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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용하
백범(白凡)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화여대 석좌교수·백범학술원장 입력 : 2009.06.16 03:22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오해가 많은 것 같다. 우선 백범을 '좌파'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백범은 독립운동 시기나 광복 후 건국 시기나 시종일관하여 민족주의자였으며 '우파'의 영수였다. 백범이 1948년 4월 남북협상 차 육로로 평양에 갔을 때, 백범이 지나가는 길목에 '김구·이승만 타도'라는 구호가 도처에 다수 남아 있었다. 북한측에서 미처 다 지우지 못한 벽보였다. 그들은 백범을 이승만과 함께 '우파'의 최고 영수라고 본 것이다.
다음은 백범을 '테러리스트'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지휘한 이봉창 의사의 동경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가 '테러'라는 것이다. 이것도 백범에 대한 모독적인 오해이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해를 불법침략하여 점령해버린 '상하이사변'이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 조계에 설립돼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특공대'(특무대 독립군)를 만들어 일본군의 침략에 적극 대항 응전하기로 하고 그 책임을 백범에게 위임했다. 임시정부 '특공대'로 조직된 것이 바로 '한인애국단'이었다.
백범은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로 상하이 점령 일본군사령부 사령관 시라가와 대장 이하 군·정 수뇌 7명을 섬멸한 대전과(大戰果)를 올렸다. 일본 육군성은 시라가와의 사망을 놓고 테러에 의한 '공무 사망'인지, 적군과의 전투에 의한 '전사'인지를 놓고 고민한 끝에 1932년 9월 전사(戰死)로 결정했다. 일본은 윤봉길의 투탄(投彈)을 "만주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편의대원(민간복장을 한 특공대원)의 공격과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시라가와가 임시정부의 특공전투로 전사한 것으로 처리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테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백범이 광복 후 환국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남·북한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먼저 '남북협상'을 해보자고 주장하며 1948년 4월 평양을 다녀온 것을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참으로 큰 오해이다.
백범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대한민국 건국을 추진하고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 증거의 하나가 백범이 주도하여 1941년 11월 반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이다. 이 건국강령에서 호칭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광복 후 서울에서 건국될 '대한민국'이었다. 백범에게 독립운동은 그 자체가 또한 건국운동이었던 것이다.
백범은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통일 대한민국'으로 건국돼야 내전(內戰)을 방지할 수 있지, 남·북한에 각각 2개 정부를 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북에서는 '남진(南進) 통일', 남에서는 '북진(北進) 통일'을 내세우면서 단독정부를 세우면 동족상잔의 참혹한 내전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큰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었다. 백범은 남북협상 때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만일 북한측이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면 이것도 단호히 반대한다고 역설하면서,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정부로 시작하자고 강조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은 통일 대한민국의 건국을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추진한 대한민국 건국지도자이다. 백범은 칠십 평생을 오직 한국 민족과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근대 최고의 애국자이고 민족의 큰 스승이다.
백범의 숨결 깃든 경교장, 복원 시동 걸렸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9.06.16 03:22 / 수정 : 2009.06.16 07:25
아들 김신회장과 자문위원 경교장 둘러보며 당시 회상 올해부터 도면설계 착수
26일은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서거한 지 60주년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자주독립과 건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서거 60주년을 맞아 백범의 삶과 정신을 되돌아보는 특집기획을 마련했다.
"방이 이렇게 좁지 않았는데…. 외양만 그대로지 내부는 전혀 달라졌어. 정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선룸(Sun room)이 있었는데 햇빛도 들어오고 꽃도 놓여 있고, 응접실로 썼다고. 1층 왼쪽에는 국무회의실로 사용하던 큰 방이 있었지."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동 경교장(京橋莊)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87)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과 1946년부터 3년간 백범 선생을 모셨던 김우전(金祐銓·87) 전 광복회장, 당시 서대문경찰서 소속으로 백범 선생을 경호했던 김태헌(金泰憲·86)씨 등이 모였다. 서울시 경교장 복원 자문위원인 김정동(金晶東)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와 도진순(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 등이 경교장 복원을 위해 김신 회장 등의 증언을 듣는 자리였다.
- ▲ 생생한 60년전의 흔적 “저기가 정문이 있던 자리지.” 김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가운데)이 경교장 발코니에 서서 정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오른쪽은 김우전 전 광복회장, 왼쪽은 이남헌 백범김구기념관 사무국장./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경교장 2층 '백범 기념실'에 들른 김신 회장은 60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여기 다다미방은 그대로네. 내가 옹진에 출장 갔다가 돌아와 보니 문 앞에 흰옷 입은 사람들이 꽉 들어찼더라고. 아, 이거 무슨 큰일이 났구나 싶었지. 이 방에 (백범 선생 시신이) 누워계시더라고. 병풍이 (시신) 뒤쪽에 놓여 있었고…."
김신 회장 일행은 경교장 곳곳을 둘러보며 옛 기억을 불러냈다. 김우전 전 광복회장은 "남북협상했을 때야. 지하실에 주방이 있었고, 거기 석탄 내리던 곳에 뒷문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백범 선생이 나가셨지" 하고 회고했다.
김정동 교수와 도진순 교수는 준비해 온 사진자료를 토대로 김신 회장에게 경교장의 옛 모습에 대해 물었다. "아래층에 보일러실이 있었는데 구(具)씨라는 사람이 기름을 땠지." "2층 오른쪽이 내 방이야. 그 앞방이 (백범 비서) 선우진 방이고."
- ▲ 안두희의 총탄에 깨진 경교장 2층 백범선생 집무실의 유리창. 지금도 옛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1938년 금광왕 최창학이 세운 경교장은 1945년 11월 23일 조국에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할 때까지 3년7개월간 숙소 겸 집무실로 이용한 곳이다. 임정요인 환국 후 첫 국무회의가 열렸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떠나는 선생을 지켜봤던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다.
백범 선생 서거 이후 자유중국대사관(1949~50년)과 월남대사관(1956~67년)으로 사용됐고, 1968년 고려병원이 인수하면서 내부가 대폭 개조됐다.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부속 건물로 응급환자 보호자대기실·약국·중앙공급실 등 병원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4월 경교장과 이승만 대통령 사저 이화장, 윤보선 대통령의 안국동 집, 박정희 대통령의 신당동 집 등 역대 국가원수 가옥 6곳의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경교장 소유주인 삼성생명은 지난 4월 서울시에 경교장을 무상임대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시는 올해 말까지 경교장 복원 도면 설계를 끝내고 이르면 내년 3월 내부공사를 시작해 2011년 11월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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