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대동세상 꿈꾼 혁명아 정여립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30. 14:25
대동세상 꿈꾼 혁명아 정여립  출처: 양돈타임스 김봉진의 우리 역사이야기

인생천지간에 누구나 천자가 될 수 있다며 왕권 세습 독점 비판

호남평야의 넓은 들을 바라보면서 그 중심 도시인 전주를 거쳐 동쪽으로 가다보면 진안군에 들어서고 마이산이 보인다. 그 건너 무주 쪽으로는 멀리 우뚝 솟아오른 덕유산(높이 1614m)이 보인다. 마이산을 거쳐 무주와 장수의 중간 길로 접어들어 가다보면 가끔씩 화살표로 표시해놓은 안내판에 ‘죽도’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긴 다리를 지나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죽도(전북 진안군 상천면 수동리 내동마을)에 해당된다.

지금은 물로 둘러싸인 죽도라는 섬이 되어버렸지만 그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섬이 아니었다. 예전부터 섬의 뜻을 가진 죽도라는 지명으로 불려 왔는데 최근에 용담댐이 완공되면서 본래 이름처럼 물에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이 됐다. 긴 다리를 건너 죽도에 들어서서 조금 더 가다보면 저 멀리 천반산(높이 647m)이 보인다. 죽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천반산은 조선 중기에 역모 혐의를 받고 자결했던 정여립과 관계가 깊은 산이다. 지금 그 산 아래로는 무심한 듯 강물이 흘러가고 있고 그 사이로 울긋불긋한 깃발과 함께 휴양객을 유혹하는 민박집과 음식점들이 자리 잡고 있지만, 한때 이곳은 새로운 세상 건설을 꿈꾸며 젊음을 불태웠던 젊은이들이 모여 공부하고 무술 수련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모아 대동계를 결성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꿈을 꾼 인물, 정여립은 조선조 왕조사회에서 감히 꿈꾸기 힘든 새로운 생각을 널리 퍼뜨린 인물이기도 하다. “천하는 공물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이 한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맹자는 제선왕과 양혜왕에게 왕도를 하도록 권했는데 이들은 성현이 아닌가?” “인생천지간에 누구나 천자가 될 수 있다.” 정여립이 표출한 이러한 생각과 표현들은 당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왕조시대에 대담하게 왕권의 세습이나 독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죽도선생 정여립. 그는 시대를 앞선 대담한 의식을 지니고 혁명을 꿈꾸다가 역모로 몰려서 자결로 삶을 마감했고 그가 자결한 직후 그의 가족과 노비뿐만 아니라 그와 교류했거나 알고 지냈던 수많은 호남의 선비들과 그 가족들은 서인들의 모함을 받고 붙잡혀가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천여명의 선비가 죽음을 당했다고 일컬어져서 기축옥사 또는 기축사화로까지 불려지는 이 참사는 처음 정여립의 반역행위에 따른 조사와 문책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선조시절부터 동서로 분당되기 시작한 조정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이어졌고 결국 개인들끼리의 원한이 개입되면서 동인들에 대한 서인들의 보복과 복수의 형태로 진행됐다. 그 결과 정여립이 태어나서 거주했던 전주를 포함한 전라도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정여립과 알고 지냈거나 인척이 된다는 이유로 때로는 단순하게 그와 한두번 편지교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이처럼 동서분당을 심화시켜서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조선조 후반기 정국의 흐름을 뒤바꾸어놓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은 어떻게 준비됐고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정여립과 그 가족 및 인척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정여립이 남긴 글마저도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단편적이나마 남아있는 자료들은 당시 역모혐의자들에 대한 조사를 담당했던 서인들이 남긴 기록들과 토벌에 나선 서인 쪽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그 객관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학계에서도 서로 반대되는 관점으로 논란을 벌이고 있어서 확정된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이처럼 조선조 중기에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은 비록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빈한한 자료로나마 그 시절을 재구성해보면서 이 사건 내막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아버지보다 더 강직, 아전들 두려워해
서인과의 이견으로 관직 던지고 낙향


정여립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의 전횡이 시작되던 1546년(명종 원년) 전주에서 정희증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려의 무신인 정중부의 태몽을 꾼 후 그를 수태했고 출산하는 날에도 정중부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푸른 빛이 도는 붉은 색의 얼굴을 지닌 정여립은 태어난 후 가족들의 걱정을 사면서 성장했다. 15세가 되었을 때 아전들이 익산현감으로 있던 그의 아버지보다도 정여립을 더 두려워할 정도로 그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고향인 전주에서 학문적 수양을 쌓은 정여립은 24세가 되던 1567년(선조 원년)에 진사가 되었고 1570년에 식년문과에 2등으로 급제한 후 성균관 정록소에서 정9품의 학유로 관직을 시작했다. 성균관 학유가 된 그는 독서에 전념하면서 이이, 성혼 등과 교류했다. 이 시기에 정여립은 여러 이론들을 잘 종합하여 논변을 잘 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다른 학유들의 주목을 받게 됐고 시경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사물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해석으로 차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가 한번 입을 열면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은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이론의 정연함에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감히 그와 논박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1581년(선조 14년)에 이이 등의 추천을 받아 정언이 된 정여립은 1583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무렵 선조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관원들을 자주 교체하여 관직에 머문 지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하는 관료들이 허다하게 생겨났다. 이에 따라 이이는 정실인사를 금지하고 대간들을 믿고 정사를 맡기도록 주청했지만 선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정의 공론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나라의 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자주 바뀌었다. 개혁적 정책을 주장했던 이율곡, 김우옹 등도 파당의 다툼에 휩쓸려서 더 이상 새로운 정책을 펼칠 수가 없자 병을 칭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1584년 3월에 홍문관 수찬이 된 정여립은 4월에 선조임금에게 “지금 나라일이 어렵고 염려스러운데 안으로 사류들이 환산하고 밖으로 싸움이 곧 일어나려고 하니 신같이 어리석고 재빠르지 못한 사람이 그 직을 수행하기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걱정 되옵니다”고 당대 정세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선조는 “제가 스스로 그 직을 맡기에 힘들다고 상소하였으니 교체하라”고 하여 그는 하직하고 고향인 전주로 돌아왔다.

그 후 1년이 지난 1585년 4월 조정에서 성혼, 이이 등과 서인들에 대한 공격이 날로 심해가고 있을 때 정여립은 이발 등 동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홍문관 수찬에 다시 임용되었다. 조정에 다시 들어온 정여립은 경연에서 “박순은 간사한 무리들의 괴수이고 이이는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며 성혼은 간사한 무리들의 편을 들어서 상소를 올려 임금을 기망하였습니다. 호남은 박순의 고향이고 해서는 이이가 살던 곳이니 그 지방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두 사람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공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도성에 들어와 성혼을 찾아가서 간인들을 편들어서 임금을 기망한 죄를 질책하면서 이이와 절교하였다고 말하니 성혼은 이의 없이 죄를 자복하였습니다.”하고 선조 앞에서 박순과 이이를 공격했다. 정여립의 주청에 대해 선조가 그 내용을 달갑게 여기지 않자 그는 엎드려서 “신이 지금부터 다시는 천안을 뵐 수 없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물러났다.

그 직후 경연에서 죽은 이이를 공격한 그의 행위에 대해 의주목사 서익은 ‘정여립이 이이 생전에 율곡을 성인으로 칭하였다가 이제 그를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스승을 배신한 처사’라며 상소했고 이이와 성혼의 문도들이 주축을 이룬 서인들도 정여립에 대한 비판의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정여립이 이이와의 사제관계를 부인하면서 “이이 생전에 이미 그와 절교하였다”고 말했다.

왕에게 미움 사 복직 못하고 낙향, 후진 양성하며 조정 세력과 교류


정여립의 이러한 주장에 이이의 조카인 이경진이 정여립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는데 이 편지를 1583년 9월에 쓴 것이라고 하여 조정에서는 누구 말이 옳은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났다. 이에 선조가 서인들의 편을 들어 정여립을 ‘송나라 형노같은 인물(스승을 배반한 제자)’로 말하면서 비판했고 이후 이발 등이 그를 계속 천거했지만 선조는 두 번 다시 기용하지 않았다.

이이와 정여립은 나이차가 10여세 밖에 나지 않았고 또한 이경진이 제시한 편지에서 정여립은 이이를 스승이 아니라 그냥 ‘존형’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그 둘은 사제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서인들의 비난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를 ‘스승을 배반한 제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는 왕의 미움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이후부터 정여립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서인들은 그를 ‘스승을 배반할 정도로 행동의 앞뒤가 의심스러운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비판했다.

이 무렵 서인들의 논변은 송익필, 송한필 형제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지모에 있어서 제갈공명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 서인들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송익필은 뛰어난 지략과 학식으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정엽, 조헌 등 대사간을 지낸 문객들이 있을 정도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그때 송한필에게 1584년 7월 그의 죄를 묻는 사건이 발생했다. 송한필의 사돈인 곽사원과 황유경의 노비 거인 사이에 방죽을 막는 일로 일어난 송사사건이 그 무렵 곽사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난 것이다. 10여년동안 이끌어온 이 판결에 대해 정언지는 곽사원이 문서를 위조하였는데도 유리한 판결이 난 것은 곽사원과 사돈간인 송한필이 후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논란이 벌어지자 곽사원 집안과 거인 집안이 모두 변방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벌을 받게 되었고 송한필도 이 송사에 가담한 죄로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송사에 함께 참여했던 정철 등 서인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한편 서인들의 집중적인 공격과 왕의 미움을 받고 관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온 정여립은 동인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향촌에 있는 후진세력들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조정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조정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우옹 등 동인들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 관료의 인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사림에서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그와 교류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그의 문하에 많이 모여들어 그는 전라도 인근에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이 시기 선조의 우유부단한 정국운영과 관료들의 관직다툼으로 조정은 어려운 민생은 제쳐두고 극심한 대립만을 빚어가면서 극단적인 파당싸움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선조 역사에서 파당의 시발점이 된 당쟁은 처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다툼에서 출발했다. 1572년(선조 5년) 대궐 동쪽인 건천동에 살던 김효원과 대궐 서쪽인 정릉동에 살던 심의겸 사이에서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일어난 사사로운 감정다툼은 더욱 격렬해져서 서로 지지하는 세력에 따라 파당을 이루면서 동서로 나누어지게 된다.

김효원의 주장에 동조했던 무리들은 동인을 이루었고 심의겸에게 동조하는 무리들은 서인을 형성했다. 동인은 그들의 영수로 허엽을 서인은 그들의 영수로 박순을 모시고 조정에서 논의하는 안건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벌였다. 이이는 중간 입장에서 조정공론을 조정하였는데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동인들에게서 서인을 편든다고 비판을 받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동서파당간에 조정역할을 했던 이이가 관직을 그만둔 다음해에 죽음을 맞이하자 당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시 조정에서는 성혼과 이이의 공과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는데 성혼과 이이를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대신들은 동인에 속했고 성혼과 이이를 높이려는 대신들은 서인에 속했다.

‘천하는 公物’임을 주장하며 대동계 조직해 거사 꿈꾸는데

동서로 분당이 된 조정에서는 대신들끼리 서로 모함하고 비난하면서 국정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탐관오리들이 들끓었고 국가재정도 고갈됐다. 게다가 연이은 흉년으로 인해 굶어죽은 시체가 들녘에 널려있었고 곳곳에서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민란을 일으키는 등 어수선한 정국이 계속됐다. 또한 변경의 북쪽지방에서는 여진족들이 수시로 침범하여 소란스러웠고 남쪽에서도 왜구들이 불시에 침범해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탐학에 시달린 백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인물과 세계에 대한 갈망이 더욱 높아져만 갔다.

고향으로 내려온 정여립은 1586년 고향에서 가까운 진안에 있는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그가 결성한 대동계에서는 계원들을 신분과 지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사람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당시 나라 정세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신분 차별을 받던 서얼과 승려들이 많이 참여했다.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매달 15일마다 진안의 천반산에 모아놓고 무술 및 군사 훈련을 시켰다. 대동계원들은 평시에 농사를 짓거나 살림을 하면서 지내다가 매달 보름이 되면 천반산 아래 모여 깃대봉에 ‘대동’이라는 깃발을 꽂아두고 정여립의 지휘 아래 뜀바위를 뛰어넘는 훈련과 궁술교육 등을 받았다. 대동계원들은 신분과 직위에 차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하층민으로 천대받았던 사람들 중에서 무술이 뛰어나거나 재능 있는 인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는 길삼봉과 정팔용과 같이 무술에 뛰어난 인물과 운봉의 승려 의연, 도잠, 설청과 해주의 지함두 등 학식과 능력이 특출한 인물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정여립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면서 그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했다.

그 무렵 정여립은 노자와 장자 및 주역에 심취해 ‘은(殷)나라의 탕왕이 하(夏)나라의 걸왕을 내쫓고 주(周)나라의 무왕이 은(殷)나라의 주왕을 쳐서 내쫓은 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에 부응한 것이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또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천하의 천하이다’라는 뜻에 공감해 “천하는 공물(公物)”임을 주장하게 된다.

한편 그는 주역을 해석하면서 나라의 운세를 파악해본 결과 경인년(1590년)과 임진년(1592년)에 큰 난리가 일어나며 자신의 운세는 그 때가 가장 길할 때임을 알고 그 시기에 맞추어서 거사를 일으킬 꿈을 꾸게 된다. 특히 정여립의 아들인 옥남이 태어날 때 등에 왕(王)이라는 글자 무늬를 띠고 있었고 두 어깨에 사마귀가 일월형상으로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들이 새로운 세계의 영도자로 태어났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고 예사롭지 않은 담력과 재주로써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아들 옥남은 아버지에게서 장차 새로운 세계를 이끌 인물로서 갖춰야할 덕목들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한편 정여립은 자신을 따르던 승려 의연과 도잠, 설청 등과 함께 황해도에 가서 구월산 등 여러 산들을 둘러보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그는 거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지에서 민심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광범위한 친분관계를 유지했고 선조의 실정에 반발한 백성들이 크게 일어나 민심이 동요되기를 기대했다.

1586년만 해도 황해도와 전라도에 큰 가뭄이 들어 기근이 더욱 심해졌고 병충해마저 극심해 굶주리는 백성들이 곳곳에서 유리걸식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랑캐와 왜구 침입까지 빈번해지자 백성들은 국정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하게 늘어놓기 시작했고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급기야 1587년 2월에 왜군들이 왜선 18척을 이끌고 와서 전라도의 손죽도(損竹島)와 선산도(仙山島) 일대에서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이고 민가에 들어와서 불을 질렀으며 수백명의 백성들을 살육하거나 포로로 붙잡아가는 정해왜변이 일어난다.  

‘이씨 망하고 정씨 일어난다’고 퍼뜨려
백성구제·차별철폐 내세워 민심 부추겨


대규모 왜군의 침입으로 수세에 몰린 각 지방에서는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각 지역의 수군과 관군만으로 이를 막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은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주부윤의 요청을 받은 그는 훈련된 대동계원들과 관군을 몇 개의 부로 나누어서 재편성한 후 각기 영장을 지정하여 지휘하도록 했다. 이때 각 부의 영장들은 모두 대동계원들이었다. 정여립은 새로 편성한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귀향했다. 전주에 돌아온 대동계원들은 다시 일이 생길 때 연통하여 모일 것을 약속하고 모두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정여립은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변숭복, 지함두, 의연 등을 각지로 보내 능력 있는 자들을 포섭토록 하면서 ‘정감록’의 참설(讖說)을 이용하여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리도록 했다. 그와 함께 자신을 따르던 길삼봉과 정팔용을 데리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흐름을 살펴보고 의연과 지함두 등을 해서지방으로 보내 정감록 같은 비기 등과 풍수지리설을 이용해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결과 1589년에 접어들면서 해서지방에서는 ‘호남의 전주지방에 성인이 일어나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며 땅과 바다에서 노역을 하거나 잘못하여 쫓기는 자들도 사면 받고 공인과 사인, 천민 등의 신분차별도 모두 혁파되어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라는 참설이 널리 퍼져나갔다.

한편 조정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 동인들은 서인의 핵심역할을 하는 송익필과 한필 형제를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그들의 약점을 찾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들 형제의 신분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동인들은 신분재판을 벌여 송익필, 한필 형제를 비롯하여 감정의 자손 70여인을 천민으로 환천시켰다. 양반 가문에서 졸지에 천민 신분으로 전락한 이들 형제는 이제 동인들의 추적을 피해 서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서인의 지략꾼인 송익필, 한필 형제가 양반에서 천민으로 전락하게 된 과정에는 안당 집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당(安塘 1460~1521)의 아버지인 돈후는 형의 노비인 중금을 첩으로 맞아들여 감정이라는 여자 아이를 낳았다. 감정은 송린에게 출가하여 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재간이 많고 총명하여 안씨 집안에서 크게 신임을 받게 된다. 1521년 안처겸은 아버지인 안당이 기묘사화로 인해 관직을 삭탈당하게 되자 크게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모친상으로 외가에 머물던 안처겸은 친구들과 담론을 하는 자리에서 대신인 심정과 남정 등이 조정에서 일을 그릇되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만 나라가 제대로 된다는 말을 하게 된다. 마침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송사련은 안처겸이 대신들을 모함하여 죽이려 한다고 고변했고 남정 등은 이를 역모로 확대시켜 안씨 집안은 멸문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송사련은 밀고를 한 공로로 안씨 집안의 저택과 노비들까지 하사받고 첨지를 거쳐 판관벼슬까지 지냈으며 80살까지 살았다. 송사련의 5남 1녀가 되는 자식 중에서 송익필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문필을 갖추어서 성혼, 이이 등과 친밀하게 교류하였고, 이산해와 더불어서 8문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송익필, 한필 형제에 대해 동인들은 그들의 행적을 주목하면서 집안가계를 세밀하게 조사했고 그 결과 이들의 아버지 송사련의 밀고행위와 함께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에 동인들은 안당의 첩실 자식인 안윤(安玧)을 앞세워 소송을 제기했고 그 결과 당시 대단한 권력들을 행사하던 송익필을 비롯한 감정의 자손들 70여명이 천민으로 전락했다. 천민으로 전락한 이들 형제는 형관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성혼, 김장생, 정철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름을 바꾸고 해서지방에 숨어살면서 자신을 천민으로 만든 동인들에 대한 원한을 가슴 깊게 품게 된다.

 
동인에 한 품은 송익필 형제
 계책 꾸며 선조에게 고자질


신분전락으로 인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송익필과 한필 형제는 동인들에 대한 혈원을 품고 황해도로 갔다. 이곳에서 이름과 성을 바꾸고 점술가로 행세하면서 황해도 지방의 향반들을 유혹하여 관상과 사주를 보아주고 조상의 묘 자리를 알려주곤 했다. 이 무렵 송씨 형제가 숨어 지내던 황해도 지방에서는 ‘전주지방에 성인이 일어나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참설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풍문을 들은 송익필과 한필 형제는 전주에 사는 정여립이 그 풍문의 주인공임을 알고 이를 이용해 조정에서 동인들을 몰아낼 계책을 세우게 된다. 형제는 예전에 선조에게 정여립의 등용을 강력하게 주청한 바가 있었을 만큼 어느 정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박식하면서도 성품이 과격해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자주 비판했고 언젠가는 경연 후 밖으로 나오면서 선조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부릅뜰만큼 강직한 기질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송한필 형제는 이러한 풍문을 이용해 정여립의 대동계 활동을 구체적인 역모활동으로 꾸며서 그과 함께 자신들을 공격한 이발 등 동인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송한필은 조생원으로 성과 이름을 고치고 황해도 이곳저곳의 주막에 다니면서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즉 정수찬이다. 길삼봉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삼봉은 하루 삼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할 데 없으며 신인이어서 사람들이 만일 그를 보게 되면 벼슬이 저절로 오게 될 것이다’라는 풍문을 널리 퍼뜨렸다. 동인들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하던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들은 정여립에 대한 풍문을 널리 퍼지도록 한 후 그를 주축으로 동인들을 한꺼번에 역모혐의자들로 만들면 자신들의 한 맺힌 원한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해도 백천은 송씨 형제의 고향이었고 이곳에는 그들을 도와줄 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활동하기에 유리했다. 송익필은 황해도 악악지역에서 활동하는 대동계원들 중에서 정여립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인 조구와 승려 의암을 주목했다. 특히 조구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입을 가볍게 놀려 머무는 곳마다 새 세상이 곧 올 것처럼 떠들고 있었고 항상 많은 무리들과 어울려서 지내고 있었다. 송익필은 같은 서인이었던 안악군수인 이축에게 이들의 행적을 알려 조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안악군수 이축은 조구와 의암을 붙잡아 문초하고 조구의 집을 조사하니 정여립과 교류한 편지가 집안에서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축은 재령군수인 박충간과 상의한 후 신천군수 한응인과 더불어 감사인 한준에게 보고했다. 한편 재령군수 박충간도 재령에서 대동계원인 이수를 붙잡아 문초하니 이축과 같이 거사를 모의한 것으로 자백했다. 이처럼 송익필은 안악에서 대동계원으로 활동하던 조구와 승려 의암의 행위들을 조사하도록 하여 이들의 활동을 역모활동으로 고변토록 했다. 한편 송익필은 안악에 사는 대동계원인 변숭복을 찾아가서 정여립의 대동계 활동이 역모로 고변되었음을 알려주면서 역도로 몰려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를 붙잡는데 협조하도록 설득했다. 송익필은 말에 설복당한 변숭복은 그의 지시대로 먼저 서인의 거두인 성혼의 문인으로 당시 진안현감으로 있던 민인백을 찾아가서 정여립을 생포할 계책을 세우게 된다.

한편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은 정여립의 역모혐의를 담은 비밀장계를 선조에게 올리게 된다. 선조가 받아본 이 장계에는 ‘전직 수찬인 정여립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역적들이 장차 금강을 건너 한강에 이르고 연로 봉수와 역졸들의 왕래를 끊어 궁궐을 범할 계책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장계를 본 선조는 곧바로 편전에 나가 삼공과 육승지, 의금부 당상관들을 급히 들어오게 하고 숙직하던 총관과 옥당 상하 번들도 모두 입시케 하여 긴급회의를 하였다. 이때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만은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변숭복의 배반으로 포위된 뒤 자결
가족 교살되고 인척 전주서 쫓겨나


정여립에 대한 역모고변으로 긴급히 이루어진 이 회의에서 대신들은 시급히 전라도와 황해도에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파견토록 주청했고 선조의 내락이 내려졌다. 금부도사 유담이 전주부윤에 이르러서 정여립의 집을 찾아갔지만 정여립은 이미 어디론가 출타하고 집에 없었다.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한 금부도사 유담은 그가 도주했다고 급보로 조정에 보고했고 10월 7일 급보를 받은 조정은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된다. 한편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고변이 있은지 일주일이 지난 10월 11일 정철은 선조를 배알하고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한 비밀보고서를 올린다. 그 결과 선조는 14일 독포어사 정난우, 이대해, 정숙남을 삼남지방으로 파견했다.

한편 변숭복은 해주를 출발해 곧바로 진안으로 갔다. 본래 날래고 발이 빨라 황해도와 전라도를 왕래하면서 정여립에게 여러 정보를 전달해주었던 그는 진안에 도착해 진안현감 민인백과 만나 정여립을 유인해 죽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에 변숭복은 죽도서실로 찾아가서 정여립과 하루 동안 같이 지낸 후 민인백과 약속한 죽도의 한적한 장소로 그를 유인했다. 이날 역모로 고변된 사실도 모른 채 아들 옥남과 함께 변숭복을 따라 죽도의 한 마을에 도착한 정여립은 뒤늦게 200여명의 관군들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아심을 품은 그가 변숭복을 추궁하여 관군이 철통같이 자신들 일행을 포위하고 있는 이곳으로 속아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은 정여립은 옆에 있던 변숭복을 칼로 쳐서 죽인 후 어두워가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울부짖고나서 자결했다. 민인백은 죽은 정여립과 변숭복의 시신을 수거하고 정여립의 아들 옥남 및 수행원 박춘룡을 붙잡아서 전주로 압송했다. 다음날 15일 이 둘의 시신을 실은 수레는 포박된 정여립의 아들 옥남 및 박춘룡을 실은 수레와 함께 전주감영을 출발해 서울로 운반됐다.

서울에서의 역모사건 조사는 서인의 중심인물로서 위관이 된 정철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우의정으로 위관이 된 정철은 성혼과 긴밀히 상의하면서 이 기회에 동인들을 모두 제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사건에 대한 조사에서 정여립은 자결했기 때문에 역모를 인정한 것으로 판결하고 붙잡혀온 정여립의 가족들과 친척, 친구들과 대동계원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15일에는 황해도에서 잡혀온 대동계원 이기와 이광수 등을 고문해 자복받은 후 처형했고 17일에는 악안의 수군인 황언륜과 방의신을 고문하여 자복받은 후 처형했다.

선조가 임석한 가운데 열린 10월 19일 국청에서 17세인 옥남은 길삼봉이 모주이고 해서인인 김세겸, 박연령, 이기, 이광수, 박문장, 변숭복 등이 가끔 왕래했으며, 승려 의연과 도사 지함두가 죽도의 서당에 머물면서 공모하였다고 자백했다. 이어서 문초를 받은 이광수, 박연령, 지함두 등의 공초는 대체로 고변을 한 조구의 말과 같았다. 붙잡혀온 이들 중에서 정홍, 방의신, 황언륜, 의연 등은 자백했지만 이진길, 정여복 형제와 한경, 송간, 조웅직, 신여성 등은 불복하다가 장형을 맞고 죽었다.

위관들은 정여립을 ‘모반대역죄’를 지은 죄인으로 판결했고 27일 그의 시체는 조정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됐다. 또한 정여립의 부모와 아내 및 자식들도 모두 붙잡혀와서 교살됐고 그의 첩과 노비들은 정여립 일행의 나포에 공이 많은 진안현감 민인백 등 공신들에게 하사되어 그들의 소유가 됐다. 또 정여립이 살던 집은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고 ‘전주는 조종(祖宗)의 어향(御鄕)이니 전주에 있는 정여립의 조부 이상의 분묘를 낱낱이 파내어 그 족인들로 하여금 이장하도록 하고, 그와 멀고 가까운 집안들도 모두 전주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고을에 가서 살도록 하라’는 선조의 지시에 따라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인척이 되는 집안들은 모두 전주에서 먼 지방으로 쫓겨났다.  

“기축옥사 이후 조선 조 정치 환경
진보 후퇴하고 보수 방향으로 전개“


서인의 지략가로서 이 사건을 뒤에서 조종했던 송익필은 동인이었던 정여립과 그 가족들의 죽음으로만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철의 집에 유숙하면서 성혼 등 서인들과 접촉을 하고 있던 송익필은 이 기회에 원한이 많은 이발 등 동인들을 한꺼번에 말살시키고자 했다.
송익필은 정철을 빨리 입궐토록 하여 위관으로 임명받도록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호남 유생인 양천회를 통해 이 사건에 중립적이었던 우의정 정언신과 동인들 여럿이 정여립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송익필의 부탁을 받은 양천회는 11월 3일 이발과 이길, 김우옹, 백유양, 정언신, 최영경 등이 정여립과 친분을 맺고 모의했다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양천회 등의 상소와 정철의 주청으로 인해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많은 선비들이 줄줄이 붙잡혀왔고 심한 고문을 받은 후 죽음을 당했다.

맨 먼저 송익필과 대립했던 이발이 정여립과 친밀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와서 온몸에 살이 온전한 곳이 없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또 이발의 동생 이호도 고문을 받은 후 유배당했다가 다시 잡혀 와서 장형을 맞고 죽었다. 이발이 죽은 후 그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도 붙잡혀 와서 모두 압사형을 받았다.

12월 3일에는 참봉 한백겸이 정여립의 시신을 염해주었다가 장살 당했다. 그리고 당시에 우의정이었던 정언신도 유생 양천회의 상소와 양사의 탄핵으로 유배당했고 그의 아들 률(慄)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식음을 전폐한 후 굶어죽었다. 또 정개청도 정여립과 친밀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 와서 고문을 당한 후 경원의 아산보로 귀양 갔다가 1590년 7월에 죽었다. 정철을 소심한 소인으로 비판했던 영남 출신인 최영경도 심문을 받고 죽었다. 이들 이외에도 100여명이 넘는 선비들이 붙잡혀와서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기축년(1589년)에 벌어진 이 옥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서인인 정철과 성혼, 송익필 등은 자신과 개인 감정이 있는 동인들을 모두 정여립과 관련시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정철은 이전부터 독선적으로 행동하고 여자와 술을 좋아하며 술자리에서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아 호남 출신임에도 호남의 일부 유생들한테는 소인배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는 항상 이를 원통하게 여겼는데 위관으로서 이 사건을 처리할 때 이러한 개인 감정을 덧붙여서 겉으로 관대한 듯 하면서 뒤에서는 살육을 교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철은 판결에 있어서 서인의 거두인 성혼과 상의해 이 사건과 아무 관련도 없는 많은 호남 유생들을 동인이라 하여 정여립과 관련시켜 죽였고 그 바람에 사림에서 존경받던 많은 호남의 인재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3년여 동안 계속된 기축옥사로 인해 이 사건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음을 당했고 조정에서는 관료들끼리 서로 의심하여 한 마디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또한 사림에서도 글 한 줄 올바르게 쓰기가 두려운 분위기가 조성됐고 동인과 서인들은 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호남의 인물들은 천여명에 이르렀고 그 결과 이 사건은 호남지방의 진보성향을 가진 선비들이 모두 희생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문적으로는 노장적인 성격을 지닌 남명의 후계자들과 개혁 지향적인 서경덕의 후계자들이 대거 희생당했다. 지역적으로는 기호지역에 사는 서인들인 이이 후학들이 가해자가 되고 호남지역에 많았던 개혁적인 동인들은 피해자가 되었다. 또 호남의 사학들은 전남 담양의 창평이 고향인 가해자 정철로 인해 분열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조 조정은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들과 기상이 사라지면서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이 사건은 조선조 정치 환경을 후퇴시켰고 이후 곧바로 아무런 대비 없이 임진왜란을 맞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조조의 정여립(鄭汝立) 모란(謀亂)과 도참(圖讖)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역사순환론적(歷史循環論的) 견해에 의하여 선조에게 올린 상소(上疏) 중에 왕조의 중쇠기(中衰期)를 말하였으므로 누적된 폐습을 혁신하자고 강력히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지만 이 때야말로 조선왕조가 중쇠기에 기울어 여러 가지 법도가 해이하고 당파의 분쟁, 농촌사회의 붕괴, 재정의 빈곤, 국방력의 허약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실정에 처하였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대두하기 쉬운 것은 도참의 조작과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반란을 꾀한 사례로서 이것이 역사상 흔히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선조 22년(1589)에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사건(謀叛事件)도 이러한 류에 불과하다. 이 해 10월 3일 밤에 황해도 감사(監司)의 비밀 서장(書狀)이 조정(朝庭)에 전달되었다. 그 밤에 즉시 왕은
삼공(三公)과 육승지(六承旨), 입직도총관(入直都摠官)과 옥당(玉堂)이 모두 입시(入侍)하도록 명령을 내리었다. 그것은 황해도의 안악(安岳), 재령(載寧) 등에 모역사건이 발생되었기 때문인데 이에 의하여 전라도의 정여립이 그 괴수임을 알게 되었다. 왕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선전관(宣傳官)으로 삼아 황해, 전라도로 나누어 보내고 검열(檢閱) 이운길(李雲吉)은 정여립의 생질이므로 입시(入侍)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를 찾아서 하옥케 하였다. 10월 8일에 의금부도사 류담(柳湛)이 서장을 올리어 정여립이 도망하였음을 고하자, 선조는 대신과 포도대장을 불러 포획(捕獲)의 책을 논의하고 다음 날인 10월 9일에는 황해도에서 난을 모의한 죄인들이 잡혀 서울에 도착하자 전정(殿庭)에서 국문(鞫門)을 하였다. 그리고 12일에는 판돈녕(判敦寧) 정철(鄭澈)이 역적을 잡는데 경외(京外)에 계엄령을 펼 것을 비밀히 아뢰는 등 조정은 자못 긴장한 분위기에 싸이게 되었다. 15일에는 황해도에서 잡혀온 이기(李箕), 이광수(李光秀) 등이 정여립과 함께 모의하였음을 승복(承服)하자, 그날로 당고개(堂古介)의 군기시(軍器寺) 앞뜰에서 교수형(絞首刑)을 집행하였고 안악의 황언륜(黃彦綸), 방의신(方義臣) 등은 정여립의 집에 내왕하며 모반역사(謀叛逆事)한 사실을 승복하여 17일에 복주(伏誅)되었다. 같은 날 선전관 이용준(李用濬), 내관(內官) 김양보(金良輔) 등이 전주(全州)에서 도착하였다. 정여립의 획토치계(倒討馳啓)를 올렸는데 그 치계에 의하면 정여립과 그의 아들 정옥남(鄭玉南)은 같은 무리 두 사람과 같이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군관(軍官)이 포위하자 정여립은 자살을 하고 그의 아들 옥남은 잡혔다는 내용이었다. 옥남이 잡혀 올라오자 20일에는 선조가 선정전에서 정옥남을 친국(親鞫)하고 군기시 앞에서 처형하였다. 이상은 정여립의 모란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반도(叛徒)들이 처형되기 까지의 경과를 실록에 의해서 살펴 본 것이다.
정여립의 모란사건이 발각되자 주모자들을 불과 17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처형하고 진압하였지만, 조정에서는 매우 긴장한 상태 속에서 전후 3개월에 걸쳐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23년(1590) 1월 1일에 선조가 '이번 역적의 변고는 종전에 없던 일'이라고 말한 바를 보더라도 이 정여립의 모란사건은 왕조 개국 이래 가장 큰 역모였던 것이다.
정여립은 선조조에 있어서 동서당쟁(東西黨爭) 중의 한 사람으로 조정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향리(鄕里)에 돌아와 강학(講學)을 칭탁하고 향중(鄕中) 내지 다른 곳의 도중(徒衆 - 儒者, 無賴武士, 승려, 기타 잡배)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동지회(同志會)를 조직하고 때로 무예를 단련하는 한편 비기참설(秘記讖說) 즉 '木子亡奠邑興(이씨(李氏)는 망하고 정씨(鄭氏)가 대신 일어난다는 것)'으로서 인심을 현혹케 하며 장차 대란을 일으켜 자기의 천하를 만들려고 모란을 꾀한 것이었다. 정여립은 박학강기(博學强記)의 인물로 경전(經傳)을 관통하고 논의가 초월하므로 일찍이 사림(士林) 사이에서 명성이 높아 특히 이이(李珥)의 사랑을 받아 그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다. 선조 17년(1584) 이이가 죽은 후로는 동인(東人)에 아부하여 동인이 증오하던 이이를 극구 헐뜯었다. 그리하여 동인의 힘으로 수찬(修撰)이란 학사(學士)의 벼슬을 얻었는데 그 심술을 간파한 선조의 눈에 벗어나자 그는 곧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돌아와 위와 같은 음모를 하였던 것이다. 음모에 관련된 사람이 많았지만 그와 관계가 깊은 동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이에 연좌처형(連坐處刑)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선조는 정여립이 비기참설을 퍼트리고 모반을 꾀하였다 하여 전주지방의 인심을 바로 잡기 위함에서였던지 '전주는 조종(祖宗)의 어향(御鄕)이므로 정여립의 조부 이상의 분묘(墳墓)가 전주에 있는 것은 관에서 이를 파내 버리고 그 족인(族人)의 것도 이장케 하는 한편, 또 그 멀고 가까운 족류(族類)를 모두 전주에서 먼 타읍으로 내쫓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모란사건이 발각된 지 불과 20일만에 취해졌다. 이로써 보더라도 당시 인심에 끼친 참설의 영향과 현혹된 민심의 동요가 어떠하였는지는 충분히 짐작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에 한가지 더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여립 사후(死後)의 영향은 더욱 지방에 미쳐 전라일도(全羅一道)를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그 후 호남인(湖南人)의 등용을 일시 제약하여 차별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정여립의 모란사건은 역사상 주의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최창조의 풍수기행]호남 산천 배역론과 정여립의 모반]

호남에 대한 편견의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를 꼽는다. 이것은 태조 26년(943년) 중신인 박술희에게 내려 준 비밀 유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니시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후세 사람들의 조작이라 주장한 바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태조 자신이 직접 말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여기서 그 시비를 가릴 처지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설혹 태조가 직접 말한 것이 아니고 후세인들의 조작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전문이 실려 있는 글이라면 고려시대에 그와 같은 얘기들이 공공연히 나돌아다녔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고 따라서 당시 사람들의 호남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실마리는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훈요십조에서 호남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제8훈으로, 그 내용은 차령과 금강 이남은 지리적 형세가 배역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의 인성 또한 그러할 것인 즉 그들을 조정에 참여케 하거나 왕실과 혼인을 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역의 조짐이 보인다는 뜻일 게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령과 금강 이남이 과연 호남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냐는 데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제2훈에서는 도선 국사의 뜻을 받들라는 대목이 있는데 도선은 그 고향이 전남 영암이며 태조 또한 그의 제자에 제자 뻘 되는 경보나 윤다 같은 승려와 최지몽 같은 전남 사람을 중용하고 있는 외에 장화왕후 나주 오씨를 목포에서 맞이한 사실 등을 들어 호남 전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의 본질에 근접한 비판은 아니다. 이것은 결국 호남에서 나주, 목포, 영암 등 서남지방 일부를 제외하자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은 후백제의 견훤에 비하여 약세에 처해 있던 태조가 전략적으로 그 지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 것일 뿐 그의 본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왕건은 지방 호족과의 유대를 위하여 무려 스물아홉명의 후비를 두었던 사람이란 사실을 상기해볼 일이다.

뿐만이 아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우리나라 3대 배역의 강으로 영산강, 섬진강과 함께 낙동강을 꼽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왕건은 그의 출신 기반인 중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령과 금강 이남의 산천을 배역의 형세라고 적시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지방이 당시로서는 최대의 산업인 농업 생산력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곡창지대란 점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호남의 물길이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의 지적대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형세(산발사하·散髮四下)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을 물길이 배역의 형세를 취한 것이라고 풀이한 것인데, 금강은 북쪽으로, 동진강·만경강은 서쪽으로, 영산강은 남서쪽으로, 탐진강·섬진강은 남쪽으로, 심지어 낙동강의 한 지류인 남강의 발원지가 전북 남원의 운봉인데 여기서 남강은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반면 낙동강은 모든 물길이 하나가 되어 다대포 앞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호남은 인심이 흩어지고 영남은 인심이 뭉쳐 충신이 배출된다는 논리다.

고려 때만 하더라도 낙동강은 3대 배역수의 하나였는데 조선 영조 때에 이르러 충신 배출의 물길로 승화된 것은 그 사이에 곡절이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 점은 다른 기회에 생각해보기로 하자. 다만 물길이 흩어지는 것과 모여드는 것이 풍토와 인성 형성에 과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이미 프랑스와 독일의 물길을 영호남의 물길과 비교하며 프랑스적 호남, 독일적 영남이란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이 때 프랑스가 더 좋으냐 독일이 더 좋으냐를 묻는 것은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영호남의 물길에 관한 풍수적 차이는 당연히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역시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역 차별과 지역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지역에 풍토적이거나 인성적인 차이는 반드시 있다. 다만 그것을 차별의 구실로 삼는데 문제가 있을 뿐이다. 본래 호남 푸대접으로 시작된 지역 차별론은 이제 김대중 정권의 등장으로 역차별 얘기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정말 지루하고도 짜증나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어느 편을 들 생각은 없다. 호남이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는 의식했든 아니든 간에 호남 쪽에 기울며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호남인들에게 배역의 참 뜻을 새기고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를 권하고 싶다. 그 단초를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시작해 보자.

선조 때 무려 천여명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그 출생에 관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도 불분명하고 출생지도 막연히 전주 동문 밖 또는 남문 밖이라는 설만 나돌 뿐이다. 그런데 모악산의 지맥인 제비봉 아래 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이 그가 태어난 곳이란 얘기를 그곳 사람들은 상당히 믿고 있는 눈치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지금까지도 전라도에 대한 편견의 한 이유처럼 거론되는 것이어서 흥미를 끈다. 일찍이 이병도 박사도 정여립이 죽은 뒤 전라도를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호남인의 등용을 일시 제약, 차별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거니와, 전주시사(1986년 간행)는 이 사건이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기록할 정도이다. 이런 사건의 출발이 모악산 언저리에서 시발되었다는 것은 땅의 이치(地理)로 보아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남한 2대 신흥종교 발상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 증산교의 창시자가 이곳에서 도를 얻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증산은 옛 구도자들이 자기를 계발하기 위하여 산으로 광야로 퇴수(退修)하였다가 힘과 영광에 가득 찬 초인으로 변모하여 동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속세로 복귀하였다는 인퇴(引退)와 복귀의 율동처럼, 드디어 서른 한살 되는 여름 큰 비가 쏟아지고 다섯마리 용이 심한 폭풍우를 불어내는 조화 바람 속에서 천지의 큰 도를 깨닫고 거칠 것이 없는 큰 차원으로 접어들어 겁액의 환난에서 몸부림치는 창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모악산을 하산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의 출생지란 설이 있는 동곡마을은 증산이 깊은 인연을 맺었던 오리알터와는 지척지간이다. 정여립처럼 산 기운이 사람을 낸 것인지, 강증산처럼 사람이 그런 산 기운에 이끌려 들어간 것인지는 분간키 어렵다. 하지만 정여립이 간단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그를 낳을 때 아버지의 꿈에 고려 무신정권의 문을 연 정중부가 나타나 “잠시 너희 집에 머물다 가겠다”고 한 대목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는 처음 율곡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훗날 스승을 공격함으로써 인품을 의심케 한 전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당쟁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선조가 정여립을 간사한 배반자로 규정한 것도 그가 누명을 쓴 까닭이란 시각이 있다. 누명으로 보는 까닭은 우선 그 사건을 맡았던 송강 정철이 정여립이 도망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장본인이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기록은 정여립이 역모가 고변된 것을 알고 진안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역도들의 상장군으로 지목된 장사 길삼봉의 존재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인데 그 길삼봉이로 지목된 최영경은 결국 당파 간의 이해관계에 얽혀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행각에 이상한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그가 선조 20년(1587년) 왜구가 전라도에 침입했을 때 전주부윤의 요청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쳐부쉈는데, 그때 동원된 군사가 대동계원이란 사실이다. 정규병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성취한 셈이다. 더구나 그는 간통사건으로 몸을 피해다니던 천민 출신의 도술이 높은 처사 지함두, 자칭 요동 사람이라 하며 “왕기(王氣)가 전주 남문 밖에서 솟아오른다”는 참언을 퍼뜨린 의연이란 승려, 그리고 수많은 떠돌이들과 사귄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의 생각 또한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는 바가 많았다. 유비보다 조조를 정통으로 삼은 사마광의 통감을 옳은 말이라 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당대의 철칙을 그저 제나라 왕촉의 주장일 뿐으로 폄하했으며, 맹자 또한 제나라와 양나라를 옮겨가며 왕도정치를 펴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 시대로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반골의 기질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종합하자면 정여립은 반골이지만 그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것은 누명이란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이미 고려 초 훈요십조에 의하여 반역의 땅으로 규정지어진 전라도는 이 사건으로 또 다시 그 오명을 다지게 되는 셈인데, 과연 반역의 땅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그럴 수 없다. 그런데 반역이란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왕조의 무능과 부패, 파렴치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 그것을 정도에 어긋난다는 뜻인 반역이라 쓴 것은 지배층이나 기득권층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당하는 민중의 처지에서 보자면 당치도 않은 논리가 된다.

당이 순하면 그 사람이 순하고 산천이 돌아앉듯 거역의 자세를 취하면 그 주민도 그를 닮는다는 것은 풍수의 주장이다. 일신의 평안만을 원한다면 순한 땅이 명당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서 공동체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불의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역사적으로 풍수상 반역의 땅이란 이름을 가졌던 곳은 바로 그런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반역의 기운을 가진 땅이란 게 있을 수 있으나 반역이란 말이 가진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반역의 땅이란 게 결코 나쁜 땅이 아니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맞지 않는 땅일 뿐이다.

전라도는 넓은 들판의 땅이다. 서해의 바다에서 시작한 저평(低平)은 김제 만경평야를 거쳐 갑자기 우뚝 솟은 평지돌출의 모악산을 만난다. 들판은 지배층을 상징한다. 평지돌출의 모악산은 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민중은 저항의 선봉인 모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당연히 들판 가운데 서지도 못하고 모악산과 들판이 만나는 점이지대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마을 입지의 풍수적 골간을 이루는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것이다. 보수로 대변되는 들판에 대하여 돌출되게 저항하는 산, 그 사이에 끼어 부대끼는 민중이란 뜻이다.

그들에게는 정당한 저항이지만 반대로 보수적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변화를 사람들이 그런 평지돌출의 성격을 가진 산의 품에 안겨 혁명과 개벽을 꿈꾸는 것은 마침내 산과 사람이 상생의 궁합을 이루었음을 보여줌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더 나아가 그런 산에 깊이 파묻혀 신선을 꿈꾸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또 다른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자생풍수는 양생수기(養生修己)의 소박한 자연주의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전라도는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천혜의 땅이었다. 그 풍성한 생산성이 타 지방에 위협감을 주게 되었으며 결국 전라도를 외경의 땅, 반역의 땅, 편견을 가지고 보는 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라 여겨진다. 고려 태조 왕건이 전투에서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연전연패한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오죽했으면 자손에게까지 전라도에 대한 경계를 당부했겠는가.

천혜를 받았으므로 편견을 당해야 하는 땅, 전라도의 모순이다. 한데 기묘한 것은 지지난해 황해도 구월산을 찾았을 때의 느낌이다. 나는 거기서 또 하나의 모악산, 또 하나의 계룡산을 보았다는 착각을 했었다. 북한 최대의 평야지대인 재령과 안악, 신천 벌방(들판의 북한 말)을 감싸안듯 둘러싼 구월산은 이 역시 평지돌출의 곳으로 그 성격은 모악을 닮았다. 판소리 `변강쇠타령'에서 변강쇠가 어디로 가서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대목에 이런 귀절이 나온다. “동 금강 석산이라 나무 없어 살 수 없고, 북 향산(묘향산) 찬 곳이라 눈 쌓여 살 수 없고, 서 구월 좋다 하나 적굴(도적 소굴)이라 살 수 있나. 남 지리 토후(土厚)하여 생리(生利)가 좋다 하니 그리로 살러 가세.” 모반과 민족 신앙으로의 요람 같은 모악산과 도적의 소굴로 표현되는 구월산, 뭔가 당의 이치가 통하는 대목은 아닐까?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이상스럽게 정여립의 모반을 처음 고변한 사람들이 당시 황해도 관찰사와 재령군수와 안악군수와 신천군수 등이라는 사실이다. 구월산 자락의 수령 방백들이 떼를 지어 모악산의 정여립을 고변한 땅의 이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여립이 살던 집터는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현 전주시 색장동)에 있었다는 데 역모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집터는 연못을 파서 지금은 파쏘라 부른다고 한다.

이제 전라도는 과거의 한을 씻고 배역과 모반의 땅이라는 의미가 지니고 있는 긍정성을 받아들여 대인의 풍도를 가질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관례처럼 이뤄지던 사회에서의 모순은 단죄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교정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훗날 또 다른 단죄를 부르지 못하게 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한겨레신문 2000년 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