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시담록

제2의 625전쟁 (2) 울진삼척토벌 상세보고서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30. 13:11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출처 검도여행 | beetle55
원문 http://blog.naver.com/beetle55/100161549656

 

6.25 사변이 끝나고 한반도는 휴전협정을 맺고 전쟁을 중단 했지만 남북한 양측 체제가 조금씩 모습을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인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3.8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무력충돌로 인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특히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는 북한의 끊임없는 시비와 도발과 국지적 군사적 침투와 공격으로 전사한 한국군과 미군들의 수도 상당하다.

특히 1966년부터 1969년까지는 많은 전투와 남북간의 침투작전과 무력충돌이 있었다. 그래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일어난 국지전투 등을 일컬어 '2차 6.25 전쟁' 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던 중 북한은 대담무쌍하면서 황당한 사건을 벌이고 마는데 바로

 

1968년, 남한은 온통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북한에서 간첩을 남파하여 대한민군 대통령을 암살하려한 대대적인 사건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 일어났다. 

 

 

참고: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http://blog.naver.com/beetle55/100161144947 

 

 

그리고 이 김신조 사건이 일어난 지 3일 후인 1968년 1월 23일,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지니

미해군의 푸에블로 호 USS Pueblo 호가 북한에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인해 남북한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북한 간의 긴장도 고조되었다. 거기에다가 남한특은 이를 계획적인 북의 도발로 보고 전쟁까지 할 기세였는데, 미국의 유화책과 군수물자 지원으로 남한은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이어 미국은 지속적으로 북한과 협상을 벌이고 결국 1968년 12월 23일 푸에블로 호 승무원들은 나포 당시 사망한 승무원의 유해 한구와 함께전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육로로 남한으로 귀환한다.  

 

참고: 푸에블로 호 나포사건  http://blog.naver.com/beetle55/100161287975

 

 

다음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벌어진 '2차 6.25 전쟁' 이라고도 불리우는 북한의 침투작전으로 인한 특히 DMZ 지역의 국지전투들 중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이 일어난 1968년도에 일어난 전투들이다.

 

 

1968

 

1월 22일에도 휴전선에서 총격전이 벌어져서 미군 3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으며

 

1월 23일. 푸에블로 호 나포사건 발생. 미군 한 명 사망.

 

1월 24일. 미군 2ID 위치 (1-23 보병대) 에서 김신조 일당중 북으로 탈주하려는 무장공비와 총격전.

              미군 2명 전사. 

 

1월 26일. 2ID (2-72 Armor) DMZ 남쪽에서 깃미조 일당 중 북으로 탈주하려는 무장공비와 총격전.

 

1월 29일. 2ID 순찰대가 남으로 침투하는 북한 무장공비 4 팀과 총격전.

 

2월 6일. 2ID 경비초소 습격당함. 북한군 한 명이 부상당함.

 

3월 27일: 2ID 와 한국군 25사 보병대가 매복 중 북한군 침투조와 격전. 북한군 3명 사살함.

 

4얼 14일: 미군 병참트럭 JSA 에서 공격당함.  미군 두명 전사. 카투사 2명 전사. 미군 주명 부상. 북한군 손실 모름.

 

4월 21일: 7ID 순찰대  (2사단, 31연대) 가 DMZ를 통해 침투하는 북한군과 교전. 미군 한명 전사. 미군 세명 부상. 북한명 15명 부상.

 

4월 27일: DMZ 에서 7ID 순찰대 (2-31 보병대) 공격 당함. 카투사 한 명 전사. 미군 두명 부상. 북한군 손실은 모름.

 

7월 3일: DMZ 에서 2ID 순찰대 공격당함. 미군 1명 부상. 북한군 손실은 모름.

 

7월 20일: 2ID 순찰대가 DMZ에서 북한군에게 공격당함. 히군 한 명 전사. 북한군 손실 모름.

             7ID 순찰대 (1 사단, 32 연대) DMZ에서 공격당함. 미군 한명 사망. 북한군 손실 모름.

 

7월 21일: 2ID 순찰대 (2사단, 38연대) DMZ에서 매복중이던 북한군에게 공격당함. 미군 한명과 카투사 한명 부상.

 

7월 30일: 2ID 순찰대 (3-23 보병연대) DMZ에서 매복중인 북한군과 충돌. 미군 한명 전사. 3명 부상. 북한군 손실은 모름.

 

8월 5일: 2ID 순찰대 (1-38 보병대) DMZ 남쪽에서 대낮에 격전. 미군 한 명 사망 4명 부상. 북한군 한 명 사망.

 

8월 18일: 7ID 순찰대 (1-32 보병대) DMZ 남쪽에서 북한군과 격전. 미군 두 명 사망. 북한군 두명 부상.

 

9월 19일: 2ID 순찰대 (2-38 보병대) 와 4 대대, 7연대, 2 대대, 9연대ment (Mechanized), 그리고 2사단은 남한으로 침투하는 북한군 분대를 격파함. 카투사 2명 전사, 6명 부상. 북한군 4명 사망, 한명 부상.

 

9월 27일: 2ID 순찰대 짚차가 DMZ에서 습격당함. 미군 2명 전사. 북한군 손실 모름.

 

10월 3일: 7ID 경계근무소 (1-31 보병대) 에서 북으로 넘어가려는 북한군과 교전. 미군 부상자 없음. 북한군 한 명 사망.

 

10월 5일: 2ID 순찰대 DMZ 에서 북한군과 교전. 미군 한 명 전사. 북한군 손실 모름.

 

10월 10일: 2ID 보트 순찰대가 임진강에서 남하하는 북한무장공비와 교전. 미군 부상자 없음. 북한군 한명 사망.

 

10월 11일: 2ID 순찰대 DMZ에서 남파중인 북한군과 충돌. 미군 피해 없음. 북한군 두명 사망.

 

10월 23일: 2ID 순찰대 DMZ에서 남한으로 침투하는 북한군과 전투. 미군 한 명 전사. 닫섯명 부상. 붇한군 한명 사망.

  

 

김신조 사건 이후 남한에서는 반공의식과 교육이 강도를 더했고, 휴전선 지역에서는 북한의 도발이 끊이질 않았으며 그로 인해 한국군과 미군의 희생도 나오고 있는 중,

 

북한 김일성은 남한에 갖첩을 침투시켜 사회를 어지럽히고 반란이 일어나게 하려는 계획으로 지속적으로 무장공비와 간첩을 남파시키는데

 

어렸을 적 반공교육의 주된 내용이었떤 남침야욕을 가진 극악무도한 괴뢰군으로 간첩은 물론 무장공비를 남파한다는 존재로 낙인찍히는

무장 공비의 대명사 격인 사건을 또 하나 벌리니, 그것이 바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다.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년 10월 30일,

울진-삼척 간 해안선으로 북한 특수부대 124부대 무장공비들이 침투를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68년 전후 미국은 베트민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는 동시에 파리평화협정을 진전시킴으로써 베트남 전쟁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동서 대결의 분위기가 완화되어 가던 추세 속에서 북한은 중공과 소련의 군사 원조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자 했다 

 

1968년 초, 김신조 사건이 터지고 몇 개월이 지나서 한 해를 넘기기 전에 또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남한으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김신조 사건 등으로 비상이 걸린 남한은 특히 북한의 무장고비들의 육로 침투경로인 휴전선에 대한 경계근무를 강화하여 남한으로 침투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북한은 남한의 해안으로 무장공비를 침투시키기 시작한다.  

 

북한은 1968년 1월 21일 일어난 김신조 무정공비 일당 청와대 습격사건의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 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해안을 통한 무장공비 치투를 실시한다. 

 

 

1968년  10월 30일 밤,

 

조선인민군 朝鮮人民軍 124 부대 부대원 120 명이 남한 강원도 울진과 삼척 사이 8군데에 상륙한다.

이들은 남한에 유격대 활동 거점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하였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같은 해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남파되었던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부대 소속으로, 침투지역 일원에서 공포분위기 속에서 주민들을 선전·선동하는가 하면, 양민학살 등 만행을 저질렀다.

북한이 무장공비를 투입한 것은 남한 내륙으로 침투, 30일만에 태백산에 유격대 본부를 세우고, 1·21사태 이후의 대남공작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의 민중봉기를 유도하려는 거점 마련에 있었다.

나아가서 미국의 월맹에 대한 북폭중지와 파리평화협상회의의 진전에 따른 월남전의 종식에 초조한 나머지 한반도에서의 긴장조성을 통한 중국·소련의 군사원조 획득과 대대적인 정치위기 은폐의도에서 감행되었다. 

 

1968년 10월 30일에서 11월 2일에 이르는 사흘 사이에

120명의 무장공비들은 15명씩 8개 조로 편성되어 10월 30일, 11월 1일, 11월 2일의 3일간 야음을 타고 경상북도 울진군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 등으로 침투하였다. 

 

무장공비들은 군복·신사복·노동복 등 갖가지 옷차림에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니고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 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 사상 교육을 실시하여 인민유격대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다.

 

울진군 북면 고숫골의 경우, 11월 3일 새벽 5시 30분쯤 7명의 공비가 나타나서 “경북경찰대에서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어주러 왔다.”라는 말로 마을사람들을 모은 다음, 사진을 찍고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며 사상선전을 하고 유격대지원 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 때 이 마을에 나타난 양양군 장성읍에 거주하는 전병두(32세, 노동)를 대검으로 찔러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위협하였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의 만행도 잇따랐다.

삼척군 하장면의 한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 등 일가 세 사람이 난자당하였으며, 통알이 아깝다며 돌로 화전민을 떄려죽이는 살인 만행을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10월 31일 아침,

이들 남파 무장공비들은 인근 민가에 난입, 마을사람들에게 사상교육을 하는데. 마을주민 중 일부가 탈출하여 신고를 하게됐다.

 

이에 한국군은 대간첩 대책본부를 세우고 군(軍)과 향토예비군을 동원하여 소탕 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곧 한국군이 헬기를 타고 출동하였고, 36사 국토방위대와 해병대 대대, 그리고 전투 경찰과 특수부대원들과 수천 명의 향토예비군이 동원되어 무장공비 추격에 나섰다.

 

당국은 11월 3일 오후 2시 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대간첩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전을 벌였다. 소탕작전 결과 11월 16일까지 사살 31명, 생포 2명의 성과를 올렸으며, 연말까지는 침투했던 공비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에 당국은 11월 3일 오후 2시 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 사태’를 선포하였고, 작전상 필요에 의해 4일 정오를 기해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갑종 사태’를 선포하였다.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 예비군을 출동시켜 산악 지대의 험준한 지형과 나쁜 기상 조건에도 불구하고 무장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다. 11월 16일까지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으며, 기관단총 3정, 권총 1정, 실탄 다수, TNT 3개, 수류탄 20발, 비상식량 200개, 카메라 1대를 노획하였다.

  

군경.민간인 합동으로 북한의 무장공비 소탕에 나서고 얼마 남지 않은 무장공비들은 북으로 탈출을 시도하며 도망을 치던 중 또 하나의 만행을 저지르는데,

12월 9일, 

평창군 산간마을의 한 초가집에 침입한 무장공비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외치는 10세의 이승복(李承福) 어린이와 일가족을 처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다.

바로

내가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배웠었던,

6.25에 이은 북한괴뢰 공산당이라고 부르던 반공교육의 대표적 영웅이자 무장공비의 희생자인 '이승복' 이다.

 

 

 

무참히 살해된 이승복 일가

 

 

 

이승복 생가

 

 

참고: 이승복 어린이 사건   아직...

  

 

이렇게 2주에 걸친 수색작전과 무장공비 소탕 작전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작전중지를 명령한 12월 26일까지 북한의 무장공비 대부분은 사살되었다.

 

조선인민군 朝鮮人民軍 124부대 부대 120 명 중 110명이 사살되고 7 명이 생포되고 3명은 도망쳤다.

그리고 한국군과 경찰 40명이 이 과정에서 전사했으며 민간인도 23명이나 사망했다.

 

생포된 무장공비의 증언에 따르면, 일당은 1968년 7월부터 3개월간 유격 훈련을 받고 10월 30일 오후 원산에서 배로 출발하여 그날로 울진 해안에 도착하였으며, 되돌아갈 때에는 무전지시를 받기로 하였으나 실패하여 독자적으로 육상 복귀를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UN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이 사건이 한반도의 긴장을 초래, UN의 평화통일노력을 방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UN총회에 특별보고를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북한의 이러한 대담한 대남교란행위는 국민의 반공태세를 한층 다지게 하였다. 

 

참고문헌

북한대남공작사 2(중앙정보부, 1973)
北傀挑發三十年(宋孝淳 編, 北韓硏究所, 1978)  

 

 

 

당시 신문기사.

 


 

울진-삼척 침투 무장공비 시체들.


 

 

 

당시 공비들이 들고 내려온 소총들과 각종 무기들.

 

 

 

울진-삼척 무장공비들이 지니고 있던 PPS-43, 나침반, 수류탄과 가짜 신원등명서 

 

 

 

압송중인 공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마무리 되고 1968년 말에 들어서는 지난 2년간 비정규 전쟁으로 끊임없이 도발해온 북한은 결국 남한에서의 혼란과 반란 등을 일으크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으며 오히려 한국 국민의 반공 태세를 한층 공고히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한-미 동맹 관계도 북한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고 더욱 굳건한 동맹을 맺어 나가게 된다.

거기에다가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정권을 이어나가서 남한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이 사건이 한반도의 긴장을 초래하고 유엔의 평화통일 노력을 방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엔총회에 특별 보고를 하기로 하였다 

 

1968년 12월 말, 김일성은 북한의 고위급 장성들에게 비정규 전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방장관 김겅봉 장군과 인민군 정치국의장 호봉핵을 처형하고, 참모총장과 정찰국 국장, 그리고 세 명의 최전방 인민군 부대 사령관을 투옥한다.

 

이어 김일성은 124 부대와 283 부대를 해체하고 전통적인 군사작전보다는 규모가 작은 특수전투 능력을 키우기 위해 전념한다.

북한인민군은 인민 위원체제로 모든 병력이 중대 크기로 전환하고 전 병력을 통솔하는데 주력한다.

이러한 군대의 변화에도 북한은 지속적으로 간첩을 남파하여 사상을 전파하고 남한을 교란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UN 사령부는 이러한 평양의 변화에 대해 평양에서전략을 바꾼것 보다는 유엔의 효과적인 활동으로 남파침투가 줄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로서는 정보들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김일성도 이 전략 등에 대해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9년 3월 중순, 남한에서는 합동군사훈련 Focus Retina 가 열리고, 북한은 이를 북침의 최종연습이라고 비난하며 휴전선에서 도발과 남침을 간헐적으로 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5월말 까지 지속되었다.

 

1969년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 에는 북한의 미그기 MiG 가 북한 동해상 167 km 지점에서 정보화임를 수행중이던 미공군의 EC-121M Warning Star 를 격추시켜 탑승원 31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 Richard Nixon 과 국가안보국의 Henry Kissinger 는 휴전 회담에서 외교적 항의와 함께 보복성 폭격을 고려하였는데, 이 두사람은 모두 무력에는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반면 닉슨의 참모들은 이미 베트남전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또 다른 전면전을 하는것을 우려하였고, Bonesteel 장군과 Porter 주한 미대사도 이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4월 18일, 닉슨은 앞으로 첩보비행기는 전투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비행을 할것이라 공표하고, 판문점에서 열린 북한과의 회담에서 미공군 정찰기 격추에 대해 항의하고. 이는 북한측에서 받아들였다.

이어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항공모함 4척을 포함한 이들을 호위하는 전투함들로 이루어진 미공군 7함대 Task Force 71 이 북한 동해선상에서 무력을 위시하려 출동하였다.

 

 

이후

1969년 5월에 이르러서 남북한 간의 긴장은 완화되었는데, 그전까지는 DMZ 에서 특히 한국군이 배치되어 있는 지역에서 국지전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남한의 군사력은 점차 커져갔고. 미국측에서는 남한에서의 군력감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69년 7월 25일, 닉슨 대통령은, 앞으로 미연합국은 미국의욱상군대가 아닌 미국의 공군과 해군의 원조로 (핵우산 정책 초함) 국방에 임한다는  '닉슨 정책' Nixon Doctrine 을 발표한다.

 

이는 주로 베트남전을 겨냥하여 추진한 안이었지만, 남한에도 적용이 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미간 공약은 변하지 않은것이라 다짐을 했다고 한다).

1969년 10월 1일, Bonesteel 장군은 주한미군 명령권을 John H. Michaelis 에게 넘긴다.

Michaelis 장군의 초기 임무는 DMZ 에사 격추당하여 북한군에 잡힌 미군 OH-23 헬기 탑승자 3명을 공식적 날짜로 1969년 12월 3일에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1968년 세차례에 걸쳐 울진과 삼척에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곳중에 세번째 침투지점이다

 

 

 

울진과 삼척의 행정적 경계선으로1968년 세차례에 걸쳐 무장공비가 침투한 사건을 알리기 위해 세운 안내판.

2008년 5월에 세움.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다음은 당시 1968년 11월에 방영된 대한뉴스에서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무장공비를 무찌른다(제 1 선)

제작연도 1968-11-16 | 상영시간 07분 00초 | 출처 대한뉴스 제 701호

  

방송보기

  

Behold the past towards the future...

 

 

 

[특집]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출처 I be | 두근두근
원문 http://blog.naver.com/naruluiha/120152569645

 

 

북한은 군사원조를 획득하고 정치 위기를 극복하고자, 남한에 무장공비를 침투시켰다.

 

1968년 11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울진 삼척 지역에 침투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1월 서울에 침투하였던 북한민족보위성정찰국 소속의 124군부대였다. 침투 목적은 1.21사태 이후 대남공작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의 민중봉기 유도 거점 마련에 있었다.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의 긴장조성을 통해 중국, 소련의 군사원조를 획득하고, 대대적인 정치 위기를 은폐하고자 하였다.  

  

무장공비들은 거점 마련을 위해 '인민유격대' 가입을 강요하며,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공비들은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채 주민들을 집합시켜 정치사상교육을 시키며 '인민유격대' 가입을 강요하였다. 이때 양양군 장성읍에 거주하는 전병주(당시 32세, 노동)을 대검으로 찔러죽이는 만행을 저질렸고, 다른 지역에서도 만행이 잇따랐다. 삼척군 하장면의 한 산간마을에는 80세의 노인,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가 죽임을 당했으며, 평창군 산간마을에서는 10세의 이승복 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절규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무장공비들의 만행은 대북경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주민들의 신고를 접한 당군은 11월 3일 오후 2시 30분을 기하여 경북과 강원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소탕전을 벌었다. 소탕작전결과 11월 16일까지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으며, 연말까지 공비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공비에 의해 목숨을 잃은 민간인과 군인은 모두 18명이다. 북한의 대남공작행위는 국민의 반공태세를 한층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話 溫故知新 (31)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출처 땡삐,건들믄 같이 죽는다.. | 땡삐
원문 http://blog.naver.com/liskangel/140021406614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북한은 1968년 이른바 1·21사태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고 질서를 파괴할 목적으로 특별히 훈련받은 124군 부대원 30여 명을 청와대 부근까지 침투시켰으나 이 무모한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은 그 이후에도 같은 해 11월2일 해안선을 통해 124군 부대원들을 해상 침투시켰다. 그것이 바로 세칭 울진·삼척사태다.

울진 부근의 해안가 바위에는 여러 해에 걸쳐 쌓인 물새 배설물이 많은데 밤에는 이것이 발광(發光)해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바로 이 물새 배설물이 쌓인 바위를 표적으로 삼아 무려 네 차례에 걸쳐 30명씩 도합 120명을 특수정에 태워 상륙시켰다. 이들은 마침 해안초소 근무자(분대장)가 동네 혼인잔치에 초청받아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상륙했다. 따라서 해안초소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산간오지로 들어간 적은 다음날 대낮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곧 남한이 적화될 터이니 모두 노동당에 가입하라”고 권고하며 입당원서를 돌리는 식으로 무모한 짓을 했다. 따라서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가 없었던들 아마도 이들은 부근 도시에 내려와 더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제1야전군 작전참모였는데 처음에는 몇 명이 상륙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작전이 시작됐다. 지금은 군 현대화 계획의 시행으로 육군 항공에 헬기가 많아 고도의 기동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공군에는 겨우 다섯 대의 병력 수송용 헬기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를 이용, 마찬가지로 당시 하나뿐인 제1공수 특전단 요원을 공중투입해 적을 분산시키는 전술로 작전을 시작했다.

내가 헬기를 동원한 공중강습 작전을 고려한 배경은 육본 작전처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공수특전부대 최초 편성에 관여해 그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공수특전부대는 비밀부대라고 해 미군도 우리 측에 외부에 공개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헬기를 동원한 공중강습 작전은 성과를 보았다. 나중에 생포한 공비의 진술에 의하면 “남한이 얼추 빨개져 너희들이 내려가기만 하면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교육을 받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공중으로부터 `불벼락'(사격)을 받아 모두 흩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얼마나 되는 적이 침투했는지도 모르던 상태에서 다행히 생포한 적으로부터 특수정에 의해 침투한 사실이며, 규모·목적 등을 파악하게 돼 본격적인 작전이 전개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육군은 전방 방어에만 주력하고 있던 터라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해 작전은 시일을 끌게 됐다. 당시 나는 제1야전군 작전참모였기 때문에 제2군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에 관여할 수 없었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 해상침투 한 적이 다시 해상으로 도주·이탈할 가능성보다 육로를 통해 야전군 지역을 통해 북상 도주할 공산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군 후방지역 경계 책임을 지고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사단장 이세규(李世圭)준장(육사7기·작고)에게 작전 준비지시를 내렸다. 이세규 사단장은 군에서도 이름난 강직하고 우수한 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제11사단지역에 적이 나타나자 작전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즉 적은 못잡고 아군의 희생만 속출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한동안 지나니까 적이 나타날 때마다 병력 건제(建制)를 무시하고 축차(逐次) 투입을 해 하나도 자기 건제 대대를 갖는 연대가 없이 돼버렸다.

그리고 부대를 장기판 주무르듯이 무계획적으로 기동시켜 모두 지치는 바람에 어느 대대장은 대원들에게 업혀 다니는 식의 웃지 못할 형편이 돼 버렸다.

2003.05.19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 

 

 

 

울진.삼척 무장공비 "北 백배, 천배 보복했어야.."<연합>
입력 2010.12.09 (목) 14:54, 수정 2010.12.09 (목) 18:37
 
바로 백배, 천배 보복했어야 한다"

지난 1968년 11월
울진·삼척으로 침투해 강원도 산골초등학생이던 고(故) 이승복 군을 참혹하게 학살한 무장공비 120명의 일원이었던 김익풍(69)씨는 9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날 낮 강원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이승복 기념관 묘역에서 열린 '제42주기 이승복 추모제'에 참석한 김씨는 "전우가 죽었는데 (군은) 바로 대응을 했어야 한다"며 "그것도 더 세게, 백배 천배 보복을 했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씨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고 안보의식 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행동도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군인은 군인다워야 한다. 교전은 싸움이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라고 한 뒤 "전쟁
걱정은 통수권자가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울진·삼척으로 침투했던 무장공비 120명 가운데 113명은 사살되고 5명은 생포됐으며 김씨를 비롯한 2명은 자수했다. 언젠가 남은 생존자와 함께 이승복군 묘역을 다시 찾겠다는 그는 "
오늘은 그냥 술이나 한자 부어 놓기 위해 왔다"라고 말했다. 앞서 김씨는 지난해 12월 계방산 자락의 고 이승복 군 묘지를 찾아 41년 만에 용서를 빌기도 했다.

김씨는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남침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부대 소속 120명 중 마지막 잔당으로 울진에서 자수한 뒤 1980년대에는 반공강연 등의 활동을 했으나 현재서울 근교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복 군의 형 학관씨도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해 "민간인에 대한 포격은 전쟁이라고 생각하는데 TV를 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며 "북한은 아직도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잠수함 무장공비 출신 이광수씨

[위클리조선] 2007년 06월 05일(화) 오후 02:30

“18 일 새벽 잠수함을 타고 동해안을 통해 침투한 무장간첩들은 도주 15시간 만에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날 밤에 달아난 나머지 간첩 8명이 분산, 도주하면서 민가를 약탈하고 우리 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긴장이 지속됐다. 군경 합동수사대는 잠수함이 좌초된 곳으로부터 서남방 5㎞ 지점인 청학산(해발 337m) 중턱에서 무장간첩 11명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숨진 간첩들은 모두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채 발견됐는데 10명은 권총을 휴대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고, 나머지 1명은 허리춤에 권총을 찬 상태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발견됐다. 동료들로부터 이탈, 혼자 도주한 이광수(31)는 오후 4시40분쯤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마을에서 농민들과 얘기를 하다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 경관 2명에게 붙잡혔다. 찢어진 청색 티셔츠에 흰색 운동화 차림인 이는 생포 당시 38구경 권총 1정과 실탄 9발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는 경찰이 칼빈 소총을 겨누자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려다 붙잡혔다. 이는 경찰에 연행되자마자 ‘배가 몹시 고프다’며 먹을 것을 요구했다.

1996 년 9월 18일 강릉 앞바다의 잠수함 출현으로 시작된 북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은 장장 49일간 전개됐다. 1968년 울진 무장공비 소탕작전의 58일에 이어 두 번째로 긴 기록을 남긴 작전이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 때는 9일, 1978년 충남 광천의 3인조 무장공비 사건 때는 38일이었다. 작전에서 군경은 26명의 무장공비 중 사살 13명, 생포 1명, 사살에 의한 집단 자살 11명 등 25명을 소탕했고, 1명은 월북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도 아군 11명과 경찰·예비군 각 1명, 민간인 4명이 희생되는 인명피해를 당했다.


당 시 침투한 무장공비 중 생포돼 유일한 생존자로 기록된 이광수(42)씨. 사건 발생 1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씨는 현재 경남 진해의 해군교육사령부 산하 충무공 리더십센터에서 정훈 교관(4급 군무원·서기관)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충무공 리더십센터는 충무공의 정신을 체득한 긍지를 가진 해군 리더를 양성해 대양 해군을 건설하겠다는 취지에서 옛 충무공 수련원을 모체로 2006년 창설된 교육기관이다.

 

5 월 14일 오전 진해 충무공 리더십센터에서 어렵사리 이광수씨를 만났다. ‘무장공비’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 우악스런 인상을 예상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전혀 달랐다. 170㎝ 가량의 작달막한 키에 탄탄한 체격,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동네 아저씨 인상의 40대였다. 악수를 건네는 그의 손은 크고 억셌다. 동료 부대원들과 체력 검정 활동을 마친 뒤 바로 샤워를 하고 와 붉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어렵다고 말씀드렸는데….” 앞서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가족들의 안부가 걱정된다”며 한사코 고사했었다. 지난 5월 11일 부대를 찾았을 때 그는 육군 모 부대에 정훈 강연을 나가고 자리에 없었다. 3박4일의 출장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역시 “어렵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계속했다. 그는 충무공 리더십센터 당파관(撞破館) 1층 그의 사무실도 공개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나중에….” 그의 고사가 이어졌다. 부대 앞에서 퇴근하는 그를 기다렸다. 부대 안에서는 훈련을 받는 사관후보생들의 군가와 고함이 끝없이 이어졌다.


침 투 당시 잠수함 조타수였던 이씨는 동해안 침투사건 이후 전향 의사와 함께 해군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도주하다 산을 넘으면서 강릉시의 모습을 봤다. 번화하고 자동차도 많은 모습은 북에서 듣던 것과는 달랐다. 체포된 뒤에는 서울 남산과 백화점 등을 구경했다. 서울 어느 가정집을 방문했는데 생활 수준이 무척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한의 생활상을 두루 보고 난 뒤 북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1997년 해군에 특채로 들어간 그는 해군교육사령부에서 교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박 재규 총장의 권유로 경남대에 입학한 것이 1999년 3월이었다. 당시 학교 측은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씨의 학력을 감안, 3학년 편입을 권유했으나 이씨는 남한 사회의 젊은이들과 캠퍼스 생활을 더 체험하고 싶다며 1학년으로 입학했다고 한다. 낮에는 교관으로, 밤에는 학생으로 주경야독 끝에 2003년 2월 법행정학부에서 학사모를 썼다. 곧바로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2005년 8월에는 안보정책학을 전공,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지금도 해군 정신교육 교관으로 북한군의 편제와 실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남 한에서의 학교생활에 대해 그는 만족스러워 했다. 그는 “처음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외로운 마음에 여러 차례 방황하기도 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됐다”면서 “요즘은 탈북자들을 만나면 학교에 가라고 권유한다”고 말했다.

자 신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그는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1999년에 임모씨와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두 딸을 두고 있는 상태. “나는 괜찮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좀 그렇잖습니까….” 이씨는 난감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두 딸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표정이다. 

 

앞서 그의 강연록 일부를 입수했다. 강연록에는 북한의 경제난, 햇볕정책, 전향에 대한 생각, 북한의 남침 가능성, 통일은 과연 이뤄질 것인가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 있었다. 햇 볕정책 이후 본격적으로 보내지는 구호물자들은 어떻게 사용되냐는 질문에, 그는 “현재 북한으로 수송되는 구호품이나 식량은 북측의 요구로 인해 해상으로 운반되고 있다. 육로로 수송할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이목이 집중되기 때문에 빼돌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이들 물자는 전쟁 물자로 우선 비축된다”고 했다.


탈 북자 가운데 고위급 간부가 눈에 띄게 적은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그만의 카리스마가 없습니다. 김정일은 아랫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평양 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차종이 벤츠라는 것, 세계 주류와 담배 수입량에서 북한이 상위에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고위급 간부라는 이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우리나라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들이 이런 생활을 포기하고 남한으로 넘어올 이유가 당장 있겠습니까.” 그는 “김일성은 본인의 우상화·신격화로 독재체제를 굳힐 수 있었지만 김정일은 달랐다”면서 “김정일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 싸움 끝에 1인자가 됐고, 오직 군사적 억압에 의해 통치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전 향 이후 다른 간첩을 만난 적이 있는가 같은 다소 민감한 질문에는 “말할 수 없다”면서 “현재 일어나는 반미 시위나 각종 데모 현장의 일선에서 활동 중인 이들은 대개 수상한 인물이다. 각 사회단체나 정치권에는 공작원 또는 이들에게 포섭된 인물이 상당수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이들의 활동은 성공적”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밖에 나가서 우리의 적은 누구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말한다”면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 는 전향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전향한 이들 중 100이면 99는 북한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의 실상을 알고 난 이후에는 김정일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서라도 북한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이다. 그 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날 체력 검정도 사실 대상자는 아니었지만, 참석해 땀이 흠뻑 날 때까지 뛰었다고 한다. 그는 술도 많이 마시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은 신의주. 북에 남겨둔 가족들 생각과 이곳에서 어렵사리 꾸린 가족의 신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두주불사를 부르는 것 아닌가 주변 사람들은 걱정과 안타까움을 함께 전했다.


그 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김정일이 죽는 순간이 북한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김정일의 서열 아래로는 서로 간의 견제가 너무 심해서 누구 하나 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김정일 사후에는 정쟁으로 자멸할 공산이 큽니다. 김정일 생전에 그의 주도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근본이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남북한의 전력 차이, 그로 인한 북한의 열세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 그 뒤는 나도 모르지만요.”


앞서 1996년 10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남과 북이 전쟁을 한다면) 북에서는 자폭정신을 바탕으로 사상적 우세를 많이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이긴다고 생각한다”고 밝힐 때와는 180도 달라진 얘기다. “언젠가는 좋은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때 편하게 얘기 하지요. 자꾸 이러시면 제가 많이 곤란해집니다. 저 갑니다.” 짧은 만남. 그는 자신의 싼타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훌쩍 떠났다. ▒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일지


1996년 9월14일 05시 북한 잠수함 26명 태우고 함남 퇴조항 출항
15일 21시
강릉 해안에 공작원 3명, 안내원 2명 상륙
17일 23시
잠수함 좌초 
18일 01시
잠수함 버리고 상륙
18일 01시35분
택시기사 이진규씨 좌초 잠수함 신고
18일 03시40분
군 진돗개 하나 발령
18일 16시30분
청학산에서 간첩 11명 자살 주검 발견
18일 16시40분
간첩 이광수 생포
19일 10시15분
단경골에서 간첩 3명 사살
19일 14시10분
칠성산에서 간첩 3명 사살
19일 16시10분
괘일재에서 간첩 1명 사살
22일 01시30분~06시40분
칠성산에서 간첩 2명 사살
28일 06시45분
강릉시 성산면에서 부함장 유림 사살
30일 15시18분
강릉시 묵계리에서 기관장 만일준 사살
10월 5일 10시30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야산에서 정찰조 2명 사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