 이르렀을 때 어느 허름한 여관에 묵게 되었다. 그날 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한 노인(月下老人)이 자루에 기대어 앉아 커다란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위고가 물었다. "무슨 책을 보고 계십니까?" "이것은 세상 혼사에 관한 책인데 여기 적혀 있는 남녀를 이 자루 안에 있는 빨간 끈(赤繩)으로 한번 묶어 놓으면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반드시 맺어진다오." "그럼 제 배필은 어디 있습니까?" "송성에 있네. 북쪽에 채소 파는 노파가 안고 있는 아이가 바로 짝이네." 그러나 위고는 참 이상한 노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그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나 위고는 상주(相州)의 관리가 되어 그 고을의 태수의 딸과 결혼하였다. 17세로 미인이었다. 어느 날 문득 예전 생각이 나 부인에게 월하노인의 말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러자 부인은 깜짝 놀라면서 말하였다. "저는 사실 태수의 친딸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송성에서 벼슬하시다가 돌아가시자 유모가 채소장사를 하면서 길러주었는데 지금의 태수께서 아이가 없자 저를 양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 氷上人(빙상인)

중매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진서》 색담전에 실려 있다. 진(晉)나라에 색담이란 점쟁이가 있었다. 그는 천문과 꿈해몽에 대해 밝았다. 어느 날 영호책(令狐策)이라는 사람이 이상한 꿈을 꾸어 색담을 찾아왔다. "나는 얼음 위(氷上人)에 서 있고 얼음 밑에는 누군가가 있어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통 생각이 나지를 않습니다." 색담이 해몽을 해주었다. "얼음 위는 양(陽)이며 그 밑은 음(陰)이다. 이 꿈은 당신이 중매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혼사는 얼음이 풀릴 무렵 성사될 것이다." 과연 영호책은 태수로부터 자기 아들과 장(張)씨의 딸을 중매 서 달라는 부탁을 받아, 얼음이 풀릴 무렵에 이 결혼을 성사시키게 되었다.


이 두 이야기로부터 사람들은 중매인을 가리킬 때에 月下老人 또는 氷上人이라 부르고 이 둘을 합쳐서 月下氷人'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은이;이달(李達)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혀 신평이씨(新平李氏)인 것이 확인되었지만, 서얼이어서 더 이상의 가계는 확실하지 않다.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박순(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충고하면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주요저서 : 《손곡시집(蓀谷詩集)》주요작품 : 《습수요(拾穗謠)》《산사(山寺)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ㆍ서담(西潭)ㆍ동리(東里).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혀 신평이씨(新平李氏)인 것이 확인되었지만, 서얼이어서 더 이상의 가계는 확실하지 않다.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박순(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충고하면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ㆍ가(歌)ㆍ음(吟)과 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도(詩道)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손곡의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익혔다. <이태백집>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외웠다. 이렇게 5년 동안 계속 당시를 배운 뒤에는 그의 시가 예전과 달라졌다.

  한편, 시풍이 비슷한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ㆍ허봉ㆍ양대박(梁大樸)ㆍ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이달은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하였지만,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였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한(恨)과 애상(哀傷)을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하게 무르녹았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에 그가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그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그 가운데에 높이 이른 시는 왕유ㆍ맹호연ㆍ고적(高適)ㆍ잠삼(岑參) 등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ㆍ전기(錢起)의 풍운을 잃지 않았다. 신라ㆍ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 여관에 얹혀살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해오지 않고,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방랑시인 이달에게 답답한 현실을 묻다
이달과 허균이 꿈꾼 세상은 반상·빈부 차별 없는 '율도국'
텍스트만보기   강기희(gihi307)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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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생가터. 오래된 집은 사라지고 낯선 집 한 채가 들어섰다.
ⓒ 강기희
오래 시간 세월을 비켜선 이 하나 있었다. 400여년 전이고 엄격한 신분사회가 존재하던 조선조 선조 때의 사람이다. 그는 흔한 말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정처없는 삶을 살았다. 길을 걷다 발길 머무는 곳이 그의 집이요, 무덤인 사람이었다. 그의 생몰연대가 불확실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손곡 이달, 세상이 그를 버리기 전에 그가 먼저 세상을 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비렁뱅이 시인 또는 방랑 시인이라 불렀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는 손곡 이달이다. 그가 스스로 방랑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그를 방랑의 길로 떠밀었다.

그가 세상과 등을 지게 된 것은 당시의 신분제도 깊은 관련이 있다. 출생과 함께 신분이 정해지던 시절 이달은 양반인 아버지 이수함(李秀咸)과 홍주 관기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기생이었던 탓에 그는 양반도 아닌 천민도 아닌 '서출'이 그의 신분이었다.

아버지는 지체 높은 양반이었으나 그는 서출이라는 이유로 양반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그의 정신적 유랑은 정해진 수순과 다름없었다. 어릴 적부터 문재에 뛰어났던 이달은 한 시절 시문학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이름뿐 전해지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서출이란 신분 때문에 관직에도 등용되지 못했던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주유한다. 그가 본 민초들의 애달픈 삶은 그의 시편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隣家小兒來撲棗 老翁出門驅小兒
린가소아래박조 노옹출문구소아
小兒還向老翁道 不及明年棗熟時
소아환향노옹도 부급명년조숙시

이웃집 꼬마가 대추 따러왔는데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마를 쫓는구나.
꼬마 외려 늙은이 향해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는 살지도 못할걸요.

- 손곡 이달의 시 '박조요(撲棗謠) 대추따는 노래' 전문


그의 시편과 인물됨이 후세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제자 허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허균은 스승의 작품을 모아 '손곡집'을 펴냈으며, 스승의 삶을 그린 '손곡산인전'을 쓰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시인 이달과 혁명가 허균의 만남은 운명

시대의 반항아 허균은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저항적 사상을 가감 없이 받아들인 당시로 보면 혁명가적 삶을 살았다. 허균이 없었다면 스승인 이달의 작품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허균의 아비인 허엽이 이달에게 허균과 허난설헌을 맡아줄 것을 청했을 때 이달은 허균이 지니고 있는 눈빛부터 살폈을 것이다. 허엽 또한 균과 난설헌을 이달에게 보내면서 아들과 딸이 세상을 비추는 빛 보다는 빛에 가려있는 어둠을 배우고 익히라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손곡 이달과 허균, 허난설헌이 한때 함께 지냈던 흔적을 찾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를 찾아갔다. 지난 3일 정월대보름날을 하루 앞둔 날이고 하늘은 쟂빛으로 덮여있었다. 손곡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펼쳐진 논은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만큼 되었으며 얕은 산은 손곡리 사람들의 심성을 보는 듯했다.

손곡리는 손곡 이달이 살았다 하여 붙은 지명이라니 이달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손곡리와 지근 거리에 있는 반계리가 반계 유형원이 살았다 하여 붙은 지명임을 감안하면 사람이 땅의 심성까지도 바뀌어 놓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을엔 더러 빈집도 보였다. 낡은 문짝 너머로 이달이 두런두런 시를 읽거나 지우와 술잔을 나누는 듯도 하고 균과 난설헌을 앉혀놓고 당시의 제도적 모순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하는 듯도 하다.

두 남매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스승인 이달의 사상을 빨아들이는 모습이 연상되는 빈집은 바람이 불면 곧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마을을 걷다 보면 손곡리에서 터를 잡고 문화운동을 펼치는 광대패 모두골이 운영하는 공연장인 '이달의 꿈'을 만난다.

공연장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는 이달이 당시 품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환생한 듯한 착각이 드는 곳이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이달의 시비가 있다. 시비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그의 시비로서는 유일하다. 시비엔 아래의 시가 음각되어 있다.

田家少婦無夜食 雨中刈麥林中歸
전가소부무야식 우중예맥림중귀
生薪帶濕煙不起 入門兒女啼牽衣
생신대습연불기 입문아녀제견의

시골집 젊은 아낙이 저녁거리가 없어서
빗속에 보리를 베어 수풀 속을 지나 돌아오네
생섶은 습기 머금어 불도 붙지 않고
문에 들어서니 어린 딸은 옷을 끌며 우는구나


- 손곡 이달의 시 '예맥요(刈麥謠); 보리 베는 노래' 전문

이달은 당대 최고 시인으로 통한다. 그는 최경창, 백광홍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칭했는데 그 중에서도 시편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경창은 기녀 홍랑의 연인이었고 백광홍은 해남 사람으로 가사문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이달의 제자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스승을 이렇게 평했다.

.."손곡(蓀谷)의 얼굴이 단아하지 못한데다가 성격이 또한 호탕하여 절제하지 않았고, 게다가 세속의 예법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입었다. 그는 고금의 모든 일과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하기 즐겼으며, 술을 사랑하였다. 글씨는 진체(晉體)에 능하였다.

그의 마음은 가운데가 텅 비어서 아무런 한계가 없었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품 때문에 그를 사랑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몸 붙일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방에 비렁뱅이 노릇을 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가난과 곤액 속에서 늙었으니, 이는 참으로 그 시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곤궁했지만 그의 시는 썩지 않을 것이다. 어찌 한때의 부귀로써 그 이름을 바꿀 수 있으리오..
-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시선' 중에서

▲ 공양왕이 유배되었던 배향산. 산 중턱에 움막을 짓고 개성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 강기희

▲ 손곡 이달의 시비.
ⓒ 강기희

이달의 시비 옆으로 임경업 장군 유허비가 있다. 그 비석 역시 세워진 역사는 얕다. 임경업 장군은 손곡리 출신으로 지역의 인물이다. 손곡리는 손곡리라는 지명이 있기 전 '손위실'이라고 불렀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이 지역으로 유배를 와 이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긴 역사의 장소라는 것이다.

원주시 부론면 일대는 역사적으로 불운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공양왕이 그랬고, 이달과 허균도 그러했다. 반란의 괴수가 된 이괄의 저항정신도 이 지역에서 키워낸 것이었다. 스스로 미륵이 되고자 했던 궁예가 왕건에게 참패한 것도 부론면과 문막 일대이다. 부론면엔 뜻은 크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져간 역사적 인물들이 많다.

여전히 답답한 현실, 홍길동은 언제 오는가

좁은 소로 길을 따라 이달이 생전 살았던 집으로 갔다. 다 쓰러져가던 집은 누군가 헐고 번듯한 조립식 주택을 지어놓았다. 함께 간 정토 시인은 주택이 있는 자리가 이달의 생가터라고 못을 박는다. 마당가엔 느티나무 두 그루가 키를 키우고 있다. 집 뒤로는 제법 높은 산이 버티고 있었다. 물이 흐르던 계곡은 봄이 되었음에도 바짝 말라있다.

"뒷산을 넘으면 흥원창이 나옵니다. 공양왕이 개성에서 배를 타고 흥원창까지 와 저 산을 넘어 이곳으로 유배를 왔지요. 손곡 이달도 그랬지요."

한때 손곡리에서 살았던 정토 시인의 말이다. 그는 손곡리에서 3년을 살았는데 그때 이 지역을 스쳐 지나간 인물들에 대한 흔적을 찾아 공양왕처럼 아파하고 이달처럼 떠돌았다고 한다.

손곡리 가는 길은
오래전 단종의 단강처럼 피로 물들지 않고
고려 마지막 공양왕의 원혼도 없는 사라치의 길

단지, 손곡 이달과 임경업 장군
이괄과 임윤지당이 서로 어울려
역성의 원한과 억압을 씻는
만인 해로의 길이 되었네

아아 손곡리 가는 길은
지난 겨울의 꿈이 되었네


-정토 시인 시 '손곡리 가는 길' 중에서

이달의 시는 맑고 투명하다. 바라보는 시선 또한 푸근하고 따듯하다. 이달도 세상을 공격하는 발톱만큼은 시어 속에 감춰놓았다.

白犬前行黃犬隨 野田草際塚??
백견전행황견수 야전초제총류류
老翁祭罷田間道 日暮醉歸扶小兒
노옹제파전간도 일모취귀부소아

흰둥이가 앞서고 누렁이는 따라가는데
들밭머리 풀 섶에는 무덤이 늘어서 있네
늙은이가 제사를 끝내고 밭 사이 길로 들어서자,
해 저물어 취해 돌아오는 길을 어린 아이가 부축하네


- 손곡 이달의 시'제총요(祭塚謠); 제사를 끝내고' 전문

당시의 시대 상황이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긴 전쟁으로 피폐한 민초들의 삶이 시공간을 넘어 오늘을 사는 이들까지 감동시킨다. 그의 시 한 편을 더 보자.

田間拾穗村童語 盡日東西不滿筐
전간습수촌동어 진일동서불만광
今歲刈禾人亦巧 盡收遺穗上官倉
금세예화인역교 진수유수상관창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의 말이
하루종일 동서로 다녀도 바구니가 안 찬다네.
올해에는 벼 베는 사람들도 교묘해져서
이삭 하나 남기지 않고 관가 창고에 바쳤다네.


- 손곡 이달의 시 '습수요(拾穗謠); 이삭줍는 노래' 전문

어느 마을이라고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이달이 떠돌아다니며 만났던 이들의 풍경이 다 이렇게 힘겹다. 이달의 사상을 현실에 접목시키기 위해 애쓴 이는 그의 제자 허균이었다. 허균은 스승 이달이 못 이룬 꿈을 이루기라도 하듯 '홍길동전'에서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만들어냈다.

율도국은 숨 막히는 신분제도를 혁파한 나라이며 모두가 평등한 삶을 이루는 그야말로 힘없는 민초들이 주인인 나라이다. 소설 주인공인 홍길동은 허균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고 스승인 이달이기도 하다.

홍길동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구원자 같은 존재다. 혁명가 허균이 만들어낸 인물 홍길동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작금의 현실이라는 것이 여전히 답답하다는 증거가 된다.

현실세계에 누가 있어 이달이 될 것이며 또 누가 있어 허균이 될 것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이달과 허균이 요즘 부쩍 그리워지는 까닭은 그들이 품은 뜻이 너무도 순정하기 때문이다.

이달의 생가를 나와 이달과 허균 그리고 허난설헌이 함께 걸었을 논둑길을 걷는다. 작은 개울물은 비록 흐려있지만 반역의 땅, 불온 땅, 패배의 땅 손곡리의 바람은 여전히 맵고 찼다. 손곡리를 관통하는 바람엔 여전히 칼날이 숨겨져 있고, 세상엔 그 칼날에 마음 베어질 사람만 득시글거린다.

▲ 이달의 꿈이 현실로 살아나는 곳.
ⓒ 강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