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5월26일, 선조가 명나라 파견군 장수인 팽신고를 위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주흥이 한껏 달아오르자 팽신고가 선조 임금에게 고했다. “전하. 제가 ‘색다른 신병’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래요. 어느 지방 사람이오이까.” “예. 호광(湖廣)의 남쪽 끝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입니다. 바다를 세 번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 여 리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가지 무예를 지녔습니다.”
명나라군의 철수를 기념해 그린 <천조장사전별도>에 보이는 흑인용병 4명. 몸집이 너무 커서 말에 타지 못하고 수레에 탔다는 기록에 완전히 부합되는 그림이다. 잠수해서 적선의 밑을 뚫는 특수임무를 지녔지만 별 전과는 기록하지 못했다.|민속원 제공
■흑인용병은 UDT 대원 팽신고가 그 ‘색다른’ 신병을 불러왔다. 과연 신기했다. <선조실록>의 기자는 “그 신병을 일명 해귀(海鬼·바다귀신)라 한다”면서 세세한 인상착의를 묘사한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이마는 대머리가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른 비단을 반도(磻桃)의 형상처럼 서려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봐도 영락없는 흑인의 모습이다. 팽신고의 자랑이 하늘을 찌른다. “이 흑인은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賊船)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며칠동안 물 속에 머물면서 수중생물(水族)을 잡아 먹을 줄 압니다.”
그러자 선조 임금이 화답한다. “우리 같은 작은 나라에서 어찌 이런 신병을 보았겠소이까. 대인의 덕택에 보게 되었으니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제 흉적(왜적)을 섬멸하는 날이 시간문제가 아니겠소이까.”
이 흑인은 명나라군에 합류한 용병이었다. 팽신고의 말에 따르자면 이 흑인용병은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하는, 지금으로 치면 UDT 요원? 파랑국 혹은 불랑국(佛浪國)은 1557년 이미 마카오 반도를 조차(통치권을 획득)한 포르투갈의 한문표기이다. 그러니까 이 흑인용병은 포르투갈 사람인 것이다.
팽신고의 말이 맞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특수부대 용병이 아닐 수 없다. 며칠동안 물 속에 머물며 온갖 수중생물을 먹고 버틸 수 있다니…. 해귀는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팽신고는 이틀만인 5월28일 포르투갈 용병 3명을 선조 임금 앞에서 소개한다. 선조는 그들의 칼솜씨를 구경한 뒤 상급으로 은자(銀子) 한 냥을 선사했다.(<선조실록>)
■‘해귀 등장’ 소식에 전국이 떠들썩 이 포르투갈 용병을 둘러싼 당대의 관심은 대단했던 것 같다. 문헌 곳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해귀의 기사가 보인다. 보는 사람마다 그 신기한 ‘종족’의 인상착의를 앞다퉈 기록한 것이다. “명나라 군이 4만7000여 명이었다.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다.”(<난중잡록> 3)
<천조장사전별도>의 전체그림. 1599년 2월 철수를 앞둔 명나라을 위한 연회의 모습을 담았다. 왼쪽 아랫부분에 해귀, 즉 포르투갈 흑인 용병의 모습이 보인다. |민속원 제공
“해귀(海鬼)라는 자가 있었다. 남번(南番) 출신으로 낯빛이 칠처럼 까맣고, 바다 밑에 숨어 다니기도 하며 그 모양이 귀신같다 하여 해귀라고 했단다. 키가 큰 사람이 있었는데, 몸이 아주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었다.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서애집>) “군중에 해귀(海鬼)가 넷인데 까만 눈에 붉은 머리털이 가는 털과 같았다.”(<일월록>)
“해귀가 등장했다”는 뉴스는 적진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것 같다. 그 해 9월5일 전라 관찰사 황신의 보고를 보자. “적진을 왕래하는 자의 보고입니다. 왜적이 중국군의 병력수를 묻기에 수·육군을 합해 모두 40만명이라 했답니다. 해귀(海鬼)와 달자(달子·몽골군)도 수없이 출전했고 엄청나게 불려 말했더니 왜적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얼굴색이 변하면서 짐바리와 잡물(雜物)을 죄다 배에 실었답니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지금의 UDT의 임무를 펼치는 ‘용감무쌍한’ 해귀가 출전했다는 소식에 왜병들도 부들부들 떨면서 철수준비를 했던 것이다.
4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포르투갈 용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1599년 2년 철수를 앞둔 명나라 군을 위한 연회의 모습을 담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서 확연히 나온다.(박정혜의 <세전서화첩>)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그림의 맨 마지막 장면 왼쪽 하단에 수레를 탄 ‘해귀’ 4명을 그렸다. 그림을 설명한 표제에는 ‘불랑국(佛浪國)의 해귀 4명은 살결이 검고 누르스름한 머리가 방석둘레처럼 펼쳐졌어도 적선을 잘 뚫었다’고 했다. 몸집에 하도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탔다’는 <서애집>의 기록과 정확하게 부합된다.
해귀, 즉 포르투갈 용병의 출전소식을 알린 <선조실록>.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과 사지와 온몸이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고 인상착의를 전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실패한 퇴출용병
그렇다면 이 용감한 용병은 선조 임금의 기대만큼 혁혁한 공을 세웠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명나라 장군 유정이 수 십 종류의 해귀(海鬼)를 이끌고 나왔다고 한다. ~얼굴이 새까만 것이 귀신처럼 생겼고 바다 밑으로 헤엄을 잘 쳤으며, 그 중에 키가 거의 두 길 정도나 되는 거인(巨人)이 수레를 타고 오기도 했다. ~유정은 경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 왜 해귀(海鬼)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의 밑을 뚫어 침몰하도록 하지 않았을까.”(<성호사설> 23권 ‘경사문·유정동정’)
그러니까 명나라군은 해귀, 즉 포르투갈 용병의 재주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패했다는 것이다.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은 바로 그 점을 꼬집으며 안타까워 한 것이다. 흑인 용병들은 잔뜩 기대를 모았다가 실망만 안겨준채 쓸쓸히 귀국해야 하는 ‘톼출용병’의 신세가 된 것이다.
■흑귀노, 곤륜노 동양의 역사 속에서 흑인은 곤륜노(崑崙奴), 혹은 흑귀노(黑鬼奴) 등으로 표현됐다. 1713년 나온 시문선집인 <동문선>의 주서문병서(呪鼠文幷書·쥐를 저주하는 글)를 보자. “사람의 집에는~각각 맡은 바가 있노라. 음식을 만드는 일은 적각(赤脚·계집종)이고, 나무하고 마소를 치는 것은 곤륜(崑崙)이 한다. 아래로 육축(가축)에 이르기까지 각기 구분이 있으니…,”
여기서 말하는 곤륜은 흑인 노예를 가리킨다. 이유원(1814~1888)의 연작시를 모은 <임하필기>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에도 ‘양흑귀노’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흑귀노는 바로 당나라 시대의 곤륜노.(黑奴唐代崑崙奴). 명사에도 하란이 부리던 오귀가 있네.(明史荷蘭役鬼烏) 구유에 음식을 담아서 말처럼 먹이고(饋以一槽如馬食), 손에 단봉을 들고 다니며 부려 먹네.(手提短棒自相呼)”
무슨 말이냐면, 서양의 흑귀노는 바로 당시 ‘곤륜노’로 통했다는 것. <명사(明史)>에도 “하란(荷蘭), 즉 네덜란드 사람이 부리던 노예를 ‘오귀(烏鬼)’라 했는데 바로 그 흑귀노”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은 남은 음식을 말구유통 같은 그릇 하나에 쏟아서 흑귀노를 먹이고 항상 목봉(木棒)을 가지고 다니며 부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때 참전한 포르투갈 흑인용병도 바로 포르투갈인들이 부리던 노예가 아니었나 싶다.
■‘산 같기도, 구름같기도 한’ 영어 알파벳 어떻든 조선인들은 이렇게 흑인 만을 다른 동물로 취급하면서 신기해하고 폄훼했을까. 그렇지 않다. 1797년 8월27일 새벽, 동래 구봉 봉수대(동구 초량동)을 지키던 군사가 아연실색했다. 엄청난 규모의 이양선 한 척이 용당포로 근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괴한 이양선을 본 조선인들은 이른바 ‘멘붕’에 빠졌다. 지휘계통을 통해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의 인상착의가 보고됐다.(<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하멜표류기> 프랑스어판.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일행을 구경하러 온 조선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코가 높고 눈이 푸른 것으로 보아 서양사람인듯 합니다. 붓을 내밀어 글을 쓰게 했더니 마치 산과 구름을 그려놓은 듯이 도무지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쓴 영어 알파벳을 보고 조선사람들은 ‘산과 구름을 그려놓은 듯 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동유(1744~1808)가 쓴 <주영편(晝永篇)>에 묘사된 선원들의 인상착의는 아주 구체적이다.
“몸집이 거대했다. 우리보다 두 어 자(60㎝) 컸다. 콧대가 높고 곧아서 위로 이마를 관통했다. 뺨에는 광대가 없었다. 코에서 귀를 향해 평평하게 낮아졌다. 마치 살구씨 모서리를 깎아 놓은 것 같았다. 상의와 바지는 몹시 좁아서 겨우 팔다리를 꿸 수 있을 뿐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그들이 쓴 글자는 산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해서 통역관도 알지 못했다.” 조정에서도 이양선 출몰은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다음은 10월4일 정조 임금이 대신들과 나눈 대화내용이다.(<정조실록>)
“동래에 온 배는 아란타(阿蘭타)·네덜란드) 사람들인 듯 하다. 아란타는 어느 나라 오랑캐인가?”(정조) 비변사 당상 이서구가 한 치의 주저함이 없이 쾌도난마식으로 브리핑했다. “예. 아란타는 곧 서남지방 번이(蕃夷)의 무리로서 중국의 판도에 속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명사(明史)>에서는 ‘하란(賀蘭)’이라 했는데 요즘의 대만(臺灣)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조와 신하들은 이서구의 해박한 지식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특히 우의정 이병모는 이서구를 칭찬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연! (이서구가) 저토록 해박하다니…. 역시 재상은 독서한 사람을 뽑아 써야 한다니까요.”
■독서인 이서구의 ‘뻥’
하멜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머물렀던 전남 강진의 병영마을. 하멜 일행 중 몇몇이 청나라 사신 앞에서 ‘조국으로 보내달라’는 기습시위를 벌인 뒤 조선조정의 감시가 심해졌다.
그러나 실상 이서구는 ‘전혀’ 해박하지 않았다. 이서구가 아뢴 것은 결과적으로 ‘뻥’이었으니까. 우선 아란타, 즉 네덜란드는 중국영토로 편입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세워 동방무역을 개척한 뒤, 1624년 대만북부를 점령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1683년 다시 대만을 정복하고 푸젠성(福建省)의 일부로 편입했다. 결국 이서구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었다. 청나라가 대만을 푸젠성으로 포함시킨 지 무려 114년이나 흘렀는 데도 그 사실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잘못됐다. 동래에 정박한 이양선은 네덜란드 배가 아니라 윌리엄 브로턴 함장이 지휘한 영국배, ‘프로비던스’호였다. 400톤 규모의 이 배는 2년 간의 태평양 탐사 도중 안전한 항구를 찾아 동래에 닻을 내린 것이다. 브로턴 함장은 귀국 후 <북태평양 탐사항해기>를 출간했다. 또 <코리아 남동해 초산항 스케치(A Sketch of Thosan Harbor S.E. Coast of Corea)>라는 도면을 영국해군수로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항해기와 지도에 나온 지명의 표기가 들쭉날쭉했다. 예컨대 부산항은 ‘초산항’을 비롯해 Tshosan, Chosan, Tchosan, Thosan, Tshesan, Chousan, Thesan 등 무려 7가지 지명으로 표기됐다.
주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브로턴이 주민들에게 항구의 이름을 묻자 ‘초산’이라고 대답했단다. 주민들이 항구이름이 아니라 ‘조선’, 즉 나라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또한 브로턴은 남해안을 ‘토상(Thosang), 조선국을 ‘토상고(Thosango)’로 일컫고 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오륙도는 바위가 검게 보인다고 해서 ‘검은 바위들(Black Rocks)라 한게 흥미롭다. 그러고 보면 이서구와 조선 조정을 국제정세에 어둡다고 싸잡아 비난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낯선 자들끼리의 만남이었으니까….(박천홍의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벨테브레와 박연 네덜란드인인 얀 얀세 벨테브레(1595~?)와 헨드릭 하멜의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흥미롭다. 그 사연을 보자. 1627년 5월12일 벨테브레는 상선 우베르케르크호를 타고 대만으로 향하다가 항로를 벗어난다. 태풍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배는 동해안 경주(혹은 제주도) 앞바다까지 흘러왔다. 벨테브레는 다른 동료 2명과 함께 물과 양식을 구하려 보트를 타고 상륙했다가 주민들에게 사로잡힌다. 주민들은 이들을 동래의 왜관으로 돌려보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왜관을 통해 나가사키로 보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왜관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표류자의 접수를 거부했다. 벨테브레 일행은 할 수 없이 서울로 이송됐다. 조정은 이들을 훈련도감 군사로 편입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투항한 일본인 및 표류한 중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장수가 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조선군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통에 두사람은 전사했고, 벨테브레만 살아남았다. 벨테브레는 조선여인과 결혼해서 1남1녀를 두었다. 그의 조선이름은 박연(朴淵)이다. 그는 조선글자를 알지못해 자기 이름을 말할 때는 늘 네덜란드 말로 이름을 불렀다. 자발적인 귀화가 아니었던 벨테브레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 했는 지는 필설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연과 하멜의 만남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653년 8월이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상선인 스페르웨르호에 탑승한 하멜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 대정현에서 좌초됐다. 이 사고로 64명 중 28명이 죽고, 서기관 하멜 등 36명이 구조됐다. 제주 목사 이원진이 조정에 이 사건을 보고한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렛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효종실록>)
제주 관리들은 왜어 통역자를 통해 생존자들을 심문했다.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그러자 다들 ‘야 야(耶耶)’ 했다.(<효종실록>) 즉 ‘예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이 어느 나라냐?”(조선 관리) “고려입니다.”(하멜 일행) 조정은 생존자들을 모두 서울로 보내라고 명했다. 조선 조정은 박연(벨테브레)과 하멜을 대질시켰다. <효종실록>은 이 대목을 아주 드라이하게 기록했다.
“남만인(南蠻人) 박연이라는 자가 (하멜 일행을 보고) ‘만인(蠻人)이 맞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을 금려(禁旅·국왕 호위군)에 편입하였다. 그들이 대개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코를 귀 뒤로 돌리고 음료를 마신다.’ 그런데 무려 26년 만에 고국동포를 만난 박연과, 앞길에 막막해진 하멜의 만남이 이렇게 무미건조했을까. 아니었다. 윤행임(1762~1801)의 시문집인 <석재고>는 “(박연이 하멜을 만나자) 옷깃이 더 젖을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하멜이 훗날 조선을 탈출한 뒤 남긴 <하멜표류기>에도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박연과 하멜일행의 만남을 설명하고 있다. 박연은 하멜일행에게 이렇게 푸념했다. “난 여러 번 국왕(효종)에게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당신이 새라도 된다면 날아갈 수 있겠지만 우리는 국법 때문에 당신을 보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난 일생을 이 나라에서 보내야 합니다.”
하멜 일행은 박연의 지휘아래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됐다. 저잣거리엔 하멜 일행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관리들은 앞다퉈 그들을 초청, 연회를 베풀었다. 그들의 검술과 춤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기 보다는 괴물로 보았다. 음료를 마실 때는 코를 귀의 뒤로 돌리고 마신다든가, 금발이라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새처럼 보인다든가 하는 소문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처음 한동안은 구경꾼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숙소에서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조선사람들이 보기에 서양인들의 코가 얼마나 컸으면 코를 귀 뒤로 돌리고 음료수를 마신다고 했을까. 높은 서양인의 코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하멜 일행은 박연처럼 가만있지 않았다. 일등 항해사와 포수 등 두 사람이 1655년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 앞에서 선처를 호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결국 두 사람은 감금됐고, 그 곳에서 사망했다. 후에 전라도에 유배됐던 하멜 일행은 13년여 만인 1663년 조선을 탈출했다.
■‘조선인은 인육을 구워먹는다’ 타자(他者)와의 조우, 즉 나와 우리가 아닌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서로간 오해를 불렀다. 조선인들이 ‘서양인’을, ‘흑인’을 양귀, 혹은 흑귀노로 낮췄지만, 서양인들도 조선인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조선에서는 식인풍속이 있다”는 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들렸다.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을 보자.
“박연은 ‘본국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구워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박연이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마침 날이 어두워 조선 군사들이 횃불을 준비했다. 배안에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모두 이 불이 자신을 구워먹으려는 도구라고 여겨 하늘이 사무치도록 통곡했다고 한다.” 여기에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둘러싼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하기야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마저도 네덜란드인을 이렇게 묘사했단다.
“네덜란드 사람의 발 길이는 1척2촌(36㎝ 정도)이며, 오줌을 눌 때는 늘 한 쪽 다리를 들고 눈다.”(<편서잡고(編書雜槁)>) 사람을 개(犬)의 종류로 보다니…. 낯선 이들을 인간으로 대접하고 존중하는 일 이렇게 힘든 것인가..
■‘백인만 골라 제사지낸 사연’ “백인으로 요제(燎祭)를 지낼까요?(燎白人)” “오늘 저녁 흰 강인 3명을 제물로 올려 제사를 지낼까요?(唯今夕用三白羌)” 은(상)나라의 정복전쟁이 한창이던 시절(기원전 1300~1046년), 정인(貞人·점을 치는 관리)들이 점을 치면서 국왕에게 보고한 갑골의 내용들이다.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첫번째 갑골은 백인을 잡아 불에 태우는 제사를 지낼 지 어떨 지를 묻고 있다. 두번째 갑골은 정복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강족 노예 가운데 피부가 하얀 사람을 3명을 잡아 제사를 지낼 지 어떨 지를 묻고 있다. 그러니까 희생자들은 피부색깔이 하얗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제물로 선택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양동숙의 <갑골문 해제>)
이렇듯 차별과 구별의 역사는 뿌리가 깊은 것이다. 3300년 전에도, 500년 전에도…. 피부색깔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내남’의 차이를 두려는 습성은 여전했던 것 같다. 타자(他者)와의 조우, 즉 나와 우리가 아닌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이렇게 서로간 오해를 불렀으니…. 아니 다른 말 집어치우고 사람에겐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천조장사전별도의 왼쪽 아랫부분을 확대한 그림. 장발에 피부색이 검게 그려진 포르투갈 병사들(海鬼)의 모습이 이채롭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의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은 제작 동기가 문벌(門閥)을 중시하던 조선 후기의 양반문화와 관련 있다. 이 화첩은 경북 안동시 미동에서 500년을 세거해 온 풍산 김씨 문중에 대대로 전승돼 온 사료다. 화첩은 풍산 김씨 10세 김휘손(金徽孫) 이래 10대에 걸쳐 청백 충효 절의 문장으로 이름을 드러낸 19명의 주요 행적을 그린 것으로, 31도(圖)의 화폭과 이를 설명하는 시문으로 이뤄져 있다. 그림마다 우측 상단에 표제가 적혀 있으며, 관련 일화들이 함께 수록돼 있다. 뒤편의 발문에 따르면 이 화첩을 편집한 사람은 19세기 전반에 참봉을 지낸 김중휴(金重休)라는 인물이다. 인물과 산수의 표현에 나타난 필치와 묘사가 그림마다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첩은 동일시기에 제작된 것이 아닌 듯하다. 집안에 전해지던 원본을 토대로 하되, 없어진 것은 첩을 꾸밀 당시 옮겨 그리거나 새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여러 대에 걸친 가계의 인물이 소재라는 점에서 이 화첩은 전기(傳記)적 기록화의 성격도 띤다. 화첩 가운데 재미있는 것으로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가 있다. 1599년 2월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훈련원에서 베푼 연회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邢개)가 자신들이 철군하는 모습을 그려줄 것을 청하자 조정은 이름난 화원이었던 김수운을 시켜 그림을 그려 주었는데, 형개는 이 그림을 다시 자신을 접대하던 조선의 관원 김대현(金大賢·1553∼1602)에게 선물로 주었다. 김대현은 풍산 김씨 미동파의 중흥조로서, 아들 8명 중 5명을 문과에 급제시킴으로써 풍산 김씨가 명문(名門)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인물이다.
그림은 네 장면으로 구성돼 있다. 고수와 배우가 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연회의 흥을 돋우는 모습과 동서로 갈라져 군문을 향해 경례하는 행렬의 모습 등이 두루 보인다. 또 마지막 장면 좌측 하단에 ‘해귀(海鬼)’라고 지칭된 검은 피부의 병사들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소수의 포르투갈 용병이 명나라 군사와 함께 참전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문중의 격을 높이고 위상을 홍보하는 일에 이런 화첩이 동원된 이유는 아마 아녀자들에게까지 내용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의 교육적 효용성 때문인 듯하다. 후손들은 이런 교재들을 통해 조상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임 노 직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한국한문학
<세전서화첩 영인본>
<세전서화첩 원본>
강대현 / 주 포르투갈 대사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군대를 파견한 최초의 서양 국가는 어디일까? 미국일까? 영국?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인 선조31년 5월26일 명나라 장군 팽신고의 막사를 예방한 선조 임금에게 팽 장군이 "막료 가운데 15만리나 떨어진 파랑국(불랑국)에서 온 해귀(海鬼)라고 하는 병사는 눈동자가 노랗고 얼굴과 손발은 새까맣고 머리털은 고수머리로 마치 검은 양털 같아 보인다"고 했다. 또한 1599년 4월 명나라 총사령관 형개 장군의 14만2000명 장병이 철군하는 모습을 담은 화폭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관련 서화첩에는 "불랑국의 해귀는…누르스름한 머리가 방석 둘레처럼 펼쳐졌어도 물속에 들어가 적선을 뚫었다"고 쓰여 있다. 1557년에 이미 마카오에는 파랑국으로 불린 포르투갈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 '해귀'들이 그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명나라 군대와 함께 임진왜란에 참전했음을 보면 우리와 포르투갈이 수 백년에 걸친 오랜 국제친선의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를 살펴보면
첫번째는 무슨 귀여운 (...) 부처상들을 싣고 가나...했었고, 두번째는짐승인간(獸人)부대처럼 보여서 이게 대체 뭐지 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두번째 그림에 '해귀'(바다귀신)이라는 글자가 보이더군요. 그래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해귀'란 것들이 있었나 하고.
그러다가 이 그림이 바로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라는 풍산 김씨 가내의 인물들을 그린 '실사화'로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의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이라는 그림책에 담겨있는 회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1599년 2월 임진왜란때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남산에 있던 훈련원에서 베푼 연회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邢개)가 자신들이 철군하는 모습을 그려줄 것을 청하자, 조선에서 이름난 화원이었던 김수운을 시켜 직접 그린 '실사화'란 것이죠. 형개는 이 그림을 다시 자신을 접대하던 조선의 관원 김대현(金大賢·1553∼1602)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참고로 이 천조장사전별도는 총 3면으로 되어 있는데, 윗 부분은 2면입니다 (다른 면들이 다음 그림들입니다).
[天朝壯士餞別圖천조장사전별도]
해귀 海鬼
정보를 찾아보게 한 단서가 되는 '해귀'라는 글자는 임란당시 두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가지는 남만, 즉 동남아병사를 뜻하고, 또다른 한가지는 바로 '포르투갈' (17세기경에는 포르투갈인도 남만인으로 칭합니다)병사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이 '네 명'의 병사는 그 숫자와 외모때문에 '포르투갈'병사들임이 정설로 1995년이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사료를 잠시 살펴보죠. 우선 실록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7개월 전 선조가 이들을 만나는 장면부터 나옵니다.
선조 31년 5월 26일 (1598, 경술)
팽 유격 처소에 행행하여 파랑국(波浪國)인을 대면하다.
상이 팽 유격(彭遊擊)의【팽신고(彭信古).】 처소에 행행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상이 이르기를, “대인은 서울에 계시겠소이까, 아니면 남하(南下)하시겠소이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1개월 후에 남하하고자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데리고 온 얼굴 모습이 다른 신병(神兵)을 나와서 뵙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지방 사람이며 무슨 기술을 가졌소이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입니다. 바다 셋을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여 리나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鳥銃)을 잘쏘고 여러 가지 무예(武藝)를 지녔습니다.”【일명은 해귀(海鬼)이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이마는 대머리가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른 비단을 반도(磻桃)의 형상처럼 서려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賊船)을 공격할 수가 있고 또 수일동안 물 속에 있으면서 수족(水族)을 잡아 먹을 줄 안다. 중원 사람도 보기가 쉽지 않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소방은 치우치게 해외(海外)에 있으니 어떻게 이런 신병을 보았겠소이까. 지금 대인의 덕택으로 보게 되었으니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더욱 감격스럽소이다. 이제 흉적을 섬멸하는 것은 날을 꼽아 기대할 수 있겠소이다.”
하고, 술자리를 파한 후 서로 읍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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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검은 빛의 용사들로 곱슬머리와 수염의 외모, 그리고 잠수에 특화되어 있는 해병대입니다. 선조는 이틀뒤 이들의 무술실력을 감상합니다.
선조 31년 무술(1598,만력 26)
5월28일 (임자)
팽 유격이 회사하다
팽 유격(彭遊擊)이【팽신고(彭信古).】 회사차 오니, 상이 영입하여 자리에 앉았다. 해귀(海鬼) 3명이 뜰 아래에서 배알하니, 상이 칼솜씨를 시험케 하고 상으로 은자(銀子) 한 냥을 주었다. 다례(茶禮)를 파하자 읍하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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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부분은 동남아병사와 포르투갈 병사를 섞어서 과장한 듯 한데, 왜군에게 이들을 이용, 겁을 주는 모습입니다. 달자는 달단으로 원나라의 후예들중 일부병력입니다.
선조 31년 무술(1598,만력 26)
9월5일 (정해)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왜병들이 철거할 뜻이 없다고 치계하다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이 치계하였다.
“적중에 왕래하는 박여경(朴餘慶)의 진고(進告)에 의하면 ‘왜적이 중국군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기에 중국군의 수군(水軍)과 육군이 모두 40만 명인데, 해귀(海鬼)와 달자(?子)도 많이 나왔다고 엄청나게 불려서 말하였더니 왜적들이 모두 얼굴색이 변하면서 짐바리와 잡물(雜物)을 죄다 배에 실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은 곧 사천(泗川)으로 향하여 적장(賊將) 주라궁(周羅宮)과 상의한 뒤에 본진(本陣)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왜병(倭兵)들에게 성(城)을 수축(修築)시키면서 전혀 철거(撤去)할 뜻이 없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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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목받는 임진왜란 사료인 정경운 (1556~?)의 [고대일록]에서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고대일록(孤臺日錄)
무술(戊戌, 1598) 가을 7월
○ 7월 9일 임진(壬辰)
명나라 조정(中朝)에서 양 경리(楊經理)를 잡아갔다. 그가 외국의 일을 전적으로 담당하면서, 뇌물이 함부로 오갔기 때문이라 한다. ○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군사를 이끌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달자(?子)와 해귀(海鬼)도 왔다고 한다. 해귀는 바로 교지(交趾)의 남이(南夷) 사람이다. 물에 들어가 십여 일이 지나도 죽지 않는다고 한다.
유성룡의 [서애집]에는 그중 한명이 유독 키가 엄청 컸다고 나옵니다.
서애집
○ 처음에 유정이 촉 지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그 중에 해귀(海鬼)라는 자가 있었는데, 남번(南番) 출신으로 낯빛이 칠처럼 까맣고, 바다 밑에 숨어 다니기도 하며 그 모양이 귀신같다 하여 해귀라고 한다 하였다. 키가 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몸이 아주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었으므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보면 천지 사이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하겠다.
이 병사가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병사들과 달리 이들은 몸집때문에 '수레'를 타고 있죠)
그럼 이들이 '네명'인건 어디 나올까요? 바로 유명한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등장합니다.
난중잡록(亂中雜錄)
무술년 만력 26년, 선조 31년(1598년)
8월 ○ 명군 5천여 명이 또 전주로부터 이르러 와 율장(栗場)에 주둔하였다가 2일을 머물고 순천으로 향했다.
27일 제독 유정(劉綎)이 친히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부터 임실(任實)에 도착하였다. 군졸이 먼저 남원에 이르러 사방으로 흩어져 나아가 목재를 흑성(黑城)의 용두산(龍頭山)으로 날라다가, 장수의 사관과 군막을 안배하여 짓고, 책(柵)을 설치하고 참호를 팠다.
이튿날 유정이 용두채에 이르러 유진하니, 전후 군대가 총합 4만 7천여 명이었고, 그 가운에 우지개(牛之介) 3명이 있었는데, 키와 몸뚱이가 보통 사람의 열배요,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고, 초원(楚猿) 4마리가 있었는데 말을 타고 놀리는 것이 사람과 같고, 몸뚱이가 큰 고양이를 닮았고, 낙타ㆍ생노루ㆍ3희생과 잡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흥판(興販) 장사꾼이 먼저 오는데 그 수도 또한 많았다. 적과 대치해서 다급한 때에 이르러서도 파는 자가 앞에 있어 소를 죽이고 돼지를 잡아서 찢어서 불에 익혀 놓으면 군졸이 은을 주고 사서 먹었다. 흥판도 또한 소속된 진이 있어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였다. 제독의 일행에 배신(陪臣)ㆍ반신(伴臣)과 본도의 감사가 따랐다. 원수 권율이 백평촌(白坪村)에 와 진을 쳤다. 동로 제독(東路提督) 마귀는 상주로부터 경주로 진군하고, 동일원(?一元)은 성주로부터 삼가(三嘉)로 진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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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면, 분명히 해귀가 4명이라고 나옵니다 (그 앞의 '우지개'는 북방민족의 하나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다음구절의 '초원' 네 마리란건 원숭이를 뜻합니다. 楚山之猿(초산지원- 초나라 산에 사는 원숭이)의 줄임말로 중국 초나라의 한 산에 사는 원숭이가 있었는데 화살을 모두 잡아내는 기술을 가졌다는 녀석들로 [사기]에 등장합니다.
사실 저 그림 '천조장사전별도'의 각 화폭에는 설명이 실려 있는데, 명확히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불랑국(佛浪國)의 해귀 4명은 살결이 검고 누르스름한 머리가 방석둘레처럼 펼쳐졌어도 적선을 잘 뚫었다". 두말 할 나위없이 '실사화'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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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해귀'라는 말은 비단 포르투갈용병만이 아닌, 남만인 (즉 동남아지역)용병들을 총칭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이익의 [성호사설]에 있습니다.
성호사설
경사문(經史門) 유정 동정(劉綎東征)
유정(劉綎)이 동정(東征)할 때 수십 종류의 해귀(海鬼)를 이끌고 나왔다고 한다. 그들은 남번(南蕃 남방의 미개(未開)한 나라. 촉중(蜀中)의 땅임)에서 나왔다는데, 얼굴이 새까만 것이 귀신처럼 생겼고 바다 밑으로 헤엄을 잘 쳤으며, 그 중에 키가 거의 두 길 정도나 되는 거인(巨人)이 수레를 타고 오기도 하였고 또 두 마리 원숭이가 궁시(弓矢)를 허리에 차고 앞장서서 말을 몰아 적진(賊陣) 속으로 들어가 적의 말고삐를 풀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박진(朴晉)은 영천(永川)에서 승리를 거둘 때 진천뢰(震天雷)를 이용했는데, 군기장(軍器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 만든 것으로, 철릉(鐵菱)과 철편(鐵片)에다 인화물질(引火物質)을 더하여 둥근 공처럼 만든 다음 대완구(大碗口)에 집어넣고 불을 이용하여 폭파시키면 능히 5~6백 보의 거리를 날아서 성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왜병(倭兵)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밀어뜨리면서 들여다보다가 포탄이 그 속에서 폭발되어, 철편이 별처럼 부숴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은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이것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하나, 이런 말들은 꼭 믿을 수 없다.
유정은 경주(慶州)에서 왜(倭)를 공격할 때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 왜 해귀(海鬼)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倭船)의 밑을 뚫어 침몰하도록 하지 않았으며, 또 무엇 때문에 원숭이를 시켜 적진(賊陣) 속으로 들어가 불을 놓고 문을 열어 젖히지 못했는가? 박진 역시 왜 진천뢰를 사용하여 가는 곳마다 적을 쏘아 죽이지 않았는가? 전쟁이 끝나지 않은 그 당시에도, 그런 제도의 무기가 발견되었건만 그대로 본받아 만드는 이가 없어서 그 방법이 유실되어 버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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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면 임란당시 해귀라는 집단이 '수십종'이라고 하고 있으며, 어떤 것은 새까맣고, 어떤 것은 거인이 수레를 타기도 하고 (이건 아마 포르투갈 해귀일듯 합니다), '두마리 원숭이 (촉원이겠죠)'가 화살을 지니고 말을 몰아 적의 말고삐를 풀었다는 엄청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를 보면 저 위의 네마리 원숭이 역시 그냥 장난으로 데려온게 아닌거죠.
이익선생은 이런 기술을 가진 용병들과 유명한 비격진천뢰같은 기술을 왜 더 발전시켜서 대량으로 사용,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않았냐라고 질타하고 있는 겁니다.
獸人부대
자 그런데 의문점이 남습니다. 이 그림은 출처나 해귀의 기록을 볼때 '실사화'임이 거의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그 숫자나 생김새를 볼때 위에 등장하는 어떠한 사료에도 이들의 모습과 일치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고 그린' 이 그림에 뜬금없이 없는 군대를 넣을리도 없습니다. 이 그림에 대한 여러 학술자료나 정보를 모아봐도 온통 '해귀'이야기뿐, 이 짐승부대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사실 이런 점이 더 신기합니다 필자는...)
화질이 흐려서 이렇게 밖에 유추할 수 없는데, 현재로써는 유일한 단서가 저 부대의 깃발에 씌여진 글자입니다. 흐려서 확실치 않은데 처음에는 猜?三百 정도로 읽었다가 (猜는 '혐오하다 시기하다 시', ?는 '수레 여'), 초록불님의 댓글을 보고 정병삼백 즉 精兵三百 이 더 맞다는 생각입니다. 즉 강한 정예부대 삼백명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이들은 과연 짐승부대일까요? 아니면 늑대가죽을 뒤집어 쓴 '수인부대'일까요. 일단 공개해두고, 훗날 단서를 얻게 되면 다시 첨부해봐야겠습니다.
사천왜성 전경. 사천왜성은 성벽과 성문이 일부 복원됐으나 원형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고, 지형 역시 매립으로 인해 원형을 잃어버렸다. 우측 상단의 비가 세워져 있는 석단이 천수각이고 위로 보이는 앞바다가 사천해전 현장이다. 사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하, 소장이 얼굴이 색다른 신병(神兵)을 데리고 왔는데 소개하겠습니다.” 정유재란이 치열한 국면으로 치닫던 1598년 5월 26일. 선조 임금이 한양도성 인근에 주둔중인 명군 진영을 방문했다. 명군이 남해안 일대의 왜군을 공격하기에 앞서 한양에 머물면서 전열을 정비하던 때다. 명나라 파견군 장수 팽신고(彭信古)가 선조에게 자랑하듯 신병 소개를 자처하고 나섰다.
“어느 지방 사람이오? 대체 무슨 기술을 가졌길래?”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포르투갈) 사람입니다. 바다 셋을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여 리나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를 지녔습니다.”(‘선조실록’)
선조는 중원 사람들도 보기가 어렵다는 신병을 뚫어져라 살펴봤다. 노르스름한 눈동자에 얼굴빛이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었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에다, 검은색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팽신고는 신병은 칼 솜씨가 뛰어나고,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으며, 또 수일 동안 물속에 있으면서 수족(水族)을 잡아먹을 줄도 안다는 등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16세기의 포르투갈 특수병 해귀
조선에서는 신병을 해귀(海鬼)라고 불렀다. 선조가 본 해귀는 흑인이었다. 해귀는 요즘으로 치면 해군 UDT 같은 포르투갈계 특수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포르투갈은 해외에서 식민지 경영을 하면서 재주 좋은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했다. 명은 마카오를 조차(租借)한 포르투갈로부터 무기와 탄약 등을 사들이면서 흑인 병사(혹은 용병)들을 데려와 정유재란에 참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해귀의 등장은 당시 조선사람들에게는 진귀한 전쟁 뉴스였다. 소문은 왜군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으로 번져갈 정도였다. 해귀를 비롯한 명나라의 다국적 파병군이 한양으로 속속 모여들고 명군을 따라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상인들과 유흥을 돋우는 장사꾼들도 나타났다. 말을 타고 놀리는 품새가 사람 못지않은 원숭이들(楚猿)과 사람인 듯 원숭이인 듯 헷갈리는 원병(猿兵), 낙타, 기이한 노루(生獐) 등 조선에서는 좀체 구경하기 힘든 짐승들도 등장했다(‘난중잡록’). 조선의 수도 한양은 생김새가 색다른 병사들과 이국(異國) 풍물로 국제도시처럼 시끌벅적했다.
해귀는 정유재란 발발 직후 갑작스럽게 조선의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그러나 팽신고가 해귀를 선보인 지 3개월 후인 1598년 8월, 전라도 남원의 명군 진영에서 해귀 4명의 모습이 보였다는 기록을 제외하고는 전투 행적은 찾을 길 없다. 다만 해귀를 데리고 온 팽신고의 이름이 그 2개월 후인 10월, 경상도 사천에서 등장한다. 팽신고는 명나라의 사로병진(동로군, 중로군, 서로군, 수로군) 전략에 의해 중로군 소속으로 사천왜성 전투에 참가했다.
기자는 팽신고의 흔적을 쫓아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바닷가에 있는 사천왜성을 찾았다. 이 왜성은 해귀 뿐만 아니라 또다른 이국(異國) 병사들이 활약했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성 둘레가 약 1km 남짓한 사천왜성은 바닷가와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바다와 접한 구조였다. 육지와 연접한 동쪽의 성벽 밑으로는 해자를 설치했다. 지금은 남쪽과 북쪽 바다가 매립돼버려 원 지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천왜성 앞바다는 임진왜란 시기에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왜군을 격퇴한 사천해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ㄷ자 모양의 건축 구조였던 사천왜성은 성곽과 동쪽의 성문이 복원돼 외형적으로는 옛 성의 정취를 어느 정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성의 가장 중심지인 천수각 자리에 6·25때 전사한 공군 장병 위령탑이 세워져 있어서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사천왜성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각별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천왜성은 일본군 전승지로 관리됐다. 사천왜성의 왜군들을 지휘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후손들이 당시 성터 일부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했다. 천수각 터에 사천신채전첩지비(四川新寨戰捷之碑)라고 새긴 기념비도 세웠다. 1945년 광복 직후 이 지역 주민들이 없애버렸다.
거인(巨人)들의 전투 현장 사천왜성
“요상한 거인(巨人)들이 쇠막대기로 성문을 마구 부수고 있다고?”
1598년 10월1일, 사천왜성의 동쪽 성문을 지키던 초병(哨兵)의 보고에 왜장(倭將) 시마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만 명 규모의 중로군 연합군이 성벽을 겹으로 포위한 뒤 구간별로 분담해 공격해오는 통에 시마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공중으로는 연합군의 ‘불랑기포(佛狼機砲)’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었다. 불랑기포는 모포(母砲·포신)와 자포(子砲)가 분리된 공성용 대형 대포였다. 포탄을 장전한 여러 개의 자포를 준비해두고 하나의 모포에 바꿔 끼워가는 방식이어서, 장전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연속 사격이 가능했다. 잇단 포탄 세례를 맞은 성벽이 서서히 깨지고 허물어지던 중이었다.
“예. 덩치가 엄청 큽니다. 눈이 양옆으로 찢어져 올라갔고요. 수염이 좌우로 나뉘어 얼굴을 덮고 있어서 무섭게 생겼습니다.”
초병은 키가 매우 큰 거구의 병사 6명이 돌격대로 나서서, 성문을 허물고 있다고 말했다. 1만 명도 채 안되는 병력으로 필사적으로 성을 지키고 있던 시마즈는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저격병들을 불러라!”
시마즈는 사쓰마번(薩摩藩) 소속의 다네가시마(種子島) 사람들을 수배해 거인들을 저격하라고 명령했다. 다네가시마 철포병(鐵砲兵, 조총병)들은 총을 매우 잘 다루었다. 100보 떨어진 곳의 나뭇잎도 정확히 맞추고, 날아가는 새도 쏘아 떨어뜨릴 정도로 명사수들이었다. 다네가시마는 포르투갈 사람이 일본에 처음으로 머스킷(Musket) 총을 선보인 곳이다. 그 때문에 다네가시마 사람들은 일찍부터 총 쏘는 기술을 익혀왔다.
거인들은 결국 저격수들의 철포에 맞아서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거인들을 제거한 다네가시마 철포병들은 계속 명군을 사살했다. 명군은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진영을 뒤로 물리려 했다.
설상가상으로 명군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팽신고의 진영에서 불랑기포 화약궤에 불이 붙어 크게 번져나갔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명군들이 놀라 피해 달아나자, 왜군들이 기습적으로 돌격해왔다. 명나라 기병(騎兵)들은 이리저리 뛰며 헤맸다. 보병도 덩달아 우왕좌왕하다가 속절없이 일본군의 총과 칼날에 쓰러졌다. 이렇게 죽은 연합군 전사자 숫자가 7000∼8000명에 이르렀다. 너무나 어이없는 조명 연합군의 패배였다.
일본측 자료에서는 이 전투에서 희생된 거인들을 타타르 사람들이라고 했다. 명나라가 속국 타타르에게 힘센 사람들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자, 특별히 타타르가 선별해 보낸 사람들이라고 했다(‘음덕기(陰德記)’ 제81권). 한국측 자료에서도 거인들의 존재가 나타난다. ‘우지개(牛之介) 3명이 있는데, 키와 몸뚱이가 보통 사람의 10배나 된다(‘난중잡록’)’는 것이다.
한편 타타르의 거인과 함께 참전한 4명의 포르투갈 해귀에 대한 전투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599년 전쟁이 끝난 후 등장한다. 조선화가 김수운(金守雲)이 철수하는 명군들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서 해귀 4명이 보인다. 사천왜성 전투에서 희생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국적 연합군 중 누가 제일 센가
정유재란이 끝난 후 철수하는 명군들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위의 그림). 아래 그림은 수레를 탄 해귀(海鬼)와 원병삼백(猿兵三百)이라는 깃발 아래의 원병들을 확대한 것이다. 이 그림을 설명하는 표제에는 ‘불랑국(포르투갈)의 해귀 4명은 살결이 검고, 누르스름한 머리가 방석둘레처럼 펼쳐졌어도 적선을 잘 뚫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해귀는 포르투갈 특수병만 지칭하지는 않았다. 잠수 실력이 뛰어난 동남아시아 출신 해귀들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로군이 사천왜성 전투를 한창 치를 무렵, 서로군을 맡아 순천 왜교성 공략에 나선 명 제독 유정(劉綎)은 수십 종류의 해귀를 이끌고 나왔다(‘성호사설·경사문’).
유정은 중국 남쪽의 소수민족인 남만(南蠻)들을 정벌한 경험으로 동남아시아 출신들을 대거 사병(私兵)으로 삼아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정유재란 때도 그랬다. 그런 유정을 오랜 세월 따라다닌 수하 장수가 다국적 병사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달자(8子, 몽골 계통)는 상대하기 쉽고, 해귀(海鬼, 남만 계통)는 약간 강하고, 왜자(倭子, 일본군)가 가장 강하다. 순천 왜교성 싸움에서 적의 수급을 가장 많이 베어 온 군사는 모두 조선 사람으로서, 귀화하여 한군(漢軍)이 된 자들이었다. 제독이 매우 중히 여겨 조선군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따라간 자가 300명이었다.”(‘성호사설·인사문’)
실제로 유정은 명나라로 귀국할 때 용맹한 조선인들을 가정(家丁)으로 삼아 데리고 갔다. 조선 영·정조 시기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도 이때의 다국적군 기세를 설명하고 있다.
“묘병(苗兵, 묘족 병사)은 귀병(鬼兵)이라고 해서 전투에 참가할 때 반드시 먼저 성에 올라가긴 했지만 왜구를 보면 지레 기가 꺾였다. 중국 군대는 더 그랬다. 그러나 조선인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잘만 쓴다면 천하의 막강한 군대가 될 수 있다.”
조선의 군사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투력이 강하기도, 약하기도 했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다국적 연합군의 전쟁인 정유재란은 세계 각국 군사들의 전투력을 비교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정유재란은 또 동원된 무기 면에서는 세계대전과 다를 바 없었다. 16세기의 최신형 무기인 일본의 철포(鐵砲)와 중국의 불랑기포는 당시 막강 무력을 자랑하던 포르투갈이 전수해준 것이다. 정유재란이 인적 물적 자원 모두에서 국제전 양상을 띤 것은 유럽의 힘을 이용하려 한 히데요시의 오랜 책략, 그리고 이에 편승한 유럽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욕구 등이 얽히고설킨 결과였다.
1751년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의 '팔도론·충청도'에는 이처럼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이 나타나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사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 '임진왜란 소사전투의 명(明) 원군(援軍) 원숭이 기병대'를 연구모임 '문헌과해석'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실기(實記)를 통해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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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교수, 참전 인사들이 남긴 明의 특수부대 기록 발견
[동아일보]
《 “명나라의 양호(楊鎬)는 원숭이(弄猿) 기병 수백 마리를 데리고 소사하(素沙河)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서 매복하게 하였다. 원숭이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쳐다만 보았다. 혼란에 빠져 조총 하나, 화살 하나 쏴 보지도 못하고 크게 무너져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
1751년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의 ‘팔도론·충청도’에는 이처럼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이 나타나 있다. 현재 충남 천안 일대인 소사(素沙) 지역의 전설을 소개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평양, 행주산성 전투와 함께 육상에서 거둔 삼대첩(三大捷)으로 꼽히는 소사 전투(1597년)를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원숭이 기마부대의 활약상은 마치 판타지 영화나 군담소설(軍談小說)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극적이고 환상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종전한 지 150여 년이 흐른 뒤에야 택리지가 작성됐고, 이전 조선의 문헌이나 명·일본의 사료에선 원숭이 부대의 활동을 찾아볼 수 없어 설화나 야사(野史)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명나라 원숭이 특수부대의 실체를 밝혀줄 연구가 나왔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사들이 원숭이 부대의 존재를 기록한 문헌이 발견된 것.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사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 ‘임진왜란 소사전투의 명(明) 원군(援軍) 원숭이 기병대’를 연구모임 ‘문헌과해석’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올해는 임진왜란이 종전한 지 420주년이 되는 해다.
○ 참전 용사의 기록에 나타난 원숭이 기병대
임진왜란 기간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손기양(1559∼1617). 1598년 7월 21일 그의 일기에는 명나라의 지휘관 유정(劉綎) 부대를 둘러보고 왔던 종의 눈에 비친 신기한 구경거리가 기록돼 있다. “유정의 군진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초원(楚猿·원숭이)과 낙타가 있다고 했다.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고, 낙타는 물건을 운반할 수 있다고 한다.”
손기양은 일기를 간단히 남긴 편이었는데 전쟁의 참혹한 전투 상황만큼 시선을 끈 것은 다름 아닌 원숭이와 낙타였다. 임진왜란 당시의 실기(實記)를 통해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임진왜란을 가장 자세하게 서술했다고 평가받는 조경남(趙慶男·1570∼1641)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경남이 직접 명나라 부대를 확인한 후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원숭이 기동대의 존재를 묘사한 것이다. 그의 기록은 택리지의 설명과 거의 완벽하게 부합한다. “군사 가운데 초원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
○ 그림 속에 등장한 원숭이 병사들
그림을 통해서도 원숭이 부대의 실체가 확인됐다. 경북 안동의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오는 ‘세전서화첩(世傳書(화,획)帖)’. 32점의 그림과 문헌 등으로 구성된 이 화첩 가운데 1599년 2월 명나라의 14만 대군이 본국으로 철군하는 장면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가 있다. 이 그림의 왼쪽 하단에는 ‘원병삼백(猿兵三百)’이란 깃발 아래서 유인원(類人猿) 열 마리가 칼을 들고 행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원숭이 병사 300명이란 의미다. 안 교수는 “서구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전투가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에서 펼쳐졌다”며 “이번 연구를 계기로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원숭이 부대의 활약을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