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새로 밝혀진 난중일기 32일치 全文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7:03

※ 을미일기 새로운 내용 (번역=노승석 순천향대 대우교수)

 

을미년 정월10일

 

순천 부사(順天府使)도 공사(公私)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 들였다.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 順川公私禮 姑留之 而有頃招入 同坐饋酒之際 言辭極兇慘

 

 

을미년 정월12일

 

  12일,삼경(三更,자정쯤)에 꿈을 꾸니 선군(先君,부친)께서 와서 분부하기를 “13일에 회()를 초례(醮禮)하여 장가보내는데 날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비록 4일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이에 완전히 평일과 같이 하게 되어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 十二日 三更夢先君來敎 十三日送醮往 似有不合 雖四日送之無妨爲敎 完如平日 懷想獨坐 戀淚難禁也

 

 

을미년 정월14일

 

  14일,사천 현감(泗川縣監)[기직남(奇直男)]이 와서 이르기를 “새로 온 수사(水使)선거이(宣居怡)가 병으로 면직서(免職書)를 올려 진주 목사(晉州牧使)배설(裵楔)이 이를 대신 맡았다”고 하였다.

 

⇒ 十四日 泗川來云 新水使宣居怡 以病呈免 晉州牧裵楔爲之云

 

 

을미년 정월15일

 

  15일,우후(虞候)이몽구(李夢龜)와 여필(汝弼)이 왔다.이 편에 “이천주(李天柱)씨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경탄함을 이기지 못했다.천리밖의 땅에 던져진 사람이 만나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더욱 애통과 슬픔이 심했다.

 

⇒ 十五日 虞候李夢龜及汝弼來 聞李天柱氏 不意暴逝云 不勝驚嘆 千里投人 不見而奄逝 尤極痛悼

 

 

을미년 정월21일

 

  21일,오늘이 바로 회()가 전안(奠雁,혼례)하는 날이니,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장흥 부사(長興府使)[전봉(田鳳)]가 술을 가지고 왔다 ……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官府)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더욱 놀랍다.

 

⇒ 二十一日 乃奠雁之日 心慮如何 長興佩酒來 … 其京妾亦率來于其府云 尤可駭也

 

 

을미년 정월27일

 

  27일,가리포(加里浦)첨사(僉使)[이응표(李應彪)]를 통하여 여옥(汝沃)형의 부음(訃音)을 들으니,놀랍고 애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 二十七日 因加里浦 聞汝沃兄訃 不勝驚痛

 

 

을미년 2월9일

 

  2월 초9일,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한 방향에 걸렸는데,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홀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남들도 보게 했지만,남들은 볼 수 없었다.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화룡(畵龍)이 되어 있었고,내가 한참동안 어루만지며 완상(玩賞)하는데 그 빛과 형상이 움직이니 기위(奇偉,특이하고 웅장함)하다고 할만 했다.기이한 길상(吉祥)함이 많은 것 같기에 여기에 적는다.

 

⇒ 二月初九日 夢西南間 赤靑龍掛在一方 其形屈曲 余獨觀之 指而使人見之 人不能見 回首之間 來入壁間 因爲畵龍 吾撫玩移時 其色形動搖 可謂奇偉 多有異祥 故記之

 

 

을미년 2월27일

  나는 또한 임시방편으로 손을 꼽으며 대비책을 묻다가 해가 저물어서 파하고 돌아왔다.그의 꼴을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 吾亦姑息 指問備策 日暮罷歸 其爲形狀 不可言

 

 

을미년 3월7일

 

  7일,우수사(右水使,이억기)가 만나러 왔다.정원명(鄭元明)과 순천(順天)군관(軍官)의 일로 말 기운과 낯빛이 매우 급하니 우습다.

 

⇒ 七日 右水使來見 以鄭元明順天軍官事 辭色甚遽 可笑

 

 

을미년 3월16일

  그의 사돈(査頓)이호문(李好問)이 또한 붙잡혔다고 했다.

 

⇒ 其査頓李好問 亦爲被拿云

 

 

을미년 3월24일

 

  24일,우수사(右水使,이억기)는 앉을 청당(廳堂,대청)을 개수(改修)하여 세우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헛소리를 많이 하며 보고해 왔다.매우 놀랍다.

 

⇒ 二十四日 右水使以坐廳改立爲惡 多費辭報來 可愕可愕

 

 

을미년 4월3일

 

  4월 초3일,상량(上樑)하였다.도리(道里)를 올렸다.

 

⇒ 四月初三日 上樑 上道里

 

 

을미년 4월13일

 

  13일,대청(大廳)의 공사를 마쳤다.

 

⇒ 十三日 大廳畢

 

 

을미년 4월19일

 

  19일,아침에 납채(納采,혼례예물을 보냄)하는 글을 쓰고 아울러 조카 해()의 합근(合,혼례)용품을 갖추었다.이영남(李英男)의 장계(狀啓)의 회답[回下]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남해 현령(南海縣令)을 효시(梟示)하라는 것이었다.

 

⇒ 十九日 朝書采文幷姪 合之俱 李英男啓回下 下來則南海梟示云

 

 

을미년 4월30일

 

  30일,아침에 원수(元帥)[권율]의 계본(啓本)과 기(奇)이(李)씨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녕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괴이하다.

 

⇒ 日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을미년 7월1일

 

  내일은 부친의 생신이신데,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 明日乃父親辰日 悲戀懷想 不覺涕下

 

 

을미년 8월5일

 

  그는 곧 “안무어사(安撫御史)통훈대부(通訓大夫)행사헌부집의(行司憲府執義)겸지제교(兼知製敎)인 신식(申湜)으로 자(字)가 숙정(叔正)이고,신해생(辛亥生)이며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서울에 산다”고 하였다.

 

⇒ 乃安撫御使通訓大夫 行司憲府執義兼知製敎 申湜字叔正 辛亥生 本高靈居京云

 

 

을미년 8월22일

 

  강을 건너 주인집에 갔다가 그길로 체찰사의 하처(下處,임시숙소)로 가니 먼저 사천현에 와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변명을 하였다.우습다.

 

⇒ 渡江入主人家 因到體察下處 則以先到泗川縣宿 而不爲迎命爲言 可笑

 

 

을미년 8월23일

 

  늦게 진주(晉州)에서 전쟁으로 죽은 장수와 병사의 위령제(慰靈祭)를 지낸다는 전언(傳言)을 듣고, …… 체찰사가 나를 부르며 분부하기를 “먼저 배가 있는 곳에 가서 배를 타고 소비포(所非浦)로 돌아가 정박하라”고 하였다.그래서 선박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

 

⇒ 晩聞晉州戰亡將士慰祭之傳 … 體察招敎曰 先往舡所 乘船回泊于所非浦云 故還到舡泊處 

 

 

을미년 9월12일

 

  충청(忠淸)수사[水使]와 박 조방장(朴助防將)이 함께 왔는데,신 조방장(申助防將)은 병으로 오지 않았다.언경(彦卿,권언경)이 홀로 남아 이야기를 할 때 사립(思立,정사립)에 대하여 언급하는데,우수사[이억기(李億祺)]를 통해 들었다면서,“그(사립)는 인륜강상(人倫綱常)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렸다”는 것이었다.지극히 놀라운 일이다.경수(景受)[이억기]는 어찌하여 이런 무리(無理)한 말을 한 것인가.그 복이 되지 못할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忠淸[水使]及朴助防來共 而申助防病不來 彦卿獨留話之際 言及思立 因聞右水 則亂倫敗常云 極愕極愕 景受何如是發此無理之言耶 其爲非福 可想

 

 

을미년 9월14일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助防將)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

 

⇒ 忠淸水使及兩助防將 同朝食

 

 

을미년 9월25일

 

  25일,새벽 2시경에 배에서 내렸다.이른 아침에 목욕소에 이르러 식사 후 목욕을 하고 배에 올랐다.음식을 조리할 때 시간이 ……

 

⇒ 四更下舡 平明到湯子 食後沐浴上舡 調理之際 日當

 

 

을미년 10월3일

 

  10월 초3일,오늘은 회()의 생일(生日)이다.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추어 주도록 예방(禮房)에 당부하였다

 

⇒ 十月初三日 乃生日 故酒食備給事 [言及][禮]房

 

 

을미년 10월21일

 

  21일,사립(思立,정사립)을 통하여 들으니,“경상수백(慶尙水伯)[권준(權俊)]이 모함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미는데 내키는대로 문서를 작성하고,문서로 적게 되면 오로지 알려지지 않게 했다”고 하였다.매우 놀랍다.권수사(權水使)의 사람됨이 어찌하여 그처럼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가.늦게 미조항(彌助項)첨사(僉使)성윤문(成允文)이 와서 권준 수사(水使)의 형편 없음는 모습을 많이 말했다.

 

⇒ 二十一日 因思立 聞慶水伯飾誣陷辭 倚指成文之 而文之則專不聞之云 可駭可駭 權水之爲人 何如是誣妄耶 晩彌助項僉使成[允(文)]來 多言權水之無狀

 

 

을미년 10월26일

 

  26일,장인의 기일(忌日)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 二十六日 以聘忌不坐

 

 

을미년 10월28일

 

  28일,밤 8시경에 거센 바람과 폭우가 크게 일었다.밤 10시경에 우레가 치고 비가 와서 여름철과 같으니 변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 二十八日初更 狂風驟雨大作 二更雷雨有同夏日 變怪至此

 

 

을미년 11월1일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기망(欺罔)하는 말들은 무엇으로도 형상(形狀)하기 어려우니 천지사이에는 이 원균(元均)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 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을미년 11월4일

 

  4일,직장(直長)이여옥(李汝沃)형 집에서 이보(李莆)의 편지가 오니 비통함을 참지 못했다.곧바로 답서(答書)를 작성하여 보()에게 보냈다.쌀 2곡(斛,10말)과 6장(丈)의 유둔(油芚),4장(丈)의 유둔(油芚)과 잡물(雜物)등의 삼단[三端,양사]을 또한 찾아서 보내도록 분부하였다 …… 우리 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 李直長汝沃兄家簡來 則不勝悲慟 卽修答書 送于處 白粒二斛 六丈油芚 四丈油芚與雜物等三端 亦覓送事敎之 … 我國兵殘力疲 奈如之何

 

 

을미년 11월28일

 

  이 날이 장인의 기일(忌日)이기도 하여 종일토록 나가지 않았다

 

⇒ 是日乃女舅忌 終日不出

 

 

병신년 1월4일

 

  초4일 진영(陣營)에 이르렀다.

 

⇒ 初四日 到陣

 

 

정유년 7월24일 (*노 교수의 해석과는 달리 무술년으로 보아야 할 듯)

 

  7월 24일,복병장(伏兵將)녹도 만호(鹿島萬戶)송여종(宋汝悰)이 전선(戰船)8척을 거두다가 전선 12척을 절이도(折島)에서 만나 6척을 통째로 포획하여 적군의 머리 69급(級)을 베고 용기를 발휘하여[賈勇] 진영에 돌아왔다

 

⇒ 七月二十四日 伏兵將鹿島萬戶宋汝悰 斂戰船八隻 遇賊舡十一隻于折島 全捕六隻 斬首六十九級 賈勇還陣

 

 

무술년 10월7일

 

  초7일,유제독(劉提督)의 차관(差官,파견관)이 도독부(都督府)에 와서 보고하기를,“육군이 잠시 후퇴하여 순천을 다시 다스려 나아가 싸우게 했다”고 하였다.

 

⇒ 初七日 劉提督差官 來告督府曰 陸兵暫退 順天更理進戰云

 

 

 

 

관련기사

-------------------------------------------

 

  • 난중일기 '빠진 32일치' 처음으로 내용 밝혀져
  •  
  • 현충사 소장 '충무공遺事'에서 판독·번역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4.02 02:27 / 수정 : 2008.04.02 08:48
    •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 1598)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쓴 '난중일기(亂中日記)' 중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일기 내용이 새로 밝혀졌다.

      지난 2004년 '난중일기' 원본 13만자(字) 전편(全篇)을 최초로 DB(데이터베이스)화했던 노승석(盧承奭)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는 "2006년부터 문화재청의 의뢰로 현충사에 소장된 고서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사진)'를 판독·번역한 결과 현재 전해지는 '난중일기'에 없는 새로운 일기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이번에 해독된 일기에서는 ▲'선친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1595년 7월 1일) 등 가족에 대한 애틋한 심정 ▲권율(權慄), 원균(元均) 등 다른 장수들과의 갈등관계 ▲관리들의 행태에 대한 한탄 ▲쇠약해진 병사들에 대한 연민 등 충무공의 인간적인 면모와 전란 당시의 상황이 적혀 있다. 또 지금까지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1598년 7월 '절이도(折爾島·현재의 전남 거금도) 해전'에 대한 기록도 있다.
    • 지난 2000년 박혜일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충무공유사'의 일부 원문과 내용을 소개했지만 이번처럼 구체적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노승석 교수는 '충무공유사'의 이 기록이 '난중일기'의 유실된 부분이라고 보는 근거에 대해 "함께 적힌 다른 일기 내용이 '난중일기'와 정확히 일치할 뿐더러 일부 글자는 '이충무공전서'(1795)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내용보다 더 정확한 것으로 보아 현재 전해지지 않는 을미년 일기 초고본 등 당시의 원자료들을 보고 필사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충무공유사'는 17세기 말 충무공과 관련된 자료들을 뽑아 초서로 필사한 것으로 덕수 이씨 종가에서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의 친필 초고본(草稿本)과 함께 전해 내려온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