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백강구전투 [百江口戰鬪]를 아시나요?

이름없는풀뿌리 2016. 1. 10. 22:27

https://youtu.be/SnftcR42mWQ

역사스페셜 / 백강구전투

 
 
백강구전투 [百江口戰鬪]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의 전투
663년 ~ 663년
금강 입구(추정)
 
660년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주체가 되어, 일본의 지원병과 합세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과 벌였던 국제적인 싸움.
 
일명 ‘백강구전(白江口戰)’·‘백강전쟁(白江戰爭)’이라고도 한다.『구당서(舊唐書)』·『삼국사기』에는 ‘백강구(白江口)’라 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 하였다.
 
이곳이 지금의 어디인가는 아직 정설(定說)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종래의 연구가 그러했듯이 백강구전쟁의 종합적인 연구가 모아지는 것으로 진전된 것이 아니고, 일본의 전적지(戰跡地)를 찾는 데만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거의 음성학적으로 위치를 비정하다 보니 많은 지명이 등장하는 혼란만 낳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백강구전의 현장을 찾는데 기준이 되어야 할 몇 가지 점은 ①일찍부터 일본과의 교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 ②당나라 수군(水軍)이 백제로 진입하는 데 있어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국토수호의 길목인 곳, ③웅진강(熊津江)에서 주류성(周留城)에 가까운 곳 등이다. 현재까지 유리한 곳으로는 ①군산포(群山浦), ②금강(錦江), ③동진강(東津江), ④홍성(洪城), ⑤부안(扶安) 등의 설이 있다.
 
이들 지명이 근대에 와서 부각되는 이유는 전쟁 앞에 붙이는 단순한 고유명사에서가 아니라 일본사람들에 의해 특수명사로 전도되어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아직도 고유명사화된 개념으로 수용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백강구전은 백강구라는 지명에 전쟁이라는 보통명사를 붙인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탈과 함께 가야의 실지회복(失地回復)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골격을 맞추는 데 사용된 특수개념으로 반영되었다.
 
[경과]
 
당시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이를 지원(조병)하기 위한 결단은 일본 내부의 지배세력이 친백제계(親百濟系)로 전환했을 때 이루어졌다. 그들이 동맹국에 행했던 파병은 고래로부터 연계(連繫) 결속된 특수관계에 있었던 백제에 대한 귀소성적(歸巢性的)인 행위로 볼 수 있는 일면도 있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가 일방적으로 관계기록만을 믿어 당시 국제관계의 추이를 파악하는 데 다소 장애요인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즉, 일본중심의 원정군 파견이라는 일면에다 각색을 했던 바, 이것은 전대(前代)의 4∼5세기 고대 한일관계에서 문제되는 것과도 유사하다. 그 내용은 일본이 파견한 지원병이 백강에 당도해 당나라 군대와 당당히 맞상대로 싸웠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①그들의 국제적 지위가 당시 당나라와 서로 비견되는 강국(强國)이라는 것. ②백제를 보호하는 후견국(後見國)의 입장에서 경사적(傾斜的)인 상국(上國)에 있었다는 것. ③신라의 영토확장에 의해 가야를 상실했던 이른바 남한경영지(南韓經營地)를 다시 구축하기 위한 계기를 이들의 군사행동에 맞추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철수와 재탈환이라는 사이클(cycle)로 날조하는 데 이용했던 것 등이다.
 
더욱이 백강구전을 이른바 당시의 국제전쟁으로까지 격상시켜 부르기를 즐겨 하였다. 국제전쟁이란 참전국의 다수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일본사(日本史)에서 남북대립의 개념을 적용하면서 이 전쟁의 해석을 미화시켰다. 당시 일본은 당나라와 비교될 수도 없는 작은 세력인데도 국제적인 위치 상정을 당나라와 대항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당전쟁(日唐戰爭)’으로 꾸몄다.
 
그리하여 백강구전 발단의 역사적 배경을 현 무문정변(武門政變)→당 태종(太宗)의 유조(遺詔)까지로 넓히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대륙문화를 직접 수용하는 통로를 주장하는 것과도 일치하는 논리이다. 이와 같이 백강구전을 당시 국제전쟁으로 승격해 부른 것은 당나라의 대립세력이 일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국제관계에서의 역할을 거의 일본중심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된 시각이다.
 
왜군의 출병은 한반도 형세에 대한 판단에 기초를 둔 것이다. 간접적인 지원으로는 당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백제의 부흥운동 세력이 진압되면 왜군은 더 이상 한반도에 손을 내밀 기회가 없어질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출병을 결정한 것이다. 663년에 이르러 왜국이 비로소 백제에 출병한 것은 완전히 왜국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여 결정한 것이지, 진심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왜국은 한반도가 당의 영향 하에 들어가는 것은 곧 일본열도에 대한 위협이라는 생각에서 백강구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일본의 군사적 원병에 대한 경위는 일본사료에 비교적 상세하다. 이들이 국가의 정규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인원은 세 차례에 걸쳐 총 4만여 명의 대규모였다. 이들이 백강에 도착해 정박하고 있었던 때부터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인다. 이들이 당도한 것은 663년이다.
 
백제 멸망 후 663년 무왕의 종자(從子) 복신(福信)이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을 본거지로 삼아 백제부흥병을 일으키고자 할 때 먼저 왜(倭)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 때 이미 왜에 질자(質子)로 파견되었던 왕자 부여 풍(扶餘豊)이 귀국함으로써 자못 그 세력이 한 곳, 즉 백제부흥에 모였다. 그리하여 부흥군은 백제의 북서부일대가 중심이 되어 유인원(劉仁願)의 부대를 포위하였다.
 
[결과]
 
백제부흥군의 공격에 당황한 당나라는 증원군으로 웅진도독(熊津都督)인 유인궤(劉仁軌)로 하여금 신라군과 연합전을 펴게 하여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백강구전은 광의로 백강구에서의 교전과 퇴로에까지 전개된 주류성(周留城)싸움을 포함한다. 주류성은 당시 민중봉기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신라의 육군과 정기(精騎)가 투입되어 이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유인궤(劉仁軌), 별수 두상(別帥 杜爽)과 부여 융(扶餘隆)은 수군(水軍)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향하던 중에 왜선(倭船)을 백강에서 만나 네 차례의 교전을 치렀는데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 때의 전과는 왜선 400척을 불태웠고, 침몰하면서 내뿜은 연기와 불기둥이 하늘을 온통 덮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나당연합군으로부터 협공된 해전에서 백제는 급히 정기를 파견해 백강의 안상(岸上)에서 왜선을 수비했지만 당나라의 뛰어난 해전술에 밀려 일격에 대참패를 당하였다.
 
한편, 백제의 부흥운동은 부여 풍을 맞아 영군장군(領軍將軍) 도침, 상잠장군(霜岑將軍) 복신을 중심으로 조직을 갖추었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는 내홍(內訌)이 일어나자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무너져갔다. 부여 풍이 고구려로 도주하자 지수신(遲受信)은 임존성(任存城)에 의거해 계속 저항하였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강구전의 기사는 신라의 전승과 더불어 부상되고 있지만 실제로 백제의 저항도 여기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의의와 평가]
 
신라는 이 전쟁 후 당나라와 충돌하게 되었으나 이를 적절히 조정하면서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본은 애당초 그들의 문화수입과 대륙교통에서 백제의 기반이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지막 소망도 이루지 못함으로써 이후 대외정책이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또 일본의 정치지도는 신라가 백제를 대신해 진출하였다.
 
백강구전투는 일본의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의 정신적·문화적인 향백제(向百濟)에로의 귀소성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백제파병은 당시 일본 국내문제의 돌출구를 대외로 전환하는 권력연장 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며, 여기에는 대외관계와 더불어 사회·문화적인 수요와 결합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구당서(舊唐書)』
『일본서기(日本書紀)』
『백제 멸망의 진실』(양종국, 주류성, 2004)
「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특집논문:7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왜국의 대한정책(對韓政策)-」(연민수, 『신라문화』2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4)
『백제 부흥운동사』(노중국, 일조각, 2003)
『백강구전쟁(白江口戰爭)과 백제·왜관계(百濟·倭關係)』(변인석, 한울, 1994)
「백강구전쟁을 통해서 본 고대 한일관계의 접점-백강 백강구의 역사지리적 고찰을 중심으로」(변인석, 『동양학(東洋學)』24, 1994)
「백강구전(白江口戰)의 서설적 고찰(序說的 考察)」(변인석, 『부산사총(富山史叢)』1, 1986)
「칠세기중엽 백강구전(七世紀中葉 白江口戰)의 연구사적 검토(硏究史的 檢討)」(변인석, 『부산사총(富山史叢)』2, 1986)
『白村江』(遠山美都男, 講談社, 1997)
『白村江の戰いと任申の亂』(小林惠子, 現代思潮社, 1988)
『白村江』(鬼頭淸明, 敎育社, 1981)
『白村江』(鈴木治, 學生社, 1975)
「百濟救援の役後の日唐交涉」(鈴木靖民, 『續日本古代史論集』上, 1972)
『百濟の役』(八木充, 小葉田淳退官記念國史論集)

 

 

 

조국 부흥 전쟁. 백촌강(白村江 : 하쿠쓰키노에) 전투

http://enjoyjap.egloos.com/1960047

はくすきのえのたたかい

우리집 문서에 나오는 쿠다라어 사전

白 밝(하쿠) ->白의 음독, 倭에서는 훈독표기로 하카타 , 하타 계열 단어. f발음 표기 혼란으로 h로 나타남.
村  (쓰키) -> 喙(탁),達(달) 진한어로 고향을 부를때 쓰는 말이다. 왜어에는 ㅌ표기가 혼란되어 ㅊ,ㅆ로 나타남
江 내(노에)  삼국시대에는 강을 냇물등을 뜻하는 나,내로 불렀다.(비류나=비류강, 아리나=아리수)

백촌, 하타, 비다쓰, 비조, 비사, 백설 이런 '백제 또는 빛' 계열의 가차발음들은 전부 백제의 별칭이다.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대전, 백강구 전투!!

일본(倭)은 왜 전함 1,000척을 백제에 파병했나?

663년 8월 전북 부안의 동진강 입구,

나당연합군 대 백제부흥군 10만여 명이 대전투를 벌인다.

"백제·왜·신라·당이 참전한 국제대전, 백강구전투"

일본천황은 무려 2년 반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전함 1,000척과 병력 2만7천명의 대규모 파병을 강행한다!

왜의 파병 명분과 목적은 무엇인가?

파병을 직접 지휘한 천황과 백제의 관계를 추적한다.

 

나당연합군 vs 백제부흥군

-<백강구전쟁>, 동아시아 모든 세력이 충돌한 최초의 국제대전!

백제는 660년 13만 나당연합군(신라와 당의 연합)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의 활발한 전개로, 곧이어 주류성을 수도로 하는 '백제부흥국'을 다시 세우게 된다. 이에 신라와 당은 2차 연합군을 결성,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킬 준비를 한다. 바로 이 백제부흥세력과 나당연합군이 663년 한반도 서남해 백강(지금의 동진강)에서 맞붙은 전쟁을 '백강구 전쟁'이라 한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백제부흥군을 위해 대규모 파병을 강행했다.

동아시아 판세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백강구 전쟁! 우리는 왜의 대규모 파병에 주목했다.

 

왜(倭), 백강구 전쟁에 국가의 명운을 걸다

- 2년 반의 준비기간!

- 1,000척의 전함과 2만7천명의 병력 파병!

왜의 파병 준비과정이나 규모를 보면 단순한 군사 원조 이상이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황, 그럼에도 천황은 660년 백제가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즉각적으로 모병에 나섰다. 천황은 파병 준비를 위해 항구인 난파궁으로 옮기고, 직접 후쿠오카까지 오가며 파병 준비를 독려했다. 사실상의 천도에 가까웠다.

이렇게 총력을 다해 준비한 지 2년 5개월 만에 1,000척의 배와 2만7천 명의 군사가 백제로 출발했다. 당시 일본 총 인구가 500만임을 감안할 때,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파병이었다. 이렇게 일본이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강구 전쟁에 참전한 까닭은 무엇인가?

 

파병의 목적은 무엇인가?

- 참전의 주체는 백제계 도래인!

일본이 파병한 이유를 두고, 한 · 일 역사학계는 극명한 해석의 대립을 보인다. 일본 사학계는 이 전쟁을 침략 사관의 논거로 삼기도 하는데...

일본 오카야마현 길비군에는 제명천황이 백강구 전쟁 모병 시 병사 2만7천명을 얻었다 해서 붙여진 '니만향'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 신사에는 백제식 유물과 축성술을 엿볼 수 있는 등 백제 도래인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8세기까지 일본 인구 7,80%가 한반도 도래계라는 논문이 일본인에 의해 발표됐다.

그렇다면 파병은 백제 도래인들의 조국구원전쟁이란 말인가? 현지취재를 통해 파병 주체의 성격을 파헤친다.

 

백제파병에 적극적으로 나선 천황가!

- 천황이 백제인이다?

백제의 파병 요청을 받을 당시 제명 천황은 60대 중반을 훨씬 넘긴 여왕이었다. 당시 국내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명천황'은 강한 의지로 파병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명천황이 죽자, 아들 천지천황이 어머니의 뜻을 이어 파병을 이루어냈다. 상을 치르기 전에 즉위식도 하지 않고 파병 준비를 계속하며 변함없는 파병의지를 천명한다.

한편 제명천황의 남편인 서명천황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궁과 백제대사를 지었고, 고대 일본의 주요 성씨들의 출신을 분석한 <신찬성씨록>에는 서명천황의 할아버지인 민달천황이 백제왕이라고 전한다.

천황은 과연 백제인일까? 백제와 일본 천황가의 관계, 그 진실을 추적한다.

일본(倭)은 왜 백제부흥에 사활을 걸었나.

 

663년 8월.

백강이라 불린 한반도 서해안 동진강하구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이 벌어진다. 당나라와 신라가 결성한 나당연합군 대 백제와 왜 연합군이 맞붙은 사상 최대의 해전이었다.

4개국에서 동원된 군사가 10만 명. 전선 1,170척.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백제부흥세력 이를 저지하려는 나당연합회군 간에 벌어진 이 백강구전쟁은

이후 1300년간 동아시아의 판도를 가르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된다.

 

 

 

동아시아 3국, 한국 중국 일본.

 

역사적으로 이 세 나라가 자국의 운명을 걸고 싸운 전쟁이 3번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1594년 임진왜란때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가 맞붙었고

1894년 청일전쟁 때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이 두 전쟁은 삼국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이룬 전쟁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는 쇠퇴의 길을 걸었고 일본은 개항을 단행했습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한 계기가 되었지요.

그렇다면 동아시아 삼국이 맞붙은 또 하나의 전쟁.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요?

 

 

663년8월 한반도 서남해에서 벌어진 백강구 전쟁입니다.

신라와 백제, 일본, 당시엔 왜였지요. 그리고 당나라까지

당시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이 최대 병력을 동원해 물러설 수 없는 일대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663년이라면 백제는 이미 멸망했을 때인데요.

660년 사비성 함락으로 멸망했다고 알고 있는 백제가 3년 뒤인 663년 국제전에 나선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선 백강구 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옛 백제의 땅인 이곳엔 한 신라의 장수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그 신라의 장수는 다름 아닌 삼국통일전쟁을 이끌었던 명장 김유신.

김유신의 사당이 멀리 백제의 땅에 세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사당을 관리하고 있는 부안의 김해김씨 문중을 통해 그 내력을 알아보았다.

보령원의 역사를 기록한 보령원지에는 조선 성종시대에 정리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공로를 인정해,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이 일대 땅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이인기 보령원 관계자에 말에 따르면

“백제가 결국 나라가 망한 뒤에 부흥군을 일으키잖아 성을 쌓고 하니까 김유신 장군이 다시 와서 그걸 쳐 부숴버린 거예요 그 말하자만 복신이라니까 여기 와서 주류성을 쌓고 그러니까 일본하고 통해가지고 부흥운동을 했거든 그러니까 못 쓰겠구나 해서 다시 와서 소멸을 한 거예요.”

조선시대에 삼국통일을 완성한 결정적 사건으로 인정했던 그 전쟁은 663년 백강구에서 벌어졌다.

13만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한 것은 660년.

불과 1주일 만에 사비성은 함락됐고, 의지왕과 왕자들은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곧바로 백제부흥군이 결성됐고, 이후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해, 사비와 웅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을 회복해나갔다.

그때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장수가 귀실복신이다.

무왕의 조카로 알려진 복신은 도침, 흑치상지와 함께 백제 유민과 군사를 모아 망한 나라 ‘백제’를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부흥 운동이 절정에 이르자 복신은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진다.

660년 8월 복신은 일본에 군사를 요청하는 동시에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부여풍’ 의 귀국을 청한다.

 

왜는 의자왕 때 우호관계 있었다. 이전에도 백제 도와서 왜가 군대 보내는 일 많다. 광개토대왕 때도 있었고 관산성 전투 때도 그랬다.

그로부터 1년 뒤 부여풍은 백제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는 복신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즉위했다.

사비성 함락 이후 세워진 또 하나의 백제.

부흥백제국 풍왕이 된 것이다.

 

 

 

 

부흥백제국의 본거지는 전북 부안의 주류성.

 

해발 508미터의 능가산에 세워진 이 성은 지금은 우금산성이라 불리고 있다.

부흥백제국은 이 주류성에서 사비성 탈환을 위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류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로프에 의지해야 할 만큼 매우 험난했다.

한 시간 가량 어렵게 산을 탄 끝에 주류성 정상에 올랐다.

멀리 서해바다까지 변산반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비와 웅진이 있는 곳은 북쪽.

내륙에서 뻗어 나온 동진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

그곳에 주류성이 있다

주변 산 능선을 따라 성곽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서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무려 4킬로미터에

달한다.

백제부흥군이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주류성은 바위산으로 험준한 요새.공격 받기 어렵고 수비하기 좋아

이곳에 백제부흥군 도읍정해 자연조건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계곡을 둘러싸는 이 포곡식 산성은 쉽사리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다.

이처럼 강고한 주류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웅진 도독 유인원은 본국 당나라에 추가 병력을 요청한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바쁜 와중에도 당은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를 투입한다. 여기에 문무왕과 김유신이 이끄는 대병력도 함께 했다

또 한 번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부흥 백제국을 도와주러 달려온 구원군은 왜군이다.

 

 
663년 3월 일본을 출발한 왜군은 8월 백강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1300년 전 백강이라 불린 동진강.

드디어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해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 당시 각국의 병력배치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신라 문무왕과 장군 28명이 이끄는 신라군이 당나라 육군과 함께 웅진성에서 주류성으로 남하했습니다.

백제 풍왕은 일본의 지원군 중 선발대 1만 명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주류성에서 나와 백강으로 나갑니다.

그러자 웅진에서 남하한 신라와 당나라 육군이 주류성을 포위했습니다.

당나라 전선 170척도 백강으로 내려와 집결했습니다.

이어서 일본에서 왜선 천척과 병력 2만7천명이 추가로 건너와 백강에 정박했고,

백제의 정예 기병이 강변에서 왜선을 방호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신라군 기병을 선두로 한 나당의 보병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라와 당, 백제와 왜 등 당시 동아시아 네 나라 군대가 모두 백강에 집결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지요.

이 병력을 모두 합하면 약 10만 명의 군사와 전선이 1,200여척이나 됩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백강에 모인 것입니까?

나당 연합군의 목표는 바로 백제부흥국의 수도인 이 주류성입니다.

주류성만 함락시키면 다른 성들은 저절로 항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반면에 백제부흥군이나 왜의 입장에서는 주류성이 함락되면 백제는 그대로 망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류성과 연결되는 백강에서 총력을 기울여 대항했던 것입니다.

바다를 거슬러 올라온 왜군은 주류성을 지키기 위해 백강, 지금의 동진강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여러 차례에 걸친 간척사업으로 강폭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당시 백강은 바다와 연결된 큰 하구를 가지고 있었다.

663년 8월. 드디어 전쟁은 시작됐다.

당나라 수군은 170척,

왜군은 전선 일 천척에 군사가 2만7천이었다.

수적으로는 당연히 왜군이 유리했다.

한창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던 중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왜군 쪽을 향했다.

당나라는 때를 놓치지 않고 불화살 공격을 시작했다.

한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운 대격전이었다.

드디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나당연합군이나 백제 부흥군 모두 나라의 존폐가 좌우될 만큼 중요한 전쟁인지라

가능한 병력을 총동원합니다.

그런데 이 때 각국을 놀라게 한 것이 바로 전선 1000척에 2만7천명이라는 왜군의 규모였습니다.

도대체 일본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많은 군대를 백강구 전쟁에 파병한 것일까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고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공표한 것도 아니고

백제부흥군과 일본, 당시 <왜>가 파병을 조건으로 어떤 협약을 맺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당장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대규모 군대를 꾸려 백강으로 보낸 것입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요?

먼저 파병 결정 과정에서 출전까지 일본의 파병 준비상황부터 점검해보겠습니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후쿠오카의 하카다항.

이곳 하카다에는 백강구 전쟁 당시 일본의 파병준비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적이 남아있다.

7세기 당시의 행정관청이었던 나노오쓰 관가 터

발굴당시 나노오쓰 관가 터 유적은 그 규모로 인해

일본 학계를 놀라게 했다.

건물을 세웠던 기둥 자리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는데

일반 건물이 10동, 창고가 10동이나 확인됐다.

행정관청이자 군수창고였던 셈이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대외적으로 일본과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지는데요.

그러한 가운데 기나이(오사카 일대)에서 사이메이(제명) 천황이 이곳에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요/아마도 이 주변, (후쿠오카) 하카타 만 연안에 주류하고 있던 군대가 한반도로 가서 백촌강 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나노오쓰 관가에 모아진 물자 중에는 전쟁에

대비한 무기도 있었다.

칼과 화살촉 등 각종 철제 무기류들이다.

는 곧 백강구 전쟁을 위한 준비였다.

한반도의 정세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 그러한 시설, 그 중에는 식량을 비축한다든지...식량이라든지 무기 등을 비축해서 한반도에서 사변이 일어나면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그러한 두 가지 기능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일본서기에는 당시 일본이 백제 구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많다 파병을 위해 철저하기 무기와 물자, 군사를 준비한 것이다.

2만7천명의 군대는 전 군대를 모은 것이다.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파병준비는 당시 일본왕이었던 사이메이, 즉 제명여왕이 직접 맡았다.

660년10월.

제명여왕이 머물고 있던 아스카 판개궁에

나당연합군의 침공과 백제의 멸망을 알리는 사신이 도착한다.

일본의 지원을 요청하는 백제부흥군 복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제명여왕은 신속하게 파병을 결정하고 오사카로

그 거처를 옮긴다. 항구인 오사카가 파병준비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제명여왕은 단순히 거처를 옮긴 것이 아니었다.

차기 대권을 이을 왕자들과 왕실인사, 최고대신까지 왕실과 조정의 중요인물은 모두 이끌고 나섰다.

사실상 천도였다.

백제가 멸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일본에게) 대단히 큰 위기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결코 일본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의 전쟁이 아닌 자신들과 관계가 있는 전쟁이라는 인식이 백촌강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제명여왕은 곧바로 파병준비에 돌입했다.

 


이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백제에 군사를 보낼 전선, 배였다.

 

당시 배를 만들도록 명령을 내린 스루가국은 오늘의 시즈오카. 현재도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 중심 도시다.

기록에 의하면 백강구 전쟁에 동원된 왜선은 일천척.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시즈오카에 남아있는 12세기 통나무 배.

5미터가 넘는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서 배를 만든

것인데 이 통나무 수령이 350년이나 된다.

시즈오카엔 배를 만들 수 있는 이런 목재들이 풍부했다.

이 아래 마루키부네(통나무 배)가 상징하듯이 토모에 강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배를 만드는 기술이나 바다와 관계되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최근에 발견된 자료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7세기에 배 일천척을 만들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물자와 인력이 필요했을까.

경력 40년의 일본 고 선박 전문가 곤도 유이치로.

놀랍게도 그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저희들이 지금 배를 만들고 있습니다만, (전선 1,000척을 만들어 외국에 보내는) 그런 일은 조금... 한 나라의 국민이 총동원되어도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세기, 백제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 일 천 척을

만들려면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동원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9세기 장보고 선박을 복원하고 있는 국내 고 선박 전문가를 찾았다.

0미터 규모의 배를 4분의 1로 축소해 복원하는데 3명의 전문가가 투입돼있다.

이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대략 배 한 척당 조선기술자 6명에 잡부 4명, 총 10명이 2년간 매달려야 한다. 따라서 당시 일 천 척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 역사였다.

 

백제 부흥에 왜 조정이 사활을 걸었다. 총력전으로 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사카에서의 파병 준비를 일단 마친 제명여왕은 승리를 위한 또 다른 절차에 착수한다.

아스카의 주선석 귀형석 유적.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야

파병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일

제명 여왕이 손을 씻고 입을 헹구어 정결하게 한 후

백강구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가졌다는 유적이다.

“물을 사용한 의식인데요. 천황이 하는 것이죠. 백촌강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필승의 기원 의식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최고통치자의 진두지휘아래 물자와 무기를 모으고 성대한 의식까지 치렀다.

백제를 구원하는 전쟁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이다.

2년 5개 월 간 일본 전역에서 모아진 물자와 군사들은 최종적으로 후쿠오카에 집결했다.

663년 3월, 드디어 왜군은 후쿠오카를 출발한다.

당시 일본 인구는 500여만 명.

군사 2만7천명에 전선 일 천 척이 동원된

백강구 전쟁은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파병이었다.

국제전에 자국의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나라 전체의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6,70년대 베트남전과 최근 이라크전에 군대를 파견한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때 파병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은 바로 <국익>이었습니다.

일본도 분명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백강구 전쟁에 파병을 했을 것입니다.

과연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 백강구 전쟁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왜군의 백강구전쟁 참전 이유,

과연 어떻게 보고 있는 지 자세하게 검토해보겠습니다.

 

일본 사학계의 백강구 전쟁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20년대부터 활발하게 전개됐다.

현재 서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관련서적만도 6종류.

 

 

 

 

그 중에서 2만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는 도오야마 미츠오가 쓴 <백촌강>이다.

 

도오야마는 일본의 참전이유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도오야마는 당시 일본의 속국이었던 백제가 당나라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일본 이를 되찾기 위해 벌인 싸움이 백강구 전쟁이라고 설명한다.

인터뷰/도오야마 미츠오 ‘백촌강’ 저자, 학습원 대학 강사
“백제와 신라보다는 일본이 상위에 서 있었다고 할까,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려고, 그러한 관계를 만들려고 한 군사개입이라고 할까. 간단히 말씀드려 일본이 중국과 같이 한반도의 위에 서는 대국(大國) 일본이라는 꿈을 갖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오야마의 주장에는 당시 일본이 백제나 신라보다 상위의 나라, 더 강성한 나라였다는 뜻이 내포돼있다.

이는 비단 도오야마 개인의 주장이 아니다.

백강구전쟁 해석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 책에서는

고대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짓고 있다.

신라를 복속하고 있던 강대국 당나라의 ‘대제국주의’와

백제, 고구려로부터 조공을 받던 일본의 ‘소제국주의’가

맞붙은 전쟁, 그것이 백강구 전쟁이라는 것이다.

인터뷰/이재석 고대 교수

“한반도만큼은 일본 영향력 미치는 나라, 즉 일본이 상위나라였다고 생각하고자 하는 의도 중국세력 넘어오니까 대응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일본 학계가 이렇게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는 무엇일까.

 

 

 

후쇼샤 출판사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4세기 일본 야마토조정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점령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쓰고 있다

일본이 한 때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

향추궁신사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인공인 신공황후를 기리는 신사다.

신공황후는 임신 중인 몸으로 직접 한반도로 건너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른바 삼한정벌의 주인공이다.

당시 한반도와 왜의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은 이 삼한정벌론을 많은

일본인들은 지금도 사실로 믿고 있다.

향추궁 신사에는 천육백년 전 신공황후가 한반도 정벌을 마치고

돌아와 심었다는 나무도 있다.

인터뷰/우에다 고오 향추궁 신사 궁사

 

“(삼한에서) 이곳으로 돌아오셔서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고르시고 이곳에서 손수 삼나무를 심으셨습니다. 단지 심은 것이 아니라 기도를 담아서, 기도를 깃들여서 심으셨습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나라를 평화롭게 지키겠다.”

또한 1922년 군국주의가 왕성하던 무렵 당시 대정황후는 이곳에 함포를 하사했다.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본 역사의 상징이 바로 신공황후였던 것이다.

과연 백강구전쟁은 신공황후가 세운 식민지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나오끼 교수 원로사학자 나오끼 교수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일본 고대 역사와 천황에 대해 연구한 그의 책에 따르면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백강구 전쟁을 토대로 만들어진 전설이다.”

인터뷰/나오끼 고지로우 오사카 시립대 명예교수

 

“신공(神功)이라는 이름은 나라시대 8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본래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4세기 당시의) 오키나가 ‘타라시’ 공주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러한 이름의 천황이 계속 없다가 7세기의 서명과 황극(제명) 천황이 각각 오키나가 ‘타라시’, 아메도요타까라이카시히 ‘타라시’인데, 이러한 7세기의 이런 천황들을 모델로 해서 4세기의 신공황후 전설, (신공황후라는) 이름까지 포함해서 모두 7세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공황후와 백강구 전쟁의 파병을 주도한 제명여왕은 여자였다는 점, 이름이 똑같은 타라시였다는 점, 그리고 신라와 싸우기 위해 해외원정에 나섰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닮아있다.

 

 

 

 

인터뷰/나오끼 고지로우 오사카 시립대 명예교수

 

 

“ (백제) 원조군을 격려하고 그러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 필요를 느낀 것은 아닌지... 제명천황이 백촌강에 갔는데, 백촌강 전쟁의 출병이라고 하는 것은 최대의 출병이었고 신공황후의 이야기를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663년 백제 부흥을 위해 출병했던 백강구 전쟁.

이 분명한 사실은 신공황후 삼한정벌론의 모태가 된다.

백강구 전쟁이 역사 왜곡의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그 결과 이번에는 삼한정벌론이라는 허구를 토대로

백강구 전쟁을 해석하는 역사왜곡이 되풀이되고 있다.

“백강구 전쟁은 한반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일본 학자들의 이런 논리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8세기 때 만들어진 이 일본서기는 백강구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교과서가 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일본서기를 자세히 검토하면 이런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 서기>는 백강구 전쟁 파병의 동기를 <복신의 뜻에 따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복신은 백제부흥군을 이끈 총대장입니다.

이는 백제의 지원 요청에 의해 군대를 파견했다는 뜻입니다.

백강구 전쟁에 참전한 왜군은 <왜> 조정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파견한 군대가 아니라

백제 부흥군의 요청에 의해 출전한 지원군인 것입니다.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부여풍지중>...<당시 일본군은 부여풍의 무리다>

이는 당나라가 백강구에 온 <왜군>을

백제 왕자 부여풍이 이끄는 무리, 백제의 군대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백강구 전쟁에 참전한 왜군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아스카에서 오사카로 거처를 옮긴 제명여왕은

본격적으로 파병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서기에는 제명여왕의 준비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있는데 여왕은 몸소 배를 타고 오카야마,

에히메를 거쳐 후쿠오카에 이른다.

여왕이 머물렀던 오카야마, 옛 길비 지역이다.

1300년 전 이곳은 어떤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었을까.

지역의 대표적 신사인 길비진 신사.

신사에는 고대 이 지역의 최고통치자였던 ‘우라’라는

인물을 기리는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다.

인터뷰/후지이다 카유키 길비진 신사 궁사

“(가마솥 밑에 우라의 목을 묻었는데,) 우라(溫羅)가 매일 꿈에 나와서 사랑하던 아조메라는 여인에게 밥을 짓게 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불길한 일이 있으려면 가마의 밥이 거칠어지고, 좋은 징조일 경우에는 밥에 윤기가 날거라고”(말했다는 전설입니다)

우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라의 성으로 알려진 키노조 성은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이 일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키노조 성.

그런데 축성방법이 낯익은 것이다.

오디오/흙을 한층한층 사람이 찍어서 지은 성벽입니다

인터뷰/다니야마 마사히코 / 오카야마현 소쟈시 문화과

“(이러한) 판축기술은 앞부분에 석판을 대서 흙을 굳히는 기법인데요. 이것은 일본에는 없는 기법입니다.”

일본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은 이뿐만이 아니다.

키노조 성은 먼저 토성을 쌓고 그 바깥쪽을 돌로 보강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백제의 수도, 부여 나성의 축성 방법과 똑같다.

백제의 토목기술이 길비 지역에 그대로 전해져있었던 것이다.

백제식의 성을 쌓고 살았던 우라.

일본인들에게 폭군이라 불릴 정도로 길비지역 최고 실력자였던 우라는 바로 백제인. 지역사람들은 백제의 왕자로 알고 있다.

우라의 세력이 미쳤던 길비 지역의 또 다른 마을.

그런데 마을 이름이 독특하다.

곳곳에서 보이는 <이만>이라는 표지판.

이 마을에 <이만>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백강구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인터뷰/아사노 쇼 이만소학교 6년

 

“옛날에 병사를 2만 명 보내서 이만이라고 붙여진 모양인데요.”

인터뷰/아카자와 히데히코 이만소학교 교장

“663년 백촌강전쟁에서 중대형왕자(천지왕)가 병사를 모집했는데 이 곳에서 이만명의 병사가 모인 것으로부터 이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모양입니다.”

현재 이곳 인구는 채 만 명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1300년 전 어떻게 이만명의 병사를 모을 수 있었을까.

마을 관계자가 안내한 곳은 고대 철 생산 유적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 생산지가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 길비였다.

당시 최고 수준의 제철기술을 가진 백제인들이 집단으로 건너와 정착하면서

이 일대는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가네후쿠 키비. 최고의 철을 만드는 길비.

 

일본인들은 이곳을 이렇게 불렀다.

인터뷰/나오끼 고지로우 오사카 시립대 명예교수

“제철 기술은 한반도가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술을 가진 한반도 사람들이키비 지역에 많이 와서, 이 지방의 산맥에서 사철(沙鐵)과 철 광산을 개발하고 철을 생산함으로써 이 지역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이곳 백제인들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고분인 야타오츠카 고분.

고분은 전형적인 백제의 굴식 돌방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이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땅의 백제인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움직일수 없는 증거다.

인터뷰/후지와라 노리요시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문화재보호과

“바로 산 너머에 스에키(토기)를 굽는 일족이랄까 그룹이 있고 북쪽으로 산을 넘으면 철을 만드는 그룹이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을 자신의 세력권으로끌어 모아서 힘을 얻은 호족의 무덤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백제 패망과 부흥운동 소식은 이곳 길비지역 백제 도래인들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길비에는 독립된 세력 존재했었다. 한반도 도래인의 근거지

백제 멸망시 군대 파견하는데 당연히 동의했을 일이다.

 

 
백강구 전쟁에 나선 지역은 비단 오카야마만은 아니다.

 

일본서기에는 또다른 파병군 출신지역이 기록돼있다.

비후국과 이예국.

비후국은 지금의 구마모토.

이예국은 에히메의 옛 이름이다.

이들 지역 또한 백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구마모토 백제와 연결된 지역.금동신발과 관계돼있어

일종의 의용군의 형태.백제와 연고 깊은 지역에서 파병하고 출자했다.

즉 조국해방전쟁, 망해가는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당시 이 지역 백제 도래인들이 얼마나 백강구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는지 알 수 있는 유적이 있다.

백강구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백제인들이 세운 이 절과 탑에는 그들의 절절한 사연이 담겨있다.

 

인터뷰/미노루 이토 히로시마현 민속자료관

"(일본이 백제에) 전투를 돕기 위해 갔을 때 이 미타니 지방의 수령이 참전했는데, 전쟁터에 가기 전에 약속을 합니다. ‘만약에 무사히 돌아오면 이곳에 절을(세우겠다)’고... 그래서 (살아 돌아와) 이 절을 만들 때 백제에서 ‘홍제(弘濟)’라는 백제 승을 데려와, 그 중이 이 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풍전등화 같은 조국 백제를 위해 대규모 파병을

단행했던 일본의 백제 도래인들.

 

 

그들에게 백강구전쟁은 조국 구원전쟁이었다.

 

일본 현지에서 확인한 결과 왜나라의 파병군은 백제 도래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에 살고 있던 백제인들이 패망한 나라를 되살리고자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힘만으로 가능했을까요?

외국땅에서 참전을 하려면 분명 최고 통치자의 적극적인 의지와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파병을 결정한 왕은 68세의 여자 왕, 일본에서는 천황이라 부르는 샤이메이, 즉 제명여왕이었습니다.

그녀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요?

긴박했던 당시 일본 조정으로 가보겠습니다.

<백제가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들이 우리에게까지 지원 요청을 한 것을 보면 나라가 망하여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다는 뜻이다.

그들의 위태로운 상황을 돕고, 백제의 끊어진 왕통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거리에서 산속에서 창을 베개 삼아 싸우며 쓸개를 먹는 것과 같은 참담한 상황이니

그들의 이 절박한 뜻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

여러 장군에게 명하노니, 백제를 위해 출병하라.

구름처럼 번개처럼 백제 땅으로 진격해 그 원수를 쳐서

백제의 긴박한 고통을 덜어주리라.>

백제를 위해 파병하겠다는 제명여왕의 의지는 아주 강력해보입니다.

다른 상황은 전혀 고려치 않고 오직 백제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일본 왕이 이토록 백제 구원에 앞장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일본 왕가와 백제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파병을 위해 일본 전역을 돌던 제명여왕이 도착한 곳은 후쿠오카.

당시 제명여왕의 처소였던 아사쿠라 궁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제명여왕은 이곳에 임시 행궁까지 짓고 머물면서

물자와 군사를 점검하고 백강구 전쟁 파병을 진두지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병준비 1년여 만인 661년 7월. 제명여왕은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여왕은 임시로 후쿠오카 고노마르텐에 묻혔다.

백강구 전쟁을 위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던

녀의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그 당시부터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인터뷰/히메노 겐따로 /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정 교육과

‘비정상적인 죽음’이라 할까요. 자연스럽게 병에 걸려서 죽은 것이 아닌,

무언가를 속이기 위해서, 반대 세력... 함께 아스카 쪽에서 온 반대 세력이‘이런 곳까지 오는 것은 위험하다’고 해서 (제명여왕)을 매장(암살)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왕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 뜻밖의 왕위계승으로 혼돈스러운 정치상황. 파병에 반대하던 세력들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중대형왕자는 상중임에도 파병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왕이 죽으면 출병중지하는 게 대부분. 그걸 계승 수표의 군중을 장악했다

즉 황태자가 총지휘했다. 파병 강행한 이유가 뭐냐

 

이 중대형 왕자가 텐지, 즉 천지왕이다.

 

당시 천지왕이 즉위식조차 미룬 채 파병 준비를 하며

백강구 전쟁에 몰두했던 사실은 이 신궁에서도 확인된다.

오미신궁에는 천지왕이 직접 만든 해시계가 보존돼 있는데 여기엔

백촌강, 즉 백강의 이름과 거리가 분명하게 새겨져있다.

천지왕은 왜 백강구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일까.

대를 이어 파병을 준비한 천지왕과 백제와의 관계를 살피던 중

그의 아버지 죠메이, 즉 서명왕에 그 실마리가 있음을 알아냈다.

서명왕은 처음 파병을 결정한 제명여왕의 남편.

서명왕이 죽은 뒤 왕위는 아내 제명여왕이 계승했고

이제 아들 천지왕이 물려받은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서명왕에 관한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이것

서명왕이 자신의 왕궁을 백제궁이라하고, 백제대사라는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다.

서명왕이 당시 일본의 수도 아스카에 세웠다는 백제대사.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이 절은 1997년 발굴돼 일본

학계를 놀라게 했다.

전형적인 백제양식인 판축기법에다

백제식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쏟아졌다.

절의 크기는 일본 사찰 중 최대규모인 3만평방미터.

 

기록에는 백제대사엔 9층탑도 있었다고 한다.

백제대사터 발굴로 탑의 존재는 사실로 밝혀졌다.

인터뷰/이노쿠마 카네카츠 교수 교토 다치바나 대학

“이 탑을 복원하면 9층탑이 되는데, 이렇게 키가 큰... (높이가) 100미터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히메지 성, 그 성과 나라현의 약사절이 있습니다만. 서로 비교해도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탑의 기단과 기록을 토대로 9층탑을 복원해보았다.

이것이 당시 일본의 국력이 총동원됐던 거대한 규모의 백제대사다.

백제대사의 동쪽에는 서명왕이 거처하던 백제궁도 있었다. 또한 서명왕이 죽은 뒤 그의 빈전은 백제대빈이라 불렀다.

도대체 왜 왕실과 국가의 중요 건물에 백제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

인터뷰/이노쿠마 카네카츠 교수 교토 다치바나 대학

“선진국의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도 여러 곳의 가게에 그 주인이 좋아하는 나라의 이름이 붙은 다방이나 식당 등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천황가에 있어서는 백제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인식으로 아마도 문화가 굉장히 풍부하고 빛나는 나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일본 학자들은 선진국 백제를 모방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한다. 과연 그런 이유였을까.

 
서명왕의 계보를 추적하던 중 또다른 문서를 발견했다.

 

신찬성씨록.

고대 일본의 황족과 귀족들 중 주요 성씨의 계보를 적어놓은 책이다.

이 책은 대원진인의 출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민달손 백제왕>이라고 적고 있다.

민달은 비타쯔왕, 즉 서명왕의 할아버지다.

홍윤기 교수는 민달왕의 손자가 백제왕이라면 자연 민달왕은 백제계라고 주장한다.

인터뷰/홍윤기 외대교수

“대원진인 민달왕 손자 백제왕족..일본 고대왕실 백제계 왕가임을 입증해주는 문헌사료”

백강구 전쟁 파병준비를 담당했던 천지왕의

선대 할아버지인 민달왕. 그는 과연 백제계였을까.

민달왕의 계보를 추적하던 중 와캬야마에 귀중한 단서가 있음을 알아냈다.

민달왕의 할아버지 계이타이, 즉 계체왕을 모신 스다하치만 신사.

이 신사에는 계체왕의 계보를 확실히 설명해줄 유물이 있다.

특별히 스다하치만 신사의 허가를 얻어 이 유물을 꺼내보기로 했다.

 

 

 

 

 

 

 

 

 

 

 

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있는 유물이다.

 

인물화상경.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울이다.

거울 뒷면에 9명의 왕족들 모습이 새겨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명문이 있는데, 바로 거울의 제작경위를

기록해놓은 것이었다.

<503년 남제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사마께서 아우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 거울을 만들었다.>

곧 이 거울의 주인공은 남제왕이고 거울을 만들어 선물한 이는 남제왕의 형, 사마라는 것이다.

인물화상경에 적힌 이 남제왕은 누구일까.

남제는 일본어로 오호도.

혹은 남대적이라고도 쓰인다.

이 오호도는 계체왕의 또다른 일본식 이름이기도하다.

남제왕은 곧 계체왕인 것이다.

그렇다면 계체왕을 아우라 부른 사마는 누구일까.

 

 

 

 

 

 

 

 

 

 

6세기 초 백제를 다스렸던 무령왕의 무덤에 그 비밀의 열쇠가 있다.

 

1971년 발굴 당시 여러 유물들 중에 무덤의 주인공을

알리는 석판 2장이 포함돼 있었다.

그 지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백제 사마왕은 523년 돌아가셨다.

사마왕. 당시 화려했던 백제 문화를 이끌었던 무령왕이 생전에

불리던 이름이 사마였다.

백제 무령왕의 이름 사마, 그리고 인물화상경에 적힌

사마. 결국 거울을 선물한 계체왕의 형님은 무령왕이었다.

김현구 교수는 여러 기록 검토결과 계체왕으로 시작된

일본왕가는 백제계였다고 주장한다.

 

일본 황실은 알려진대로 만세일계 아니다.

세 번 바뀌었다.계체천황은 현 천황가

무령왕릉 지석과 비교해볼 때 백제관련돼 있다.

계체왕의 손자가 민달왕, 민달왕의 손자가 백제대사를

지은 서명왕이다. 백강구 전쟁에 나선 천지왕은

곧 계체왕의 5대손인 것이다.

 
백제계 왕통을 이어받은 천지왕.

 

그가 위기에 처한 백제를 위해 파병에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663년 8월. 모든 준비를 마친 왜군은 천척의

 

배에 2만7천명의 군사를 싣고 백강에 도착했다.

당나라 전선은 170척.

그러나 각 지역의 지원군으로 편성된 왜군은

정예부대인 당나라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서해안의 조류와 바람의 방향도 왜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백제와 왜 연합군은 네 번의 전투에서 네 번 모두 패하고 말았다.

불에 탄 전선만 400척. 대참패였다.

이로써 백제는 완전히 멸망했다.

백제 부흥을 위해 사활을 걸었던 일본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에 건너가 있던 백제계 사람들이 백강구 전쟁에 뛰어든 것은

마치 1948년 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세계 각국에서 유대인들이 모여든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명여왕도 천지 왕도 파병에 사활을 걸었던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필사의 노력으로 전쟁 준비를 마친 제명여왕이

출전을 앞두고 지었다는 노래 한 수가 그 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니키타스에서 배 타려고 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마침 둥그런 달이 떠서, 물때도 딱 알맞구나.

자, 지금 저어나가자>

백제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백강구 전쟁.

그래서 절대 물러 설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참전하지만

결국 백강구 전쟁의 승자는 나당연합군이었습니다.

이로써 백제는 663년 역사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벌어졌던 국제 해전 백강구 전쟁은

일본과 백제가 어떤 관계였는지

고대 한일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 가장 확실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