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이 순리다.
새벽 4시에 시작한 오름이 세시간 반의 사투 끝에 토롱라(5,416m)에서 끝이 났다.
토롱페디(4,450m)에서 시작했으니 고소증세에 시달리며 1천m에 가까운 고도를 올린 것이다. 내리막의 끝은 묵티나트(3,760m)이니 1,600m를 내려가야 '안나푸르나 라운딩' 7일째 일정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고비인 토롱라에 올랐으므로 ‘안나푸르나 라운딩’ 전체 거리의 절반을 지나온 것이고 고소증에 대한 걱정도 없어져서 한결 수월한 여정이 될 것이다.
토롱라에서 묵티나트로 내려가는 하산길. '은둔의 숨겨진 왕국' 무스탕의 입구다.
묵티나트에서 토롱라로 오르는 당나귀 행렬. 이 길이 무스탕 지역과 마낭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고 무역로였다.
토롱라에서 묵티나트로 내려가는 길이 한 눈에 들어 왔다.
풀 한 포기 없는 거친 황토색 언덕과 설산들로 둘러싸인 하늘아래 첫 동네 묵티나트. ‘마지막 남은 은둔의 왕국’이라고 불렸던 무스탕 왕국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무스탕 왕국은 14세기에 세워진 왕국으로 티베트에 의해 둘러싸인 오래되고 외로운 땅이다. 동쪽의 돌포(Dolpo)에서 시작해 서쪽에 있는 라다크(Ladakh)까지 펼쳐진 거대한 지역이다.
원래이름은 로만탕 왕국이었으나 무스탕으로 서방에 잘못 알려졌다고 한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무스탕은 티벳에서 인도까지 이어지는 히말라야 횡단무역을 지배했다. 황금기였다. 이 황금시대 기간에 무스탕은 서부 티벳 전 지역을 지배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 로만탕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그 때 남겨진 그들의 문화 유산은 아직도 곰파(사원)과 곰파의 화려하고도 장엄한 프레스코 벽화로 남아있다.
17세기가 지나면서부터 무스탕도 쇠망의 길을 걷는다. 무스탕 왕국은 종족과 문화의 뿌리가 티벳이었음에도 네팔과 연합하여 티벳과 싸웠고 곧 네팔에 합병되었다. 무스탕의 왕족들은 티벳과의 싸움에서 네팔을 지원하는 대가로 농토에 대한 권리를 인정 받았다. 무스탕 왕국은 1951년 네팔이 외국인들에 국경을 개방하고 방문을 허락할 때까지 역사에서 사라진 ‘은둔의 왕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스탕 왕국은 티벳의 분리독립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번 역사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는다.
1950년 10월 7일 중국은 중국 본토를 하나의 정부가 통치한다는 공산당의 구호 아래 티벳 침략을 감행했다. 점령군이었던 인민해방군은 끊임없이 티벳 문화가 봉건적이라며 소수민족 말살정책을 폈고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1959년 3월 10일, 수도 라싸를 비롯해 곳곳에서 전개된 독립시위는 수만명이 숨진 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280만명의 티벳인들은 네팔과 인도 등지로 탄압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티벳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달라이 라마도 이때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50년 전 오늘이었다. 달라이 라마도 이 험한 무스탕의 고갯길을 넘었을 것이다.
무스탕은 티벳 분리독립운동이 무력진압 된 뒤 중국의 티벳 점령에 항거한 사람들이 많이 넘어와 무장게릴라 캄파(Khampa)의 근거지가 되었다.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가 녹음으로 중국과 무장투쟁을 중지할 것을 호소하자 많은 캄파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네팔 난민촌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일부는 죽을 때까지 항거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무스탕으로 들어가는 루트는 완전히 폐쇄되었고 수십 년 간의 이 어려웠던 기간에 무스탕 계곡은 외부와 완전 차단되었다. 1960년부터 1991년까지 무스탕이 외부인에게 열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저 땅은 얼마나 척박하고 얼마나 많은 슬픔을 간직한 땅인가.
묵티나트의 가을풍경. 산 허리를 돌아가는 길 아래에 카그베니가 있을 것이다. 짚차가 다닌다.
황량한 언덕과 계곡에 유독 묵티나트 주변에만 나무와 풀이 자란다.
'룽다'가 휘날리는 마을 뒤 언덕위에 곰파(사원).
토롱라에서 4시간을 내려오니 급경사가 끝나고 계곡옆에 서너개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포터 기리가 구운 감자를 먹으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즌에만 문을 여는 롯지란다. 그 동안 무던히도 나를 괴롭혔던 고소증세도 말끔히 사라졌다. 페트병에 든 코카콜라 한 병을 사서 한번에 마셔버렸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라면 바로 이런 것 일게다. 베낭에 기대서 꿀 같은 낮잠에 빠져보는 여유도 즐겼다.
임시 롯지에서 묵티나트까지는 두시간 거리다.
묵티나트에서도 롯지 잡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군데를 물어서 외딴 곳의 롯지를 잡았다.
4일만에 처음으로 세수를 하고 머리 감고 샤워를 했다. 마낭을 지나면서부터는 세수할 여건도 안되어서 물휴지로 얼굴을 닦고 컵에 물을 담아서 겨우 양치질만 할 수 있었다. 3,000m가 넘는 고산 트레킹에서는 머리를 감지 않는다. 몸의 열을 뺏겨서 감기에 걸리면 고소증세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묵티나트는 칼리 간다크 나디(강)로 흐르는 협곡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다.
좀솜까지 비행기로 와서 카그베니와 묵티나트에서 휴가를 보내는 여행객들도 많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야크털로 만든 모자와 옷감을 파는 노점이 즐비하게 서서 여행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마을 주변에만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었는데 마을 외곽에는 제법 큰 논밭이 있어서 가을 추수가 한창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아낙들이 가을걷이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이방인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스무살이 되었을까? 수줍음 많고 앳된 처녀들이었다.
칼리 간다키 협곡의 바람은 거세다. 특히 오후가 되면 강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먼지로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되도록 오전에 일정을 마쳐야 한다.
칼리 간다키 나디(강)을 건너는 당나귀 행렬. 세계 최고의 협곡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8일째.
오늘 묵티나트에서 어디까지 갈 것인가가 하산길의 중요한 결정이다.
이제부터는 완만한 내리막길 뿐이다. 묵티나트부터는 중간에 길이 끊어지긴 하지만 짚차를 이용해서 내려갈 수도 있고 하루거리의 좀솜까지 가서 비행기로 포카라까지 바로 갈 수 도 있다.
4일이 남았는데 적당한 속도로 베니로 내려가는 것이 일정상 가장 안전한 선택인 것 같았다.
베니에 가면 포카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애초부터 평범하고 쉬운 길을 택한 건 아니지 않은가.
고라파니까지 가서 푼힐의 일출을 꼭 봐야한다는 욕심이 버리기 어려웠다.
베니로 내려가는 것보다 이틀이 더 필요하고 타토파니에서 푼힐까지는 하루에 고도를 2,000m를 올려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또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자.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포터 기리가 문제였다. 초반부터 무리한 것 때문인지 회복이 더뎌 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내 베낭 무게를 줄이고 기리에게 나머지 짐을 모두 맡겨 짚차를 태워 보냈다.
좀솜, 마르파를 지나 나르중까지 이틀가야 할 거리를 하루에 마쳤다. 하지만 트레킹 중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지름길을 가다보니 무스탕 초입 마을 카그베니를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과 칼리 간다키 강의 광활한 모습을 보면서도 사진 찍을 여유도 없이 지나가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칼리 간다키 나디(Kali Gandaki Nadi)는 동쪽으로 안나푸르나 연봉들과 접하고 서쪽으로 다울라기리에 접해 형성된 거대한 협곡이다. 세계 최고의 협곡으로 알려져 있다. 8,000m급 산군들 사이에 흐르는 강이니 그 깊이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칼리 간다키는 카트만두에서 트라슐라 강과 만나고 인도로 흘러가면서 갠지스 강의 원류가 된다.
카그베니에서부터 강폭이 넓어지기 시작한 칼리 간다키 강은 좀솜에 이르기까지 광활하게 펼쳐졌다 다시 툭체를 지나 나르중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강폭이 1km가 넘는다. 건기의 트레킹 코스는 이 강을 따라가는데 우기때는 강이 넘쳐 길이 사라져버릴 때도 있다고 한다.
길을 버리고 말라붙은 강 바닥을 따라 걸었다. 오후가 되면서 칼리 간다키강에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르중에 도착할 즈음 강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다울라기리(8,172m)와 툭체피크(6,920m), 닐기리(7,061m)의 연봉들은 붉은 빛을 내뿜으며 또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나마스떼"
네팔 말은 이 한마디 밖에 배우지 못했다.
산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마스떼"라고 하면 상대방도 "나마스떼"라고 인사를 한다.
'내 안에 있는 신이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신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날 여유가 없었다.
보이는대로 "나마스떼"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신기한 것은 그들의 반응이었다.
낮선 이방인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카메라를 들이대면 카메라를 피하려 하거나 싫은 표정을 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안나푸르나에서 나의 카메라와 마주친 사람들은 카메라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주 오래된 연인이나 친구인 것처럼.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포터들. 포터들 중에는 나이어린 소년들도 많았고 여자들도 있다.
카메라를 들고 20여년의 고행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자신 없는, 가장 어려운 사진은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찍는 것, '포트레이트(portrait)' 사진이다.
사람의 얼굴을 카메라로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겪은 세월과 깊이가 보인다.
자기의 생각과 주관이 뚜렷하면 사진에서도 그 표정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생각없이 입만 나불거리는 인사라면 셔터 소리에서 벌써 그 사람됨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관상쟁이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안나푸르나의 사람들을 만나고 사진을 찍는 것은 참 편안했다.
카메라를 거부하지도 않고 당당했다.
땔감을 구해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짧은 휴식.
빨래하는 처녀. 안나푸르나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왼쪽 코에 피어싱을 했다.
왜 왼쪽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브라가. 티벳 난민촌 앞에서 짐을 나르다 잠시 쉬고 있는 여인.
마낭가는 길 훔데 마을 입구에서 갓 구운 빵을 팔던 소녀. 영어도 썩 잘했다.
이른 아침 타토파니 초입에서 트레커들에게 과일을 팔고 있는 여자 어린이들.
사진을 찍고 30Rs(500원정도)의 과일을 사서 먹어봤는데 최악이었다.
안나푸르나 사람들의 삶은 누추하고 빈곤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자유롭고 풍요로웠다.
그 자유는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영혼은 자신을 타인에게 내 보이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타인을 배척하고 시기한다. 안나푸르나 사람들은 자신의 궁핍을 내보이는데 꺼려하지도 않았고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았다.
네팔인들의 행복지수는 항상 세계 상위권이라고 한다.
물질적 탐욕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서울은 어떠한가.
투쟁하고 남의 것을 탐하고 이웃을 시기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누르려하지 않는가.
안나푸르나 라운딩 9일째
'안나푸르나 라운딩’ 9일째 되는 날 나르중(2,550m)에서 칼리 간다키(Kali Gandaki Nadi) 협곡을 따라 타토파니(Tatopani 1,190m)까지 내려왔다.
이제 마지막 고비인 푼힐(Poon Hill 3,193m)만 오르면 긴 여정이 끝난다.
묵티나트에서 나르중까지 하루, 나르중에서 타토파니까지 하루를 걸었다.
정상적인 트레킹 속도라면 나흘 거리다. 푼힐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리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점심을 먹고 한참을 내려오다 가사(Ghasa 2,010m)에서 포터인 기리를 기다리는데 세시간이 지나도록 기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사까지 오는 길은 산사태로 무너져 내려 트레킹 코스 중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다. 걱정이 됐다.
베낭을 가게에 맡기고 포터를 찾아 오던 길을 되돌아 갔다.
한 시간 쯤 거슬러 올라갔을 때 멀리서 기리의 모습이 보였다. 기진 맥진한 기리가 그래도 나름 열심히 내려오고 있었다. 갈 길이 바쁜데 중간에서 뒤에 쳐진 포터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무사히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개념도. 베시사하르에서 출발하여 마낭, 토롱라(5,416m)를 넘어 나야풀까지 안나푸르나
산군을 돌아오는 약 250km의 트레킹 코스이다.
타토파니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지나서였다. 헤드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둘이서 별만 총총한 어두운 길을 걸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9일째 밤은 타토파니에서 보냈다. 온천이 있어 트레커들이 노천 온천탕에서 피로를 풀고 가는 곳이라고 했지만 온천에 몸을 담그려던 꿈은 접었다.
푼힐에 해가 떠올라 붉게 물들었다. 멀리 다울라기리 산군이 펼쳐진다.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푼힐에서 내려오는 길. 풀잎과 나뭇가지에 이슬이 얼어붙어 맺혔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10일째.
새벽에 일어나 미리 예약한 아침을 먹고 고라파니(Ghorepani 2,869m)를 향해 출발했다.
아침 6시.
포터 기리는 버스를 태워 베니로 내려보냈다. 다음날 오후에 나의 트레킹 종착점인 나야풀(Nayapul 1,070m)에서 만나기로 했다. 기리는 드디어 무거운 짐에서 해방됐다.
하지만 나는 타토파니에서 고라파니, 푼힐까지 2,000m를 올라 갔다가 다시 2,000m를 내려와야 한다. 고라파니 가는 길은 끝도 없는 오르막과 더위 때문에 괴로웠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고라파니에 도착했다.
고라파니는 포카라에서 푼힐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연결되는 트레킹의 요충지여서 제법 붐볐다. 큰 길과 가까운 롯지는 벌써 만원이었다.
푼힐은 왼쪽으로 다울라기리(Dhaulagiri 8,172m) 산군에서 오른쪽 안나푸르나 산군까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라 비교적 짧은 여행일정을 잡은 트레커들에게 인기였다. 특히 마차푸차레(Machapuchhre 6,997m)가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나야풀에서 이틀 올라가고 하루면 하산이 가능하다.
롯지를 잡고 해지기 전에 푼힐로 오른다. 고라파니에서 한시간 거리지만 고도가 3,000m가 넘어서 숨이 막히는 오르막이다. 푼힐은 보통 새벽에 오른다. 다울라기리와 안나푸르나 봉우리에 붉게 떠오르는 일출 장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질녁의 푼힐도 운치가 있었다.
구름에 가린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가 어렴풋이 보였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11일째. 마지막 날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벌써 밖은 푼힐로 오르는 사람들로 떠들썩하다. 작은 베낭에 카메라를 넣고 어제 갔던 길을 다시 오른다. 정상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푼힐 전망대는 벌써 계단까지 발 디딜 틈도 없다. 우모복을 입고 털모자를 써도 몸이 떨렸다.
일출은 아주 천천히 시작된다. 보통 일출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에서 해가 올라오면서 시작되지만 푼힐에서의 일출은 독특하다. 맨 먼저 다울라기리 꼭대기가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곧이어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이 차례로 붉게 물든다. 마차푸차레는 마지막이다. 푼힐에 햇살이 들어올 때 쯤에는 붉게 물들던 봉우리들은 하얀 설산으로 변한다. 푼힐에서의 일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제 내려가는 길.
고라파니 롯지에서 아침을 먹고 8시에 하산을 시작했다. 체력이 다하고 다리에 힘이 빠진 상태에서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더 힘들다. 끝도 없는 돌계단이 계속됐다. 울레리(Ulleri 1,960m)에서 힐레(Hile 1,480m)까지 500m 내리막은 혼까지 쏙 빼버린다. 이 길을 오르는데 사흘 걸렸다는 트레커도 있었다. 어지간히 단련이 된 산꾼이 아니면 죽음의 오름으로 기억되고도 남으리라.
트레킹의 종착점인 나야풀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반이었다. 기리가 버스타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먹을 기력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독일에서 온 대학생 두 명과 같이 비용을 나누어서 포카라 가는 택시를 탔다.
포카라의 생명인 폐와 호수. 호수에 비친 안나푸르나의 일출.
뾰쪽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물고기의 꼬리(Fish Tail)로 불리는 마차푸차레(6,997m)다.
마차푸차레는 네팔인들이 신성시해 히말라야 봉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미등정 봉우리로 남아있다.
폐와 호수. 호수 한 가운데 사원이 있고 호수 주변은 레이크 사이드라고 해서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 등
휴양시설이 몰려있다.
포카라(POKHARA 820m)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니 마당에 먼저 자리를 잡은 한국 여행객들이 있었다. 루크라가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위한 전초기지라면 포카라는 안나푸르나의 전초기지와 다름없었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였는데 한국 베낭 여행객들이 많이 묵는 곳이었다.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와 쉬는 사람들과 이제 곧 미지의 땅으로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트레킹을 마친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트레킹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은 더 긴장을 하고 이야기에 열중한다. 사소한 정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를 하기도 한다.
그 속에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 있었다.
카트만두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같은 게스트 하우스로 찾아가던 중년의 사내와 시간만 나면 오지여행을 떠난다는 회사원 아가씨였다. 카트만두 공항에 마중 나온 안내원을 따라 나선 건 나를 포함해 4명이었다. 젊은 총각 한 명은 일주일 만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갔다 내려오는 숨가쁜 일정을 택해 벌써 귀국했을 것이고, 나는 안나푸르나 라운딩, 나머지 둘은 푼힐(Poon Hill 3,193m)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nnapurna Base Camp 4,130m)까지 가는 비교적 여유있는 코스를 택해서 뿔뿔이 흩어졌다가 포카라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혼자서 안나푸르나를 찾아왔다는 공통점 밖에 없었지만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금방 친구가 된다.
열 하루 동안 걷기에 지친 나를 이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포카라에서 시간은 하룻밤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카트만두로 이동해야 한다. 먼저 포카라에 도착해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선배들에게 이 짧은 시간에 포카라에서 무엇을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호수에서 한 시간 보트 타고 삼겹살 먹으러 가면 돼."
"삼겹살?"
"여기도 삼겹살 있나요?"
"한국 삼겹살 보다 맛있어. 소주도 있다니깐."
"좋습니다! 오늘 하산주는 제가 쏩니다."
포카라에도 한국식당이 몇 군데 있었다. 값도 싸고 음식도 좋았다. 요리사들도 한국에서 오래 생활한 베테랑들이란다.
그 날 먹은 삼겹살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삽겹살 랭킹 투.
랭킹 원은? 일본 고베 지진(한신 대지진) 취재 갔을 때이다.
일주일 동안 컵라면으로 연명하다가 차이나타운으로 들어 갔는데 그 지진 와중에도 길거리에서 삼겹살 구워서 팔았다. 한 점에 500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중국인들의 비지니스 마인드에 혀를 내두르면서 삼겹살을 허겁지겁 삼켰던 기억. ...
1995년 1월. 결코 잊을 수 없다.
같이 삼겹살 테이블에 앉았던 스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행을 마치고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던 스님이었는데 우리 일행이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나서자 스님이 뒤따라 나선 것이다.
오랜만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려고 나섰는데 스님과는 좀 어울리지 않을까봐 은근히 걱정이 됐다.
"스님. 사실은 저희들이 삼겹살 먹으러 가는데 스님이 드실 만한 것이 있으면 따로 시키겠습니다."
스님 왈,
"탁발은 원래 주는 사람 마음이지요. 얻어먹는 탁발승이 메뉴를 따지겠습니까?. 허허."
"ㅎㅎㅎ”
스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에도 폭탄주는 여러 차례 돌고 돌았다.
언젠가는 꼭 다시 안나푸르나로 돌아 오자며 건배를 했지만 날이 밝고 ‘
먼 그 곳’ 샹그릴라의 땅을 떠나면 기약이 없는 마지막 밤의 의식이었다.
포카라 호수를 끼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이 있었다. 포카라 폐와 호수(Phewa Tal)는 안나푸르나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다가 포카라에서 잠시 머무르다 가는 곳이다. 이 호수가 없었다면 포카라는 그저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포카라 호수는 포카라의 보석과 같은 곳이었다.
호수가 벤치에 셋이 나란히 앉아 불빛을 반사하는 호수를 한참 바라보는데 젊은 처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는 솔로니까 혼자 여행하지만 아저씨들은 왜 혼자 산에 다녀요?"
"그러니까... 나는 기러기라서 혼자 올 수 밖에 없었고 다음엔 꼭 가족이랑 같이 오고 싶어."
"아저씨는요?"
젊은 처자가 중년사내에게 다시 물었다.
"사실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아내를 묻고 왔어."
“......”
"지난 봄에 안나푸르나에 꼭 같이 가자고 아내와 약속을 했거든. 이제야 그 약속을 지키게 됐어."
"아내를 베이스캠프에 묻고 왔는데 너무 추우면 어떡하지?”
사내는 한번도 호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취기가 확 달아났다.
사내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기로 아내와 약속을 했었다.
둘이 다 산을 좋아해서 결혼 후 첫 여행을 안나푸르나에서 보낼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주말이면 주변 산을 같이 올랐다. 체력이 약했던 아내는 더 열심이었다. 사내가 시간이 없으면 혼자 산악회를 따라 다녔다.
그의 아내가 사고를 당한 건 지난 여름이었다.
그날도 아내는 산악회를 따라 나섰다. 아내는 희양산 암릉을 오르다 실족하고 말았다. 바로 앞에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암릉을 오르는 아내에게 스틱을 내밀었고 스틱이 빠지면서 바위에서 추락했다. 등산용 스틱의 구조를 몰라서 당한 초보적인 실수였으나 운명은 그 실수를 피해가지 않았다.
사내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화장하기 전 아내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하고 있다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묻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사내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떻게든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 하는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흐를 뿐. 언어라는 것은 얼마나 열등한가. 이 상황에서 그 사내에게 해 줄 아무말도 생각나지 않다니.
사내가 아내의 머리카락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에 묻던 날 밤, 사내는 갑작스럽게 심한 고소증에 시달렸다. 잠든 젊은 처자를 깨워 부축을 받으며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3,700m)로 철수했다고 한다. 천천히 내려와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밤새 기어서 내려온 것이다. 아내와의 이별 의식이었을까?
폐와 호수의 아침. 안나푸르나에서는 삶과 죽음이 서로 닿아있다.
하늘에 떠있는 해가 삶이라면 호수에 비친 해는 죽음일까?
마차푸차레. 마차푸차레 오른쪽 봉우리는 안나푸르나 2봉(7,93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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