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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만이 희망이다, 단재 신채호|

이름없는풀뿌리 2016. 1. 13. 18:14

1. 만주는 우리 고대사의 근원지!

                                단재 신채호의 새로운 역사인식!~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아(我)는 나를 말하고

 

                비아(非我)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말한다.

 

            역사는 곧 나와 다른 사람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

 

나라를 빼앗겼던 암울했던 시절.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었던 시절.

역사만이 희망임을 이야기했다.

 

그는 왜 역사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했던 것인가?

 

"단재 신채호.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이며, 문학가, 역사가였던 단재.

그러나 그를 깊이있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보통 세수를 하게 되면 허리와 고개를 숙이는 게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단재는 달랐습니다.

그는 세수를 할 때면 허리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 했다고 합니다.

옷 한 벌을 다 적셔가면서도 오히려 옷 버리는 게 뭐 대숩니까 했던 단재!

 

그것은 일제 앞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느 방향으로도,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평생을 이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호 단재일편단심을 의미합니다.

 

한 번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던 단재.

안타깝게도 그가 처한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나라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져만 가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때로는 폭력을 선동했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단재는

독립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는 역사를 선택했습니다!

독립을 위한 현실적 대안을 역사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에서 그가 희망을 발견한 시기는 고대사였고,

그 무대는 만주였습니다.

 

만주!

그는 왜 한반도가 아닌 만주에 주목했던 것일까요?" 

 

 

신채호의 새로운 역사찾기 무대가 되었던 광활한 땅 만주.

 

그는 신문 논설에서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부터 가장 중시 여겼던 곳이 만주라고 했다.

 

만주를 지배한 부여족은 우리 민족이고

따라서 만주는 우리 영토임을 강조하고 있다.

 

만주를 우리 영토라고 보는 그의 시각은

부여족과 고구려를 우리 민족이라고 보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 역사의 체계상으로 볼 때

상고사가 올라가서 단군조선으로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를 중시하는

이러한 역사인식 체계상으로 볼 때 만주를 중요시하는 관점이 나올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단군과 단군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가

그 중심 지역으로 있었던 곳이 만주였기 때문에 만주를 중시했다 이렇게 할 수 있지요."

                                                         - 이만열 교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숙명여대

 

 

북만주의 흑룡강에서부터 양자강에 이르기까지

단재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머물러 있던 우리 역사의 무대를 만주까지 넓혀 놓았던 것이다.

 

그는 왜 만주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당시 역사는

고대 역사가 압록강 이남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많이 왜곡된 역사 중에 하나가 고대사라고 봤습니다.

 

고조선 시대나 부여, 고구려 시대를 보면

우리 한국의 선조들은 동북아에서 아주 막강한 민족이었고

찬란하고 독자적인 민족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요." 

                                                                              - 신용하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중국 집안시.

1914년 이곳에서 신채호는 1년간 머물렀다.

 

집안은 1,400년 전만해도 고구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그는 이 때 이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고구려의 유적지를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셀 수 없이 많은 왕릉으로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 집안시.

신채호는 당시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본 감상을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집안은 도시 전체가 고구려 유적지로 불릴 만큼

발길 닿는 곳, 시선 닿는 곳 어디 하나 고구려의 옛땅 아닌 곳이 없는데..."

 

신채호는 눈 앞에 유적을 보고도 깊이 연구해볼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는 광개토대왕릉비문 앞에서 고구려의 웅대했던 힘을 느끼기도 한다.

 

신채호는 고대사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고증하여 정리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그 현장을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그 결과 우리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는 걸 확인하게 된다.

 

"김부식 등 중세시대 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압록강 이남으로 무대를 축소시키고,  

또 일부 식민주의자들은 거기에다가 그걸 중국의 지배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왜곡을 하고,

남쪽은 또 일본의 식민지배로 시작되었다고 그러니까,

  

종래의 역사를 부정하고

새로 역사를 개척하시면서 사실로서의 역사,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쓸려고 하니까 

만주가 큰 무대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 신용하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는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신채호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

만주가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강력히 반박하고 나선다.

 

 

그의 주장은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

만주에 발해를 세우고 약 300년간 만주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임을 

그의 논설 <독사신론>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손인 대조영이 세웠고 우리 민족의 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주가 우리땅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로선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중국에 가서는 고적 답사도 했고,

그리고 북경에 가서는 사고전서를 비롯해 선진 문헌을 많이 접했다는 말입니다.

 

선진 문헌이라는 것은

진나라 이전,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했는데,

그 분서갱유에서 타지 않은 책들,

그런 문헌들까지도 많이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 안에서,

우리나라에 책만 가지고 역사 연구를 한 사람들과는 우선 독서량 자체가 다르고,

그가 해석하는 범위와 사고도 아주 확장되고 열린 그런 것이었습니다."

                                                                                                          - 이만열 교수

 

철저한 답사와 수많은 책을 통해 얻어진

그의 새로운 역사인식은 종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누구보다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신채호.

 

그는 우리의 고대사와 만주에서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찾아냈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옛땅에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에 만주가 한국 독립운동과 이민들의 생활무대였는데

이것이 남의 나라가 아니라

옛날에는 우리의 선조가 역사를 만들고 생활하던 우리의 땅이었다고 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좋은 영향을 미치는 고무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만주를 깊이 연구를 하고

특히 부여, 고구려, 더 올라가면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역사인식으로 새로운 견해와 새로운 연구를 진행시켰던 것입니다."

                                                                                                      - 신용하 교수 

 

현장을 뛰면서 그는 확고한 신념을 얻었다.

역사속에서 희망을 찾아내려는 신채호의 노력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로 결실을 맺는다. 

            

 

2.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

            일제에 대항하는 길은 오직 힘을 기르는 것!~ 

 

 

"우리의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문화도 매우 찬란했다,

이러한 신채호의 확실한 역사인식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은

못난 민족, 하찮은 국가라는 오명도 싹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잃었던 나라를 찾기 위해 찾아간 만주땅,

신채호는 그 속에서 역사 뒤편에 가려져 있던 광대한 우리 역사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는 고대사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잃었던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쩌든 신채호가 선택한 이러한 역사연구는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우리 주민들과

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게 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암울했던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단재.

그는 언론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역사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1871년 4월 강화 앞바다에 침입한 미군을 시작으로

조선은 열강들의 계속된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신미양요).

 

 

대전 중구 여남동 신채호 생가.

 

1880년 12월 8일.

신채호는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18대손으로 태어난다.

 

시골 양반집 살림은 가난했다.

단재가 7살 되던 해 아버지 신광식은 세상을 떠나고

단재는 할아버지 신성우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던 단재는

9살 때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을 완전히 익혔고

13살 때에는 사서삼경을 독파해 천재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1898년 단재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19살에 성균관에 입교한다.

당시 성균관 관장 이종원은 "너는 곧 나를 능가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신채호의 능력을 뛰어나게 봤다.

 

26살에 성균관 박사가 된 단재는

당대 제일의 논객 위암 장지연의 논의를 받고

황성신문에서 언론인으로서 첫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국내 언론에서는 황성신문 주필 생활을 하셨고

그 다음에 대한매일신보에 주필을 하셨고요.

그 다음에 가정잡지라는 여성 잡지에 편집인이 되셨던 거지요.

순한글로 된 잡지였습니다.

더불어 대한협회 회보나 여러 잡지에 논설을 써서 언론 활동을 펼쳤습니다."

                                                                                      -박정규 관장, 단재사이버기념관, 前 청주대 교수

 

그가 처음 몸 담았던 황성신문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을 사전 검열없이 배포했다는 이유로

무기한 정지된다.

 

단재는 양기탁이 있는 대한매일신보로 옮긴 지 한 달만에

'단재의 시일에우방성대곡(1905. 12. 28)'을 그의 붓끝으로 되살려낸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제의 탄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논설의 강도를 높여간다.

 

 

이 무렵 단재는 국권을 회복하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민족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에 대한 많은 논설을 쓴다.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

그의 논설에서 밝혔듯이 역사를 애국심에서 찾으려고 했다.

따라서 민족의 앞날도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

고로 역사의 기록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다."

                                                                       - 대한매일신보 논설

 

 

그가 이렇게 역사를 중요하게 봤던 계기는 무엇일까?

 

"하야시라고 하는 일본학자가 있었는데 이분의 전공이 조선사예요.

 

그는 조선 역사를 다섯 권으로 썼는데,

조선의 역사는 기자와 한사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고

 

삼국시대는 가라가 일본의 식민지로써 임나일본부를 만들어가지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일본에 조공을 하고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직접 지배를 했다고 썼습니다.

 

그러니 조선 역사라는 것은 당초부터 북쪽은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남쪽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자주성이 없는 정적인 역사, 타율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라는

초기 식민주의 역사관을 피력했어요.

 

이 책이 한국에 들어와서 읽혔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구한말 교과서에도 반영되기 시작했습니다."

                                                                                                                     - 신용하 교수

 

단재는 일제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논설에서 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역사를 강조한다. 

 

그 무렵 이태리를 위기에서 구한 세 명의 영웅을 담은 책 <이태리 3걸전>을 번역하면서

단재는 역사 속의 영웅들에 관심을 가진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영웅 중에

을지문덕과 최영,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3대 영웅전을 발표한다. 

 

역사 속에 영웅에 주목했던 단재,

그가 역사 속 영웅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 나라를 다시 완전 자주 독립으로 이끄는 방안이 무엇이냐 생각하면서,

 

나라가 이렇게 된 원인 자체를 규명하려는데 이게 문치다,

글에 의해서, 관력에 의해서,

행동이 없는 그런 지식인들의 행태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었다,

공리공론에 빠진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그러니 문치와 더불어

무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주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웅이 나와야 한다,

그들을 통해 우리나라를 구하는 데 적극적인 영향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 이만열 교수 

 

을지문덕살수대첩에서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무찌른 삼국시대의 대장군으로,

최영은 왜구를 물리치고 요동정벌을 단행한 고려의 명장으로,

이순신임진왜란 당시 왜구를 물리치고 바다를 평정한 조선의 명장으로 그리고 있다.

 

단재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고 찾아야 할 때

오직 칼과 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의 권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보호할 따름이오.

나의 권리가 이미 떨어졌거든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찾아올 따름이오..."

                                                                   - 을지문덕전 중에서

 

그가 무력을 권리수호의 방법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식민지를 강점하게 된 힘은

그들의 군국주의와 군사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제 침략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면

일제 군사력에 대항하는 힘과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은 무장, 무력 투쟁 밖에 없다고 본 거예요.

 

일제의 침략 형태가 무력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 투쟁의 방향도

궁극적으로는 무장투쟁이 그 핵심에 놓여 있어야 한다것이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지론이었습니다."

                                                                          - 신용하 교수

 

신채호 소설 <꿈하늘>.

단재는 문학작품에서도 독립을 위해서는 강한 힘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역사 속에서 찾아낸 세 영웅,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장군에게서도 이런 공통점을 발견한 것이다. 

 

"이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면 대외 경쟁력에서, 대외침략에서

나라를 수호하고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그런 영웅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는 이 시기에

일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영웅의 표본으로서  이 세 사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 이만열 교수

 

 

 3. '조선일천년제일대사건(一天年來日大事件)'은 묘청의 난!~

                 강한 민족의식, 자주성, 독립성 열망!~

 

  

"신채호가 역사를 내세운 이유는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의 영웅들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강한 나라, 힘있는 민족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진리,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고 곧 무력으로만 이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철저히 공부한 덕분에 우리의 역사로부터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독사신론.

신채호가 쓴 논문입니다.

 

그 첫 구절을 한 번 보면   

 

'한 국가의 역사는 

그 민족의 번영과 멸망을 담고 있어서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고  

역사를 버리면 그 국가의 권력도 대단한 것이 아니니

역사가의 책임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렇게 신채호는 그의 글에서

역사와 국가, 또 민족을 공동운명체로 보았을 만큼 역사를 중요시 하였습니다.

역사가의 책임 또한 그만큼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인 신채호가

'조선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라고 봤던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일천 년 전 역사를 돌아보건데 최대의 사건,

적어도 단재에게 있어 그렇게 보였던 사건이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시대에는 반역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건일까요?"

 

고려 중기 묘청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묘청의 난의 당대 기록부터 찾아보자.

 

고려사절요 인종 10년의 기록이다.

묘청을 저자거리에서 목을 베라고 쓰고 있다.

 

 

 

고려사절요 인종 12년의 기록은 어떠한가?

묘청을 베어 하늘의 경계에 응답하시고 민심을 위로하라고 적고 있다. 

 

묘청.

고려 중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그에 대한 기록들은 하나같이 반역자요 허황된 술수를 부리는 인물로 묘사했다.

 

반면 신채호는 왜 그런 인물에 대해 최고의 평가를 내리고 있는 걸까?

 

고려 중기 12세기로 내려가면서 

요나라와 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의 삼각 구도는

여진족의 성장으로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여진족에 의해 금나라가 세워진 지 불과 8년 지나면 그것이 인종 3년이 되는데

그 시기에 가면 금나라는 세력이 강해져서 고려에 대해 형제관계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고려는 동생의 나라고 금나라는 형의 나라다, 이렇게까지 금나라는 세력을 강하게 키워갑니다. 

 

그리고 다시 옛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의 세력이 더 강해져서 군신관계로까지 바뀌게 됩니다.

고려는 신하의 나라, 여진은 왕의 나라, 임금의 나라로 되면서 고려를 격하시키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고려 대단히 분노케 됩니다."

                                                                                                      - 이정신 교수, 한남대 사학과 

 

이 때 묘청이 등장하여

아예 금나라를 정벌해버리자고 주장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까지도 내세우게 된다.

 

"칭제건원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황제와 왕을 비교하지 않는데

중국과 맞설 수 있는 중국의 중심에 황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제라고 한다는 것은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원이라는 것은

연호를 세운다는 것으로 독립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도 독립성을 강하게 주장할 때는 연호가 나옵니다.

 

고려나 조선에서도 대부분 연호가 없습니다.

그런데 연호를 사용하자는 것은 대단한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이었지요."

                                                                                    - 이만열 교수

 

묘청은 이어서 개경(개성)에서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한다.

서경에 궁궐을 지어 천도를 하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며 주변에 36개국이 모두 신하가 되서 고려를 따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단 서경 천도를 한다는 것은,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새로운 지지 기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개경에 기존의 지배세력 문벌귀족들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서경에 가서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정국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서경이라는 곳은

고구려의 수도였고, 북진정책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이정신 교수, 한남대 사학과 

 

당시 여론이 서경천도로 기울여지자

개경을 중심으로 한 김부식 등 문벌귀족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김부식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는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문벌귀족의 강한 반발에 인종은 결국 서경천도를 포기하고 만다.

 

개경세력에 의해 서경천도가 좌절되자

묘청 등은 을 일으키게 된다.

고려 인종 13년, 1135년의 일이다.

 

금나라와의 전쟁보다는 화친을 주장했던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묘청의 난은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이것이 단재 신채호가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일대사건'으로 꼽았던 묘청의 난이다.

이 사건이 그에겐 왜 그렇게 크게 보였던 것일까?

 

"단재선생은 묘청자주적인 역사가, 자주적인 승려이고 문인이라고 봅니다.

반면에 김부식사대적이고 중국 의존적인 정치가이고 역사가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묘청이 자주적인 힘을 길러 만주를 회복하고 요동을 회복할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부식이 군사를 데리고 묘청을 쳐서 섬멸시킨 것,

그리고 삼국사기로 압록강 이남에 만족하도록 정신교육을 시킨 것,  

이것이 결국은 우리나라를 힘이 없는 나라, 작은 나라로 만든 결정적 전기가 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 신용하 교수

 

묘청의 난을 정벌하고 돌아온 김부식은 문하시중 벼슬을 얻게 되고

삼국사기 편찬의 총책임을 맡는다.

 

김부식을 비난한 신채호는 삼국사기의 내용에 대해서도 거세게 비난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아니하고,

 

중국적인 관점에서,

유교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것을 관찰하고 비판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가 중국과 전쟁을 해가면서 자주권을 회복하려고 한 것에 대해

중국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비판한 것이 더러더러 보입니다.

 

거리를 측정하는 것도

우리나라 안에서가 아니라

중국 북경에서 몇 리가 된다라든지 중국 중심의 가치관이 보이고 있습니다."

                                                                                                               - 이만열 교수

 

신채호는 김부식의 사대주의 때문에

중국의 눈높이로 쓰여진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신라 중심의 역사관 때문에

가장 강대했던 우리의 고대 역사가 빠져버렸고

 

결국 소국민이 대국민이 되고

대국민이 소국민이 되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신채호는 삼국사기를 역사서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왜 이렇게 삼국사기를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영향력이 컸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역사서 중에서 삼국사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이 삼국사기를 통해서 삼국시대나 신라시대, 그 이전 시대를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난감할 정도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책이 제대로 씌여져 있다면,

우리나라의 민족정신을 밝혀주고 좀더 자주의식이 강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 이정신 교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북벌과 개혁을 주장했던 묘청.

따라서 단재는 묘청의 난을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본 것이다.

 

 

 4. 무장투쟁의 지침서가 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민족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 할 것이다.  "

 

 

"역사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만일 신채호의 바램대로 묘청의 난이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신채호는 우리나라가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면서 진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단재는 붓끝으로 일제에 맞섰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만큼 그의 글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느껴지는데, 독립운동 시절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단재는 생계를 위해 중국 중화보북경일보에 논설을 집필한 적이 있습니다.

신채호의 논설이 실리면서 신문의 발행 부수가 점점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사에서

단재가 쓴 논설 가운데 조사에 불과한 '의(矣)'자를 맘대로 고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단재는 논설을 중단해버렸고 독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신문사 사장은 매일같이 단재를 찾아와 사과를 하려 했지만 단재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끼니가 끊길 지경이었으나

단재는 조선인을 무시하는 중국인들의 태도가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글을 쓴 자신을 질책했다는 것입니다.

민족적 자존심을 단재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느낄 수 있는 단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독립을 갈구했던 신채호의 글.

그 대표적인 글이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입니다.

 

조선혁명선언에는 신채호의 역사관이 잘 드러나 있는데요,

조선혁면선언!

그것은 독립투사들의 바이블이자 행동지침서로 통했습니다.

 

투쟁 목표와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조선혁명선언!

단재 신채호는 왜 의열단에게 조선혁명선언을 써 주었던 것일까요?"

 

6천 4백여 자에 이르는 장문으로 이루어진 조선혁명선언,

최남선의 3.1 독립선언서와 함께 최고의 명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젊은 투사들의 피를 뜨겁게 했던 조선혁명선언.

그 글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일까?

 

조선혁명선언!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다 빼았아

일절의 생산기능르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일제에 대한 고발로 시작되는 이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내용의 요지를 말씀드리면

문서 제목 그대로 지금 조선에서 조선 민족을 주체로 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혁명이 필요한가?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

단재 선생은 그것을 강도통치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식민지 통치에 의해 생존조건이 압박받고 모든 조건이 박탈 당하고 있는데

혁명을 통해야만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랬을 때 그 혁명 조건을 단재선생은 다섯 가지로 정의하셨습니다." 

                                                                                           - 김영범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첫째, 다른 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것을 찾겠다.

둘째, 특권계급을 없애고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모습을 찾는다. 

셋째,  경제약탈제도를 없애고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든다.

넷째,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다 같이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

다섯째, 문화적 차원에서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

 

조선혁명선언은 혁명을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혁명을 위해서는 일곱 가지 제거해야 하는 죽여버려야 할 대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고관이라든지,  일본군 수뇌라든지, 만주총독, 매국노, 친일파, 밀정, 반민족적 토호

이런 존재들은 다 죽이고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이만열 교수

 

그럼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신채호는 투쟁의 방법으로 무력을 선택한다.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독립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폭력으로 맞서 싸우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일척(一擲)의 작탄(炸彈)만 못하며

억 천 장의 신문 잡지가 1회 폭동만 못할지니"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조선혁명선언은 어떻게 누굴 위해 쓰여진 것일까?

 

1920년 북경은

당시 외교활동치중하던 임시정부

독립의 방법을 달리하던 무장항일세력의 활동 무대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신채호는 이곳에서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과 가까워진다.

김원봉과 신채호는 무력투쟁노선을 내세우면서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조직되었다.

그들은 암살과 폭력, 파괴를 독립운동의 방패로 삼았던 항일비밀결사단체였다.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폭력을 사용했던 의열단의 방법은 때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동안 의열단이 취했던 독립운동 노선에 대해서

그것이 단순한 테러리즘이다, 과격주의다, 또한 공포주의다 하는 식의 비난이 많이 있어왔습니다.

 

임시정부 요원들 사이에서도 이런 비판을 가했는데

특히 1922년 3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이 일으킨 황포폭탄의거라고 하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지를 저격한 의거가 실패하면서

미국인, 영국인 사상자가 생기면서 그후 사방에서 비판이 가해지면서

의열단이 어떤 면에서 궁지에 몰렸지요.

 

그런 상황에서

의열단이 자기 노선에 정당화를 기하면서

이념적인 재무장을 하기 위해 어떤 지침이 되는 강령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 김영범 교수

 

"그래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단재 신채호 선생한테 와서

우리 의열단이 이러이러한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이런 우리 활동의 정당성, 이념적 지표가 되는 문구를 작성해주십시요'라고 요청하게 되지요.

 

그 요청을 받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이 직접 만드는 폭탄공장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 때 단재 신채호 선생 앞에서 의열단이 실제로 폭탄을 터트려 보이죠.

그걸 보고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감흥을 해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게 됩니다."   

                                                                                           - 한시준 교수, 단국대 역사학과

 

1923년 1월.

신채호는 한달간의 심혈을 기울인 끝에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한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의 의식을 한껏 고양시켰다.

 

1923년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바로 그 때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을 비롯하여

1924년 김지섭동경이중교폭탄투척사건

의열단의 의거활동은 한층 치열하게 이루어졌고 일본을 공포에 떨게 한다.

 

 

 

 

 

"의열단으로서는 우리는 이제 혁명국가다, 우리 의열단는 혁명단체다,

우리는 혁명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는 취지에서 굉장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혁명선언서를

중국 관내라든지, 만주, 러시아, 국내로 들여보내고

심지어 일본 도쿄에는 단원들을 보내서 의도적으로 대량 살포를 하기도 했고

거사때는 항상 이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뿌렸구요,  

 

그래서 조선혁명선언과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굉장한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는 원천이 되었지요." 

                                                                                                         - 김영범 교수

 

단재는 이 선언문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민족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다.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의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 할 것이다.  "

 

 

 5. 항일을 향한 투쟁의 길!

                      실천하는 지식인 무정부주의자 신채호!~

                          

  

"앞이 한 치도 안 보이는 암담한 상황,

신채호는 한 때 절망에 빠진 현실을 구출해줄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 최영, 을지문덕의 전기도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수많은 민중의 투쟁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와의 투쟁,

즉 나와 나 아닌 다른 것과의 끝없는 투쟁, 그것이 바로 역사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신채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역사관입니다.

수많은 논설과 역사서, 그리고 선언문으로 독립심을 부추겼던 그는

1928년 실천적인 행동으로 독립군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조선혁명선언에서 이미 밝혔듯이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한 신채호는 적극적인 투쟁 방법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그는 왜 무정부주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나약한 지식인, 관념적인 독립운동이라고 판단했을 때

그는 더 강한 독립운동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혁명선언서를 쓰고

그 혁명에서 민중해방을 강조한 그러한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무정부운동에 나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무정부운동은 초기에는 물론 독립운동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만

무정부운동 자체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 이만열 교수  

 

신채호가 지향했던 무정부주의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1928년 신채호는 천진항으로 향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인도, 필리핀, 등

7개국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천진대회에 참석한 신채호.

 

그는 여기서 비밀결사조직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결성하고 그 운동 방향을 모색한다.

당시 발표했던 선언문의 내용이다.

 

짐승같은 자본주의 강도들이 

식민지 국민들의 온갖 물건들을 다 빼앗아서 그들은 배가 터지려고 한다.  

 

그런고로 식민지 국민들은 싸워서

그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천진대회에서 보면 국경 교외에다가 폭탄공장을 만들어 가지고 테러활동을 하자는 겁니다.

각국에 테러주의자를 보내어 고관들을 암살한다든지 각 기관을 파괴한다든지 그런 활동을 하기로 하고

그래서 독일인과 러시아인 기술자를 초대해서 그 기술을 전수받기로 하고

기관 잡지를 발행해서 아나키즘을 선전하기도 하고

그렇게 결정을 해서 그런 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야 하지 않습니까?"

                                                                                                     - 이호룡,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단재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당시 뜻을 같이 했던 북경우체국에 근무하는 대만 사람 임병문과 함께

각국의 위조어음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을 만들기로 한다.

 

계획은 액면 6만 4천원에 외국어음 2백매를 위조해 

일본, 대만, 조선 등에 발송하고 현지에서 찾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당시 유맹원이라는 가명을 쓰며 중국인으로 변장을 했다.

 

1928년 5월 8일.  

신채호는 돈을 찾기 위해 일본 고베를 거쳐 대만행 배에 올랐다.

 

대만 기륭항.

안타깝게도 신채호의 신분은 미리 유출되고 말았다.

 

그가 도착하기 전 일본 수상경찰들은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기륙항에 도착하자마자 곧 바로 체포되었고 중국 대련으로 이송되었다.

 

 

 

신채호는 중국 여순감옥에 투옥되었다.

이곳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옥살이를 한 역사의 현장이다.

 

1930년 5월.

신채호는 '유가증권위조 및 사기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수감 당시 신채호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당했다.

죄수번호 411번, 나이 49세 신채호(申采浩).

 

수감생활 중 병을 얻었던 신채호에게 일제는 병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 사람 생각에는 감옥에서 돌아가시면 여론이 안 좋아지고 그러니까

당신 보호해줄 사람만 있으면 병보석으로 내보내주겠다,

그런데 실제로 보호해줄 사람도 나왔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께서는

'내가 민족을 반역을 하고 그런 사람의 보호에 내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셨지요."

                                                                                                               - 이덕남, 신채호의 자부

 

그를 보호해줄 사람은 일제의 앞잡이.

대의와 지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단재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단재가 수감된 뒤 그가 전에 썼던 글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통해 연재되기 시작했다.

기자를 통해 자신의 글이 연재됨을 전해 들은 신채호는

그가 쓴 역사서들은 아직 수정할 곳이 많아 아직 빛을 볼 때가 아니라고 했다.

출옥후 손을 봐서 연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미완성의 역사서,

그것이 지금 <조선상고문화사><조선상고사>다.

 

역사만이 희망이었던 신채호.

그는 수감 중 노역에 동원되면서도 틈틈히 쉬는 10분에 휴식시간도 아끼며 책을 읽었다. 

면회 온 기자를 통해 그가 읽기를 원했던 책들은 대부분 역사서들이었다.

 

신채호는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벽초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가야국 천국고><정인홍공 약전> 두 구상을 이미 끝냈다고 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역사에 몰두했던 신채호.

역사는 그에게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힘으로 조국과 민족을 다시 찾으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단재 선생에 의하면 애국심이라 봤어요.

 

이 애국심을 고취하려면

역사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본 것입니다.

 

국민들에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역사를 가르치는 것,

 

그것도 '민족의 얼이 살아있는 역사'를 가르쳐 놓으면

그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역사를 배우고 자라서 애국심이 배양 되어가지고 

반드시 미래에는 역사의 힘으로, 애국심의 힘으로 통하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궁극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할거라고 보셨습니다."

                                                                                                      - 신용하 교수

 

출옥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신채호는 뇌일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1936년 2월 21일 사망했다.

 

"지난 2월 21일. 단재 서거 65주기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완전독립, 절대독립만을 원했던 단재 신채호.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단재 신채호에게 역사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역사연구를 통해

좌절에 빠져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게 되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독립이 가능하리라는 것이 신채호의 생각이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역사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역사만이 희망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안고 독립운동 전면에 나섰던 단재 신채호.

그는 갔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출처 : 세계국학원청년단 사이버의병
글쓴이 : Ψ의병★용용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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