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얼굴의 비밀, 내가 다벗겨주지"
"미스코리아 결선진출자 128명 신체조건 측정해 봤더니… 非한국적인 것이 美로 받아들여져"
"한국인은 우뇌형… 4명 중 3명은 오른쪽 눈이 더 커"
"12만명 이상 연구… 우주인 이소연씨 얼굴 부기 측정기계도 내가 만들었죠"
미술대학 졸업 후 7년간 낮엔 시신 해부, 밤엔 미술 공부
"모나리자 얼굴의 비밀 내달 도쿄예술大서 발표할 것"
#방앗간 2층
방앗간은 서울 사당동 언덕배기에 있었다. 건물 2층으로 들어서니 컴컴한 공간이 30평이다. 바닥에는 분유 깡통이 수북이 널려 있다. 석고로 꽉 채운 깡통 한가운데 철근(鐵筋)이 박혀 있다. 공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굵기다.
철근 위엔 두상(頭像)이 꽂혀 있다. 완성돼 표정이 살아있는 머리도, 해골(骸骨)도, 뇌(腦) 모양도 있다. 갓 만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 벽 세 곳에 놓인 장식장엔 300개의 '작품'들이 무심한 눈빛으로 낯선 방문객을 쳐다보고 있다.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들이다. 조용진(趙鏞珍·60·전 서울교대 미술과 교수)이 그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저쪽은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저 사람은 6000년 전 통영 앞바다에 살던 분…."
- ▲ 열 살짜리 시골소년에게 서울서 왔다는 여자 선생님이 "다빈치 같은 예술가가 돼라"고 했다. 소년은 자라서 미대 교수가 됐다. 해부학도 배웠고, 뇌 연구도 한다. 수백개의 얼굴이 내려다보는 어둑한 연구실, 모나리자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이 씩 웃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얼굴연구소장'이자 한남대 객원교수 직함을 가진 남자가 두상을 집어왔다.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한 얼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신대(等身大)다. 면(面)으로 된 2차원 그림과 달리 입체는 입술 부근이 찌그러져 있다.
"다음달 17일 도쿄예술대에서 발표할 겁니다. 그곳엔 130년 전부터 미술해부학연구실이 설치돼 있었어요. 우리 미술학도들은 관심도 없지만. 일본미술해부학회 모임에서 밝힐 건 바로 모나리자의 비밀입니다." 그가 쉼 없이 말했다.
"모나리자에 두 가지의 의문이 있었죠? 작품에 대한 객관적 데이터가 없다는 것, 인물상 그 자체가 가진 애매성!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상상으로 창조한 여인이라는 겁니다. 모나리자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 있을 수 없거든요."
형질우선(形質于先)
조용진은 기자를 보자마자 "전 괴짜가 아닌데 왜 찾아오셨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A4용지 한장을 척 내놓았다. 그 위에 자작 사자성어(四字成語) 6개가 적혀 있다. 형질우선은 '개인의 능력은 타고난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밤에 오면 도둑도 오금이 저릴 분위깁니다.
"훔쳐갈 게 뭐 있겠어요. 돈 되는 것도 아닌데."
―사람 머리와 '형질우선'이 무슨 관곕니까.
"교육은 본질적으로 개인을 잘되게 하는 겁니다. 나라도 잘 돼야지만 개인이 더 중요하지요. 그러려면 유전자가 좋아야겠죠? 그 유전자가 뭡니까. 한국인이죠. 그럼 어찌 해야겠어요. 한국인의 기원을 알아야겠죠?"
―한국인의 기원이 뭔데요.
"한민족은 두 부류입니다. 인도네시아 부근 순다열도, 거기가 6만년 전에 육지였어요. 그곳 연중 기온이 섭씨 26도 이상입니다. 26도는 나체로 살 수 있는 임계온돕니다. 거기서 올라온 사람들이 한민족의 일각을 이룹니다. 또 한쪽은 시베리아에서 왔어요."
―시베리아?
"아프리카~중동~중앙아시아를 거쳐 온 사람들입니다. 시베리아부터 흥안령산맥 일대는 1만5000년간 빙하(氷河)에 덮여 있었어요. 그 안에 갇혀 지냈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자꾸 묻지 마시고 그냥 말씀하시죠.
"농사나 과일 채취가 불가능하니 고기를 언 채로 씹거나 말려 먹느라 이빨이 커졌겠지요. 이가 크니 턱도 컸을 테고. 코가 길면 코끝이 커져 동상(凍傷)에 걸리잖아요. 그러니 작지요. 입술은 크면 열(熱) 손실이 많잖아요. 그러니 작지요. 속눈썹 길면 고드름이 달리지요? 그러니 눈썹이 짧지요. 한마디로 사냥에 의존한 건데 그럼 뭐가 발달했겠어요?"
―공간 감각?
"맞습니다! 오른쪽 뇌, 즉 우뇌(右腦)가 발달한 겁니다. 문 기자, 얼굴 좀 들어 절 보세요. 음~ 역시. 이마도 오른쪽이 크고 눈도 오른쪽이 크구먼. 사람은 눈이 두 개지만 보통 한쪽으로 보거든요. 한국인 가운데 4분의 3이 다 그래요. 오른쪽 눈이 큽니다."
―그럼 한민족이 남방, 북방인의 혼합체란 얘기군요.
"북방인의 평균 신장이 176㎝ 정도 됐어요. 남방인들은 남자 158~165㎝, 여자는 148~150㎝였지요. 북방인들이 더 강했지만 힘세다고 전쟁만 할 순 없잖아요. 서로 결혼해 평화를 유지해야지요. 단군신화는 바로 그걸 바탕으로 한 겁니다. 북방인이 남방인의 두 부족, 즉 곰 토템족과 호랑이 토템족 가운데 하날 택했다는 얘깁니다. 더 재미있는 것도 있어요."
―뭡니까.
"인간이 왜 아프리카에서 여기까지 이동했을까? 그 비밀이 바로 '서비후각계'에 있어요. 남자는 성(性) 페로몬, 즉 여자 냄새를 맡으면서 사랑을 느낍니다. 보통 4㎞ 밖에서 맡을 수 있고 북극곰은 100㎞ 밖 냄새도 맡습니다. 남자가 여자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하루 평균 11㎞를 이동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길까요."
―다른 여자 냄새를 맡다 바람이 나겠네요.
"그럼 놔두고 온 여자는? 다른 남자가 또 그 냄새를 맡고 접근하겠죠. 그게 원시 난혼(亂婚)사회의 원인이 됐고 다시 모계 씨족사회로 발전한 겁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그냥 말하시라니까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살잖아요. 서비후각계가 마비될 수밖에 없죠. 그렇지만 지금도 남자를 몇달만 격리시켜 놓으면 후각이 살아납니다."
―지금까지 말한 게 전부 팩트(Fact)인가요?
"제가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연구했어요. 1979년부터 81년까진 미스코리아 결선진출자 128명의 신체조건을 측정한 적도 있어요. 여성단체 반발로 중단하긴 했지만. 그 결과가 뭔 줄 압니까. 한국적이지 않은 얼굴을 아름답다(美)고 생각한 거죠.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 보는 저 두상들이 전부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 ▲ 해부학 배울 땐 사람들이 다 뼈로 보였다. 불상을 봐도 부처의 벗은 몸을 빚은 조각까지 찾아봤다. 뇌 연구를 하니 모든 인간문화가 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은 관심 분야 에 집중하고 또 몰입한다. 그는“나는 괴짜가 아니다”라고 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조용진은 풍양 조씨다. 그의 육촌형이 종손(宗孫)이라고 한다. 조선 말 세도가였던 조씨 가문은 국망(國亡)을 겪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 일부가 충청남도 서천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다섯살 되던 해까지 조용진도 산에 묻혀 지냈다.
―저 벽에 걸린 초상화와 그 옆에 놓인 인물은 동일인인 것 같은데….
"한 문중(門中)의 요청을 받고 제작 중인 조선시대 인물의 얼굴입니다. (머리를 여러 개 들고 와선) 먼저 이렇게 골격을 만들고 다시 눈동자 넣은 두상을 만들고 다음엔 수염 있는 두상을 만듭니다. 다 달라 보이죠?"
―한 번도 본 적 없고 진영(眞影)도 없는 두상을 어찌 과학적이라고 주장합니까.
"여기 대조영, 태씨 문중에서 요청한 겁니다. 우리나라에 태씨가 5000명밖에 없어요. 태씨의 얼굴 특징을 조사했습니다. 얼굴을 500개 부위로 나눠서요. 그 뒤 한국인의 일반적 얼굴 특징을 제외시키면 태씨 고유의 형태가 나오죠. 이래도 비과학적입니까?"
―대조영의 두상을 만들면서 왜 태씨를 조사하나요.
"발해가 멸망한 뒤 대씨가 곳곳으로 끌려갔어요. 망한 왕족은 그냥 살 수 없잖아요. 큰 대(大)자에 점 하나 찍으면 태(太)씨죠. 탤런트 태현실씨, 예전에 장관 지낸 태완선씨 같은 분들이 다 대씨의 후손들입니다. 이왕 보여 드린 김에 최근 만든 지공(指空) 화상도 보여 드릴까?"
―지공이라면 고려시대, 무학대사를 가르쳤다는 고승(高僧)?
"지난주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미술사연구회에서 발표한 내용인데, 지공은 원래 왕족이었어요. 그런데 아리안계와 인도 토착민인 드라비다계의 혼혈이다 보니 성골(聖骨)은 아니고 진골(眞骨)쯤 된 거죠. 그러다 출가해 세상을 떠돌다 우리나라까지 온 겁니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이 출가한 것처럼요. 아리안계와 드라비다계의 특성을 섞으면 이런 모습이 됩니다."
―왜 지공화상은 머리가 깁니까? 뒷부분만 대머리고.
"당시 지공은 삭발을 하지 않았거든요."
―산속에서 살던 서천 시골소년이 지금 선생처럼 변한 데는 사연이 있겠습니다.
"다섯살 때 대처(大處)로 나오면서 삶에 큰 변화가 왔어요. 처음 본 게 미군이 몰던 자동차였습니다. 그 모습이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뇌리에 박혔어요. 축음기 통해 흘러나온 '죽장에 삿갓 쓰고~'라는 노래 가사 알죠? 그것도 머릿속에 통째로 입력된 겁니다."
―본인이 천재라는 얘깁니까.
"초등학교 시절 전 아동화를 그려본 적이 없어요. 아동화라는 게 뭡니까. 얼굴은 동그랗게, 코는 삐죽하게 그리는 거잖아요. 전 처음부터 투시원근법으로 그렸어요. 당시 대회가 많지도 않았지만 서천에서 열린 미술대회란 대회에선 전부 1등을 했습니다."
―어쩌다 그리됐습니까.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배운 언어 정보를 뇌에서 인출합니다. 그 뒤엔 시각적 정보를 뇌에서 빼내지요. 그 분기점이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저는 전(前)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럼 투시원근법 때문에 미술을 전공하게 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어요. 서울에서 4년제 대학 나온 여자 선생님이었어요. 전근 온 아버지 따라 서천에 왔다가 교단에 선 거예요. 그러니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얼마나 창의력이 풍부했겠어요. 그분이 학생들 가정방문할 때마다 절 데리고 다니셨어요. 멀게는 8㎞ 이상을 걸어야 했는데 꼭 이런 말을 해주시는 겁니다. '다빈치 같은 예술가가 되라'고."
―다빈치?
"당시 화가는 극장 간판 그리는 사람으로 인식됐지만 선생님은 '다빈치처럼 되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해부학도 공부해야 한다'고 했어요. 전 해부학이 뭔지 몰랐지만 그때부터 개구리나 염소 잡을 때 유심히 보게 됐지요."
―특이한 소년시절입니다.
"바로 그 해 학원사에 나온 대백과사전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고교 때도 독학으로 해부학을 공부했고요. 1968년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는데 잠깐 (낡은 스케치북을 가져와) 이것 좀 보세요."
부신해진(剖身解眞)
낮에는 시신을 해부하고 밤에는 미술공부하는 세월이 7년째 계속됐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론 홍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는 1981년 군산대 미술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후 몇년 뒤 서울교대 미술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제목이 '인체미술해부', 1968년 11월 16일에 시작해 1969년 1월 6일에 끝냈군요. 밑에 글귀도 있군요. '승리를 지향하는 눈은 결코 곁눈질하지 않는다'라고. 노트에 실제로 그린 그림 수준이 대단합니다.
"대학 1학년 말에 만든 겁니다. 홍대 은사 중에 김원 선생님이 계셨어요. 1912년생인데 오페라단으로 유명한 김자경(金慈璟) 선생의 남편 심형구 선생과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했습니다. 두 분이 하숙생활하며 '나중에 꼭 한국에도 미술학교를 만들자'고 했대요. 두 분이 이화여대 미대를 만들고 교수를 하셨는데 6·25 때문에 사단이 일어난 겁니다."
―북으로 끌려갔나요.
"휴전 후 도강파(渡江派)와 잔류파(殘留派) 사이가 크게 나빠졌어요. 서울이 함락될 때 피란간 분들이 서울에 남은 사람들을 빨갱이처럼 본 겁니다."
―서울에 남았다고 다 그렇게 취급됩니까.
"정부가 서울 사수(死守)를 외쳤기 때문에 그리하면 안 되는데. 김원 선생님은 노모(老母)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었습니다. 여하간 그 일로 이대를 떠나 홍대로 오신 겁니다. 제가 1학년 말에 그 노트를 보여 드리니 '앞으로 내 제자 하게'라고 하시더군요. 미술에선 해부학 공부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제가 2학년 때는 '미술해부학'이란 책을 만들기도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교 때까지 한 해부학 공부를 정통으로 볼 순 없는 거 아닌가요.
"72년도에 졸업했는데 당시 한국일보에 이런 광고가 나왔습니다. 가톨릭의과대에서 해부학 조교를 모집한다는. 당장 응시했어요. 면접 때 가니 교수께서 '자네 몇년이나 할 생각인가'라고 묻더군요. '2년'이라고 우물거리는데 표정이 싹 변하는 것 같아 잽싸게 '5년은 해볼 생각입니다'라고 했어요."
―순발력이 좋아 붙었다는 겁니까.
"그분이 '해부학은 10년은 해야 쉽다, 어렵다 말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7년 동안 해부학 조교를 했습니다."
―첫 해부 때 혹시 토하거나 그러진 않았습니까.
"해부학 조교가 되면 첫 한 달은 골학(骨學)을 배웁니다. 첫 해부를 해본 건 1972년 4월 23일 토요일 오전 10시였어요. 너무 재미있어 불쾌감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미대 출신이 해부학 조교를 했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겠습니다.
"첫 1년간을 살펴보니 매일 60개 이상의 지식을 얻었습니다. 너무 즐거웠어요. 그땐 사람들이 모조리 뼈로 보였어요. 버스 탈 때도 앞에 앉은 사람이 뼈로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친구들이 재잘대면 '오! 저 뼈에서 저런 오묘한 소리가 나다니'하고 감탄했고요. 전 그 친구 뼈를 그려주면서 '너, 앞으로 이렇게 된다'고 했고요."
―풍양 조씨 가문이라면서 집에서 반대하진 않았습니까.
"홍대 가겠다고 하니 아버님께서 이러시더군요. '씨도둑은 못한다'고. 조선 인조 때 조속이란 화가가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 화단의 리더였는데 저희가 그분의 방계입니다."
―보통 미대 나오면 국전(國展) 출품하고 하는데, 생계는 유지했습니까.
"집안이 어렸을 때는 가난했는데 제가 고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아졌어요. 생활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해부학 조교의 월급이 그리 적지도 않았고요."
―흥미는 있었겠지만 여자 친구 사귀는 데 도움이 안됐을 것 같습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요만큼도 없었어요. 홍대 다닐 때 제일 처음 교문을 열고 들어와 제일 늦게 학교를 나갔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요. 도서관에선 서가(書架)로 학생을 안 들여보내는데 전 예외였어요. 워낙 대출을 많이 했거든요. 결혼은 제때 했어요. 아내(고예영·高譽瑛·57)는 고교 교사를 했습니다."
―혹시 전공이?
"생물학입니다. 그래서 절 많이 이해해주죠. 지금은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조용진은 신이 난 것 같았다. 처음엔 '그런 것까지 묻느냐'더니 선반에서 인간의 뇌 모형을 잔뜩 들고 오는 것이었다. 해부로 시작된 강의가 인간 두상, 뇌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포르말린 냄새가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해부를 많이 해보니 인간 몸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하던가요.
"당연히 뇌죠! 이 뇌 보세요. 70대 문맹(文盲) 할아버지의 뇌인데 이 부분이 발달하지 못했어요. 아기 뇌처럼요. 대신 노동과 관련된 부분은 발달했어요. 두 번째 이 뇌는 파평 윤씨 집안에서 나온 미라의 뇌입니다. 친정에서 출산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양반가 여자인데도 교육을 안 받아 문맹이었어요. 이쪽 뇌는 서울의대 서유헌 교수의 뇝니다."
―그 분 살아계신 분 아닙니까?
"뇌 연구한다니 제게 주신 건데 이렇게 풍선에 바람불어 넣은 것처럼 팽팽하잖아요. 비교해보면 앞모습, 그러니까 전두엽이 다르죠? 제가 앞서 교육이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이해가 안 가면 이 뇌를 보여 드릴게요."
―이건 누구의 뇝니까.
"아인슈타인의 뇝니다. 봐요, 천재들은 다 뇌가 이렇게 생겼어요. 보통 뇌에 주름이 많이 잡히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홈 같이 파인 이 줄을 보세요. 실비우스열(Sylvius裂)이라 하는데 아인슈타인이나 서유헌 교수 같은 천재들은 이렇게 가다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문화유뇌론(文化唯腦論)을 주장하는 겁니다."
―문화유뇌론?
"한국인은 북방인 특유의 기질이 많이 남아 대개 우뇌형입니다. 우뇌형으론 노벨 물리학상을 탈 수 없어요. 사람의 모든 문화는 뇌로부터 비롯됐습니다. 전 언어, 미술, 음악, 무용, 스포츠와 뇌의 관계를 밝혀낼 겁니다. 내친김에 이 책도 보여 드릴게요."
―또 뭔가요
"'동양화 읽는 법'이란 책입니다. 동양화엔 이해가지 않는 그림이 많아요. 왜 바닷가에 살지 않는 학(鶴)을 그릴까, 모란에는 나비를 그리지 않을까, 뭐 이런 겁니다. 이 그림엔 고양이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는데 참새들이 가만히 있잖아요. 백로는 꼭 한 마리 아니면 아홉 마리를 그리거든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죠."
―보니까 그렇네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답이 들어 있더군요. 서양화도 마찬가지예요. 이 성모마리아 옆에 아이가 둘이 있는데 그럼 누가 예수일까, 왜 이 여인들은 귀족인데 맨발로 있을까. 거기도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눈은 인간을 연구하면서 생기는 겁니다."
―동양화가를 하면서 인체 해부를 했고 옛 인물의 얼굴을 복원하는가 하면 뇌를 연구하고…. 진짜 다빈치처럼 관심영역이 넓어 보입니다.
"다빈치는 예술가지만 사실 그는 발명가이자 가수로 봐야 합니다."
―발명가이자 가수?
"다빈치가 남긴 메모를 보면 지금 당장 만들어도 될만한 것들이 많잖아요. 저도 어릴 때부터 발명이나 고안을 많이 했어요. 대표적인 게 불상(佛像)계측법과 첫 우주인 이소연씨의 얼굴이 우주 공간에서 얼마나 붓는가를 측정하는 기계였지요."
―'이소연 측정기'는 많이 보도됐는데 불상계측법은 뭔가요. 아니 부처님 상에 이런 모습도 있습니까.
"논문마다 좌상(坐像)인데 다 표기가 다릅니다. 용어통일이 안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불상계측법·1979년)에서 제가 그걸 밝혀냈어요. 부처님 벗은 몸 처음 봤습니까, 마음장상(馬陰藏像)이라고, 다 있는 겁니다. 원래 부처님을 표현하는 법이 다양하거든요."
―발명가는 알겠는데 가수는 뭔가요.
"다빈치가 정작 남긴 그림은 열두 점밖에 안 돼요. 그것도 대개 미완성으로. 생계를 어떻게 이었을까요. 다빈치는 가수였어요. 사실(史實)이지만 당시 가수는 서커스단원처럼 여겨졌기에 전기(傳記)작가들이 안 썼을 뿐입니다. 저도 그래서 다빈치처럼 되려 음악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1988년과 92년에 독창회를 했고 올 10월쯤 회갑기념으로 독주회를 할 겁니다."
―이런 일 하면 돈은 됩니까.
"돈이 되긴 뭐가 돼요. 다 좋아하는 일인데. 이런 게 있어요. 2004년엔가 한국콘텐츠진흥원에 해준 일인데 한국인의 유형을 오십 몇 가지로 나눈 겁니다. 홍길동을 예로 들어볼까요? 홍길동을 만화로 그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 그리면 안 되지요. 홍길동의 고향이 전남 장성이니 그 특성이 있겠지요? 이렇게 팩트를 추려나가면 오십 몇 가지 유형만 가지고도 한국인 몇천만명을 다 만들 수 있게 되지요."
대화가 3시간째를 넘었다. 두 가지에 끝내 대답하지 않던 그가 입을 열었다. 첫째 왜 중·고교 때 기억은 없는가. "전 자폐 비슷했어요. 그러니 한 분야를 파고들었지요. 그런데 시골 살면 자폐가 될 수 없어요. 아이들과 어울리니까."
둘째 그 좋다는 국립대 교수는 왜 그만뒀나. "국립대교수 10년 했으면 됐지요. 얼굴연구소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대학에서 약속을 했다 어겼어요. 그래서 방앗간 빌려 저 혼자 하고 있습니다."
기인(奇人)이 말했다. "앞으로 목표가 세 가집니다. 과학과 예술을 결합한 걸작 남기는 것, 둘째 독일인이 그린 동양인형해부도보(東洋人形解剖圖譜)를 죽기 전에 제 손으로 만드는 것, 셋째 후계자를 기르는 것!" 그와 헤어지며 말해주고 싶었다. '선생 괴짜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