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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도공주 허황옥과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2. 13:59

인도공주 허황옥과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김병모의 고고학(考古學) 여행: 두 마리의 물고기, 그 의미를 찾아 헤맨 40년

페르시아 신화(神話)에서「가라」는 악신(惡神)으로부터 신목(神木)을 지키는 신어(神魚)를 뜻하는데, 페르시아 문화(文化)를 받은 허황옥(許黃玉)의 고국 아유타國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허황옥(許黃玉)이 금해(金海)로 김수로왕(金首露王에게 시집와 그것이 가락국의 국장(國章)이 되는 역사(歷史)의 수수께끼를 풀다

김 병 모 (金 秉 模)
2004 서울 세계박물관대회 공동조직위원장.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이탈리아 국제문화재연구소 및 영국 런던고고학연구소 수학. 영국 옥스퍼드大 철학 박사. 안면도 고남리 패총, 二聖山城 발굴작업 주관. 1993~1995년 한국 고고학회 회장. 前 한국 전통문화학교 총장. 現 한양大 문화인류학과 교수. 저서 「금관의 비밀」, 「김수로왕비 혼인길」.

글 | 김병모 2004 서울 세계박물관대회 공동조직위원장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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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 허씨 대종회 홈페이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 공주의 영정. 큰 눈과 큰 코 등 이국적 풍모가 뚜렷하다.
옛날 경상남도 김해(金海)지방에 가야(伽倻)라는 나라가 있었다. 삼한(三韓)시대에 변진(弁辰 또는 弁韓)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자라난 고대국가인데 이 나라의 처음 이름이 가락국(駕洛國)이다.
 
  가락국의 초대왕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은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인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서기 48년 7월27일 붉은 돛을 단 배가 해안에 도착한다. 배에서 20여 명이 상륙한다. 그 중 한 여인이 수로왕에게 자기를 소개한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 나이는 16세입니다』
 
 
  「妾是 阿踰陀國 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二八矣」
 
 
  수로왕이 왕비를 맞아들이는 과정이다. 이들의 결혼으로 10왕자 2공주가 탄생하여 오늘날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조상이 되었고 아들 중에 두 사람에게는 어머니의 성인 허(許)씨를 사성(賜姓)하여 김해 허씨(許氏)의 조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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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 정문(納陵)에 새겨진 신어상(神魚像). 가락국 시절의 국장(國章)이다.

  아유타는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 있던 고대국가의 이름이다. 현대 인도어로 Ayodhia 라고 쓰고 「아윳다」라고 발음한다. 
 
 허황옥의 한국 도착은 고대 항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스터리로 치부되었고, 한국사에서는 이 시대가 희뿌연 안개 속에 싸여 있을 뿐이고, 인도 출신 허황옥의 가락국왕과의 결혼이야기는 한국사의 여명기인 2000년 전 일어난 국제결혼 사건 정도의 에피소드로 취급돼 왔다. 우리 역사에서는 신화시대 수준이지만, 서기 1세기 때는 세계사에서 중국은 後漢(후한) 때이고 서양사에서는 로마시대이다. 이미 중국의 諸子百家(제자백가) 시대가 지나갔고, 그리스 과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알렉산더가 인도를 다녀간 후이다.
 
 
 
 마주 보는 두 마리 물고기
 
   나의 아유타국 연구는 실로 하찮은 이유로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유달리 검었다고 한다. 보통의 한국인들보다 훨씬 검게 타고난 피부 때문에 할머니로부터 자주 놀림을 받았고 집안 행사 때면 모이는 친척들까지도 나의 피부가 검은 것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그까짓 일로 상심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 때부터 나기 시작한 여드름 때문에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자문(自問)하기 시작하였다.
 
  「역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김해 김씨의 조상인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출신이기 때문에 그 후손의 한 사람인 나의 얼굴도 인도인처럼 검게 된 게 아닌가? 그래도 2000년 전에 있었던 국제결혼의 흔적이 설마 지금까지 계속 나타날 수는 없을 터인데」
 
  그 정도의 의문을 지닌 채 나는 대학에 진학하였다. 사회인류학 강의를 통해 족내혼(族內婚)과 족외혼(族外婚)의 풍속을 배우면서 한국인들은 동성동본(同姓同本)끼리는 혼인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이성(異姓)이면서도 동본(同本)인 경우에도 결혼을 꺼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예가 바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관계이다. 즉 김해 허씨는 허황옥 왕비의 성을 딴 자손들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부모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가 전하는 수로왕의 혼인 설화는 김씨족(族)과 허씨족(族) 사이에서는 단순한 설화 이상의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의문의 원인 제공자인 김수로왕과 허황옥 할머니의 능을 참배하러 김해까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맞닥뜨린 것이 수로왕릉의 대문에 새겨 있는 神魚像(신어상)이었다.
 
  신어상(神魚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며 가운데 있는 어떤 물체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두 왕릉의 배후에 있는 산의 이름도 신어산이고, 신어산에 있는 銀河寺(은하사)라는 절에도 수미단에 神魚像이 두 개나 조각되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검은 피부와 神魚像은 이렇게 어우러지면서 그 후 수십 년간 나로 하여금 인도와 아유타국 연구에 빠지게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神魚像은 가락국이 발전한 가야의 영역권인 경상남도 지방에 있는 오래된 불교사찰과 祠堂(사당)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惠超가 다녀온 다섯 天竺國 중 하나
 
   아유타국은 지금의 인도 땅 아요디아 (Ayodhia)인 것 같다고 선대의 학자들이 추측하였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학자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추측만 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현장을 답사한 사람이 재야사학가인 故 李鍾琦(이종기)씨였다. 李씨는 펜클럽대회 참석차 인도에 갔다가 김수로왕릉에 그려져 있는 雙魚紋(쌍어문:신어상)이 아요디아에 무수히 많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돌아와 「駕洛國探査(가락국탐사)」라는 책을 써냈다. 1970년대의 일이다.
 
  가락국의 국장(國章)격인 神魚像이 한국 땅에는 가야문화가 퍼진 경남 일대를 중심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과 인도의 아요디아에서도 쌍어문이 사원의 대문마다 그려져 있다는 李鍾琦씨의 말을 듣고 나니 직접 인도를 답사하지 않으면 나에게 검은 피부의 인자를 제공했을지도 모르는 인도공주의 미스터리를 천착해 볼 길이 없게되었다.
 
  그래서 인도에 가게 되었다. 1985년의 일이었다 뉴델리에서 비행기 편으로 동쪽으로 한 시간쯤 가면 럭나우라는 도시에 내려서 차 편으로 150km를 동쪽으로 가는 곳에 아요디아가 있다. 아요디아는 산스크리트語로 「정복되지 않는 땅」이라는 뜻이다. 혜초의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에 기록된 다섯 개의 천축국 중에 中天竺國(중천축국)에 해당된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의 탄생지이다. 그런 만큼 아요디아에는 수많은 전설과 역사가 색색가지의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그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푸는 사람이 인도의 고대사를 잘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힌두교의 신비를 캐어 내는 작업의 단초를 찾는 사람이 된다.
 
 
 
 힌두교와 카스트의 나라
 
   카스트(Cast) 이야기를 조금 하자. 인도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인 계급이 정해져 있다. 그들은 브라만(신앙지도자), 크샤트리아(통치계급), 바이샤(생산계급), 수드라(천민)의 네 계층 중 하나로 태어난다. 이들은 직업만 다른 것이 아니고 주거지역도 다르다. 그러니 다른 계급 간에 결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만약 이런 전통을 어기고 다른 계급의 사람과 결혼한 부부는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심지어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죽게 되는 일도 있다. 인도의 신분제도의 경직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때로는 용감한 젊은이들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외국으로 탈출하여 살고 있는 예도 수없이 많다.
 
  그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새로운 신분 간 계급으로 불린다. 아버지가 상위 신분일 때와 어머니가 상위 신분일 때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계급이 또 새로운 신분을 탄생시켜 인도의 카스트는 수십 가지로 분화해 나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층 간의 벽은 엄격하다. 심지어 어느 계층의 의사는 자기 계층의 환자만 치료하고 다른 계층의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님 같은 외국인이 인도인 환자를 돌보아야 할 이유가 생겼나 보다.
 
 
 
 믿을 수 없는 인도
 
   인도, 즉 인디아(India)라는 명칭은 페르시아 동쪽에 있는 험준한 산맥인 「힌두쿠시 산맥 너머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곳에 있는 강이 인더스 강이고 나라 이름도 인도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인도를 불교의 나라라고 우대하여 天竺國(천축국)이라고 불렀지만, 그전에는 「身毒(신독)」이라고 음역하였다. 인도인들의 피부가 검어서 혹시 몸속에 독이라도 들어 있지 않나 하는 해학적 명칭이다. 이웃 나라 이름을 비하해서 부르는 중국 사람들의 버릇 중에서도 매우 고약한 명칭이다.
 
  인도인에게 「인도」라는 역사적인 이름을 선물한 인더스 강은 지금 인도에 없다. 영국의 식민 통치를 벗어난 후 인도 대륙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면서 대륙 서북쪽의 인더스 강 유역인 펀잡 지방이 파키스탄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반대쪽인 동쪽 지방의 갠지스 강은 하류의 벵골 지방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해 나가, 인도는 이리 찢기고 저리 뜯겨 상처 입은 공룡처럼 되고 말았다.
 
  인도 대륙의 주민들이 힌두교도들의 인도와 이슬람교도들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리해 나가는 장면을 영화 「간디」를 통해서 본 사람들은 「과연 종교가 그 엄청난 인구를 이동시킬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인도인은 기본적으로 농업인들이다. 농업인들에게 토지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농토를 포기하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천지로 떠난 사람이 많다.
 
  그렇다. 정신적인 자유는 경제적인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 영국의 프로테스탄 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 플라워(May Flower)號에 몸을 싣고 아메리카라는 신천지로 이민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종교 생활이 자유로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 오늘날 탄탄한 유태인 사회를 구축한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비록 힘든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도와 인도인을 깔볼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구한 인더스 문명을 모태로 살아온 인도인들은 인류 최대의 인구가 신봉하는 힌두교를 탄생 시켰고, 여기서 불교까지 꽃을 피워 지구 인구 몇 분의 일이 인도 철학의 영향 속에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도 대륙을 가장 멋지게 표현한 말이 「믿을 수 없는 인도(Incredible India)」이다. 10억 명의 인구가 힌두어·타밀어·우루두어·벵골어 등 수십 가지의 언어를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아직도 계급사회가 엄연히 존재하여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는 섞여 살지도 않고, 혼인도 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나라이다. 종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양대 축으로 하여 시크교·밀교 등이 섞여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한 사람의 총리가 통치하는 오묘한 구조의 나라이다. 정치·경제用 공용어는 영어이다.
 
  나에게 인도는 여러 색으로 구성된 무지개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각각의 색이 따로따로 보일 듯 말 듯하고 그 배경 뒤로 허황옥 공주의 모습 같은 영상이 희미하게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영혼의 江- 갠지스
 
   힌두교의 源泉(원천)인 갠지스를 빼놓고 인도를 생각할 수 없다.
 
  대부분이 힌두교도인 인도인들은 그들의 영혼을 갠지스 강에 담고 있다. 갠지스 강에 걸려 있는 바라나시에서 힌두교도들의 성스러운 목욕의식과 엄숙한 화장의식은 처음 목격하는 사람에게는 섬뜩한 장면이다.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며칠 동안 식사도 못 한다. 반면에 사랑에 취한 사람들은 인도에 가면 타지마할에서 16세기 때인 모굴시대 「샤 자한」 왕이 먼저 세상을 떠난 愛妃(애비)를 기리는 남자의 애틋한 사랑의 표시를 만난다. 그래서 인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색깔로 보인다.
 
  내가 아요디아에 처음 도착하던 날은 갠지스 강의 지류인 사라유 강변에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황토색 강물이 忍苦(인고)의 생활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힌두교도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 주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강물에 몸을 담고 있었다. 먼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허비한 노력과 경비를 일순간에 상쇄하는 마력을 지닌 갠지스 강물이다.
 
  강가에는 이발사가 削刀(삭도)로 순례자의 체모를 깎아 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의 행복해하는 얼굴에서 우리는 인도인의 영원한 평화를 읽을 수 있다. 강변에 마련해 놓은 간이의자에 앉아 하루나 이틀쯤 후에 다가올 永眠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영면은 죽음이 아니다. 天刑(천형)과 같은 이승 시절의 카스트를 탈피하여 자유롭고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넓은 인도 대륙의 원래 주인은 드라비다族이다. 인더스 문명의 핵심지역인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폐허된 후인 기원전 1600년경부터 카스피海 부근에 살고 있던 서양인 계통의 인종인 아리아 족들이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 이민의 배경에는 철기문화의 확산에 따른 지역 간 전쟁이 있었다. 그 결과 유럽어 계통의 언어인 힌두語가 생겨났고 토착인들의 남하에 따라 드라비다語는 南인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月刊朝鮮 2월호에서 이미 썼다. 어찌되었든 다신교인 힌두교는 소수의 집단이 큰 인구를 다스리는 통치이념으로 교묘하게 사용되었다.
 
 
 
 아요디아-코살(Kosala)國의 수도
 
   서기전 7세기 때쯤에 北인도는 간다라, 펀잡, 마치, 코살, 마가다, 앙가 등의 고대 왕국이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에 걸쳐 일어났다. 그 이남에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오늘날 네팔 땅에 있던 카피라 성에서 태어났을 때인 기원전 6세기에는 고대 왕국 중 코살국이 맹주였다. 아요디아는 코살국의 중심이었다.
 
  코살국의 조상신화엔 태고에 대홍수가 있었다. 그때 만물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때 위기에 처한 「마누」라는 인물이 커다란 물고기(Matsya)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마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홍수 전설에서 「노아」가 살아나는 과정과 흡사하다. 마누의 먼 후손인 「익스바쿠」가 코살국을 세웠고, 그의 아들이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이다. 따라서 물고기는 코살국의 토템이자 힌두교의 한 신상(神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코살국의 국장이 신어(神魚)로 정해진 것이다.
 
  후대에 코살국이 망했어도 神魚를 숭앙하는 신앙은 그대로 전승되었고, 아요디아 출신의 힌두교도들은 왕조가 바뀌고 주민이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도 그들은 가는 곳마다 힌두교 사원을 세우고 그들의 神들을 경배하였다.
 
  과연 아요디아 시내에는 수백 개의 힌두교 사원이 서 있고, 사원의 대문마다 문설주 위에 신어(神魚)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박물관의 입구에 그려진 神魚는 시위가 당겨진 활과 어우러져 있고, 경찰의 계급장에도 神魚가 들어 있었다. 도처에서 神魚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守禦者(수어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神魚는 아요디아 전체에서 흘러 넘치고 있고, 그 州(주)를 대표하는 州章(주장)으로 발전해 있었다. 여기는 글자 그대로 神魚國(신어국)이었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神魚像은 인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었다. 집중 분포지는 이상하게도 아요디아가 중심도시인 우타르 푸라데시(Uttar Pradesh 北洲)뿐이었다. 즉 아유타국의 문화권에서만 神魚의 신비스러운 기능을 신봉하는 사상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리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그해에 KBS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아유타국의 신비, 1985」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물고기가 인류를 구해 준다는 이야기는 지구상 여러 민족의 민속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몽골 사람들도 물고기를 신성시하여 먹지 않는 풍속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기마민족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스키타이族들도 말의 장식으로 물고기 한 쌍을 달고 다녔다는 연구보고서가 있다. 
    
  
 아무도 몰랐던 神魚의 상징 의미
 
   그러나 이러저러한 神魚의 흔적들이 지구의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하였어도 神魚들이 상징하는 의미에 대하여는 알아낼 수 없었다. 아무도 그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요디아의 박물관장도 모르고 스키타이 연구를 많이 하는 독일학계에서도 神魚의 상징성에 대한 전문가가 없었다.
 
  어느 해이었던가. 방글라데시의 다카 국립박물관 입구 바닥에 그려져 있는 神魚像들을 발견하고 박물관장과 큐레이터들에게 문의하였더니, 그들의 대답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지대인 페샤와르에서 시내를 굴러다니는 픽업 트럭에 멋지게 새겨져 있는 神魚像들을 발견하고 그 지역 미술사 권위자인 이슬라마바드 대학의 다니 교수에게 문의하였다.
 
  『글쎄요. 그런 장식을 그린 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상징연구자가 아니라서 권위 있는 대답은 못 하겠습니다. 혹시 캘커타 대학의 무커지 교수라면 당신이 원하는 답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캘커타에 회의차 갈 일이 생겨 무커지 교수를 어렵게 수소문하여 만났더니 그는 오히려 다니 교수가 모른다면 자기도 추측성 설명밖에는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神魚의 의미에 대해 답변하는 사람은 없고 서로 핑퐁을 치고 있었다. 신성스러운 물고기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미궁으로 빠지는 듯하였다.
 
  나는 神魚에 중독되어 여기저기서 물고기만 나타나면 혹시 가락국과 관계가 있나 하고 살펴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때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들르게 되었다. 도서실에서 미국에서 출판된 近東(근동) 미술사 책에서 두 사람이 물고기 모양의 옷을 입고 마주보고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유학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그 박물관의 동양부장이었던 제시카 로슨 여사에게 문의하였다. 제시카는 즉시 근동 담당 큐레이터를 소개해 주었다. 이 전문가는 나를 만나더니 단번에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 사진의 실물이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에게는 근동(Near East), 동양사람들에게는 西아시아로 되어 있는 이란으로부터 터키까지의 광활한 지역에 대한 문화연구는 진공상태가 되어 있다. 1960년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6일 전쟁」으로 시작된 정치적 소용돌이는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미국과 이라크의 걸프전까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 지역을 한가롭게 다니면서 유적과 유물을 살피며 고대 사상이 이동하던 흔적을 찾는 유한계급들이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이 아무에게도 없었다. 
    
  
 숙명적 해후에 화가 났다
 
   나는 다음날 독일로 날아갔다. 냉전 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은 관광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東베를린 지역에 페르가몬 박물관이 있었다. 거기에 내가 평생을 바쳐 만나려고 노력했던 마음속의 연인이 있었다. 돌로 만든 神魚像이 있었다.
 
  거대한 석제 水槽(수조)의 외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신어상(神魚像)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이름도 뜻도 모른 채 신어상이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의 한 박물관에서 자기를 찾고 있는 지구상의 단 한사람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신어상이 새겨 있는 수조는 바빌로니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센나게립 왕이 세운 궁전 중앙에 있던 신앙용 성수(聖水)를 담는 거대한 물통이었다.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복원한 것이었지만 조각은 선명하였다.
 
  신어상(神魚像)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어떤 신앙의 상징이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신전 대문 위나 성수용 수조에 조각하였다. 그들의 주신은 오아네스(Oaness·水神)이고 그 神을 물고기 모양의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 사제가 양쪽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사제는 바빌로니아 식 사각형 수염을 기르고, 왼손에는 물통을 들고 오른손에는 부채 같은 기구를 들고 주신을 향하여 물을 뿌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제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물고기의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위로는 머리, 아래쪽으로는 물고기의 꼬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물고기의 비늘도 선명하게 선각되어 있었다.
 
  한국의 신어상(神魚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평행으로 마주하고 있고, 아요디아의 신어는 45도 정도로 일어선 채 마주보고 있는 데 비하여, 바빌로니아의 신어는 사람처럼 일어선 채 마주보고 있는 차이가 있었다. 모두 페르시아의 가라에서 기원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나는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촬영하려면 큐레이터의 허가가 있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국제적 예의를 무시하였다. 유물이 너무 중요하였고, 훌륭한 만큼 나는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좋은 유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독 정부, 아니 페르가몬 박물관은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인가 무엇인가를 실험하느라고 나라의 문을 꼭 잠그고 비용이 없어서 수십 년간 박물관 소장품 圖錄(도록)조차 출판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동독이 서독과 합치지 않았다면 나 같은 바깥세상의 연구자들은 이런 중요한 유물을 보지도 못한 채 평생을 허송할 뻔하였다.
 
  다행히 나의 무례한 행동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나는 神魚들을 애인의 얼굴처럼 쓰다듬으며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숙명적인 해후에 감격하였다. 
  
    
 페르시아 신화 속의 「가라」가 加羅
 
   神魚의 의미에 대한 나의 관심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으니까 40년이 훌쩍 지나갔다.
 
  이 21세기로 접어든 어느 날 새로 구입한 페르시아 신화 한국어 판을 읽게 되었다.
 
  인류의 만병을 고치는 영약이 있었다. 그 약은 「고케레나」라고 부르는 나무의 열매였다. 고케레나는 바다 속에서 자라는 나무였다. 인류를 파멸시키는 惡神(악신)이 나무의 뿌리를 파 버리려고 두꺼비를 파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알고 보니 나무 뿌리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神通한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고기의 이름이 가라(Kara)이다. 가라가 지성으로 보호하여 고케레나 나무가 잘 자라났고 그 열매와 잎새를 먹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번창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라」가 바로 내가 필생을 바쳐 추적해 온 「신어(神魚)」아닌가? 아요디아의 마치 설화와 유사한 내용이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또 한 번 놀란 것은 페르시아 신화의 「가라」는 가락국의 별칭인 加羅(가라·Kara)와 똑같은 발음이라는 점이다. 페르시아에서는 인류를 살리는 靈藥(영약)을 내는 神木을 보호하는 물고기의 명칭이 한국 역사에서는 국명이 되었단 말인가? 과연 이런 추리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가락국은 신어국 아닌가.
 
  그렇다. 페르시아와 가락국, 이란과 한국의 시공을 뛰어넘는 문화의 동질성은 이렇게 뚜렷하니 쉽게 부정해 버리면 연구자의 태도가 아니다. 같은 시대에 신라 고분에서는 페르시아 제품인 유리 술잔과 寶劍(보검)이 심심찮게 출토되고 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음도 떠오른다.
 
   나의 神魚연구는 끝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한 고개를 넘어가면 또 다른 준령이 내 앞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구약성서 속에서 「魚門(어문·Fish Gate)」이라는 단어를 찾게 된다. 魚門은 바빌로니아의 어느 종족이 신전을 세우고 그 대문에 물고기 모양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이었다. 
  
  고고학적 증거와 신화와 성경의 내용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오래 추적한 보람이 있었다.
 
  페르시아는 옛날부터 정치적으로 바빌로니아와 대립하면서 자라났다. 센나게립 왕 때의 神魚 복장을 한 사제들의 기능이 페르시아 신화의 「가라」의 기능과 서로 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유타국 王孫
 
   신어상을 연구하는 동안 나는 아요디아를 4회 방문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아요디아에 지금도 살고 있는 왕손인 미쉬라 氏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의 인도는 공화국체제니까 총리가 다스리는 나라이지만 각 지역에는 前 시대부터의 토착세력인 토호들이 있다. 중앙정부는 이들에게 재산권을 허용하고 있어서 미쉬라 가문은 학교·병원·莊園(장원) 등을 경영하고 있다.
 
  현재 아요디아의 왕손이 그 옛날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과 혈연으로 연결될는지는 다음 문제로 하고 우선 서로 역사적 정보만이라도 교환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총리 시절의 김종필(金鍾泌)씨 초청으로 미쉬라 氏 부처가 김해를 방문하였고, 이어서 김해 金氏 종친회원들과 김해 출신 실업인들이 아요디아를 방문하였다. 그 결과 아요디아에 허황옥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2002년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 때 화려한 입장식이 있었다. 이때 인도 공주가 가락국에 시집오는 과정이 연출되었다. TV 감독이 내게 전화를 하여 입장식에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인도 공주가 어떤 과정으로 한국에 시집오게 되었는지 해설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마침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한 고고학자의 연구내용이 국제 체육행사에 채택되어 TV 방송을 통하여 아시아人 모두에게 알려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긴 세월 동안 고행(苦行)에 가까운 추적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전설이 역사로 굳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