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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민족 시조’ 단군, 언제부터 한반도 '산신의 시조'가 됐을까?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4:15

 

 

‘한민족 시조’ 단군, 언제부터 한반도 '산신의 시조'가 됐을까?
박정원  박정원 님의 블로그 더보기
입력 : 2009.06.15 09:27
 
 

‘한국 산신의 시조인 단군이 언제부터 한반도 시조가 됐을까’라는 의문이 어느 날 문득 들었다. ‘한반도의 시조인 단군이 언제부터 한반도 산신의 시조가 됐을까’라는 역도 마찬가지다. 다 아는 얘기이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지만 막연히 배운 한반도 시조인 단군이 또한 한국 산신의 시조가 돼 있었다. 간과할 수 없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곰곰이 생각을 한번 해보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언제 처음 기술됐나? 왜 단군에 대한 기록이 고려시대 초기에 필요했을까? 이에 대한 의문부터 하나씩 풀어보자.

단군에 대한 기록은 고려 초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나온다. 일연은 무신정변과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스런 사회에 대한 자각을 과거의 전통에 대한 재인식을 강조하면서 새롭게 하고자 했다. 주체적 이념은 불교적, 신화적 세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할 의도였다.

 

삼국유사가 어떤 책인가? 한반도의 신화와 역사를 모아 편찬한 한반도 최초의 역사서이지 않은가. 중국과 만주, 몽고의 영향에서 벗어나 문화적, 정치적으로 독립된 나라를 이루어낸 한민족의 정체성을 보다 확고히 하고, 홍익인간이라는 통치이념과 정신을 퍼트리기 위해서 저술한 역사서라고 볼 수 있다.

 

단군은 누구인가? 하늘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이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블로그 초기에 적었음)에 내려와 곰에서 인간으로 탈바꿈한 웅녀와 결혼한다. 그 아들이 단군이다. 단군은 평양에 도읍지를 정하고 한반도 첫 왕조인 고조선을 세웠다. 이후 수도를 백악산의 아사달로 옮기고 1500년간 통치했다. 그러다 기원전 1122년 중국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으로 파견했고, 단군은 창당경으로 옮겨갔지만 나중 1908세가 되었을 때 산신이 되어 아사달로 돌아와 은둔했다. 이게 우리가 배운 단군신화의 주 내용이다. 그리스 신화보다 더 신화 같은 우리의 이야기다.

 

 

전주의 유명한 사찰인 쌍용사엔 단군 산신과 불상이 같이 모셔져 있다. 그만큼 산신은 불교와  융화하고 있다.

신화 속의 산은 세계의 모든 신이 그러하듯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장소다. 이  지점은 신이 살고 있는 곳이며, 사람들이 신에게 경배를 하는 장소가 된다. 산은 신들이 사는 하늘과 인간이 사는 땅 사이에 존재하며, 두 세계를 연결해 주는 곳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볼 때 산은 세상의 산이 될 수도 있고, 우주적인 산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우주적인 산의 개념이 산신 신앙의 원천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단군이 산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산으로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부분에서는 영원히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된다.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 왕조 이래로 정치적이나 국가적인 위기가 닥쳐오면 한 핏줄로 나눈 한민족의 단결을 유도하는데 단군의 개념과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러면 통일신라시대엔 왜 단군을 적극 활용하지 못했을까? 통일신라시대엔 이미 불교가 너무 융성해 있어 단군을 통해 통치이념을 강조하기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반도를 새롭게 통일한 고려시대 이후로 한반도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조상을 둔 단일 민족을 강조함으로써 국론을 통일시키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렇게 단군은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통치했고, 정신적으로 한반도를 지켜온 수호신으로 한민족의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지금은 단군신화를 포함한 우리의 이야기를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은 재미있는 신화의 얘기로 재구성하고 각색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의 신화고 우리의 산을 지킨 우리의 산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