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일주문]
내소사(來蘇寺)의 일주문을 지나면 곧장 보이는 전나무 숲길
하늘을 찌를듯이 쭉쭉 뻗어올라간 수백그루의 나무들이 터널을 이룬다. 녹음이 우거진 이 길을 걸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며 엄숙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백제 무왕34년(633)에 창건된 고찰로 내소사의 처음 이름은[다시 태어나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라는 뜻의 소래사(蘇來寺)였다고 한다.
[천왕문]
숲길이 끝날 즈음해서 사찰을 지키며, 악귀를 내쫓는다는 사천왕문이 나온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과 내리칠듯 움켜쥔 주먹이 무서워 걸음을 빨리해 본다.
[당산나무]
사천왕문을 통과하고 나오니 내소사의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오며, 바로 눈 앞에 천년도 넘었다는 당산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내소사 초입에 있는 당산나무는 할머니 나무이고 절 마당에 있는 것은 할아버지 당산나무라고 한다.
해마다 정월보름이면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올리고 마을 축제처럼 되었다고 한다. 절 마당에 당산목을 모시고 제를 지내는 행사는 이곳 내소사에만 있다는데 부안에 곳곳에서 당산이라는 안내판이 많이 보이던 것은 민간신앙이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인것 같다. [대웅보전과 3층석탑]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은 조선 인조 11년(1633)에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 앞의 석탑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탑이며, 전북 유형문화재 제 124호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는 3층 석탑이다.원래 대소래사와 소소래사로 지어졌다가 대소래사는 화재로 소실되고, 소소래사가 당나라 때 소정방이 말에 내려서 시주하고 간 이후로 내소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南行日記)]에 <소래사(蘇來寺)>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와전된 것이 분명하다는 설도 있다.
[설선당(設禪堂)과 요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25호)]
설선당(設禪堂)은 승려들과 일반 신도들의 수학 정진 장소 내소사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한가지는 대웅보전을 중수할 때 대목이 3년 동안 기둥, 서까래와 목침만한 나무토막만 깎아 놓아 사미승이 장난 삼아 나무토막 하나를 슬쩍 감추어 놓았다고 한다.
마침내 나무 깎기를 멈추고 대웅전을 짜 맞추는 날, 나무 한 조각이 부족한 사실을 알고 목수가 당황해 하며 주지 스님에게 자신은 대웅전을 지을 자격이 못된다며, 포기하겠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사미승이 감춰둔 나무 조각을 내어 놓았지만, 부정탄 나무라하며 한 조각이 부족한 채로 대웅전을 지었다.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려는 듯 내소사 대웅전은 쇠못 하나 쓰지 않은 짜맞추기 공법으로 지었고 대웅전 천장 우측에 나무 한 토막이 빠져 있다고 한다.
두번째는 대웅전 단청에 관한 전설이다. 대웅전이 완공된 후 한 단청장이가 찾아와 자신에게 단청을 맡겨 주기를 간청한다. 단, 백일 동안 누구도 문을 열고 들여다 보아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약속한 백일이 다 되도록 인기척이 없고 단청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마지막 백일째 되는 날
사미승이 문틈으로 살짝 엿보았더니 새 한 마리가 부리에 붓을 물고 제 몸에서 물감을 묻혀 단청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인기척에 놀란 새가 마지막 한 부분을 단청하지 못하고 날아가 버려 지금도 법당 한 곳에는 단청이 빠져 있다고 한다.
[고려동종(보물 제 277호)]
내소사 동종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종으로 우리 나라 종에서만 보이는 특유의 음통과 용머리 모습을 한 종고리 등을 갖추고 있다. 세번째는 보종각에 있는 동종에 대한 전설이다.동종은 원래 고려 고종9년(1222)에 내변산 청림사의 종으로 주조된 것을 청림사가 폐사된 뒤에 종이 없어져 찾을 길이 없다가 1853년 발견되었다.
그 당시 아무리 종을 쳐도 울리지 않자 종을 울리는 스님이 가져가기로 했는데 내소사 스님이 종을 치자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내소사로 가져왔다는 전설이다.
[부도]
내소사를 내려오다 보니 오른쪽으로 조금 더 들어간 곳에 부도가 보인다.누구를 모신 부도인지...갈 길이 바빠 나중을 기약하고 돌아나오며 아쉬워 사진으로 나마남겨두기 위해 한장 찍었다. 아무래도 고승의 부도일것 같다.
백제 부흥 꿈 쪼개진 바위.. 매창 '이화우' 사랑 엮은 산사[자박자박 소읍탐방]
최흥수 입력 2022. 01. 26. 04:30 댓글 4개전북 부안에는 ‘생거부안’이라는 표현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부안은 어염시초(魚鹽柴草)가 풍부해 부모를 봉양하기 좋은 땅’이라고 보고했다는 데서 유래를 찾는다. 물고기·소금·땔나무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고루 갖춘 땅이라는 의미다.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 학수(박정민)는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밖에 없다’고 한다. 변산은 부안의 서북쪽 해안가로, 여행객도 대개 채석강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 몰린다. 박문수가 본 부안은 곰소와 줄포를 중심으로 한 부안의 동남부였을 듯하다. 산과 바다에 너른 들판과 갯벌까지 갖춘 곳이다.
쪼개진 울금바위 아래 고즈넉한 개암사
외지인에게는 부안보다 변산반도가 익숙하다. 수려한 자연과 풍성한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변산은 전라남북도를 가르는 노령산맥의 끝자락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홀로 뚝 떨어진 변두리 산으로 국내 유일의 반도형 국립공원이다. 내변산의 직소폭포와 의상봉, 외변산의 채석강과 적벽강 등 안팎으로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개암사 초입의 전나무숲. 규모는 작지만 천년 고찰의 운치를 더한다. 개암사 초입의 녹차밭. 전나무숲과 함께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자랑한다.변산 동쪽 상서면에 개암사라는 사찰이 있다. 뒤쪽 봉우리에 울금바위가 상투처럼 솟아 있는데, 대웅전 앞마당에 서면 둘로 갈라진 것처럼 보인다. 절의 명칭은 바로 이 바위에서 유래한다.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 왕사가 변한의 궁궐을 절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나름 ‘천년 고찰’인데 긴 역사에 비하면 덜 알려진 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건했고, 1913년에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차장에서 절 입구까지 짧은 구간에 전나무숲이 형성돼 있다. 규모는 인근 내소사나 평창 월정사에 미치지 못하지만, 150년가량된 아름드리 나무가 고찰의 운치를 더한다. 절간 좌우에는 녹차밭이 있어 전나무숲과 함께 한겨울에도 짙푸른 녹음을 자랑한다. 신라시대 원효 대사가 울금바위 아래의 굴에 머물렀다는데, 이때 녹차를 대접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개암사 대웅전 뒤로 울금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개암사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가람 사이로 울금바위가 보인다. 개암사 대웅보전의 귀면. 잡귀를 물리치는 도깨비라기보다 귀여운 호랑이처럼 보인다.‘개암사중건사적’에 따르면 고려 숙종 때 절을 크게 고쳤다고 한다. 황금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청연각, 서쪽에 백옥교, 남쪽에 청허루가 있었고, 경내의 연못에 꽃과 대나무가 비쳐 마치 극락 세계와 같았다고 한다.
소규모 대숲을 빼면 지금의 개암사는 기록상의 배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전나무숲을 통과해 다리를 건너면 사천왕문이 시야를 가린다. 문을 통과하면 다시 근래에 지은 거대한 2층 문루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뒤쪽 산 능선과 절 이름의 유래가 된 울금바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건축에 문외한이라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 가람 배치다.
절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도 마찬가지다. 곱게 단청한 ‘대웅보전’ 현판 위에 도깨비 두 마리가 보인다. 잡귀나 재앙을 막기 위한 일종의 귀면(鬼面)이다. 단청을 하기 전 오른쪽 도깨비는 시선을 돌려 우측을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는데, 지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귀면이 아니라 귀여운 새끼 호랑이처럼 보인다.
개암사는 부안을 대표하는 시인 이매창의 ‘매창집’을 목판으로 간행한 곳이기도 하다. 입으로 전해오던 그의 시 58편을 엮은 시집이다. 부안의 아전들이 그것도 사찰에서, 죽은 지 58년이 지난 기생의 시집을 간행했다. 작품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만큼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매창(1573∼1610)은 기생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부안 현리였던 이양종의 서녀였다고 한다.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고, 시와 글씨가 뛰어나 황진이에 버금가는 조선시대 여성 시인으로 꼽힌다.
동료 시인인 유희경과의 인연은 그의 대표작 ‘이화우(梨花雨)’로 남았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유희경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한 시기가 아마 오얏꽃 피던 봄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사찰에 이매창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개암사 오른편으로 울금바위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1km가 안 되지만 힘든 오르막길이다. 두 개의 거대한 바위로 형성된 울금바위. 지난해 명승으로 지정됐다. 울금바위 아래의 복신굴. 백제 부흥군의 장수 복신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울금바위 아래 복신굴에서 바깥으로 바라본 풍경.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울금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채 1㎞가 못 되지만 내내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20분은 족히 걸린다. 활엽수가 빼곡한 평범한 산길이라 특별한 감흥은 없는데, 능선 부근에 다다르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울금바위가 길을 막는다. 높이 30~40m에 이르는 바위 군상은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다.
길을 따라 왼쪽으로 돌면 쏟아질 듯한 바위 아래에 커다란 굴이 파여 있다. 이름하여 ‘복신굴’이다. 백제 부흥군의 장수 복신이 은거한 굴이라는 의미다.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멸망하자 그의 사촌 복신과 승려 도침 등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백성들을 모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울금바위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우금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백제 부흥군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주류성이다.
결과적으로 백제 부활의 꿈은 내부 분열로 막을 내린다. 주류성에서 복신은 경쟁자인 도침을 살해하고, 왕권의 위협을 느낀 풍은 복신을 제거한다. 부흥군의 또 다른 근거지인 예산 임존성에선 흑치상지 장군이 당에 투항하고, 거꾸로 부흥군을 공격해 무너뜨린다. 오합지졸의 부흥군이 김유신과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에 맞서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울금바위에서 개암사 주차장으로 연결된 등산로. 산봉우리를 우회하는 순한 길이다. 울금바위에서 개암사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를 걸으면 내변산의 아기자기한 풍광이 펼쳐진다.울금바위에서 가파른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는 다소 아쉽다. 주류성 방향은 가파르고 험해 접근할 수 없고, 등산로는 반대편으로 이어진다. 개암사를 둘러싼 산줄기를 한 바퀴 돌아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약 4㎞ 코스다. 산자락을 우회하는 완만한 내리막이어서 1시간가량 걸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우측으로는 내변산의 아기자기한 산세가, 좌측으로는 부안의 넓은 평야가 내려다보인다.
짜임새 있는 내소사, 짭조름한 곰소항
개암사에서 멀지 않은 진서면 변산의 또 다른 골짜기에 내소사가 있다. 부안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일등공신은 사찰 입구에서 경내에 이르는 약 700m 전나무 숲길이다. 무더운 여름이면 산산한 그늘을 드리우고, 흰눈 내리는 겨울이면 더욱 운치를 더하니 언제라도 좋은 길이다. 평지 사찰이지만 깊은 산중에 든 것처럼 아늑한 것도 이 숲길 덕분이다.
내소사는 오랜 기간 마을 주민과 화합을 다져온 사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절 입구와 대웅전 마당에 수령 1,000년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나무로 불리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는 당산나무다. 매년 열리는 당산제에는 주민들과 내소사 승려들이 함께 참가해 평온을 기원한다고 한다.
관음봉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내소사. 내소사 전나무숲길. 어느 계절에 가도 운치 있는 길이다. 내소사 경내의 당산나무. 사찰 입구의 당산나무와 짝을 이루고 있다. 내소사 요사채의 설선당 현판. 이광사의 글씨로 춤을 추듯 현란하다.내소사는 개암사보다 한 해 빠른 633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관음봉 아래에 차분하게 안긴 절간의 모습도 개암사에 비하면 짜임새 있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화려한 단청이 없어 수수해 보이지만, 불교 미술의 아름다움과 부처의 가르침을 동시에 품고 있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꽃문살은 자체가 뛰어난 공예품이고, 나무조각 하나가 빠진 천장 기둥은 비움의 미학을 가르친다.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완성했다는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살아 있는 듯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대(大)’ 자는 사람이 두 팔과 다리를 벌린 모양에서 진화해 곧장이라도 걸어갈 듯 생동감이 넘친다. 승려들의 거처인 바로 옆 설선당(說禪堂) 현판 역시 춤을 추듯 현란하다. 건물은 화려하지 않아도 주변 경관은 계절 따라 화사하고, 넘치지도 않지만 모자람도 없으니 한결같이 사랑받는 사찰이다.
곰소항 옆 나룻산공원에서 본 곰소만 풍경. 질펀한 갯벌 지형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다. 곰소항에서는 풀치(갈치 새끼)를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풀치조림은 젓갈과 함께 곰소항의 대표 먹거리다.내소사에서 바닷가로 나오면 짭조름한 젓갈 내음이 풍기는 곰소항이다. 곰소는 예부터 칠산바다의 온갖 해산물이 모이는 곳이었다. 곰소의 소는 물웅덩이가 아니라 고창과 부안 사이의 바닷길, 곰소만이다. 간조 때는 그 넓은 바다가 갯벌로 변신하니 물고기뿐만 아니라 조개까지 풍성한 항구다. 곰소젓갈시장에는 새우젓 갈치젓 멸치젓은 기본이고, 바지락젓 어리굴젓 (명태)아가미젓 소라젓까지 바다에서 나는 모든 젓갈이 모여 있다.
곰소항의 식당마다 3~4가지 젓갈이 기본 반찬으로 나오니 따로 젓갈백반을 시키지 않아도 된다. 곰소항의 특이한 음식 중 하나는 풀치다. 꾸덕꾸덕하게 말린 갈치를 조려 내는 음식이다. 말리는 모양이 꼭 풀처럼 휘어져 있어서 이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실제 풀치는 갈치 새끼라는 뜻이다.
곰소만의 가장 안쪽 줄포에는 대규모 갯벌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저지대 침수에 대비하기 위해 제방을 쌓아 조성한 공원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담수 습지는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물길이 되었고, 약 66만㎡(20만 평)의 광활한 갈대밭으로 낸 10리 산책로는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해질 무렵 운치가 그만이다.
줄포만갯벌생태공원의 10리 갈대밭길. 줄포만갯벌생태공원 제방 바깥으로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줄포만갯벌생태공원 갈대 수풀 안에 쪽배 한 척이 설치작품처럼 버려져 있다.주목을 끌었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세트는 철거됐고, 그 자리는 야생화 동산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사실 ‘생태와의 단절’로 출발한 생태공원이지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며 이제야 이름에 부합하는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부안=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캄파눌라 | 다시한번 가고 싶은 곳이 내소사 인데..마음만 있을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아득하고...좋은 절이였고 숲속을 걷는 듯한..길도 있었는데..오늘 그 길이 많이도 그리워 집니다. 2006/06/13 11:2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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