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625전쟁 (1) 121김신조사태 상세보고서
1.21청와대기습테러와 팬텀기 도입
1월 21일은 유명한 김신조의 청와대기습이 있었던 1.21사태의 바로 그날입니다. 1.21사태는 1968년 북괴 124특수군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청와대를 기습한 사건입니다. 굳이 비교하여 예를 들자면 우리가 겪은 1.21사태는 미국이 겪은 911사태와 그 성격이 같습니다. 1.21사태를 계기로 하여 한국의 국방정책은 많이바뀌게 됩니다. 일종의 비정규전(테러)에 대한 대응체제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비군제도입니다.
북괴의 청와대 기습테러인 121사태를 겪고나서 우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그 향토예비군은 그후 일련의 테러전인 울진삼척지구무장공비토벌에 일등공신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박대통령의 불같은 응징의 의지를 달래고자한 미국의 약점을 간파하여 우리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팬텀기를 토입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조차도 F-104를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F22랩터를 도입한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 였습니다. 1969년에 우리가 팬텀기 1개대대(18대)를 운영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미국외에는 영국만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전략적 전폭기 역할을 수행하는 팬텀기를 도입하기 위해서 박대통령은 월남파병에 반대급부적 조건으로까지 이용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측 협상 대표인 최규하 외무부장관을 불러 “팬텀기 지원을 보장받지 못하면 회담을 깨고 나오라”고 지시까지 했던 것입니다.그렇게 해서 우리는 팬텀기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특기할 만한 것으로, 미국 이외로서는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F-4 운용국가가 된 것 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 최강의 항공전력을 보유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의 항공자위대는 1970년도입을 결정하여 1973년에 F-4E를 도입개시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무상군사원조 1억달라를 추가로 받아내었습니다. 이것의 내막은 북괴의 연이은 테러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 미국에대한 한국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미국의 고육지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무상원조 1억달라의 용처에 대해서 박대통령은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다들 들으시오. 최규하 - 밴스 장관의 회담 내용인데 군사원조 지원액 1억 달러 중 팬텀기 1개대대(18대) 구입비와 비행장 개선비(500만달러)를 포함해 6800만 달러를 공군이 쓰고 나머지 3200만 달러는 육군·해군, 해병대와 경찰이 쓰라는 지시요.” 당시 우리의 경제를 감안하면 1억달라는 천문학적 금액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미국에 대한 엄포로서 1억달라 공짜로 받아냈다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 돈인 1억달라중에 무려 6800만 달라가 공군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나마 아시아 최강의 공군전력을 유지할수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가장 공군을 우선한 정책이기도 합니다. 그 후 미국에 의해 Peace Spectator로 명명된 프로그램의 제1진으로 1969년 8월25일 F-4DBlock 24형 4대, 25형 13대, 26형 1대, 총 18대의 F-4D를 인도 받게 되며 이 기체들은 제11전투비행단 제151전투비행대대가 창설되어 배치되었습니다.1972년에 제2진으로 공군 보유 F-5A 36대와 RF-5A 8대의 베트남 공여에 대한 대여분으로 주한미공군 제3전투비행단 (3rd TFW) 소속 F-4D 18기 (Block 26형 7대, 27형 6대, 28형5대)가 이관되어 공군제110전투비행대가 재편성되었다. 제2진은 미국으로부터의 대여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몇대가 일시 사용 후 반려되었을 뿐 대부분은 그대로 공군의 보유기가 되었다. (한때는 막강 공군이었는데 ...)
그리고 우리는 방위성금을 모아서 팬텀기를 추가로 구입하여 공군력을 확충하였습니다. 지금처럼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온국민이 한마음으로 공군력을 강화한 결실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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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버님으로 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전해 드립니다.1968년1월 21일 당시 저의 아버님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은 바데로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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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신조일당은 주로 미군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과 일부 미군과 국군의 경계지역 접경만을 골라서 침투하였습니다. 그만큼 당시 미군의 경계태세가 허술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아군 복장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의심을 회피할수 있었기도 합니다. 어쨌든 김신조일당의 청와대 습격조는 아주 유유히 휴전선을 넘어서 서울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후 미군경계지역을 벗어나서 검문다운 검문을 한 것이 바로 세검정에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시던 최 규식 총경이었습니다. 김신조 일당이 최규식총경을 총격하고 그곳에서 총격전이 벌어 졌습니다. 물론 그전에 신고가 접수되어서 우리의 군경이 대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북괴 특수침투요원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던 상황이었습니다. 68년 1월21일 저녁 7~8시경이었습니다. 당시 기온은 영하 20도를 헤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규식총경의 검문에막힌 김신조일당의 총격으로 콩볶는 듯한 소리가 효자동 세검정 그리고 청와대까지들렸습니다. 우리의 군경과 북괴침투조간의 격렬한 총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그러자 상황실에는 청와대 외곽 경비초소로부터 다급하면서도 지원을 요청하는 경비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 외곽 초소경비요원은 거의 울음 썩인 목소리로 긴급지원(실탄등) 을 요청하는 그런 상황이었다고합니다.계속 다급한 지원요청은 들어오고 총격전의 소리는 더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당시 저의 아버님은 경비대 본부에서 근무를 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그 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고 지금도당시 말씀을 하실때는 마치 당시로 돌아가서 서 있는듯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그중에서도 박대통령의 모습은 지금도 너무나도 생생하다고 하십니다. 무선과 유선으로 날라오는 상황에 대해서 박대통령께서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진두지휘를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 특수부대를 최규식 총경보다 먼저 조우한 사람은 서대문경찰서장이었습니다. 소속을 묻자 특수수부대훈련 마치고 귀대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바람에 의심을 가지면서도 그냥 통과 시키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무래도 미심쩍으니까 서대문 경찰서장은 뒤따라가면서 무전을 날렸습니다. "미상의 부대 이동중, 재 검문요망" 이 무전은 바로 당시 중앙 정보부에 잡혔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선 바로 종로경찰서에 알렸고 그래서 최규식 총경은 부관과 함께 "빽차(당시 경찰차는 새하얀 백색의 찦)" 를 타고 자하문 밖 세검정으로 달려 간 것입니다. 허리에 권총만 찬 총경이 북괴 특수부대를 가로막고 검문을 하였습니다."소속을 말하시오" "방첩부대야! 저리 비켜"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리는 수법)"난 종로서장이요. 소속을 확인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세검정 고개길로 77번 시내버스가 헤드라이트를 키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특수부대원들은 77번 시내버스를 최규식총경을 지원하러오는 지원부대인 줄 착각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총격을 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시내버스라는 것을 알았다면 최규식총경(부관,운전병)일행을 무혈 진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후 김신조 일당을 잡은 군경은 승진과 포상을 받았지만 제일 처음 김신조일당과 조우하였으나 미처 검거치 못하고 놓친 서대문서는 그 어떤 포상도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서대문서장의 자조섞인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죽은 총경보다 산 순경이 낫지 않은가?"어째든 그 후 김신조 외에 1명을 더 생포 했습니다만 그 한명은 후송중에 자폭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은 대테러전까지 가미한 국가안보 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분명 121사태(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는 국가의 심장부를 노린 테러였고 또 그 테러의여파는 대한민국을 변화시켰습니다. 대테러전 능력까지 겸비하게 된 대한민국을 보고 당시 김일성은 통탄해마지 않았습니다. "앗 뿔사! 내가 실수 했구만" 바로 김일성이가 박대통령이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상대를 잘 못 골른 결과입니다.(발췌) /고성혁의 역사추적이야기 2006/01/23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http://blog.naver.com/beetle55/100161144947
6.25 사변이 끝나고 이렇게 대한민국, 한반도는 휴전협정을 맺고 전쟁을 중단 했지만 이후 남북한 양측 체제가 조금씩 모습을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인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3.8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무력충돌로 인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특히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는 북한의 끊임없는 시비와 도발과 국지적 군사적 침투와 공격으로 이때 희생당한 한국군과 미군들의 수도 상당하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이곳 후전선 부근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지만. 특히 1966년부터 1969년까지는 많은 전투와 남북간의 침투작전과 무력충돌이 있었다. 그래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일어난 국지전투 등을 일컬어 '2차 6.25 전쟁' 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다른 체제에서 각자의 길을 걷던 남북한은 접경지대인 휴전선에서 크고 작은 국지전을 벌이던 중 1968년, 남한을 온통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지니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 무장공비들이 남한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 뒷산까지 쳐들어온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 일어난다.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박정희 목따러 왔시오.” 박정희라는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기 어려웠던 1968년, TV로 중계된 기자회견장에서 무장공비 김신조가 던진 말이다. 남북 대립이 극심했던 40여년 전, 남한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남파한 북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 중 유일한 생포자 김신조가 기자회견에서 던진 말이다. 1968년 1월 21일.
의 무장 공비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인 박정희 朴正熙 (1917-1979.10.26.)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사건이 일어난다. 북한 무장 공비 특공대는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공작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 또는 '1·21 사태', '1·21 청와대 기습 사건' 이라고도 부른다. 1968년 1월 13일,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당시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와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는다. 이들의 임무를 달성하면 남한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국민이 들고 일어나 남한정부와 미국에 저항하여 싸울 것이고, 그 틈에 북한이 남한을 흡수하여 통일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들 특수부대는 이 암살지령 수행을 위해 2년 동안 특수훈련을 받았으며, 마지막 15일 동안은 청와대 실제 모형에서 목표 제거 훈련 예행연습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또한 이들 특수부대원들은 침투훈련과 탈주훈련, 무기, 지도법, 공수작전, 수륙작전과 맨손격투 (나이프 격투를 특히 강조) 그리고 은닉법 등에 대해 훈련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30kg나 나가는 군장을 메고 시속 8 마일로 산속을 달리는 훈련은 극심한 훈련으로 발톱이 부러지거나 동상에 걸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특히 은닉술에서는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매장되어 있는 시신과 함께 잠을 자는 훈련을 받았다.
이후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 는 “무덤을 파고 들어가 자는 훈련을 함으로써 우리들은 두려움을 모르게 되었다 - 아무도 우리를가 무덤 안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124 부대 북한의 민족보위성 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의 특수부대. 이 부대원 중 31명이 차출되어 당시 남한의 대통령인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로 보내진다. 피습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31명의 특수부대원 중 29명이 사살당하고 한 명은 북한으로 탈출하고, 한 명은 생포된다. 이후 이 특수부대는 해체되었다. 124 부대는 남한에서 주로 정보수집, 스파이 활동, 테러활동 그리고 납치 등의 공작을 하는 북한의 특수부대 수색팀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한국에 침투한 31명의 무장동비들 중 한 명이 북으로 탈출을 한것으로 여겨지며, 훗날 이는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에 의해 사진에서 북한의 4성장군 박재경으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김재경은 북한군의 부참모총장으로 김정일의 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68년 1월 16일,북한의 124부대 특수부대원들은 황해북도 연산 延山郡 의 자신들의 주둔지을 떠난다.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1월 17일 밤 11시, 휴전선의 미군 2 보병 사단 (2nd Infantry Divison, 2ID 또는 2nd ID) 가 맡은 구역의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남하하는데 성공하고, 1월 18일 새벽 2시, 모래동과 석포리에서 야영을 한다. 1월 19일, 새벽 5시, 임진강을 건넌 북한공작원들은 심봉산에서 야영을 한다. * 임진강 臨津江 한반도 중부를 서쪽으로 흘러가서
로 흘러가는 강. 한강의 제 1지류로 하류에서
과 합류하고 강폭이 넓어진다. 하구에는
가 있다
임진강 臨津江 오후 2시, 떌감을 하러 나온 법원리의 우씨 4형제가 이들 북한공작원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북한공작원들을 이들을 주기이느냐 살려주느냐로 한참을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죽이지는 않고, 이제 곧 남한에 반란이 일어날 것이며,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영예에 대해 설교를 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준다. 하지만 우씨 형제는 바로법원리 창현 경찰서에 신고를 한다. 무장공비가 좀 마음이 약했나보다. 공비들은 바로 야영을 중단하고 페이스를 높히는데, 각자 30kg 의 군장을 메고 시간당 10 킬로미터를 산길을 행군하면서 노고산을 넘어 1월 20일 아침 7시 비봉산에 도착한다. 한편 신고를 받은 한국측은 총비상이 걸리고, 대한민국 25 보병 사단 (별명: 비룡부대, ROKA 25th Infantry Division) 에서 3개 대대가 출동하여 수색작전을 벌이고 노고산 일대를 뒤진다. 하지만 무장공비들은 이미 한국군이 예상한 포위망을 벗어나 그곳을 떠난 후였다. 1월 20일 밤, 북한 124부대 특수부대원들은 2인 또는 3인 1조로 서울에 잠입, 승가사 절에서 재집결하고, 한국군의 무전을 엿듣고는 새로운 습격 작전을 짠다. 한편, 한국군은 무장공비 수색에 30 보병대와 공수부대를 다시 투입하고 경찰이 홍제동과 정릉 그리고 북악산 지역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무장공비 침투 소식에 서울 전 지역의 검색은 강화되고, 그들의 작전은 성공할 확율이 적어지자 북한 124부대 특수부대원의 대장은 작전을 바꾼다. 무장공비들은 한국군 제26 보병대 군복으로 갈아입고 (부대 마크도 준비해 왔다고 한다) 대열을 만들어 마치 수색작전에 참여했다가 교대를 하러 돌아오는 것처럼 마지막 남은 약 1.6km 를 청와대로 행군했다. 이들은 자하문 옆 세검정을 지나 청와대로 향했는데. 진군 중 경찰대와 한국군 부대들을 지나치기도 하였다.
1968년 1월 21일 저녁 8시,
북한 124부대 특수부대원들은 청와대에서 불과 800 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정체가 드러난다. 당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장
崔圭植 총경이 무장공비들에게 다가가 검문을 하였고, 이들의 대답에 의심을 하기 시작한 최규식 총경이 총을 뺴들고 순식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무장공비들은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총격전에서 무장공비 두 명이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이어 무장공비들은 흩어져서 인왕산, 비봉산과 의정부 등지로 도망을 간다.
,
. 1월 22일,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한국 육군 6사단은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나서고 결국 92연대와 30 보병대는 인왕산 근처 민가에 숨어있던 김신조를 생포한다. 그리고 무장공비 한 명은 자결을 한다. 수도방위 사령부 30 대대는 부암동과 북악산에서 무장공비 4 명을 사살한다. 그리고 1월 23일, 26 보병대는 도봉산에서 또 무장공비 한명을 사살한다.
이어서 24일,26 사단과 1사단 군인들은 12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했고, 25일에는 송추 근처에서 무장공비 셋을 사살했다. 그리고 1월 29일, 파주 坡州 에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하여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후 도주한 걸로 간주한 2 명의 무장공비 중 한명은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나머지 한 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침투한 31명의 북한 124부대 특수부대원들 중 29명이 사살되었고, 한 명 (김신조) 은 생포, 그리고 한 명은 북한으로 탈출한것으로 보고있다.
생포당한 남파 무장공비 김신조 (당시 26세).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북에서 내려보낸 북한 124부대 특수부대원 31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고, 생포된 인물. 28명이 사살됐고. 한 명은 의령로를 통해 북으로 넘어간것으로 추정.
1968년 청와대 습격 사건(1.21 사태) 뒤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가 사살된 동료 무장공비들의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124 부대원 31명이 침투하면서 소지한 습격용 무기는 기관단총 (PPS) 31정, ㄱ실탄 9,300발, TT 권총 31정,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 방어용 수류탄 252발, 단도 각 1정씩 31개로 완전 중무장한 상테였다.
김신조가 지니고 있던 총기류.
김신조 침투를 알리는 안내판.
총격전의 흔적이 남아있는 북악산 소나무.
소나무 옆 안내문.
세검정-자하문 검문소. 2011년 7월.
세검정-자하문 검문소 건너편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
이 북한공작원 침투.암살기도사건으로 남한측은 모두 26명이 사망하였고, 모두 66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대부분은 군인과 경찰이었지만 약 20명이 넘는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DMZ 군사분계선을 넘어 탈출을 시도하는 무장공비들과의 교전에서 미군도 4 명이 전사하였다.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장
총경과 정종수 부서장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 최규식 崔圭植 (1932-1968.1.21.) 대한민국의 경찰관으로 1968년 김신조 金新朝 를 비롯한 무장 공비들에 의한
때 사망했다.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61년 경찰에 투신해 1967년 10월부터 서울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김신조 및 31명의 무장 공비들이 당시 청와대를 습격해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고 남파되자 청와대 바로 옆에서 이를 검문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고 정종수 경사와 함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사후 경무관으로 특진되고
이 추서되었으며 그 근처에 동상도 건립되었다.
창의문 근처 세검정에 서있는 최규식 총경 동상.
최규식 총경 동상.
최규식 총경 동상에 있는 안내문.
김신조 일당 침투경로
김신조 사건으로 경기도 양주시와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일명 소귀고개) 6.8km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 되었으다. 서울의 DMZ 라 불리던 이 길은 41년만인 지난 2010년 2얼에 민간인에게 개방되었으며 '김신조 루트' 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김신조가 타고 내려온 루트의 오늘날의 모습. 이 길은 북으로 도봉산, 그리고 남으로 북악산이 위치한다. 6.25 전쟁 때에는 파주와 양주 피난민들이 이 길을 따라 피난을 떠났다. 1965년 4월, 청와대로 이르는 길이라 민간인 금지구역으로 정하기 전까지 미공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사저이자 관저인 청와대.
청와대. 2010년 8월 5일. 김신조 金新朝 (1942-)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 당시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려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공비 31명 중에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 중 생포되었던 인물 (다른 한 명은 북한으로 탈출한것으로 보임). 생포된 김신조는 일년 동안 취조를 받고 이후 대한민국에 귀순, 1970년 남한 시민이 된다. 북한에 있는 김신조의 아버지는 처형당하고 그의 친척들도 처형당했다. 남한에 정착한 김신조는 결혼 후 서울침례회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가 되었으며 목사로 활동 중이고 이름도 개명한 채 안정된 삶을 살아가도 있다고 한다.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 (김신조 저, 동아출판사, 1994.10.01)
당시 대한민국을 뒤흔든 희대의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김신조 사건" 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남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국가 비상사태 시 국가의 안전보당을 위하여 태극연습을 그 해 처음 실시하였고. 이듬해인 1969년 을지연습으로 명칭을 ㅏ꾸어 지금까지 41년 동안 맨ㄴ 실시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비정규군에 대비하기 위해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안보우선주의는
과
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다.
* 향토예비군 鄕土豫備軍
전시 또는 비상 사태가 일어났을 때 본인이 소속된 직장이나 지역을 지키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한국의 비정규군. 6·25전쟁을 통한 한반도의 무력적화 야욕이 좌절된 북한은, 한때 평화통일을 앞세운 심리전·정치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 다시 무력침략정책으로 복귀하여 이른바 4대군사노선을 실천하고, 약 50만 명의 현역군 외에 노농적위대(勞農赤衛隊) 142만 명과 붉은 청년근위대 70만 명을 무장시켜 전쟁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1968년 1월 21일의 청와대기습 미수사건, 울진·삼척 지구의 양민학살과 약탈사건 등의 비인도적 야만행위를 감행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자주국방을 확립하기 위하여, 1968년 4월 1일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5월 29일 ‘향토예비군설치법’(법률 2017호)을 공포·시행함으로써 그 체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김신조 사건" 으로 남한도 북한의 김일성의 암살을 목적으로 특수부대를 설립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졌던, '실미도 (2003)' 의'634 부대 (실미도 부대)' 이다.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남한의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투한 사건으로 당시 대툥령 박정희는 대노하여 남한은 비밀리에 북한에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고, 1968년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부대를 설립한다. 부대의 이름은 인턴 서쪽에 있는 무인도 실미도의 이름을 따서 '실미도 부대' 로 정하고, 역시 북한의 124 부대 침투조 처럼 31명의 대원을 뽑는다.전과자들로 이루어진 대원들은 (이는 영화에서도 내용이 같지만, 사실과는 다르다고 함) 북한의 김일성을 암살하는 목적으로 훈련을 받았는데, 얼마 뒤 남북한이 화해 분위기로 바뀌어감에 따라 공격명령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존재 가치가 없어져버린 실미도 부대원들은 반역자의 오명을 쓰고, 1971년 8월 23일, 영등포 대방동에서 총격전 끝에 거의 전원이 사망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난 2003년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실록으로 본 1968/1/21사태 전말
1967년 10월 초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康仁德(강인덕·북한국장,통일부 장관 역임·68) 중앙정보부 분석 과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서 제목은 「최근 북한의 對南침투에 관한 분석-북한의 冬季 게릴라 침투 豫想報告」. 朴대통령은 보고를 들으면서 밑줄을 치고 때때로 메모를 했다. 결론 부분에 이르자 朴대통령은 한 문장에 밑줄을 두 번이나 치고 있었다. 「북괴는 내년부터 冬季작전에 돌입하여 본격적인 인민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라는 부분이었다. 북한의 동계 게릴라 침투작전을 예상한 보고가 끝나자 朴대통령은 인터폰으로 『국방부 장관, 각 軍 참모총장들 다 들어오라고 해』라고 지시했다.
『康君, 이건 게릴라戰이라 중앙정보부 통제능력에서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좀 모이라고 했으니까 자네가 다시 한번 설명하게』
이날 오후 국방부 장관과 육해공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앞에서 康과장의 설명이 끝나자 朴대통령은 『내가 조만간 全軍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과 기관장들을 다 모아 놓고 對간첩작전 회의를 해야겠으니 자네는 이 내용 을 설명할 준비를 하게』라고 했다. 대통령은 金聖恩 국방장관에게는 『국방부에 對간첩 작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할 테니 준비하시오』라고 했다. 「북한의 冬季 게릴라 침투 豫想報告」는 그때까지 중앙정보부에 속했던 對간첩 작전의 권한들을 대부분 국방부로 이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康仁德 과장이 이런 보고를 하게 된 것은 1967년 1월초 휴전선을 침투해 들어온 3인조 간첩을 체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들은 서울 시내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지내다 경찰의 불신검문에 의해 체포되었고 신원조회를 하는 과정에서 특이점이 나타나 對共수사기관에 이첩된 경우였다. 康仁德 前 통일부 장관의 회고.
『세 명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지 않고 내려 왔습니다. 그저 서울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돈을 쓰다가 신분증만 몇 개 구해서 월북하라는 것이 전부였는데, 당시로서는 특이한 경우였지요. 특히 6.25 이후 겨울에 휴전선을 통해 3인조를 내려 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눈밭에 발자국이 남기 때문에 북한은 극력 피하던 방식이었거든요. 「왜 내려 보냈나」하는 의문을 가지고 다각도로 분석해 보니 冬季작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겁니다』 5·16 당시 康仁德 해병대 중위는 전략정보관으로 해병대 사령부에 근무하다 중앙정보부에 차출된 경우였다.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군복을 벗고 분석국 과장, 부국장을 거쳐 1970년 12월 북한국장이 된 뒤 1978년에 퇴직했다 . 그는 매월 한 차례씩 북한 동향을 분석 보고하는 과정에서 朴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1967년 9월 초 金聖恩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북한이 게릴라 부대 를 만들었다는 보고를 접했다.
金聖恩씨의 증언.
『9월 초쯤 방첩대장 尹必鏞(윤필용)이 해안으로 침투하던 공비를 생포해 심문했더니 이런 정보가 있더라면서 보고를 해 왔습니다. 「124군 부대」였지요. 정확한 규모나 위치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북한이 군사도발을 강화할 것이란 판단을 했습니다』
방첩대의 정보는 비교적 정확했다. 북한은 1967년 8월12일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의 對南 공작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124군 부대」란 명칭을 가진 이 집단은 2400명에 이르는 부대원을 300명씩 8개 基地(기지)로 나누어 對南 유격훈련을 시작했다. 각 基地는 남한의 일개 道를 담당했으며 제 6기지는 경기도와 서울 지역을 담당했다.
이해 가을 제 6기지 부대원 중 정예요원 35명이 선발되어 서울 침공 계획 훈련에 돌입했다. 이 중 제1조 15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고 나머지 4개조(각 5명)가 각기 다른 목표를 동시에 타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제2조는 美대사관저를 습격하여 대사와 그 가족을 살해할 동안, 제3조는 육 군본부를 폭파해 將星들을 살해하고 제4조는 서울 교도소 정문을 폭파하여 죄수들을 탈옥시키며, 제5조는 서울 서빙고동에 있는 방첩부대의 간첩수용소를 급습하여 간첩들을 구출해 함께 월북한다는 계획이었다. 훗날 생포된 인민군 金新朝 소위는 자신이 선발되었을 때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임무가 실패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부대원들에게는 당과 수령을 위해 죽는 것이 최대의 영광이었으니까요』
1968년 1월6일 오전 10시, 朴正熙 대통령은 특별 기동차 편으로 강원도 원주역에 도착했다. 이날 야전군 상황실인 1군사령부 회의실에서 열린 「對간첩 非常治安회의」에는 丁一權 국무총리와 全 국무위원, 金炯旭 중앙정보부장, 任忠植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사령관,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知事, 檢事長, 경찰국장 등 173명의 각급 기관장들이 참석했다. 개식사에서 朴대통령은 『북괴 만행을 봉쇄하고 무장 간첩을 섬멸하는 데 있어 유의할 일은 軍官民이 혼연일체가 되어 상호협조체제를 확립하여 汎국민적 對간첩작전을 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정부는 이를 위해 향토방위법의 제정을 서두르고 있으며 앞으로 이 법을 잘 운용하여 지방 주민의 勝共정신을 강화하고 지역적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말했다. 이 회의에 중앙정보부 康仁德 분석과장도 참석했다. 그는 석 달 전 청와대 에서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참석자 전원에게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
『이번 1월부터 시작될 북한의 동계 작전은 종래와 다른 대규모 게릴라 작전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對간첩 작전시 각종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들어가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날 특히 朴대통령은 참석한 金炯旭 부장을 향해 중앙정보부의 越權(월권)행위를 거론하며 질타했다.
『서해 바다에 간첩선이 나타나면 정보부가 해군을 지휘해서 해군 사령관 노릇을 하거나, 육지에서 공비가 나왔을 때는 해당 지역 中情 지부장이 軍사령관 머리 꼭대기에 앉아 병력을 여기 배치하라, 저기 배치하라는 식으로 월권행사를 하는 모양인데 … 중앙정보부는 그런데 나가는 게 아니고 북괴의 정보를 수집해서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요. 앞으로 軍 작전에 정보부는 일체 개입하지 마시오』
이날 金炯旭 中情부장은 얼굴이 벌개져 회의 내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金聖恩 당시 국방부 장관의 설명.
『첫째, 朴대통령은 金炯旭이 지휘하여 수사한 「동백림 사건」이 심각한 외교문제를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知識人들을 고압적으로 수사하는 정보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합니다. 두 번째는 그 날 대통령도 지적했듯이 對간첩작전이 벌어지면 현지에서 중앙정보부의 월권행위가 하도 심해 군인들이 작전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비 두 세명만 출몰해도 군, 경찰, 정보부, 방첩대 등이 서로 다른 명령 계통을 가지고 현지에서 대립하다 초기 대응을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공비가 나타날 경우 상황에 따라 비상경계령을 甲, 乙, 丙 세 가지로 분류하기로 했다. 甲種 비상령은 경찰력만 동원해도 되는 상황 , 乙種 비상령은 군·경찰이 합동 대응해야 하는 상황, 丙種 비상은 전적으 로 軍이 통제권을 가져야 하는 상황으로 구분했다.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으로 對간첩 작전 기구를 2월 초까지 구성하기로 했다 . 이 기구는 軍을 중심으로 경찰과 정보부가 협조하는 체제로 결정됐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 오후 6시 회의를 마친 뒤 헬기 편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원주회의」에 참석하고 돌아 온 康仁德 분석과장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자신의 분석대로라면 북한의 동계침투작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전방에서 는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답답해진 그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 국방부에 나가 있던 정보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야, 들어오냐?』라고 물었다. 그때 마다 『아직 별 일이 없습 니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康과장은 속이 탔다.
이 무렵 金新朝가 포함된 124군 부대 35명은 각자 임무에 따른 반복 훈련을 거듭하며 출동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13일,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金正泰(김정태)는 공격 목표가 너무 분산되었다면서 기존의 계획을 수정, 공 격목표를 청와대로 한정시키고 朴正熙 대통령만 살해하는 임무로 축소시켰 다. 인원도 35명에서 31명으로 줄였다. 공격시점은 1월21일 20시 정각. 공격목표와 날짜가 정해지자 청와대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주요 지점별 공 격조를 나눠 훈련에 돌입했다. 청와대 습격 D데이에 임박해서는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청사를 대상으로 실전 연습을 하기도 했다. 북한의 암살목표로 결정된 朴正熙 대통령은 1월15일 오전 10시부터 11시40 분까지 청와대에서 年頭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는 경제건설과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부문의 성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사물에 대해 긍정적이고 善意的 인 관찰과 비판을 하는 것이 제2경제(경제의 윤리적 측면)의 요체』라고 말 했다.
예정시간인 1시간보다 40분이나 길어진 이날 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여 유있게 미소를 섞어가며 답변했던 朴正熙 대통령은 13개의 질문 중 꼭 한번 金正濂(김정렴) 상공부장관의 조언을 얻었을 뿐 정확한 통계수치를 들며 혼자서 답변했다. 朴대통령은 5·16 혁명 이후 4번째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對월맹정책에 대해 서는 평소의 강경론을 다시 강조했다.
이날 오후 朴대통령은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초도 순시를 했다. 오후 4시20 분부터 6시30분까지 재무부에서는 徐奉均(서봉균) 재무부 장관이 재무행정의 9大 목표를 브리핑하는 가운데 京釜고속도로 재원 조달 방안을 보고했다.
1968년 1월16일 朴正熙 대통령이 농림부, 건설부, 상공부를 연두순시하며 특용작물의 중점 지원, 서민 주택 건설에 주력하라고 각 부별로 지시를 하 던 시각, 金新朝 일당은 한국군 26사단 마크가 부착된 국군 복장에 개머리 판을 접을 수 있는 接鐵式(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 및 對戰車(대전차) 수 류탄으로 무장하고 황해도 연산에 주둔한 부대를 출발했다. 이들은 자정 무렵 開城에 도착, 다음날인 17일 새벽 비무장지대內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곳 에서 야간 침투를 위한 僞裝(위장)을 했다.
이날 국방부는 「原州 회의」에서 朴대통령이 내린 특별지시에 따라 분산된 對간첩 작전을 일원화시키는 새 기구안을 마련해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새 기구안은 대통령 직속으로 對간첩작전을 총지휘하며, 정책을 마련하는 중 앙협의회와 정책을 실천하는 대책본부를 두고 대책본부는 합동참모본부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월17일 밤 8시, 무장공비들은 美 2사단 지역의 正面(정면)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기 시작, 10시 정각에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에 도착했다. 이들 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은밀 침투를 시작했다.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은 軍 GP들이 요소 요소에 있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부 터 임진강을 건너기까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은밀 침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나 냄새까지 죽이며 지형의 그늘진 부분을 이용해 이동 하는 特殊戰(특수전) 기술이다. 초소나 경비병 근처에서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한 시간에 수 m 정도만을 이동할 정도로 인내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 金新朝를 포함한 무장공비들은 이미 훈련과정에서 이런 능력을 배양했고 , 야간 침투중 인기척을 느꼈을 경우 부동자세로 한 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 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둠속에서 상대방이 이 쪽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 게 하는 훈련이었다.
이들은 美 2사단 구역을 통과하여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널 때까 지 약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고 하며 먼동이 틀 때엔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파주군과 법원리 사이의 작은 산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경비병이나 지뢰밭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 아니라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서해바다로 연결된 임진강의 중·하류가 시작되는 임진각 부근은 海水가 滿潮(만조)때마다 밀 려 올라와 얼음이 비늘처럼 솟아오르고, 얼지 않은 바닷물이 곳곳에 고여 있어 도보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었다. 대신 고랑포 지역은 상류에 속해 海水의 영향이 없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 있어 이들이 침투로로 선정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선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루트가 美軍이 관할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 었다. 미군 지역에서는 무장침투 간첩을 한국군으로 誤認(오인)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군 지역 철책이 舊型(구형) 철조망이었기 때 문이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의 증언.
『1967년은 유달리 남침 사례가 많아 휴전선 철책부터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 그때까지 휴전선 철책이란 휴전 당시 남북한 군인들이 직접 설치한 원형 철조망 서너 가닥이 전부였습니다. 새빨갛게 녹이 슬대로 슬었고, 가끔씩 보수공사를 한다고 갈아주기는 했지만 인적이 드문 비무장지대에다 예산부 족으로 改修할 생각을 못했지요. 이것을 美 국방성에 부탁해 자재를 공급받 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철책선을 만든 겁니다. 이 공사는 그 해 겨울, 2 49km의 휴전선 全지역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단 미군 지역 4km 정도만 제 외되었지요』
美 2사단측은 鐵柱(철주)를 박고 전기 철조망을 쳐 對敵하려는 한국군의 대 응자세를 못 미더워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전자 감응 경보기 등으로 대처 하겠노라며 공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1968년 1월18일 오전 5시, 은밀침투로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31명의 무장공 비들은 지쳐 있어 이날 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비들은 假眠(가면)상태 로 휴식하고 있었고 5명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들어온 시각에 朴正熙 대통령은 연두순시에 여념이 없었다. 1월18일에는 외무부, 문교부, 공보부 에 들러 1968년도 시정방침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1월19일, 與野 총무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국회가 2월 중순까지 空轉(공전) 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은 법무 국무 교통 등 3개 부처를 순 시했다. 그는 국군장병의 처우개선, 호남선 複線化(복선화)계획 촉진 및 호 남지방 고속도로 계획을 수립할 것을 관계부처에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바로 그 시각, 파주군 초리골에 살던 禹聖濟(우성제·현 파주경찰서 보안계 장)를 포함한 네 형제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벼랑 아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경계병과 마주쳤다.
『국군 대위 한 명, 소위 한 명, 그리고 사병 계급장을 단 3명 등 모두 5명 이었죠. 우리 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였고 총은 개 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소총이었어요. 한 눈에 공비라고 알아 보았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禹씨 형제를 본 공비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불러 세워 담배를 권하더니 갑자 기 기관총으로 등을 밀며 벼랑 쪽으로 몰았다. 禹씨 형제들이 벼랑 밑으로 와 보니 일개 소대 병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禹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 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 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31명의 공비들은 禹씨 형제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말을 붙여왔다. 金新朝(現 충남 예산 군 성결교회) 목사의 증언.
『원칙으로는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무조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일부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며 반대를 했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역시 살려두자는 의견이 많았 습니다』
禹씨 형제는 벼랑 아래 덤불 속에서 네 시간여 동안 공비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풀 려날 수 있었다. 공비들 중엔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목시계를 꺼내 선물 로 주며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 부대가 내 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릴거야』라고 위협했다. 禹씨 형제들은 빈 지게를 지고 돌아 나오면서 자꾸만 뒤가 꺼림칙했다고 한다.
『혹시 쏘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요. 우리가 한참 걸어 나오다가 힐끗 돌아 보니 깜깜한 데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이동중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마을 입구 가로등 밑에서 미행이 없는지 살핀 뒤 언제 신고를 하 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丹陽 禹씨 종가집으로 달려가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19일 밤 9시경.
국가간의 전투력은 戰場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1·21 사태는 6·25 이후 15년 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金新朝를 포함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소대병력은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국군 초계병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뭇군 禹씨 형제와 우연히 부딪친 것을 제외하면 前方 거주 주민들에게 거동수상자들로 몰려 신고된 적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對간첩 작전능력도 6·25 이후 별로 改善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통신 계통은 특히 전근대적이었다.
金新朝와 30명의 무장공비 목격 사건은 禹씨 4형제에 의해 1월19일 밤 9시 경 파출소에 신고 접수가 되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전달된 시각은 9시30분 경이었다. 對간첩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는 세 시간이 지난 자정무렵에 이 정보가 도착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자만심 같은 게 있었어요. 훈련을 받을 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같이 하면서 교관들은 우리에게 「동무들은 세계 최강의 용사다. 국방 군들이 동무들 을 비행기로도 못 쫓아 오게 만들어 주겠다」며 혹독한 훈련 을 시켰거든요』
1월19일 오후 8시경 禹씨 형제들을 살려 보낸 뒤 거의 동시에 金新朝 일당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급속행군 이란, 약 30㎏의 짐을 진 重무장한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이 다. 당시 한국군의 경우 급속행군은 산악이 아닌 오직 도로 위에서만 가능 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 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金新朝 일당은 시간당 평균 10 ㎞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康仁德 과장은 이날도 자신의 분석이 들어맞지 않아 실망한 채 관사로 퇴근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머리 속은 온통 북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1월20일 토요일 새벽 두 시 경, 전화 벨 소리에 선잠에 빠졌던 康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강인덕 과장입니다』
『과장님,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몇 명이나 돼?』
『잘 모르겠지만 3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康仁德 과장은 「게릴라전이 시작됐다. 이젠 정치가 아닌 군사력이 대응해 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때 金新朝 일당은 앵무봉을 지나 경기도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엔 노 고산을 주파한 뒤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眞寬寺( 진관사)를 통과했다. 오전 6시경엔 북한산 碑峰(비봉)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없이 全力질주를 해낸 것이다.
1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 金聖恩 국방부 장관은 청사로 출근해서야 이 사 실을 보고받았다. 오전 9시30분경, 金장관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正熙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어디로 들어왔소?』라고 물었다.
『임진강 상류 고랑포 쪽입니다. 얼음이 얼면 건널 수가 있는 곳이지요』
『그놈들이 뭣하러 들어왔을까?』
『각하, 지난해 놈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각종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지 시설 파괴나 테러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군 부대나 주요시설도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휴전 후 연간 最多 도발 횟수인 170회를 기록한 1967년 한해 동안 전방지역 에서는 전쟁에 준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감행됐다.
1월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순찰중이던 한국 해군 56함 당진호가 두 척의 북한 砲艦(포함)으로부터 피격받아 침몰했고, 4월12일에는 중부산악 지대 휴전선을 북한군 90여명이 침범해 들어와 국군 7사단과 교전을 했다. 이때 7사단의 3개 포병대대가 북한지역에 휴전 후 최초로 585발의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4월22일에는 북한군들이 서부전선으로 침투해 미군 막사를 폭파, 두 명의 미군이 숨지고 19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있었고 5월2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작업중이던 한국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한국 해군이 25분 간 엄호사격을 하기도 했다.
8월7일에는 침투한 북한군이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트럭을 습격해 3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사흘 뒤엔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트럭이 습격당해 아군 3명이 사망했다. 8월 28일, 북한군은 판문점 동남쪽 30여m에 위치한 미군 막사를 기습, 미군 3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
9월5일에는 경원선 열차 폭파사건이, 13일에는 경의선 열차 폭파사건이 있 었고 동해상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을 여러 차례 납치하는 등 진행속도가 완 만할 뿐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金聖恩 국방장관은 그 순간까지도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지난해와 유사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짐작했을 뿐 청와대가 목표 인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이날 오전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을 전화로 불러내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서울 외곽에 집중 배치토록 지시했다. 6·25 당시 해병 전투단장(여단장)으로 한국군 1사단 지역이던 문산 지역에 서 美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金聖恩 장관은 金新朝 일당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당 지역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었다. 金 前 장관은 당시 자신의 추론이 어긋나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金新朝 일당이 나무꾼들을 풀어 준 지점에서 서울 眞寬外桐(진관외동)의 眞寬寺(진관사)까지 산악 코스로 행군을 하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 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眞寬寺를 거쳐 北漢山 碑峰의 僧伽寺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 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1968년 1월20일 토요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의 병력배치 상황을 보기 위해 金聖恩 장관과 朴鐘圭 경호실장을 대동하고 청와대 정문까지 내려왔다. 이틀 후 월남을 방문하기 위해 전날 청와대에 들러 朴대통령에 게 보고차 인사를 했던 崔宇根(최우근·육사3기) 수경사 사령관이 청와대로 달려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복 차림의 朴대통령이 정문에 서서 수경사 30대대 병력들이 배치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후부터 朴대통령은 감기를 앓아야 했다. 崔사령관의 인사를 받은 朴대통령의 얼굴엔 긴장감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곁에 섰던 朴鐘圭 경호실장이 『정보부 장보다 빨리 오네?』하며 농담을 했다.
오후 2시경, 6군단 예하 3개 사단과 金載圭(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되어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이 구축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장공비들이 이미 통과한 다음 병력을 배치한 것이었다 . 공비들은 자신들이 놓아준 禹씨 형제들의 신고보다 빨리 포위망을 벗어난 셈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에게 『주간에는 정밀 수색 을 실시해 흔적을 찾고 야간에는 매복을 하라』고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金聖恩 장관과 점심을 함께 들며 『임진강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라며 아쉬워 했다.
金장관은 오후 2시경,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접했다. 받아 보니 북한산 북쪽 자락의 경기도 송추 유원지 부근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및 흘린 듯한 음식물 약간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철통 같 은 방어선을 펼쳤는데 하루 만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실물 흔적을 남겨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朴대통령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보분석을 함께 하고 있었지요』
이때 金聖恩 장관은 결과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결정을 내렸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로 蔡元植(채원식) 치안국 장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 甲種 비상을 걸도록 하고 세검정에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월6일 「原州회의」에서 결정된 비상 경계령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甲種 경계령이 내려진 서울에서는 경찰들이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이무렵 무장간첩들은 북한산 僧伽寺 아래 기슭에 모여 휴식에 들어갔다. 계획대로라면 이날 오후에는 청와대 뒷산인 北岳山까지 가 있어야 했다. 金新朝 목사 의 증언.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4일 동안 강행군했기 때문에 지쳐버렸던 것이죠. 원래 루트는 다음날인 21일 오후까지 북악산을 지나 밤 8시경에는 세검정 쪽으로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북악산을 타려면 공격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허리까지 눈이 쑥쑥 빠지고 발밑은 미끄럽 고 더 이상 산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산 하나를 둔 채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碑峰 에서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날 밤 金聖恩 국방부장관 은 저녁 늦게까지 朴대통령과 환담했다.
朴대통령은 감기가 조금 심해지는 듯 밤이 깊을수록 기침을 자주 했다고 한 다. 金장관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한남동 공관으로 돌아왔다. 1월21일 일요일 오전, 金聖恩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곧바로 출근해 任忠植 합참본부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지도를 펴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金炯旭 정보부장이 드나들었지만 對간첩 작전 권이 국방부로 이첩되고 사건 성질상 자신이 개입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별 말이 없었다는 것이 金聖恩 前 국방장관의 증언이다.
1968년 1월21일밤 8시경, 朴正熙 대통령은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강한 체질이어서 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던 朴대통령은 저녁 식사 후 드물게 감기약을 먹고 9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 시각, 北漢山 碑峰 밑에서 마지막 공격 캠프를 차린 金新朝와 무장공비 30명은 조용히 개인 장구류를 챙긴 뒤 눈 덮인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자 기관단총, 소련제 TT 권총, 수류탄 10발 및 對전차 수류탄 2발, 실탄 300발 그리고 대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방한모 차림에 한국군 군복이었으 나 소련군式 장외투에 검은 농구화여서 어딘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추 위와 어둠이 이를 가려주었다.
밤 9시30분, 이들은 산길을 내려와 내리막인 일반 도로로 접어들었다. 접철 식 AK소총과 수류탄을 숨긴 외투가 밖으로 불룩했다. 이들은 행군하는 군인 처럼 2열 종대를 갖추고 침묵 속에 움직였다. 반짝이는 것은 눈동자뿐. 金新朝 목사의 회고.
『생각해 보세요. 1개 소대가 휴전선을 넘어 4일 동안 한번도 걸리지 않고 서울까지 온 겁니다. 중간에 나무꾼을 살려두어 경계령이 펴진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남한의 경찰이나 군인들을 한번도 겁낸 적이 없었습니다 . 지난 4일간의 경험도 우리가 그들을 비웃는 계기가 되었지요. 검문을 당 한다 해도 해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영화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대범함 뒤에는 한국군의 약한 戰力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碑峰에 숨어 있을 동안 이들은 세부 작전 계획을 수 립했다. 침투, 습격, 탈출조 등 3개 조로 나누어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 었다고 한다.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 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그동안 탈출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취해 시동 을 걸어 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습격조는 목표에 따라 네 개조로 세분되었고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습격하 여 朴대통령을 살해하고, 2조는 청와대 1층,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에 침입하여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전원 살해한 다음 도피 및 탈출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청와대 1층 습격을 맡은 2조 조장이 金新朝 인민군 소위였다. 이들이 세검정 길을 2열 종대로 걸어갈 무렵 서울 시내는 甲號 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뜸해 있었다. 이 괴한들을 처음 확인한 사 람은 李珏鉉(이각현) 서대문경찰서장이었다. 그는 정제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는 무전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李서장은 구평동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세검정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는 괴한 들을 목격하고 즉시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서울시경에 보고했다. 그 직후 李서장은 스리쿼터에 6명의 형사를 태우고 괴한들을 쫓아가 대열 선두에 차를 세웠다.
『당신들 뭡니까』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데 참견 말라』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자 李서장은 차를 타고 뒤쫓아 갈 수밖에 없었다. 밤 10시경, 자하문 고갯길로 방향을 돌린 괴한들은 누각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와 청와대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고개 아래 30여m 쯤엔 당시 종로구 청운 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있었고 그 담을 끼고 종로경찰서 관할의 자하문 임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날 검문소에서 근무하던 종로 경찰서 수사 2계 朴泰安(박태안), 鄭鍾壽(정종수) 형사가 언덕길을 내려오는 괴한들 을 발견하고 검문소 밖으로 나왔다. 괴한들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을 받은 바 없었다.
『당신들 뭐요』
『너는 뭐냐』
『종로서 형사다』
『우리는 CIC 방첩대원들인데 특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서장에 게 알렸는데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우리는 너희와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다. 알려거든 너희 서장에게 물어보라』
공비들은 조금 전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린 것과 같은 방법을 썼다. 함경도 억양이 묻어 나왔다. 공비들은 긴장해서 과장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외투 속에 숨겨진 총구가 드러나는지도 몰랐다. 朴형사는 살짝 드러난 총구를 순간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들이 경기도 북쪽에서 신고된 공비들이란 직감을 했다. 곁에 섰던 鄭형사가 朴형사의 눈치를 보고 예삿일이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두 형사는 서로 거리를 좁혀 이들과 맞섰다. 그러자 공비들은 이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대열이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두 형사는 崔圭植(최규식) 종로경찰서장에게 「불신검문에 응하지 않는 괴한들이 나타났다」고 무전 보고를 한 뒤 저만 큼 가고 있는 이들의 앞을 달려가 가로 막았다.
『거, 신분증 좀 봅시다』
『신분증 같은 거 없어』
『우리나 당신들이나 비슷한 수사기관에 있는데 피차 고생하는 처지에 서로 신분을 밝히는 게 좋지 않습니까』
『우리 신분을 알려면 계속 따라오면 될 것 아니야』 자하문을 내려가 효자동에 이르면 육군 방첩대 본부가 위치하고 있어 딱히 이들의 말에서 거짓말임을 발견해 내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지리를 확실하 게 익히고 들어 온 공비들이었다. 그러나 형사들은 직감을 믿었다. 두 형사는 공비들과 숫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자신들은 권총 한 정 없는 상태여서 진땀이 흘렀다. 다시 공비들의 대열이 움직였다. 두 형사는 조 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대열 맨 뒤에 따라가는 공비에게 말을 걸면서 자하문 고갯길을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5분경, 청와대가 지척인 자하문 내리막길에서 두 형 사는 무장공비의 대열 맨 뒤에 걸어가던 부대장격인 金春植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金春植은 朴형사에게 『당신 경상도 말씬데, 고향이 어디요?』하고 물었다. 朴형사가 『대구인데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우리 친척집도 대구인데…』 라며 말을 흐렸다.
朴형사는 이들과 농담까지 주고 받으며 시간을 끌어 보려했으나 기다리던 증원 부대는 오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괴한 들은 자하문 고개를 넘어 오는 원효여객 60번 버스를 세웠다. 朴泰安씨의 회고.
『무장공비가 분명한데 그 자리에서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못 잡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비들은 이미 7∼8명이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극성스럽게 저지하기 시작하자 隊長인 듯한 자가 부하들에게 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두 명이 이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고, 미치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때까지 공비들의 목표가 청와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버스에서의 시비가 끝나자 대열은 다시 움직였다.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지 나 청와대로 꺾어지는 커브 쯤에서 맨 뒤에 가던 金春植에게 朴형사가 끈질 기게 말을 붙이는 바람에 金春植은 어느 새 대열과 7∼8m 떨어지게 되었다 . 朴형사는 속으로 「이놈 한 놈만이라도 잡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밤 10시10분.
朴형사는 길이 꺾어지는 쪽으로 공비들이 빠지면 연락을 받고 달려 올 증원 부대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공비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이르자 鄭형사와 함께 승강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프차는 괴한들의 대열 앞에 멈춰섰다. 전진하던 대열도 멈칫 했다. 헤드라이트가 이들의 몰골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는 동안 차에서 당당한 체구의 사나이가 내렸다. 崔圭植 종로경찰서 서장이었다.
『나는 종로경찰서장이오. 소속을 밝혀야지요.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
『아무 것도 아니오. 우리는 CIC 사령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는 길이오』
『여기는 내 담당구역입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는 아무도 못 지나가요』 2조 조장 金新朝는 대열 중간에 서 있다가 지프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 추는 가운데 崔圭植 서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저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남침 후 처음으로 당황했다고 한다. 공비들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을 때 崔圭植 서장 뒤로 시내 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길을 가로막은 지프차 뒤로 멈춰섰다. 공비들은 버스를 국군의 지원 병력인 줄로 착각했다. 잠시 후 또 한 대의 버스가 커브를 돌아 나오다 앞 차량이 멈춰 서 있자 급 정거를 했다. 공비들은 연이어 두 대의 차량이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는 외 투 속의 총과 수류탄을 더듬었다. 그 순간 崔圭植 서장과 시비가 붙었던 공비가 외투 속에서 총을 꺼내 崔서장의 가슴을 향해 연발 사격을 가했다.
『드르륵, 드르륵』
『국방군 출동이닷!』 1·21 사태의 첫 희생자가 된 당시 36세의 崔圭植 서장은 가슴에 세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밤 10시15분경이었다.
총성이 나기 무섭게 공비들이 일제히 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세 발의 수류탄이 작렬했다. 버스에 타고있던 청운중학교 3학년 金亨基(김형기·1 7)군과 회사원 洪裕敬(홍유경·29)씨가 수류탄 파편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 지고 버스 차장 金貞子(김정자·18세)양은 오른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공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국군인 줄 알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열 뒤에서 부대장 金春植과 말을 걸었던 두 형사가 金春植을 쓰 러 뜨렸다. 朴형사는 오른손으로 金春植의 목을 죄면서 왼손으로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머리를 내려쳤다. 졸지에 돌멩이로 머리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金春植을 朴형사는 수갑으로 채워 生捕하는 데 성공했다.
멀리서 동료가 경찰에 의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공비들은 도망가면서 두 형사를 향해 총을 쏘았다. 鄭鍾壽 형사가 쓰러졌고 朴泰安 형사는 왼쪽 귀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鄭형사는 며칠 후 병원에서 숨졌다). 경복고 후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성이 퍼지자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던 수경사 30대대(대대장 全斗煥 중령 ) 병력들이 즉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한 명이 쓰러지는 걸 보고는 「틀렸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휘부가 무너졌다고 판단하는 순간 휴전선에서 청와대까지 내려왔다는 자부심이고 뭐고 다 없어졌고 동료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겁니다. 청와대고 작전이고 없었어요. 불과 5분 정도 교전한 것 같은데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던 겁 니다. 일부는 오던 길을 거슬러 세검정 쪽으로 튀었고 일부는 청와대 뒷산인 北岳山을 탔고, 저는 경복고등학교 뒷담을 넘었지요. 인왕산을 타고 北으로 가려고 말입니다』
인민군 소위 金新朝는 동료들이 많이 택하지 않은 루트를 골랐다. 자하문을 넘어 세검정쪽으로 도망가려던 공비들은 뒤따라 내려오던 시내버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승객들이 미리 대피한 상태여서 피해는 없었다. 이들은 세검정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두 대의 버스에도 수류탄과 기총소사를 해대며 도망쳤다. 밤 10시30분경이었다. 야간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은 성공했지만,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 가며 유격전을 벌인 것만큼 어리석은 非정규전 사례도 없을 것이다.
밤 10시 40분경 세검정 길과 북악산 일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대대 병 력들이 투입되어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30대대 병력이 현장에 투입될 무렵 , 경복궁 옆에 주둔하던 30대대 연병장에서는 대대장 全斗煥 중령과 작전주임 張世東 소령의 지휘하에 81mm박격포 10여 문에서 조명탄이 날아 올랐다 . 조명탄은 밤새도록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같이 밝혔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 15분부터 30분 사이 총성이 여러 차례 울린 시각, 朴正熙 대통령은 감기약을 먹고 잠을 자다 깨어났다. 朴鐘圭 경호실장이 제일 먼저 달려왔고 崔宇根(최우근) 수경사 사령관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와 상황을 보고했다.
비슷한 시각, 金聖恩 국방부 장관도 총성을 듣고 국방부에 비상전화를 걸었 다. 청와대 부근에서 交戰中이란 보고를 받은 金장관은 즉시 차를 타고 청와대로 달려왔다. 朴正熙 대통령은 점퍼 차림으로 집무실로 내려와 있었다 . 金장관이 보니 대통령은 경황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金장관, 내가 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자다가 일어났는데 말이야. 거 참, 이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 올 줄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소?. 고약한 놈들. 뭐 못하는 짓이 없구먼. 그렇게 파괴하더니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 왔구먼』
『저도 놀랐습니다. 각하. 괴뢰군 놈들이 神이 아닌 이상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두 사람은 전쟁을 겪은 군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수행하던 경호원들이 보아도 무척 대담했다고 한다. 청와대 밖 하늘은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훤하게 밝아 있었다. 尹必鏞 방첩대장은 金聖恩 국방부 장관에 게 戰果와 피해상황을 수시로 보고했다. 자하문에서 최초 총격전이 벌어져 종로경찰서장이 피격당해 순직했으며, 한 명은 생포했고 현재 청와대 외곽 으로 몰아내며 추적중이라는 내용이었다. 朴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崔圭植 총경이?』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崔圭植 총경은 연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중 6·25를 만나 종합학교 31기생 으로 임관했다. 5·16 당시 소령으로 복무중 혁명정부로부터 충청북도 경찰 서 정보과장으로 발령받아 경찰에 투신하게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釜山市警 정보과장을 거쳐 1966년 8월 용산경찰서 서장으로 승진했다. 1년 뒤인 1967년 10월27일 종로 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아 근무중 참변을 당했다. 崔圭植 총경의 순직을 가슴 아파한 또 한 사람은 2층 부속실에서 귀를 쫑긋 하게 세우고 앉아 있던 陸英修 여사였다. 이날 밤, 경호실에서 등화관제를 요구해 제2부속실의 洪晶子(陸英修의 조카) 비서관은 불도 켜지 않은 2층 복도를 오가며 陸여사의 심부름을 했다. 총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陸英修는 극도의 침착성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5·16 혁명하던 날 이모님 인상과 참 비슷했어요. 총성이 나자 어느 새 옷(한복)을 갈아 입고 서재 겸 집무실이있던 방으로 가셔서 촛불을 켰지요 . 경호관들이 오가면서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崔圭植 총경이 순직했다는 말을 들었던 겁니다』
崔圭植 총경이 용산 경찰서장에서 종로 경찰서장으로 1년 만에 부임하게 된 것은 陸英修 여사의 칭찬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실했던 崔총경은 부산시경 정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아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부산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용산서장으로 발령받아 상경했다. 陸英修 여사가 崔총경을 눈여겨 본 것은 해외 순방이나 큰 행사 때 깔끔한 복장에 절도 있는 행동으로 일선 경찰들을 지휘하는 모습에서였다고 한다 . 그 후 관내에 청와대가 포함된 종로 경찰서장으로 발령받게 하는 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망인 劉貞和(유정화·67)씨에 따르면 남편 崔총경은 서울 용산으로 올라 와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종로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은 뒤로는 너무 바빠 부산대학교 교수들이 상경해서 논문 지도를 했다고 한다. 1968년 1월12일 崔圭植 총경은 부산대학교로부터 논문이 최종 통과되어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는 축하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9일 뒤 자하문 언덕에서 무장공비가 쏜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미망인 劉여사는 그해 2월26일 부산대학교 총장의 초청으로 남편을 대신해 졸업식장에 참석, 학위를 받았다. 陸여사의 조카 洪晶子 비서관의 회고.
『그날 밤 이모님은 눈물을 참 많이 흘렸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 만, 崔총경의 죽음이 마치 자기로 인해 벌어진 것은 아닌지 자책하는 듯이 슬퍼했지요. 새벽 2시쯤 되자 「전화를 해야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라 며 수화기에 손을 얹고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종로 경찰서에 전화를 하셨어요.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하시면서 울먹이셨지요』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청와대로 속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와대 쪽에서 는 李厚洛(이후락) 비서실장, 金詩珍(김시진) 정보비서관 등이 정부쪽에서 는 丁一權(정일권) 국무총리,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 申稙秀(신직수 ) 검찰총장, 金玄玉(김현옥) 서울시장, 李洛善(이낙선) 국세청장 등이 달려 왔다. 각료들은 朴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던 중 『총성이 난 이상 시민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진상 발표를 신속히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난 朴대통령은 라디오를 켰으나 사 건은 여전히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申範植 청와대 대변인을 불 러 『왜 방송이 늦어지고 있나』면서 『중계방송 하다시피 소상하게 보도해서 국민의 불안을 덜어주고 간첩 수색에 국민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보도 관제는 22일 오전 7시를 기해 해제되었다.
자하문 부근에서 交戰(교전)이 있기 직전인 1월21일 오후 10시 10분경, 蔡元植 치안국장실 무전기로 긴급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검동 고갯길에서 이상한 옷차림의 군인 30여명이 술에 취해 청운동 쪽 으로 내려가고 있음」
蔡국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교전이 끝난 뒤였고 도로에는 수류탄으로 반파된 버스가 팽개쳐져 있었다. 길바닥엔 崔圭植 종로경찰서장의 시체 와 아직 숨이 붙은 鄭鍾壽 형사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朴泰安 형사가 생 포한 金春植을 지키고 있었다. 蔡국장은 朴형사와 생포 공비를 차에 태워 근처 효자동 파출소로 데려 갔다가 다시 蔡국장 차로 치안국으로 이동했다 . 시간은 21일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뒤로 젖힌 양 손에 수갑이 채워진 金春植은 머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는 소매 없는 등산용 조끼를 입고 양 옆구리에도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조끼 앞가슴엔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을 만들어 위, 아래 두 줄로 네 발씩 모두 여덟 개의 수류탄을 넣고 흔들리지 않게 실로 누벼놓았다.
蔡元植 국장은 金의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내고 양 옆구리의 주머니에서 휴대용 식량과 주머니 칼을 찾아냈다. 蔡국장은 칼날에 쓰인 글을 보더니 곁 에 서있던 朴형사에게 보여주었다. 「Made in Japan」이라고 쓰여 있었다. 직원들은 蔡국장의 무장해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朴형사도 蔡국장을 돕기 위해 金이 입은 조끼 양 옆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 바로 그때 蔡국장이 소리쳤다.
『엎드려!』
몇 초후 「꽝!」하는 폭음과 함께 金春植의 복부는 산산조각 나고 치안국 복도는 피범벅으로 변했다. 朴泰安씨의 회고.
『그때 蔡국장은 조끼 윗줄의 수류탄 네 발을 모두 제거하고 아래쪽의 수류 탄 세 번째 것을 제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수류탄은 낚시줄 같이 가는 선으로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을 물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겁니다. 蔡국장이 세 번째 수류탄을 제거하는 순간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이 뽑혀 올라온 것이죠』
蔡국장은 안전핀이 뽑힌 채 조끼에 달려 있는 수류탄을 보면서 공비를 복도 한쪽으로 힘껏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때문에 무장해제를 지켜보던 직원 들과 朴형사는 파편상도 입지 않았다. 대신 복도와 수사과장실 유리창이 박 살나면서 벽면 전체가 피범벅이 되었다. 生捕(생포)된 간첩이 爆死(폭사)로 사라져 버렸다.
蔡국장은 차를 타고 나와 종로경찰서를 들러 직원들을 격려하고 치안국 감찰계장 金德中 총경을 임시 종로 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자정 무렵 蔡元植 치안국장은 청와대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丁一權 국무총리, 李澔(이호) 내무부장관 등과 군 장성들이 속속 청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이 누런 연기를 흘리며 빛을 발하는 가운데 화약 냄새가 청와대 주위를 애워싸고 있었다. 蔡국장은 청와대를 지나 세검정 쪽으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과 공비들의 격전이 있은 직후 신문, 통신, 방송사 기자들도 취재에 뛰 어 들었다. 그러나 한 시간여가 지나는 동안 사방으로 튀어 달아난 공비들 로부터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자정 무렵 각 언 론사는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기자들을 철수시켰다. 곳곳에 군인과 경찰들이 검문을 하는 중에 중앙일보 孫石柱(손석주·61세· 現 M&R대표) 사회부 기자와 張洪根(장홍근) 사진부 기자는 만하장(現 올림 피아 호텔) 부근에 신문사 깃발을 단 지프차를 세워 두고 검문소 통과를 시 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프에 무전기가 없어 본사로부터 철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에 남아 있던 중이었다. 군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려는 孫, 洪 두 기자에게 『죽고 싶으냐』며 위협해 시비가 일었다.
蔡元植 치안국장은 순찰中 무전을 통해 파주 부근에서 교전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출발을 서두르는 순간에 군인들과 시비가 붙은 두 기자를 발견했다 . 蔡元植 국장은 현장을 기록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들을 불렀다.
『어이! 기자. 이리 와!』
『아, 蔡국장님이십니까. 중앙일보 사회부 孫石柱 기잡니다』
『당신, 나하고 파주에 갈 수 있겠어? 교전중이라는데도?』
『당연히 가야죠』
타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기자는 차에 오를 준비부터 했다. 이들을 태운 蔡국장의 차가 구파발을 지나 경기도 벽제 부근에 도착했을 때 蔡국장의 차량 무전기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한 놈 잡았습니다. 홍제동 파출소로 연행중입니다』 즉시 서울로 차를 돌렸다. 당시 홍제동 파출소는 30사단(사단장 許準 준장 )의 임시 작전 지휘본부가 설치된 곳이었다. 시간은 22일 새벽 3시를 넘어 서고 있었다.
蔡국장과 두 기자가 파출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30사단 군인들이 민가 부근에서 생포한 공비 한 명을 파출소로 끌고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공비의 허리춤과 웃옷을 잡고 있었기에 국방색 군복 상의는 몇 군데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검은 목면 바지는 앞 단추가 열린 채 무릎까지 흘러 내린 상태 였다. 사진부 張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몇 장을 찍은 뒤 밖으로 튀어 나갔다. 軍에 의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여서 언제 필름을 빼앗길지 몰랐기 때 문이었다. 몇 평 안되는 파출소는 일순간 사람들로 붐볐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 경찰, 中情요원들로 복작거렸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孫기자가 공비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김신조다. 스물일곱 살이다』 ―주소와 계급은.
『군관(장교)이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 청암동 3반에 가족이 살고 있다』 ―남파 목적이 뭐야.
『청와대를 까러 왔다. 21일 밤 8시에 공격을 개시해 5분 만에 끝낸 후 청 와대 車를 뺏어 타고 문산 방면으로 도망하기로 했다. 이것이 잘 안되면 비봉 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잘못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몇 명이 왔어?
『31명이 국군 복장을 하고 왔는데, 1명은 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하고 넘어왔다』
―넘어 온 게 언제야?
『16일 평양에서 출발했다』 ―무기는?
『수류탄, 장총, 권총이다. 1인당 수류탄 열 개와 탄알 300개 씩을 가져 왔다. 우리는 결사대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 군관(장교)이다』
―현재 기분은?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젠 겁도 안 난다』孫기자는 金新朝의 윗주머니에서 「지식인들이여 언론 출판의 활동을 위해 싸우라」는 내용의 삐라를 발견했다. 잠시 후 金新朝는 앰뷸런스에 실려 방첩대로 끌려갔다.
金新朝가 체포된 곳은 자하문 밖 인왕산 기슭에서였다. 1월22일 새벽 1시 30분경, 자하문 밖 세검정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하던 30사단 공병대 소속 車章錫 이병은 세검천 위쪽 인왕산 기슭에서 계곡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내 려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M1소총 자물쇠를 푼 車이병은 검은 그림자를 조 준하려 애썼다. 야간사격은 총열 끝에 붙은 가늠쇠도 잘 보이지 않아 빗나 가기 일쑤다. 車이병의 사격도 빗나갔다. 괴한은 세검천 변 외딴 집 옆에 있는 바위로 몸을 숨겼다. 두 시간 반 전에 경복고등학교 담장을 넘어 도망 쳤던 인민군 소위 金新朝였다.
『한 놈 나타났다!』 소대장 朴源造(박원조) 소위와 소대원들이 달려 와 포위망을 쳤다. 朴소위 가 플래시로 바위 쪽을 비춰보니 짚단 더미 사이로 사람 그림자 비슷한 것 을 보았다. 수하를 위한 암구호를 외쳤다.
『피아노』
『……』
『피아노』
『……』 대꾸가 없자 병사들이 바위 주변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순찰중이던 周喜俊 (주희준) 소령이 트럭을 끌고 와 헤드라이트로 괴한이 숨은 바위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괴한은 그때서야 짚더미를 헤치고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고 일어났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안 그러면 쏜다!』 괴한은 주먹쥔 왼손 안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땅에 떨어뜨렸다. 안전핀이 빠진 채 땅바닥을 구르던 수류탄은 군인들과 괴한을 초긴장 속으로 몰았다 .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임을 감지한 한 병사가 뛰어나가 수류탄을 차 버리고 괴한을 생포했다. 현장에서 몸수색을 한 결과 괴한의 소지품이 쏟아져 나왔다. 참깨 섞은 엿 두 개, 말린 오징 어 한 마리,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의 약품과 30cm짜리 파 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물이나 흙 속에 몸을 은폐할 때 숨을 쉬기 위한 호흡용 파이프였다.
나머지 공비들 중 일부는 세검정 부근 民家 쪽으로 튀었다. 21일 밤 11시경 홍제동 쪽으로 달아나던 공비 한 명은 지붕을 타고 도망가다 지붕이 내려 앉아 그 집 부엌으로 떨어졌다. 잠을 자던 李翔來(이상래·당시 65세)씨와 아들 容瑄(용선·당시 31세)씨 등 가족 5명이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몽둥이로 괴한에 달려 들었다. 이들이 괴한과 몸싸움을 하던 도중 괴한의 몸에서 수류탄이 떨어져 나와 가족들은 비로소 무장공비임을 알 게 됐다.
李씨 가족 중 한명이 30여m 떨어진 홍제동 파출소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늑장 출동을 하는 바람에 공비와 격투를 벌이던 아들 容瑄씨는 공비가 쏜 권총에 복부를 맞아 숨졌다. 신고를 받고도 즉시 출동하지 않은 홍제동 파출 소장은 며칠 뒤 파면되었다.
자하문 경복고등학교 후문 부근에서 첫 교전을 벌이고 학교 담을 뛰어넘은 공비는 金新朝뿐 아니라 5명 가량이 더 있었다. 이들은 몰려 다니며 교장 사택으로 뛰어 들어 마당에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집안의 유리창이 박살 났다. 폭음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수위 鄭四永(정사영·당시 45세)씨에게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
밤 11시30분 경에는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 자가 유탄에 맞아 숨지는 등 이날 밤 우리측은 崔圭植 서장과 민간인 6명 등 모두 7명이 사망했고, 朴泰安 형사 등 3명의 경찰관과 민간인 한 명이 부상했다. 공비를 쫓던 수경사 30대대는 22일 오전 8시경 北岳山에서 3명, 오전 11시쯤 다시 한 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22일 오전까지 첫 교전에서 金春植을 포함한 다섯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한 명(金新朝)을 생포했다.
1월23일 오후 1시쯤 북한산에서 한 명의 공비가 사살된 이후 공비들은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 나갔다. 이 무렵 생포된 金新朝를 심문했던 방첩대 에서는 「124군 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金新朝에게 북한 전역에 걸 친 부대 위치와 金新朝 자신이 훈련받은 부대의 위치 및 건물 요도를 그리 게 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은 이 그림을 들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만났다. 첩보기를 띄워 항공 촬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金 前 장관의 증언.
『오산 비행장에서 첩보기 SR-71이 이륙하더니 서해안에서 곧바로 北上하다가 평양 부근에 이르러 우회전하더군요. 그리고 원산까지 통과하는 데 정확 히 3분이 걸립디다. 이렇게 해서 얻은 항공사진으로 김신조가 그린 건물과 비교를 해 봤는데 정확했습니다』
방첩대의 조사와는 별도로 공비 소탕에 나선 군경합동 수색대는 1월30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27명을 사살하고(자폭 포함) 金新朝 한 명을 생포했으나 우리측도 민간인 7명이 사망했고, 이익수 대령 이하 23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만도 52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공비 세 명 중 한 명은 2월 중순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 지 두명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종결지었다. /// 자료출처: 유용원의 군사세계
1.21사태 북 공비 두목 김종웅의 최후.
1.21 침투 김신조 부대가 사용했었던 ppsh -43 기관단총--------------------------------------------------
종로 서장 최규식 총경에게 기관단총을 휘두른 김종웅의 최후
1968년 1월 26일 오전 0시 25분경.
그 나흘 전인 1.21일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세검정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발각되어 흩어져 도주하던
북 124군 부대 소속 공비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양주군 광적면 비암2리 애기수 바위 근처에 설치한
육군 26사단 00연대 잠복 초소 앞에 수상한 그림자가 어른 거렸다.
잠복선의 분대장은 천 모 하사로서 월남전 참전 용사였다.
노련한 그는 전방의 기척을 살펴보다가 정확한 사격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판단하고
옆 분대원의 M-79유탄 발사기를 빌어 40mm 유탄 1발을 사격하였다.
M-79유탄 발사기
사격과 동시에 전방에서 섬광과 함께, 폭음과 사람의 비명이 섞여 들려왔다.
이 시각에 그런 장소에 나타날 사람은 한창 북으로 분산 도주하고 있는 북한 124군 부대원 즉, 공비일수밖에 없었다.
사건 발생후 언론에서 이들을 북한 특공대,또는 유격대라고 불렀으나,
정부에서 며칠후 공비(共匪)라는 호칭으로 통일했었다.
공비는 한국 전쟁 전후 많이 사용되던 호칭이었는데 다시 등장한 것이다.
천 하사 분대는 그 방향에 추가 소총사격을 가 했다.
그러나 조금 뒤 천 하사는 전방에서 수류탄을 까들고 돌격해 들어오는 괴한을 목격하고 아연 긴장하였다.
그 괴한은 천 하사 분대의 일제 사격에 다시 쓰려져 일어나지 못했다.
날이 밝자 상대 괴한의 시체를 수색한 분대원들은
그의 한 팔이 유탄 폭발로 날아 간 것을 보고 그런 중상을 입고도 수류탄을 까들고 최후의 돌격을 했던 공비의 끈질김에 혀를 내둘렀다.
그 이틀 뒤 6군단 0p에서 사살 공비 시체들 확인차 나온 생포 된 124군 부대원 김 신조는
이 시신이 1월 17일 밤 공비 31명으로 구성된 청와대 습격대를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온
공비들의 총조장 김종웅 상위[上尉-24세]의 것임을 확인했다.
김종웅은 124 청와대 기습대원 중에 키가 제일 커서 쉽게 식별이 가능했다.
군 당국은 김신조의 증언에 의해서
그가 그 작년에 서울에 한번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해본바,
그는 그 작년인 1967년 1월 20일 다른 간첩 2명과 함께 서울역 앞 양동 사창가에서 하룻밤을 잤던
간첩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육군 방첩대[현 보안대]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 3인조가 그 다음날 코로나 택시를 타고 고양군 대자리 검문소를 통과하다가 검문에 걸려 그중 두 명은 체포하였으나,
한 명은 북으로 도주했는데, 그 자가 김종웅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종웅은 한국 역사에 깊이 각인된 1.21사태에서
이들 공비 부대가 임진강을 은밀히 도강하여 법원리 산에서 나무꾼 4형제를 붙잡았다가 풀어준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나무꾼 4형제에게 일제 세이코 시계를 선물하고 당국에 고발하지 말라고 했지만 형제들은 풀려난 직후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접근하던 이들이 발각된 것은
1월 21일 밤 세검정에서 종로署 형사들에게 검문 당했을 때였다.
공비들은 자신들이 방첩대[현 보안대] 소속으로서 훈련을 마치고 귀대 중이라고 답하며
동행을 요구하는 형사들과 거칠게 시비를 벌였다.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직접 나타나서
이들에게 신분을 밝히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기관단총을 난사해서 그를 살해한 사람이 김종웅이었다.
최 규식 서장 동상-중앙일보-
현재 청와대 정문에서 좌회전하여 자하문 쪽으로 가다보면 세검정 길옆에 건립 된
최규식 서장의 동상이 있다.
공비들이 소지했던 PPSH -43기관단총[7.62mm]
2차 세계대전 중에 탄생한 최고의 기관단총으로 꼽는 무기 전문가도 있었다.
김 신조씨는 이 기관단총 30발로 돌연 표적 15개를 제압하는 능력이 갖출 때까지
훈련을 받았다고 했었다.
1.21 사태 때 포로가 되어서 살아남은 김 신조 씨는 지금은 목사가 되어 교회를 이끌고 있다.
일선 부대를 방문하여 자기가 뚫었던 철조망을 돌아보는 김 신조 목사 -연합 뉴스 사진
(이 분은 자서전에서 남한의 경계태세도 허술했지만 청와대 기습 124 군부대의 작전
계획도 매우 허술했었다고 술회했었다. 우리는 124군 부대원들이 받았다는 훈련이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혹독한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북한 대남 기관이
세운 청와대 기습 작전의 ‘질’을 살펴보는 것은 조금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부대의 작전 실패와 김종웅의 죽음은
1월 17일 법원리 산에서 나무꾼 형제를 잡아 놓고 북한에 ‘ 민간인에게 발견되었다! 지시 바란다!’라는 무선을 보냈을 때 이미 결정되었었다.
타전 후 잠시 후 북한 본부에서 답신이 왔는데
무선 담당 공비는 난수표를 가지고도 이 통신문을 해독하지 못할 정도로 엉터리였다.
이후 공비들은 본부와 한 번도 제대로 교신하지 않았다.
적진 침투 비밀 작전에서 통신의 중요성이야말로 더 강조하기가 불필요한 것인데 이를 무시하고 제대로 숙련되지도
않은 무선담당을 동행시켰던 것이다.
김 신조씨가 체포된 후 이 사실을 털어놓자
군 정보 부대 통신 전문가는 사살된 공비들로부터 입수한 난수표로 이 통신을 단숨에 해독해냈다.
민간인에게 발각되었으니 지시 바란다는 공비들의 발신에 북에서 보내온 답신은
“원대 복귀하라!”라는 것이었다.
무전 담당이 잘 훈련되어서 지령문만 잘 풀었더라면
청와대 기습도 없었을 것이고 김 종웅을 비롯한 공비들도 무모한 작전을 중단하고 무사히 북으로 귀환했을 것이다.
김 종웅은 나무꾼들을 놓아주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
단숨에 장거리를 주파해서 군의 예상 차단선을 돌파는 했지만 하늘에 수색 헬리콥터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무꾼들이 신고했다는 것을 알았었다.
통칭 김 신조 부대의 침투로
그럼에도 그는 기습 작전을 강행했었다.
이런 경우에 대한 별다른 훈련이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검정에서 최규식 서장을 살해하고 자신들이 노출되자 그들 중에 청와대를 향해 돌격하는 잠꼬대 같은 명령을 하는 조장도 있었으나, 공비들은 이 돌발 상황에서 돌격은 커녕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도망치기에 바빴다.[이 것도 역시 아무런 훈련이 안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민간인에게 발각되거나 남한 군경과의 교전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에 대비한 훈련을 충분히 거듭했더라면
이런 부대 전멸의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련한 침투 전문가가 작전을 세웠다면
바로 이런 돌발 급변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에 대처하는준비나 훈련을 시켰을텐데
북의 124군 부대에는 이런 치밀한 작전 수립체계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청와대 습격 공비들이 휴대했던 토카레프 TT -33권총
작전은 정보를 토대로 수립하는 것인데 이 정보가 또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공비들은 청와대 경호는 빈약해서 정문의 단 2명의 보초만 처치하면 대통령 사저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접근할 수가 있다는 가정하에 작전 계획을 세웠었다.
그래서 단 5분 안에 대통령을 암살하고, 청와대 트럭을 탈취하여 통일로를 질주해서 임진강을 건너 복귀하라는 명령이 작전의 골자였다.
당시 통일로 검문소간 통신 상태와 각 검문소가 장비한 차량 통행 차단 시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작전을 꾸민듯하다.
124군 부대장 이재형 대좌는
1964년 송추에서 접선 시도중 경찰들과 격투를 벌이다가 복부에 총상을 입고도 북으로 복귀해서 이중 영웅 칭호를 받은 대남 침투의 경험이 풍부한자이다.
그가 처음 세운 작전은
70여명을 동원해서 서울의 청와대, 육군 본부, 서대문 구치소, 미 대사관, 서빙고 방첩대 등 5개의 목표를 일시에 치겠다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정찰국장 김정태가 청와대 하나만 작전하라는 명을 내렸었다.
그런 경험자가 지휘관으로 있는 부대에서 이런 엉성한 작전을 입안하고 수행한 것은 그가 만용스럽고 무모한 영웅주의적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하여튼 124군 부대의 그런 엉터리 작전 수립이 남한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이런 부대의 최고 사령관인 정찰국장 김정태는
대 실패로 끝난 1.21 침투 사태 후에도 목이 그냥 붙어 있었고
다시 그 해 10월 무지하고 무모했었던 울진 삼척지구 침투 작전을 또 지휘해서 침투 병력 120여명중 5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멸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태백산 산간에 친공 세력을 구축하라는 꿈같은 목표를 세웠던 것 자체부터가 현실성없는 소리였다.
청와대를 기습 획책했던 군부대가 124부대 1기였었고, 울진 삼척지구 침투 부대가 2기였으니
124부대 창설 두 기 모두 무지한 정보와 엉터리 작전 실패의 참혹한 희생양이 되었다.
청와대는 막강한 경호실외에 수경사 소속 1개 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며 전담했었으니
북한 정보 수집의 비현실성을 알만하다.
당시의 대대장은 전 두환 중령이었다.
국군,경찰 학살도주 무장공비에게 선물받은 김대중 노무현
2012-04-16 18:05:32 common sense
1.21 사태 도주무장공비 박재경. 현 인민무력부 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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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경을 아는가?
1966년 강릉에 무장공비가 출몰한다. 1968년 1월 21에는 김신조를 포함한 무장공비가 철책을 뚫고 개성서부터 62km의 침투과정을 거쳐서 청와대를 폭파하기 위해 들온다. 같은해인 1968년 10월에는 이승복 어린이를 참살시킨 무장공비가 울진 삼척에 또 출몰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국군, 민간인 그리고 경찰에 인명 손해를 끼치게 되고 국민들은 북괴의 적화야욕에 치를 떨게 된다.
1968년 일어난 이른바 ‘1.21사태‘에서 김신조는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지만 그 와중에 북괴로 도망쳐서 돌아간 자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박재경이다. 그 당시는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였고, 이 도주 무장공비 박재경은 대한민국에 와서 많은 살상을 하고 돌아왔다는 이유 때문인지 북괴에서 슬슬 지도계급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박재경의 이름을 알았을 리 없다.
세월이 32년이나 흐른 2000년 9월 11일 김대중이 집권하고 있을 때, 당 중앙 비서인 김용순을 대동하고 내려온 인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도주 무장공비 박재경이다. 이 자는 김대중을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이 보낸 송이버섯 상자를 건네준다. 그리고, 7년의 세월이 더 흘러 노무현이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났을 때, 노무현과 우리측 관계자들에게 또 김정일이 보낸다는 송이버섯을 건네준 것도 박재경이었다.
김대중을 만났을 때의 직위는 ‘북괴군 총 정치국 부국장‘ 이었고, 노무현을 평양에서 보았을 때는 ’인민 무력부 부부장‘ 이었다. 현재 박재경은 북괴에서 ’조선인민군 대장‘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중국의 주북괴 대사 ’류홍차이‘와 2011년 연회를 가질 때도 ’인민 무력부 부부장‘이었다.
김정일이란 것이 박재경을 선물 전달자로 지정한 의미는 뭔가?
대한민국 정권의 심장이라고 할 청와대를 습격해서 박정희까지 노리려 했던, 즉, 일국의 국가 원수를 노렸던 무장공비를 키워주고 벼슬을 주며, 세월이 흘러 바로 그 도주했던 무장공비에게 김대중 및 노무현에게 송이버섯을 7년 사이로 각각 선물했다는 것은, 대한민국 자체를 우습게 보고, 같잖게 본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놈을 다시 그 다음 대통령들에게 보내어 선물을 준다는 이 상징적 의미가 바로 북괴의 진정한 속내이다.
물론, 노, 김 두 정권이 워낙 친북괴정권이다 보니, 그 두 인간에게 도주 무장간첩을 보내서 선물을 준 것도 이렇게 동질감을 느끼고, 무장공비의 의도 자체를 이해해줄 김대중 노무현이라고 봤기에 박재경을 굳이 선정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는 과거라고? 그러니까, 마음 넓게 과거는 잊자고? 이건 아니다. 과거는 과거로 그치는 과거기 있고, 현재까지도 그 과거를 보면서 요주의 인물, 복수를 할 인물, 그리고 철저한 경계대상 인물임을 알게해서 정신각오를 새롭게 해주는 과거도 있는데, 무장공비 습격은 엄연히 후자이다.
만일, 김대중 노무현이 용공 친북정권이 아니었다면, 김정일은 박재경을 선정해서 선물을 주려하지 않았다고 본다. 철저한 반공 정권의 수장에게 어떻게 과거 이 나라 대통령을 죽이려고 까지 하다가 도망간 무장공비를 시켜서 선물을 주게할 수가 있었겠는가. 김대중 및 노무현 그리고 주위 인간들이 김정일이가 보낸 그 붉고 야비한 의도가 섞인 송이버섯을 얼마나 잘 받아서 잘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의례상 받긴 받더라도 결코 먹을 수 없는 것이며, 굳이 박재경을 통해 선물을 준 의도가 무엇인지를 항변해야 하는 일이었다.
용공 친북 사상을 가진 정치인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가짜라고 하고, 천안함 피폭도 대한민국의 조작이라고 하고, 이승복 어린이 일가족 참살 사건도 어거지로 다 알면서도 부정하는 인간들이 무장공비 사건이 30여년이 흘렀다고 또 부정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대한민국은 조작만 하는 나라라고 우겨댈지 모르지만, 지금 북한산 호경암이라 불리우는 바위에는 1.21 사태 때, 그 격렬했던 전투를 증명하는 깊이 파인 총알 흔적이 여러 개 있다. 그 당시 장렬히 전사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의 동상, 정종수 경사의 부조상 및 추모비가 있다.
그리고, 공비들이 타고 왔다가 국군에 의해 침몰된 잠수함 및 잠수정이 그대로 보존되어있음은 물론, 공비들에게서 노획한 총, 탄알, 반합 등등 자질구레한 것들도 그대로 있으며, 땅굴을 파헤치다가 대한민국을 위해 전사한 많은 장병들의 묘소도 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이승복 어린이 수 많은 초교에 세워져 있고, 기념관도 있고 이것이 반공교육에 큰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정작 급한 것은, 이중인지 저중인지 모르는 정치인들에게 위에 열거한 모든 것들을 모두 다 견학시키고, 그에 대한 소감을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발표시켜야 한다.
민통, 진통의 당 대표, 당원, 일반당원들은 물론 새누리의 박근혜 및 그 주변 무리들도 이 반공견학 대열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된다고 본다. 섣불리 몽상적으로 주사파들의 외침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면서 사사건건 부정을 하는 야권의 인간들도 문제지만, 명색이 여권이라고 하면서 김정일이가 일부러 선정한 도주 무장공비 박재경으로 부터 송이버섯을 즐겁게 선물 받았던 김대중과 노무현이 취했던 퍼주기, 대주기 선언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박근혜는 더욱 더 특별 견학 소감내용을 국민들 앞에 반드시 제출하게 만들어야 한다.
45년 전, 1·21 사태 때 전사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유족"박정희 살해하려던 김신조 기억되고, 그를 막은 아버지는" 사건 직후 향토예비군 만들고, 자주국방을 최우선으로 추진
수방사, 21일 공비 침투로 걷기 등 대규모 행사 개최
'1·21 사태' 때 유일하게 생포됐던 무장공비… 김신조 목사
"김일성, 박정희 산업화 인정… 그래서 죽이려 했다"
"北, 내가 죽었으면 발뺌했을 것… 천안함도 마찬가지"
"김일성은 당시 남한의 산업 발전이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라는 걸 인정했어요.
더 시간이 지나면 한국의 공산화가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 빨리 죽이려고 한 겁니다.
"1968년 1월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던 북한 특수부대원 김신조(71)는
45년이 흐른 뒤 노(老) 목사가 돼..
- [만물상] 1·21 사태의 기억
- 2013. 1. 18 (금)
- 1968년 1월 10일 새벽 황해북도 사리원 인민위원회에 괴한 31명이 나타났다.
- 건물 주변에는 무장한 노농적위대와 사회안전원 수십 명이 지키고 있었다.
- 괴한들은 총격을 퍼부으며 건물 1·2층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12명이 죽고 40
- "김신조는 기억되고 공비 막은
1·21 전사자 35명… 45년 지난 지금 사진조차 없는 軍"남편은 6·25 때 끌려가 죽고 맏아들은 北특수부대에게…"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
<19>북한의 도발청와대 기습한 김신조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1~2명 휴전선 통해 월북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1~2명 휴전선 통해 월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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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치용
- 재미 탐사보도전문기자
- E-mail : jesim56@gmail.com
- 미국 국무부 비밀전문 첫 공개
1~2명 생존해 서부 전선 미군 지역 철책 뚫고 월북
미국 정부는 민간인 탈출계획 만지작...독일 등 '우리도 데려가라' 아우성 -
1968년1월25일 생포된 공비 김신조가 동료들의 사체를 확인하고 있다.지금부터 46년전인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라는 말로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했던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 사건이 발생한지 사흘 뒤인 24일밤 김신조 일당 1~2명이 미군 관할인 서부전선 철책을 뚫고 월북했다는 사실이 미국 국무부 비밀전문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 전문은 김신조 일당이 31명이라는 당시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모두 33명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사건 당시 생존자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 비밀전문은 주한 미국대사관이 도주자가 있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해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번 비밀전문은 처음 공개되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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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암포터 주한미국대사가 1968년1월25일 오전 미국 국무부에 타전한 비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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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포터 주한미국대사가 1968년 1월 25일 오전 9시 34분 미국 국무부와 주일미국대사관, 하와이의 미태평양사령부,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 등에 타전한 비밀전문에 따르면 1·21사태가 발생한 사흘뒤인 1월 24일밤 북한군 8명에서 10명정도가 비무장지대 절책 너머 북쪽에서 소총과 수류탄으로 미군 초소를 공격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미군은 동이 트면서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전개, 미군초소에서 멀지 않은 지점의 철책에 3피트 깊이의 구멍이 뚫려 있음을 발견했고, 족적과 혈흔 등을 추적한 결과 무장공비 1명 내지 2명이 월북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포터대사는 미군초소의 위치가 UTM 좌표 CT 089029 지점이라고 밝히고, 북한군이 미군초소에 총격을 가한 것은 무장공비의 월북을 돕기 위해 미군의 감시를 분산시키기 위한 술책이라고 보고했습니다. 포터대사는 이외에도 1월 24일 저녁과 1월 25일 새벽에 총격전이 발생했으며, 1월 25일 UTM 좌표 BS 996980 지점에서 총격전으로 인해 미군 8명이 부상을 입고 한국군은 2명이 숨지고 1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윌리암 포터 주한미국대사가 1968년1월23일 오후 미국 국무부에 타전한 비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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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 대사는 이에 앞서 1월 23일 오후 1시 24분 미 국무부 등에 보낸 비밀전문을 통해 1월 23일 새벽 4시 28분 미 2사단이 관할하는 비무장지대 철책에 3명에서 5명의 북한군이 총격을 가해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즉각 대응에 나섰으며 같은 날 새벽 6시 25분 북한군이 재차 공격을 감행, 미군 3명이 부상했으며, 총격지점 인근 철책에서 고성능 폭탄으로 뚫은 구멍 2개가 발견됐고 그 지점의 철책은 북쪽으로 휘어져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포터 대사는 북한군의 총격전은 첫째 1·21사태를 일으킨 무장공비의 탈출을 도우려는 것, 둘째 북한군의 새로운 침투공작, 세째 미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행동 등의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특히 포터대사는 생포한 김신조를 그들이 침투한 철책지점으로 데려가 확인한 결과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은 미 2사단이 관할하는 철조망을 뚫고 침투했으며 침투지점의 UTM 좌표는 CT 089055 였다고 확인했습니다. 1·21사태 사흘 뒤인 24일밤 무장공비 1-2명이 월북에 성공한 철책의 좌표는 CT 089029, 이들이 침투한 지점의 좌표는 CT 089055로 결국 생존한 무장공비들은 그들이 침투한 지점 인근의 철책을 통해 다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미국이 무장공비 1-2명이 월북한 것으로 보고함에 따라 1·21사태 당시 침투한 무장공비가 과연 몇명인지에 대해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124군부대 소속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했다가 이중 김신조 1명만 생포됐으며 나머지 30명은 사살됐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인터넷백과사전은 당시 31명 침투, 1명 생포, 28명 사살, 2명은 실종이라고 기록하는등 사살된 무장공비 숫자가 혼선을 빚고 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이었다고 말하는 간첩 김신조. 기자회견 장소에는 노획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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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국은 1968년 1월 북한의 청와대 습격과 푸에블로호 납치 등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자 한국에 체류하던 미국민을 탈출시키는 작전을 조심스럽게 검토했으며,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일본, 독일, 스웨덴 등이 자국민도 탈출대상에 포함시켜 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청와대 습격 6일, 푸에블로호 피납 4일뒤인 1968년 1월 27일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대사는 국무무와 태평양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등에 보낸 '도피및 탈출 작전'이라는 비밀전문에서 “주한미국대사관은 조심스럽게 상황을 검토했으며, 지금 시점은 도피 및 탈출작전을 공식적으로 경보할 단계는 아니라고 믿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포터대사는 이 전문에서 '도피및 탈출위원회'는 주한미군사령부와 협조해 도피 탈출작전(E & E PLAN)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E & E PLAN 이란 ESCAPE AND EVASION PLAN, 즉 도피 및 탈출작전으로 한반도 유사시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 국민들을 한반도 밖으로 비상 소개시키는 작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ESCAPE AND EVASION OPERATIONS (E&E) 라는 작전계획(OPLAN)을 수립,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포터 대사는 나흘뒤인 1968년 2월 1일 국무부 본부의 버거 대사에게 도피 및 탈출작전에 대해 보고합니다. 포터대사는 이 전문에서 “한국에 체류중인 미군 가족과 비필수 미국 국민이 약 1만1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또 네덜란드와 일본, 독일, 스웨덴, 그리고 유엔산하기구도 미국이 만약 미국 국민들을 한국에서 탈출시킨다면 자국민들도 그 대상에 포함시켜 달라고 요구했고, 유엔 산하 일부기구의 한국내 직원들이 포함되지 않자 미국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무부가 1968년 2월 21일 주한 미국대사관에 하달한 비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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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21일 미국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보낸 전문에서 “네덜란드 대사관이 한국에서 소개가 필요할 경우 자국민을 도와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며 “한국체류 네덜란드인은 서울 16명 등 모두 21명”이라고 밝혔습니다. 국무부는 이 전문에서 “만약 소개작전이 진행되고 네덜란드인들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탈출비행기 등의) 좌석에 여유가 있으면 본인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주한미국대사가 이들을 탈출대상에 포함시켜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네덜란드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자국민을 포함시켜달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2월 21일 국무부로부터 네덜란드인들을 포함시켜주라는 지시를 받은 뒤 약 1주일이 지난 2월 27일 국무부로 또 다시 전문을 보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이 전문에서 “수년동안 도피 및 탈출작전에는 영국 및 영연방 국민, UNCURK의 직원, 그리고 서울 소재 스칸디나비아병원의 직원들에게는 미국민과 똑같은 우선권을 부여, 탈출시키도록 돼 있다”고 밝히고 “그러나 이들 국가와 맺은 계약이나 계약내용을 담은 기록 등이 대사관에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도 함께 탈출시키는 것은 맞지만 그 세부사항은 대사관에 없으므로 국무부가 대사관으로 보내달라는 부탁입니다.- 윌리암 포터 주한미국대사가 1968년 2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타전한 비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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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국대사관은 또 자국민을 도피 탈출계획의 대상에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한 한국 주재 독일, 일본, 스웨덴 대사관에 스스로 자국민들의 탈출을 주선해야 한다고 통보하는 한편, 미국정부도 민간항공기를 이용하는 만큼 그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독일, 일본, 스웨덴대사관에 군사수단(군용기 또는 군함 등)을 이용한 비상탈출 때에는 각국 정부가 그들 본국 정부 또는 주재국 정부의 자원을 이용해야 한다고 통보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이들 나라에게 미군은 좌석 등이 여유가 있을 경우에만 이들 나라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며 그렇더라도 이는 '도피 및 탈출계획'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유사시에 자리가 있으면 혹시 탈출시켜 줄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탈출계획의 정식 대상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한국내 유엔직원들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UNKURK 직원들은 미국민들과 똑같은 우선권을 부여받지만 UNCURK를 제외한 다른 UN기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UNCURK와는 달리 도피 탈출작전때 제3국 국민대우를 받는다고 보고했습니다. 말하자면 포터대사가 유엔직원들은 어떻게 할지 지침을 달라, 그런 전문이었습니다.
결국 한달뒤인 3월 25일 미국무부는 '도피탈출계획'이란 제목의 비밀전문을 주한미국대사관에 보내고 유엔직원들을 모두 대피계획에 포함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국무부는 이 전문에서 “UNCURK 직원 외 다른 유엔직원들이 탈출대상에서 제외되면 유엔본부가 미국에 비우호적으로 나올 수 있다”며 “이들을 모두 포함해도 유엔 관련 직원은 50명에 불과하므로 미국의 도피 탈출계획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이의가 없다면 대사재량하에 도피탈출계획을 수정해 UN직원을 모두 포함시키고 이를 UNCURK 사무총장에게 통보해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2011년 1월 21일 1.21사태 43주년을 맞아 무장공비로 침투했던 김신조씨가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남방한계선 철책을 넘었던 현장에서 육군 비룡부대 장병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름없는풀뿌리 68년 1월 10일 새벽 황해북도 사리원 인민위원회에 괴한 31명이 나타났다. 건물 주변에는 무장한 노농적위대와 사회안전원 수십 명이 지키고 있었다. 괴한들은 총격을 퍼부으며 건물 1·2층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12명이 죽고 40여명이 다쳤다. 괴한들은 트럭을 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날이 밝자 남한 특공대 소행이라는 소문이 좍 퍼졌다. 괴한들은 북한이 남한 침투 게릴라전을 벌이려고 키운 124군 부대 2400명 중에서 뽑은 최정예 대원이었다. 청와대 습격을 앞두고 건물이 비슷하게 생긴 자기네 인민위원회를 상대로 실전 훈련을 한 것이다. 이들은 극한 훈련을 겪어낸 살인 병기였다. 40㎏ 군장 메고 한 시간에 12㎞ 달리기, 무덤 파고 들어가 시체와 함께 숨어 있기, 혀를 문 채 자기 턱을 올려쳐 자결하기…. ▶1월 21일 일요일 밤 10시 15분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경복고 후문 앞길에서 총성이 울렸다. 북한 게릴라를 가로막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곧이어 출동한 수도경비사령부 장병과 게릴라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은 민간인이 탄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까 넣었다. 조명탄으로 하늘이 대낮처럼 밝았다. 시민들은 콩 볶는 총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격전 끝에 게릴라 29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했고 한 명은 북으로 달아났다. 우리 쪽에선 민간인 5명을 포함해 30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부상했다. ▶1968년은 6·25 이후 한반도에 전쟁 위험이 한껏 치솟았던 해였다. 1·21 사태 이틀 뒤 미군 정보수집함(艦) 푸에블로호가 납북돼 미 항공모함이 동해로 출동했다. 10월엔 124군 부대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으로 침투해 양민을 학살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오늘 1·21 사태를 기억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북한에 대한 복수를 벼르며 훈련시켰던 실미도 특수부대원을 반공 정권의 희생자로 묘사한 영화는 있어도 1·21 사태를 되비춰본 영화는 없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같은 일이 벌어져도 북한을 비난하면 오히려 낡은 사람 취급받는 세상이다. 1·21 사태를 겪었던 세대는 그 공포스러운 기억이 세월에 풍화(風化)돼 바랬다. 젊은 세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주도 세력들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던 그 순간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애쓴 탓일 것이다. 위기에서 배우지 못한 국민은 언젠가는 다시 위기의 시간을 맞고야 만다. 조선일보 [만물상] 1·21 사태의 기억 입력 : 2013.01.18 22 2013/01/20 12:16:17
풀뿌리 밤의 임진강(臨津江)
반도(半島)의 동편서편 전적(戰跡)을 씻기우며
상흔(傷痕)을 버리고 간 강물은 아는가?
철책(鐵柵)에 걸려있는 너와 나의 뼈와 살.
강변(江邊)의 물상(物像)조차 어둠에 함락되고
북구(北毆)의 철새들도 갈 섶에 잠자는데
별들은 잠잘 곳 없어 강심(江心)만을 떠돈다.
철조망 넘나들어 남북을 오고 가며
상심(傷心)한 삼십여년 별처럼 지새우는
임진아! 너의 숙소(宿所)는 금수강산 어디인가?
덧붙임)
1981.10.22 밤 나는 지금 남북 철도가 연결되는
도라산 아래 임진강변 장단반도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달빛 아래 끝간 데 모를 갈 숲으로 뒤덮인 장단반도는
울지 않고는 못배기게하는 마력으로 나의 혼을 앗아갔다.
리비교, 티일교, 장깨교, 도라산, 제3땅굴, 봉일천, 문산, 광탄,
방축리, 발랑저수지, 백경수, 해유령, 노고산, 용주골, 직천리, 장파리,
감악산, 신산리, 가래비, 학곡리, 율포리, 선유리, 적성, 반구정, 화석정등이
내가 군 생활했던 영역이었다. 2005/12/02 19:25:00
"박정희 목 따러 왔다"는 김신조, 진관사 앞에서 멘붕된 이유
8시간전 | 중앙SUNDAY | 다음뉴스
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그곳을 스쳐 지나갔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 이후 52년 만인 2020년 11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된 북악산 곡장 전망대에서...
관련뉴스 “박정희 목 따러 왔다“는 김신조, 진관사 앞에서... 8시간전 | 중앙sunday
시사저널 21/05/31 인터뷰 / 사진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872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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