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공정의 핵심 사안인 간도(間島) 영유권과 국경선을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분쟁이 아직도 ‘미해결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한 중국 학자의 논문이 중국의 권위 있는 국제전략연구기구 홈페이지에 올라 관심을 끌고 있다. 국제전략연구기구는 2002년 중국에서 설립된 첫 민간 국제전략 연구기관으로 권위 있는 논문과 평론만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다. 이곳에 게재된 ‘중국-조선 국경선 쟁의의 발단(中朝邊界爭端)’이라는 논문은 “한국이 1992년 중국과 수교할 당시 백두산 천지와 옌볜(延邊) 지구의 귀속 문제를 제기했다”며 “중국과 한국 사이에 여전히 영토와 영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논문은 저자의 이름 없이 ‘jiayi’로 등록돼 있다.
▽“정계비(定界碑) 잘못 세웠다?”=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712년 중국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가 파견한 목극등(穆克登)은 무관 출신으로 변경 조사에 필요한 지식이 턱없이 모자라 압록강과 도문(圖們)강의 발원지를 찾지도 못했고 정계비를 세울 때도 완전히 조선 관원에 의존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국경선이 청조에 불리하게 세워졌으며 백두산정계비에 쓰인 국경선 압록(鴨綠)-토문(土門)의 위치와 발원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고 이 논문은 지적했다. 또 조선과 청나라가 1883년부터 1888년까지 여러 차례 담판을 벌였지만 끝내 아무런 결과도 도출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간도 영유권 문제 안 끝나=간도 문제는 청나라가 1664년부터 1886년까지 222년간 만주지역에 주변 민족의 입주를 금지하는 봉금(封禁)정책을 실시했지만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개척 활동을 하면서 발생했다고 이 논문은 주장했다. 조선은 이후 간도를 자국 땅이라며 20세기 초엔 러시아와 옌볜을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협약을 맺고 이범윤(李范允)을 간도 시찰사(視察使)로 파견했다는 것. 그러나 을사늑약(1905년) 이후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 나서 1909년 9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선으로 한 간도협약이 맺어졌다고 이 논문은 소개했다. 육낙현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대표는 “수교 당시 한국이 간도 및 백두산 천지의 귀속 문제를 제기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며 “중국도 국경 문제가 미해결 상태임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논문”이라고 말했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백두산정계비와 '잃어버린 땅' 간도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입력 2018.06.10. 09:01
[신동아]
19세기 말까지도 조선과 청은 국경을 두고 다퉜으나
1909년 일제가 청과 맺은 간도협약으로 간도는 중국 땅이 됐다.
1962년 북한-중국 국경협정이 체결됐으나
통일 후 압록강에서 랴오닝성 펑황(鳳凰)까지의 영유권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환관당과의 정쟁에서 패배한 사가법은 창장 이북에 위치한 난징의 울타리 양저우(揚州)를 방어하고자 북상했다.
청나라군이 난징을 향해 내려오는데도 주유숭은 미녀를 선발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했다.
청(淸) 실권자 아이신고로 도얼곤은 금(金)나라가 그랬듯 화이허(淮河) 이북만 차지할 생각이었으나
남명 정부가 뿌리째 썩은 것을 알아채고는 중국 전체를 장악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南明 정벌 참전 조선팔기軍
남명 정부는 유택청, 고걸, 유량좌, 황득공 등 강북 4진 주둔 장군들로 하여금 남하하는 청나라군에 대응하게 했다.
고걸은 농민군에서 이자성의 부하로 있던 인물이다. 이들도 원나라 말기 장군들과 같이 상호 세력 다툼에만 골몰했다.
청나라군은 허난을 쉽게 평정하고 양저우로 진격해 내려왔다.
주유숭은 고걸이 지휘하던 10만 대군으로 하여금 사가법의 지휘하에 들어가도록 명령했으나,
마사영은 사가법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이 두려워 고걸의 군대를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가법 휘하에는 2만 병력밖에 남아있지 않게 됐다. 1645년 4월 청나라군의 맹공으로 양저우가 함락되고,
주민 70여만 명이 학살당했다. 이어 난징도 무너졌으며 주유숭과 마사영은 도주했다.
전겸익은 항복하고, 임시 황제 주유숭은 난징 근처 우후(蕪湖)에서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베이징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노왕 주이해, 당왕 주율건, 영력제 계왕 주유랑(朱由榔) 등이 명나라 유신들의 지원을 받아 푸젠, 광둥, 광시, 윈난 등에서
망명정권을 수립했으나 그것은 폭풍 앞에 놓인 명나라의 마지막 불꽃일 뿐이었다.
쓰촨의 지배자 장헌충은 1646년 11월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패망했다.
장헌충 군단은 공산주의적 성격을 지녀 중소 지주와 지식인을 적으로 간주해 모두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다.
푸젠의 무역 군벌 정지룡은 청나라에 항복했으나 정가(鄭家) 세력은 유지되고 있었다.
1650년 푸젠 앞바다 아모이섬(샤먼)의 대안(對岸) 고랑서(鼓浪嶼)에 주둔한 정지룡의 아들 정삼(1624~1662)은
아모이를 습격해 6촌 형제 정채, 정련을 죽이고 정가군단(鄭家軍團)을 장악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타이완 점령한 明부흥군
정성공은 1658년 17만 대군을 동원해 명나라 부흥에 나섰다.
청나라군 상당수가 남중국 각지에서 망명정권을 세운 영력제군과 교전 중이었기에
정성공군은 창장 하류 대부분을 손쉽게 장악했으나 난징 공략은 쉽지 않았다.
정가군단 장병들은 지나치게 쉽게 전공(戰功)을 올려온 터라 무리한 작전을 펴곤 했다.
난징성 남쪽 신책문에서 청나라군이 갑자기 뛰쳐나오고, 충밍다오 주둔 청나라군도 배후를 찔러 들어오자 정성공군은 대패했다.
정성공은 결국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정성공은 푸젠성 대안 타이완(臺灣) 점령을 결심했다.
타이완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1661년 3월 정성공은 수백 척 함선에 병사 2만5000명을 태우고 타이완으로 향했다.
정가함대는 4월 제란디아 요새가 있던 타이난(臺南) 앞바다에 상륙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지원군과 함께 제란디아성에서 농성(籠城)에 들어갔으나 1662년 2월 항복했다.
포위된 지 6개월 만이었다. 1624년부터 38년간 이어진 네덜란드의 타이완 지배가 끝났다.
정성공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필리핀 정복을 계획했으나 1662년 6월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아들 정경은 그 후 20여 년간 타이완을 근거로 반청운동을 벌였다.
영력제 주유랑은 광시와 윈난 등에서 복명(復明) 활동을 계속했다.
가톨릭에 귀의한 주유랑은 로마교황청에까지 사신을 보내 원군(援軍)을 요청했다.
이정국과 손가망이 지휘한 영력제군은 1654년 광시성 구이린에 주둔한 공유덕의 8만 청나라 대군을 전멸시키는 등
한때 중국 남부 7개성을 영향력하에 뒀으나 마길상, 이정국, 손가망 등 유력자 간 내분으로 곧 멸망의 길을 걸었다.
버마로 도주한 영력제의 최후
영력제 정권이 패망기에 접어든 1659년 3월 조선에서는 효종 이호(李淏)가
산림(성리학 사대부 세력)의 거두 송시열과 단독면담(己亥獨對)해 북벌 문제를 논의했지만
그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그해 5월 재위 10년 만에 사망했다.
청나라 조정은 중국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상가희를 광둥에, 경중명의 아들 경계무를 푸젠에, 오삼계를 윈난에 분봉(分封)했다.
평서왕 오삼계는 티베트, 버마 등과의 교역 및 광산 개발 등을 통해 영지를 발전시켰다.
상가희, 경계무, 오삼계의 삼번(三藩)은 독자적인 인사권과 군대를 갖고,
국방비 명목으로 청 조정으로부터 매년 2000만 냥의 보조금을 받는 등 독립국으로 행세했다.
‘삼번의 난'은 평남왕 상가희가 아들 상지신과의 불화로 은퇴를 신청한 데서 비롯됐다.
1673년 3월 상가희는 랴오둥 귀향(歸鄕)을 요청하면서 아들 상지신에게 왕작(王爵)을 세습해줄 것을 요청했다.
20세의 청년 황제 강희제(1654~1722)는 귀향은 허락했지만, 왕작 세습은 거부했다.
이에 놀란 오삼계와 경계무의 아들 경정충도 청 조정의 의지를 시험해보자 철번(撤藩·번왕국을 폐지함)을 신청했다.
청나라 조정은 철번을 받아들이자는 소수 강경파와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다수 온건파로 나뉘었다.
강희제는 철번 신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에 반발한 오삼계는 1673년 반란을 일으켜
윈난-구이저우에서 북상해 쓰촨을 장악하는 한편, 창장의 남쪽 지류 샹장(湘江)을 타고 올라가 우창과 장링(형주)도 점령했다.
오삼계가 중국의 거의 절반을 손아귀에 넣자 광시장군 손연령(孫延齡)이 투항하고,
산시(陝西)제독 왕보신(王輔臣)은 반란을 일으켰다.
일부 한족 호족(豪族)들도 오삼계에 동조했다.
청나라 조정은 상지신과 경정충을 오삼계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광둥과 푸젠의 철번을 취소했다.
분할과 지배(Devide & Rule) 작전을 취한 것이다.
조선, 북벌을 논하다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에서도 북벌 주장이 다시 대두됐다.
현종 집권기인 1674년 7월 남인 계열 윤휴(尹鑴)는 비밀 상소를 올려 "조선의 정병(精兵)과 강한 활솜씨는 천하에 이름이 있으며,
화포를 곁들이면 진격하기에 충분하다. 베이징으로 군대를 보내는 한편, 타이완의 정가군단과 힘을 합쳐
청나라의 중심부를 흔들어야 한다. 그리고 남중국과 일본에도 격문을 보내어 함께 떨쳐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중국에서 삼번이, 타이완에서 정가군단이 반청 군사 활동에 나선 상황에서 조선도 북벌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윤휴의 북벌론은 남인을 포함, 성리학 사대부 거의 모두로부터 비현실적 주장으로 간주됐다.
윤휴 역시 '명나라는 우리의 은인'이라는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觀) 틀에서 북벌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북벌 주장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또는 정쟁 차원에서 생명력을 지녔다.
중국의 민심은 한족 오삼계가 아닌 오랑캐 만주족 강희제를 지지했다. 청나라 통치가 명나라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오삼계는 군대를 서부 윈난→쓰촨→산시로(路)와 동부 윈난→구이저우→후난로(路) 두 갈래로 나눠 진격하되
서북부 산시(陝西)와 동남부 저장 2개의 날개로 베이징의 목을 조르려 했으나
경제 중심지 장쑤, 장시, 저장 등을 장악한 청군의 저항은 강력했다.
청군은 오삼계군의 중심부로 돌입해 양 날개를 잘라내는 전술로 나아갔다. 중심부를 돌파당한 오삼계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1676년 말 경정충과 상지신이 청나라에 항복했다. 오삼계는 세(勢)를 과시하고자 1678년 장링에서 주(周)나라 황제에 즉위했다.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오삼계는 즉위 직후 죽고, 그를 계승한 손자 오세번도 1681년 쿤밍에서 자결함으로써 삼번의 난은 종식됐다.
상지신은 앞서 베이징으로 소환돼 처분을 받았으며, 경정충은 살해됐다.
1683년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도 펑후다오(澎湖島) 해전에서 청나라 해군에 대패하고,
정지룡의 부하였던 해군제독 시랑(施琅)에게 항복했다. 중국 사상 최초로 중원 정권이 타이완까지 차지한 것이다.
4000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융성한 시기는 1978년 개혁·개방 이후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청(淸)나라 강희, 옹정, 건륭 3대 130년간이다.
건륭제 집권 시기 청나라는 세계 산업 생산액의 33%를 차지했다.
청나라는 쓰촨성 서부 · 몽골 · 신장 · 타이완 · 티베트를 정복하고,
조선과 베트남 · 버마 · 네팔 · 태국 · 라오스 등을 위성국으로 거느렸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1150만㎢의 영토를 차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청이 만들어놓은 제국의 판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960만㎢(한반도의 44배)의 영토는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보다 훨씬 넓다.
투먼장 아닌 두만강이 국경으로
1712년(숙종 38년) 청나라는 범법 월경 사건을 문제 삼아 백두산을 청나라 영토에 포함하려는 의도로
백두산 부근 국경 획정(劃定) 계획을 세웠다.
청나라에서 백두산 부근을 측량하고자 목극등을 보냈다.
조선은 접반사 박권, 함경감사 이선부 등으로 하여금 목극등과 함께 국경을 측량케 했다.
이들은 늙었다는 핑계로 사양하고 접반사 이의복, 순찰사 조태상, 거산찰방 허량, 역관 김응헌과 김경문 등 6명만 동행해
목극등의 요구대로 정계비의 위치를 정했다.
백두산 정상 동남쪽 약 4㎞ 지점(해발 2200m)에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정계비가 세워졌다.
조선·청 간 정계비가 세워졌다는 것은 조선이 독립국이었다는 뜻도 된다.
백두산정계비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경계를 정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토문강'이 두만강(豆滿江)을 말하는 것인지 '투먼장(土們江)'을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정계비가 세워진 위치를 놓고 볼 때 '토문강'이 두만강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어
백두산과 천지가 우리 영토 밖에 놓인다는 해석을 낳을 여지를 남겨둔 게 화근이 됐다.
1885년(고종 22년), 1887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의 제의로 조선과 청나라 대표가 회동해
정계비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우리는 조·청 국경선으로 두만강 상류 홍토수를 주장한 반면, 청은 홍단수-석을수를 주장했다.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뒤인 1909년 9월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다롄-선양) 부설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청나라 측 해석을 인정해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 제1조는 '청·일 정부는 두만강을 조·청 경계로 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잇는 선을 국경선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쑹화장의 상류인 투먼장이며, 간도는 조선 땅이라는 우리 주장은 무시됐다.
압록강선(線)에서 랴오닝성 펑황(鳳凰)까지의 영유권 문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압록강 너머 180리까지 공한지다. 연산파절까지 가야 명나라 초병이 보인다'고 기록한다.
명나라 초기인 1480년 이전까지 만주 쪽 압록강 이서(以西) 180리(72㎞)는 명나라 영토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펑황 부근 책문(柵門)이 조·청 국경이었다고 한다.
이순신 활약 '녹둔도'는 러시아령으로
16세기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해양강국들은 필리핀과 베트남, 타이완, 일본 등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고,
헤이룽장과 지류(支流)인 쑹화장의 흐름을 타고 북만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청나라 정부는 만주 중·남부가 청나라의 발상지이자 만주팔기(滿洲八旗) 영지인 까닭에 봉금(封禁)해 특별구역으로 지정했다.
헤이룽장과 그 지류인 쑹화장, 우수리장 등이 흐르는 북만주 일대는
퉁구스-몽골 계통 여러 부족이 유목이나 수렵에 종사하며 살던 곳이다.
청나라는 그들을 수시로 징발해 전쟁에 소모된 만주팔기를 충당하면서도 자치에 맡겼다.
이 땅에 갑자기 러시아인들이 나타나 원주민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15세기 이후 모스크바공국이 중앙집권을 강화하자 일부 세력이 반발했다.
'무장한 자유인'을 뜻하는 코사크가 반발 세력의 중심을 이뤘다.
코사크는 남러시아 킵차크 평원에 거주하던 그리스 정교도(正敎徒) 슬라브족이 투르크족과 혈연적·문화적으로 융합되면서 형성됐다.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낸 예르마크는 볼가강과 돈강 상류 지역에서 비적(匪賊)으로 살다가
이반 4세의 토벌을 받고 카마강 상류 페르미의 스트로가노프가(家)의 보호를 받게 됐다.
스트로가노프가는 예르마크에게 시베리아 정복을 맡겼다.
예르마크는 코사크군을 지휘해 1581년 우랄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진격했으며
오브강의 지류 이르티시(Irtysh)강 중류의 투르크-몽골계 시비르칸국 군대를 격파했다.
예르마크는 1582년 시비르칸국 수도 시비르를 일시 점령해 이반 4세에게 바쳤다.
시베리아라는 말은 바로 이 '시비르'에서 나온 것이다.
시비르칸국, 모스크바로 진격하다
러시아인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헤이룽장을 따라 남하,
조선군(변급, 신유)이 포함된 청나라군의 거듭된 저항에도 불구하고 1666년 헤이룽장 유역에 알바진 기지를 건설했다.
강희제는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면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사절을 보내 선물을 진상하고는 무역 외에는 다른 뜻이 없음을 천명했다.
러시아인들은 이후 쑹화장 유역까지 남하해왔다.
강희제는 러시아가 서북 몽골과 칭하이, 신장, 티베트 등을 영토로 한 오이라트 계통 중가르칸국과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중가르칸국의 공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 청나라는 1683년 헤이룽장 연안 아이훈(愛琿)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청나라는 1689년 7월 러시아로부터 알바진을 탈취하고,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라틴어와 함께 만주어, 러시아어, 몽골어 등 4개 언어로 작성됐는데,
이는 청나라가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확인한 구체적 사례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청·러 국경이 외싱안링(야블로노이와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확정됐으며 러시아의 남하는 저지됐다.
당시 러시아는 제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표트르 1세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국내외 정세가 매우 불안했기에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외몽골에는 칭기즈칸 가문을 재흥시킨 다얀 가한 계통 할하족이 자리 잡았고,
서북몽골에는 다얀 가한의 손자 알탄 가한에게 밀려난 에센 계통의 오이라트족이 살았다.
1634년 오이라트족 초로스부(몽골화한 투르크족)의 카라쿠라가 오이라트족 대부분을 통합해
몽골어로 '왼쪽'이라는 뜻의 중가르칸국으로 묶어냈다. 손자 갈단(도솔천이라는 뜻)은 제2의 칭기즈칸 제국 건설을 꿈꾸었다.
러시아제 총포로 무장한 칭기즈칸의 후예들
중가르가 약화된 후 할하부는 외몽골로 돌아갔으며 청나라는 외몽골을 이번원(理藩院) 관할하에 뒀다.
칭하이에 진출한 호쇼트부 중심 중가르는 재기해 1717년 쿤룬산맥(崑崙山脈)을 넘어 티베트를 점령했다.
이듬해 1718년 청나라군이 티베트를 침공해 티베트로부터 중가르군을 몰아내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2년 뒤인 1720년 청나라군은 칭하이와 쓰촨 2로(路)로 티베트를 공격해 중가르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강희제는 지주의 착취로부터 소작인을 보호하고자 토지와 소작인을 묶어 매매(賣買)하지 못하게 했으며,
흉년기에는 소작료를 감면해주도록 했다. 민심이 따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는 내치를 단단히 해 아들 건륭제가 적극적인 외치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줬다.
건륭제는 막대한 흑자 재정을 갖고 통치에 임했다. 건륭제는 재위 중 중가르(1755~1758),
위구르(1758~1759), 대금천(1747~1749) 티베트(1771~1776), 버마(1758~1769), 베트남(1788), 타이완(1788),
네팔(1791~1792) 등 인근 국가와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총 10회나 출정했다.
건륭제는 원정 기록을 십전기(十全記)라는 이름으로 비석에 새겨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 언덕에 있는 강희제의 평정서장비(平定西藏碑) 옆에 나란히 세웠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강한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약한 소수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 한족에게 몽땅 갖다 바친 결과물이다.
건륭제의 첫 번째 원정은 1747년 대금천 티베트족 토벌로 시작됐다.
청나라는 쓰촨 서부에 위치한 작은 땅을 얻기 위해 3년간에 걸쳐 당시 재정 2년 치에 해당하는 7000만 냥의 거금을 썼다.
대금천을 완전히 정복하기까지는 30년의 세월이 더 소요됐으며, 수많은 장병의 목숨도 바쳐야 했다.
뿌리째 썩어가기 시작한 대청제국
백범흠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現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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