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문서에 나오는 쿠다라어 사전
白 밝(하쿠) ->白의 음독, 倭에서는 훈독표기로 하카타 , 하타 계열 단어. f발음 표기 혼란으로 h로 나타남.
村 (쓰키) -> 喙(탁),達(달) 진한어로 고향을 부를때 쓰는 말이다. 왜어에는 ㅌ표기가 혼란되어 ㅊ,ㅆ로 나타남
江 내(노에) 삼국시대에는 강을 냇물등을 뜻하는 나,내로 불렀다.(비류나=비류강, 아리나=아리수)
백촌, 하타, 비다쓰, 비조, 비사, 백설 이런 '백제 또는 빛' 계열의 가차발음들은 전부 백제의 별칭이다.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대전, 백강구 전투!!
일본(倭)은 왜 전함 1,000척을 백제에 파병했나?
663년 8월 전북 부안의 동진강 입구,
나당연합군 대 백제부흥군 10만여 명이 대전투를 벌인다.
"백제·왜·신라·당이 참전한 국제대전, 백강구전투"
일본천황은 무려 2년 반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전함 1,000척과 병력 2만7천명의 대규모 파병을 강행한다!
왜의 파병 명분과 목적은 무엇인가?
파병을 직접 지휘한 천황과 백제의 관계를 추적한다.
나당연합군 vs 백제부흥군
-<백강구전쟁>, 동아시아 모든 세력이 충돌한 최초의 국제대전!
백제는 660년 13만 나당연합군(신라와 당의 연합)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의 활발한 전개로, 곧이어 주류성을 수도로 하는 '백제부흥국'을 다시 세우게 된다. 이에 신라와 당은 2차 연합군을 결성,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킬 준비를 한다. 바로 이 백제부흥세력과 나당연합군이 663년 한반도 서남해 백강(지금의 동진강)에서 맞붙은 전쟁을 '백강구 전쟁'이라 한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백제부흥군을 위해 대규모 파병을 강행했다.
동아시아 판세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백강구 전쟁! 우리는 왜의 대규모 파병에 주목했다.
왜(倭), 백강구 전쟁에 국가의 명운을 걸다
- 2년 반의 준비기간!
- 1,000척의 전함과 2만7천명의 병력 파병!
왜의 파병 준비과정이나 규모를 보면 단순한 군사 원조 이상이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황, 그럼에도 천황은 660년 백제가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즉각적으로 모병에 나섰다. 천황은 파병 준비를 위해 항구인 난파궁으로 옮기고, 직접 후쿠오카까지 오가며 파병 준비를 독려했다. 사실상의 천도에 가까웠다.
이렇게 총력을 다해 준비한 지 2년 5개월 만에 1,000척의 배와 2만7천 명의 군사가 백제로 출발했다. 당시 일본 총 인구가 500만임을 감안할 때,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파병이었다. 이렇게 일본이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강구 전쟁에 참전한 까닭은 무엇인가?
파병의 목적은 무엇인가?
- 참전의 주체는 백제계 도래인!
일본이 파병한 이유를 두고, 한 · 일 역사학계는 극명한 해석의 대립을 보인다. 일본 사학계는 이 전쟁을 침략 사관의 논거로 삼기도 하는데...
일본 오카야마현 길비군에는 제명천황이 백강구 전쟁 모병 시 병사 2만7천명을 얻었다 해서 붙여진 '니만향'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 신사에는 백제식 유물과 축성술을 엿볼 수 있는 등 백제 도래인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8세기까지 일본 인구 7,80%가 한반도 도래계라는 논문이 일본인에 의해 발표됐다.
그렇다면 파병은 백제 도래인들의 조국구원전쟁이란 말인가? 현지취재를 통해 파병 주체의 성격을 파헤친다.
백제파병에 적극적으로 나선 천황가!
- 천황이 백제인이다?
백제의 파병 요청을 받을 당시 제명 천황은 60대 중반을 훨씬 넘긴 여왕이었다. 당시 국내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명천황'은 강한 의지로 파병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명천황이 죽자, 아들 천지천황이 어머니의 뜻을 이어 파병을 이루어냈다. 상을 치르기 전에 즉위식도 하지 않고 파병 준비를 계속하며 변함없는 파병의지를 천명한다.
한편 제명천황의 남편인 서명천황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궁과 백제대사를 지었고, 고대 일본의 주요 성씨들의 출신을 분석한 <신찬성씨록>에는 서명천황의 할아버지인 민달천황이 백제왕이라고 전한다.
천황은 과연 백제인일까? 백제와 일본 천황가의 관계, 그 진실을 추적한다.
일본(倭)은 왜 백제부흥에 사활을 걸었나.
663년 8월.
백강이라 불린 한반도 서해안 동진강하구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이 벌어진다. 당나라와 신라가 결성한 나당연합군 대 백제와 왜 연합군이 맞붙은 사상 최대의 해전이었다.
4개국에서 동원된 군사가 10만 명. 전선 1,170척.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백제부흥세력 이를 저지하려는 나당연합회군 간에 벌어진 이 백강구전쟁은
이후 1300년간 동아시아의 판도를 가르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된다.
동아시아 3국, 한국 중국 일본.
역사적으로 이 세 나라가 자국의 운명을 걸고 싸운 전쟁이 3번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1594년 임진왜란때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가 맞붙었고
1894년 청일전쟁 때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이 두 전쟁은 삼국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이룬 전쟁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는 쇠퇴의 길을 걸었고 일본은 개항을 단행했습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한 계기가 되었지요.
그렇다면 동아시아 삼국이 맞붙은 또 하나의 전쟁.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요?
663년8월 한반도 서남해에서 벌어진 백강구 전쟁입니다.
신라와 백제, 일본, 당시엔 왜였지요. 그리고 당나라까지
당시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이 최대 병력을 동원해 물러설 수 없는 일대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663년이라면 백제는 이미 멸망했을 때인데요.
660년 사비성 함락으로 멸망했다고 알고 있는 백제가 3년 뒤인 663년 국제전에 나선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선 백강구 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옛 백제의 땅인 이곳엔 한 신라의 장수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그 신라의 장수는 다름 아닌 삼국통일전쟁을 이끌었던 명장 김유신.
김유신의 사당이 멀리 백제의 땅에 세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사당을 관리하고 있는 부안의 김해김씨 문중을 통해 그 내력을 알아보았다.
보령원의 역사를 기록한 보령원지에는 조선 성종시대에 정리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공로를 인정해,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이 일대 땅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이인기 보령원 관계자에 말에 따르면
“백제가 결국 나라가 망한 뒤에 부흥군을 일으키잖아 성을 쌓고 하니까 김유신 장군이 다시 와서 그걸 쳐 부숴버린 거예요 그 말하자만 복신이라니까 여기 와서 주류성을 쌓고 그러니까 일본하고 통해가지고 부흥운동을 했거든 그러니까 못 쓰겠구나 해서 다시 와서 소멸을 한 거예요.”
조선시대에 삼국통일을 완성한 결정적 사건으로 인정했던 그 전쟁은 663년 백강구에서 벌어졌다.
13만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한 것은 660년.
불과 1주일 만에 사비성은 함락됐고, 의지왕과 왕자들은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곧바로 백제부흥군이 결성됐고, 이후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해, 사비와 웅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을 회복해나갔다.
그때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장수가 귀실복신이다.
무왕의 조카로 알려진 복신은 도침, 흑치상지와 함께 백제 유민과 군사를 모아 망한 나라 ‘백제’를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부흥 운동이 절정에 이르자 복신은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진다.
660년 8월 복신은 일본에 군사를 요청하는 동시에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부여풍’ 의 귀국을 청한다.
왜는 의자왕 때 우호관계 있었다. 이전에도 백제 도와서 왜가 군대 보내는 일 많다. 광개토대왕 때도 있었고 관산성 전투 때도 그랬다.
그로부터 1년 뒤 부여풍은 백제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는 복신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즉위했다.
사비성 함락 이후 세워진 또 하나의 백제.
부흥백제국 풍왕이 된 것이다.
부흥백제국의 본거지는 전북 부안의 주류성.
해발 508미터의 능가산에 세워진 이 성은 지금은 우금산성이라 불리고 있다.
부흥백제국은 이 주류성에서 사비성 탈환을 위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류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로프에 의지해야 할 만큼 매우 험난했다.
한 시간 가량 어렵게 산을 탄 끝에 주류성 정상에 올랐다.
멀리 서해바다까지 변산반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비와 웅진이 있는 곳은 북쪽.
내륙에서 뻗어 나온 동진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
그곳에 주류성이 있다
주변 산 능선을 따라 성곽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서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무려 4킬로미터에
달한다.
백제부흥군이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주류성은 바위산으로 험준한 요새.공격 받기 어렵고 수비하기 좋아
이곳에 백제부흥군 도읍정해 자연조건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계곡을 둘러싸는 이 포곡식 산성은 쉽사리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다.
이처럼 강고한 주류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웅진 도독 유인원은 본국 당나라에 추가 병력을 요청한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바쁜 와중에도 당은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를 투입한다. 여기에 문무왕과 김유신이 이끄는 대병력도 함께 했다
또 한 번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부흥 백제국을 도와주러 달려온 구원군은 왜군이다.
663년 3월 일본을 출발한 왜군은 8월 백강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1300년 전 백강이라 불린 동진강.
드디어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해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 당시 각국의 병력배치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신라 문무왕과 장군 28명이 이끄는 신라군이 당나라 육군과 함께 웅진성에서 주류성으로 남하했습니다.
백제 풍왕은 일본의 지원군 중 선발대 1만 명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주류성에서 나와 백강으로 나갑니다.
그러자 웅진에서 남하한 신라와 당나라 육군이 주류성을 포위했습니다.
당나라 전선 170척도 백강으로 내려와 집결했습니다.
이어서 일본에서 왜선 천척과 병력 2만7천명이 추가로 건너와 백강에 정박했고,
백제의 정예 기병이 강변에서 왜선을 방호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신라군 기병을 선두로 한 나당의 보병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라와 당, 백제와 왜 등 당시 동아시아 네 나라 군대가 모두 백강에 집결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지요.
이 병력을 모두 합하면 약 10만 명의 군사와 전선이 1,200여척이나 됩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백강에 모인 것입니까?
나당 연합군의 목표는 바로 백제부흥국의 수도인 이 주류성입니다.
주류성만 함락시키면 다른 성들은 저절로 항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반면에 백제부흥군이나 왜의 입장에서는 주류성이 함락되면 백제는 그대로 망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류성과 연결되는 백강에서 총력을 기울여 대항했던 것입니다.
바다를 거슬러 올라온 왜군은 주류성을 지키기 위해 백강, 지금의 동진강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여러 차례에 걸친 간척사업으로 강폭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당시 백강은 바다와 연결된 큰 하구를 가지고 있었다.
663년 8월. 드디어 전쟁은 시작됐다.
당나라 수군은 170척,
왜군은 전선 일 천척에 군사가 2만7천이었다.
수적으로는 당연히 왜군이 유리했다.
한창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던 중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왜군 쪽을 향했다.
당나라는 때를 놓치지 않고 불화살 공격을 시작했다.
한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운 대격전이었다.
드디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나당연합군이나 백제 부흥군 모두 나라의 존폐가 좌우될 만큼 중요한 전쟁인지라
가능한 병력을 총동원합니다.
그런데 이 때 각국을 놀라게 한 것이 바로 전선 1000척에 2만7천명이라는 왜군의 규모였습니다.
도대체 일본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많은 군대를 백강구 전쟁에 파병한 것일까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고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공표한 것도 아니고
백제부흥군과 일본, 당시 <왜>가 파병을 조건으로 어떤 협약을 맺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당장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대규모 군대를 꾸려 백강으로 보낸 것입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요?
먼저 파병 결정 과정에서 출전까지 일본의 파병 준비상황부터 점검해보겠습니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후쿠오카의 하카다항.
이곳 하카다에는 백강구 전쟁 당시 일본의 파병준비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적이 남아있다.
7세기 당시의 행정관청이었던 나노오쓰 관가 터
발굴당시 나노오쓰 관가 터 유적은 그 규모로 인해
일본 학계를 놀라게 했다.
건물을 세웠던 기둥 자리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는데
일반 건물이 10동, 창고가 10동이나 확인됐다.
행정관청이자 군수창고였던 셈이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대외적으로 일본과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지는데요.
그러한 가운데 기나이(오사카 일대)에서 사이메이(제명) 천황이 이곳에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요/아마도 이 주변, (후쿠오카) 하카타 만 연안에 주류하고 있던 군대가 한반도로 가서 백촌강 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나노오쓰 관가에 모아진 물자 중에는 전쟁에
대비한 무기도 있었다.
칼과 화살촉 등 각종 철제 무기류들이다.
는 곧 백강구 전쟁을 위한 준비였다.
한반도의 정세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 그러한 시설, 그 중에는 식량을 비축한다든지...식량이라든지 무기 등을 비축해서 한반도에서 사변이 일어나면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그러한 두 가지 기능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일본서기에는 당시 일본이 백제 구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많다 파병을 위해 철저하기 무기와 물자, 군사를 준비한 것이다.
2만7천명의 군대는 전 군대를 모은 것이다.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파병준비는 당시 일본왕이었던 사이메이, 즉 제명여왕이 직접 맡았다.
660년10월.
제명여왕이 머물고 있던 아스카 판개궁에
나당연합군의 침공과 백제의 멸망을 알리는 사신이 도착한다.
일본의 지원을 요청하는 백제부흥군 복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제명여왕은 신속하게 파병을 결정하고 오사카로
그 거처를 옮긴다. 항구인 오사카가 파병준비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제명여왕은 단순히 거처를 옮긴 것이 아니었다.
차기 대권을 이을 왕자들과 왕실인사, 최고대신까지 왕실과 조정의 중요인물은 모두 이끌고 나섰다.
사실상 천도였다.
백제가 멸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일본에게) 대단히 큰 위기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결코 일본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의 전쟁이 아닌 자신들과 관계가 있는 전쟁이라는 인식이 백촌강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제명여왕은 곧바로 파병준비에 돌입했다.
이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백제에 군사를 보낼 전선, 배였다.
당시 배를 만들도록 명령을 내린 스루가국은 오늘의 시즈오카. 현재도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 중심 도시다.
기록에 의하면 백강구 전쟁에 동원된 왜선은 일천척.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시즈오카에 남아있는 12세기 통나무 배.
5미터가 넘는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서 배를 만든
것인데 이 통나무 수령이 350년이나 된다.
시즈오카엔 배를 만들 수 있는 이런 목재들이 풍부했다.
이 아래 마루키부네(통나무 배)가 상징하듯이 토모에 강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배를 만드는 기술이나 바다와 관계되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최근에 발견된 자료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7세기에 배 일천척을 만들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물자와 인력이 필요했을까.
경력 40년의 일본 고 선박 전문가 곤도 유이치로.
놀랍게도 그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저희들이 지금 배를 만들고 있습니다만, (전선 1,000척을 만들어 외국에 보내는) 그런 일은 조금... 한 나라의 국민이 총동원되어도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세기, 백제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 일 천 척을
만들려면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동원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9세기 장보고 선박을 복원하고 있는 국내 고 선박 전문가를 찾았다.
0미터 규모의 배를 4분의 1로 축소해 복원하는데 3명의 전문가가 투입돼있다.
이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대략 배 한 척당 조선기술자 6명에 잡부 4명, 총 10명이 2년간 매달려야 한다. 따라서 당시 일 천 척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 역사였다.
백제 부흥에 왜 조정이 사활을 걸었다. 총력전으로 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사카에서의 파병 준비를 일단 마친 제명여왕은 승리를 위한 또 다른 절차에 착수한다.
아스카의 주선석 귀형석 유적.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야
파병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일
제명 여왕이 손을 씻고 입을 헹구어 정결하게 한 후
백강구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가졌다는 유적이다.
“물을 사용한 의식인데요. 천황이 하는 것이죠. 백촌강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필승의 기원 의식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최고통치자의 진두지휘아래 물자와 무기를 모으고 성대한 의식까지 치렀다.
백제를 구원하는 전쟁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이다.
2년 5개 월 간 일본 전역에서 모아진 물자와 군사들은 최종적으로 후쿠오카에 집결했다.
663년 3월, 드디어 왜군은 후쿠오카를 출발한다.
당시 일본 인구는 500여만 명.
군사 2만7천명에 전선 일 천 척이 동원된
백강구 전쟁은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파병이었다.
국제전에 자국의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나라 전체의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6,70년대 베트남전과 최근 이라크전에 군대를 파견한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때 파병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은 바로 <국익>이었습니다.
일본도 분명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백강구 전쟁에 파병을 했을 것입니다.
과연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 백강구 전쟁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왜군의 백강구전쟁 참전 이유,
과연 어떻게 보고 있는 지 자세하게 검토해보겠습니다.
일본 사학계의 백강구 전쟁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20년대부터 활발하게 전개됐다.
현재 서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관련서적만도 6종류.
그 중에서 2만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는 도오야마 미츠오가 쓴 <백촌강>이다.
도오야마는 일본의 참전이유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도오야마는 당시 일본의 속국이었던 백제가 당나라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일본 이를 되찾기 위해 벌인 싸움이 백강구 전쟁이라고 설명한다.
인터뷰/도오야마 미츠오 ‘백촌강’ 저자, 학습원 대학 강사
“백제와 신라보다는 일본이 상위에 서 있었다고 할까,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려고, 그러한 관계를 만들려고 한 군사개입이라고 할까. 간단히 말씀드려 일본이 중국과 같이 한반도의 위에 서는 대국(大國) 일본이라는 꿈을 갖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오야마의 주장에는 당시 일본이 백제나 신라보다 상위의 나라, 더 강성한 나라였다는 뜻이 내포돼있다.
이는 비단 도오야마 개인의 주장이 아니다.
백강구전쟁 해석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 책에서는
고대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짓고 있다.
신라를 복속하고 있던 강대국 당나라의 ‘대제국주의’와
백제, 고구려로부터 조공을 받던 일본의 ‘소제국주의’가
맞붙은 전쟁, 그것이 백강구 전쟁이라는 것이다.
인터뷰/이재석 고대 교수
“한반도만큼은 일본 영향력 미치는 나라, 즉 일본이 상위나라였다고 생각하고자 하는 의도 중국세력 넘어오니까 대응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일본 학계가 이렇게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는 무엇일까.
후쇼샤 출판사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4세기 일본 야마토조정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점령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쓰고 있다
일본이 한 때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
향추궁신사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인공인 신공황후를 기리는 신사다.
신공황후는 임신 중인 몸으로 직접 한반도로 건너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른바 삼한정벌의 주인공이다.
당시 한반도와 왜의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은 이 삼한정벌론을 많은
일본인들은 지금도 사실로 믿고 있다.
향추궁 신사에는 천육백년 전 신공황후가 한반도 정벌을 마치고
돌아와 심었다는 나무도 있다.
인터뷰/우에다 고오 향추궁 신사 궁사
“(삼한에서) 이곳으로 돌아오셔서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고르시고 이곳에서 손수 삼나무를 심으셨습니다. 단지 심은 것이 아니라 기도를 담아서, 기도를 깃들여서 심으셨습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나라를 평화롭게 지키겠다.”
또한 1922년 군국주의가 왕성하던 무렵 당시 대정황후는 이곳에 함포를 하사했다.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본 역사의 상징이 바로 신공황후였던 것이다.
과연 백강구전쟁은 신공황후가 세운 식민지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나오끼 교수 원로사학자 나오끼 교수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일본 고대 역사와 천황에 대해 연구한 그의 책에 따르면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백강구 전쟁을 토대로 만들어진 전설이다.”
인터뷰/나오끼 고지로우 오사카 시립대 명예교수
“신공(神功)이라는 이름은 나라시대 8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본래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4세기 당시의) 오키나가 ‘타라시’ 공주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러한 이름의 천황이 계속 없다가 7세기의 서명과 황극(제명) 천황이 각각 오키나가 ‘타라시’, 아메도요타까라이카시히 ‘타라시’인데, 이러한 7세기의 이런 천황들을 모델로 해서 4세기의 신공황후 전설, (신공황후라는) 이름까지 포함해서 모두 7세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공황후와 백강구 전쟁의 파병을 주도한 제명여왕은 여자였다는 점, 이름이 똑같은 타라시였다는 점, 그리고 신라와 싸우기 위해 해외원정에 나섰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닮아있다.
인터뷰/나오끼 고지로우 오사카 시립대 명예교수
“ (백제) 원조군을 격려하고 그러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 필요를 느낀 것은 아닌지... 제명천황이 백촌강에 갔는데, 백촌강 전쟁의 출병이라고 하는 것은 최대의 출병이었고 신공황후의 이야기를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663년 백제 부흥을 위해 출병했던 백강구 전쟁.
이 분명한 사실은 신공황후 삼한정벌론의 모태가 된다.
백강구 전쟁이 역사 왜곡의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그 결과 이번에는 삼한정벌론이라는 허구를 토대로
백강구 전쟁을 해석하는 역사왜곡이 되풀이되고 있다.
“백강구 전쟁은 한반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일본 학자들의 이런 논리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8세기 때 만들어진 이 일본서기는 백강구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교과서가 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일본서기를 자세히 검토하면 이런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 서기>는 백강구 전쟁 파병의 동기를 <복신의 뜻에 따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복신은 백제부흥군을 이끈 총대장입니다.
이는 백제의 지원 요청에 의해 군대를 파견했다는 뜻입니다.
백강구 전쟁에 참전한 왜군은 <왜> 조정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파견한 군대가 아니라
백제 부흥군의 요청에 의해 출전한 지원군인 것입니다.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부여풍지중>...<당시 일본군은 부여풍의 무리다>
이는 당나라가 백강구에 온 <왜군>을
백제 왕자 부여풍이 이끄는 무리, 백제의 군대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백강구 전쟁에 참전한 왜군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아스카에서 오사카로 거처를 옮긴 제명여왕은
본격적으로 파병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서기에는 제명여왕의 준비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