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돌 선우
묵돌 선우(冒頓 單于, 재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 혹은 모돈 선우는 기원전 3세기 말의 흉노의 선우이다. 묵돌이라는 이름은 투르크어의 Bayatur(바야투르, 용감한 자)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목차 |
[편집] 선우가 되기까지
진나라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에 북방 수비를 맡겨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후 진시황이 죽고, 몽염도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죽게 되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된다. 묵돌은 그의 맏아들이다. 이때 두만에게는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두만은 묵돌 대신에 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태자에게 주게 되어 있는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의 대장으로 삼았다. '용감한 자'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묵돌의 지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이에 묵돌은 반란을 도모하였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의 기병을 훈련시켰다. 훈련 동안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적을 향해 활을 쏘면 모두가 그 표적을 향해 활을 쏴야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어기고 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목을 베었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명마를 쏘았다. 몇몇 부하가 따라 쏘기를 주저하기에 목을 벤 후, 이번에는 자신의 연지(부인)를 향해 활을 쏘았다. 이번에도 몇몇 부하가 주저하기에 또 다시 목을 베었다. 마지막으로 사냥터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다. 1만 기병은 한 명도 주저 없이 두만을 향해 활을 쏘았고, 묵돌이 두만을 대신해 선우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기원전 209년)
[편집] 주변 정복
예로부터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돌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돌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돌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돌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2]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돌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돌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돌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편집] 한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202년, 한 고조 유방은 진나라 붕괴 이후 혼란스럽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고조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인 한왕 신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 토벌을 명한다. 하지만 한왕 신은 흉노 토벌이 어렵다 생각하여 화평을 시도했고, 이후 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흉노로 투항해 버렸다.
한왕 신이 투항하자 묵돌은 그의 인도를 받아 대(代)의 땅을 공격해 들어갔고, 현재의 산서성 동쪽의 평성에 이르렀다. 한 고조 역시 대군을 일으켜 이에 맞섰으나, 묵돌은 이를 무찌르고, 한나라 군대를 백등산에 몰아 넣어 7일간 포위하였다. 이후 한 고조는 묵돌의 연지(선우의 왕비)에게 선물을 주어 포위를 풀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후 고조는 유경(劉敬)을 보내 다음의 사항을 약속하였다.
- 한 황실의 여인을 선우의 연지로 바친다.
- 매년 한은 흉노에게 솜, 비단, 술, 쌀 등을 바친다.
- 황제와 선우와의 사이에 형제의 맹약을 맺어 화친한다.[3]
한왕 신 이후에도 노관이 유방을 배신하고 흉노로 들어간 바 있다.
이후 한 고조가 죽고, 효혜제가 즉위하였다. 묵돌은 고조의 왕비인 여태후에게 "나도 독신이고 그대도 독신이니 잘해보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여태후는 크게 노하여 흉노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주변에서 모두 고조의 예를 들어 만류하여 토벌을 취소하였다.
[편집] 월지 토벌과 사망
묵돌 시절 월지는 흉노의 서방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당시 서역 나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우현왕이 한나라와 소규모 전쟁을 벌인 이듬해인 기원전 176년(한나라의 효문제 시대), 묵돌과 효문제가 편지를 교환하였다. 묵돌이 보낸 다음의 편지에는 월지 토벌의 내용이 나타난다.
“ | 지금 작은 관리들이 약속을 깨트렸기 때문에[4] 그 죄를 물어 이번에 우현왕에게 그 벌로써 서쪽으로 월지를 토벌하게 하였소. 다행히 하늘의 가호로 단련된 정예 병사와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쳐부수어 이를 모조리 죽이거나 항복시키고 누란, 오손, 호게 및 그 인접 26개 국을 평정하여 이들을 모두 흉노에 병합하였소. 이리하여 각 유목민족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되었고, 북쪽 지방은 이미 안정을 찾았소. | ” |
— 사마천, 《사기》, 흉노열전 |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묵돌은 월지는 물론, 서역의 여러 나라를 점령하여 북방 유목민족을 하나로 통합했던 것이다. (이후 월지는 대월지와 소월지로 나뉜다.)
위 편지를 받은 효문제는 답장을 통해 우현왕을 책망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며, 선우에게 옷 수십 필을 선물로 주었다. 편지를 교환한 지 얼마 못 되어 묵돌은 죽고, 아들인 계육이 즉위하여 노상 선우라 칭하였다.
[편집] 주석
- ↑ 사와다 이사오 (2007). 《흉노》. 아이필드
- ↑ 사와다 이사오, 앞의 책, p40에 따르면 구탈지는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는 유목민족이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자 각각 수비병을 배치했던 중간지대"이다.
- ↑ 사와다 이사오, 같은 책, p.42
- ↑ 우현왕과 한나라 관리들이 선우와 황제에 보고함 없이 전투를 벌인 일을 뜻함
전 임 두만 선우 |
흉노의 선우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 |
후 임 노상 선우 |
‘흉노’가 국가로서 건국하는 것은 ‘모돈(冒頓)’에 의해서이다. 모돈은 흉노 선우 두만(頭曼)의 태자였다. ‘선우’는 흉노 천자(天子)를 일컫는 말이다. 두만은 월지국에서 새로이 젊은 얀지를 맞아 작은아들을 낳았다. ‘얀지’는 흉노 선우의 부인을 일컫는 말이다. 두만은 새로 맞아들인 얀지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봉하고 싶어서 원래의 태자인 모돈을 죽이고자 한다. 그래서 두만은 모돈을 우선 새로 얻은 부인의 나라인 월지국에 인질로 보낸다. 모돈이 월지국에 인질로 가 있을 때 하루는 갑자기 두만이 월지를 공격하여 모돈을 죽이고자 한다. 모돈은 평소에 잘 보아 두었던 준마를 타고 아버지의 공격을 피하여 본국으로 돌아온다. 두만은 비록 모돈을 죽이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기병 만 명을 주어 모돈이 거느리게 한다.
이때부터 모돈은 수하의 군사들이 자기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도록 훈련을 시킨다. 모돈은 날아가면서 우는 소리를 내는 명적(鳴鏑)이라는 화살을 만들어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부하들로 하여금 앞으로는 이 명적이 날아가는 곳을 향하여 무조건 활을 쏘라고 엄명을 내린다. 만약 명적이 날아가는 곳으로 활을 쏘지 않는 부하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참(斬)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고 전달했다. 하루는 부하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을 때 명적을 날렸으나 그때 그 명적이 가는 곳으로 활을 쏘지 않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모돈은 가차 없이 그 자리에서 그 부하를 죽였다. 이렇게 부하를 훈련시키다가, 하루는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향하여 명적을 날렸다. 그러자 부하들 가운데서 감히 모돈의 애마를 향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모돈은 그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목을 베어 버렸다. 또 하루는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돈은 자기 부인을 향하여 명적을 쏘았다. 그러자 부하들 가운데는 설마 하면서 감히 활을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모돈은 이때도 역시 그 자리에서 명적이 가는 곳으로 활을 쏘지 않은 부하들을 가차 없이 모두 죽여 버렸다. 그렇게 얼마가 지난 후에 모돈은 아버지 두만 선우를 따라 같이 사냥을 나갔다. 모돈은 갑자기 명적을 선우가 타고 있는 말을 향하여 쏘았다. 그러자 부하들은 일제히 선우의 말을 향하여 화살을 날렸다. 그제서야 모돈은 이제는 이 부하들을 믿고 거사를 치를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모돈은 부하들을 자기 말에 철저히 복종하도록 훈련을 시켰다.
아버지 선우의 말을 쏜 후 얼마가 지나 역시 아버지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모돈은 명적을 뽑아 들고는 갑자기 두만 선우를 향하여 그 명적을 쏘았다. 과연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화살을 두만 선우 쪽으로 쏘아 두만 선우를 죽였다. 모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모와 이복동생을 위시하여 자기를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고는 스스로 자립하여 흉노 선우가 되었다. |
소위 말하는 ‘천독항재(天毒降災)’는 이 역사적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에 동호(東胡)가 강성하였다. 모돈이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동호가, 사신을 보내 모돈에게 두만 선우가 타던 천리마를 갖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불가하다고 간언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물이므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모돈은 “서로 이웃해 있는 나라가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천리마를 동호에게 내주었다.
얼마 후에 동호는 모돈이 자기들을 무서워하는 줄로 알고 다시 사람을 보내 선우의 부인인 얀지 중에서 한 명을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모돈은 좌우를 보고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은 화를 내면서 동호가 무례하다고 당장 공격해 버리자고 말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모돈은 “서로 나라를 이웃해 있으면서 어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고는, 사랑하는 부인 한 명을 동호에게 보내 주었다.
동호는 더욱 교만해져서 흉노의 서쪽을 침범하였다.
이때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버려진 황무지가 천여 리에 걸쳐 있었다. 두 나라는 변방에 각기 초소를 세워 두었다. 동호는 다시 사람을 보내 흉노가 경비하고 있는 수비초소 밖의 황무지는 흉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땅이니 동호가 그곳을 차지하고 싶다고 땅을 내줄 것을 청했다. 이번에도 역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몇몇 신하가 그 땅은 어차피 황무지니까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모돈은 크게 화를 내면서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째서 땅을 동호에게 줘도 좋다는 것이냐?”라고 말하고는, 땅을 줘도 좋다는 부하들을 모조리 그 자리에서 참수(斬首)해 버렸다.
그러고는 바로 말을 타고는 전국에 동원 명령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서 후퇴하는 자는 즉시 처단하겠다는 말을 전하고는 바로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그간 모돈이 매번 동호의 청을 들어 줬기 때문에 흉노를 우습게 보아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모돈은 그 왕을 죽이고 백성을 사로잡았으며 가축을 모두 빼앗았다. 동호를 파하고 돌아와서는 모던은 군대를 정비해 월지를 격파하여 그 영토를 병합하고, 남으로는 누번(樓煩) 왕, 하남(河南)에 있는 백양(白羊) 왕의 영토를 수중에 거두었다. 이때는 한(漢)의 유방과 초(楚)의 항우가 전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이 혼란기를 틈타 흉노 모돈은 진(秦)의 몽염장군에게 빼앗겼던 흉노 옛 땅을 모조리 수복했다.
모돈의 군대는 조나(朝那)와 부시(膚施)에까지 이르렀으며, 드디어 연(燕)과 대(代)를 침범하였다. 이렇게 강성하게 된 흉노는 공현(控弦)의 군사 30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ⅰ) 이상의 한자 발음들을 근거로 읽으면 ‘고구려(高句驪,高句麗)’는 ‘감구지(kama-kuji, kawa-kuji)’로 읽었을 것이다. 지금의 한글로는 ‘가마구지’가 된다. 현재는 이것을 ‘가마우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어로는 ‘가마오디’ 또는 가마오지를 뜻한다. ‘가마구지’는 물새인데 어부가 이 새를 훈련시켜 목에 줄을 감아 놓고 강에 보내면 물고기를 잡지만 목의 줄 때문에 삼키지를 못한체 주인에게 돌아온다. 어부는 잡아온 물고기를 빼낸다는 것. ⅱ) 이상의 고증에서 ‘가마구지’는 ‘고구려(高句驪)’의 독법인 것을 알았다. 또한 그것은 ‘가마귀’이며 ‘삼족오(三足烏)’인 것이다. ‘까마귀 오(烏)’자가 지금은 화부(火部) 즉 발이 네 개인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설문고본고(設文古本考)』에 의하면, “『용감수감(龍龕手鑑)』에 이르기를 『설문(設文)』 및 『옥편(玉篇)』, 『절운(切韻)』 등에는 모두 삼점(三點)으로 태양 가운데 있는 삼족오(三足烏)를 형상한 것이라 한다.”고 했다. ‘가마구지(高句驪)’는 흉노 시조(始祖)이면서 태양신(太陽神)이다. 삼족오는 태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ⅲ) 여기가지의 고찰에서 우리는 흉노 시조 모돈은 여자라는 것과, 그는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여 자기 친아버지를 죽이고, 온 가족과 대신들을 도륙(屠戮) 내고 자립하여 선우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모돈이 아니라 모두(旄頭)였다.
또 모든 학자가 이들 삼한(三韓)의 국명을 아무 근거 없이, 그리고 어느 하나 확실한 증거 없이 모두 반도 남부에서 찾고 있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지금 중국에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백제 땅에 실존하는 국명(國名)이 적어도 한 개가 있다. 『수경상수주』에는 상수(湘水)가 영현(酃縣)을 지나 상남현의 동쪽 등을 거치는데, 이 부분에서 『십삼주지』가 인용되고 있다. ‘일화수(日華水)’와 ‘일화산(日華山)’에 관한 것이다. 마한(馬韓)의 한 국명에 보이는 ‘일화(日華)’가 여기의 마한에 있는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국명 ‘한국(韓國)’을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역사상 우리나라는 한번도 ‘한(韓)’이라는 국명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삼한’은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남부에 있었던 것이다. 또 정작 한국에는 없는 ‘한강(韓江)’이 앞서 말한 신라현지(新羅縣地)였던 복건성의 장정현에서 남하하여 광동성의 징해(澄海)에서 바다로 유입되고 있다. 우리가 ‘한국(韓國)’이라는 국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 말기에 일본의 입김이 증대되어 고종(高宗)을 황제로 격상시키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로 바꾸면서다. 여기에는 그들의 오랜 음모가 숨어 있다. 명분은 ‘한국(韓國)’이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 자율권(自律權)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을 그들의 세력권에 편입시켜 궁극적으로 합병을 하겠다는 의도다. 그들의ㅣ 이런 흉계는 역사의 왜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삼한이 반도에 있었다는 이론도 일본이 개발한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기자(箕子)’라는 이름만 들어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그들이 보는 조선사(朝鮮史)는 삼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모든 조선은 설화(說話)쯤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중국에서 왕씨를 비롯하여 이씨, 선우씨 등 많은 역사적 인물이 확인되고 있다. 또 기자(箕子)의 ‘홍범구주(洪範九疇)’사상은 청나라 말엽까지 국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청나라 말의 고위 관료 공자진(龔自珍)은 “중국이 우(禹)와 기자(箕子) 이래 식화(食貨)를 똑같이 중하게 여겨 왔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의 ‘삼종결정의’를 논하고 있다. 또 그의 시에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 있는데, 그 주(注)에 1812년에 조선이 글을 한 편 올렸는데 그 내용에 고구려의 세계(世系)에 관해 틀린 것이 있어 지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이 가지고 있던 우리 역사가 틀린 것이다. |
12. 모돈(冒頓)의 신조선(新朝鮮)침범(侵犯)과
한(漢)나라 정벌(征伐)
BC 198年 신조선왕은 부여 별종으로 불리는 대 부여국 북막추장 선비(鮮卑)가 정녕 불복하고 월씨후(月氏候)를 공격하고 흉노가 이를 지원하니 신조선王이 월씨후(月氏候)를 지원(支援)하여 선비를 토벌(討伐)하고 이어서 흉노를 토벌(討伐)코저 하니 흉노王 선우(單于) 頭蔓이 감히 조선(朝鮮)과 항전(抗戰)할 수 없음으로 월후에게 태자(太子) 모돈을 볼모로 보내고 사죄하니 화평(和平)을 허락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월후는 볼모로 와 있는 흉노의 태자 모돈이 비상(非常)한 인물(人物)임을 보고 두렵게 생각하였다. 한편 흉노왕은 미녀(美女) 알씨 소생자를 심히 사랑하여 후계자로 하고자 장자(長子)인 태자(太子)모돈을 죽음으로 몰기 위하여 조선국 월씨를 다시 공격하였다.
월후는 흉노왕의 배신에 대노(大怒)하여 볼모인 태자 모돈을 죽이려고 하니 모돈은 꾀를 써서 월씨의 좋은 말을 훔쳐 달아났다. 흉노는 태자가 돌아온 것을 보고 다시 태자의 말과 그 처를 활로 쏘아 죽게 하고 태자 모돈에게도 활을 쏘아 죽이려 하니 그 활을 돌려 그의 계모와 그 소생인 이복동생 들 그리고 그를 죽이려 하는 아비 두만까지 전부 쏘아 사살하고 스스로 왕위(王位)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조 선왕은 모돈에게 사자를 보내서 모돈의 천리마(千里馬)를 상납하라 하였다. 모돈이 추장 회의를 열고 의견을 들으니 부하장상들이 모두 거절하고 싸우자 하였다.
그러나 모돈은 말하였다.
"지금 조선이 강성하여 싸워서 이기기는 극히 어려운 형편이니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한갓 명마 한 필이 대수로울 것 없다."하고 기꺼이 말을 헌납하였다.
얼마 후 조선의 북막후 월씨(月氏)는 모돈의 처첩 중에 미색(美色)이 뛰어난 려인(麗人)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여인(女人)을 바치라 하였다.
모돈은 좌우(左右)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한 신하가 다시
"알씨(閼氏)(王의 비빈)를 바치라 하니 어찌할 수 없다 하였다.
군신이 일제히 분노하여 말하기를
"무도한 오랑캐를 공격해야 한다."고 규탄하였다.
모돈이 말하였다.
"이웃나라와의 우호(友好)를 위하여는 어찌 한낱 여자(女子)를 아낄 것인가"하고 사랑하는 여인(女人)을 헌납하였다.
모돈은 내심(內心) 분노하고 장차 원수를 갚기 위하여 군비 확장에 전력(全力) 하였다. 얼마 후 조선의 북막후 월씨(月氏)는 점점 교만하여 다시 사자를 보내어 흉노와 조선 사이 서로 비워 놓은 공지 천리(千里)땅을 조선이 점령하겠다. 고하였다. 이에 모돈은 대노(大怒)하여
":영토는 나라의 근본이라 어찌 양도할 가부냐?"하고 양보하고 화친하자는 자(者)는 목을 베고 마상(馬上)에서 월씨(月氏)를 치는데 참전하지 아니하고 뒤에 남는 자(者)는 모두 참(斬)한다 고하였다. 고구려(高句麗) 건국과 같은 시기이다.
군령(軍令)을 내리고 삼십만(三十萬) 보기(步騎) 대병(大兵)으로 삼(三)군을 호령하여 일제히 요동으로 진격하니 신조선은 모돈을 가볍게 보고 그가 감히 조선에 도전하지 못할 줄 알고 지난날 여러 차례 흉노는 조선을 침입하였다가 패하고 상당 기간 순종하였은 즉 안심하고 있다가 불시에 침공하니 1차로 하북의 월후가 패하여 전초 방위선이 무너지니 신조선이 갑자기 징집한 병력은 십만(十萬)에 불과하여 요하변에서 방어하다가 또다시 패배하였다. 모돈은 이에 신조 선왕이 멀리 달아났으니 깊이 추격하다가는 계교에 빠질까 위험하기도 하고 신조선이 재기하여 다시 공격해 올 힘은 당분간 없을 것임에 요서로 철수하였다. 번조선은 원군을 보낼 겨를도 없이 신조선의 십만(十萬)병력은 섬멸 당하고 무수한 치중을 잃었다. 그리하여 하북 영토를 모두 빼앗기고 요동으로 후퇴하였다. 때에 한나라 유방은 항우와 싸우느라 하남지역을 비우고 있었다. 그 틈에 모돈은 조선고지(故地)와 하남지역 한나라 국경 지역까지 진출하여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삼십만(三十萬) 대군(大軍)을 이끌고 한군(漢軍)을 공격하여 마읍(馬邑)에서 한나라 대장(大將) 한신(韓信)을 포위하였다. 한신은 여러 차례 흉노에게 사자를 보내여 화친을 청하였으나 의심하여 화의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한편 한신은 한王 유방에게 구원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여도 한王도 한신을 의심하여 구원해 주지 아니하니 한신은 진퇴양난(進退兩難)으로 마읍에서 흉노 모돈에게 항복하였다. 모돈은 한신을 항복 받고 한왕 유방을 토벌하기 위하여 낙양으로 향하였다. 한王도 모돈과 항전하기 위하여 군사 삼십이만(三十二萬)명을 유방왕이 친히 이끌고 북(北)으로 향하여 평주(大同府)에서 모돈군과 만났다. 모돈은 동방의 강국 신조선을 격파하고 자신을 얻어 사십만(四十萬) 정병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흉노 모돈은 남으로 태원(太原)을 공격하고 진양(晋陽)에 이르렀다. 흉노와 한신은 진양에서 한군을 공격하였다. 유방의 한군은 삼십이만(三十二萬)의 병력으로 반격해서 들어갔다. 이때 한나라 대장(大將) 유경(劉敬)이 돌아와서 한왕 유방에게 고하였다. 양국 싸움은 조금 쉬고 동정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전면에 늙은 노약者가 배치되고 아군이 진격하면 후퇴하고 복병을 해 두었다가 기습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하니 지금 흉노를 쳐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이때 한나라 군사는 이미 진격을 재촉하고 있는 中이라 유방은 이 말을 듣고 대노(大怒)하여 유경을 가리켜 제나라 포로노(奴)가 입을 잘 놀려 벼슬을 얻고서 무슨 그따위 망언을 하느냐 하며 마구 치고 가둔 후 한王은 군사를 재촉하여 일거에 흉노를 섬멸코자 평성에 진출하였다. 흉노는 싸우며 달아나다가 한군이 미쳐 평성에 집결하기 전에 모돈은 사십만(四十萬) 보기병으로 한王군을 포위하여 생포하였다.
(冒頓從精兵四十萬騎圍帝於白登 『鑑易』)
한王을 따라 종군해 온 진평(陳平)이 한王을 구하는 비책을 세웠다. 간첩에게 보화를 많이 주어 한씨(斡氏)(모돈의 王비)에게 갖다 바치도록 파견하였다. 모돈의 王비가 좋은 선물을 받고 모돈에게 말하였다. 우리와 한나라가 지금 서로 어려움이 없는 터에 지금 우리가 한王을 잡고 너른 영토를 점령하였으니 우리가 점령한 영토는 목축을 할 만한 초지가 아니니 가져도 쓸모 없는 땅이고 한王은 놓아주지 아니하면 그를 대신할 王을 세울 것인즉 차라리 한王을 놓아주고 쓸모 없는 땅도 지키는데 힘만 들 것이오니 돌려주고 앞으로 우리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다짐을 받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흉노 모돈은 돌려보낼 것을 허락을 하고 그 대신 매년 상당한 세패(조공)을 받고 한王의 공주(公主)를 모돈선우(單于)의 첩실로 헌납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돌아온 한王 유방은 가두어 두었던 유경을 풀어 주고 가로되 내가 공(公)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평성에서 욕을 보았다 하고 유경을 이천호(二千戶)의 관내후(管內候)에 봉(封)하고 號를 建信候라 하였다. (유경은 동이족으로서 포로된 자임) 주(註). 중국 사기는 한王이 포위되어 칠(七)일 동안 굶고 있다가 흉노가 길을 열어 주어 탈출했다고 쓰여 있을 뿐 자세한 포로 생활의 내용이 없음. 한王이 공주(公主)를 흉노에게 보내려고 하니 呂后(한王의 王비)가 밤낮으로 울면서 첩이 태자(太子)와 단 하나의 공주(公主)가 있는데 어째 공주(公主)를 흉노에게 버릴 것이오 하며 슬퍼함에 보내지 못하였다.
(帝曰善欲遣長公主呂后月夜泣曰妾唯太子一女奈何棄之匈奴上竟不能遣 『通鑑』)
한王이 고민하고 있다가 다음해 겨울 집안 처녀를 공주(公主)라고 속여 보냈다 라고 사기에 기록하였으나 그후 공주에 관한 기록으로는 흉노에 시집간 공주(公主)가 생남하여 외손자가 외가(外家)를 잘 섬겼다는 것뿐 공주에 관하여는 일체 기록이 없고 한나라 여후(呂后)의 주위 친 인척 기록이 허다한데 비하여 보면 다른 여자(女子)를 보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하여 신광이 말하기를 건신후(유경)는 모돈 잔적은 인의(仁義)로 설득할 수 없는 오랑캐라 하고 한편으로 혼인하여 사돈을 맺게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아니한 부당한 행동이었다 라고 하였다. 신조선은 그릇된 판단으로 모돈을 대하다가 상곡 우북평 일대의 영토를 도리어 잃고 모돈의 요서 침입을 막는데 급급하였다. 이번 전역으로 하남북주(河南北州)의 36개 고조선 영토가 흉노와 한의 영토로 돌아갔다.
한나라도 오래 전부터 흉노를 동(東)에서 위압하든 조선이 뜻밖에도 흉노에게 도리어 패하니 크게 당황하였다. 흉노 모돈은 오랜 세월 동(東)역의 강대국 조선 제국의 위력에 눌려 오다가 신조선을 패퇴시켜 의기양양하여 중원의 한고조를 공격하여 항복 받고 교만이 넘쳤다. 흉노 단두(王)모돈은 한고조가 죽은 후 여태후에게 사자를 보냈다. 사자가 여태후에게 전한 친서를 펼쳐 보고 여태후는 군신들 앞에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다가 사자를 보고 호통쳤다. "이 자를 끌어내어 목을 베라 하였다."
그 친서의 사연인즉
"지금은 과부가 된 당신이나 내가 다같이 인생의 즐거움이 없으니 서로간에 같이 즐길 수 있도록 오락을 갖자 하였다." 즉 연애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번희가 아뢰었다.
"흉노 단우가 이같이 무례하니 원컨대 십만(十萬)병을 주시면 흉노속에 들어가 모조리 정벌하겠습니다."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제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번희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하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가로되,
"지난날 고조 폐하께서 평성에서 흉노와 싸우다가 포위되었을 적에 번희는 상장군으로서 한병 삼십이만(三十二萬)병을 이끌고 흉노와 싸워도 고조 폐하를 구하지 못하고 황공하게도 고조 폐하께서 항복하여 풀려나고 그들의 침공을 막을 수 없어서 년간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헌납하는 수치를 감당하고 있는 터에 무수히 죽어 간 상이의 애처로운 노래 소리가 끊기지 아니한 형편에 단지 十萬명의 병사로 흉노에 가서 횡행한다는 망언은 교만에 넘친 행동이옵니다. 흉노는 지금 강성하여 그들이 섬기는 조선 제국도 패퇴시켰습니다. 오랑캐는 좋은 말로도 그들을 좋아하게 하는데는 부족하옵고 나쁜 말은 노여움을 사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하였다.
여후가 실정을 모르는바 아니라 그가 애지중지하는 공주를 단우에게 바치고 철석간장이 녹는 아픔도 견뎌 온 처지이라 중신들 보기 민망하여 한번 은 노여움을 보였을 뿐이었다. 이에 여후는 사자에게 좋은 말로 손사하고 차마를 내어 사자를 돌아가게 하면서 여러 가지 여건이 여가를 즐길 수 없어 미안하다는 답서를 써서 답변사를 함께 파견하였다.
단우 모돈도 사자를 보내어 고맙다는 답서와 함께 좋은 말을 선사하고 단우 모돈도 드디어 화친하고 여후 초청을 강요하지 아니하였다.
신조선도 이번 전쟁으로 피해 막대하나 한(漢)나라도 이번 전쟁으로 사람과 물자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고 하북산동의 조선국과의 충돌도 일체 피하였으며 그 지역의 동이족 내란에도 간여하지 아니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 서적에 西土지역의 大小전쟁을 내란과 漢寇의 구분을 하지 않고 기록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에 의하여 멸망한 연은 유방의 한나라가 진나라를 대신하여 영유한바 되었다.
진나라를 멸한 후 한(漢)중왕 유방과 초(楚) 패왕(覇王) 항우는 중원의 주인공 자리를 두고 七年간의 혈전을 벌여 유방이 승리를 거두어 한나라의 황제로 등장하였다.
흉노 시조 모돈은 "고구려" | 고구려 | 2004/09/23 12:49 |
http://blog.naver.com/kokuryo41/40006134135 | |
흉노 시조는 모돈이다. 흉노선우 두만의 태자다. 후에 두만이 사랑하는 얀지(부인)에게서 아들을 낳으니 이 아들을 태자로 삼고 싶었다. 두만은 모돈을 월지국에 인질로 보내 놓고는 월지국을 급습하여 태자 모돈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모돈은 선마를 골라 타고 도망하여 돌아 온다. 모돈이 장성했음으로 만기를 거느리게 됐다. 모돈은 나르면서 우는 소리가 나는 명적이란 화살을 만들어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쏜 명적을 따라 쏘지 않는 자는 참할 것이다"라는 엄명을 내렸다. 사냥을 나가 명적을 따라 쏘지 않는 자는 바로 참했다. 하루는 모돈이 자기가 아끼는 선마를 명적으로 쏘았다. 좌우가 혹시나 할때 따라 쏘지 않은 자를 모두 참했다. 하루는 모돈이 자기의 사랑하는 처를 명적으로 쏘았다. 좌우가 모두 두려워 했을때 따라 쏘지 않은 자를 역시 참했다. 또 하루는 사냥을 나가 자기 아버지의 말을 명적으로 쏘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두가 따라서 명적이 날아가는 쪽으로 활을 쏘았다. 모돈은 그의 부하들 모두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날 그의 아버지 두만 선우의 사냥에 따라 나섰다. 어느 순간 모돈은 명적으로 자기 아버지 두만을 쏘았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명적이 날아간 곳을 향해 활을 쏘아 선우 두만을 죽인다. 모돈은 그 후모와 동생 및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두 죽였다. 모돈은 자립하여 선우가 되었다. 이 모돈이 흉노 시조다. 그의 무용담은 [사기]와 [한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모돈은 여자다. 서한의 초연수가 쓴 [역림]에는 "명적의 재난에 북으로 도망한 음호가 국호를 흉노라 하고 자립하여 존선우가 되었다"고 한다. 음호란 여자 흉노란 뜻이다. [역림]에서는 여러 곳에서 모돈이 여자란 것을 언급하고 있다. 모돈의 "모"자는 토끼를 뜻하는 "묘"다. 모돈의 독법은 "모두"이다. 이 모두는 토끼자리의 별을 뜻한다. 즉 현토라는 뜻이다. 하늘의 토끼다. 묘년은 단알의 해이다. [역림]에는 "단알의 해에 두 임금이 나란히 서다"라고 했다. 초연수는 전한시대 사람이니까 임금니라면 진시황과 한 고조 둘중의 한사람익다. 한고조 원년은 요년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시황 원년이다. B.C. 246 을묘년이다. "고구려"라는 것도 여자다. 주몽의 어머니며, 세발 가마귀 즉 삼족오란 뜻이다. 태양신이다. 주몽이 개국하면서 도읍을 정한 곳이 "해본" 즉 삼족오의 거처며, 현토 또는 원토다. 졸본으로 잘못 알려진 이 해본은 "일본"이란 뜻의 순순 우리 말이다. 광개토대왕 훈적비의 홀본이다. 태양신을 뜻하는 고구려와 토끼를 뜻하는 모돈이 같다는 것은 [역림]에 "묘일의 정기"라 하여 양자를 동일시 한다. 또 "외로운 삼족오"라 하여 모돈의 끔찍한 참사를 언급하고 있다. 고구려 그리고 이어 지는 고려에서는 이 삼족오가 절대적인 신이다. 일본은 이 역사를 훔쳐 간 것이다. 주몽이 해본에 건국한 것은 B.C. 209년이다. 이 건국연대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주몽의 고구려건국은 한고조 보다 3년이 앞선다. 그리고 한고조를 황제로 등극시킨 것이 바로 주몽이다. 당태종이후 지금현재 까지 중국의 역사조작은 고구려가 한나라 이후로 만드는 것이다. 고구려가 한나라 때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당서]부터 천명된 방침이다. 이것을 우기는 것이 중국의 역사왜곡이 바탕을 두는 전제다. 고구려가 중국의 황제들에게 칭신한 봉건국가 였다는 것이다. 본인은 [광개토대왕 훈적비와 고구려]라는 책에서 이 연도를 잘못 계산햇다. 고구려는 여인의 이름이며 고구려에서는 항상 이 시조신이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한서]를 풀이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수나라 초까지 중국의 남북 제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외의 영토는 물론 말 할 것도 없다. 지금의 몽골, 위굴, 인도에 있던 계림, 그리고 중앙 아세아까지의 영토들이다. 이 고구려라는 여인인 삼족오는 [사기][한서]등에서 "천마"로 묘사 되어 있다. 고구려는 모두 천마종인 것이다. "악와 용종"이라고도 한다. 수당 교체기에 반란을 일어 켰다 요절한 이밀은 "고구려"의 후예다. 문장으로 더 유명한 위징이 쓴 [이밀묘지명]에는 그가 "악와 용종"이라 했다. 이 "악와"라는 말은 [사기]악서와 [한서]예악지에서 천마가를 노래하면서 등장하는 단어다. 따라서 "천마"는 결코 말을 노래 한 것일 수가 없다. 그래서 고구려의 "려"나 구려의 "려"가 모두 마부의 한자들이다. 이 마부의 자들은 용맹, 무용등을 의미한다. 주몽도 인도의 계림을 개척한 위대한 정복자 였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의 어머니도 지략이 풍부하며 병법에 능한 출중한 정복자였다. 후에 모든 고구려인은 그들의 관에 가마귀 깃털을 항상 꽂음으로서 이 "고구려" 또는 "모돈"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삼족오 설화는 고구려의 것이다. 또한 흉노가 이 삼족오의 후예들이다. 주몽과는 계통을 달리 하면서 흉노는 독자적 세격을 구축했다. [구당서]에서는 [사기],[한서],[후한서], [삼국지], [진춘추]를 고구려가 가진 사서라 한다. [진춘추]는 남아 있지 않다. 앞의 고증에서 잠간 본 바와 같이 고구려가 가진 이들 사서는 곧 고구려의 역사책이다. 예악지, 천문지, 여복지, 식회지, 수휼지등등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상당부분 복원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읽느냐의 방법논이다. 고구려가 "특히 애지중지햿다"는 [문선]도 고구려의 역사다. 고구려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손의 국가였다. 따라서 그 통치는 밖으로 들어나지 않는 형태로 이루어 졌다.
송동건 저. [광개토대왕 훈적비와 고구려]. 신아사. 2004년 8월 발행. |
2011/01/07 00:00
http://blog.naver.com/kimyto/50102393610
흉노 이야기를 이어오면서 두루두루 외곽으로부터 맴돌고 돌아, 이제 그들의 역사를 요약하는 대목까지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나서 몇몇 저술들을 접하게 되는데, 딱히 잘 정리된 흉노의 역사서는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이런저런 저술들과 자료들을 읽은 것을 메모하고, 그것을 하나의 그림으로 압축한 게 위 그림입니다. 우선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나 설명을 해야겠네요~ 시간은 좌에서 우로 흐릅니다. 연도를 숫자로 표시했는데, BC는 숫자에 마이너스를 붙였습니다.
긴 띠의 아래위는 동아시아의 남쪽과 북방입니다. 아래는 <장성 이남의 중원문명을 왕조로 구분>해서 표시했습니다. 위는 북방 유목민의 무대를 역시 왕조 내지 정권 단위로 구분했으나, <흉노>와 그 다음 주인공인 <선비>만 눈에 보이게 표시했고, 그 외의 북방민족들은 과감하게 생략했습니다. 수당 시대의 돌궐도 있었느나 그들의 공간이 빈칸으로만 있습니다.
북방기행의 첫 타자로 나서서 동아시아 역사를 열어가기 시작한 <흉노의 흐름>은 연두색입니다. 흉노 다음 강타자로서 남북통합의 대의를 실현한 <새로운 시대이념의 주체였던 선비>는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수.당 역시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음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부분의 흰색은 <북방과 통합하지 않은 상태의 중원문명>입니다.
표 하단의 어설픈 타원으로 몇 단계 구분한 것은 흉노 역사의 흐름을 남북 관계에 주안점을 두고 저 나름대로 구분한 것입니다. 아울러 표 위로 빠져나간 것은, 흉노의 일파가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서 4세기경 로마제국 앞에 나타난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실선이 아니라 점선으로 표시한 것은 훈족이 흉노족인가 하는 것에 이견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흉노의 역사 요약을 시작해보지요~
흉노가 언제 동아시아의 북방에 자리잡게 됐는지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다만, 고고학 연구성과를 종합한 학자들의 설명을 되살려보면, 동아시아 남방에는 남방 계통의 선사시대 문명이 있었고, 북방의 문명은 중앙아시아와 동일한 계통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 고대에 <남방>과 <북방>이 있었노라~ 이런 말입니다.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각각 커다란 문명과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남방>은 전국시대와 진나라의 장성 수축 이후에는 <장성 이남>이란 말과 혼용하고 있습니다. 남방이란 말의 뉘앙스가 자칫 중원을 빼고, 장강의 남쪽 지역이란 느낌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추가할 것은 이런 견해입니다. 어떤 문화가 어디서 어디로 전파되었는지로 파악하는 <전파론 모델>과, 각각의 지역에서 각각 문명이 진화했다는 <진화론 모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문명이 인접한 문명과 끊임없이 접변하면서 발전해왔다는 <전파+진화 = 교류발전형 모델>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류발전형 모델은 앞의 두 모델을 합친 것으로서, 훨씬 합리적인 견해라고 보입니다.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어느 문명이 어느 것의 선조인지 아닌지를 주장하는 것보다는,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된 문명들이 입자운동처럼 상하좌우로 교류와 갈등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옳다 싶습니다.
이 북방기행에서도, 동아시아에 남방과 북방이 있었다는 것고, 어느 것이 더 오래되고 누가 더 우위에 있었다는 단세포적인 유치한 우열론에 빠지지 말고, 관찰자가 관찰하는 기분으로 남북의 교류와 갈등과 접변이란 관점에서 흉노 역사를 음미하자는 뜻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는 어떤 영감들이 떠오르거나 잡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하~ 또 길어진 사족~)
<흉노는 누구인가>-----------------------------------------------------------------------------------------
아무튼 유럽의 동부에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몽골고원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동아시아 북방 초원>에서 <유목과 수렵>으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람이란 뜻으로 불렀습니다. 그 말은 슝이나 훈에 가까운 발음이었습니다.
중원의 사람들은, 그 말을 자기들 문자로 고약스럽게도 匈奴라 기록했고, 그 글자의 현대 발음은 xiongnu이고, 그것을 우리 식으로 읽거나 쓰면 흉노입니다. 나중에 그들을 만나게 된 유럽 사람들은, 비슷한 발음의 hun으로 기록을 남겼고, 우리 식으로 읽고 쓰면 훈입니다.
중원의 기록에는 중원에 하.은.주 세 왕조가 이어지는 동안 북쪽에 살았던 그 사람들을, 은나라 시대에는 귀방(鬼方)이라고 했고, 주나라에서는 험윤(猃狁)이라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춘추시대에 융적(戎狄)이라고 기록된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이 직계로 동일 혈통 동일 민족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거시적으로 보면 동일하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BC 3세기부터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흉노가 이들의 후손이라고 보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만, 귀방이 험윤이나 융적이란 어휘의 사용례에 따라서는 <다소간의 학술적 왈가왈부>가 있을 수 있다고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상고시대부터 이 <북방초원>에 살아왔고, 나름대로의 <유목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생물학적 혈연구분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는 것도 좋겠지만, 유목문화라는 기본틀을 갖고 넓은 지역에 넓게 퍼져 살던 사람들이 서로간에 <교류와 융합>을 반복하면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가 바로 흉노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흉노의 역사>-------------------------------------------------------------------------------------------
중원의 하.은주와 춘추시대
중원에서 하.은.주시대를 거쳐 춘추시대까지, 남방의 농경문화와 북방의 유목문화는 그렇게 많은 교류나 갈등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초원은 척박했고,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농경문화와의 교류가 필요했으나, 농경문화 측에서는 유목문화와 교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갈등의 불씨는 점차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흉노와 중원의 갈등이 누적되다 <전국시대>
전국시대에 들어서서 중원의 북변에 있었던 <진.조.한>과 <흉노> 사이에 갈등이 본격화된 것 같습니다. 전국시대 이 세 나라는 북으로 성벽을 쌓아 흉노의 남하를 저지했습니다. 단지 전쟁이 있었을 뿐이 아니라, 수세적이고 폐쇄적인 성벽을 쌓은 것만 보더라도 흉노와의 갈등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고, 이 세나라게에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흉노의 일방적인 침입과 약탈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나라에서는 무령왕(재위 BC329~299년)이 군대를 개혁해서 유목민의 옷과 유목민의 전술을 익혀서 거꾸로 흉노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흉노에 대한 공격에 국력을 기울인 조나라는, 흉노로부터 자신을 지킨 게 아니라 진나라를 지켜준 결과가 됐고, 그렇게 힘을 낭비하지 않은 진나라가 조나라와 다른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했습니다.
중원이 흉노를 공격하다 <진시황의 북벌 전쟁과 장성 구축>
전국 6국을 흡수해서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은, 몽염(蒙恬)이란 장군을 시켜서 흉노를 공격해서 북으로 밀어내고 오르도스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이때 흉노의 수장 곧 선우(單于)는 두만(頭曼)이었습니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BC221년)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창설했고, 그 이전과 변함없던 유목국가 흉노로서는 진시황의 기세에 맞대항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승리 후에 진시황이 취한 조치는, 전국시대 세 나라의 성벽들을 정비해서 소위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남북이 장성을 기준으로 갈라선 게 됐습니다. 장성을 쌓아서 갈라진 게 아니라, 남북의 갈등이 있었기에 장성을 쌓은 게 됐습니다만, 이 물리적인 장성은 그 이후 오래도록, 동아시아 남북의 국경선이자 심리적 장벽이자 문명의 경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흉노에 초원의 영웅 묵돌선우가 등장하다
남방에서 진시황이 BC 221년 중원을 통일하여 시대이념을 새로 만들고, BC 202년 유방이 진나라를 한나라로 바꿔치기를 해서 진.한(秦.漢)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중원이 몸부림을 치면서 진시황과 한고조라는 영웅을 앞세워 통일을 하는 동안, 북방에서는 BC 209년, 흉노의 최고의 영웅 묵돌선우가 등장합니다.
살부 구데타를 감행하며 솟아난 묵돌 선우
묵돌선우는 흉노에게는 전무후무한 최고 최대의 영웅입니다. 그의 등장부터가 야생의 늑대와 같은 일화를 품고 있으니 ....... 일단 오늘 포스팅에서는 묵돌의 등장까지만 하기로 하지요.
<오른쪽 사진은 묵돌의 흉상>
묵돌은 한자로 冒頓이라 씁니다. 혹시 모돈이라고 읽는 게 아니냐 하기도 하는데, 이 사람의 이름으로 쓸 경우에는 묵돌이라 읽습니다. 이 묵돌은 투르크어로 용감한 사람이라는 바야투르(bayatur)를 한자음으로 쓴 것이랍니다.
묵돌은 선대 선우인 두만(頭曼 재위기간 ??~BC 209))의 장남입니다. 두만에게는 장남인 묵돌 이외에 애첩이 낳은 아들이 또 있었습니다. 당시에 흉노에게서는 장자상속 제도가 완벽하게 굳어진 것 같지는 않았고, 당시 묵돌을 다음 선우라고, 즉 황태자 내지 그런 포지션에 공식적으로 지명하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애첩의 베게밑 송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송사에 넘어간 두만은, 애첩의 아들을 차기 선우로 내세울 생각을 하게 됐고, 자신의 장남을 제거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때마침 흉노의 서쪽에 있는 월지(月氏)라는 나라(현재의 감숙성 일대)에 볼모로 보낼 일이 생기자 장남을 보냅니다. 볼모란, 두 나라 사이가 나빠지면 제일 먼저 모가지가 뎅거덩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흉노와 월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묵돌은 꼼짝없이 죽을 판이었으나, 그 혼란과 위험 속에서 월지의 명마를 훔쳐타고 탈출해서 자기 땅으로 돌아갑니다. 용감한 자라는 뜻이 이름을 얻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당시엔 주변의 나라에 아들을 볼모로 보내는 일이 적지 않았기는 했습니다만 ........ 애첩의 속삭임에 넘어가서 이러는 걸 보면 남자 내지 수컷이란 존재는 참~~ 어리석습니다. 애첩이 사랑스러우면 애첩을 사랑해주는 것으로 거기까지만 했어야지, 그것을 나랏일에까지 끌어들여서, 다른 아들을 사지에 몰아넣다니 ........ 비극은 이렇게 자라는 것이지요.
두만은 살아돌아온 장남 묵돌에게 기병 1만명을 주면서 <좌현왕>에 봉합니다. 이것은 선우 다음의 2인자 자리로서, 자신의 군대도 있고, 통치하는 지역도 따로 있지요. 흉노를 포함한 북방에서는, 남쪽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왼쪽, 즉 해뜨는 쪽을 신성시합니다. 그래서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것이지요. 흉노의 좌현왕도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자리입니다.
아버지는 그를 좌현왕에 봉함으로써 그의 귀환을 맞아들였지만, 아버지의 속내를 다 알게 된 묵돌은 구데타를 준비합니다. 묵돌이 살아돌아왔고 그에게 기병 1만명을 내주고 좌현왕에 봉했을 때, 두만 선우는 묵돌을 후계자로 정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불가능입니다.
묵돌 ....... 살부(殺父) 구데타를 꾸밉니다. 우선 그는 자신의 기병들이 자신의 말에 절대 복종하도록 훈련시킵니다. 자신이 어딘가를 향해 쐬앵~ 소리가 나는 특별한 화살을 쏘면 무조건 같은 표적을 향해 화살을 퍼부으라고 명령합니다. 어길 경우에는?? 처형이지요~
묵돌이 쏘겠다는 화살은 명적(鳴鏑) 또는 효시(嚆矢)라고 합니다. 우는 소리를 내는 화살로서, 전쟁에서 전투를 개시할 때 가장 먼저 쏘는 신호용 화살입니다. 이 화살이 날아가면 다른 궁수들이 모두 활을 쏘게 되는 첫번째 화살이란 뜻이어서, "무엇무엇의 효시"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지요.
아무튼, 묵돌이 사냥을 나가서 이 화살을 쐈는데, 자신이 쏜 표적을 향해 화살을 날리지 않은 군사가 있어 즉결처분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아끼는 말을 향해서 쏘는데, 이때에도 주저주저~ 하면서 쏘지 않은 병사가 있어 처형해버렸습니다. 살벌하지요 ........
그 다음은, 끔찍하게도 ...... 자신의 아내를 향해 활을 날립니다. 또 몇몇 군사는 멈칫하다가 그만 묵돌에게 가차없이 처형당합니다. 그 다음엔 아버지가 아끼는 말을 향해 활을 날립니다. 그제서야 한명도 빠짐없이 화살을 그 말에 날려댔습니다. 치밀하고 무서운 아들이지요 ....... 게다가 마누라까지.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수렵을 나갔습니다. 쐐애앵~~~~ 묵돌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아버지를 향해 명적을 날립니다. 그러자 묵돌의 부하들이 유목제국 흉노의 현직 황제를 향해 거침없이 화살비를 쏟아부었습니다 .......
그렇게 해서 부자지간의 비극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아버지 측근과 계모와 이복동생의 몰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애첩의 베게밑 송사에 꼴깍 넘어가서 장남을 위험에 빠드리는 어리석은 인간도 남자지만, 권력쟁투에서는 부자지간의 연도 매몰차게 끊어버리는 비정한 인간 역시 남자입니다. 역사 이야기를 떠나서 ........ 남자란 동물, 수컷이란 놈들 참 ....... 속 없지요? 단세포 동물들입니다 .......
이 이야기는 중원의 사람들이 해놓은 기록이라 어디까지 실제 있었던 일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자지간의 갈등구조는 분명히 있었고, 선우의 승계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흉노의 영웅을 패륜으로 깍아내리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그걸 논하거나 논증할 일은 아니라 이 기록 그대로 좀더 음미하자면 .......
살부 구데타를 벌였다고 해서 묵돌을 꼭 그렇게 비난만 할 건 아닙니다. 묵돌의 입장에서는 권력이나 야망 이전에 <생사여부>의 문제였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최고권력자의 아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권력의 승계에 개입된 채로 태어난 운명입니다. 삐끗하면 죽음이 덮치는 위험한 라인을 걷는 인생인 겁니다.
황제의 여자들이 황제의 총애를 무기 삼아서 밤마다 베게밑 송사를 통해 황태자가 어쩌구, 후계자가 저쩌구 하는 것은, 황제의 아들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새파란 여자가 애첩이라고 들러붙어서 자신의 목숨까지 들었다 놨다 까불어댔으니 ........
이런 예는 숱하게 많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고조 유방 역시 애첩의 아들을 황태자로 앉히려다가 그만둔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자신의 사후에 참혹한 사건이 이어집니다. 동시대의 유사한 사건이니 조금 들여다 보면 .......
유방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인 본부인 이외에 전장에도 데리고 다니던 애첩이 있었습니다. 이 애첩은 척부인이라고 하는데, 베게밑 송사를 해댑니다. 요지는 간단하죠, 자신이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하자는 것입니다.
실제 유방은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적극 반대하는 바람에 없엇던 일로 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 본부인이 강력하게 저항했겠지요. 특히 처갓집 덕분에 출세한 유방으로서는 이 벽을 뛰어넘기 힘들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훗날 유방이 죽고나자, 황태자가 어린 탓에 유방의 본부인인 여태후(呂太后, 왼쪽 그림)가 섭정을 합니다. 권력을 탈취당할 뻔했던 여태후가 권력을 통째로 틀어쥔 것입니다. 여태후가 황제로 취임한 건 아니지만, 역사에서는 실질적인 황제로 인정받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권력을 틀어쥐자마자,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흔들어댔던 그 새파란 애첩과 애첩의 아들을 참혹하게 죽여버립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방의 출세를 너무나 훌륭하게 뒷받침 했던 <사상 최고의 아내>였던 여태후는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여자>로만 기억되게 되지요.
이 이야기도 참~ 재미있는 정말~ 끔찍한 스토리인데, 시간 나시면 여기를 클릭해보세요, 여태후의 무자비표 혹독급 잔인별곡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시 흉노로 돌아와서, 묵돌의 살부 구데타는, 한나라의 기록에서는 패륜이니 뭐니 하는 험담이 잔뜩 들러붙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북방 콤플렉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묵돌의 살부 구데타는, 묵돌 자신의 생사여부의 문제 이외에, 다른 요인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치열한 내부경쟁>입니다.
흉노는, 선우의 장남이 선우자리를 이어가는 것 이외에 동생이 이어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형제상속의 전통이 있는 탓이지요, 앞에 이야기했던 형사취수와 같은 수계혼도 그런 맥락입니다. 부족연맹 성격이 강한 유목국가이기 때문에 혈통과 무관하게, 각 부족의 족장들이 돌아가면서 선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원의 진.한은 그래도 장자상속이 권력 승계제도로 굳어졌지만, 흉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게지요. 당시 흉노를 유목제국이라고는 하지만, 정치문화로서는 아직도 부족연맹적 성격이 많이 남아 있던 흉노에서, 차기 선우의 선출에 대해서는 현직 선우 이외에 팔부대인(八部大人, 흉노의 귀족)의 발언권도 꽤 높았습니다.
북방에서는, 차기 선우의 후보들을 드러내놓고 있다가, 새로 선우를 선출하게 되면 그들 가운데 누가 적합한지 상당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야 합니다. 선우의 장남마저도 차기 선우를 놓고 <내부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우의 동생이나 아들들은 각지에 왕으로 봉해져서 전공도 세우고, 일정 지역을 지방자치 비슷하게 통치하면서, 대인들의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이런 내부경쟁은, 내분이나 내란으로 터져버리기도 하지만, 내부의 에너지를 결집해서 강렬하게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묵돌은 너무나 심한 내부경쟁을 통해 선우에 올랐습니다. 이복동생과의 경쟁이 아니라, 그 이복동생을 후원하는 현직 선우인 아버지와도 목숨을 걸고 경쟁한 셈입니다.
이런 치열하고 끔찍한 내부경쟁과 갈등을 밟고 솟아났기 때문에, 그가 발산하는 에너지는 더욱 강렬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내부경쟁 시스템은 이후의 북방민족들, 거란 몽골 여진.만주로 계속 이어집니다. 결코 황제나 대칸의 장남이라고 해서 손 안대고 코풀어서는 영웅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거란의 아율아보기는 자신의 친동생까지 가담한 반개혁 세력과의 내부경쟁으로 인해 내란까지 벌였습니다. 아율아보기는 그 내전을 힘겹게 이겨내고는, 누구도 처벌하지 않고 말없이 눈물만 흘렸답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모아서 거란을 <중국사 최초의 정복국가>로 굳게 세웠습니다.
칭기스칸은 몽골부의 통일을 위해 거의 평생을 바쳐서 경쟁을 했습니다. 내부 경쟁을 통해 완벽하게 몽골부를 통일하자, 그 다음엔 바로 세계제국으로 뻗어나가는 괴력의 에너지를 뿜어냈습니다.
그의 아들들도 손자들도, 자동뽕으로 대칸 자리를 먹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능력과 업적으로 대칸의 자격을 객관적으로 증명한 자만이 대칸으로 오를 수 있었지요. 이런 시스템이 허술해지는 순간 몽골제국도 힘을 잃어갔습니다 .......
묵돌이 아버지에 대해서 살부 구데타를 일으킨 것을 <내부경쟁>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나, 그런 구데타 속에서 <내부경쟁의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내부경쟁이란 손 안대고 코 푸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권력은 누가준다고 생기는 건 아닌가 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손 안대고 코 푸는 것에 대해 스스로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황태자조차도 공짜로 먹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살아서 경쟁이 치열한, 그래도 다 합쳐봐도 대륙에 비해서는 소수인 민족으로 살아가는 운명이라면, 결코 단순유치하게 <소수파의 억지 단결>만을 외칠 일이 아닙니다.
소수파라 하더라도 내부에서부터 치열하게 경쟁하고, 경쟁을 통해 능력을 끌어올리고, 그 경쟁의 결과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게 순리가 아닐까요. 그 내부 경쟁과정이 피곤하다 하더라도, 그건 우리의 운명이라는 걸, 흉노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들의 역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보상이 없으면 의욕이 강해지지 않고, 경쟁이 없으면 능력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과 무관하게, 경쟁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미 북방의 역사가 잘 보여준 것입니다.
묵돌의 등장 스토리가 너무 길어졌네요. 묵돌 선우가 흉노제국의 선우로서, 무슨 일을 어떻게 벌였는지는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가겠습니다.
2011/01/06 00:00
http://blog.naver.com/kimyto/50102427079
토털 사커와 같은, 목숨 걸고 죽을 때까지 뛰어야 하는 전쟁, 흉노의 전쟁 이야기를 조금더 하려고 합니다.
흉노의 전술은 몇 가지 특징적인 게 있습니다. 적을 유인해서 내가 유리한 장소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함정>이지요. 구덩이를 판 것만이 함정이 아닙니다. 지형상의 유리함이 있어서 위에서 아래로 화살을 퍼붓기 쉽다든지, 우리 군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덮치면 순식간에 아군이 숫적으로 크게 우세해지는 곳이 바로 함정입니다.
이런 유인작전은 평소에 사냥하는 것 그대로입니다. 사냥에선 야생동물 몰래 살금살금 접근한 다음, 미리 정해진 곳으로 몰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동물들이 한쪽 방향으로 밀려나오면 화살로 죽이든가, 올가미로 사로잡는 것입니다. 이게 함정입니다.
BC 200년 가을, 한나라 고조 유방이 32만 대군을 끌고 북벌을 나섰을 때, 흉노의 묵돌선우가 그를 유인해서 옭아맨 것도 이런 유인작전입니다.
묵돌선우는, 전쟁 초기에는 잘 훈련된 소규모 부대를 보내서 싸우다 후퇴하기를 반복하면서 적을 유인합니다. 이건 아무나 하는 어설픈 연기가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특공대가 하는 일입니다.
적이 완벽하게 속아서 함정을 의식하지 못한 채 끌어들여야 합니다. 이에 속으면, 적은 승리의 착각에 빠져 적극적으로 추격하지요. 유방이 이런 작전에 딱 걸린 것입니다.
도망가던 선발대가 휘익~ 돌아서서 맞짱을 팍~!~ 떠오는 순간, 앞길이 덜컥 막히고 나니 이미 포위된 것이지요. 결국 유방은 백등산에서 포위되고 항복 수준의 화친조약을 맺게 됩니다.
아참, 중원의 기록 사기(史記)에는, 유방이 32만 대군을 끌고 갔는데, 묵돌 선우가 40만 대군으로 포위했다고 나옵니다. 한서(漢書)에는 묵돌 선우의 군대가 30만 대군이라고 돼 있습니다만, 이것은 유방의 패배를 조금이라도 분식하느라 흉노 군대의 숫자를 왕창 부풀린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흉노는 애시당초 이런 대규모 군대를 차출할 만한 인구가 없었습니다. 한나라 조정에서 북방정책을 논할 때, "흉노는 우리나라 하나의 군(郡)에도 못 미치는 인구지만~ 어쩌구저쩌구"라고 돼 있는데, 어떻게 유방보다 많은 군대를 끌고 나왔겠습니까. 기록자가 이왕 패배한 거, 쪽이라도 덜 팔리게 분칠을 덕지덕지 한 것이지요 ....... 잠시 뱀다리로 빠졌네요 ㅋㅋㅋ
BC 99년 한나라에서 명장이라고 침 튀기며 칭송해 마지 않던 이릉(李陵) 역시, 흉노의 전형적인 유인책에 휘말려 병졸은 거의 몰살당한 채 항복을 하고 말았죠.
흉노의 또하나의 전술은 <전격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격전이란 적이 상상할 수 없는 지점을, 적이 예상치 못하는 빠른 기동력으로 찌르고 들어가 박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전에서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했던 폴란드 침공이 전격전의 전형이라고 합니다. 전차부대와 공수부대 그리고 공군의 연합작전이었지요.
역사에서는 칭기스칸의 몽골군이 처음 선보인 것으로 평가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북방의 유목민에게는 몸에 배인 전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동력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전술이니까요.
또하나 흉노에게나 북방유목민에게 <한가로운 전쟁규칙 같은 건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 초반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 이외에는 싸그리 죽여버린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진행중일 때에는 어설프게 포로를 잡아서, 포로를 관리하느라고 자신의 전력을 손실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공포의 최루탄입니다. 빨리 투항해야 목숨이라도 건진다는 공포의 바이러스를 공중에다 삐라처럼 뿌리는 겁니다. 물론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고 난 다음에는, 상대방의 생존자들을 노예로 잡아가기는 합니다.
또 하나 흉노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의 하나는 <빠르게 철수>해 버리는 것입니다. 불리할 것 같으면 미련없이 후퇴합니다. 승산이 없는 게임은 하지 않는 것 같은 마인드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철수해 버리면 한나라 군대는 하염없이 쫓아갈 수도 없습니다.
한나라는 흉노에게 밀려서 남으로 밀리면, 밀리는 만큼의 농토와 인구와 물산을 상실하지만, 흉노는 초원으로 흩어져 버리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나라 입장에서는 점령해야 쓸모없는 땅이요, 사람도 없고, 챙겨갈 전리품도 없습니다. 새떼가 총성에 놀라 흩어지면 빈 공간만 터엉~ 남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나라 군대가 잠시 승리에 도취해서 북으로 밀고 깊이 들어가면 결국 전부 패하고 맙니다. 그것은 보급부대가 따라가지 않으면 안되는 군대라서 그렇습니다. 이것도 한나라와 흉노의 전략적 입지가 다른 것이지요.
흉노가 강했던 또하나의 요소는 <인재 등용에서 개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목민들에게는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전형적인 예가 한나라 장수들이 투항하면 기꺼이 받아주었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았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충고와 자문을 잘 활용했습니다.
한나라 환관 출신으로, 흉노의 선우에게 바쳐진 공주를 호송하여 흉노로 갔던 중항열(中行說)도 그렇습니다. 그는 흉노로 가기 싫었으나 조정에서 강제로 보내자, 아예 망명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흉노의 입장에서 한나라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책략을 많이 제시합니다.
왼쪽 사진은 "선우화친(單于和親)"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기와
그가 충고한 것 가운데 하나는, 한나라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려면 그들이 보내오는 맛있는 음식이나 호화로운 비단옷에 유혹되지 말고, 기마민족으로서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조신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원해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투항했다가 다시 돌아온 자입니다. 그는 한나라에 있었을 때 한나라 군대의 장단점과 전략을 잘 파악할 위치에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나라와의 전선을 북쪽으로 넓게 펼치도록 했습니다. 결국 한나라 군대는 보급선이 충분치 못해 몽골 고원에 들어와 헤매게 만든 것이지요.
약간 다른 경우지만, 장건이 한무제의 명을 받고 서역으로 가다가 흉노에게 잡힙니다. 그런 장건에게 흉노는 새 장가도 들게 해줍니다. 장건은 아들까지 낳고 한참을 살다가 도망갔지요. 적은 적이지만 귀순하거나 포로로 잡은 다음에는 꽤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곤 합니다. 유목민은 상당히 개방적입니다. 농경문화가 갖는 자폐성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전국칠웅을 하나로 통일한 진(秦)나라에서도 발견됩니다. 춘추전국 시대에 진나라는 서쪽 변방의 오랑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이나 의례에 치우치지 않고, 특히 외지의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하는데, 진나라의 핵심 요직은 거의 외지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인물들을 객경(客卿)이라고 합니다.
전국시대에 인재등용의 창구로서, 제나라의 학궁(學宮)과 진나라의 수도 함양 두 군데가 유명했답니다. 이 함양이 바로 객경의 산실이었습니다. 타국 사람이라고 물리치지 않았고, 한번 등용하면 의심치 않았고, 객경이 정권을 좌지우지해도 염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뭔가 음미할 만하지요~ 나중 이야기입니다만, 진나라는 통일 이후에 오히려 인재등용에서 실패한 것 같습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바로 전형적인 인재핍박이었으니 말입니다.
흉노에 기여한 한나라 지식인이나 무장의 이야기도 인재등용의 개방성이란 측면에서 우리가 음미해야 할 구석이 있습니다. 단, 중국 쪽 자료에는 흉노인들이 좀 모자랐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하기 위해 이런 인재를 과장하는 경향이 느껴지니, 그런 점을 유의해서 음미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아무튼 흉노의 인재등용을 보면서,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노골적으로 외지인 외국인들을 배격하는 것 ....... 건강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앞날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겠지만, 남의 손이 우리의 운명을 만질 수 있게 허용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흉노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두루두루 중구난방, 이것저것 짚어봤습니다만 ....... 이제는 흉노의 수백년 역사를 종합해서 요약할까 합니다만, 이 지루한 이야기는 이 북방기행 흉노편의 마무리가 되는 셈인데,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갑니다~ ^^
2011/01/08 00:00
http://blog.naver.com/kimyto/50102478595
이미 한번 올린 연대기 그림을 다시 한번 올립니다. 이번 포스팅은 위 그림 하단의 동그라미로 <흉노 우위 화친>이라고 쓰인 시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흉노에서는 묵돌선우, 그 다음 노상선우의 시대였고, 한나라에서는 한고조 유방에서부터, 한무제가 즉위한 다음 40여년간의 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입니다.
묵돌선우는 BC209년 선우자리에 오릅니다. 진나라가 망한 게 BC206년이니까, 이때는 아직 진나라 시절이었습니다. 묵돌은 일단 진시황에게 빼앗긴 자신들의 목초지이자 고향과 다름없는 오르도스 지역을 욕심내지 않고 몽골 고원의 동서쪽을 정리합니다.
지명이나 방향에 헷갈리 수 있으니 지도 설명으로 하지요. 오른쪽 지도는 한나라(청색선)와 흉노(적색선)의 강역입니다. 중국쪽 자료입니다.
일단 대륙의 남쪽에 동그라미를 치고 물음표를 네 개 달아놓은 것은, 이 시대에 저 지역은 한나라의 강역으로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 지역에는 특별한 역사의 주체세력이 없는 지역이니까 그냥 내 것이라고 표시한 느낌입니다. 이 지역은 실제로 삼국시대 손권의 오나라가 본격적으로 개발해서 중원에 편입한 지역이지요.
한나라든 흉노든, 두 나라 모두 가장 넓었을 때의 강역을 표시한 것이라 두 나라의 강역이 중복되는 지역이 있습니다. 북중국에 중복의 띠가 형성되네요. 남북간의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지요.
흉노의 동쪽 끝 바깥에는 부여(扶餘)가 동그라미로 표시돼 있습니다. 이 중국지도에는 부여의 부를 父라고 표기하네요.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자 그 후예들이 다시 세운 나라입니다.
흉노의 동부에는 선비(鮮卑)가 동그라미로 표시돼 있습니다. 그 동그라미 위에 괄호 안에는 동호(東胡)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선비와 동호는 서만주 내지 요동지방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선비와 동호는 엄격하게 구별하기는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주쪽 북방민족들이라 하면 될듯.
그리고 흉노의 왼쪽 제일 큰 동그라미는 지금의 신장성입니다. 우리가 서역(西域)이라고 하는 바로 그 지역입니다.
지도에서 흉노의 奴자 아래, 한나라 강역으로는 돌기처럼 튀어나와 흉노의 강역과 겹치는 곳은 지금의 감숙성입니다. 서역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저 길목은 티벳고원과 몽골고원 사이에 낀 것으로서 한나라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들인 지역입니다. 당시에 이곳은 월지(月氏, 여기서 氏는 씨가 아니라 지라고 읽습니다~)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흉노의 북부에는 정령(丁靈)이라고 있습니다. 몽골 고원의 북부, 바이칼호 근처라고 보면 됩니다.
흉노 강역 남부에 우, 선우, 좌라고 표시된 것은 흉노의 황제인 선우가 중앙의 <선우정>에 자리를 잡고, 좌우에 2,3인자를 왕으로 봉한 것입니다. 각각 <좌현왕> <우현왕>이라고 합니다. 좌현왕은 서만주에 가깝고, 우현왕의 지역은 지금의 오르도스 지역과 중복되거나 접하는 위치입니다.
지도에서 대륙의 남부를 제외한 게 당시의 한나라였고, 흉노의 강역은 표시된 그대로이고, 흉노의 인구가 적기는 했지만 그 지배강역으로 보면 <광대한 유목제국>을 세운 것입니다. 잘 감상해보세요 ....... 저 초원에 끓어오르는 유목민의 함성과 그 에너지를 ........
여기에 표시된 흉노의 최대 강역이 바로 묵돌 선우의 업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는 선우에 오르고나서 일단 동쪽으로 밀고 갑니다. 동호를 정벌해서 복속시키지요. 대략 요서지역과 서부 만주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고조선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 다음 서역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신이 볼모로 잡혀갔기도 했던 월지도 때려잡습니다. 그리고 서역의 소국, 오아시스를 거점으로 한 작은 나라들도 평정해서 복속시킵니다. 이 <월지 정벌>은 또다른 이야기의 실마리가 됩니다. 잠시 그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지요~
이 월지는 묵돌선우에 밀려서 중앙아시아로 쫓겨갑니다. 월지가 흉노에 밀렸다고는 하지만 그리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중앙아시아로 가서는 그곳에 오래 전부터 살아오던 철기문화의 선진국 스키타이를 강타합니다.
스키타이는 ...... 또 서쪽으로 밀려갑니다. 스키타이는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밀려가서, 조용히 잘 살고 있던 그 지역의 게르만족을 덮쳤고, 게르만은 놀란 토끼마냥 유럽 중부로, 서부로, 로마로 밀려 들어갑니다.
이 게르만족의 난폭한 유입으로 인해 나태와 안일과 퇴폐에 절어가던 늙어버린 로마제국은 맥없이 무너집니다. 결국 묵돌 선우가 유라시아 초원의 동쪽 끝에서 냅다 한방 갈기니까, 그 충격파가 유라시아 대초원을 따라 유럽까지 밀려가서는, 유럽의 고대를 무너뜨리고 중세의 유럽으로 넘어가게 한 셈입니다. (훈족 이야기는 따로 할 예정~)
우리가 기존 역사 교과서에서 서유럽 중심의 유럽사, 중원 중심의 중국사가 세계사의 줄기인 것으로 배워서 그렇지, 세계사의 중심은 이 <유라시아 초원의 길>에 있었습니다. 저 길을 통해 <스키타이의 선진 철기문화>가 동아시아로 전파돼 고대 동아시아의 비약적 역사발전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제 흉노의 시대에, 그 반대방향으로 <묵돌 선우의 충격파>와 <그 이후 흉노의 서천(훈족)>이 차례대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려가다가 유럽에 도달함으로써, 노년의 성인병에 맥없이 휘청거리던 유럽의 고대가 파산하고, 중세로 넘어가게 됐지요.
훗날 칭기스칸이 다시 저 길을 따라 세계가 하나로 엮어지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제국>을 이룩했습니다. "쥐새끼같은 말"을 타고 온 칭기스칸의 통렬한 꾸짖음에 자지러지게 놀란 유럽이, 중세의 미몽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초원의 길을 통해 전달된 인쇄술을 포함한 <동양의 선진문화>가 중세 유럽이 근대 유럽으로 발전하게 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다시 반대방향으로 더 강력한 충격이 밀려왔지요. 바로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유럽이, 이제는 늙어버린 동아시아를 흔들어보다가는 만만하다 싶으니까 칼로 툭툭 찔러보다가 곧 난도질을 해버립니다. 아편전쟁이 그 신호탄이었지요. 그것이 <19세기 20세기, 최근 2백년의 식민지 역사>입니다.
이 시기에 실질적인 식민지의 충격파는 해군을 통해 바닷길로 몰려들었습니다만, 실크로드라고 칭해지기도 하는 저 초원의 길에서는 문화적 약탈이 광범위하게 자행됩니다. 유럽에서는 <탐험가> <학자>라고 칭해지는, 동양에서 보면 <유럽 침략군의 선발 정탐대>가 온갖 군사적 문화적 답사를 벌였고, 돈황 석굴을 비롯한 숱한 유적을 파헤치고 온갖 유물들을 가져갑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1865-1592), 영국의 오렐 스타인(1862-1943), 프랑스의 폴 펠리오(1878-1945), 독일의 르 코크(1860-1930)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오지 탐험가이자, 실크로드학을 일군 학자들이고, 거대한 도굴범 두목들이자, 돈 잘버는 고대유물 수집상이며, 문화재 약탈자들입니다.
이들이 어떤 형식이든 퍼간 유물들은, 오늘날 영국박물관, 파리의 국립도서관, 베를린박물관의 주요 콜렉션을 이루고 있습니다 ....... 장물 콜렉션이지요. 그 양이 어느 정도였다면 장물 소리까지는 안하겠지만, 그 양이 엄청나고 그 중요성으로 말하자면 필설로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거대 장물아비들이지요.
그러나, 그것들의 가치를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분실하고, 내버려두고, 팔아먹고, 불쏘시개나 똥딱지로 써버리고, 벽지 대신 발라버렸던 그 원래의 주인들은 죄가 없다고 면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공범에 가깝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남만 탓하지는 말아야지요~ 내탓이 반은 넘는 거니까요.
아무튼, 백년이 넘는 식민시대와 전란의 빈사상태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동아시아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그 저력을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나중에 다시 음미하기로 하고요~
이제 <21세기 초반>, 동아시아와 유럽(서양) 사이에 서서히 힘의 균형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제 어떤 방향으로 어떤 충격파가 흘러갈지는, 아직 안개속처럼 보입니다만,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는 충분히 보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잠시 <묵돌 선우의 월지 벙벌>에서 <거시적인 세계사>로 너무 많이 너무 멀리 흘러나왔네요 ㅋㅋㅋ 아무튼, 이런 세계사의 큰 흐름의 한복판에 흉노가 있었고, 흉노의 주인공이 바로 묵돌 선우였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흉노의 각론으로 돌아가서 .........
동쪽으로 동호, 서쪽으로 월지와 서역을 정벌한 묵돌은 중원의 판세를 지켜보게 되지요. 당시 중원은 진나라는 통일 16년만에 폭삭 거꾸러지면서 항우와 유방이 권력쟁취 내전을 벌입니다. 흉노는 지리적으로 유방과 접하는 위치였는데, 유방을 건들지는 않습니다. 유방을 건들어봐야, 그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항우를 댓가없이 도와주는 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상 외로 유방이 승리합니다. 처가의 지원과 권모술수와 정치전략의 승리, BC202년의 일입니다. 이때 묵돌 선우는 다시 동쪽으로 진출해서 연(燕)나라와 대(對)나라 지역을 치고 들어갑니다. 흉노가 기세등등하게 나오자 유방은 고민합니다.
한고조 유방은 한왕신(韓王信)에게 지금의 산서성 태원(太原)에서 흉노의 남하를 저지하도록 합니다. 이 한왕 신은 유방의 군대를 지휘했던 한신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항우와 유방이 쟁패를 벌일 때 유방을 도운 사람.
한왕신에게 중요 변방을 맡긴 것은 사실 유방의 비열한 술책이었답니다. 흉노의 방어에 성공하면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건 충신을 얻는 것이고, 그가 패해서 죽으면 유력한 제후 하나를 피도 안 묻히고 편리하게 제거하는 것이고 .......
(당시 유방은 대업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자신을 도운 유력한 제후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어떤 때에는 몰아서 그룹으로 제거했지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비열한 주인공이 바로 유방이라는 거~ 오른쪽 그림이 유방입니다만, 이 그림은 특히 은근히 비열한 캐릭터로 그렸군요)
유방의 명령을 받은 한왕신은, 산서성 마읍(馬邑)을 보수하고 군수물자를 비축해서 방어에 나서는데, BC201년 가을, 드디어 흉노가 마읍을 포위하고 공격을 해옵니다.
초원의 전투에서는 강력했던 흉노가 성곽을 공격하는 데에는 약했나봅니다. 다소 지지부진하게 소강상태였답니다. 그러자 묵돌 선우는 병력을 대폭 증강해서 공세를 강화했고, 이를 견뎌야 하는 한왕신은 흉노의 공격을 늦출 계략으로 흉노 측에 사신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런 제스처가 유방의 의심을 삽니다. 의심이 DNA에 새겨진 의심 전문가 유방은, 이 소식을 듣고 한왕신을 의심하게 되고, 한왕신을 문책하려 듭니다. 입장이 아주 난처해진 한왕신은 그대로 흉노에게 투항해버렸고, 흉노와 합세하여 의심병 또라이 유방에게 반격을 가합니다.
결국 유방은 무모한 결심을 합니다, 흉노를 직접 정벌하겠노라, 진시황도 몽염을 시켜 북벌을 했었는데 내가 왜 못하겠는가 ....... 이런 겁니다.
그리하여 유방이 친히 32만 대군을 끌고 산서성으로 진군합니다. 한왕신의 군대와 먼저 조우합니다. 한왕신의 군대를 물리친 유방은 계속 북진하는데 ....... 유방의 지략은 자기 신하를 들볶아서 토사구팽시키는 데에는 아주 강력했지만, 적군과의 실전 전투에서는 별다른 효력이 없었습니다.
초기에 거둔 약간의 승전이 미끼인 줄도 모르고, 허벌나게 북으로 추격해간 유방은, 흉노의 유인책에 말립니다.
유방은 평성(平城, 지금의 大同) 근처의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의 묵돌에게 완전히 포위당합니다. 이걸 중국말로는 백등지위(白登之圍)라고 하는데, 당시 전쟁을 지도에 표시한 게 왼쪽 그림입니다.
그러나 유방이 숨어들어간 백등산의 산세가 험준하여 추격하는 게 좋지 않았던 터라 묵돌은 유방을 굶겨 죽일 작정으로 봉쇄해 버립니다.
결국 일주일만에 한계에 달한 유방은 참모의 계책에 따라 묵돌 선우의 연지(부인)에게 뇌물을 바치고 포위를 풀어달라고 구걸했습니다. 구걸과 술책, 유방의 전공분야지요~
목돌 선우는 굳이 유방을 죽이고 중원을 직접 경영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원을 누군가가 안정적으로 경영하고 있어야 자신들에게 지속가능한 효율적 먹거리가 된다는 것도 잘 아는 터라, 포위를 풀어줍니다.
한고조 유방은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도망가고, 묵돌이 기대한 그대로 바로 화친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말은 화친이고 그 내용을 보면 트럭에 깔린 개구리마냥 사지를 땅바닥에 완전 깔아버리듯 엎드린 것입니다.
중원으로 돌아간 유방은 공주 하나를 묵돌에게 바쳐야 하는데, 본부인인 여태후가 몇날며칠을 울고불고 해서 여태후의 딸이 아닌 다른 친족 처녀를 보냅니다. 그리고 혼수품이라고 해야 하나요? 현금(황금) 듬뿍에다가 비단 술 음식 곡식 등등 대량의 조공 물품을 흉노에게 바칩니다.
그 이후 BC133년, 한무제가 화친조약을 깨고 북벌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약 70년간의 <흉노 절대우위의 화친관계>, 한나라에게는 치욕의 화친은 계속됩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도 흉노는 소규모이긴 해도 수시로 국경을 넘어옵니다.
약탈이라는 실리와 함께 공포의 바이러스를 계속 뿌림으로써 한나라가 딴 마음 품지 못하게 한 셈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묵돌 선우가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제지하기도 합니다만, 워낙 각 지방에서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적지 않았던 터라 ........
이제 한무제가 즉위합니다. 그동안 한나라는 흉노와의 전면전을 피하면서, 안으로는 국부가 대폭 성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를 클릭하시면~ ^^
그렇게 축적된 경제력을 배경으로 흉노와의 불리한 화친조약을 파기하고, 남북 장기 전면전의 시대가 되는데,
이 대목은 다음 포스팅으로 ......... 넘어갑니다~
2011/01/05 00:00
http://blog.naver.com/kimyto/50102393515
지금까지, 북방기행을 서른 다섯 편을 써오면서, 1-3번은 <북방과 흉노의 의의>를 풀어놓은 것이고, 5-10번은 흉노와의 정면 대결을 벌여서 나라를 망친 이야기였기 때문에 흉노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대방이었던 <한나라의 어설픈 북방정책> 이야기였습니다. 11-14번은 바위그림을 통해 <흉노 선조의 삶>을 더듬은 것이고, 16-22는 오르도스 지역의 <특이한 자연경관>을 찾아본 사진들입니다.
23번은 중간 정리를 한 것이고, 다시 24-32번은 말, 황하, 사막, 생김새와 의복, 혼인과 제천의식, 무당 등등 <흉노인들의 일상생활>에 가까운 것들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이어서 33-35번은 쉬어가는 <겨울호수 구경>이고, 이제 36번이군요.
이제 <흉노의 역사>를 좀더 직접적으로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우선 흉노의 전쟁의 속을 살펴본 다음, 흉노의 역사를 개괄해서 요약해보고, 흉노 최고의 영웅 묵돌선우, 흉노의 분열과, 유럽까지 이동하게 되는 이야기도 살펴보고, 마무리에서 흉노의 흥망성쇠의 몇 가지 핵심 요소를 저 나름대로 찾아볼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흉노의 전쟁, 유목민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21세기스러운 한국의 스타 박지성 선수가 주말마다 그라운드를 누빕니다. 특히 그가 속한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게임을 보면 박진감이 철철철철~ 흘러넘쳐 홍수가 날 지경이지요.
잉글랜드의 축구가 대부분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기술로 무장한 것은 기본이고, 초인적인 체력으로 90분 내내 그라운드를 휘젖는 그 스물두명의 선수들 ....... 토털 사커(Total Soccer)라고 하나요?
저는 EPL,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경기를 보면, 지칠줄 모르는 기동력으로 주심이 휘슬을 불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뛰어다닐 것 같은 토털 패싸움으로 보입니다.
커다란 사각형 안에서는 죽고 죽이는 것만 제외하고는, 무한정 공을 차고, 그라운드를 달리고, 상대을 향해 거칠게 태클을 날리고, 또다시 미친듯이 뛰는 ...... 토털 패싸움.
제 머리 속에서는, 북방유목민의 전쟁이 바로 이런 토털 사커와 연상이 됩니다. 마지막 호흡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써가면서 죽어라 뛰는 게임 .......
흉노와 한나라의 대결구도에서, 양측의 인구와 물산을 감안하면, 흉노의 기마군단이 한나라에 비해 훨씬 강합니다. 결과는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무승부에 그칩니다.
최종적인 결과는, 흉노가 체력은 고갈되고 분열되면서 일파는 서쪽으로 가버렸고, 일파는 새로 등장한 젊은(?) 유목민 선비족에게 흡수당합니다. 한나라 역시 자폐와 부패로 주저앉아 폐장당했고, 그 후예인 위.진(魏.晉)과 남조(南朝)는 강남의 풍부한 물산에 기대어 퇴폐와 또라이 찬가에 푸욱 빠져있다가 선비족의 나라 수.당에게 먹히면서 종결처리됩니다.
그건 남북 대결의 최종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고, 왜 흉노는 한나라에 비해 군사력에서 강했을까요. 인구로 보면, 한나라의 한개 군(郡)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흉노가 어떻게 한나라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휘두를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전쟁을 좀더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전투력의 기본요소로서, <말(馬)>의 활용에서 강하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말을 가지고 놀면서 자란 흉노인은 누구나 훌륭한 기수이자 기병입니다. 무기로서 <활(弓)>에 관한 이야기도 이미 바위그림에서 했습니다. 초강력 무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흉노가 당연히 강했지요.
옷 역시 ....... 전국시대 조나라가 호복을 입자고 복장개혁을 할 정도로 전투에 최적화된 것입니다. 식량에서도 전투력 증강에 최적화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풀었던 것이니, 전부 링크만 연결해뒀습니다.
이런 요소들 이외에 ........ 유목민들의 <사냥>은 식량이나 가죽의 확보인 생업인 동시에 실전 전투연마입니다. 이들이 하는 사냥은 개인적인 사냥도 있지만, 씨족이나 부족 전체가 출동해서 일정 지역을 포위한 뒤, 야생동물들을 한곳으로 몰아세우고는, 길목에서 깡그리 때려잡는 것으로, 전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의 사냥을 가만히 뜯어보면, 지휘관이 결정한 작전에 따라 임무를 나눠맡아 흩어져 이동해서 포위하고,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미리 정해진 교전규칙 또는 사냥방법에 따라 행동합니다. 단계별로 엄격한 규칙의 군사통신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최종적으로 목표물을 포획하거나 사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온 부락이 다 모여서 사냥해온 고기로 부락잔치를 열지요~ 춤추고 마시고 놀고 ........
이렇게 평상시의 일상생활이 전투와 똑같으니 실제 전쟁에서도 전투력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활이나 올가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놀이가 생업이고, 생업이 곧 전쟁입니다. 유목민들은 올가미로 말을 잡고, 활로 사냥을 하는 것 자체가 생활이요, 놀이요, 그것이 바로 전쟁연습인 셈입니다.
그러나, 농삿군들은 평소에 쌈질 연습할 일이 뭐 그리 많겠습니까. 밭을 갈다가 잠시 쉬면서, 괭이 들고 육박전 연습하겠습니까??
오른쪽 그림은 섬서성의 흉노인 묘에서 출토된 장식.
씨름과 비슷한 놀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연습을 많이 한 선수를 당할 수는 없습니다, 박지성처럼 말입니다. 추신수도 운동장 관리인이 제발 집에 좀 가라고 사정사정할 때까지 연습해서 오늘의 추추가 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유목민에게 전쟁은 생존이고, 이기지 않으면 죽는 운명입니다. 무승부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유목민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다른 유목민들과 치열하게 목초지 쟁탈전을 벌이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생산할 수 없는 무엇을 획득하기 위해 농경사회를 침략하는 것입니다.
특히 농경사회로 쳐들어갈 때에는, 상대방보다 적은 인구로, 짧은 시간에 최대의 성과를 내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독안에 든 쥐처럼 갇혀버리기 때문에, 이들은 이기는 것 이외에 선택이 없습니다. 비기는 것도 패배입니다. 사냥에서 비기면 고기나 가죽를 얻을 수 있나요?
반대로 농경사회에서는 전쟁을 통해 얻는 것이 실제로는 없습니다. 권력자가 자신의 위상을 세계에 뽐내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흉노와의 전쟁에 대입하면, 무승부만 해도 되는 편안한 입장입니다. 그래서 장성을 쌓았던 것이지요. 장성을 둘러쳐서 그들의 기마군단을 저지하기만 하면, 농경으로 생산한 물산을 지켜내는 <승리>가 되는 겁니다.
이기지 않으면 탈락하는 팀과, 비겨도 16강에 진출하는 팀이 붙으면 전자가 훨씬 공격적이고 날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EPL에서도 승리하면 승점 3이지만, 무승부는 1점밖에 안 주더군요. 유목민에게는 그나마 무승부면 마이너스 1점인 운명입니다. 흉노에게 전쟁은 생존이자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전투력이 강한 또 하나의 이유는, 위에서 했던 사냥 이야기의 마지막 한 구절에도 있습니다.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서 온 부락이 다 모여서 사냥한 고기를 함께 나눈다"라는 것이지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아주 중대한 차별성이 있는 대목입니다.
중원의 농경사회에서는 병졸로 차출되어 전쟁에 나가는 건, 끌려가는 것이지, 결코 돈을 벌러 가는 게 아닙니다. 군대 면제를 받지 못하니까 끌려가서, 댓가없이 죽거나, 잘해야 운좋게 살아 돌아오는 겁니다. 세금내는 것과 똑같습니다. 안내면 사망이고, 내봐야 내년에 또 내야 하는 것. 가끔 전쟁을 통해 출세하는 놈들이 있으나, 그것은 일반 백성과 농민들의 행로는 아니지요.
이에 비해 유목민은 사냥이든 전쟁이든 그 결과의 분배에서 농경사회에 비해 훨씬 평등지향적입니다. 특히 전쟁에서는 상대방에게 승리해서 한 지역을 점령했다면, 하루나 이틀을 전리품 약탈시간으로 줍니다. 이때 당하는 쪽에서는 약탈과 폭행의 지옥이 되는 것이고, 이긴 쪽에서는 승리의 잔치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서도 분배의 차별은 있지만, 근본적으로 농경사회의 불평등 분배보다는 훨씬 평등에 가깝습니다.
흉노 이후에 선비, 거란 몽골, 여진 모두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즘 말로 뒤집어보면, 징집-보훈시스템이 아주 잘돼 있습니다. 전사로서 출병하면 온 집안이 잔치를 합니다. 만일 죽으면?? 전리품을 나라에서 챙겨서 나눠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가족은 사회 시스템 또는 나라가 부양합니다. 그러니 병사들의 사기가 훨씬 높은 징집-보훈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 징집-성과보상-보훈의 역사와 시스템을 보면, 이런 것으로는 21세기에 어림택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시당초 지들끼리 군면제 티켓을 나눠먹는 전통이 굳어졌고, 군대 물자 빼먹는 게 치부의 지름길이었고, 식민지를 벗어나 전쟁이 끝나고 보니 치열하게 싸우고 장렬하게 죽은 놈들만 너무나 억울한 꼴이 되어 있고 ........
기업의 경영이든 나라의 경영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성과에 대한 보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성장은커녕 유지하지도 못하는 겁니다. 박지성이 스타로서 가치가 있는 하나의 이유는, 그가 성과보상을 아주 찌릿하게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샘플이 필요합니다.
또 한가지, 북방유목민은 군민일체(軍民一體)입니다. 전국민이 전부 현역군인이거나, 최소한 군속이거나 전투예비군(당나라 군대가 아니라~)입니다. 전쟁이 터지면 선우가 제일 앞장서서 싸워야 합니다.
선우의 아들이라도, 싸워서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선우로 올라서기 힘듭니다. 능력이 딸리면 그냥 전장에서 죽어버리지요.
왼쪽 사진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
어디에 있는 걸 찍은 건지 불분명~
이런 군민일체의 징집시스템은 인구가 적은 유목민으로서는 불가피한 것이지요. 흉노 이후에 몽골의 천호제(千戶制)나 여진족의 맹안모극제(猛安謀克制), 만주족의 팔기제(八旗制)도 모두 군민일체의 사회구성 방식이지요. 이것이 그들의 군사력의 요체입니다.
온국민이 열외없이 군대가서, 평소 훈련한대로 사냥을 하듯이 전쟁을 하고, 죽거나 죽지 않거나 보상을 제대로 받는데, 전쟁에 이기지 않으면 죽음으로 때워야 하는 운명이라면, 전투력이 훨씬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북방 유목민이 미개해서, 야만적이라서 싸움만 잘한다? 그런 웃기는 짬뽕 같은 소리는, 퇴폐의 도포자락 늘어뜨리고, 담장 뒤에 숨어서, 궁시렁거리는 쪼잔한 찌질이들이 하는 푸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목민들은, 그들의 시스템을 작동시켜서 최대의 에너지를 쏟아내서 승리한 것이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패배했을 뿐입니다.
단지 쌈질을 잘하는 놈들이 모여서 유목민이 된 게 아닙니다. 전투력이 강한 것은 결과이고, 전투력을 강하게 하는 어떤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게 과거와 역사와 대화를 하는 가장 큰 이유지요.
전투력이 강하려면, 전투력을 강하게 하는 요소를 탄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정말 이런 상상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두만 선우
두만 선우(중국어 간체: 头曼单于, 정체: 頭曼單于, 터키어: Tumen, Teoman: 재위 ? ~ 기원전 209년)는 흉노의 선우로서 역사에 첫 등장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투멘(만인장)과 관련이 있다.
[편집] 생애
진나라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에 북방 수비를 맡겨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후 진시황이 죽고, 몽염도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죽게 되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된다.
그의 맏아들은 묵돌이었는데, 이때 두만에게는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따로 있었다. 두만은 모돈 대신에 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태자에게 주게 되어 있는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의 대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묵돌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이라는 뜻의 명적(鳴鏑)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의 기병을 훈련시켰고 기원전 209년 결국 사냥터에서 묵돌의 공격을 받아 활에 맞아 암살당했다.
전 임 (알려지지 않음) |
흉노의 선우 ? ~ 기원전 209년 |
후 임 묵돌 선우 |
초원의 정복자 [ 1 ]
정복자 전에 있었던 정복자
역사 이래 최대 정복자를 손꼽으라면 단연코 칭기즈칸(成吉思汗, 1162~1227)을 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떠한 제왕도 물리적으로 칭기즈칸을 능가할만한 정복을 기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혹자는 대영제국이 더 큰 정복자가 아니었나하고 반문할지 몰라도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대영제국과 칭기즈칸 당대에 일어 선 몽골제국의 맹아(萌芽)를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듭니다.
[ 몽골 국회의사당에 위치한 칭기즈칸 동상 ]
이전에 존재하던 흔적을 찾기 힘들만큼 아주 조그만 부족에서 시작하여 교통, 통신도 불편하였던 그 당시에 어떻게 그처럼 유라시아대륙을 휩쓸 수 있었는지는 수많은 역사학자들에게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마치 순식간 사막을 휩쓸고 지나간 거대한 모래폭풍처럼 그의 흔적을 한 번에 조망하기 어려울 정도로 칭기즈칸이 살아생전에 역사에 남긴 발자국은 크고 어마어마하였습니다.
[ 칭기즈칸은 모래 폭풍처럼 갑자기 발흥하여 커져갔습니다 ]
일부 당시의 유물이나 유적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유라시아대륙 한가운데 땅만 커다란 약소국으로 남아있는 몽골인민공화국(Mongolia)이나 중국의 일부가 되어버린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만 놓고 본다면 12세기에 세계를 휩쓸던 칭기즈칸을 떠올리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이 아직까지도 사상 최대의 정복자로 길이길이 전하게 된 이유는 바로 풍부한 기록 때문입니다.
[ 칭기즈칸의 행적이 수록된 원사(元史) ]
그에 관한 기록은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후대에도 많이 쓰여 졌고 지금도 수많은 관련 논문들이 쉬지 않고 발표될 정도입니다. 이러한 기록에는 스스로를 칭송하려 몽골이 남긴 기록뿐만 아니라 피해 당사자는 물론, 제3자가 멀찌감치 떨어져 기록한 내용까지 남아있습니다. 때문에 현재 무덤조차 미궁으로 남아있을 만큼 흔적을 찾기는 힘들지만 부인할 여지없이 그는 사상 최대의 정복자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 무덤까지 미스터리로 남았지만 그가 정복자로 남은 것은 기록 때문입니다 ]
그런데 공간적으로 정복 내용만 놓고 본다면 칭기즈칸에 결코 뒤짐이 없었던 초원세계의 제왕이 있었는데, BC 3세기~1세기에 존재한 흉노(匈奴, Xiongnu)의 발흥기를 이끈 묵특(冒頓, ?∼BC174)입니다. 묵특이 활약하였던 시기는 대략 기원전 2세기이므로 칭기즈칸보다 무려 1,300여 년 전의 인물이고 핏줄로 따진다면 칭기즈칸의 먼 조상이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 중국 싸이트에 묘사 된 묵특의 모습 ]
이 호걸의 일생을 보면 그의 후대인 칭기즈칸이 이룬 것 보다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모자람이 없는 흔적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다만 그가 칭기즈칸만큼 인구에 많이 회자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적은 이유는 그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얼마만큼 거대한 정복자였는지 반추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 흉노의 화려한 유물 하지만 아직도 흉노는 미지의 제국입니다 ]
묵특은 흉노인들이 부르던 발음을 중국의 사서에 한자로 기록한 것인데 한글로 모돈, 목돌, 목특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어떻게 발음하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다만 어원으로 따져 투르크어로 '용감한 자'를 의미하는 Bayatur로 여겨지고 있을 뿐입니다. 엄밀히 말해 음성 기록 매체가 없던 시기의 사람들이 어떻게 발음하였는지는 항상 추론일수밖에 없습니다.
[ 하지만 적은 기록에도 선우묵특의 활약상을 반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
흔히 그는 묵특선우 혹은 선우묵특이라고 불리는데 선우(單于)는 당시 초원세계의 지배자를 의미합니다. 한문으로 탱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의 약자인데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뜻합니다. 따라서 5세기 이후 초원의 지배자들이 사용한 칸(汗)과 같은 의미이고 중원에서의 황제(皇帝)와도 같은 뜻입니다. 앞으로 소개할 내용은 진정한 초원세계의 최초 정복자였던 묵특선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초원의 정복자 [ 2 ]
정복자들의 고향
역사에 거대한 변화를 이끈 무대로 툭하면 등장하는 초원은 유라시아 대륙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스텝(Steppe) 지역을 의미합니다. 강우량도 부족하고 남으로는 사막, 북으로는 툰드라지대 사이에 끼어 있으며 겨울이 길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수렵을 하거나 가축을 방목하며 생계를 잇기 때문에 새로운 초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목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광활한 초원지대는 인간이 거주하기에 상당히 열악한 환경입니다 ]
이곳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 온 유목민들은 가축을 먹일 초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갈가리 찢겨 이동하며 거대한 초원에 점과 같은 형태로 나뉘어 지내었는데 많이 변하였지만 이런 패턴은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고찰하면 이들은 인근 씨족이나 부족끼리 피를 부를 만큼 엄청난 경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일단 헤게모니를 쟁취한 강력한 집단이 등장하면 쉽게 그 집단을 중심으로 하나로 똘똘 뭉치는 특성이 있습니다.
[ 유목민족에게 이동은 생존 방식입니다 ]
예를 들어 초원민족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12세기 몽골이 불과 한 세대 만에 이름도 없는 조그만 부족에서 불이 붙어 순식간 거대한 제국으로 타올라갔던 이유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몽골만이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이러한 발흥 과정은 몽골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초원 민족 국가들의 흥망성쇠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당연 과정이기도 합니다.
[ 중국 싸이트에 묘사 된 여러 유목 민족 ]
문화 인류학적으로 이곳의 여러 제 유목인들을 이후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국가들의 이름을 따서 몽골-투르크계로 통칭합니다. 중원에서는 이들을 통틀어 북적(北狄) 즉, 북방의 오랑캐라고 비하하는데, 비록 문화적으로 앞서고 있다는 자부심도 그런 건방진 말을 쉽게 뱉도록 만들었지만 사실 그러한 이면에는 중원의 한족(漢族)들이 이들에게 대대로 겪었던 상당한 피해의식도 함께 담겨있습니다.
[ 한족은 주변을 모두 오랑캐로 칭하는 오만함을 보였습니다 ]
왜냐하면 기후나 여러 여건으로 말미암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생존이 어려울 경우 남쪽의 사막을 넘어 중원의 농경지대를 공격하여 약탈하는 경우가 역사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는데 그때마다 중원은 심각한 피해를 당해왔기 때문입니다. 유목민들은 이동과 사냥이 곧 삶이었기 때문에 전시에는 남들이 쉽게 상상도 못할 놀라운 기동력과 전투력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유목민들에게 한족들은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 한족들은 오만함은 사실 기마민족들에 당해 온 피해 의식의 발로였습니다 ]
워낙 넓은 지역에 산개하였던 생활관습 때문에 유목민들은 피터지게 겨루던 적이 굴종하여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몰살하고는 하였습니다. 따라서 뛰어난 전투력에 이러한 무서운 관습이 더해져 중원의 한족들에게 초원민족은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고 역사 이래 중원의 천자가 하여야 할 가장 큰 일중 하나가 유목민으로부터 그들의 강역을 보존하는 일이었습니다.
[ 역사이래 초원민족은 한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
흉노는 초원의 유목민들인 몽골-투르크계가 기원전 3세기경 오늘날 몽골 고원 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건국한 국가의 이름인데, 이후 주변의 제 부족들을 병합하여 가면서 제국으로 발전하였고 시간이 흘러 이후 흉노는 제국에 속한 속민들을 칭하기는 이름으로도 쓰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에 등장하는 흉노는 나라의 이름이자 이에 속하였던 제 민족들을 의미합니다.
[ 사서에 시대별로 등장하는 초원의 유목민족들은 사실 별개가 아닙니다 ]
때문에 흉노는 이후 같은 곳을 근거지로 하여 반복하여 흥망성쇠 하였던 몽골-투르크계의 제국이었던 돌궐, 거란, 몽골의 직계 조상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뿌리이며 한반도 북부에서 발흥한 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를 건국된 국가의 시대별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들을 굳이 서로 관련이 없는 다른 민족으로 구분 지으려 한 것도 한족들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초원의 정복자 [ 끝 ] |
초원의 정복자 [ 12 ] |
초원의 정복자 [ 11 ] |
초원의 정복자 [ 10 ] |
초원의 정복자 [ 9 ] |
초원의 정복자 [ 8 ] |
초원의 정복자 [ 7 ] |
초원의 정복자 [ 6 ] |
초원의 정복자 [ 5 ] |
초원의 정복자 [ 4 ] |
'17[sr]역사,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고려 무신정권 연대기 (0) | 2015.08.21 |
---|---|
[스크랩] 인수대비(소혜왕후)의 일생 (0) | 2015.08.21 |
[스크랩] 용곡동굴유적 [龍谷洞窟遺蹟] (0) | 2015.08.21 |
[스크랩] 궁예대왕의 나주정벌 재평가(역사스페셜) (0) | 2015.08.21 |
[스크랩] 안중근의사 러시아 수사기록 첫 공개 / 모친편지 조작 (0) | 2015.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