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직시하라! 투표하라!"
[특별기고] 도올 김용옥 교수의 '혁세격문(革世檄文)'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기사입력 2012-12-17 오후 2:10:52
지금 조선의 들판이 혁명의 불길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지금 조선의 먼동은 "다시 개벽"의 눈부신 햇살을 발하고 있다. 자고 있는 자들이여, 모두 깨어나라! 새 시대, 새 정치의 함성이 그대를 부른다. 깨어난 4천만의 유권자들이여, 남녀노소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투표장으로 가라!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혁명의 물결이 이 아사달 신시를 휘덮으리라! 조선의 깨인 자들이여! 남김없이 혁명의 대오에 어깨를 엮어라!
환인 하느님께서는 이 신시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건국 치세이념을 내리셨다. 그런데 지금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홍익(弘益)이 아닌, 홍해(弘害), 홍살(弘殺)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인의(仁義)를 망각하고 솔수식인(率獸食人)의 사리(私利)를 앞세우며, 진현(進賢)의 정도(正道)를 거부하고 착복과 부패의 한계를 없이 하며, 국고를 털어 치자(治者) 본인의 사욕을 충족시키며 주변의 승냥이들에게 떡고물을 분배하고 있다. 국토의 산수대강(山水大綱)을 파괴하고 4대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왜곡·오염시키며, 백두대간의 대혈인 국립공원에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케이블카의 설치를 획책하고, 인천공항과 같은 공익의 자산을 사유의 질곡으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농촌을 해체시키고 도시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양극화의 괴리는 재벌의 독재를 흥륭(興隆)케 하며 서민대중의 삶을 노예 이하의 나락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추락은 영락이요 죽음이다. 그런데 서민대중의 죽음을 현 정권의 치자들은 환호하고 재벌은 환희의 박수를 친다. 그리고 전국 골목골목의 상권을 대형마트라는 탱크와 기관총으로 후려 갈겨대고만 있다. 어찌 미국의 총기난사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처다보고만 있는가? 자기 가슴에 총알이 박히고 있는 바로 그대들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우리가 지도자를 잘못 뽑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국민이 교사(巧邪)와 허언(虛言)의 달인(達人)을 지도자로 떠받들 수 있는가? 민주라는 허명에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메이저 언론의 정보조작과 선거를 둘러싼 가치의 혼란이 민중의 너무도 정당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민주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호도하는 온갖 정교한 부정이 민주주의라는 타자(他者)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민중이여! 또 당할 셈인가? 현 정권의 죄악을 반성 없이 반복할 셈인가? 이제 또 안보의 위협에 대책 없이 속을 셈인가? 마지막 순간을 앞둔 깜짝쇼에 대의(大義)의 정조(情調)를 굴복시킬 셈인가? 민생의 감언에 또다시 도덕을 망각할 셈인가? 민중이여! 두 손에 가슴을 얹고 잘 생각해보라! 누가 과연 그대들의 민생을 도와주었는가? 누가 과연 그대들에게 돈 한 푼이라도 거저 준 적이 있는가? 민생은 아사달의 신시로부터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민중 스스로 해결해온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정치는 민생을 해결하지 못한다. 민생은 어디까지나 민중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란 그 민생결단의 번영을 훼방하는 행위를 정치가 제발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일 뿐이다. 오늘과 같은 악랄한 대기업의 횡포는 정부와 공권력의 비호가 없다면 당장 민중의 힘으로 타도될 것이다. 기업과 정부권력의 유착, 자본의 끝없는 폭리확대와 공무행정의 부패의 연환(連環)은 대중민생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이 희생에는 이제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자산가, 임금노동자를 불문하고 모든 대중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공약으로 "민생"을 우선시 한다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위선자일 뿐이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민생이라기보다는 도덕의 구현이며 정의의 확립이요 인정仁政의 구체적 실천이다. 위장된 웃음의 눈꼬리를 가장하며, 정의와 도덕을 외면하고 반성과 실천을 거부하는 위선의 심장에 이제 종지부를 찍자! 더 이상 속지 말자! 민생이 아닌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자! 그리하면 민생은 저절로 해결된다. 도덕이 바로서고 민생이 풍요롭게 되지 아니 하는 역사는 인간세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도덕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그 너무도 쉬운 해결방안이 그대 손에 쥐어져 있다. 부패와 사악의 정권을 바꾸면 된다. 어떻게 바꾸는가?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의 신성한 혁명의 권리를 행하라! 나와 같이 수십만 권의 장서를 수십 년에 걸쳐 뇌리에 입력한 자나, 만 20세의 청순한 홍안의 유권자나, 동일한 한 표의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인간 오성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신념은 반만년 인문정신의 기나긴 투쟁의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다. 어찌 이 고귀한 권리를 나태와 냉소와 방임으로 포기할 셈인가? 혁명은 어렵지 않다. 유권자의 90%만 매번 투표에 참여한다면 역사는 항상 선을 지향하며 뒤바뀌게 되어있다. 그런데 유권자 한 명이라도 더 투표장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치세력이 과연 수권(受權)의 자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국가기관이나 공영언론조차도 투표를 독려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직무유기를 일삼는 것이다. 국민이여! 분노하라! 분노하라! 실상을 직시하라!
과거에는 최고의 권좌, 그 천명(天命)을 바꾸는 혁신(革新)의 대업에는 수없는 인명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다. 삼일운동을 기억하라! 동학의 우금치전투를 상기하라! 정주에서 폭파된 홍경래의 염원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라! 그 얼마나 처절한 고립무원의 항쟁이었던가? 그대들이 손에 쥐고 있는 투표용지는 이들 선열(先烈)의 잘린 모가지처럼 피가 흐르고 있다. 민주의 나무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랐다. 대한민국처럼 비서구권에서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을 수용하고 직접선거의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이룩한 선례를 축적하여온 나라도 별로 없다. 이것은 오직 선현(先賢)들의 피흘림의 투쟁으로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체제 밖에서 천 리를 가는 것보다 체제 안에서 한 치를 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체제 안에서 천 리를 갈 수가 있다. 우리 민중 모두가 19일 투표함으로 가기만 한다면 혁명은 이루어진다.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혁명은 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가? 이제 혁명은 폭력이 아니다. 이제 혁명은 광포한 영감이 아니다. 이제 조선의 혁명은 체제의 룰에 따라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는 정의로운 상식적 작업이다. 그러나 이번 우리의 혁명은 바스티유감옥의 철창을 터뜨린 불란서인들의 인권선언보다, 차르왕정을 무너뜨린 러시아혁명보다, 아편전쟁 이래 열강의 침탈을 종식시킨 마오쩌뚱의 공산혁명보다도 더 막중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혁명이다. 우리의 혁명은 열강의 모든 근대적 노략질과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결과물인 세계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진정한 세계평화의 출발이다. 동·서의 언어적 편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며 남·북의 불필요한 이념의 기미(羈縻)를 절단하며,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하고, 도농(都農)의 균형을 꾀하고, 세조의 찬탈 이래 끊임없이 왜곡되어온 정의의 패배를 설욕하는 대업이다. 훈구파들의 끊임없는 득세, 선조의 파렴치한 임란책임회피, 그 뒤로 이어지는 노론의 장악, 세도정치, 일본제국의 식민지통치와 친일파의 발호, 이승만의 권력찬탈과 무능한 6·25전쟁대처, 일제 만군출신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폭정, 이 모든 흐름이 "불의라도 박박 우겨대면 역사의 정의가 된다"는 왜곡된 가치관에 대한 통렬한 국민적 반성의 기회를 박탈해왔다. 반성이 없는 역사는 미래가 없다.
올해가 임진왜란 일곱 환갑! 그 부끄러운 통치자들의 행위가 빚어낸 참혹한 민중의 삶을 일순간이라도 연상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의 좌표는 명료해진다. 그대들은 아는가? 가도입명(假道入明)의 명분으로 이 땅을 짓밟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침략군의 저주보다, 이 나라를 구해주겠다고 원정 온 명군(明軍)의 작태가 민중의 삶에 끼친 폐해가 구체적으로 더 심원했다는 사실을 그대는 정말 아는가? 임란 극복의 원동력은 이순신의 서남해상권 제패와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분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장렬한 최후의 진로를 선택해야만 했고, 의병장 김덕령은 모진 고문 속에 죽어야만 했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신선을 가장하고 소리 없이 스러져야만 했다. 선조는 이들 구국의 지도자들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명군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만을 찬양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여송의 사당을 만들었고 명군을 위하여 동대문 밖에 관묘를 지었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었다는 은혜, 즉 재조지은의 찬양은 결국 불과 30년만에 정묘·병자의 양 호란(胡亂)이라는 처참한 비극을 다시 불러왔다. 이러한 민중의 비운의 역사의 배면에는 6·25전쟁 등 현대사의 명암이 겹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다. 그러나 우리의 친미는 미국과의 정당한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미국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인도주의적 친미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의 화해를 돕도록 만들어야 하며, 역으로 우리는 남·북한 화해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세계평화를 이끌어가도록 만드는 21세기 인류 최대의 염원을 달성케 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생(民生)이라기보다는 민본(民本)이다. 민중 스스로가 자결의 주체성을 갖는 역사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손에 쥔 투표용지 하나로 인류의 역사를 전쟁과 대결의 국면에서 평화와 화해의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사의 기나긴 좌절과 절망을 승리와 희망으로 회향시킬 수 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30만 우국지사들의 원혼을 기억하라! 좌절된 반민특위의 역사를 반성하라! 이제야말로 우리는 투표용지 하나로 반민족행위자들의 작태를 일소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에 국민이 오는 것을 꺼려하는 모든 반민족행위자들의 생애에 종막을 드리워라! 그것도 아주 평화롭게!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 땅의 깨인 자들이여! 모두 남김없이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들의 투표가 이 민족 모두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리라. 주변의 모든 동포를 설득하여 투표장으로 가라! 이 민족의 기나긴 불의와 독선과 배타와 불인(不認)의 역사를 끝장내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아갈 수 없다! 모든 반동은 그 자체의 힘에 의하여 분쇄된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으로 가라!
“아버지는 5·16으로 집권… 그 딸은 51년 6개월 뒤 51.6% 득표율로 당선”
누리꾼 글 인터넷서 화제
“아버지는 5·16으로 정권을 잡고, 딸은 51년 6개월 뒤 51.6%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건 하늘이 한 일이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다.”한 누리꾼이 ‘516의 숨겨진 비밀’이란 제목으로 올린 글이 인터넷에서 화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는데, 딸인 박근혜 당선인이 51년 6개월(실제로는 51년 7개월) 만에 득표율 51.6%로 부녀(父女) 대통령의 기록을 세웠다는 점을 신통한 일이라고 평가한 글이다. ID가 ‘로벅’인 누리꾼은 “설마 했는데 진짜로 51.6%로 당선됐어! 516!”이란 글을 올렸다. 2012/12/21
말춤이여, 北까지 퍼져 한반도 恨을 힐링하라
기사입력 2012-12-25 03:00:0
김지하 시인 특별기고
우리는 이제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이 다섯 나라를 이끌어 엮어 내는 세계적 신(新)르네상스 운동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베네치아 중심의 유럽 르네상스가 오늘의 근대문명을 결정했다. 이제 한반도 안에서 절박하고도 급박하게 새로운 세계 문화의 기본 틀이 만들어질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 땅에서 우주생명과 맞닿아 있는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것이 네오(신) 르네상스이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라는 질문은 거두라. 이미 그것은 우리의 숙명이요, 세계 전 인류의 운명이다. 민족문화의 부활과 네오 르네상스의 시작 없이는 참다운 민족통일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세계에 전할 문화와 가치의 첫 번째는 ‘시김’(판소리의 멋과 맛을 느끼게 해 주는 것으로 소리를 추어올렸다, 꺾어 내렸다, 궁글렸다, 뒤집었다 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부여하는 일종의 발성 기법·편집자)이다. 세계는 지금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시김’은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原形)이다. 왜 ‘시김’이 가치 있는가? ‘발효’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발효’인가?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신명으로 뒤바꿔 내는 것이 바로 발효요, ‘시김’이다. 시김’은 ‘한’에서 출발해서 ‘신명’으로 귀결된다. 한류에는 바로 ‘시김’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한류가 글로벌 차원의 호소력을 가진다. 이제 ‘시김’의 흔적이 아니라 본체를 살려 네오 르네상스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 바이칼에서 아메리카까지, 한류의 신명으로 춤추게 하라 ▼
우리는 오랫동안 ‘시김’을 억제하고 살았다. 중국의 압력, 조선시대의 경직, 일제의 억압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신명’이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온갖 수단으로 억눌러 그 신명을 차단했다. 그 결과 신명 위에 한(恨)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2002년 월드컵 당시 젊은이들이 ‘붉은 악마’를 통해서 그 신명을 살려 뜀뛰기 시작했고 ‘한’까지 흔들며 춤추기 시작했다. ‘신명’이 ‘한’을 데리고 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시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류에는 ‘시김’이 배어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욘사마’가, 동남아에서 ‘한류’가 불 밝혀졌다. 케이팝이 퍼지고 마침내 ‘말춤’이 떠오른 것은 모두 ‘시김’의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격변, 우주적 이상 변동, 세계적 괴변 현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완전히 새로운 심리유형―이 모든 것은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발효시켜 그 한가운데로부터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을 솟아나게 하는 지혜―‘시김’의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오직 ‘시김’을 통해서만 삶은 운명으로 승화될 수 있다. 운명으로 고양된 삶―이것이 바로 내가 말해 온 ‘흰 그늘’이다. 우리 온 민족이 지금 시김을 구한다. 온 인류가 시김을 기다린다. 온 중생이 지금 시김을 기다린다.
유럽 현대의 영지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 문명의 대변동기에는, 가난하지만 영롱한 작은 민족, 이른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나서, 다가오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체험적으로, 문화적으로 가르쳐 주곤 한다. 로마문명기에 그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그 로마시대보다 더 근원적인 대전환기인 현대, 오늘 그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민족이 극동에 있다는 것밖에 모른다.”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인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巖)는 그 민족이 일본이라 착각하고 애쓰다가 좌절하고 결국은 그것이 바로 한민족이라고 깨달은 사람이다. 나는 바로 그 일본인을 통해서 슈타이너의 영적인 통찰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이 세계에 전해야 하는 문화와 지혜는 ‘시김’에서 시작한다. 시김은 논리가 아니다. 시김은 논리, 논의 자체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불같은 분발이거나, 배고픔이거나 아니면 번쩍하는 번갯불이다. 이 민족의 시김은 누구나 다 아는 남도소리, 판소리, 탈춤, 육자배기, 무가, 허드렛소리와 불교 및 무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그 근원은 강원도의 정선 아우라지로부터 시작된다.
정선아리랑은 시김새의 첫 뿌리에 속한다. 그것은 ‘넉넉한 월봉(月峰)의 그믐달 밤과 날카로운 초미(初眉)와 눈부신 해돋이’의 동서 결합이다. 그것이 춘향가의 ‘쑥대머리’다. 판소리 사이사이 끼어드는 ‘이완’의 ‘시르라기(쓰레기)춤’, 또는 ‘허벌춤’이 곧 싸이의 ‘말춤’이다. 한갓 심심풀이 ‘허벌춤’이 ‘말춤’이 되어 세계적 호소력을 가진다. 하물며 본격적인 ‘시김’의 축제, ‘ㅱ감(不咸)’과 ‘다물(多勿)’의 예술제가 쏟아진다면?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남도 시김새는 그 주역이 단연 여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시대’가 한 걸음 나아가면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충격파를 만들어 낸다. 우선 일본에 충격이 전해진다. 일본 철학계의 중핵이라 할 교토대의 쓰루미 준스케(鶴見俊輔)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문화혁명이다. 일본 여성이 문화적으로 주체를 자각할 때 일본은 해방된다. 일본 여성은 한국문화가 자기의 숨은 주체임을 깨달을 때 일어선다. 곧 그날이 올 것이다. 천 년 전 일본 교토 왕실에는 백제의 문화 전통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5세기에는 가톨릭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9세기 말에는 사회주의를 지킨 여성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성이 주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뒤, ‘욘사마’가 왔고 뒤이어 ‘료조(龍女)’ ‘레키조(歷女)’가 왔고 이어서 수백만 주부들의 ‘아메 요코’라는 시장의 대변혁이 왔다. 그때 악랄한 일본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는 “여편네들이 설치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대지진과 원전사고가 왔다.
그 여성들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을까? 나는 한반도에서 여성 문화 권력이 일어서는 날, 그날 곧이어 일본 여성이, 그리고 곧이어 미국의 커피 파티, 즉 ‘힐러리 그룹’이 일어서리라고, 그리하여 새 세계가 오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남성 지배 사회가 들이닥쳤던 것은 대략 3000년 전쯤 된다. 이제 여성은 3000년의 굴레를 벗고 자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3000년 그늘 속에서 솟아오르는 흰 섬광, 즉 ‘흰 그늘’ 아닌가! 바로 ‘시김새’ 아닌가! 그래서 여성은 ‘시김’의 예술가이다. ‘시김’은 여성을 통해 한 걸음 더 탄탄해진다. 여성이 주류 문화, 주류 사회를 주도하는 날, ‘시김’을 원형으로 삼은 한류 역시 더 탄탄해진다.
이 한류의 소식이 북한에 전해진다면? 전 세계를 열광시킨 말춤의 소식이 북한에 퍼진다면? 한류가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부(富)의 원천’이라는 소식이 퍼진다면? 평안도, 함경도의, 그리고 금강산 깊이깊이 가라앉아 있는, 그러나 한번 떠오르면 좀체 꺼지지 않을 마치 아우라지의 불멸의 시김새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지 않을까?
우리 문화의 원형―‘시김’은 한반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러시아의 동남부 ‘이르쿠츠크’ 황야에서 ‘샤먼 마하’라는 늙은이를 만난 적 있다.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니까 그가 한마디 던진다.
“스구리 스구리 오야히야니 스구리스구.”
그래, 발해시대 이후부터 전해지는 연해주 가요라고 한다. 무슨 뜻일까? 뜻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리듬에서 나는 금방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까지 스탈린에 의해 삶의 터전이던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뿌리 뽑혀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야에 내버려졌던 30만의 ‘조선 유민’을 떠올렸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이곳은 발해의 땅이었다.
중국은 발해가 저희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아가, 우리 시조할머니인 ‘웅녀(熊女)’까지도 저희 조상이라고 싱안링(興安嶺)에 동상을 세워 놓고 초등학생들에게 참배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중화패권주의의 극성 한가운데에서 만주, 바이칼, 동남시베리아, 600만 주민들로부터 무엇인가 떠오를 것이다.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 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으러 가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근대문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전체주의로 치달렸었다.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복원하는 힐링 파워는, 바로 러시아 동부, 중국의 동북부에 잠들어 있는 옛 한국인들의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젊은이들은 이것들을 찾아서 되살리러 가야 하지 않는가?
어찌 시베리아, 만주, 연해주뿐인가? 오호츠크 바다 건너 캄차카로 간다. 사모아 발랑카의 분출수는 한없이 뜨겁다. 그런데 오호츠크는 그만큼이나 차갑다. 이것이 커다란 우주변동의 시작이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유리(琉璃)세계의 조짐이다. 그래서 캄차카는 우리의 신화에 아주 가깝다. 가깝다. 무엇이? ‘장승굿’을 ‘빔차’에서 봤다. 똑같다. 장승 위치에서부터 무당너스레까지 너무나 똑같아서 지루할 지경이다. 나는 페트로파블롭스카야 역사박물관으로 가서 그곳 소장인 러시아 고고학자 비에라 박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캄차카 신화는 9000년의 역사를 가진다. 약 3000개가 있다. 그중에 현재 채취 가능한 것만 2500개다. 중요한 것은 이 신화들의 근본은 당신들 한국인이다. 캄차카 신화는 아직까지 유럽의 그 어떤 신화학자도 채집한 적이 없다.
또한 캄차카 신화는 중앙아시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신화가 담고 있는 우주적 미스터리이다. 캄차카 신화는 숨어 있는 미스터리도 다르다. 캄차카 신화는, 지금은 베링 해에 잠긴 몽골리언 루트의 상호 소통 민요다. 베링 해가 점점 넓어지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이어 주던 통로인 몽골리언 루트가 약 6000년 전에 완전히 끊기기 전까지는 양쪽 사람들이 서로 오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캄차카 신화에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상호 소통, 즉 공명(共鳴)이 들어 있다.”
그는 내게 이런 옛 신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이카이 이카이 데에무 와이스미 코낭카투이.
새야 새야 네가 가는 곳이 어디니?
내가 발 담그고 있는 이 큰 바다 밑의 저 새파란 새 하늘 아니야?”
어디선가 들어 봤다. 그렇다. ‘바다 밑에 새파란 새 하늘이 존재한다’라는 신화는 이 땅에도 있다. 부산 가덕도 앞바다는 ‘미친 바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 바다 밑에 새파란 새 하늘이 있다는 전설을 나는 부산에 갈 때마다 듣는다.
이렇듯 옛 한국인들의 발자취는 바이칼에서 동남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한반도, 일본, 캄차카에 이른다. 그리고 몽골리언 루트를 따라 아메리카로 넘어간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옛 한국인의 문화 원형을 찾아 부활시키는 작업은 당연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 원형 부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인디언의 문화 원형이 부활된다면, 미국 사회 전체에, 우리와 영혼의 차원에서 통할 수 있는 새롭고 중요한 문화적 유전자가 추가된다.
그렇다. 우리의 ‘네오 르네상스’의 목적은 바로 ‘한국이 교차로가 되어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을 이끌고 엮어 내는 문화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한류로 하여금 새로운 ‘우주생명의 이치’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이 문명 격변기에 요구되는 흰 그늘이고 ‘시김’이다. 이는 곧 문명 격변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고단함과 애달픔에 대한 ‘힐링’ 아닌가! 김지하 시인 특별기고
김지하 시인, 이정희에 “쥐새끼 같은…” 무슨일?
동아일보/기사입력 2013-01-09 03:00:00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수감돼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39년 만인 이달 4일 무죄를 선고받은 김지하 시인(72)을 이튿날 강원 원주에서 만났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 선언을 했던 그는 인터뷰에서 1970년대 고초를 회고하며 박정희 시대와의 화해를 말했다. 인터뷰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비속어, 존칭 생략 등 그의 육성을 대부분 그대로 싣는다. (*)은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고 붙인 설명이다. 》
김지하 시인이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시인이 귀가하는 대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TV에서는 김 시인의 기자회견 장면이 나왔다. 느닷없이 ‘돈’ 이야기를 꺼내 듣는 이를 당혹스럽게 했다. “27억 원씩 받고 도망간 여자(통합진보당 이정희 의원을 지칭)도 있는데 사형선고 얻어터진 김지하가 몇 푼 받아서야 되겠느냐. 5억이 아니라 500억, 5000억 정도 주던가. 적어도 27억 이상은 줘야지.” 그의 발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어울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시간 뒤, 김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더니 “하기 싫다. 난 내일 (원주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토지문화관 구경이나 오든지” 하며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말을 들으며 얼굴을 마주하고 인터뷰를 청하면 가능성이 없지 않으리라는 작은 기대가 생겼다.
이튿날 토요일(5일)에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두 시간여. 토지문화관에 들어서니 부인 김 관장이 있었다. 기자는 김 시인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꼼짝 못한다는 김 관장을 설득했다. 마침내 김 시인이 오후 7시경 문화관으로 들어섰다. “혼자 정선 아우라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기자회견 때 돈 이야기만 하셔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수십 년간 떠든 게 민주주의였는데 민주주의 얘길 또 해? 지루하기 짝이 없지. 풍자? 그게 아니야. 누구는 제멋대로 떠들다가 27억 먹고 튀는 판이야. (이정희 의원이 대선후보 사퇴한다는) 기사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쥐새끼 같은 ×,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이 튀어나왔어. 우습더라고. 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을 따라 기자도 웃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어. 법원 쪽에는 공손히 인사했어. 근데 기자들을 보니 뭔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느낌이 어떠냐길래 ‘아무 느낌 없다’ 하니 실망한 눈치였어. ‘이 자식들이 왜 실망을 하지?’ 다시 보니까 다 젊어. 똥구멍 같은 내 입에서 뭔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아. 그래서 돈 이야기 했어. ‘나는 요즘 돈이 좋다. 왜? 돈이 나빠? 돈 싫어하는 사람 손 들어봐.’ 아무도 손드는 사람 없데. 나는 옛날엔 돈을 악(惡)의 징표라 봤어. 오래 살다보니 돈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수단이야. 아들에게 돈 주려다가 안 주면 인상 쓴다구. 부자지간에도 그래.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민주투사가 속물 같아 보였습니다.
“공자도 돈 하면 눈이 커지는 사람이었어. 돈 많은 제자를 아꼈지(*자공·子貢을 말하는 듯). 나는 매일 돈 없어서 부인한테 ‘병신’ 소리 들어.(김 관장이 ‘내가 언제 그랬어요?’ 하자 시인은 다시 껄껄 웃었다.) 은행 가서 몰래 돈 꺼내 택시 타고 다녀서 이 사람한테 혼나…. 실제로 나는 지금 돈이 필요해. 두 아들 놈 유학 보내 공부시켜야 해. 아들 둘이 대학엘 못 갔어. 요즘 세상에 대학도 못 나오면 어디에 쓰나. ‘두 아들이 대학도 못 갔다’ 해도 놀라는 사람이 없어. 욕 안 하기로 맹세했지만 그럴 땐 ‘×발’ 소리가 절로 나와. ‘×발새끼들, 자기 자식들은 대학 졸업시켰으니까. 대학 못 보낸 부모 한(恨)을 모른다.’ 아이들 속에도 한이 맺혔을 거야. 나는 아비로서의 한이 또 있어.”
쩌렁쩌렁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김 관장이 “아니, 울려고 그러셔? 우는 건 또 처음 봤네” 하자 다시 우렁찬 목소리가 나왔다.
“안 울어. 내가 왜 울어…. 어떻든 그날 기자들 보니 갑자기 돈 이야기 한번 하자 생각이 들더라구. 근데 젊은 기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네가 돈 때문에 재심신청했구나’ 하는 표정이야. 그걸 보고 더 하기 시작했지. 내가 그런 면이 있거든. 남이 싫어하면 더 해. 하하하. 그런데 (회견 끝나고) 나오면서 후회가 들더라구.”
―(기자회견 내용이) 걱정이 되긴 되셨나 보네요.
“그럼, 나는 소심한 남자야.”
소년처럼 맑은 미소가 번졌다. 다시 거친 말이 이어졌다.
“내가 오적(五賊) 쓸 때도 사업가들이 뇌물 주는 건 욕하지 않았어. 하지만 국고금 빼먹은 놈은 찢어 죽여야 한다고 했어. 내 신념이야, 아니 민중의 신념이야. 장사꾼이 뇌물 주는 것은 상관없다 이거야. 그런데 국고금이라는 건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야.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거기에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집권한 자들이) 돈을 쳐먹어?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부하는 목포 광주 한(恨)의 천재들이? 망월동 피값 받은 외에 또 받아?”
비록 욕설은 난무해도 그의 말은 받아 적으면 시가 될 듯, 발음도 정확하고 운율과 리듬까지 있어 몰입하게 했다. 김 시인은 이번 무죄 판결과는 별도로 오적 판결(선고유예)에 대해서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스톡홀름대 한국문학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처음 번역한 외국 문학이 오적이야. 나보고 참관하라 해서 스웨덴까지 갔잖겠어. 동양 최고 시인이 김삿갓 다음에 김지하라더군. 청중이 일제히 박수를 쳤어. 이런 비슷한 일이 러시아, 중국, 미국 등에서 있었어. 미친 생각이지만, 만약에 노벨상을 내게 준다면, 국가에서 오적을 유죄라고 하는 상태에서 주어지면 어떻게 돼. 나라 망신 아닌가. 물론 나는 반체제 작가로 영웅이 될 테지만(웃음)…. 나꼼수는 저질이야. 그런 것들로 무슨 선거를 이기겠다고. 내가 썼으면 간이 덜덜 떨리게 쓴다. 근데 그런 글을 오적 이후 못 썼어.”
그가 먼저 선거 이야기를 꺼내길래 화제를 선거로 돌렸다.
―이번 선거 흐름을 어떻게 봤습니까.
“마르크스 읽지도 않은 자들이 마르크스를 말하는 세상이야. 그런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 때 전시작전권 반환 외에 한 것이 뭐야. 그것 도로 돌아갔어. 부동산도 완전히 실패했지. 그 다음에 NLL(서해 북방한계선) 취소? 김정일에게 돈 갖다 바친 것. 그것들 꽁무니 따라서 문재인이 또 튀어나왔어. 김대중이 흉내 냈지. 김대중은 돈 갖다 안 바쳤는가? 북에서 날아온 포탄은 거기서 나온 거야. 그 돈은 우리 세금 아닌가? 문재인이 그 꽁무니 따라왔으니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찍어. 이번 선거에서 원탁회의 어쩌구에서 안철수에게 장관 5개를 주고 누가 몇 개를 먹고. 그것을 지들이 결정해서 문재인에게 보고한다 해서, 까불지 말라 혼내려고 대장(아내)에게 물어봤어. 아내 말이 ‘조져!’(웃음) 그래서 내가 원고를 신문사에 보냈어. 원고는 교정됐어. 원래는 그것보다 더 지독했어. 마침 신문에 (글) 나간 날이 원탁회의 하는 날이었더군. 나는 몰랐어.”
그의 말이 이어졌다.
“(민주당은) 자기 쇄신 안 하면 다 망해. 국민 모두가 이석기 이정희 하는 거 봤어. 앞으론 그런 행동 다시 못해. 다시 말해 간첩행동 못한다 이거야. 그렇다고 우파가 옳으냐, 그것도 아니야. 서경석 목사가 전화해서 수만 명이 모인 우파 집회에 나오라 하더군. 내가 왜 가냐 했더니 ‘박근혜 지지했잖아요’ 이래. 그래서 ‘네 눈엔 그렇게 보이냐. 좌우를 넘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야지 무슨 우파 집회야. 지금 우파, 좌파, 중간파가 어디에 있나. 이번 선거를 봐. 좌파 우파로 투표한 게 아니야. (국민들이) 속에 들어 있는 생각으로 찍은 거야.”
―안철수 씨는 다시 (정치판으로) 돌아올까요.
“안철수는 깡통이야. 아무것도 몰라. 그 사람 전공이 뭔가. 융합과학이야. 그런데 그 사람 정치가 융합과학에 맞는 것인가? 지금 융합과학은 유전자까지 확대되고 있어. 하지만 확대할 때는 조건이 있어. ‘절제’라는 동양적인 제약 사항을 끌어들여야 해. 정치에서 절제란 할 말 못할 말 구분하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구분하는 거야. 그런 것도 없는 사람이 자기 전문영역과 정치의 관계도 모르고, 여야 관계도 몰라. 밑에서 박수 쳐 주니까 붕 뜬 거지. 그런 사람을 깡통 아니면 뭐라고 해.”
―안철수 씨도 시간이 지나면 단련될 수 있을까요.
“끝났다니까. 정치란 게 하고 싶다고 매일 할 수 있는 게 아냐. 배우하고 똑같아. 한번 찍히면 끝난 거야. 문재인 옆에서 왔다 갔다 한 사람들이 대안이 없으니까 ‘안철수, 안철수’ 한 거야. 게다가 개표 전날 미국으로 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문재인을 지지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봐야 할 것 아냐. 도대체 ‘선거’라는 행위를 뭘로 보는 거야. 선거는 국민의 결정이지 자기들 결정이 아니야. 미국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정치 또 한다고 했지? 미친 사람 아니야? 그런 사람을 데려다 뭐에다 써먹어.”
―왜 박 당선인을 지지했죠.
“남자의 시대가 가고 여자의 시대가 왔다는 것은 내가 오래전부터 해온 말이야. 근데 박근혜 혼자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어. 그래서 이원집정제를 생각했지. 박근혜가 가능하려면 남자 중에 보조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 거야. 안철수 쪽에서 도와준다면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 근데 자세히 보니까 안철수가 깡통이야… 아내도 박근혜가 좋다 하더라구.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총탄에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18년 동안이나 고독 속에서 무엇을 생각했겠느냐, 어떤 내적(內的) 상태가 왔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내가 놀라서 대꾸를 못했어. 거기까진 생각 못했거든. 박근혜가 내공이 쌓였을 것이라고 결론 냈지. 내공이 뭐냐, 독한 마음이야. 뭔가를 하겠다는 독한 마음. 박근혜가 (지난해 12월 13일) 여기 토지문화관에 왔을 때 ‘당신 내공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아버지 이야길 꺼냈지.”
김 시인은 옛일이 주마등처럼 흐르는 듯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미쳤었어. 참선을 지독하게 하면 치유 효과가 있다더라고. 그래서 시작했어. 잘 때도 가부좌를 틀 정도로 독하게 했지. 얼굴은 해골이 됐어. 참선 100일을 끝내고 101일째 되는 날이었어. 낮 12시에 교도소 방송에서 박정희가 죽었다고 나오는 거야. 그때 떠오르는 게 있었어. 공(球)이 세 개가 떠올랐어. 그게 참선이야. 공마다 이름이 있었어. 첫째 공은 인생무상, 둘째 공은 안녕히 가십시오, 셋째 공은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껄껄 웃음이 나오더라구. 참선이 코미디야 코미디. 이튿날 12시에는 또 추모방송이 나와. 방송에 나온 김수환 추기경의 첫마디가 인생무상! 아따, 나 그렇게 소름 끼치기는 처음이네. 무서워서가 아니야. 내가 인생무상을 생각했는데 가톨릭의 거인이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니 소름이 끼친 거야.”
▼ “정치가 뭐냐고? 모든걸 제자리에 앉히는거지” ▼
4시간여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김지하 시인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우주론 동학이론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원주=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인생무상이라… 그건 어떤 느낌이었나요. (박정희 대통령이) 잘 죽었다는 통쾌함?
“그런 게 아니야. 차원이 달라. 나는 사람을 극단적으로 미워한 적이 없어. 참선을 하면서 박정희를 생각해 보니 ‘자기도 나라 먹여 살리려 애쓰다 갔지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전처럼 욕이 안 나와. 이 이야기를 박근혜 앞에서 했어. 그런데 얼굴이 하나도 안 변해. 눈물은커녕 웃음도 없어. 조금은 감동할 줄 알았는데 꼼짝도 안 해. ‘김지하니까 경계해야겠다’는 것도 아닌 거 같았어. 그냥 독한 거야. 그래서 내가 속으로 ‘18년 동안 자기 혼자 가슴 안에 칼을 세우고 혼자서 지켰구나.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내공이다’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박근혜에게 이렇게 말했어. ‘당신이 뭘 해낼 사람이다’.”
―(박 당선인이) 앞으로 잘할까요.
“잘할 거야. 잘 안하면 설 자리가 없어. 가난한 사람 먹여 살려야 해. 지금 국운이 서 있어. 3000년 동안 남성이 여자를 억압해 왔어. 남성주의, 가부장제 역사에서 여성 지도자가 나올 때는 대세가 움직인다는 거야. 지금이 바로 개벽기야. 음(陰) 개벽이야. 양(陽) 지배에서 음 지배로 넘어가는 때야. 이번에 5060세대가 움직였어. 5060세대는 민주화운동과 산업화의 주체야.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은 국운이 바뀐 거야. 또 젊은 세대 34%가 박근혜를 지지했어. 이것이 국운을 움직인 힘이 아니면 뭔가.”
―만약 당선인이 잘못하면?
“알게 뭐야. 내게 책임 있어? 나는 책임 질 생각 없어. 내 할 일 하면 돼. 글 쓰면 돼.”
다시 화제를 과거로 돌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많이 미웠나요.
“지독했지. 가랑이를 찢어서 개한테 줄까. 미워할 수밖에 없지. 내가 그렇게 얻어터졌는데. (기자를 보며) 불로 지지는 것만 고문이라고 알지? 그렇지 않아.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다가들어와. 가끔 밑바닥도 올라와. 24시간 감시받으며 독방에 오래 있으면 누구라도 정신착란에 빠져. 온몸을 뒤틀고 몸부림치면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정보국에서 연락이 와. 항복하라고. 차(車) 사 준다 어쩌고 하면서 ‘각하에게 편지 한 통 쓰세요. 나라를 위해 같이 좀 일 좀 합시다. 뭐가 어렵습니까?’ 나는 면회실에 걸린 태극기를 가리키며 ‘태극기가 왜 저렇게 생긴 줄 아세요?’라며 딴청을 부렸지. 내가 (그들에게) 손들 수 있어? 손들 수 없지.”
―인생무상을 깨닫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왜 그 뒤로도 마음고생을 했나요.
“(내가) 미쳤었다니까. (갑자기 호통을 치며) 한번 말하면 왜 못 알아들어. 정신병이었다고 정신병! 나는 미쳤었어. 10년 동안 정신병원을 열두 번이나 들어갔어. 지금은 약을 안 먹지만 항우울제 안정제 수면제로 폐인이 됐다고. 그것 때문에 온 가족이 우울했어. 아내는 정보부와 빨갱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세 번이나 살해될 뻔했어. 고생을 강조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언젠가 책을 쓸 테니 기다려. 신문에 쓸 내용은 아니야. 왜? 더러우니까. 돈이 나오고, 나한테 속임수를 쓰고, 간첩이 나오는데. 아직 (책 쓰기엔) 일러.”
옆에 있던 김 관장이 조용히 말을 받았다.
“처음에 붙잡혀 간 후 1년 동안 면회도 안 됐다. 김지하 죽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오는데. 그런데 소문이 들리기로 백낙청, 이영희(*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1929∼2010)를 말함.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책으로 386세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인간들이 모여 김지하 욕을 한다는 거야. 내가 이영희 집에 서슬이 퍼래서 쳐들어갔지. 이영희가 너무 놀라 담배를 거꾸로 물었을 정도였어. 김지하가 형무소에 들어간 초부터 백낙청과 이영희는 김지하를 씹었어. 자기들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다시 김 시인의 말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시골에서 돈이 안 올라오면 강의실에서 잤거든. 그래서 우리 패거리 별명이 거지야(웃음). 근데 이영희가 나한테 술 취해서 ‘김지하는 거지’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이야말로 거지다’ 했지. ‘매일 프롤레타리아 만세를 부르고, 없는 사람 만세 부르면서 내가 밥 얻어먹으려고 손 벌리는 게 뭐가 나빠. 당신이야말로 더러운 거지야. 사상(思想)거지, 당신 글 다 읽어봤는데 당신 창작물이 어디에 있어. 아사히신문, 뉴욕타임스, 인민일보 인용한 것 외에 더 있나?’ 그랬더니 후배들이 낄낄 웃고.”
시인은 마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 아이처럼 깔깔댔다.
―얼마 전 신문 칼럼에서는 백낙청 교수를 비판하셨어요.
“내가 옛날부터 다 말했던 거야. 다만 (공개적으로) 참은 거지. 옛날에 백낙청한테도 이야기했어. 지금 우리나라 민중 형태는 밑바닥이다. 이쪽(민중)부터 들어올려야 한다.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 당신이 배운 미국 문학을 하면 좋겠다. 문학은 고통의 산물이야.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하버드 갔다 온 걸로 사람들 겁주고, 가르치려 들면 안 되지. 심지어 (내가) 감옥에서 막 나온 뒤에 실천문학에서 나하고 백낙청 대담을 시켰어. 며칠 후 (당시 주간이었던) 이해찬(전 국무총리)이 전화를 했어. 백낙청이가 자기가 말한 부분을 수정한다고 원고를 가져갔다는 거야. 그러면서 나한테도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하라고. 내가 그랬지. 아니 대담 원고를 수정하는 놈도 다 있냐.
또 있어. 내가 장모(*소설가 박경리)를 만나기도 전이야. 백낙청이 장모 문학평을 썼어. ‘시장과 전장’이란 책이었어. 근데 이걸 완전히 멜로드라마로 만들어 놓은 거야. ‘시장과 전장’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야. 그걸 백낙청이 멜로드라마로 만든 거야. 이런 자가 평론가라고 나서고 대담원고를 수정해? 내가 그 동네 풍경을 잘 알아. 한국 문화를 알려면 한국 문학전통에 집착을 해야지. 배우지도 않고 미국 소설 몇 개를 읽고 들어와서 휘저으려고 하니. 그런 문학 지식이 지식이야? 이번에 쓴 칼럼이 그 이야기야.”
문득 그에게 인생이란 뭘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김 관장님은 아까 제게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은요?
“인생은 한 번 왔다 가는 거야. 내가 오래 살고 싶을 것 같아? 돈 많이 벌어서? 지금 이렇게 정신 차리고 있는 것만도 사실 무리야. (옆눈으로 김 관장을 보며) 나는 굉장히 소심한 사람이야. 소심한 사람이 대게 마누라 한마디에 움찔해. ‘헤어집시다’ 하면 바로 ‘안 돼’라고 말해. 밥은 얻어먹고 살아야 할 것 아냐. 하하하.”
―선생의 병을 고친 한의학자 장병두 할아버지가 선생을 보고 ‘서 푼짜리 분노를 집어치워라’고 했다던데 그 분노는 뭐였나요? 박정희였나요?
“모두 포함한 건데, 못났으니까 분노를 느낀 거야… 집안이 불행했지.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어. 기관총 들고 게릴라전까지 간 사람이야. 우익들이 나를 가마니에 넣고 목포 앞바다에 집어넣는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하니까 기관총 내던지고 하산했어. 자수한 거지. 굴욕이 심했을 거야. 자살 기도를 세 번이나 했어. 불행했어.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목포)으로 갈 수 있었겠나. 흘러 흘러 원주로 왔지. 판자로 지은 극장에 영사주임으로 있으면서 당시 열세 살이었던 나를 불러 원주에서 함께 살게 됐어.”
그의 입에서 듣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 그대로였다.
“굶지는 않았지만 가난했어. 돈이 생기면 아버지는 술을 드셨지. 그래도 나를 서울대학까지 보낸 거야. 나는 외아들이었고. 이런 내가 어떻게 공산주의가 되겠나. 공산주의에 개인은 없어. 내가 감옥 들어간 뒤 나더러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라고 한 것은 다른 놈들이 만들어 붙인 거야. 4·19 이후부터 이상하게 자칭 마르크시스트들이 나를 대장으로 만들려는 분위기가 있는 거야. 나는 아닌데 말이야. 그 뒤로 몇십 년 동안 사람들이 심심하면 전화를 해 ‘아무개가 형님 찍어 죽인다 했어요’라는 거야. 내가 뭐라 대꾸했는지 알아? ‘네가 더 나쁜 놈이다, 동지를 고자질하고, 뭐하는 새끼냐. 전화 또 하면 죽일 거야.’ 한국의 자칭 혁명가들이 잘하는 고자질, 그게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내 이름이 왜 지하인줄 알아?”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기자는 “지초 지(芝)에 물 하(河) 아닙니까”라고 답했다. 그가 허허 웃었다.
“땅속에나 갈 놈이라는 뜻이야. 나중에 유식한 놈들이 한자를 붙인 거지. 한글로 그냥 ‘지하’야. 서울대 문리과대학 다닐 때 시화전을 했어. 그 당시 우리 세계에서는 시화전 한번 하면 이름이 나게 돼. 그러니까 이름이 중요하잖아. 내 본명이 김영일이야. 그런데 같은 이름이 5명이나 됐어. 그러던 참에 동아일보에 있던 선배 한 명이 술 사준다고 오라는 거야. 당시에 낮술 사주는 선배는 큰 선배였지. 얼큰하게 취해 학교로 가려는데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야. 그래서 걸었어. 길가를 지나는데 ‘지하 이발소’ ‘지하 다방’ 옳다, 지하다. 그때부터 내 이름을 지하라고 한 거야… 더러운 이름이야.”
그의 말끝이 너무 쓸쓸해 기자 마음까지 쓸쓸해졌다.
문득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뱀띠시죠?
“맞아. 근데 하나도 안 즐거워. 올해 (서민들은) 고통의 해야. 내년 봄까지도 안 좋을 것 같아. 그 대신 이 고비만 넘기면 참 좋은 시절이 올 것 같아. 물론 내 생각이니 믿지는 말고(웃음). 요즘 나는 무조건 아내 (생각) 따라가. 옛날에 나는 빠르고 단호했는데 지금은 안 맞아. 그래서 기다려야지, 신중해져야지 해. 박근혜에게 국민들 희망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안도였어. 이제 좀 살겠구나, 이제 나는 글만 쓰자. 나머지는 후배들에게 맡기고… 이제 짐을 놓았어.”
―정치가 뭡니까?
“정치? 모든 것을 제자리에 앉히는 거지.”
역시 그다운 대답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인근 식당으로 옮겨서까지 진행된 4시간여 인터뷰 동안 그는 걸림과 막힘이 없었다. 기자는 그를 만나기 전 그의 모진 삶을 연민했다. 하지만 때로는 두 눈을 부릅뜨며 욕설과 호통을 치면서 화를 내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표정으로 깔깔대는 모습을 보며 기자는 ‘태어나서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이 저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김지하 시인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로 4개월 투옥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1970년 사상계에 발표한 풍자시 ‘오적’ 으로 반공법 위반, 1개월 투옥
△1973년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
△1974년 민청학련 주모자로 기소돼 사형 선고(긴급조치 4호 위반)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 1974’와 관련해 재구속(반공법 위반), 노벨 문학상·평화상 후보로 추천
△1978년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
△1941년 목포 출생
△1959년 중동고등학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학사)
△1985년 미국 명예인권실천 박사
△1993년 서강대 명예문학박사
△명지대, 영남대, 동국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역임
△현재 원주 상지대 출강
인터뷰=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
[박근혜 시대 개막]
[대선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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