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스크랩] 궁예대왕의 나주정벌 재평가(역사스페셜)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5:08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 - 전남 강진[11] 2008
2011.03.01 검색어표시
선각국사 형미(先覺國師 逈微, ***~***)는 신라말 고려초 가지산문 계통의 선승으로 성은 최씨(崔氏)... 이후 전남 나주지방을 정복한 태조 왕건과 인연을 맺게 되어 철원에 올라갔다가 궁예의 미움을 받게...
궁예대왕의 나주정벌 재평가(역사스페셜)
2011.11.23 검색어표시
최 교수는 비문 내용을 정밀 판독한 결과 10세기 나주 등 전라도 지역을 원정하고 비석의 주인공 선각대사를 태봉국에 데려간 이는 <삼국사기> 등 사서에 전해지는 왕건이 아니라 궁예라는 사실을...

 

  • 여행작가 최복일의 마애불 역사기행(11):강원 철원 금학산 마애불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궁예가 슬픔에 빠진 금학산을 위로하다

  •  

    최복일
    여행사진 작가
    E-mail : sanjo@hanmail.net
    1961년생. 서울대 경영학과와 동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기업에..
철원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운 나라의 수도

철원을 다니다 보면 태봉이라는 간판을 종종 보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철원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운 태봉이라는 나라의 수도였다.

신라 왕족이었던 궁예(?-918)는 태어날 때부터 이가 났다. 게다가 5가 두 번 겹치는 5월 5일에 태어나는 등 불길한 징조라고 해서 왕은 궁예를 죽이려고 했다. 누각에서 던져진 어린 궁예는 유모가 받아서 목숨은 건졌으나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왼쪽 눈이 멀었다. 그리고 멀리 도망친 유모가 그를 키웠다.

신라가 쇠퇴해지면서 지방에서는 무리를 모은 세력들이 강해지고 있었다. 궁예는 죽주(안성)의 기훤 세력과 북원(원주)의 양길 세력 밑에 들어갔다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지역 세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개성의 해상 호족세력인 왕융을 자신의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왕융이 자신의 아들인 왕건(20세)을 추천함으로써 궁예와 왕건의 만남이 이루어졌다(896).

그 후 세력이 커지면서 궁예는 스스로 임금이라 칭하고 수도를 개성에 두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901). 고려라는 이름은 고구려 유민들의 근거지인 개성의 호족들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26세의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후백제를 세운 지(892) 9년이 지난 후였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이미 쇠약해진 기존의 신라(1약)와 새로 세운 후백제, 고려(2강)라는 1약 2강의 후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후 궁예는 나라 이름을 고려에서 마진, 연호는 무태로 바꾸었고(904) 수도도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몇 년이 지난 후 궁예는 다시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연호도 수덕만세로 바꾸었다(911).

철원으로 수도 이전 때 고암산이 아닌 금학산에 궁궐을 세우라

동송읍의 동송초교를 지나면 금학산(金鶴山)이 앞에 우뚝 서 있다. 마치 양쪽 봉우리를 날개 삼아 학이 내려앉는 모습을 닮았다. 마애불은 금학산 중턱에 있다.

 
마애불 전경.
마애불 전경.
 
궁예가 개성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길 때였다. 그는 고암산(북한 소재)과 이곳 금학산 둘 중 어느 곳을 진산으로 해서 궁궐을 지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도선국사는 고암산에 지으면 단명할 것이나 금학산을 진산으로 해서 궁궐을 지으면 국운이 300년 이상 계속될 것이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궁예는 금학산이 아닌 고암산 주변에 궁궐을 세웠다. 이런 결정이 나자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금학산은 몇 년을 울었고 그 결과 이 산에서 난 약초는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는 전설도 전해져 온다.

전설처럼 도선국사의 예언을 무시하고 고암산에 궁궐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궁예의 나라는 왕건에게 넘어갔다. 실제로 초기에 그 당시 민중들이 받드는 미륵불을 이용하여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고 선정을 베풀던 궁예는 나중에 주변 사람들을 불신하고 반대세력을 처형하는 등 광기를 보였다. 결국 자신의 부하였던 왕건(42세)을 중심으로 한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의 세력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났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긴 궁예는 명성산(울음산)에서 사흘을 울었다고 한다. 산야를 헤매다니던 그는 결국 부양(평강)에서 백성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918). 고려를 세우고 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현재 아무도 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DMZ) 안에 태봉의 궁궐터가 있다.

마애불 앞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는 철원평야의 전망은 일품
마애불의 몸체는 큰 바위 면을 잘 다듬어 선으로 그리듯이 새겨 놓았고 머리는 별도의 바위로 만들어서 몸체 위에 올려 놓았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 우뚝 솟은 코는 토속적인 한국인의 얼굴이 아니라 마치 인도 태생의 부처님 얼굴 같다. 그에 비해 몸체에 새겨진 조각 솜씨는 지방 석공의 수준을 못 벗어난 듯하다. 두 손도 그렇고 입고 있는 옷의 표현에서도 형식화되고 세련되지 못했다.

전설에 의하면 고암산에 궁궐을 빼앗겨 울던 금학산을 달래기 위해 궁예가 이곳 바위에 마애불을 새겼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은 어쨌든 전설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마애불 앞에는 마애불이 소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절터가 있다. 그 터에 본체를 잃어버린 두 개의 연꽃 대좌와 석탑 조각들이 있다.

 
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본 5월 중순의 철원평야.
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본 5월 중순의 철원평야.
 
절터 끝에는 높은 절벽이 아찔한 곳에 너럭바위가 있다.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곡창지대인 철원평야의 전망은 가히 일품이다. 이곳 마애불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곳 철원평야의 풍요로움을 계속 지켜달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이 마애불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후삼국 통일의 명분 속에 계속되는 전쟁으로 당시 백성의 삶은 지치고 또, 불안감은 커져만 갔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미래 세계를 기다리는 백성의 미륵불 신앙도 이 마애불에서 볼 수 있는 것 같다.

▶소재지: 강원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 산 142
▶아름다운 마애불을 볼 수 있는 햇빛 좋은 시간대: 정오-오후 1시
▶답사 난이도: 보통(★★★☆☆ 산 입구에서 약 30분 정도 소요)

▶주변 볼거리
- 도피안사: 도피안사(到彼岸寺)는 피안(彼岸 극락세계)에 이르는(到 이를 도) 절이다. 도선국사가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신도 1,500여 명을 데리고 극락세계 같은 이곳에 철불(국보 제63호)을 봉안하고 5층 석탑(보물 제233호)을 세워서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소재지: 강원 철원군 동송읍 도피동길 23).
- 노동당사, 농산물 검사소 등: 도피안사에서 좀 더 북쪽으로 가면 일제 강점기 때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제2금융조합, 농산물 검사소, 얼음 창고 등이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노동당사도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채 남아 있다.

 
노동 당사.
노동 당사.
 
- 백마고지 전적지: 안보관광지로 부근에 백마고지 전적지가 있다. 한국전쟁 중 백마고지에서는 휴전협정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남북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외에 제2땅굴,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누워 있는 철마가 안타까운 월정리역 등도 안보 관광지중의 하나이다.

- 한탄강을 끼고 있는 주변 절경
①고석정: 거대 바위 고석(孤石)과 어우러진 한탄강 절경의 대표적인 곳이다. 조선 명종 때 백정 출신인 의적 임꺽정이 이 바위에 숨어 지냈다고 하여 유명해졌다. 입구에 임꺽정 동상이 있다.
②직탕폭포: 높지는 않지만 강 폭만큼 넓게 폭포가 펼쳐져 한국의 나이아가라폭포로 불린다. 높이는 약 3m, 폭은 80m이다.
③순담계곡: 조선 정조 때 영의정이었던 김관주가 은퇴 후 이곳에서 지냈다. 그는 이곳에 조그만 연못(潭 연못 담)을 만들어 수련의 일종인 순채(蓴 순채 순)를 심고 순담(蓴潭)이라고 했다. 강물과 어우러진 계곡의 암벽, 반짝이는 모래는 한탄강 비경의 백미이다.
④삼부연폭포: 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을 때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는데 이때 바위가 가마솥 모양으로 뚫렸다고 한다. 가마처럼 큰 웅덩이 세 개를 지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가슴이 시원해진다.

▶주변 볼거리와 연계하면 좋을 마애불 여행 1일 추천 프로그램
- 금학산 마애불(정오-오후 1시)→도피안사(하루 중)→직탕폭포(하루 중)→고석정(하루 중)→순담계곡(하루 중)→삼부연폭포(하루 중)

 
찾아가는 길.
찾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