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따 줄리아
임진왜란 7년(1592~1598)전쟁 때 왜병들은 조선의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하여 5만 여명을 일본의 포로로 끌고 갔는데 그 중에는 왕족 출신의 3살 짜리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는 자기 양녀로 삼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이 아이를 예수회 선교사 모레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하여 줄리아라는 예쁜 세례명도 지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이 아이는 오따 쥴리아로써 왜장인 양부모 아우구스티노와 유스티나에 의해 종교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당시의 박해를 피해 밤늦도록 성서를 읽고 기도를 바쳤습니다.
1600년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자 양아버지 아우구스티노는 처형당하였으며 오따 쥴리아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따 쥴리아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영하는 등 신앙 생활에 충실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격케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남몰래 양식도 많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오따 쥴리아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안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21살된 그녀의 타고난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성을 보고 배교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했으나 오따 쥬리아는 목숨을 버리면 버렸지 신앙은 버릴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1612년 4월 오오시마로 유배를 당하는 몸이 되었으며, 오따 쥴리아는 배를 타기 위해 부두로 가는 길에 일부러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가 그의 발에서는 피가 낭자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맨발로 험한 자갈밭을 걸어 간 것은 십자가를 메고 사형장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기 위함이었으며 유배도 하나의 긴 순교로 생각한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유배 길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오따 쥬리아의 유배는 오오시마에서 니이시마를 거쳐 고오즈시마로 옮겨졌는데 이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한 관졸들은 장소를 바꾸어 그녀를 유배시킨 것입니다.
오따 쥬리아는 고오즈시마에 사는 동안 혼자 제대를 꾸미고 미사 드리는 흉내를 내기도 하고 멀리 육지에 있는 신부님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유배지에서의 신앙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가 하면 순교자 전기, 성인성녀전, 기도서 등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하여 그곳 섬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했습니다. 오따 쥬리아는 극기와 인내와 기도로 40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유배지인 고오즈시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따 쥴리아는 신앙을 가진 완고한 조선의 여인으로 섬사람들의 후손 대대에 전해져 내려왔으며, 그녀의 성덕은 300년이 지나도 그곳 사람들의 신앙의 등불이 되어 1970년에는 일본 사람들이 제1회 쥴리아제를 개최하게 되었으며 해마다 열리는 쥬리아제를 통하여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오따 쥬리아는 죽어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위의 분의 훌륭하신 답변에 약간 더 추가 합니다.
오따 줄리아(?∼1651).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 그 곳에서 순교한 조선인 동정녀(童貞女).
오따(大田)는 일본식 성(姓), 줄리아는 세례명.
1900년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심용제(沈容濟) 신부의 ≪高麗致命事略≫에는 왕족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有一高麗王族李氏女子 聖儒立亞被倭將].
임진왜란 때 천주교인 왜장(倭將) 고니시 유끼나가(小四行長)에게 3살의 어린 나이로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간 뒤, 고니시 유끼나가 부부(夫婦)에게 입양되어 어려서부터 양모(養母) 유스티나의 종교적 교육을 받아 성장했고 예수회 선교사 모레혼(Morejon)신부에게 영세하고 수도자와 같은 극기 · 인내 · 기도로써 생활하였다.
1600년 양부모가 죽은 뒤 도꾸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정권을 잡게 되자 도꾸가와의 시녀(侍女)로 들어갔고, 그 뒤 도꾸가와의 천주교 박해령으로 일본내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게 될 때 오따 줄리아도 도꾸가와에게 배교의 위협을 받았으나 배교를 거부하고 21세 때인 1612년 4월 20일 유배형을 받아 오오시마(大島), 니이시마(新島)를 거쳐 이해 6월 고오즈시마(神津島)로 유배되었다.
유배형을 받고 배에 오르기 전 항구까지의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는 예수를 묵상했고 또 예수회 선교사 파에즈(Paez) 신부에게 자신의 유배소식과 함께 기도를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한 교우로부터 유배도 일종의 긴 순교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유배길에 올랐다.
고오즈시마에 도착 후, 양부(養父)의 친구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후손들의 보호를 받아가며 어렵게 생활했으나 그러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항상 극기와 인내와 기도를 잊지 않았다. 1651년 40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유배지인 고오즈시마에서 사망하였다.
그 뒤 1958년 12월 25일 일본인 교우들과 교포교우들이 최초로 오따 줄리아를 추모하는 행사와 함께 기념비를 고오즈시마에 세웠고 1970년 고오즈시마에서 제1회 줄리아제(祭)가 열린 후 지금까지 매년 줄리아제가 열리고 있으며 1972년 10월 26일 묘토(墓土)가 환국되어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의 줄리아 기념비 유택(幽宅)에 안장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천주교에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자료
예수의 단세포적 발생학에 대해서 물어보니 마리아를 임신시킨것은 성령이라고 말을 돌리는데..이것이 <봄이오면>햏이 말한 <객관적인 근거속에서 비판>에대한 답변이라니 놀라울 뿐이야. 나는 기독교인처럼 비굴하게 살지는 못하는 성격이거든. 아닌건 아니고 맞는건 맞는것이지 성령이 임신시켰다고 말도 안되는 식으로 둘러치지는 못해. 그래서 이 수정된 글을 올리는 것이야. 수정하고 봐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입장에서는 내용상 변한것은 없는것 같아.
1. 예수를 믿느냐 안믿느냐의 관점에서 바라본 임진왜란.
조선:이순신장군을 비롯한 많은 조상들 ===> 당연히 지옥에 감.
일본:고니시 유키나가 ===> 무수한 조선인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니시에게 죽임당한 무수한 조선인들 역시 지옥에 감. 반면 고니시는 예수를 믿고 최초로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했을뿐만 아니라 조선인들 7천명을 예수품으로 인도하여 구원해주었고 세례시켜주었다. 그중에는 복자에 들어간사람도 있었으며 당연히 천국에 감.
선봉장으로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흑천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를 비롯하여 오도순현(五島純玄 고지마 쥰겐), 천초종원(天草種元 야마쿠사 다네모토)등 5만여 명이었다.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인 전교회장(후간 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왔다. 왜군 신자들을 돌봐 주었으나 별로 전교 활동을 못하고 1595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임란 7년 후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4만여 명 중에 장기(長崎)지방 근처에서 7천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2. 신학대 교수관점에서 본 임진왜란.
.. .. 김임규(金任圭) 신학대 교수 曰 : "최초로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 왔다는 것이 인간으로 할 수 없는 큰 일을 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히데요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김임규 "임진왜란을 통한 기독교의 전래에 관한 고찰"『성결교신학교 논문집』14,
1986. 4 82쪽>
3. 결론
조선: 예수를 안믿는 죽어마땅한 민족들이었고 잘죽어서 지옥에 갔다.
일본: 예수를 믿는 아주 훌륭한 민족이며 풍신수길과 고니시라는 걸출한 선교사를 보내 조선을 선교했기 때문에 천국에감. 임진왜란은 아주 잘 일어난 전쟁으로 조선인들에게 예수님의 축복을 안겨준 전쟁이었다.
일본인들은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아와사키:한국에 4백년 전에 천주교가 전해졌다는 이야기 알고 있어요?
경화:2백년 전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아와사키:히데요시의 군대와 함께 스페인 선교사가 조선에 와 있었어요. 그리고 일본군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어서 조선인을 일본으로 데리고 와서 세례를 주었다고 해요.
<註> 로마예수회역사연구소의 메디나 신부가 펴낸 「한국천주교의 기원」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제일군사령관이자 천주교신자인 브이센트 코니시(小西)는 조선인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세례를 주었다. 코니시가 데리고 온 왕족 출신의 12살 난 소년은 베데로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브이센트 권(權)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브이센트 권은 나중에 신부가 되었다. 그러한 신도들에 의해 1610년에 나가사키(長崎)에는 조선인성당이 만들어졌다. 토쿠가와(德川)정권은 조선통신사편에 그들 신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아래 자료출처는 천주교쪽 사이트들이야..
http://gijang.info/
http://church.catholic.or.kr/kuro3/chapt23.htm
한국 천주교회 역사
1592년 4월 일본의 풍신수길은 15만 7천여 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 출정(出征)을 계기로 일본은 국내에 크게 퍼진 천주교를 없애고자 했다. 선봉장으로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흑전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를 비롯하여 오도순현(五島純玄 고지마 쥰겐), 천초종원(川草種元 야마쿠사 다네모토) 등 5만여 명이었다.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인 전교회장(후간 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왔다. 왜군 신자들을 돌봐 주었으나 별로 전교 활동을 못하고 1595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임란 7년 후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4만여 명 중에 장기(長崎)지방 근처에서 7천 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덕천막부(德川幕府)의 금교정책은 1611년부터 1720년까지 1백여 년 계속되었다. 조선인 신자 7천 명도 모두 순교하였다.
자료출처 =>
http://blog.daum.net/_blog/ArticleCateList.do?BLOGID=060UF&CATEGORYID=171992
豊臣秀吉의 사후, 세키가하라의 대 결전에서石田三成(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의 지휘관으로서 참전하였으나 川家康(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패배.크리스트교도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일본 패장들이 자신의 프라이드를 지키기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할복자결은 하지 못하고, 이부키야마로 피했지만 결국은 잡혀 참수 당한다. 자살을 금지한 크리스트교의 교의에 따른 선택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킨 小西집안의 자녀들
쥴리아 오타아
1592년, 小西行長를 지휘자로삼은 제1군, 加藤?正(카토오 키요마사)의 제2군은 연달아 조선을 침공했다. 코니시 유키나가의 원정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함락 시키고 평양 부근까지 진군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명·조선 연합군의 반격을 받게되고, 조선의 명장 이순신의 수군에 의하여 보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일단은 일본으로 철퇴해야 했다.
이 평양성 전투로 조선의 무장이 전사를 했으며(누구인지 정확한 신분에 관한 기록은 발견치 못했다)그의 부인마저도 자결을 하여 불과 5살전후의 딸 만이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천주교신도였던 小西行長는 전쟁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목숨을 앗아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팟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여자아이를 가엾이 여겨 일본에 데리고 간다.
小西行長은 일본으로 데려온 아이를 양녀로 삼아 소중히 키웠다. 小西行長의 아내도 당연히 천주교도였는데 쥬리아는 양어머니의 권고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일본명을 "오타아" 세례명을 "쥴리아"라고 했다. 小西行長의 아내는 약초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지식을 양녀인 쥴리아에게 가르쳤다.
小西行長의 사후 쥴리아 오타아는 川家康의 궁녀로 발탁된다. 추측하건데 그녀는 미모와 물론이려니와 교양도 뛰어난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그녀는, 川家康의 앞에서 춤을 추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녀가 몹시 마음에 들어 측실로 맞고 싶었으나그녀는 그것을 거절했다. 당시 궁중안의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차지하고 싶어했던 측실의 지위를 그녀는 크리스찬 신앙 때문에 거부했던 것이다.
진노한 이에야스는 쥴리아를 이즈오오시마(伊豆大島)에 유배로 했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푸념 하나 하지않고, 오히려 자신의 약초에 대한지식을 살려, 섬사람들을 위하여 힘썼다고 한다.그리하여 오오시마에는 크리스찬이 점점 늘어났으며 그로인하여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하치죠오지마(八丈島)로 유형을 당하고 거기에서도 크리스찬이 점점 증가하여 마침내는 코오즈시마(神津島)까지 보내어 졌다.
의사도 없는 멀고 먼 작은 섬에서, 그녀는 섬의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대했다. 몸이 썩어 가는 병으로 가족마저도 외면한 할머니도 헌신적으로 간호하고, 해적질로 몇번이나 잡혀 사형을 받을뻔한 젊은이를 인수 하기도 했다. 오타아는, 여기 코즈시마에서 그 생애를 마쳤는데, 그녀의 유배생활은 40년이나 된다.
권 빈첸시오
權- 1581∼1626 일본에서 순교한 한국인 복자(福者). 쥴리아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당시 전화에 말려 부모를 잃는 소년으로 小西行長가 일본으로 데려가 그의 딸이자 쓰시마(對馬島)도주(島主) 소오(宗)의 부인인 마리아에게 맞겼다.마리아의 후원으로 예수회 학교를 졸업하였다.
1603년 세례를 받고 수련수사(修鍊修士)가 되었으나, 집권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금교령(禁敎令)을 내리는 등 가톨릭 박해가 심해지자 조선으로 돌아와 전교하려 하였다.
14년 예수회 파체코신부의 명으로 중국을 통하여 조선에 입국하려 하였으나, 철저한 쇄국정책과 중국에서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년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5년간 졸라신부와 시마바라[島原]반도에 숨어서 일본인과 그들에게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에게 전도하다가 25년 체포되어, 다음해에 파체코·졸라·토레 신부들과 나가사키[長崎]에서 화형당하였다. 사형 전 감옥에서 파체코신부로부터 수도자 서원식(誓願式)을 받아 수도자로 순교하게 되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위하여 활약한 숨은 공도 크다.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205명의 일본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식(諡福式)을 통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쪽바리 들은 천국 갔구나..어쩐지 일제시대 때에도 3.1 운동 때 기독교가 쪽바리들 편 들어주고 요즘 천도교에서 한 공들 가로챌려고 하는 센스는 뭐냐..진짜 기독교의 교리나 재데로 지키는거냐..한국 기독교는..교리는 없고 돈밖에 없는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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