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임꺽정은 실제로 왕이 두려워한 의적이었다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5:09

명종14년(1559년) 3월 27일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중추부 영사 윤원형 등 당대 최고 실권자 4명이 머리를 맞대고 황해도 일대를 휩쓰는 도적 떼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임꺽정이라는 자로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이 군사 20여명을 이끌고 습격했다가 화살 일곱 발을 맞고 사망한 데 따른 후속 조치를 위한 논의였다. 실록에 임꺽정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록이다.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명종(明宗)이라는 인물은 그 이름과 달리 암군(暗君)이었다.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에게 휘둘려 이렇다 할 왕권을 행사해본 적이 없는 군왕이다. 게다가 불과 4년 전에는 호남의 상당 지역이 왜구에게 점령당하는 을묘왜변을 겪기도 했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려야 했던 혼군(昏君)이었던 것이다. 폭정이 도적을 부른다는 격언이 이때에도 딱 들어맞는다. 명종의 정치가 임꺽정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에게는 홍명희의 대하소설로 더 친숙한 ‘임꺽정’의 실체는 어땠을까? 홍길동에 비하면 픽션 속 임꺽정은 실제 임꺽정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것은 아마도 한문 원문으로 실록을 보았을 홍명희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었지만 힘만 센 것이 아니라 그만의 리더십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무리에는 상인, 장인, 아전 등이 두루 포함돼 있었다. 지략가들도 있었다. 단순한 도적질이 아니라 관을 상대로 잦은 전투를 벌여 이미 조정에 등을 돌리고 있던 민심을 얻는 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2년 이상 경기도ㆍ황해도ㆍ강원도 일대를 누비며 관군에 맞서 조직을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임꺽정이 전개했던 전략과 전술이 만만치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홍길동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조정의 논의가 있은 후에도 임꺽정 무리에 대한 소탕작전은 순조롭지 못했다. 폭정이 심해질수록 임꺽정이 붙잡히지 않고 관군을 더 괴롭혀주기를 바라는 민심까지 생겨났다. 어느새 임꺽정은 의적(義賊)이 되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 명종15년 11월 24일 포도대장 김순고가 급보를 올렸다. 임꺽정 수하에 있는 서임이라는 자가 엄가이라는 가명으로 숭례문 밖에 산다는 첩보를 입수해 서임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였다.


서임을 조사한 결과 두 달 전에 이미 체포되어 있던 임꺽정의 처를 구출하려고 작전을 펼친 장본인이 바로 서임을 비롯한 임꺽정 패거리였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임꺽정 진영에서는 자신들에 대한 적극적 소탕작전을 전개한 봉산군수 이흠례를 살해하려 했다는 계획까지 털어놓았다. 이흠례가 신계군수로 있을 때 자신들이 입은 피해가 컸기 때문에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위용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임꺽정은 단순한 도적 떼가 아니었다. 관군을 희롱할 만큼 막강한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정으로서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해 12월 28일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이 도적의 괴수 임꺽정을 체포했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 이사증이 사로잡은 인물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수하에 있던 가도치라는 인물로 드러났다. 이사증이 공을 세우기 위해 고문 등으로 협박을 가해 조서를 위조한 것이다.


붙잡힌 인물이 임꺽정이 아니라 가도치였다는 사실은 서임과의 대질신문에서 드러났다. 서임은 그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인 가도치라고 털어놓은 것이다. 결국 이사증은 중벌을 받아야 했다.


‘진짜’ 임꺽정이 체포된 것은 그로부터 9개월여가 지난 명종16년 9월 7일이었다.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과 그 일당을 체포했다고 평안도 관찰사 이양을 통해 보고를 올린 것이다. 이수철이 받아낸 임꺽정의 공초 내용에 따르면 이미 중앙이나 지방에서 그를 도운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당시 임꺽정은 “우리 패거리 가운데 한 명은 승정원에 파고들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치밀한 정보전을 펼치려 했다.

 

‘진짜’ 임꺽정이 한양에 붙잡혀온 것은 9월 21일이었다. 그런데 임꺽정의 조사를 맡았던 추관들이 보고하기를, 이 자도 임꺽정이 아니라 윤희정이라는 인물로 해주의 군인으로 의주에서 변경 방비를 하다가 붙들려 왔다는 것이었다. 조정은 두 번째로 기만을 당했다.

 

임꺽정에 대한 명종의 분노는 그에 비례하여 커져 갔다. 윤희정이라는 인물을 사형에 처해버린 것도 그 같은 분노의 일단이었다. 명종은 일개 도적을 “국가에 대한 중대한 반역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조정 관리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임꺽정을 체포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임꺽정이 체포되는 것은 다시 해가 바뀌어 명종17년 1월 3일이었다. 중앙조정에서 황해도 토포사로 남치근을 임명해 임꺽정을 잡아들이도록 특명을 내린 지 2개월여가 지나서였다. 당시 좌의정 이준경은 “수도의 장수 중에서 위망과 지략이 있는 자를 보내 굳세고 용맹스러운 자들을 뽑아 거느리게 하고, 또 황해도의 군대를 동원하여 그 중에서 도적의 실정을 잘 아는 자를 나누어 배정토록 해 토벌에 나서야 한다”고 건의해 명종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오죽 했으면 실록을 쓴 사관조차 “좀도둑 때문에 장수를 보내고 군대를 일으키는 일을 논하니 조정에 기강이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혹평했을까.

 

명종의 불안감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준경과 남치근, 두 사람은 을묘왜변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투톱(two top)이기도 했다. 남치근은 당대의 유명한 무장이다. 이 작전은 황해도 일대의 모든 군사가 총동원된 말 그대로의 총력전이었다.

 

처음에는 경기도ㆍ강원도ㆍ평안도ㆍ함경도에서도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황해도 밖으로 나가는 모든 장정을 수색했다. 황해도 밖으로 단 한 명의 도적도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이후 남치근은 황해도 초토화 작전에 들어갔다. 하늘을 찌르던 임꺽정 무리의 사기도 마침내 꺾이기 시작했다. 투항이 이어졌고 임꺽정 무리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임꺽정은 구월산으로 들어가 최후의 항전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황해도의 평범한 백성들이 받아야 했던 정신적ㆍ물질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병사들의 식량을 공짜로 제공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임의로 구타와 약탈이 진행되었다. 오죽하면 실록에 “한 개 도가 텅 비었다”고 했을까.

 

결국 임꺽정은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실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남치근은 임꺽정의 아들, 손자까지 모두 색출해 죽였다고 한다. 당시 임꺽정 소탕작전의 일등공신은 서임이었다. 그가 남치근의 길잡이를 했다.

 

임꺽정의 체포 및 처형이 끝난 지 열흘 후 조정에서는 서임의 처리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소탕작전의 공을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도적의 무리이므로 화근을 없애는 차원에서 처형해야 하는지 조정 대신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 것이다. 결론은 서임을 포도청에 귀속시키되 포도대장의 철저한 지도감독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후 서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임꺽정 사건을 기록한 사관은 이런 평을 남겼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곤궁한 백성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