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스크랩] 북방민족이 중국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나라, 여진족의 '大淸제국'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5:51
  •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23)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북방민족이 중국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나라, 여진족의 '大淸제국'

  •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E-mail : seyfert213@naver.com
    경제 정책을 군사 작전에 비유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으..

 

입력 : 2015.02.02 13:42
 
1. 북방민족 여진이 세운 나라「淸」의 기원과 흥망

16세기말 임진왜란과 반란·부패 등으로「明」의 국력이 쇠퇴일로를 걷는 가운데 만주일대에서는 해서·건주·야인 등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건주여진의 영웅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여진족을 통합하여 1616년 흥경(요녕성 신번)에서 ‘칸’으로 즉위, 국호를「대금(大金)」이라 했고 이것이 12세기 여진족이 세운「金」을 이은 후금이다. 누르하치는 이름이며 성은 아이신줴러(愛新覺羅)다. 만주어에서 아이신(愛新)은 金, 줴러(覺羅)는 일족을 의미하므로 김씨(金氏)라는 뜻이라 한다. (*이 가문은 金태조 아골타와 같이 신라 후예여서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음차를 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선양 복릉, 태조와 황후의 능>(좌), <누루하치 묘소, 심양>(우)
<선양 복릉, 태조와 황후의 능>(좌), <누루하치 묘소, 심양>(우)
누르하치를 이어받은 홍타이지(皇太極)는 만주족의 팔기군을 장악하고 외몽골과 내몽골까지 병합하여 만주·몽골·한족의 다민족 국가를 출범시켰다. 그는 국호를「대청(大淸)」이라 고치고 1636년 황제로 즉위하여 청나라의 기초를 다졌으나 명나라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선양 고궁, 봉황루>(좌), <선양 고궁, 대정전>(우)
<선양 고궁, 봉황루>(좌), <선양 고궁, 대정전>(우)
홍타이지 사후 아들 순치제가 다섯 살의 나이로 이어받으면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으나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의 섭정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 도르곤은 북경을 점령하는 등 중국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사냥터에서 돌연 사망하고 순치제의 친정이 이루어진다. 순치제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왕조 중국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순치제를 이어받은 강희제는 61년을 재위하면서 눈부신 내치와 외정의 업적을 쌓아 청의 중국지배를 완성했고, 이후 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 전성기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명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만을 정벌하는 한편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외몽골·티베트에 이르는 정복전쟁을 계속했다. 강희제 사후 치밀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인 옹정제가 반대파를 제압하고 즉위하여 황권강화와 내정개혁을 통해 절정기인 건륭시대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외치에서도 티베트원정을 마무리하고 운남·귀주·광서 등 중국남부까지 평정하여 최대 영토의 기틀을 마련했다. 6대 건륭제는 63년 재위하면서 내정을 안정시키고, 문화를 융성시키는 한편 준가르, 위구르, 타이완, 미얀마, 베트남, 네팔 등 광범위한 주변국 원정과 평정에 나서 淸 대통일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청나라 지도
청나라 지도
건륭 말년 이후 정치부패와 국정혼란이 이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 등 각처에서 반란과 봉기가 이어진다. 이러한 가운데 1.2차 아편전쟁(1840,1856)에서 청일전쟁(1894)에 이르기까지 외국 세력의 중국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거대한 淸은 와해되고 1912년「마지막 황제」선통제 푸이가 퇴위하면서 276년 역사는 막을 내린다. 중국 마지막 왕조이자 선비, 金, 元등에 이어 마지막 북방민족 여진의 중국지배에 종지부를 찍는다.

2. 대통일제국 淸과 한반도 역사와의 조우

고려말 함경도지역에는 여진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4대조가 동북면으로 이주했고 나중에 태조가 된 병마사 이성계를 군사적으로 뒷받침한 배후 세력이 되었다. 태조는 개국 후 여진족 동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한다. 이후에도 여진족에 대해서는 조선 조정의 강·온 양면의 정책이 교차하게 된다.

후금이 건국되던 1616년은 조선 광해군 8년 시기로 明·淸 교체기라는 대륙의 큰 소용돌이가 한반도에도 높은 파도를 일으켰다. 당시 광해군은 동북아 국제정세를 대신들과는 달리 정확히 꿰뚫어 보고 明에 대한 일방적 의존보다 등거리 외교전략을 택한다. 후금이 요동지방으로 진격해오자 명은 임진왜란 당시 지원에 대한 보답을 명분으로 조선군 파병을 요구(1618년)해왔고, 광해군은 마지못해 파병하나 明·淸의 패권전쟁인 사르후전투 패전 후 추가 파병은 묵살한다. 이후 광해군의 외교정책으로 후금과 큰 마찰없이 지내게 되나, 광해군 15년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명과의 관계 개선과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내세우면서 후금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된다.
북방민족이 중국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나라, 여진족의 '大淸제국'
이러한 상황에서 후금은 明 정벌에 앞서 배후의 조선을 미리 제압하기 위해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1627년 3만 병력이 조선에 침공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조선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고 이어지는 후금의 전방위 압력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이후 후금의 국경침입, 신속(臣屬)요구, 파병요구 등이 이어지면서 인조의 조선에서는 척화배금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국호를 淸으로 바꾼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1일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침공에 나섰다. 병자호란으로 불리는 이 전쟁에서 청군은 심양을 떠나 10여일 만에 수도에 육박하는 전광석화 같은 작전으로 조선을 압박했고, 급한 나머지 일단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와 조정은 청군에 포위되어 끝내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다음해 1월30일 청의 출병 후 2개월 만에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항복하여 전쟁이 끝난다. 이후 양국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할 때까지 지속된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강희·옹정·건륭시대(1661~1799년)는 청나라 최전성기였고 조선은 현종·숙종·영조·경종·정조(1659~1800년)가 재위하였다. 이 시기에 청은 대제국을 완성하고 세계와 교류하면서 문물을 발전시켰고 조선은 청을 통해 문물교류 기회를 확대할 수 있었다.

현대 중국의 영토는 몽골, 연해주, 카자흐스탄 일부, 대만 등을 제외하고는 청 제국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청은 100만 명도 안되는 만주족이 1억명을 훨씬 넘는 한족을 지배하면서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고 강대한 국가로 성장했다. 중국헌법 전문을 보면「중화민국은 전국 각 민족 인민이 공동으로 건설한 다민족 통일국가」라 규정한다. 이민족의 청이 현대 중국의 모태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중국이 지금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했고 한국과의 관계도 과거 어느 때보다 긴밀하다. 중국은 한국의 제1의 교역국이며, 한국은 (EU·ASEAN·홍콩 제외시) 미·일에 이어 중국의 세번째 교역국이다. 양국은 지난 259년 조선·청 관계와는 판이한 새로운 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3. 淸을 세운 만주족과 한민족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2세기 金을 잇는다는 의미로 나라이름을 大金이라 했다. 119년간 존속한 金은 여진족 추장 아골타가 세웠으며 그는 고려에서 온 신라인 김함보의 후예다. 그러면 만주일대에서 활약한 여진족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고대로부터 만주일대에 살던 사람들로 그들이 살던 지역이나 민족을 중국에서는 시대별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 한대에는 읍루, 남북조시대에는 물길, 수·당대에는 말갈, 송·명대에는 여진이라 불렀고 청대에는 홍타이지가 민족명을 ‘여진족’에서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북방민족이 중국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나라, 여진족의 '大淸제국'

여진족이 활동한 만주일대는 고조선·부여를 이어 고구려의 땅이었다. 당나라시대 돌궐과 고구려는 동맹관계로 당을 양쪽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돌궐이 분열 등으로 멸망하자 이어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러나 돌궐에서는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돌궐 멸망 30년 만에 영웅 쿠틀룩이 후돌궐을 일으킨다. 한쪽에서 당의 견제 세력이 다시 등장하자 고구려가 멸망한 만주지역에서도 30년 만에 후고구려 세력이 일어난다. 이 나라가 바로 영웅 대조영의 발해다. 30년 만에 당, 후돌궐, 발해의 삼각관계가 다시 형성 된 것이다.
북방민족이 중국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나라, 여진족의 '大淸제국'
발해의 건국으로 한민족 역사가 만주일대에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핵심을 이루는 고구려를 이어 받은 발해는 이후 거란에 의해 멸망했으나 발해 땅 그리고 그 땅에 살던 사람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그 땅과 그 사람들이 여진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그래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나아가 청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와 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진족에 대해 단순히 중국적인 시각으로 북방민족의 하나, 또는 오랑캐로 생각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블라디보스톡 박물관에 보관중인 발해 토기(좌)와 금나라 토기(우)
블라디보스톡 박물관에 보관중인 발해 토기(좌)와 금나라 토기(우)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우리민족의 본류라 인식되고 있는 예맥은 동호, 숙신과 같은 이름으로 만리장성 이북의 동북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의 총칭이었다. 이들 중 만주지역에 남아있던 숙신은 후일 물길, 말갈, 읍루, 여진, 만주족 등으로 불리웠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사기 흉노전에 등장하는 ‘동호’는 고조선(신朝鮮)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선비는 동호의 후예이고 선비에서 유연, 북위, 거란, 몽골이 유래한다는 사서·연구는 우리의 고대역사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단재 선생은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는데…」라고 쓰고 있다. 청나라를 건국해서 오늘날 중국이 있게 한 여진족 역시 과거 우리와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23)] 전체기사 보기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