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羅世(1320~1397) 延安君 일대기 / 조선왕조실록 나세 기록 / 나주 나씨 근원/ 서천 나주 나씨

이름없는풀뿌리 2015. 11. 9. 08:49

나세(羅世)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장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나세(羅世)
(元) 연우(延祐) 6년/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6년(1319년) ~ 조선(朝鮮) 태조(太祖) 6년(1397년) 9월 17일(음력)
시대 고려 말기(14세기) ~ 조선 초기
관직 직책: 판도판서(版圖判書), 교동만호(喬桐萬戶), 도병마사(都兵馬使),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경상도부원수(慶尙道副元帥), 밀직부사(密直副使), 서해도상원수(西海道上元帥) 겸 도순문사(都巡問使), 전라도상원수(全羅道上元帥) 겸 도안무사(都安撫使),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판숭녕부사, 해도원수(海道元帥), 문하평리(門下評理),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 경상도조전원수(慶尙道助戰元帥), 병선조전절제사(兵船助戰節制使),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도추포사(都追捕使)
봉호: 연안군(延安君)
주군 고려: 공민왕(恭愍王) → 우왕(禑王) → 창왕(昌王) → 공양왕(恭讓王), 조선: 태조



《태조실록》(太祖實錄)의 나세의 졸기(卒記)에 사망 당시 78세였다는 기록으로 거슬러 계산하면 생년은 원 연우(延祐) 6년, 고려 충숙왕 6년(1319년)이 된다.


원(元)의 귀화인으로 공민왕 12년(1363년) 홍건적의 난 진압의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1월에 최유의 난이 일어나 정주(定州)에서 적에게 잡혀간 도병마사 홍선(洪瑄)을 대신해 도병마사가 되고, 안우경(安遇慶) · 이귀수(李龜壽) · 지용수(池龍壽) 등과 함께 고려군 좌익을 맡아 싸웠다. 그러나 이후 교동만호(喬桐萬戶)로써 왜구가 쳐들어오자 막지 못하고 도망쳐 온 죄로 순위부(巡衛府)에 투옥되기도 했다.


공민왕 23년(1374년) 명(明) 조정에 바칠 말 2천 필을 요구한 고려 조정의 명을 거부하고 3백 필만을 보낸 제주(濟州)의 목호(牧胡)들을 토벌할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써, 나세는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지윤(池奫)의 휘하에서 부원수로써 종군했다.


우왕 2년(1375년) 8월, 고려로 들어오려는 심왕(瀋王) 탈탈불화(脫脫不花)와 그 어머니를 호종해 고려로 오고자 하는 북원(北元)의 군사들을 막기 위한 군사 지휘관으로 나세는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에 임명되었다(서해도부원수로는 밀직부사 박보로가 임명되었으며 박보로는 도체찰사를 겸했다).


우왕 3년(1376년) 9월에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가 되었는데, 10월에 왜구의 선단 50척이 웅연(熊淵)에 정박해 적현(狄峴)을 넘어 부령현(扶寧縣)을 약탈하고, 동진교(東津橋)를 불살라 고려군의 진군을 막자 나세는 변안열(邊安烈) · 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밤에 다리를 놓아 왜구를 공격했고 행안산(幸安山)으로 달아난 왜구를 사면에서 포위 공격해 이겼다.


우왕 4년(1377년) 3월, 왜구가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왕에게 글을 올려 왜구 토벌을 자청했고, 우왕은 그에게 내구마(內廐馬) 두 필을 내렸다가 또 열 필을 주었다. 나세는 조사민 · 이원계(李元桂) · 강영(康永) ·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쳐서 내쫓았으나, 5월에 왜구는 다시 남양(南陽)· 안성(安城) · 종덕(宗德)을 치고 50척의 선단으로 강화를 쳐서 부사(府使)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고려군 수졸 1천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수원(水原)까지 쳐들어왔다. 나세는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전함 50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쫓았는데, 강화 경계를 넘다가 물가에 숨어있던 한 여자가 나와 어느 집에 적의 첩자가 들어갔다고 고했고, 나세는 서둘러 여자가 가리킨 그 집을 에워싸고 불을 질러 숨어있던 적 29인을 태워 죽였다.


6월에 왜구의 선단 45척이 신주(信州) · 옹진(瓮津) · 문화(文化) 등의 현을 약탈하자 세는 원수 조인벽(趙仁璧) · 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쳤고, 8월에 다시 신주 · 문화 · 안악(安岳) · 봉주(鳳州)로 쳐들어온 왜구에 맞서 나세는 심덕부 · 양백익(梁伯益) · 박보로(朴普老)와 함께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재차 조정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조정은 이성계와 임견미, 변안열, 밀직부사 유만수, 홍징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삼아 나세에게 원군을 파견했다.


우왕 4년(1378년) 8월에 왜구는 연안부(延安府)와 해주를 거쳐 금주(衿州)와 양천(陽川)을 약탈하였다. 나세는 심덕부와 함께 전함을 거느리고 섬들을 돌며 왜구 수색에 나섰다. 이듬해 4월에 다시 왜구가 연안부를 쳐들어오자 김유(金庾)와 함께 전함 50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막았으며, 5월에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 왜구의 배 두 척을 잡아 모두 죽였다.


우왕 6년(1380년) 8월에 해도원수로써 심덕부 · 최무선(崔茂宣) 등과 함께 전함 1백 척을 지휘해 진포(鎭浦)에 정박해 있던 왜선 5백 척을 불사르고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 백성 330인을 구해냈다(진포대첩). 승첩을 들은 우왕은 사자로써 소식을 가져온 진무(鎭撫)들에게 은 50냥씩 하사했고, 개선할 때에 나세와 심덕부, 최무선 등에게 금 50냥씩을 하사했다.


우왕 7년(1381년)에 동강도원수가 되어 강의 요충지를 막게 되었다. 그러나 우왕 9년(1383년) 2월에 다시 해도원수를 거쳐 6월, 경상도조전원수로써 축산도(丑山島)에 들어온 왜구를 치라는 왕명에 머뭇거렸다는 이유로 광주(廣州)의 옥에 갇혔고 곧 풀려났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새로운 왕조의 무관으로써 복무했다. 태조 2년(1393년) 병선 건조 임무를 맡은 병선조전절제사(兵船助戰節制使)로 임명되어 친군위(親軍衛) 용사들을 거느리고 바닷가로 파견되었으며,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써 치사한 뒤에도 태조 6년(1397년) 다시 도추포사(都追捕使)로 임명되어 경기도와 풍해도 및 서북면 등지의 해적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이 해 8월 14일 용주(龍州)에 침입한 왜적을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9월 17일 진중에서 죽었다.

 

 

 

위키백과 나세 연대기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84%B8

 

나주나씨 홈피 소개 연안군 나세 연대기

http://cafe.daum.net/nanafamilytree/XI44/3?q=%BF%AC%BE%C8%B1%BA%C6%C4&re=1

 

 

 

나세(羅世) 1320(충숙왕 7)~1397(태조 6). (브리테니커 자료)

고려말·조선초의 장군. 왜구 격퇴에 공이 컸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을 물리쳐 2등공신이 되었고, 1374년 제주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최영(崔瑩) 등과 더불어 진압했다. 1375년(우왕 1)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가 되었고, 1376년에는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로 왜구를 격퇴하여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1380년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과 함께 진포(鎭浦:지금의 충남 서천)에서 화약·화포를 사용하여 왜선 500척을 쳐부수고, 그 공으로 문하평리가 되었다. 1381년 동강도원수, 1383년 해도원수와 경상도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 조선이 개국된 뒤 참찬문하(參贊門下)가 되었으며, 1397년 경기풍해도 서북면등처 도추포사(京畿豊海道西北面等處都追捕使)로 왜구를 막다 병으로 죽었다. 


 

나세(羅世) 1320(충숙왕 7)~1397(태조 6). (나주나씨 계간지에서)  

나세(羅世) 장군(將軍)은 나주나씨(羅州羅氏) 연안군파(延安君派)의 파시조(派始祖) 로서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초에 문과등과(文科登科) 하였으나 잦은 외침(外侵)으로 당시 국내(國內) 사정(事情)이 어지러워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과 더불어 무장(武將)으로 출전(出戰)하여 국난극복에 맹활약을 하였으며 우왕(禑王) 6년에는 해도원수(海道元帥)로서 1백척의 전함을 이끌고 서해안지방(西海岸地方)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倭)의 함선 5백척을 진포<(鎭浦)-서천(舒川) 금강입구>에서 격파함으로서 그들의 기세를 크게 꺾어 놓았다.

 

공(公)은 공민왕(恭愍王) 11년에 내침(來侵)한 홍건적(紅巾賊)을 제장(諸將)과 더불어 격퇴시킨 공(功)으로 이등공신(二等功臣)이 되었고 그 후로 내직(內職)에 있다가 외침(外侵)이 있을 때마다 출전(出戰)하였는데 내직(內職)으로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찬성사(贊成事)에 이르고 출전(出戰)해서는 경상도(慶尙道) 부원수(副元帥), 서해도상원수(西海道上元帥) 겸 도순문사(都巡問使), 전라도상원수(全羅道上元帥) 겸 도안무사(都安撫使),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경상도 조전원수(助戰元帥), 도병마사(都兵馬使) 등을 역임하면서 외적을 격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우왕(禑王) 삼년 왜(倭)가 강화(江華)에 침입하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나세(羅世)는 자원출전(自願出戰)하여 이를 물리쳤으며 그들이 다시 연안지방(延安地方)인 신주(信州), 문화(文化), 안악(安岳), 봉주(鳳州), 옹진, 해주(海州) 등지에 침입하자 이를 다시 쳐서 격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公)을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하고 해도원수(海道元帥)로 임명(任命)하여 바다를 지키도록 하였다. 왜(倭)는 이 후에도 서해안지방을 자주 노략질 함으로 공(公)은 이를 여러 차례 격퇴시킨 바 있으며 용강현(龍岡縣) 목관포(木串浦)까지 올라간 왜(倭)는 점차 남으로 철수하여 우왕(禑王) 6년 팔월에는 서천(舒川)의 진포에 5백척의 배로 배끼리 동아줄로 연결하여 진(陣)을 치고 일부병력으로 내륙의 주군(州郡)을 넘나들며 살인, 방화, 약탈 등 갖은 만행을 다하면서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붙잡아 갔다. 이에 왜(倭)를 추격해 내려간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는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심덕부(沈德符), 화포제조(火砲製造)의 선구자인 최무선(崔茂宣)과 더불어 전함 1백척으로 공격하였는데 탁월한 작전지휘와 화포의 위력에 힘입어 5백척의 적선을 모조리 격파하였다. 왜군(倭軍)은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었으며 일부 살아 있는 자는 도망치기 전에 포로로 붙잡혀있던 우리 백성들을 무차별 살해하였는데 그 시체가 산을 이룰 정도였다. 이때 오직 3백34명만이 적의 학살에서 탈출하였으므로 공(公)은 이들을 구출하였다. 진포(鎭浦)의 승전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우왕(禑王) 이하 만조백관이 크게 기뻐하고 승전을 치하하였으며 장수들이 돌아오자 왕은 잔치를 크게 베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상금으로서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 최무선(崔茂宣) 등 원수(元帥)들에게는 금 오십량, 정용(鄭龍), 윤송(尹松), 최칠석(崔七夕) 등 비장(裨將)들에게는 은 오십량씩 하장(下腸)하였다. 그리고 나세(羅世)는 진포대첩(鎭浦大捷)의 공으로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그 후 공(公)은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 해도원수(海道元帥), 경상도 조전원수(助戰元帥), 도병마사(都兵馬使) 등을 역임하면서 외적을 격파하는데 진력하였으며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이라는 정변을 일으켜 결국 고려왕조(高麗王朝)를 무너뜨리고 신왕조(新王朝)를 창업(創業)하자 두문불출 하였다. 이에 이태조(李太祖)는 수 차례 출사(出仕)할 것을 명(命)하였는데, 공(公)과 함께 진포(鎭浦)에서 공(功)을 세운 심덕부(沈德符)는 출사(出師)하여 공신(功臣)이 되었으나 공(公)은 불사이군(不仕二君)의 충정(忠情)으로 끝내 불응하였으며 이태조 육년 9월 16일에 78세로 운명하였다.

 

진포대첩(鎭浦大捷)은 우리 전함 1백척이 침략해 온 왜선(倭船) 5백척을 쳐부순 해전(海戰)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거둔 한산대첩에 버금 가는 위업(偉業)이나 이에 관한 전승비(戰勝碑) 하나 없이 역사(歷史)에서조차 희미할 따름이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문중 여러분이나 문중 외 여러분들도 아쉽게 잊혀지고 있는 역사적 위업을 바로 알고 이를 우리들의 후세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나세(羅世) 나주나씨대동보에서

공은고려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휘부의후예며령동정휘득충의4세손이요진사수영의제4자이며충숙왕7년경신서기1320년에연생하여유시로부터천자영민하고문무겸전하여공민왕초년에이미문과등제로한림벼슬을지냈다그러나당시의려조는격동하는국제정세아래내우외환이계속되었으니내로는간신배가충동되고외로는북호남침의입구로빈번하던때이라원수로하여금문신에안연할수없고드디어정전의야를구치하게하였다공민왕10년부터11년에걸쳐월강내침하는홍건적이국토를유린하게되매원수는분연궐기하여출진토적케되었으니차적을토평하는날원수는2등공신에등록되었다그후13년갑신에역신최유가북호를이끌어입구작란케되매최영이성계등과더불어이반적을격파주참하고23년갑인에는다시최영등과더불어탐라의제주도까지평정하여원수의무공이떨치게되었다이때대륙에는몽고족인원이망하고한족인명이창업하게되었으며공민왕이시해당하고우왕이즉위하게되자형세는일변하고서해연안에래침하는왜구의화가국민상하를괴롭히게되었으니원수의우국충성은왜구소탕에경주되었다우왕원년9월에왜적선50대가우인에래박하여상륙도량하게되매전라도상원수겸도안무사로출진하여10일에변안열조사민의제장으로더불어이구적을크게격파하였다날이갈수로왜구의래침이극성하여우왕3년정사3월에는경기도근해강화도까지침습하게되니원수는분연이죽음으로써국가의만일에보답할결심이라상서하고자진제병하여조수민등의제장과함께강화도에출진하여적을격파하고그후얼마안가서또다시입구한50여대의반도와대전하게되었다이러한왜적의창궐에조정에서느철원천도설까지나돌게되었으니그국면이얼마나위급하였음을알수있는것이다흉폭한적도는강화부사김인귀를살해하고우리백성천여명을포로로한다음수원에까지입구하는등실로국가의대환이었다이때도원수께서양백연등의제장들과더불어용진감투하여이적을무찔렀기때문에그위급을면할수가있었다그후적의예봉은서해를북상하여신주옹진문화안악봉주해주등의연해제읍을탈량하며그세더욱호세하게되니일로추격하여왜적소탕으로영명을크게떨친이성계의출진과제장의응원아래해주대전에서이를격파하고그전공에의하여원수는연안군에봉작되였다4년무오부터원수는다시심덕부등으로더불어연해도서의왜적을색출하기에영일이없었으며5년기미4월에는김해군김유와함께52척의함대를거느려연안부의왜적을무찌르고동년5월에는용강현목곶포에서적선을포획소멸하였다이때부터적세는방향을돌려남하하는데증원부대도가담하여6년경신추8월에그무리가진포금강입구로집결하여침구할때에는총세500척을이끌고내륙주군으로넘나들며살인방화겁탈등온갖만행을자행하여백성들의피해는막심하였다이에원수는우리나라화포제조의선구자인최무선과더불어용의주도한탄멸작전을행하게되었으니신예한아군의화기가적을향적할때도와적선을모조리소멸하였다진포의소탕전에서왜적을탄멸하고원수와최무선심덕부등의제장이개선할때국왕도크게기뻐하여대설하고연회환영하는동시황금을풀어제장을상주었으니이대첩이야말로청사에빛날위훈이라고할수있다려조가원수에게대하여문하평리겸동국도원수에찬성사라는영직을보낸것도결코과대한것은아니었다그러나불행한사실은왜적이옥산도를범하게되자우왕이원수에게출격을명하였지만즉행치않았기때문에왕명으로원수가투옥당하게되었다는사실이었다당시의기록이그이유를밝히지않았으나후세의사가로써살피건대이때이미려조의왕실이쇠하여우왕자신이황음무도를극하고충신현상의간언도불청하였다하니모호한기록이상의심각한이면이있었을것을짐작한다얼마안가서원수는석방되고9년계해5월에는다시해도원수로복직되여단양제천영주등지의왜적을추격코저출진하였으니원수의위국충정에는변함이없었음을증언하는것이다이후불과4-5년에우왕이내쫓기어천하는혁명의와중에휩쓸리게되고신왕조가수립되매2군을섬길수없다하여누차출사할것을명했으나불응했다우리를에워싼국제정세가조국의안위를근심케하는금일원수의후손들이어찌북호를격퇴하고왜적을섬멸하던원수의위대한행적을추모치않을것이냐공은78세를일기로이태조6년9월17일에종천하였다년구세심하여누겁병화로묘소를실전한고로1957년정유세에충남서천군마서면옥산리순제동사좌지원에설단하고매년음3월17일에세일제를향사한다배는통의군부인덕수이씨요전서군이준의녀이며생존년월일미상이다

 

 

조선왕조실록 나세장군 관련내용 발췌

 

태조 1권 총서 42번째기사
공민왕을 폐위키 위해 최유가 요양성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오니 이성계 등이 쳐부수다 
 

공민왕 13년(1364) 갑진, 처음에 여러 기씨(奇氏)들이 참형(斬刑)을 당하니, 기 황후(奇皇后)공민왕에게 감정(憾情)이 있었다. 본국(本國)의 최유(崔濡)원(元)나라에 있으면서 장작 동지(將作同知)가 되었는데, 여러 불량배(不良輩)들과 더불어 기 황후를 달래어 왕을 구함(構陷)하여 폐위(廢位)시키고 덕흥군(德興君)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세워 왕을 삼으려고 하여, 요양성(遼陽省)의 군사를 내어 정월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왔다. 왕은 찬성사(贊成事) 안우경(安遇慶) 등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여 물러와서 안주(安州)를 지켰다. 왕은 찬성사(贊成事)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날랜 군사[精兵]를 거느리고 안주(安州)로 빨리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指揮)하게 하고, 태조에게 명하여 동북면으로부터 날랜 기병[精騎]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밀직 부사(密直副使) 이귀수(李龜壽)·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지용수(池龍壽)·판도 판서(版圖判書) 나세(羅世)안우경(安遇慶)은 좌익(左翼)이 되고, 판개성(判開城) 이순(李珣)·삼사 좌사(三司左使) 우제(禹磾)·밀직사(密直使) 박춘(朴椿)태조는 우익(右翼)이 되고, 최영은 중군(中軍)이 되어 행군하여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패전하여 물러나온 것을 보고 그들이 겁내고 나약하여 힘써 싸우지 않은 것을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를 꺼리었다. 이때 적병이 이미 수주(隨州)달천(㺚川)에 둔쳤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이르기를, “내일의 싸움에는 그대가 혼자 이를 맡으시오.” 하니,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자기를 꺼림을 알고 조금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튿날 적병은 3대(隊)로 나누어 오매, 태조는 가운데 있고, 수하(手下)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을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으로 삼아, 각기 그 1대(隊)를 대적하게 하여 용기를 내어 적을 쳤다. 태조의 탄 말이 진창[泥濘]에 빠져서 심히 위태로왔는데, 말이 힘을 떨쳐 뛰어서 나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태조가 적장 두서너 사람을 쏘고 드디어 적병을 크게 부수었다. 태조가 늙은 장수 두 사람을 바라보니, 두 사람이 칼을 빼어 함부로 적병을 치고 있었다. 적병은 이미 패하여 달아났는데, 다만 먼지가 공중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5면  【분류】 *인물(人物)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외교(外交)
 
태조 1권 총서 62번째기사
태조가 서해도에 침구한 왜적을 해주에서 격퇴하다
8월, 왜적서해도(西海道)신주(信州)·문화(文化)·안악(安岳)·봉주(鳳州)를 침구(侵寇)하니 원수(元帥) 찬성(贊成) 양백익(梁伯益)·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나세(羅世)·지문하(知門下) 박보로(朴普老)·도순문사(都巡問使) 심덕부(沈德符) 등이 패전하여 장수를 보내어 조전(助戰)하기를 청하매, 우왕태조와 문하 평리(門下評理) 임견미(林堅味)·변안열(邊安烈),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만수(柳蔓殊)·홍징(洪徵)으로 조전(助戰)하게 하였다. 원수(元帥) 안열(安烈)·견미(堅味) 등이 해주(海州)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태조가 장차 싸우려고 투구를 백 수십 보(步) 밖에 놓고 시험해 이를 쏘아, 싸움에 이길까 못 이길까를 점쳐 보았는데, 마침내 세 번 쏘아 모두 꿰뚫었으므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알겠다.”하였다. 해주(海州)의 동쪽 정자(亭子)에서 싸우는데, 싸움이 한창일 때에 넓이가 한발[丈]이나 넘는 진창의 땅을 만났다. 태조의 말은 한번 뛰어서 지나갔으나, 따라간 사람은 모두 건너지 못하였다. 태조는 대우전(大羽箭)으로 적을 쏘았는데, 17번 쏘아서 모두 이들을 죽였다. 이에 군사를 놓아 이 형세를 이용하여 마침내 적군을 크게 부수었다. 이 싸움에서 태조가 처음에는 대우전(大羽箭) 20개를 가졌었는데, 싸움이 끝나매 화살 3개가 남았다. 측근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모두 왼쪽 눈초리를 쏘았다.” 하므로, 측근의 사람들이 나아가서 보니 다 맞았다. 남은 적군들이 험지(險地)에 의거하여 섶[柴]을 쌓아 스스로 튼튼하게 하였다. 태조는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음악을 베풀게 하니, 중[僧] 신조(神照)가 고기를 베어 술을 올렸다. 태조는 사졸들에게 명하여 섶을 불지르게 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찼다. 적군이 곤경(困境)에 빠져서 죽을 힘을 내어 충돌(衝突)하였다. 화살이 자리 앞[座前]에 있는 술병에 맞았으나, 태조는 편안히 앉아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김사훈(金思訓)·노현수(魯玄受)·이만중(李萬中) 등에게 명하여 이들을 쳐서 거의 다 죽였다. 이때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이성계(李成桂) 만호(萬戶)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를 묻고, 감히 태조의 군사에게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반드시 틈을 엿보고서야 들어와 침구(侵寇)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7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역사(歷史) / *군사(軍事)
 
태조 3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4월 21일(을미) 1번째기사
나세를 연해 등처 병선 조전 절제사로 삼아 친군위 병사를 거느리고 가도록 하다
나세(羅世)를 연해 등처(沿海等處)의 병선 조전 절제사(兵船助戰節制使)로 삼아 친군위(親軍衛)의 용사(勇士)를 모집하여 가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4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군사(軍事)
 
태조 7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4월 19일(임오) 1번째기사
검교 참찬문하부사 최무선의 졸기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이 졸(卒)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永州)요, 광흥창 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 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 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라고 하였다. 무선은 항상 〈중국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 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 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헌의(獻議)하여 마침내 성의가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이루어지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전함(戰艦)의 제도를 연구하여 도당(都堂)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내었다. 경신년557)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무선을〉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고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이 있는 줄을 뜻하지 못하고 배를 한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太祖)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 참찬(檢校參贊)을 제수하였다. 죽음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賻儀)하였으며, 신사년에 의정부 우정승·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이다. 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 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주니,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 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
 
태조 12권, 6년(1397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7월 3일(임자) 1번째기사
나세·최유경을 도추포사·도체찰사로 각각 임명,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나세(羅世)경기(京畿)·풍해도(豊海道)·서북면 등처의 도추포사(都追捕使)를 삼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유경(崔有慶)으로 경기·충청도 도체찰사를 삼고,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강중림(姜仲琳)으로 충청도 경차관을 삼아 병선을 거느리고 풍해(豊海)·서북면 연해(沿海) 등처에서 왜적을 잡게 하고, 한성 윤(漢城尹) 조익수(曹益修)를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술을 내려 주게 하였다.【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10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 / *외교(外交)
 
태조 12권, 6년(1397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8월 14일(계사) 2번째기사
왜적이 용주를 노략질하다. 18일에
나세 등을 명하여 잡게 하다
왜적용주(龍州)에 들어와 도둑질하므로, 18일에도 다시 나세(羅世) 등을 명하여 가서 잡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109면  【분류】 *외교-왜(倭)
 
태조 12권, 6년(1397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9월 17일(병인) 1번째기사
참찬문하부사로 치사한
나세가 출사하여 군대를 지휘하다가 죽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나세(羅世)가 군(軍)에서 죽으니, 나이 78이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110면 【분류】 *인물(人物)

 

 

 나주를 본향으로 하는 성씨들


1. 나주김씨(羅州金氏)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인 김굉의 맏아들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김굉은 신라(新羅)가 망하자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을 범공(梵空)으로 하여 불가로 귀의하였는데, 그가 입산하기 전에 고려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첫째 아들 김운발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나주군에 봉하고, 둘째 아들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운발을 시조로 하고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며서 누대에 걸쳐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긍지를 심었다.

 

2. 금성나씨(錦城 羅氏)

 

당 태종때 상서 좌복야 나지강이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발라현(나주)에 정착한 후 신라 때에 벼슬이 좌승상에 이르렀다. 그 후 신라 효공왕 때에 나경이 나주사손으로 봉해지고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나 후손의 기록이 없어져서 고려 초에 삼한벽상 일등공신인 나총례(羅聰禮)를 시조로 하였다. 그러나 영조 때에 무신흉변의 화를 면하려고 나주의 옛이름인 금성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그러나 나총례의 후손이면서 아직도 본관을 옛 본관인 나주를 바꾸지 않고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계통도 있고 안정, 군위, 수성 등으로 본관을 하는 계통도 있다.

    

3. 나주나씨(羅州 羅氏)

 

당 태종 때에 수선관을 지낸 나부(羅富)가 정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주에 살면서 그의 후손들이 나부(羅富)를 시조로 하고 여황(艅?)나씨로 하였으나, 고려 성종 때 여황(艅?)이 나주로 바뀌면서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을 알 수 없어 나득규(羅得?)를 중시조 1세조로 하고 있다. 

 

 

2012.05.07

족보는 나주나씨 내에 있는 각 파별로 발행한 파보를 제외한 대문중 차원에서 발간한 족보로 평균 50년만에... 보전하기 위한 조상의 공덕으로 오늘날 씨족의 계보를 알 ...

백익의 후예 나주나씨

시조 나부(羅富)는 원래 중국 예장(豫章)사람으로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주(羅州)에 정착, 고려조에 벼슬하여 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正義大夫監門衛上將軍) 지냈습니다. 그러나 시조 나부가 동래한 연대와 정착한 지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습니다. 1982년에 간행한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의하면 옛 가승 및 고려 말의 공조전서 진(璡)의 묘비문에 <당(唐)나라 태종 때 한림수찬관이 해외로 귀양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발라(發羅:나주의 옛이름)에 표착하여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고 씌어 있고, 용강(龍岡), 강화(江華), 수원(水原)에 있는 옛 문적에는 <시조 부(富)가 봉명(奉命)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체류중 송(宋)나라가 망하자 여황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라고 씌어 있어 시조의 동래 연대와 정착지점이 각 지역 또는 각 파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1975년에 주한중화민국 대사 나영덕(羅英德)이 제시한 <예장나씨광동파보(豫章羅氏廣東派譜)>에 의하면 나영덕 대사의 25대조인 금상(錦裳)에게 두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부(富)는 이름자만 씌어 있었고, 차자 귀(貴)는 송나라 소흥(紹興:1131~1162)연간에 황비의 난을 피해 남웅(南雄)으로 옮겨와 광동파 파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시조 부가 사신으로 왔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돌아가지 못했다는 연대(1127년)와 귀가 남쪽으로 옮겼다는 소흥 연간이 비슷한 연대이고 또 양측의 정황이나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광동파보에 나오는 부와 나주나씨 시조부가 동일인이라는 의론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부 이하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가능한  나득규를 제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습니다. 시조의 제단은 전남 나주군 나주읍 송월리에 있으며 매년 3월 15일에 향사합니다.

성원(姓原)-임진보참조(壬辰譜參照)
나씨(羅氏)는 멀리 백익(伯益)의 후예(後裔)로서 대대(代代)로 우(虞)나라에 사관(仕官) 하다가 주대(周代)에 이르러 대나씨(大羅氏)가 되어 성왕(成王)을 섬겨 유공(有功) 하였기로 나국(羅國)을 봉(封)하였더니 초(楚)나라 부용국(附庸國)(이곳은 박나상(泊羅上)에 있다)되었다. 후(後)에 초(楚)나라 굴씨(屈氏)에게 멸(滅)함바 되어 예장 나씨(豫章羅氏)가 되었다. (안(按)컨데 지지(地誌)에 예장(豫章)은 금중국강서성남창부(今中國江西省南昌府)에 있으며 굴씨(屈氏)의 사적(事蹟)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상재(詳載)되어있다.

중국나씨족보예장나씨전기(中國羅氏族譜豫章羅氏傳記)
시조(始祖)는 황재헌원씨(黃宰軒轅氏)요. 자(子)에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요. 자(자)에 전욱고양씨(○頊高陽氏)요. 자(子)에 축융씨(祝融氏)로부터 62세(六十二世)를 전(傳)하여 광정공(匡正公)이 주(周)나라에 유공(有公)하였음으로 나국(羅國)(금방주(今房州))에 봉(封)하여 대나씨(大羅氏)가 되었다. 우전 90세(又傳 九十世)에 학공(學公)이 나라를 ○탄당(○呑當)하고 도피(逃避)하니 자못 일인(一人)이 존재(存在)하여 전지백령2세(傳至百零二世)에 주공(珠公)이 한(漢)나라

초(初)에 대공(大功)이 유(有)하였음으로 예장군(豫章郡)(금남창부(今南昌府))을 봉(封)하였다.

 

이에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었습니다. 주공(珠公)으로부터 29세(二十九世)를 전(傳)하여 굉보공(굉보공)에 지(至)하여 골출국(骨出國)(일운골견국(一云骨見國))으로 천왕(遷往)하였다. 기후(其後)로 33세(三十三世)에 유일인공(有一寅公)하야 생오자(生五子)하니 개귀현(皆貴顯)하였다. 이때는 당말시인(唐末時人)이니 황소지란(黃巢之亂)으로 분산각처(分散各處)하였으니 중국지나(中國之羅)는 개일본야(皆一本也)라 하였다.

이조성원잡기(李朝姓原雜記)
나씨(羅氏)는 중국예장(中國豫章)으로부터 동도(東渡)하여 유휘부(有諱富)하야 고려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高麗正議大夫監門衛上將軍)으로 위시조(爲始祖)하고 위관나주(爲貫羅州)라 하였다.

구승(舊乘) 및 고려말공증전서공휘진묘비문중(高麗末工曾典書公諱璡墓碑文中)
당태종조(唐太宗朝)에 한림수○관(翰林修○官)이 해외(海外)로 원○중(遠○中)에 풍랑(風浪)으로 표류(漂流)하여 발나현(發羅縣)(금나주(今羅州))에 상륙급거(上陸伋居) 하고 위관나주(爲貫羅州)라 하였다.

나주는 본래 백제의 발나현 인데 신라때 금산군으로 고쳤다.견훤이 후백제라 칭하고 이 땅을 모두 차지했으나 궁예가 빼앗아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조 성종 14년에 절도사를 두었고 진해군이라 칭하여 해양도에 소속시켰다.현종 9년에 목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 조 세조 때는 진을 두었으며 1894년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하였고 1895년 행정구역이 바뀜에 따라 1군으로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주요 성씨로는 나. 양. 오. 정. 임. 박. 홍. 류씨 등이 있다.

나주 나씨의 파로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금양군파(錦陽君派), 연안군파(延安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가 있습니다. 나주나씨 분파는 고려조에 진사를 지낸 4세조 나수영(守永)의 다섯 아들을 파조로 하여 나누어지는데  나위(位)의 후손이 전서공파, 나계(桂)의 후손이 시랑공파, 나석(碩)의 후손이 금양군파, 나세(世)의 후손이 연안군파, 나원(源)의 후손이 직장공파 입니다.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인 위(位)는 고려 때 일찍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당시 혼란한 정국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나주에 은거자정(隱居自靖)하여 금양처사(錦陽處士)로 불리였으며, 그의 아들 동길(東吉)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증주 목사(甑州牧使)로 나가 자손들이 그곳에서 잉거(仍居)하면서 용강(龍岡)과 성주(成州) 등지로 이거(移居)하여 주로 관서북 (關西北) 지방에 집중 세거하게 되면서부터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일족(一族)을 이루었습니다.


시랑공파(侍郞公派)의 파조인 계(桂)는 고려에서 벼슬이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이르렀고, 자손들이 주로 경기도(京畿道)에 집중 세거하며 시랑공파(侍郞公派)를 이루었다. 그의 묘소(墓所)가 한양성내(漢陽城內)에 있는 것으로 기록에 전하나 실전(失傳)하여 1978년 후손들이 강화군 (江華郡) 하점면(河岾面) 장정리(長井里) 봉천산(奉天山) 남쪽에 6대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향사 (享祀)하고 있습니다.

금양군파(錦陽君派) 파조(派祖)인 석(碩)은 고려 때 사온서 직장(司 署直長)으로 나라에 공(功)을 세워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나주로부터 김제(金堤)로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김제파(金堤派)라고도 하였습니다. 그의 묘소(墓所)는 김제의 북조산(北造山)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후손들이 1954년 김제군(金堤郡) 금산면(金山面) 청도리(淸道里) 종산(宗山)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 향사(享祀)하고 있습니다.


연안군파(延安君派) 파조인 세(世)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상원수(全羅道上元帥) 겸 도안무사(都按撫使)를 거쳐 나라에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습니다, 묘소는 실전되어 후손들이 1957년에 충남(忠南) 서천군(舒川郡) 마서면(馬西面) 옥산리(玉山里) 순제동(荀堤洞)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하고 있습니다


직장공파(直長公派) 파조인 원(源)은 사온서 직장(司 署直長)을 지내고 나주(羅州)에 세거(世居)하고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 묘소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던 아들 진(璡)과 함께 나주 송현(松峴)에 있으며 3월 3일에 향사(享祀)하고 있습니다. 자료 : Dionysos-Bacchus 카페에서 발췌함,

 

 

나주나씨(羅州羅氏)  새만금일보 2014/12/17

 

 

시조 나 부(羅富)는 고려 때 중국에서 건너와 정의대부, 감문위상장군을 지낸 뒤 나주에 눌러 살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나 부를 시조로 하고 여황나씨로 하였다. 그 뒤 고려 성종 때 여황이 나주로 바뀌면서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나주의 다른 이름인 금성을 본관으로 한 금성나씨는 나주나씨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 구분하기 쉽게 나주나씨를 당라(唐羅), 금성나씨를 토라(土羅)라고 한다.

 

 1세조는 나득규이다. 고려 때 진사를 지낸 4세조 나수영의 아들 나 위, 나 계, 나 석, 나 세, 나 원 대에서 전서공파, 시랑공파, 금양군파, 연안군파, 직장공파 등 5개 파로 갈라진다. 나중소는 한일합방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한 인물이다. 1919년 김좌진, 서 일 등과 북로군정서를 창설하여 참모장이 되었고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사관양성소를 설치했다.

 

대종교의 초대 교주인 나 철(羅喆)(1863-1916)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부락에서 태어났다. 1891년 29세에 문과에 장원하여 승정원가주서가 되었으나 일본의 침략이 점차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우국지사들을 모았다. 그 뒤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해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1월 15일 경성 재동 취운정에서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군대황 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행한 뒤 단군 교포명서를 공포하였다.

 

이때부터 이 날을 중광절(重光節)이라고 부른다. 그 뒤 교세가 확장되어 교도수가 2만여 명에 달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남도 본사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뒤 나 철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유서를 남기고 순국한다.

 

나혜석은 화가, 소설가로 이름이 난 인물이다. 1921년에는 한국 여류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1918년‘경희’, ‘정순’등의 단편소설을 발표, 여류 소설가로도 등장했다. 개화기 대표적인 여성 인물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나세찬(羅世纘) : 문과(文科) 중종33년(1538) 탁영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나만영(羅晩榮,1652 壬辰生) : 문과(文科) 숙종19년(1693)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나사선(1652 壬辰生) : 문과(文科) 중종 29년(1534) 별시 병과(丙科),

나신국(羅藎國,1524 甲申生) : 문과(文科) 명종 21년(1566) 별시 병과(丙科),

나순영(羅純榮,1857 丁巳生) : 문과(文科) 고종 28년(1891) 별시2 병과(丙科) 등 모두 159명이 있다.

문과 28명, 무과 29명, 사마시 102명이다.

 

현대 인물은 나웅배(부총리, 국회의원), 나중배(육군대장), 나도석(서울농대교수), 나운영(연세대학장, 작곡가), 나종일(문학박사, 서울대교수), 나길조(대법원판사, 변호사), 나천수(서울고법판사), 나이수(민의원), 나창수(한국기계공업진흥회부회장), 나준수(정치학박사, 독일대교수), 나종수(판사), 나도성(재무부이사관), 나용수(국방대교수), 나갑수(국방대교수), 나성수(곡물검사소전남도지부장), 나민수(국세청국장), 나귀영(쌍용투자 광주지점장), 나복규(한일서예문화진흥회장), 나정웅(교수), 나상동(조선대교수), 나종주(동남사무기기 대표이사), 나채규(판사), 나금만(총경), 나영옥(총경), 나익진(상공부장관서리), 나호진(검찰지청장, 변호사), 나형수(검사), 나용주(전북도노동국장), 나상목(동양화가, 동국대교수), 나상균(이학박사, 울산대교수), 나종훈(판사), 나교희(단양군수, 중원군수), 나종일(문학박사, 교수), 나영균(문학박사, 이화여대교수), 나형수(검사), 나진선(한학자), 나제윤(한학자), 나병직(대통령비서관), 나종열(정보부비서관), 나명원(교수), 나필열(정치학박사, 교수), 나형열(신학박사, 교수), 나숭열(검사), 나도헌(의학박사, 보사부차관), 나도영(공주대교수), 나도상(조달청국장), 나항윤(대법원판사, 변호사), 나종오(국민대교수), 나규환(약학박사, 성균관대교수), 나병선(육군소장), 나상무(이학박사, 아주대교수), 나희필(육군중장), 나기봉(삼중교역사장), 나주택(익산군수), 나상윤(서울역장), 나지수(보해양조사장), 나선수(판사), 나석훈(전북도청과장) 씨 등이 있다. (무순, 전·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23세 集(집), 24세 燾(도), 25세 均(균) 圭(규) 基(기), 26세 鍾(종) 鈺(옥) 錠(정), 27세 永(영) 洙(수) 澈(철), 28세 相(상) 榮(영) 植(식), 29세 燁(엽) 熙(희) 然(연), 30세 重(중) 玹(현) 在(재), 31세 善(선) 鐸(탁) 鎰(일), 32세 汶(문) 浩(호) 洪(홍), 33세 杓(표) 根(근) 柱 ,34세 容(용) 燦(찬), 35세 培(배) 坤(곤) 起(기), 36세 銀(은) 鐵(철) 鎔(용), 37세 泳(영) 泰(태) 湜(식), 38세 炳(병) 枰(평) 采(채), 39세 烋(휴) 烈(렬) 杰(걸)이다.

 

본관 나주는 전라남도 나주시 지역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리었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불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나주 본관 성씨는 나주강씨(羅州姜氏), 나주김씨(羅州金氏), 나주나씨(羅州羅氏), 나주내씨(羅州奈氏), 나주노씨(羅州盧氏), 나주독고씨(羅州獨孤), 나주류씨(羅州柳氏), 나주문씨(羅州文氏), 나주박씨(羅州朴氏), 나주방씨(羅州方氏), 나주배씨(羅州裵氏), 나주백씨(羅州白氏), 나주서씨(羅州徐氏), 나주성씨(羅州成氏), 나주손씨(羅州孫氏), 나주송씨(羅州宋氏), 나주신씨(羅州申氏), 나주아씨(羅州阿氏), 나주양씨(羅州梁氏), 나주엄씨(羅州嚴氏), 나주염씨(羅州廉氏), 나주오씨(羅州吳氏), 나주이씨(羅州李氏), 나주임씨(羅州林氏), 나주임씨(羅州任氏), 나주장씨(羅州張氏), 나주전씨(羅州全氏), 나주정씨(羅州鄭氏), 나주정씨(羅州丁氏), 나주조씨(羅州趙氏), 나주주씨(羅州朱氏), 나주진씨(羅州陳氏), 나주차씨(羅州車氏), 나주추씨(羅州秋氏), 나주한씨(羅州韓氏), 나주호씨(羅州扈氏), 나주홍씨(羅州洪氏), 나주황씨(羅州黃氏) 등이다.

 

 집성촌은 전북 김제시 용동, 전북 정읍시 소성면 주천리, 전북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신흥리, 전남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전남 나주시 왕곡면 신포리,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전남 광양시 옥룡면 용곡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전남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전남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 전남 나주시 삼영동, 전남 나주시 노안면 장동리, 전남 나주시 석현동, 경남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 충남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충남 서천군 마서면 옥산리, 전북 김제시 명덕동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나주나씨는 1985년에는 총 23,284가구 99,090명, 2000년에는 총 33,600가구 108,13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1만여 가구,9천여 명이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26,712명, 부산 4,432명, 대구 2,453명, 인천 4,071명, 경기 12,934명, 강원 2,824명, 충북 2,321명, 충남 8,623명, 전북 9,333명, 전남 17,150명, 경북 3,747명, 경남 3,773명, 제주 716명이다. 전남 지역에 가장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27,202명, 부산 4,303명, 대구 2,854명, 인천 7,534명, 광주 7,138명, 대전 3,291명, 울산 1,088명, 경기 23,046명, 강원 2,103명, 충북 2,421명, 충남 5,013명, 전북 7,505명, 전남 7,644명, 경북 3,116명, 경남 3,111명, 제주 770명이다.  광주, 전남, 전북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 나주나씨 연원(淵源)

 

나주나씨의 시조는 고려중엽에 중국의 예장(豫章)에서 동도(東渡)하신 부공(富公)이다. 중국인은 모두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후손이며 나씨는 황제의 후손이다. 황제의 후손 광정공(匡正公)이 주나라에서 공을 세워 나국(羅國)(현 방주)에 봉해졌으므로 국명을 따라 나씨라는 성을 최초로 갖게 되었고, 그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漢)나라 초에 대공을 세워 예장에 봉해졌으므로 예장나씨의 시조가 되었다.

 

부공(富公)은 중국 북송 예장사람으로 금나라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급해 지자 봉명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북송이 멸망(서기 1127년)함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였으며, 전라도의 여황현(광산구 본량면)에 정착하였는데, 어질고 덕을 많이 베풀었으므로 호남의 망족(望族)이 되었다고 문헌에 전해오고 있다.

 

부공(富公)은 고려조에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란 직책을 받으셨다. 감문위는 중앙군의 일부로서 궁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부서이고 상장군은 그 부서의 책임자로서 정三품인 정의대부(正議大夫)란 직급이었다. 외국인에게 왕권과 직결되는 군의 고위직을 제수하였다는 것은 부공(富公)이 송나라에서 명망있는 무장이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始祖 富公의 중국에서의 행적은 문헌으로 검증되지는 않았으나 남창(옛 豫章)일대에 세거하는 백림파보(栢林派譜)에 나오는 羅富將軍이 나주나씨 시조인 羅富에 가장 근접한 실존인물이다. 羅富는 족보명은 仁老(인노)라 하며 관명이 富였다. 羅富는 대관 2년(서기 1108년)에 무귀위(武騎尉)가 되었고, 랑귀위(郞騎尉)를 거쳐 세직(世職)으로 알려진 운귀위(雲騎尉)가 되었다. 따라서 羅富는 나주나씨의 시조와 이름이 같을 뿐만 아니라 장군으로서 북송이 멸망시는 50대의 무인이었으며, 부인의 장지는 족보상에 기록되었으나 정작 본인의 장지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 동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주나씨의 관향(貫鄕)이 나주로 정해진 것은 조선초기로 보여진다. 이는 조선조 초에 여황현이 폐현되고 나주에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과방록(科榜錄)에 세종조에 급제한 나득강(羅得康)이 최초로 나주인으로 명기되므로서 조선초기에 이미 관향이 나주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 공민왕 원년에 급제한 羅世는 선조가 중국에서 왔으며 당시 중국은 원나라였으므로 元人이라 하였고, 공민왕 11년에 급제한 羅仲佑 [羅碩의 長子이며 羅得康의 父親)는 과방록에 貫鄕을 명시하지 안았다.

 

나주나씨는 富公을 시조로 하고 득규공(得규公)을 후1세로 하여 세계(世界)를 이어오고 있다. 후1세 득규(得규), 후2세 중윤(仲潤), 후3세 송기(松奇), 후4세 수영(守永)까지는 독자로 내려오다가 수영(守永)이 위,계,석,세,원(位,桂,碩,世,源) 등 5형제를 두었는데, 이분들은 모두 고려말에 관직에 나갔으며 각각 5대파조가 되었다.

 

나주나씨는 이들 다섯 분의 후예들로서 자손이 전국각지에 번창하고 학행덕업이 근 1000년 동안 끊이지 아니하여 많은 인재들이 문·무과에 등과하였고, 충·효·열과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부총리, 장관, 대법관, 외교관, 대학총장, 국회의원등 많은 활동가들이 속출하여 국가 및 사회발전에 공헌하고 있고, 그 자손들이 10만 여명에 이르고 있다.

    

 

□ 본관연혁(本貫沿革)

 

나주나씨의 본관은 羅州다. 나주는 본래 백제의 발라현인데 신라가 백제를 멸한지 27년만인 신문왕 5년에 발라현을 금산군이라 개칭하고 城을 금성(錦城)이라 하였다. 그 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이곳을 차지하였으나 후고구려의 궁예가 왕건을 시켜 해로로 금성을 공략하여 빼았고 나주로 고쳤으며, 고려조에서도 그대로 나주로 불렀다.

 

고려 성종 14년에 나주에 절도사를 두었고 진해군이라 칭하여 해양도에 예속시켰다. 해양도는 나주, 광주, 정주. 승주. 구주. 담주. 낭주 등의 주현이다. 현종이 원년에 나주로 걸안의 난을 피하였다가 귀환한바 있어 9년에는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조에서는 세조때 나주에 진(鎭)을 두었고, 인조시와 영조시 한때 금성현으로 강등하였다가 다시 나주로 복원하는 등 羅州와 錦城이란 이름을 번갈아 쓰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하였고, 1895년 행정구역이 바뀜에 따라 나주군으로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나부의 후손들이 나부가 동도하였다는 여황현(광산구 본랑면)에 세거하였다. 나주나씨의 본관이 나주로 정해진 것은 조선조 초기로 보여 진다. 이는 조선조 초기에 여황현이 폐현되어 나주에 합병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초기인 세종 원년에 급제한 나득강[羅得康, 나중우(羅仲佑)의 3子]이 과방록에 羅州人이라고 명기하므로서 나주나씨 급제자중에는 최초로 관향(貫鄕)을 나주로 밝혔기 때문이다.

 

※공민완 초년에 급제한 羅世는 선조가 중국에서 왔으며 당시 중국은 원나라였으므로 元人이라 하였고, 공민왕 11년에 급제한 羅仲佑[羅碩의 長子이며 羅得康의 부친]는 과방록에 관향을 명시하지 않았다.

    

 

□ 씨족사(氏族史)

 

나주나씨는 고려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高麗正義大夫監門衛上將軍)을 지낸 나부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나부는 중국에서 건너오셨으며, 어질고 덕이 많다고 하였다. 시조의 동도설에 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으나 나부가 송의 봉명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기 전에 송이 망하자 돌아가지 못하고 여황(현 광산구 본량면)에 세거하였으며, 羅州를 本貫으로 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나주나씨의 분파는 시조인 나부(羅富)의 후계 3~5대가 불분명하여 득규공(得규公)을 후1세로 하고 있으며, 영동정(令同正)을 지낸 후2세 중윤공(仲允公)과 후3세 송기공(松奇公)까지는 독자로 내려오다가 진사를 지낸 후4세 수영공(守永公)이 위(位), 계(桂), 석(碩), 세(世), 원(源) 등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다섯 아들을 파조로 하여 5대파로 나뉘어 지며, 각 파는 다시 분파가 계속되어 현재는 70여개에 이른다. 5대파란 나위(羅位)의 후손인 전서공파(典書公派), 나계(羅桂)의 후손인 시랑공파(侍郞公派), 나석(羅碩)의 후손인 금양군파(錦陽君派), 나세(羅世)의 후손인 연안군파(延安君派), 나원(羅源)의 후손인 직장공파(直長公派)를 말한다. 파조의 행적을 개관해 보면,

 

첫째인 羅位는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금양처사(錦陽處士)라 불렀고, 나주에 퇴거하였다.

 

둘째인 羅桂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다.

 

셋째인 羅碩은 사온서직장영동정(司醞署直長同正)을 지내고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으며, 나주에서 김제로 옮겼고, 후손이 그 곳에 세거하였다.

 

넷째인 羅世는 고려말의 대표적 무인중 한사람이다. 그는 공민왕 초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홍건적 침입때 출전하여 2등공신이 된 것을 비롯하여 경상도 부원수, 전라도 상원수, 서해도 원수, 해도원수, 경상도조전원수 등을 거치면서 주로 왜구토벌에 진력하였으며 연안군에 봉해졌다. 우왕(禑王) 6년에는 해도원수(海道元帥)로서 심덕부 최무선과 함께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선 500척을 완파하는 진포대첩을 총 지휘하였으며, 그 후 문하평리(門下評理)와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 현 수도방위사령관) 등을 지냈고, 조선조에서는 문하참찬(門下參贊)이 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치사(致仕)하였는데 왜구가 바다를 침범하자 노령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였으며 군문에서 78세로 순직하였다.

 

다섯째인 羅源은 공민왕시 사온서직장동정(司醞署直長同正)을 지냈다.

    

 

□ 분파명(分派名)

 

나주나씨는 始祖 富公을 시조로 하고, 후1세 득규公부터 후4세 守永公까지는 독자로 내려오다가 수영공이 5子를 두었고, 5명이 모두 관직에 나갔으므로 이들을 중시조로 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금양군파(錦陽君派), 연안군파(延安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 등 5大派로 최초로 분파되었으며, 각 파는 다시 수개에서 수십 개의 지파로 분파되었다. 5대파의 파명은 파조의 관직이나 나라에서 내린 봉직과 관련이 깊다.

 

• 첫째인 위(位)는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제수 받았으므로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평안도 용강과 성천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 둘째인 계(桂)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으므로 시랑공파의 파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경기도 강화 일대에 살고 있다.

 

• 셋째인 석(碩)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영동정을 지냈으며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으므로 금양군파(錦陽君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전라도 김제 일대에 살고 있다.

 

• 넷째인 세(世)는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므로 연안군파의 파조가 되었다. 그는 우왕(禑王) 6년(1380년)에 해도원수로서 금강하구의 진포에서 전함 100척으로 서해안으로 침입하던 왜구의 배 500척을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을 이용, 공격하여 완파하는 청사에 빛나는 무공을 세웠으며, 그 후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충청도의 서천 일대에 살고 있다.

 

• 다섯째인 원(源)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동정(同正)을 지냈으므로 직장공파의 파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전라도의 나주 일대에 살고 있다.

    

 

□ 주요 세거지 변천(變遷)

 

• 전서공파

첫째인 나위가 고향인 나주로 퇴거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후6세 나동길(羅東吉)이 증주목사(甑州牧使)로 간 이래 자손들이 용강과 성천을 위주로 평안도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성천에 자리잡은 것은 7세 나득춘(羅得春)부터 이며, 나득춘의 후손이 평남 순천지역으로 이거했으므로 자손 일부가 그곳에 살았고, 후손 일부는 성천에서 개천(价川)을 거쳐 평남 안주와 평북 선천 등지에 정착하고, 황해도 수안으로 이거하기도 하였다.

 

• 시랑공파

둘째인 나계의 자손들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을 역임한 후11세 나윤보(羅允寶)의 대를 전후하여 강화군 일대를 세거지로 삼았으므로 이 무렵부터 강화를 비롯한 경기도 일원에 터를 잡았다.

 

• 금양군파

셋째인 나석이 나주로부터 전라북도 김제로 이거하였으며, 그 후 후손들은 김제일대에서 세거하였다. 후손 중 일부가 정읍의 소성(所聲) 등지에 옮겨가 살았고, 일부는 경기도 시흥의 안산으로 옮겼으며, 일부는 강원도 원주, 평창, 영월 등지에 정착하였고, 일부는 평북 희천으로 이거하였다. 또한 후손 일부는 경기도 양주군(現 서울시 증산동)과 이천, 진천, 청주 등지에 정착하였다.

 

• 연안군파

넷째 나세의 후손들은 주로 충청남도에 살았다. 8세 나효기(羅孝基)의 후계가 서천에 세거하였고, 11세 나치명(羅致明)의 후계는 공주에 세거하였으며, 13세 나의국(羅義國)의 후손은 보령에 자리를 잡았다.

 

• 직장공파

다섯째인 나원이 정국의 혼란을 피해 나주로 물러난 이후 자손들은 나주일대에 세거하였다. 후손 일부가 경남 함안, 진해 등에 정착하였고, 일부는 전북 고창, 무주, 장수 등지로 옮기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는 함평, 영암, 보성, 해남 등지로 옮겼으며, 18세 나윤강(羅允綱)이 영조 무신년 화를 피해 경북 의성으로 가 후손이 그곳에 세거하였다.

    

 

□ 錦城羅氏와의 관계

 

전남 나주에는 금성부원군 나총례를 시조로 하는 금성나씨와 고려때의 감문위 상장군 나부를 시조로 하는 두 집안의 나씨가 있어, 상대(上代)의 계보를 놓고 혼란과 이설이 있었으나 서로 계통이 다른 종씨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나주에 나씨가 양족이 있으니 중국 예장으로 부터 동도한 후 휘 부(諱 富) 감문위상장군을 시조로 모시는 나주나씨와, 가라국 수로왕의 후손인 나총례(羅聰禮)로 하는 금성나씨는 고려조에 거평으로 관향하다가, 나주로 관향을 고치고 숙종조 이래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으로 다시 관향을 고친 속칭 토박이 나씨이다.

 

양씨족은 서로 다른 나씨로 확연히 밝혀졌으며, 전·근대를 통하여 연혼한 사실이 양가보첩에 자세히 등재되어 있으며, 금성나씨의 현조인 송재 나세찬은 나주나씨 도강감무공(道康監務公) 설(設)의 외손이며, 나주나씨 금봉공의 자부가 금성나씨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의 손녀이며, 나주나씨 석호공의 자부와 남간공의 계비가 모두 금성나씨이다. 또한 나성군의 화상찬(畵像讚)을 찬(撰)한 금성나씨 나계종은 죽헌 나성군을 나공(羅公)이라 호칭하였음은 종친이 아니라는 반증으로서 입증된다.

 

1968년 3월24일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나주나씨 대표(나정균)등 3명과 금성나씨 복관대동보소의 대표(나승옥)등 3명이 전남 나주군 문평면 남산리 금성나씨 복관대동보소 나환주 집에서 양나씨의 전례 문헌을 신중히 재 고증한바 현재 나주이든 금성이든 간에 휘 총예를 시조로 하는 나씨와 휘부를 시조로하는 나씨가 서로 다른 뿌리임을 자세하게 밝혀 양나씨 대표가 확인하고 약정서를 작성 서명날인 하였다.

(임술대동보)

    

 

□ 행열자표

 

• 후손이 번성하여 그 이름자가 서로 같거나 선대의 휘자에 범촉된 경우가 있으니 앞으로 각파가 혼용되지 않도록 오행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世數別(세수별)로 3자씩 정하였으니 삼가 준수하여 작명하여야함(임술대동보)

 

• 行列字表

 

• 나주나씨 종친중 일부에서는 “相“(상)자를 돌림자로 쓰고 있으나 세수가 각각 다른데 전서공파, 시랑공파, 연안군파는 23世이고 금양군파는 25世이며, 직장공파는 28世이다.

 

• 초면 인사 때에는 상기 내용을 유의하여 세수를 확인하여 결례되는 일이 없도록 바랍니다.

 

• 출생신고 때의 성명 한자는 호적법 시행규칙 제37조의 규정에 의거 한자로 신고하여야 합니다.

 

• 羅氏의 羅字는 두음법칙에 의거 “나”로 표기하기로 하였다.

 

(1993년11월27일 나주나씨 중앙종친회에서 결의).




주요 현대인물


1. 전서공파(典書公派)

•나인협(羅仁協) : 호.홍암(泓菴)3.1독립. 33인중 1인

•나용환(羅龍煥) : 호.택암(澤菴)3.1독립. 33인중 1인

•나석주(羅錫疇) : (1892ㅡ1926)義士는 3.1運動 主動 拳 銃團, 韓人愛國團,義烈團에가입 機關爆破 軍資金募金, 1926년 12월 28일 오후2시 東洋拓植會社, 朝鮮殖産銀行에 爆彈投擲爆破, 日人多數殺害後自決함, 建國功勞勳章追敍, 外換銀行뜰에 銅像 建立.

•나중소(羅仲昭) : 獨立軍 北路軍政署 參謀長, 靑山里 戰鬪에서 金佐鎭將軍을 보좌하여 日軍을 大破

•나운규(羅雲奎) : 호.춘사(春史). 映畵監督. 映畵아리랑 原作. 主演. 監督. 主題曲아리랑은 先生이直接 作詞

•나희필(羅熙弼) : 육군중장(陸軍中將)

•나동환(羅東煥) : 육군중령(陸軍中領)

 

2. 시랑공파(侍郞公派)

•나근형(羅根炯) : 인천광역시 교육감(敎育監)

 

3. 금양군파(錦陽君派)

•나용균(羅容均) : 호는 白峰 24歲때 日本 早稻田大學在學中(1919년2월8일) 在東京 朝鮮留學生 獨立宣言을 主導하고 必要 經費一切을 調達한 嫌疑로 日警에 逮捕 投獄, 上海로 亡命 大韓民國臨時議政院議員으로 活躍하면서 上海에서 開催된 國民代表者大會 準備委員. 英國 런던大學에서 經營學 專攻. 上海臨時政府로 歸任活躍하다 解放後 歸國 韓國民主黨 事務局長. 1948년 全北井邑에서 制憲國會議員으로 無投票當選. 國會內務治安委員長. 1950年 美議會에서 韓國援助案을 否決함에 國會議長 申翼熙氏와 함께 國會代表로 渡美하여 援助案 復活에 成功. 1958年 國會에서 U.N總會代表로活躍. 1960年 保健社會部長官으로 入閣. 先生은 制憲國會議員을 始作으로 3,4,5,6代議員을 歷任하면서 國會副議長까지 역임. 1964年 國會에 國際議員聯盟支部를 設置하고 同支部 副議長을 하셨으며, 1964年 덴마크 코팬하겐에서 開催된 國際議員聯盟大會에 參加하여 同大會 副議長에 被選. 1966年 서울에서 開催된 아세아 議員聯盟大會에서 運營委員長에 被選. 現在 國會에는 每年 先生의 德望과 業績을 기리기 爲하여 雅號을 따서 白峰賞을 制定. 良心的이고 模範的인 國會議員을 選拔하여 每年 施賞하고있다.

•나익진(羅翼鎭) : 號는 覺堂이며 延禧專門 商科를 卒業 東亞貿易(株)을設立하였으며, 先見之明이 있어 韓國貿易協會를 創立하는데 先導적 役割, 遞信部次官, 商工部長官, 商工政策을 刷新, 住宅營團理事長. 産業銀行總裁을 歷任, 通商使節團長과 또는 各種國際會議에 參席하여 國威宣揚에 힘썼다. 그리고 金融通貨委員으로 金融政策樹立에 이바지함은 물론 數百編의 經濟政策 關聯 論文을 발표하여 經濟政策方向 決定에 寄與하였다. 이러한 功勞가 認定되어 大統領으로부터 産業포章과 銀塔産業勳章을 받았으며, 延世大에서 名譽經濟學博士 學位를 받았다. 그리고 死後에 政府에서는 金塔産業勳章을 追敍하였다. 著書로는 韓國經濟의 理論과 實際 外 여러卷이 있다.

•나호진(羅虎振) : 검찰인천지청장.변호사.중앙종친회장

•나종훈(羅鍾勳) : 사법고시 합격 판사(判事)변호사.

•나진선(羅鎭璇) : 유학자.조선세기저자.금석문고권위자

•나상목(羅相沐) : 화백.원광대미술대학 학장

•나상균(羅商均) : 이학박사.울산공대총장

•나종일(羅鍾一) : 서울대 物理大政治學科 卒業 英國켐부리지대 정치학과卒業. 政治學博士取得 慶熙大 政經大學長, 國情院1次長, 駐英國大使을 歷任, 大統領 國家安保補佐官에 選任, 주일대사, 우석대학교 총장

•나병술(羅炳述) : 교육학박사.목원대 교수

•나종우(羅鍾宇) : 문학박사.원광대교수. 원광대박물관장

•나국주(羅國柱) :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辯護士)

•나만수(羅萬洙) :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辯護士)

•나 현(羅鉉) : 사법고시 합격. 판사(判事), 변호사

•나의균(羅義均) : 공학박사 군산대 교수

•나우진(羅禹鎭) : 김제시 의회 의장(議長)

•나용태(羅龍泰) : 육군대령(陸軍大領)

•나순오(羅淳五) : 육군대령(陸軍大領)

•나종삼(羅鍾三) : 육군중령(陸軍中領), 제주4.3사건위원회 전문위원.

•나태수(羅泰洙) : 육군중령(陸軍中領)

•나각순(羅恪淳) : 문학박사. 서울시사편찬전임연구원

•나윤영(羅潤英) : 의학박사.치과의원 원장

•나일주(羅一柱) : 육군중령(陸軍中領)

•나태균(羅泰均) : 의학박사. 나산부인과 원장

•나옥주(羅玉柱) : 총경 전북순창경찰서장

•나화종(羅華鍾) : 전북경찰청 총경 경찰서장

•나유인(羅攸仁) : 전북경찰청 총경

•나상수(羅祥洙) : 강능 감정원장

•나제안(羅濟安) : 정보통신부 조달사무소장

 

4. 연안군파(延安君派)

•나항윤(羅恒潤) : 대법관. 변호사(辯護士)

•나희집(羅熙集) : 3대 국회의원(民議員)

•나도황(羅燾晃) : 고등고시 합격. 대법관(大法官)

•나숭열(羅崇烈) : 사법고시 합격. 검사(檢事)

•나병선(羅炳扇) : 육군중장. 국회의원(國會議員)

•나도룡(羅燾龍) : 육군중령(陸軍中領)

•나상훈(羅相勳) : 육군대령(陸軍大領)

•나대환(羅大煥) : 육군중령(陸軍中領)

•나학열(羅學烈) : 육군중령(陸軍中領)

•나득환(羅得煥) : 육군중령(陸軍中領)

•나종갑(羅鍾甲) : 육군중령(陸軍中領)

•나용집(羅庸集) : 공학박사(工學博士)

•나도헌(羅燾憲) : 보사부차관.국립의료원장

•나필열(羅必烈) : 정치학박사(政治學博士)

•나규환(羅圭煥) : 의학박사(醫學博士)

•나영환(羅英煥) : 공학박사(工學博士)

•나중열(羅重烈) : 의학박사(醫學搏士)

•나극환(羅克煥) : 공학박사(工學博士)

•나행열(羅珩烈) : 신학박사(神學博士)

•나수균(羅秀均) : 의학박사(醫學搏士)

•나동균(羅東均) : 의학박사(醫學博士)

•나종갑(羅鍾甲) :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辯護士)

•나봉균(羅奉均) : 의학박사(醫學搏士)

•나만균(羅滿均) : 공학박사(工學博士)

•나락균(羅樂均) : 철학박사(哲學博士)

•나훈균(羅勳均) : 물리학박사(物理學博士)

•나석환(羅碩煥) : 농학박사(農學博士)

•나긍균(羅肯均) : 의학박사(醫學搏士). 삼성치과원장

•나사균(羅司均) : 공학박사.L.G반도체(주)선임연구원

•나상선(羅相璿) : 서천군의회 의장(議長)

•나종하(羅鍾河) : 항일지사(抗日志士)

•나대집(羅大集) : 항일지사(抗日志士)

•나상도(羅相度) : 항일지사(抗日志士)

•나병소(羅秉素) : 항일지사(抗日志士)

•나상우(羅相禹) : 항일지사(抗日志士)

•나병갑(羅秉甲) : 항일지사(抗日志士)

•나두환(羅斗煥) : 항일지사(抗日志士)

•나인균(羅仁均) : 법학박사(法學博士)

•나소열(羅紹烈) : 서천군수. 새천년민주당 서천위원장

•나도연(羅燾連) :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辯護士)

•나도희(羅燾희) : 보사부장관 효자상 수상

 

 

5.직장공파(直長公派)

•나 철(羅喆) : 호 홍암(弘巖) 1891(高宗辛卯)년 文科에 合格하여 記注書와 承文院副正字 歷任. 1893(高宗癸巳)년에 임금이 두차레에 말두마리下賜. 文章과 書藝가 卓越하였고 憂國衷情에 불타는 志士로 1917년에 數次 日本을 往來 同志를 규합 賣國的인 5條約大臣들을 聲討하고 謀殺 直前에 發覺되어 5개월간의 獄苦와 10년간 智島에 流配되었다. 1909(己酉)년 1월 15일에 서울 古經閣에서 神命을 받드러 大倧敎 初代 都司敎가 되어 布敎하면서 獨立運動을 함께하여 獨立軍을 創設하는데 主動役割을하였다. 黃海道 九月山 三聖祠 修道室에서 54世로 殉死.

•나혜석(羅惠錫) : (1896ㅡ1948)호는 정월(晶月), 1896년 4월 28일 羅基貞의 4男 1女中 외동딸로 水原에서 태어나 “女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친 우리나라 最初의 女性畵家, 最初의 女性小說家, 女性最初로 世界一周를 하였는가하면. 3.1運動에 加擔, 5個月의 獄苦를 치른 獨立運動家이다. 進步的 思想家로 오늘의 韓國女性 女權確立의 代母다. 自己時代를 가장 正直하게 살다간 불꽃의 女人으로 2000年 2月 文化의 人物이다. 水原市에서는 팔달구 인게동에 나혜석 거리를 造成

•나길조(羅吉祚) : 고등고시 합격. 대법원판사. 변호사

•나순채(羅純埰) : 고등고시 합격. 판사

•나선수(羅 ) :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

•나종일(羅鍾一) : 문학박사. 서울대 교수.

•나민수(羅緡洙) : 경기대교수. 경기대 총장

•나인수(羅仁洙) : 나주시 시장(民選)

•나천수(羅千洙) : 사법고시 합격. 판사. 강능지원장

•나창수(羅昌洙) : 기술고시 합격. 국장(局長) (소포파)

•나종태(羅鍾泰) : 사법고시 합격. 법무관(法務官)

•나일영(羅一英) : 기술고시 합격

•나도성(羅道成) : 행정고시 합격

•나복규(羅福圭) : 韓.中.日 서화진흥회 회장

•나채규(羅采圭) : 사법고시 합격. 판사(判事), 변호사

•나판수(羅判洙) : 4대 국회의원(國會議員)

•나웅배(羅雄培) : 11대 국회의원. 제무부장관. 상공장관 아주대총장. 경제부총리

•나중배(羅重培) : 육군대장. 외교관(大使)

•나기수(羅起洙) : 육군대령

•나균섭(羅均燮) : 육군대령

•나금만(羅金萬) : 치안감. 도로교통안전협회 감사

•나성남(羅成南) : 경무관.

•나영수(羅泳洙) : 서울시 교육위원회 의장

•나종석(羅鍾錫) : 나주시의회 의장

•나춘균(羅春均) : 의학박사, 반도정형외과 원장

•나상동(羅相同) : 공학박사. 공업기반 기술위원회위원

•나난수(羅暖洙) : 강원도 병무청장

•나상신(羅相臣) : 미시칸대 전자공학박사. 아주대교수

•나이균(羅二均) : 광주 민주화 유공자. 평민당 및 신민당 서울 금천구 지구당위원장.

•나종현(羅鍾絃) : 농학박사. 흥농종묘 부장

•나선수(羅鮮洙) :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

•나경원(羅卿瑗,女) : 사법고시 합격.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17, 18대), 한나라당 대변인

•나경선(羅瓊善 女) : 사법시험 합격. 판사 (송도파)

•나창수(羅昌洙) : 사법시험 합격

•나상훈(羅相勳) : 사법시험 합격. 군 법무관 (소포파)

•나상곤(羅相坤) : 행정고시 합격 (석호파)

•나성수(羅性洙) : 곡물검사소 전남도지부장 (남간파)

•나춘홍(羅椿弘): 光州 우리은행 지점장 (남간파)

•나현수(羅賢洙) :(대한민국 산업혁명의공훈자 羅州出生) 대한석탄공사課長.現代건설課長 국내수직,수평 갱터널 一인 보유자.중동건설참여..(석호파)

•나광수(羅光洙) : 공군사관학교 공군중령 戰鬪機 조종사 中小企業社長 (석호파)

•나천수(羅千洙) : 전남대학교農學士 행정학 碩士 전라남도 통상협력과장.정보통신擔當官歷任 한학자( 羅州羅氏 뿌리이야기)집필 (석호파)

•나익수(羅益洙) : 숭실대학원 碩士 大學敎授 (석호파)

•나승수(羅昇洙) : 서울工大 造船과대학원졸업 工學博士 木浦大學敎授 (석호파)

•나운영(羅運榮) :(연세대학장, 작곡가) 유관순.아!가을인가.가려나....(송도파)

•나 건 (羅 鍵)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연세대 법정대학정치외교학(運慶)교육관대표 (송도파)

•나건영 (羅建榮) :서울醫대 敎授 의학박사 (송도파)

•나종구 (羅琮球) :의학박사 서울 여의도 聖母病院 (송도파)

•나현신(羅炫信): 서울大學校敎授 (습독파)

•나상섭(羅相燮) : 중앙대학교 화학공학과졸 서울대학교 化學工學科博士(능허파)

•나상엽(羅相燁) :東國대학교 工科대학博士 남서울대학교敎授

•나영균 (羅英均, 女):이화여대교수 영문학자(부사파)

•나현화 (羅炫華. 女) 영국런던대학킹스컬러지醫大수학.외과박사(남간파)

•나해원 (羅海元 ,女)영국옥스포드대학생화학석사,모건스탠리은행생명공학주식연구원 (남간파)

•나정원 (羅元梃, 女)영국쌩마틴대학 패션디자인과졸업(남간파)

•나춘수 (羅春洙) 남부대학원공학박사 남부대학교수,중앙종친상임이사.(남간파)

•나희수 (羅希洙) 건국대학교 경제학博士(남간파)



서천군에 거주하는 羅氏 들의 입향조(入鄕祖)와 그 후손들

- 나 주 운 -


  이곳 서천군은 충청남도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으로는 보령시와 부여군과 인접하고, 북고(北高) 남저(南底)의 지형적 특성을 갖은 곳으로 비옥한 평야가 널리 펼쳐져 예로부터 살기 좋고 인심 좋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 서천지역에 고려말과 조선조 초부터 두 본관의 羅氏가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동부지역에는 금성나씨로 한림(翰林-고려 문종대 직관표에 한림은 종三品관)나봉(羅奉)공 께서 고려가 망하자 가솔을 이끌고 한산땅 산성동(오늘날 기산면 영모리)에 정착하여 은둔생활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맑은 날 새벽이면 뒷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눈물지으니 옷소매에 얼룩이 지워질 날이 없다는 말을 이태조가 듣고 아깝게 여겨 여러번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절을 지켜 끝내 일어나지 않고 생을 마치셨다.


  서부지역에는 나주나씨가 조선 세종조 말엽 동지의금부사를 지낸 나효기(羅孝基)공께서 증조부인 나세(羅世)장군이 해도원수로 금강의 진포(서천앞 포구)에 나타난 왜구의 적선 500척을 심덕부, 최무선 장군과 같이 화포로 전소시키고 대승을 거둔 진포해전의 전승지가 마서 앞 금강이므로  증조부의 전승지를 기리는 마음에서 서천군 마서면 주변에 정착했다고 한다.   필자는 금성나씨 파조인 한림공께서 한산으로 낙향하신데 대하여 항상 의문을 갖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천리 길 먼 곳에 가족을 이끌고 이사하는 데는 아무런 연고(緣故)없는 곳에 가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 한 예로 한산지역에는 정변 또는 사화로 인하여 한산이씨의 사위들이 처가를 찾아 피신하여 정착한 후 그 후손들이 번연하여 대성(大姓)으로 발전한 예가 많은데 그  몇 성씨만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〇 교하노씨는 낭장을 지낸 노윤보(盧允寶)가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사촌 남매지간으로 고려가 망하자 처가 근처인 마산면 마명리에 정착한 후 그 후손이 크게 번연하여 노씨로는 전국 최대 집성촌을 기산면 두문 5동에 두고 있다.

〇 고령박씨는 면천군수 박세광(朴世光)이 목은 이색의 현손(玄孫)인 이서(李胥)의 사위이고 대사간 이윤번(李允蕃)과 남매간으로 갑자사화를 피하여 처가 근처인 화양면 추동리에 피화하여 한산면 송산리와 기산면 두북리에 집성촌이 있다.

〇 고령신씨는 신영원이 목은 이색의 현손 이윤수의 사위로 처가근처인 화양면 활동리에 정착 하여 그 후손들이 문명(文名)을 떨쳐 8인의 문장을 배출 하였다.

안동권씨는 송화현감 권인(權靭)은 동생 권필(權畢)이 광해군의 비(妃) 유씨의 척족들이 방종함을 보고 궁류시를 지어 비방하자 광해군이 대노하여 권필은 친국을 받고 귀양 가다 장독으로 죽고, 그의 형 권인은 대사간 이윤번과 남매간이므로 처가 근처 화양면 완포리에 피신하여 정착 하였는데 그 후손이 크게 현달하여 네명의 판서(判書)를 배출 하였다.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난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이거하는 데에는 대개의 경우 처가 근처로 가는 것을 볼수 있는데 한림공 선조님은 묘소도 실전하고 배위의 기록도 없어  그때의 정황을 알수 없으나 분명 처가(妻家)가 한산이씨(韓山李氏)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른 성씨들은 처가 근처로는 자리를 잡았어도 한산이씨의 중앙에 터를 잡지는 못했으나 한림공께서는 한산이씨 터밭의 중앙에 정착하셨다.  한산 성안은 한산이씨가 대대로 호장을 지냈고 바로 그 옆에 시조 호장공의 묘소가 있으니  그곳이 본 고장이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고촌리가 가정 이곡(李穀)이 태어났고 양경공 이종선(목은 이색의 三子)의 효자 정문이 있는 곳이니 이곳이 한산이씨 들의 본관지(本貫地)이기도하다.


한림공 선조께서 정착하신 산성동(남은암)에서 한산 관아와 호장공의 묘소와는  東으로 1키로, 가정 이곡이 태어난 고촌리가 北으로 2키로, 목은 이색이 학문을 배웠다는 곳, 즉 유허비가 있는 곳이 南西로 800미터, 가정 이곡의 묘소가 南으로 1키로, 목은 이색의 묘소와 문헌서원이 北西로 600〜700미터인 것을 보면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으로 유추 된다.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볼수도 있다. 한림 나봉(羅奉)공과 죽헌 나계종(羅繼從)공과는 17촌 숙질간인데 죽헌공은 제학(提學-고려 문종대 관직표에 從二品)을 지냈다. 죽헌공(竹軒公)은 가정 이곡(李穀)의 사위이고, 목은 이색(李穡)과는 남매간이 된다, 한림공은 목은 이색과는 연녕 차이가 있겠지만 목은의 아들 삼형제와는 같은 조정에서 공무를 봤을 것이며 친숙했을 것으로 여겨져 이분들의 주선으로 한산으로 낙향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후 한림공 후손들은 한림공께서 이조에 불복함으로서 현달하지 못하고 영체하게 지내왔다.  그 후손들은 진사공파와 옥동파로 분파 되었는데 진사공파는 지파(支派)로 막동파, 향정파, 사성파, 신기파로 분파되고, 옥동파는 번연하지 못하고 단계로 내려왔다.


금성나씨는 서천군에 거주하는 종인 총 가구수는 205호이며 집성촌은 기산면 신산리에 40호, 막동리에 26호, 한산면 동산리에 10호, 시초면 후암리에 8호가 있다.  나주나씨는 연안군 나세 (羅世)장군의 후손을 연안군파 또는 서천파라고도 한다. 입향조는 동지의금부사를 지낸 나효기(羅孝基)공이 마서지역에 정착한 후 삼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서호공 휘 국경(國經)인데 그 후손들은 마서면 남전리의 칠전과 합전에 큰 집성촌을 형성하였고, 차자 세경(世經)공의 후손이 참판공파이며 12世 충국(忠國)공이 300여년전 마서면 신포리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은 신포리와, 시초면 선동리, 마서면 한성리, 서천읍 화성리에 거주한다, 제3자 순경(順經)공의 후손이 송암공파이며 그 후손은 서천읍 화금리와 당선리에 거주한다.


나주나씨 금양군파는 휘 수영(守永)의 三子가 금양군 석(碩)이고, 四子가 연안군 세(世)인데 三子의 후손이 금양군파이다. 금양군파는 21世  운경(雲絅)공이 200여년전 서천의 화금리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화금리와 동산리 솔뫼에 세거하고 있으나 화금리에는 연안군파의 송암공 후손들도 같은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나주나씨 연안군파는 크게 번연하여 서천군에 총 594호가 거주하고 그중에 10호 이상 집성촌만도  마서면 합전리에 43호, 칠전에 50호, 발동에 32호, 신포리에 35호, 덕암리 18호 서천읍 화금리에 34호, 시초면 선동리에 12호, 서면 합전에 14호가 거주한다.


이 밖에도 서천읍 군사리와 사곡리, 장항읍 창선동과 신창동에 많은 수의 두 나씨들이 거주하고 있으나 상권지역이기 때문에 누구가  어느파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서천의 나씨들이 조선조에는 크게 현달은 못했지만 나주나씨는 서천군지에 사마(司馬-진사,생원)가 세분이고 광복이후 국회의원과 군수, 판사, 검사, 도의원, 군의원등 관계에도 많이 진출하고 있다.


금성나씨도 서천군지(舒川郡誌)의 사마(司馬)편에 생원, 진사가 7분이  있고 고위 관직은 없어도 낭관(郎官)은 여러분이 계셨기 때문에 한산 고을이 가정, 목은 같은 유현(儒賢)을 배출했고, 한산의 六 君子가 있으며, 생원 진사가 다른 고을보다 월등히 많아 양반 고을이라 자랑하는 한산에서 한산이씨, 안동권씨, 고령신씨, 교하노씨, 고령박씨 틈에 끼어 한산향교에서 직원(直員)과 전교(典校)도 했고 장의(掌議)는 끈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고을의 향반(鄕班)으로서 타 성씨로 부터 부당한 대우는 받지 않았다 한다. 특히 나주나씨는 서천향교에서 羅씨, 白氏, 丘氏가 돌려가며 직원(直員)과 전교(典校)를 해왔으므로 군수나 원님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자료는 오늘날 성씨를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다만 羅氏들이 서천지역에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어떻게 분파되어 어디에 얼마의 수가 살았었나를 연구하는데 참고할 따름이다.


  과거 씨족사회에서 종족이 한마을을 형성하고 수십 수백호가 집성촌을 이루던 시대는 지나갔다. 사회 구조가 경제사회가 되면서 직장 따라 도시로 가고, 수익이 있는 곳으로 모이기 때문에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자연 감소 현상으로 이제 농촌은 점점 공동화 되어 과거의 집성촌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며, 우리 마을의 예만 봐도 甲午경장 직전의 일로 노씨(盧氏)측에서 향약(鄕約)을 만들어 한산군수의 처분 결재를 받아 마을의 위계질서와 정서순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규율을 잡았던 성씨로 50여년전만 해도 교하盧氏의 집성촌으로 타성들은 말조차 크게 못하고 지냈으나  오늘날 현재 盧氏들은 노약자 5호만이 남아 그 존재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전의 쟁쟁하던 성씨, 다수를 과시하던 집성촌은 이제 거의가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다행한 것은 35년전부터 대구에서 다섯 본관의 羅氏들이 모여 영남 종친회를 결성하고 한 뿌리의 羅氏로서 단합과 우의를 다지고 있으며,  금년 5월19일에는  羅氏들의 본관지인 나주에서 전국 나씨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 나씨 총 연합회를 창립했고, 11월 9일은 서천군 지회를 결성함으로서 점차 사라져가는 씨족관념을 재 결집하는 쾌거를 이룩했던 것이다.   모범적인 예로 車氏와 柳氏들은 먼 조상이 형제라고 하지만 천 수백년을 각기 성을 달리 하면서도 車,柳 종친회를 운영하고 있고,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은 시조가 다르지만 본관이 같고 본관지가 같다는 이유로 서로 존중하고 일가로 호칭하며 시기하고 비방하는 경쟁상대가 아닌 서로 협조하는 상승관계로 승화하여 오히려 서로 우호적이라 하고 있다. 


  참고: 이 자료는 필자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서천군에 거주하는 82성씨의 본관과 입향조(入鄕祖)를 조사하여 서천군 향토문화 연구회 회지 제2집으로 발간하고 서천신문에 2년간 연재한 자료이기 때문에 17년이란 세월이 지난 오늘날 많은 수의 주민들이 도시로 이주하여 많은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이점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장나씨 주공 충효사 참배기

 

서기 2012년 8월 중국 남창문화원에서 나주시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금성나씨 대종회를 방문하고 중국 羅珠(나주) 公(공) 忠孝祠(충효사) 준공식에 참여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일정이 확정되면 초대 하겠다고 하였다. 서기 2013년 8월 한국의 모든 나씨 앞으로 珠公(주공) 충효사 준공식에 참여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금성나씨 대종회 나진 회장이 주간이 되어 추진하고 참석 신청을 받은 결과 총 30여명이 신청을 하였는데 서울경기에서 20여명이 참석 신청을 해 편의상 서울에 있는 금성나씨 서울종친회 나남열 회장이 권한을 넘겨받아 추진하였다,

 

드디어 서기 2013년 10월 25일 새벽 울산, 양산, 서천, 대구, 서울 경기 일원에서 밤잠을 설치고 인천국제 공항으로 모였다. 그때가 새벽 5시 그러나 뿌리를 찾아 떠난다는 희망으로 부푼 가슴을 달래면서 출국 심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시간 9시 55분 이륙, 지상을 박차고 창공을 날았다. 기내식을 먹고 조금 지나 어느덧 중국 상해공항에 도착,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와 대기중인 관광버스를 타고 예약한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불고기로 먹었다. 저녁에 열차에서 먹을 도시락 하나씩을 챙겨들고 홍교 기차역으로 가서 14시 49분발 고속열차를 타고 남창을 향해 떠났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3층 건물이 줄을 지어 나열해 있고 앞에는 전답이 있고 다음은 수로와 도로가 설치되어 집과 전답 물길이 어우러져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생활 모습 이었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어둠이 내리자 우리는 도시락을 꺼내 저녁을 먹었다. 기차는 쉬지 않고 하염없이 남창을 향해 장장 830km를 달리는데 한곳도 끊기지 않고 거리가 비슷한 형태로 도시가 연결 되어있었다. 어둠을 뚫고 항주를 지나 남창역에 도착하니 그때가 현지시각 21시 32분 이었다. 예장나씨 행사 담당 나신우씨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나신우씨는 환영 인사를 하고 내일행사 일정을 알려주고 돌아갔다. 우리는 남창에서 대기중인 관광버스를 타고 약 40분 거리에 있는 호텔로 가서 2인 1실을 배정받아 방으로 들어가 여정을 풀었다.

 

남창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 6시에 일어나 호텔식당 뷔페에서 아침 먹고 7시에 출발해 백림행사장으로 이동하였다. 8시 30분 행사장 입구에 도착하니 백림(柏林) 사거리 약 500m 길 양 옆에 붉은 색으로 된 전통복을 입은 학생 행사요원이 줄지어 서서 꽃 수술을 양손에 들고 흔들고 일부는 북과 타악기를 치면서 손님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환영을 받으면서 행하장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를 돕기위해 <청도에서 기업경영자> 나채준 종인이 나와 우리를 안내하였다. 나채준 종인의 안내를 받아 접수대로 가서 나진 대종회장, 나성열 나주나씨회장, 나주운 서천 한림공 문중회장 차례로 접수대에서 한림공 문중 5,000위안, 금성나씨서울종친회 7,000위안, 금성나씨대종회 10,000위안, 나 진 대종회장 한화 1,000만원, 나주나씨 연안군파 한화 100만원 헌금을 접수하고 들어갔다. 넓은 마당에 각 종중과 각 나라 표지판에 번호는 번호를 써서 종중과 각 나라를 알아보기 쉽게 해놓았다. 우리는 한국나씨 표지판에 1번을 달고 왼쪽자리를 부여받아 행사에 참석 하였다.

 

1. 야외 행사

 

1) 개회선언 하고 행사내용 설명하고 회장 인사

2) 준공식, 테이프 커팅

3) 현지인 축사

4) 한국대표, 금성나씨대종회 나진 회장이 축사 하는데 나채준 종친이 통역

5) 나주공 동상을 문중대표에게 증정. 한국대표 나진회장도 받음

 

2. 충효사(忠孝祠) 제례(祭禮)

1) 나주공(羅珠公) 동상 앞에 제물을 차리는데 음식은 산고기(生)와 꽃다발을 올렸다.

2) 초불은 3척의 큰 나무 가지 같은 큰 향불을 피우고.

3) 재관. 삼헌관(三獻官)으로 검은 양복에 금빛 목도리(스카프)차림을 하고.

4) 제례(祭禮)는 집례관 홀기에 따라 진행하고 절은 삼배(三拜).

제례식, 재상이 다 차려지자 삼헌관이 나란히 서서 집례관 홀기에 따라 절 3번하고 종료.

첫번째로 한국나씨가 첫 번째로 참배. 입구에서 향불을 들고 입장 주공(珠公)제상 앞에 2열로 서서 집례관 홀기에 따라 삼배. 절을 세번 하였다.

두 번째 , 세 번째 차례로 제례, 번호 순번으로 제례를 마치고,

 

다음으로 두 번째 건물로 내려오면서 동상이 세 분이 계시는데 (누군지 미확인) 세분 동상 앞에 참배하고 건물 앞으로 나오면 동제와 서제건물이 있다. 동제에는 선인들의 글씨 현판이 걸려있고 서제에는 전시물이 있는데 족보 몇 권 있는데 최근 만든 것으로 족보 형체도 우리나라 것과 달리 계보처럼 이름이 나열해 있어 우리가 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문집이 몇 권 있는데 중국어를 몰라 살펴보지 못하였다, 나지강 공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예장나씨 각 종중과 유대를 하면서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음 세 번째 건물은 대문 겸 전시장으로 되어 있었다, 건물 서문으로 나오면 뜰 밑에 분향소가 있는데 일반 조상의 분향소 인 것 같았다. 분향소에 분향하고 제례가 마무리 되었다, 분향소에서 한 계단을 내려오면 넓은 마당에 단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철골로 계단 층을 만들어 놓아 우리는 마당으로 내려와 단체로 사진촬영하고 주최 측 회장님과 임원을 모시고 사진 촬영하고 작별 인사 후 퇴장했다,

 

11시 충효사 행사를 다 마치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백림(柏林)을 떠났다,

 

백림(柏林) 4거리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식당에 도착하니 12시, 간판이 올리브 식당 이었다, 한국 요리로 점심을 먹고 휴식 취한 후 식당에서 저녁 도시락을 지참하고 남창 기차역으로 가서 14시 30분 기차로 항주를 향해 떠났다, 2013년 10월 26일 밤 항주에 가서 1박하고, 27일 소주 가서 일박하고. 28상해가서 일박 후 29일 모든 일정을 끝내고 무사히 집으로 귀향 하였다,

 

끝으로 나채준 종인을 알게 된 것은 큰 성과다, 나채준 종인은 대구에 살고 있는데 지금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나채준 종인은 우리 일행에게 통역과 안내를 해 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나채준 : 고령출생 대구거주, 현재 중국 청도에서 사업중, 안렴사 나문규공 둘째아들 자손)

 

1)충효사와 예장나씨 시조 나주공(忠孝祠와 豫章羅氏始祖 羅珠公)

 

예장나씨 시조(豫章羅氏 始祖) 나주(羅珠)(BC231년-BC142년), 백림(柏林)의 기초를 세운 나당(羅瑭)(220년-312년), 동진시대(東晉時代)의 충신 나기생(忠臣 羅企生)(363년-400년). 동진효자 나준생(東晉孝子 羅遵生)(365년-439년)을 기리기 위한 민간 모금활동을 통해 “충효릉원(忠孝陵園)”을 보수건립(補修建立)하였다.

 

그러나 이미 오래됐고 장소가 협소하여 예장나주문화연구회(豫章羅珠文化硏究會)는 “충효릉원(忠孝陵園)”장소에 2,000여평을 추가하여, 2,200평의 면적에 3년간의 노력으로 “예장나씨충효사(豫章羅氏忠孝祠)”를 건립하여 시조(始祖)등 4人과 700여 신위(神位)를 안치하였다. 예장나씨시조(豫章羅氏始祖) 나주(羅珠)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 장사군(長沙郡: 지금의 호남성 湖南省)에서 태어났다(BC231년7월 15일). 부 나군용(父 羅君用)은 진(秦)나라시대 무릉현(武陵縣) 현령(縣令)직무를 수행하던 중 정부의 철을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다가 동정호(洞庭湖)에 빠져 익사하였는데, 그의 아우 나군동(羅君同)과 딸 나편인(羅鞭因)은 시신을 못 찾은 죄책감에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그들의 효행이 전국을 감동시켰다. 한(漢)나라는 효를 치국의 도(道)로 삼았기에, 나주(羅珠)는 총명하고 학문이 높고 품행단정하여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칭송을 받아, 재정을 관리하는 대신(大臣)인 치속내사(治粟內使)에 임명되었다.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고, 국가가 사용하는 물품은, 충분히 보상해주는 정책을 시행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한고조(漢高祖)가 붕어(崩御)하고(BC195년5월) 여태후(呂太后)가 개국공신(開國功臣)들 살해를 기도하고, 한고조(漢高祖)의 다른 부인을 독살 하는 등 잔혹한 정치를 펼치자, 나주(羅珠)는 조정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권신(權臣)들로부터는 미움을 사서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BC192년). 기원전 196년 8월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고조(漢高祖)와 선봉장 관영장군(灌嬰將軍)은 반란을 4개월만에 진압하였다. 관영(灌嬰)장군이 구강군(九江郡)과 예장군(豫章郡)을 점령했을 당시 남창(南昌)이 교통요충지라는 것을 알게 되어 남창성(南昌城) 축조를 시작했는데, 한고조(漢高祖)의 사망으로 급거 조정으로 소환되었다. 나주(羅珠)가 조정을 떠나갈 때, 관영(灌嬰)이 나주(羅珠)를 구강(九江)군수로 추천하고 남창성(南昌城)건축을 주도(主導)하도록 건의하여, 조정이 허락(許諾)하였다. 부임후, 건국초기라 어려운 여건하에서 민중의 힘으로 각고분투하여, 결국 둘레 10여리에 달하고 문이 6개인 남창성(南昌城)을 완공하였다(BC189년). 이때부터 남창(南昌)은 예장군(豫章郡)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나주(羅珠)도 남창성(南昌城)내에 거주하였고, 장사(長沙)의 친족들도 이주해왔다. 그래서 예장나씨(豫章羅氏)시조가 되었다. 한 혜제(漢 惠帝)가 병사하고(BC188년), 소제(少帝)가 즉위했으나, 여태후(呂太后)가 조정을 장악하고 여씨일가(呂氏一家)가 좌승상을 맡는 것을 보고, 나주(羅珠)는 병을 핑계로 완전히 은거(隱居)에 들어갔다. 이름도 한(漢)나라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나한(羅漢)으로 개명하였다. 호(号)도 나회한(羅懷漢)이다. 그는 도처에 송백(松柏)을 심어 나한송(羅漢松). 나한백(羅漢柏)으로도 불린다. 여태후(呂太后)가 죽고(BC180년), 관영. 주발. 진평(灌嬰.周勃.陳平)등이 여씨(呂氏)들을 평정하여, 관영(灌嬰)이 승상(丞相)에 올라(BC178년), 관영(灌嬰)은 나주(羅珠)가 여씨(呂氏)들을 반대하고, 애국충절(愛國忠節)하고, 고결한 품행과 남창성(南昌城) 축성에 공(功)이 있어 친히 나주(羅珠)를 방문하고, 문제(文帝)에게 나주(羅珠)를 “관배상국(官拜相國)”으로 추천하여, 조정에 다시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고사하였다.

 

나주(羅珠)는 기원전 142년 향년 90세의 나이로 서거(逝去)하였다. 묘는 남창시(南昌市) 만리구(湾里區)에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역대왕조 마다 관민(官民)이 끝임없이 나주사(羅珠祠)를 보수 개축하였다. 당 선종대중(唐宣宗大中)년간에는(847-859) 심지어 나주(羅珠)를 “진혜왕(眞惠王)”으로 봉했다. 현재 나주(羅珠)의 후손은 중국과 세계 30여국가에 거의 2,000만이 있고 한국엔 30만이 있다.

<출처 중국 문화원에서 발행한 책 중에서 일부 번역 >

 

이번 중국 예장나씨 시조 주공 충효사 준공식에 참석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으로 남겨 참고자료로 쓰기 바라며 후일 한국의 나씨 나지강공의 뿌리를 찾는대 노력해 주기 바라는 바이다.

 

금성나씨 서울종친회 부회장 나승록 삼가 기록함

2013년 11월 일



나철과 나주나씨

 

대종교의 초대 교주인 홍암(弘巖) 나철(羅喆)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본명은 인영(寅永)이다. 교단에서는 신형(神兄) 또는 대종사(大宗師)로 존칭한다. 그는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부락에서 아버지 용집(龍集)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10세 되던 해에 국문을 해독하고 한학서당에 입학한다.

 

당시 호남의 석학이었던 구례의 왕석보(王錫輔)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1년 29세 때인 10월 문과에 장원하여, 11월 승정원가주서가 되었다. 일본의 침략이 점차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출신의 우국지사들을 모았다. 그 뒤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해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6월 홍암은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영구 평화를 위해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정부의 각 대신과 정객들에게 전달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하기도 했다.

 

1906년 1월 일본에서 서울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90세로 본명이 백전(伯佺)이고 호가 두암(頭岩)이라는 노인이 홍암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러면서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명을 받고 그대에게 이것을 전하러 왔노라"고 하면서 백지에 싼 것을 전해주고 사라졌다. 그가 집에 돌아와 펴 보니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紀) 두 권의 책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관심이 없어 책장 속에 넣어두고 말았다.

 

그는 1907년 2월 동지인 오기호, 김인식, 이기와 함께 을사조약체결 다섯 대신인 이른바 오적 암살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서창보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탄로났다. 동지들이 체포되자 그들의 고문을 덜어주기 위해 홍암은 오기호, 최인식 등과 함께 평리원에 자수한다. 6월에 10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무안군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1월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사면되어 풀려났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5일에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이 찾아와 "나는 백전도사 등 32인과 함께 백봉신사에게 사사(師事)하고, 1904년 10월 3일 백두산에서 회합하여 일심계(一心戒)를 같이 받고 포명서(佈明書)를 발행하였는데, 귀공의 이번 사명은 이 포명서에 대한 일이오"라며 단군교포명서 한 권과 고본신가집(古本神歌集) 및 입교절차 등의 책을 주었다.

 

그 뒤 홍암은 나라가 쇠망하게 된 근본 원인이 오랜 세월에 걸친 모화사대의 왜곡된 교육에 있으며 이에 따라 올바른 민족의식이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절실히 느낀다. 그는 "이미 나라는 망했으나, 후학들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과 국가재건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후 홍암은 보국안민과 제인구세의 대원(大願)을 이룩하고자, 한배검께 주야로 간절히 기도하여 대도포명(大道佈明)의 묵계(默契)를 받았다.

 

그는 1909년 1월 15일 경성 재동 취운정 아래 초가에서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행한 뒤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였다. 이때부터 이 날을 중광절(重光節)이라고 부른다. 중광이라 함은 새로이 창교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교단을 중흥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홍암은 교도들이 준행할 주송(呪頌)인 각사(覺辭)를 지어 반포했다. 그 뒤 교세가 확장되어 교도수가 2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1910년 8월5일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국내에서의 포교활동이 금지되자 나철은 동지들과 함께 1911년 7월21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로 대종교 총본사를 이전하였다.

 

그 뒤 교도수는 3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탄압이 가해져 1914년 11월 중국 화룡현 지사로부터 대종교 해산령이 내려졌다. 나철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남도본사에서 교단 조직과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는 결국 1916년 8월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유서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한편 나철은 나주나씨의 후손이다. 나주나씨의 시조 나부(羅富)는 중국 송나라 사람이다. 봉명공신으로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송나라가 멸망하자 나주에 눌러 살게 되었다. 그 뒤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우리나라 나씨는 ▲금성나씨를 제외하고 모두 나주나씨에서 갈려 나갔다. 나주의 다른 이름인 금성을 본관으로 한 금성나씨는 나주나씨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 두 나씨를 구분하기 쉽게 나주나씨를 당라(唐羅), 금성나씨를 토라(土羅)라고 한다. 한편 금성나씨는 2000년 현재 40,493명이 있다.

 

나주나씨의 1세조는 후손인 나득규로 한다. 분파는 고려조에 진사를 지낸 4세조 나수영의 다섯 아들 나위, 나계, 나석, 나세, 나원 대에서 5개 파로 갈라진다. 나중소는 한일합방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한 인물이다. 1919년 김좌진, 서일 등과 북로군정서를 창설하여 참모장이 되었고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사관양성소를 설치했다.

 

나혜석은 여류화가이자 여류소설가로 유명하다. 조선미술전람회에 1회부터 5회까지 계속 입선했고 1921년에는 한국여류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1918년에는 <경희>,<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개화기 대표적인 여성인물이다.

 

2000년 현재 108,139명이다. 주요파는 ▲전서공파 ▲시랑공파 ▲금양군파 ▲연안군파 ▲직장공파 등이다. 전북 정읍시 소성면, 김제시 일원, 익산시 망성면, 전남 광양시 옥룡면, 영암군 시종면, 무안군 삼향면, 나주시 일원, 충남 서천군 마서면,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합천군 대양면 등이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