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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여립의 恨이 서린 천반산과 죽도

이름없는풀뿌리 2016. 1. 16. 19:56

  

예전 같으면 장마철이 끝나면 한동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휴가철이 되곤 하였는데 요즘엔 우리나라가 아열대성 기후로 변해 간다고 하더니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는 우기가 계속되고 있다. 산악회원들은 계곡을 찾아 강원도로 떠나고 나는 가까운 진안의 천반산으로 향한다. 

 

천반산은 정여립과 기축사화의 슬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곳으로 진즉부터 가보려고 맘에 두고 있던 차에 여름 물놀이 야유회와 엮어서 산행 공지가 올라오고 보니 일 때문에 강원도 계곡행에 빠져 하는 나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수 없다. 조선시대 최대의 옥사이자 조선 500년 최대의 사건 현장을 찾아가는 천반산 산행은 마침 여름 이어서 더욱 반가운것 같다. 

 

천반산 옆에 있는 죽도는 어릴적 부터 많이 들어왔던 곳으로 여름이면 많이들 놀러 갔던 곳 이다. 여름날 천반산 산행이 반가운것은 긴 능선을 따라 굽이 굽이 흘러가는 구량천의 물줄기를 바라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짧은 산행후에 만나는 죽도를 에워싼 아름다운 냇가에서의 시원한 물놀이가 있기 때문이다. 천반산 능선을 따라가며 억울한 죽음을 맞은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천재였던 정여립을 회상해 보고 인기 많았던 죽도의 옛 영화를 떠올려 본다. 

 

 

 

천반산 휴양림 앞에서 산행시작 (10시1분) 

 

진안군 동향면 성산리 천반산 휴양림 앞에서 하차후 다리를 건너 우측의 산길들머리로 향하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찌는듯한 여름날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다리왼쪽편에서 구량천 물에 첨벙거리며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420년전 역모라는 이름으로 희생당한 대동계원들과 정여립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천반산으로 산행은 조선최대음모 라는 역사의 이야기를 화제로 삼으며 시작을 한다. 

 

 

휴양림 우측 들머리에서 시작한 산길은 능선까지 어렵지 않은 편안 오름길 이다. 하지만 오랫만에 산행길에 동행해서 인지 그네님과 한방콜라님이 습한 날씨와 함께 힘들어 하며 우리팀은 두대의 버스에서 내린 많은 일행들 중에 맨 후미에서 천천히 진행을 한다. 산행시작 40여분이 지나자 능선길에 오르고 10여분을 더가니 나무가지 사이로 진안 지역에 오면 가장 눈에 띄는 이정표인 뾰족한 말귀를 가진 마이산이 보인다. (10시52분) 

 

 

실제로는 더 크게 보이는데, 내 카메라 최대줌이 고작 여기까지 라서 멀게만 보인다. 

 

 

능선을 따라 가며 바위 구간에 밧줄이 매어져 있는데.... 등로 한가운데 (원안) 바위밑에 말벌집이 있다. 

 

먼저 지나간 일행들이 벌집을 건들고 갔는지, 열댓마리의 왕팅이들이 나와서 윙윙 거리며 화를 내고 있다. 모르고 지나쳤으면 대형사고 날수 있는 상황이다. 우리 일행은 우측 사면으로 우회를 하여 지나갔는데, 우리와 코스를 반대로 잡고 삼삼오오 혹은 홀로 반대로 가능하면 만나는 분들마다 주의 하시라 말씀을 드렸지만, 위에서 내려오시는 분들에겐 저 바위밑의 벌집이 보이지 않을텐데 걱정이 된다.  

 

 

정상으로 가는길에 만나는 암벽과 원거리 조망 

 

멋진 조망을 렌즈에 담고 있는 반보님

 

지능선에서 주능선에 오르면 정상은 우측으로 가야 하는데, 조망을 찾아 왼쪽으로간 반보님이 기가막히다고 소리쳐 불러 가보니 오늘 산행에서 만날수 없는 능선 반대편 조망이 시원스럽게 열려있다. 

 

멀리 향적봉에서 이어진 덕유 주능선을 따라 무룡산~삿갓봉이 보이고 다시 우측으로 남덕유산과 할미봉이 보인다. 

 

남덕유산 방향의 조망 (클릭) 

 

 

 

천반산과 건너편 고산의 지능선을 따라 굽이 굽이 휘돌아 흐르는 구량천 

 

천반산 정상 깃대봉 647m (11시21분)

 

정여립이 훈련할 때마다 천반산 제일 높은 곳에 ‘大同(대동)’ 이라는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봉 이다. 천반산은 정여립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산이다. 천반산을 오르면서 정여립과 기축옥사에 대해 모르고 갈수는 없는 일이다. 산행을 하면서 일행들과 정여립의 모반과 조선시대 최대, 최악의 사화인 기축옥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르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알고 다시 보면 420년전 도포를 입고 천반산 산길을 걸었을 정여립의 모습이 떠오르는듯 감흥이 새롭기만 하다.   

 

 

천반산의 이름 유래

 

천반산(天盤山)의 이름에는 3가지 유래가 있는데... 먼저 주능선 일원이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고 두번째로 땅에는 천반, 지반, 인반 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세번째로는 산 남쪽 마을 앞 강가에는 장독바위가 있어, 이 바위가 하늘의 소반에서 떨어진 복숭아(천반락도 天盤落桃)라 하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천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작금에 있어 천반산은 마치 天反山 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조선시대 최대의 옥사가 발생한 정여립 사건의 주인공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하고 죽은곳이 이곳 천반산 이기 때문이다. 하늘(임금)에 반대 했던 역신들의 산 천반산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억울하게 죽은 정여립은 그렇게 부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잔혹한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모반 사건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장계(첩보문건) 한 장이 조정에 당도한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정여립이 '세상을 전복시킬 엄청난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첩보는 구체적이다. 정여립이 자신을 따르는 일당과 호남, 황해도에서 동시에 봉기해 한강의 얼음을 딛고 한양으로 진입, 훈련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때까지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선조조차도 정여립이 모반할 까닭이 없다고 단언했다. 정여립과 한 길을 걸었던 동인 계열은 그가 스스로 한양에 올라와 무고를 주장하면 사건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판단은 어긋났다. 10월7일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당도했다. 변고는 거듭됐다. 10월18일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월20일 선조가 직접 나선 정옥남에 대한 친국을 시작으로 기축옥사가 시작됐다. 옥남은 정여립의 아들이다.

 

이듬해 7월까지 무려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조 4대 사화의 희생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임진왜란을 4년 앞두고 동인인 이순신, 권율등이 음모에 휩쓸리지 않은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4~500만 명이었다. 모반에 대한 치죄는 매우 엄했다. 삼족을 멸하고, 정여립과 조금 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 죽였다.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된 뒤 조선팔도로 흩어지고 그와 서신 한 번이라도 주고받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말 한 마디 건넨 이력이 있는 사람도 죽었다. 이웃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집단이 죽임을 당했다. 전주와 한양에서 국문이 109일 동안 계속됐다. 심지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까지도 묘향산과 오대산 사찰에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정여립의 근거지 전주는 동래 정씨가 아예 살 수 없게 됐고, 그의 고향 금구는 현으로 강등됐다. 집을 파괴하고 역적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연못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돼 이후 인재등용에서 배제가 되었다.

 

여기 까지가 승자들의 역사속에 남겨진 정여립에 관한 기록이다. 서인들이 조선시대가 망할때까지 집권을 하였으니 결국 그들의 기록은 믿을만한게 못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역모가 아니라 잔인한 음모다!!

 

당시의 사건은 이렇게 추정되고 있다. 정여립 역모사건과 기축옥사는 조선역사에서 늘 문제가 되는 악적 서인들의 철저한 시나리오에 의한 잔인한 음모 라고 볼수 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역대 최악의 임금중 하나로 꼽히는 선조이며, 당시는 임진왜란을 고작 몇년 앞에 두고서 동인들이 주도적 집권세력을 형성하고  있을때 였다.

 

힘을 잃고 정권을 찾을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은 완벽한 시나리오를 구성하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모 사건이라 하면 조선시대에는 정권을 충분히 뒤엎을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고, 이에 서인들은 진안 운장산/구봉산의 이름을 만들게한 간신 송익필(자가 운장, 호가 구봉)과 동인백정으로 불리웠던 송강 정철 등이 음모를 꾸며 율곡의 추천으로 서인에 들어왔다가, 1년후 율곡이 죽자 서인들의 행태에 실망하고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을 역모의 주역이자 도화선으로 삼아 동인정권을 끌어내리고 집권을 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정여립은 동인으로 옮겨간 이후 서인들의 행패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여 천반산 일대에서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한달에 한번씩 모여 무술훈련도 하고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도 하였는데, 열혈남아였던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  ‘백성과 땅이 이미 조조와 사마씨에게 돌아갔는데, 한 구석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의 정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거침없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게 또한 서인들이 정여립을 역모의 주동자로 몰기에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준것이다. 당시 정여립의 거침없는 발언은 선조 앞에서도 할말이 있으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동사만록>에도 음모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사건을 만든 사람은 송익필이고, 각본에 따라 연출한 사람은 정철 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서인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당쟁의 산물일 뿐, 역사 속에서 역모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한 서인은 계획된 대로 사전에 내통한 황해도 관찰사를 시켜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다는 비밀장계를 선조에게 보내면서 준비된 음모가 시작되는데 그때 이미 정여립은 서인들이 보낸 자객에게 천반산 앞 죽도에서 암살을 당한 이후 였다고 한다.

 

이율곡과 선조도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천재 정여립이 역모를 꾀할일이 없으니 같은 동인들도 가볍게 생각하고, 졍여립이 나와서 진실을 밝히면 아무 문제가 없을것으로 가볍게 보았는데, 죽은 정여립이 어찌 나와서 진실을 밝힐수가 있었을까. 서인들은 정여립을 죽여놓고 열흘이 넘게 시간을 끌면서 매일 매일 매수된 관원을 시켜 거짓된 상소를 올리면서 그가 도망중이다, 궁지에 몰리자 자살했다 는등 계획된 거짓정보를 왕에게 전달하여 점차 국면을 엄청난 역모로 몰아간다.

 

결국 음모는 성공하기에 이르고 조선시대 최악의 왕 선조는 동인의 반대파인 서인의 수장 정철을 시켜 기축옥사를 진두지휘하게 하고 동인 사냥을 시작케 한다. 이때의 모사꾼이 송익필 이다 (정감록과 정여립을 결부시켜 거짓 소문을 퍼트린 이가 송익필 이다). 그렇게 동인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狂人 정철의 손에서 원래 계획된 동인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대로, 당시 집권하고 있던 동인들은 수장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관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삭탈관직을 당하고 동과 서는 더 이상 말로써 회복할 수 없는 극한의 원수가 되어 버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 이라며 한탄을 했다.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 

 

또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을 쓴 신정일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6세기 말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진왜란 때 인재부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선비들은 더 이상 바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조선사회를 썩게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가막리와 멀리 마이산

  

 

정여립의 역모가 거짖인 이유들 

 

1. 당시 집권층은 정여립의 동인이다. 불만은 서인들이 가지고 있는데, 집권파인 정여립이 역모를 할 이유가 없다.

2. 역모의 진원지는 전라도 천반산인데,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고변은 천리길도 넘는 황해도에서 했고, 전라도지역에서

    역도로 붙잡힌 사람들은 역모 자체를 부인하다 장살된 반면 해서지역 역도들은 역모를 사실이라 자백했다고 한다.

3. 정여립이 암살을 당할시 그는 천반산 앞에 있는 작은산 죽도에 아들과 수하 한명을 동행하고서 단풍구경을 하고 있었다.

4. 수백명의 무술을 하는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지만 그는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

5. 역모사건후 그의 집에는 그가 평소에 쓰던 그대로 방치되어 그와 교류했던 선비들과의 안부 편지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후 그 편지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었는데, 역모를 준비한 사람이 집안에 중요한 문서

   등을 집에 방치해 두며 단풍놀이를 간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단풍구경 갔다가 암살을 당한 것이다.

6. 그가 역모후 도주한곳이 죽도 라고 하는데, 잠시후 아래에서 죽도 사진을 올릴것 이지만, 죽도는 말만 섬이지

   밤톨만큼 작은, 그러면서도 사방이 강물에 에워 쌓여진 조그만 야산에 불과 하다. 정말 역모라면 지리산 같은 큰산으로

   도망을 가던지 해야지 마을 뒷산보다 작은 죽도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것 이다. 

 

능선상의 커다란 바위

  

 

정여립의 역모사건 이후 힘을잃고 망해가는 조선 

 

서인들의 음모에 의해 일으켜진 기축옥사는 1,000명 이라는 엄청난 지식인 선비들을 죽이고 끝이 났다. 당시 인구가 400~500만 가량이고, 이중에 양반의 비율이 약 2%로 정도인데, 이중에서 동인과 정여립과 친분이 있던 당대의 최고 엘리트 지식인들 1,000명이 죽었으니 엄청난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참고 :: 1910년 호구조사에서 전국 가구수가 289만4777호로 집계되었는데 이때 양반은 5만4217호로 전체인구의 1.9%에 불과 했다고 한다) 

 

결국 4년후 임진왜란을 맞아 고전을 한 큰 이유중의 하나가 기축옥사때 당대의 지식층을 너무 많이 죽여서 임란때 주도적으로 전쟁을 치를만한 인재가 없었다고 한다. 더 웃기는 것은 지난번 화양구곡과 송시열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말했듯이 이 기축옥사를 일으킨 문제의 서인들은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인물이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원균, 신립 = 서인, 도움이 전혀 안되고 그나마 있던 병력과 장비를 말아먹은 인사들이다)

 

참고로, 기축옥사로 조선의 인재들을 싹 죽이고 임란때 왜적을 맞아 싸운것은 곽재우, 권율, 이순신등 동인들이고...서인들은 임란중에 이순신을 시기하여 백의종군케 하더니 기껏 한다는짓이 원균을 앞세워 그나마 잘싸우던 수군을 전멸을 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서인이 내세운 신립은 방어에 유리한 문경새재를 버리고 조총의 위력을 모르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는 어리석은 전술로 육군을 몰살시켜 버린다. 이렇듯 임란때도 서인측이 한 공적 이라고는 아군을 몰살시켜 국가에 큰 위해만 끼쳤는데, 임란이 끝나고 다시 힘을 일케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되는 계기가 바로 자신들 스스로가 실제 역모를 일으키는 인조반정 이다. 인조반정의 추악함에 대해서는 지난번 화양계곡과 송시열을 언급하면서 충분히 설명하였음으로 그만 하고자 한다. 다만 기축옥사에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거쳐 친일파로 이어지는 서인들의 끝없는 악행을 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참을수가 없다.

 

기축옥사 이후 재능있는 선비들은 왕 앞에 바른말 하기를 꺼려하고, 동인과 서인의 갈등의 골은 돌이킬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어 이후 조선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에너지를 잘못된 곳에 소모를 하게 된다. 조선이 망할때까지 쭈욱 권력을 잡은 서인 정권은 주변 나라들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이 되어 가는 와중에 애꿎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며 두차례나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고는 자신들은 싸움 한번 안하고 나라에 치욕만 안기고선 이후 주자학과 숭명사상에 빠져 결국 조선을 망하게 하더니 그 주역들은 죄다 친일파 주축이 되어 현재까지 그 부를 이어오고 있다.

  

 

전망바위에서 연호님

 

  

시인으로 만족했어야 했을 송강 정철의 두얼굴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

사미인곡, 속미인곡등 왕을 향한 절절한 충정의 글을 남겨 훌륭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송강 정철의 이면은 송시열 만큼 다르다. 해방후 국사편찬 까지도 당시의 서인들이 맡고 있으니 현재 국사의 기록도 여전히 서인들의 왜곡한 잔재들이 남아 있을수 밖에 없을것 이다. 

 

선조실록에는 송강 정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사독한 정철은 천고의 간흉이다.' <선조실록 145권>

- '정철이 항상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역적의 변이 신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오늘이야    말로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날이라 여겨 자신이 신문하는 관원이되어 일망타진 할 계책을 세웠다.' <선조실록 84권> - '정철의 일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 듯하니 방치하는 것이 옳다.' <선조실록 54권>

 

이외에도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은 정철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정철이 기축년에 많은 그물과 함정을 만들었다. 정철이 기축옥사를 이용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했다고 전한다. 선홍복을 사주하여 이발, 이길, 백유양 등을 거짓으로 고변하게 하였다, 이는 정철 등이 꾸민 일이다. 대단한 죄가 아닌데도 백성들이 연좌되어 감옥이 가득차고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 김천일의 상소 이는 모두 정철이 지휘한 것이다.

 

술을 좋아하여 늘 술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그때문에 실수도 많았던 천재시인 정철, 예술가의 피를 타고난 그는 타협할줄 모르는 고집센 성격으로 강원도 지역에 내려오는 정철 관련 설화등에선 성질이 고약하고,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잘 잡는 쪼잔한 인간으로 나온다. 동인의 수장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가며 대립각을 세우더니 서인의 수장으로서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세우는 음모를 꾸미고 기축옥사를 책임지며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해 버린다. 그의 주옥같은 문학작품속에 광기어린 이면이 감춰지고 있는데 기축옥사를 통해 정철의 다른 모습을 알수가 있다. 그런 정철도 결국은 선조의 눈밖에 벗어나고 결국엔 선조가 정철을 일컬어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 등으로 부르며, 선조실록에 험한 평가가 올라가고 내처지게 된다.

 

당시 정철과 언쟁을 벌이며 정철이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던 정철의 정적 동인 출신 이발의 식솔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 종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여 극적으로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광산 이씨 이발의 후손들은 지금도 명절이나 제사때 고기를 다지면서 '철, 철, 철' 하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다고 한다.

 

광기어린 천재 정철이 선조를 이용해 음모를 꾸미고 정적을 제거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 순진한 시인이 정치9단 선조의 계략에 이용당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정철이 기축옥사를 이용해 엄청난 살륙을 저지르고 정권을 잡은건 사실이다.  또한 전라도 지역에서 성장하며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닦고 결혼을 하고 관직에 들어선 정철이 음모로 시작된 거짖 역모와 기축옥사를 통해 호남지역의 인재들을 몰살 시키고 이후 호남이 역적의 땅이 되어 그쪽 인재들의 등용을 막았던 것은 자신이 살기 위한 몸부림 이었을까?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선각산~덕태산 라인 (중앙 뒤쪽)과 마이산 (우측) 

 

마이산 우측으로는 운장산 ~ 복두봉 ~ 구봉산 능선이 보인다.

 

 

천고의 간흉 송익필  

 

사진에 보이는 운장산은 송익필의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고, 구봉산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 이라고 한다. 송익필은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세우고 천여명을 죽게한 조선 최대의 사화인 기축옥사의 주범이라고도 할수가 있는데, 그의 아비 송사련 또한 송익필을 능가하는 간악한 자였다.

 

송익필의 아비 송사련은 서얼 출신으로 그의 어미 또한 서녀로 당시 중종때 좌의정이던 안당의 서매가 되니 촌수로는 외삼촌 이지만 거의 노비신세 였다고 한다. 안당의 신세를 지던 그는 벼슬 욕심에 안당의 정적인 심정에게 붙어 미관 말직을 얻으면서 외삼촌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을 모함하여 신사무옥을 일으키는 만행을 자행한다. 결국 은혜를 입은 안당을 멸문지화로 만들고 자신은 그 공로로 당상관이 되었다.

 

그러나 30년후 안당이 복권되고 나서 그의 자손들이 송사련을 무고죄로 고발을 하게 되자 음모가 드러나고 이미 죽은 송사련은 관직이 박탈되고 송익필등 가족은 다시 노비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철과 친하게 지내며 뛰어난 문장가로 어떻게 신분상승을 꾀하던 그를 제지하는  동인세력은 그에게 눈의 가시였고 결국 전국의 서인세력을 규합하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는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하며 언변에 거침이 없던 정여립으로 타겟을 잡고 치밀한 계획하에 전라도의 정씨가 왕이된다는 유언비어를 전국적으로 유포시키고 백성의 관심과 의심병 많은 선조의 관심이 이쪽에 쏠리게 만든다. 드디어 기축년에 황해도에서 왕에게 장계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시나리오에 천여명의 생목숨이 끊어지니 이게 바로 기축사화다. 그의 아비는 신사무옥을 일으키고 그는 기축사화를 일으키니 신분상승을 꾀하던 '쌍놈' 父子가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을 몰살시키고 국란을 맞아 국가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동인백정 이라는 송강 정철 보다도 더 악질 간흉임에 틀림이 없다.

 

운장산은 그 악적의 이름을 버리고, 본래 이름인 주줄산으로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조망 (클릭) 

 

가막마을과 독재봉 

 

시원한 조망을 다시 편안한 능선을 걷는다. 

 

정여립이 바둑을 두었다는 말바위 널찍한 바위가 말 등처럼 생겼다. 

 

 

 

곧이어 천반산 성터가 나온다 (11시56분)

 

 

선조의 열등감이 빚은 참극

 

선조는 애초부터 왕의 자질이 많이 부족했는데 어릴적에 왕이 되어 당대 최고로 뛰어났던 천재 정여립에게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열등감은 이후 몇십년이 지나도 씻겨 지지가 않았는데, 당시 국내 정세가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이 좋지 않게 흐르자 변덕스럽고 의심병 많은 선조는 민심을 회복하고 정치적인 돌파구를 찾으려 고민하던 차에, 집권당인 동인을 누르고 정권을 잡으려는 서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뻔히 보이는 음모로 인해 시작된 역모를  눈감아 주면서 왕권을 회복 하고자 정철을 앞세워 기축옥사를 단행 하였다.

 

또한 낙향한 정여립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 수백명의 대동계를 조직하여 전라도 지역에 상륙하여 전혀 대비가 없던 관군들을 물리치며 승승장구 하던 천여명의 왜적을 물리친 일이 발생하자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민심이 정여립에게 쏠리게 되자 불신감 가득한 새가슴인 선조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서인들을 부추켜 정여립과 동인들을 몰살하게 한다. 서인들의 뻔히 보이는 음모의 배경에는 이렇게 선조의 문제가 오버랩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정여립 역모사건 이전에 정철과 선조의 밀약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역사의 기록에는 없지만 양자간의 이해관계로 볼때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 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이어 2주 연속 우연한 동행을 하고 있는 바람재님 ~ 

 

성터에서 우리는 죽도쪽으로 길을 잡고 우측능선을 타고 간다. 

 

풍경을 담고 있는 바람재님  

 

바람재님이 서있던 자리에서 바라본 그림같은 풍경 

 

잠시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정표는 성터에서의 이정표와 거리가 일치하지 않는다. 

 

천반산 깃대봉과 지나온 능선길 

 

뜀바위

  

뜀바위에서 바라본 건너편 봉우리

  

정여립이 말을타고 뛰어 넘었다고 하는 뜀바위다. 이정도면 정여립이 대단하다기 보다 그 말이 더 대단스러운것 같다.

 

 

정여립과 용마(龍馬)

 

정여립이 타고 다녔던 말이 용마 라고 하는데, 정여립의 이야기에는 그 용마의 전설도 함께 전해 내려온다. 그 말은 워낙 빨라서 정여립이 상두산에서 6km쯤 떨어진 김제 황산으로 활을 쏘면, 용마가 더 빠르게 달려가 그 화살을 물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살을 쏘았는데 용마가 화살을 물어오지 못하자, 정여립이 화가 나서 곧바로 그 용마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화살이 용마 엉덩이에 꽂혀있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크게 자책하며 그의 칼과 함께 용마를 묻었다고 하는데, 그 무덤이 김제시 금산면 쌍룡마을앞 논 가운데 있는 무덤 이라고 한다. 

 

뜀바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래로 산행종착 지점인 장전마을이 보인다. 

 

뜀바위에서 내려가기 직전에 시야를 가리는 잡목을 제끼고 능선 반대편의 가막골로 흘러가는 금강을 담았다. 

 

굽이굽이 산을 끼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 천반산 산행의 가장 큰 즐거움 이다. 

 

뜀바위의 건너편 봉우리 뒤로 운장산(왼쪽), 구봉산(오른쪽)이 숨어 있다. 

 

능선 반대편 죽도를 돌아 흘러가는 금강과 마이산 조망 

 

반대편 구량천과 장전마을 

 

장전마을 지나 죽도쪽으로 흘러가는 구량천 풍경 

 

대던산의 모습과 그 앞 죽도 사이를 돌아 가는 금강 

 

뜀바위에서... 사진에 안보이는 오른쪽은 구량천 왼쪽은 대덕산과 금강 

 

뜀바위를 내려가면서...만난 바위손 

 

뜀바위 건너편 봉우리에서 방금 지나온 뜀바위를 바라보며 

 

뜀바위 건너편에서 바라본 금강 

 

멋진 비박쟁이 바람재님 

 

하산길에 바라본 죽도

 

이 송편모양의 작은 섬이 죽도 인데... 정여립이 역모를 하고 이 작은 산에 숨을 이유가 없는것이다. 그는 이곳에 단풍놀이 왔다가 암살을 당하고 조선시대 최대 음모사건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산을 하면서 바라본 죽도의 흉물 (명물?) 

 

 

죽도의 슬픈 상처는 명물이 되고

 

버스에서 회장님이 저곳을 죽도의 명물 이라고 설명을 하신다. 원래 죽도는 오메가 Ω 형태의 섬같은 곳 이었다. 수려한 바위산 절벽을 맑은 물이 휘돌아 흘러 마치 섬과 같았던 곳 이다. 용담댐이 만들어지기 전 이야기다. 그런데 70년대 중반 물줄기 일부를 돌려 논을 만들려고 병풍바위 중간을 폭파하여 지금의 폭포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구량천이 곧바로 폭포 아래로 흘러가게 되면서 물길이 바뀌어 죽도를 돌아 흐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논만들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인간의 욕심이 남긴 결과만이 죽도의 본래의 아름다움을 훼손한채 영원히 복구할수 없는 흉물스런 절단면이 되어 죽도의 슬픈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용담댐 건설 이후 다 떠난 죽도에 민가 한채가 보인다.

 

사진에 보이는 곳이 합수부 인데... 구량천과 연평천이 합수하여 죽도 반대편으로 돌아 내려갔었는데 오른쪽 구량천에서 오는 물줄기의 맥이 죽도폭포로 다 빠져 버리고 조금만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볼수가 있다. 

 

죽도 합수부와 건너편 대덕산 

 

죽도폭포가 있는 상죽도쪽 풍경 

 

파괴된 병풍바위로 인해 죽도폭포 라는게 만들어 졌다.

이 끊어진 절벽 때문에 장전마을 사람들은 ‘혈맥이 끊겼다’고 말한다. 사람 욕심 때문에 훼손되는 자연산천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말인데, 이렇게 한번 훼손된 자연은 복구 할수가 없으니 그점이 안타깝기만 하다. 세월은 흘렀지만 지금도 자연을 회복불가능한 상태로 훼손하는 이런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 

 

죽도 입구의 파괴된 병풍바위에 도착하여 일단 산행을 마치고 야유회 모드로 전환한다.  

 

 

술자리 이후 물놀이를 하면서 방수카메라로 몇컷 담았는데 화질이 좋지 않다. 죽도폭포앞 구량천의 수심이 깊어 냇가를 가로질로 보조자일을 설치 하고 수영으로 열심히 팔다리를 저어서 푸짐하게 먹은것을 소화 시켰다. 

 

물놀이를 마치고 냇가 길을 따라 장전마을에 주차한 버스로 돌아오는 길

우측능선은 오늘 진행한 산행길 이다. 

 

걸어오다가 다시 물속에 시원하게 몸을 담그신 회원님들 

 

구량천 냇가엔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장전마을 입구로 돌아와 하루 일정을 마무리 한다. (16시32분) 

 

 

 

 

천반산 - 죽도 지도

 

산행코스 :: 천반산휴양림 - 천반산 깃대봉 - 전망바위 - 성터 - 뜀바위 - 죽도폭포 - 장전마을 (약3시간)

산행일시 :: 2011년 7월31일, 금강산악회

 

 

 

 

鄭汝立 謀叛事件에 대한 考察 

                                                     李 羲 權 (전북대강사-한국사)

鄭汝立 모반사건에 대한 고찰

宣祖 22년(1589)에 일어난 全州人 鄭汝立(?-1589)의 謀叛事件은 3년여에 걸친 獄事의 蔓延으로  무려 千餘名에 달하는 犧牲者를 낸 慘憺한 悲劇을 불러 왔고, 結果的으로는 全羅道를 叛逆鄕으로 전락시켜 平安道 咸鏡道地方과 함께 差待 받는 地方으로서의 설움을 겪게 하였다.

鄭汝立 謀叛事件의 告變經緯  

黃黃海道 觀察使 韓準(1542-1601)과 載寧郡守 朴忠侃(?-1601), 安岳郡守 李軸(1538-1614), 信川郡守 韓應寅(1554-1614)등이 前 弘文館修撰 鄭汝立의 모반을 告變한 것은 선조 22년 (1589) 기축 10월 2일의 일로서 宣祖修正實錄에 기록되어 있는 告變經緯는 大體로 다음과 같다.

海西의 九月山 僧侶 가운데 汝立의 역모에 가담한 자가 있었는데 僧 藏巖이 이를 探知하여 載寧郡守 朴忠侃에게 비밀리에 알렸으나 충간이 머뭇거리며 결정을 못하여 告變을 하지 않았다. 이 때 安岳郡守 李軸에게 南截이라는 族弟가 있었는데 그가 시골에 살면서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듣고 李軸에게 알렸으므로 축이 南截을 시켜 비밀리에 汝立의 逆相을 探知하게 했다.

이이에 南截은 校生 趙球가 汝立의 弟子라고 말하면서, 항상 많은 무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이 그 종적이 평소와 같지 않으므로 이 사실을 李軸에게 알렸다. 이에 李軸이 趙球를 잡아 問招하고 그의 집에서 汝立의 편지를 찾아내어 詰問하니 趙球가 숨길 수 없음을 알고 叛逆의 實相을 모두 告했다

李軸은 즉시 朴忠侃을 불러 상의 한 결과 信川郡守 韓應寅은 名士이므로 朝廷의 신망을 얻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 趙球를 韓應寅에게 보내어 連名으로 監司 韓準에게 報告하였다.

한한편 朴忠侃은 載寧으로 되돌아가 읍내에 사는 汝立의 당원 李綏(수)를 잡아서 문초하니 李綏의 自白도 趙球의 말과 같으므로, 전에 의암에게서 들었던 내용과 함께 소를 갖추어 그의 아들을 시켜 대궐에 나아가 上變하도록 했는데 이때 황해감사  韓準의 狀啓도 그 뒤를 따라 도착되었다.

그러나 위 告變經緯에 대하여 掛一錄에는 朴忠侃이 李軸을 찾아가 鄭汝立의 역모가 드러났으니 속히 도모해야겠다고 말하였으나 軸이 쉽게 응하지를 않았고 또 韓應寅의 협조를 구하려 했으나 韓應寅이 故意로 忌避하므로 충간이 李軸과 韓應寅을 협박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여 장계를 올리게 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고,(燃藜室記述 3) 己丑獄案에도 韓準의 告變狀啓가 汝立의 모반내용을 朴忠侃이  제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패림 5, p.701)

이상의 사료를 검토하면서 제기되는 의문은 왜 해서에서 고변이 이루어 졌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宣祖修正實錄에는 汝立이, 해서지방의 풍속이 頑惡하여 일찍이 林巨正의 난이 있었음을 알고, 자신이 황해도 都事가 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安岳人 邊崇福, 朴延齡, 海州人 池涵斗 등과 정을 맺고 海西에서 역모를 진행시켰던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汝立이 황해도에서 역모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宣祖修正實錄에 보면 일찍이 汝立이 해서는 율곡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이곳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栗谷의 사주에 의한 것이며 公論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율곡을 詆斥하다가 西人들의 최대의 증오의 대상이 된 여립이 하필이면 율곡 문인들의 소굴인 해서에서 역모를  했을 리가 없으며, 또 모반의 산실이 전라도의 수도 全州이니 全羅道에서의 역모진행이 더욱 완연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全羅 觀察使나 全州府尹 및 各 官廳의 관헌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고 해서의 벽지에서 먼저 탐지되었다고 하는 것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海西에서 고변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2. 逆謀의 斷定

宣祖修正實錄의 기록을 보면 고변이 있었던 10월 2일 밤, 선조는 便殿에 나아가 三相과 六承旨 및 義禁府堂上을 모이게 하고 汝立의 甥姪인 檢閱 李震吉만을 제외하고 宿直에 들어와 있는 都摠管과 弘文館 上下番을 모두 入侍케 한 뒤 汝立의 爲人에 대하여 대신들의 소견을 묻고는 告變書를 내어놓았다. 이때 領相 柳㙉(1531-1589)과 左相 李山海(1539-1591)는 汝立의 위인을 알 수 없다고 했고, 右相 鄭彦信(1527-1591)은 그가 독서하는 사람이라고 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宣傳官과 義禁莩事를 黃海道와 全羅道에 각각 파견하였으나 , 이 보다 앞서 邊崇福(一名 涘[사])이 趙球가 告變했다는 말을 듣고 安岳으로 부터 4일만에 金溝에 到着하여 汝立에게 고변 사실을 알려 주어서, 汝立이 朴延齡의 아들 朴春龍과 자기 아들 玉男이와 함께 집안 사람들도 모르게 밤을 틈타 달아났었음으로, 다음 날에 義禁莩事 柳湛이 金溝와 全州에 있는 汝立의 兩家를 掩襲했으나 汝立을 잡지 못했다. 이 때 汝立은 鎭安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는데  縣監 閔仁伯(1552-1626)이 밭 두덕에 쌓아둔 풀 더미에서 찾아내어 군대로 포위하고 생포하기 위해서 왕명을 받들고 나아가 自辨하라고 회유했으나 여립이 듣지 않고 변숭복을 죽이고 옥남이를 죽이려다 실패한 뒤 자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玉男이와 春龍이 잡혀오고 海西의 역도들이 잡혀오게 되어 선조가 臨席한 가운데 庭鞫이 실시되었는데, 옥남은 吉三峰이 謀主이고 海西人 金世謙, 朴延齡, 李箕, 李光秀, 朴杙(익), 朴文長, 邊崇福 등이 때때로 왕래했으며 중 義衍과 都事 池涵斗가 서당에 머물면서 공모했다고 자백했다. 역도들이 곧 잡혀와서 문초를 받았는데 李光秀, 朴延齡, 池涵斗, 등의 供招가 趙球의 말과 대체로 같았으며 鄭弘 方義信, 黃彦倫, 義衍등이 伏誅되고  李震吉, 鄭汝復 兄弟, 韓憬, 宋侃, 趙惟直, 辛汝成 등은 不服하고 杖殺되었다.

결국 여립의 자살과 역도들의 자백으로 鄭汝立의 역모는 하나의 부정못할 엄연한 사실로 단정되고 말았다. 적어도 汝立의 자결이전까지는 朝臣들의 대부분이 汝立의 모반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었다. 고변 초의 朝廷의 동정에 대하여 松江年譜에는 李山海, 李潑, 白惟讓 등이 汝立을 斗護하여  告變이 李珥 門人들의 捏造라고 했으며 특히 鄭彦信은 汝立이 逆賊이 될 수가 있느냐면서  고변자를 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掛一錄에는 宣祖 자신도 汝立이 어찌 역적질이야 했겠느냐고  半信半疑했으며 , 西人들까지도 汝立이 반역할 리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雲巖雜錄에도 宣祖가 半信半疑 하다가 여립이 자결했다는 말을 듣고 獄事를 시작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문제는 汝立의 자결이다.  모반이 사실이라면 단 한번의 항거도 없이 도주하여 자결했을 리가 없으며 모반을 계획하지 않았다면 자결학 리가 더더구나 없다. 여립의 죽음이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역모의 산실인 전라도 역도들은 한결같이(玉男除外) 역모사실은 부인했는데 海西에서 역도라고 지목되어온 해서 愚氓들은 모두 역모 사실을 시인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전라도에 관계없이 해서에서 사건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3. 鄭汝立 謀叛事件의 全貌

宣祖修正實錄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汝立의 逆狀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3. 1 逆謀의 動機  

汝立이 자주 宣祖의 꾸지람을 당하고 벼슬을 버리고 歸鄕햐여 全州와 金溝 鎭安 別庄 사이를 내왕하며 소일하고 있었음으로 조정에서 이를 애석히 여겨 서로 뒤를 이어 汝立을 淸望의 자리에 천거했으나 宣祖가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본래부터 跋扈의 뜻이 있던 汝立이 이처럼 좌절과 억제가 심하게 되자 모반을 계획하고는 講學을 假託하고 無賴漢들을 불러모았는데 그 중에는 武士와 僧徒들도 끼여 있었다. 당시 나라는 軍政이 문란하고 財力이 쇠진한 데다가 매년 흉년까지 들어 도적들이 횡행하고,  백성들은 군정의 紊亂으로 괴로워했으며, 北界刷民으로 인해 동요마저 있었음으로 汝立은 백성들에게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음을 알고 그의 무리들과 모반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의 사료가 제시한 모반동기는 결코 汝立의 모반사실을 단정해 줄 자료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반동기는 이런 것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鄭汝立 자신뿐인데 실은 汝立이 말 한 마디 없이 죽었다. 따라서 위 기록은 汝立의 모반사건이 단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것이 모반동기였을 것이다>라는 하나의 추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 2 謀叛嫌疑

  3. 21 讒說의 流布

* .고래로 구전되어 오던  木子亡奠邑興이라는 讒說을 汝立이 妖僧 義衍과 모의하여 이를 玉版에 새겨 智異山 石窟에 숨겨 두고 , 義衍이 道潛, 雪淸 등과 산놀이를 빙자하고 智異山에 가서 石窟의 방향에 寶氣가 있다고 말하여 동행인을 시켜 玉版을 찾아 汝立에게 가지고 가서 비밀리에 黨人들에게 보이면서 이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 . 義衍이 명산을 두루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遼東에 있을 때 王氣가 朝鮮에 있음을 보고, 와서 살펴보니 왕기가 全州 東門 밖에 있더라고 꾸며대어 全州王氣說을 퍼뜨렸다.  

* . <뽕나무에 말(馬)갈기가 나면 그 집주인이 왕이 된다>는 동요가 있었는데 汝立이 義衍과 몰래 汝立의 집 정원에 있는 뽕나무 껍질을 벗기고 말갈기를 끼워 두었다가 뽕나무 껍질이 서로 붙게 되자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國初以來로 鷄龍山 開泰寺址가 李氏王朝의 뒤를 이을 鄭氏王朝의 도읍지라는 讒說이 있었는데 汝立이 鷄龍山 廢寺의 벽에 <戊己年間에 亨運이 열릴 것>이라는 詩를 써 붙였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위에서 열거한 혐의들은 모두가 汝立이 민간에 전해오던 讒說을  자기의 野心에 영합 날조하여 민심을 眩亂케 했다는 것이거나, 荒說을 조작했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汝立이 奸凶한 일면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에 학식이 뛰어나고 말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도 사실인데, 그러한 汝立이 精神錯亂症患者나 誇大妄想狂의 愚行으로 집권을 망상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며 , 만일 위 혐의들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도리어 汝立이 정권탈취와 같은 豪膽하고 雄大한 일을 감행할 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반증이 된다. 

 


   3 . 22 武力養成

汝立이 壬辰年에 變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이 때를 틈타서 일어나고자 武士와 公私賤隸들을 모아 大同契라는 불법단체를 만들어, 매월 15일에 활쏘기를 익혔으며, 丁亥倭變 때에는 全州府尹 南彦經의 요청을 받고 一號令間에 부대를 편성하여 倭軍을 물리쳤으며 부대를 해산할 때 자기의 親密武士인 將領들에게 후일 만일 변고가 있으면 즉시 소속부대를 이끌고 오라고 명령하고 軍簿를 한 벌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大同契의 조직이 모반을 위한 무력을 양성한 것이라는 혐의는 지나친 비약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一號令間에 倭寇를  격퇴할 만한 부대를 동원할 수 있을 만큼 명령체계가 치밀하게 조직화된  세력의 기반을 가진 汝立이 왜 한번의 항거도 없이 죽었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해답이다. 거사할  기회가 없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宣祖修正實錄을 보면 己丑年 8월 말경 李潑의 동생 李洁이 서울로 가는 도중에 金溝에서 汝立을 만나 여러 날 놀다가 작별할 때 汝立이 佶에게 모종의 암시를 했다. 李洁이 놀라서 이러나 상경을 재촉하여 恩津縣舍에 들려 현감에게 부탁하여 민병의 호위를 받으며 상경하는데 汝立이 武士 수인을 보내어 佶의 뒤를 쫓았으나 佶이 민병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므로 감히 범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놀라서 달아나는 佶의 행동에서 汝立은 불안을 느꼈을 것이고, 佶을 뒤  쫓게 했던 자기의 수하 무사들로부터 佶이 무장한 민병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적어도 위기를 의식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告變까지에는 상당한 기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모반을 위해 세력의 기반을 형성해 두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왜 이 때에 거사를 서두르지 않았느냐는 것이며, 告變이 있은 뒤에도 邊崇福이 告變 사실을 汝立에게 알린 뒤로부터 도사 柳湛이 汝立의 집을 엄습하기까지에는 1일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왜 성패간에 거서가 없었느냐는 것이다. 세력의 기반이 구축되어 있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거사하지 않았다면 모반계획이 없었던 것이며, 모반계획이 수립되어 있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거사하지 않았다면 거사할 만한 세력의 기반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鄭汝立의 모반사실은 부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汝立은 도주해야 할 필요도 자결해야 할 이유도 없게 되어 汝立의 죽음은 自決이 아니고 他殺일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면 大同契란 어떤 것인가? 大同契는 모반을 위한 무력 집단이 아니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실의에 차 있는 汝立이 不滿을 달래며 시골의 불평무사나 선배들과 어울려서 활쏘기를 겨루며 술을 마시고 놀던 鄕村의 친목계에 불과한  것이었을 것이다.

3.23 擧兵說의 傳播와 兵器準備  

汝立이 池涵斗를 시켜 吉三峰과 三山 兄弟가  神兵을 거느리고 때로는 智異山에 들어갔다고 하고, 때로는 鷄龍山에 들어갔다고 했으며 鄭八龍(汝立의 幻號)이란 神勇人이 鷄龍山에 都邑하기 위해 곧 擧兵할 것이라는 말을 해서지방에 퍼뜨렸고, 汝立의 도당들이 변란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兵器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汝立이 擧兵說을 의도적으로 전파했다는 말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역모를 양성적으로 한다는 것은 상식이하의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기록은 <역모가 사전에 발각될까봐 변란을 일으킬 결심을 했다>는 宣祖修正實錄의 기록(다음에 소개됨)과도 상호 모순이 된다.

그리고 변란대비를 빙자하고 병기를 준비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一國의 관헌들이 모두 허수아비라면 모르거니와 정부가 태연한데 백성들이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관헌들의 눈을 糊塗하고 병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 3 擧兵計劃

道潛과 雪淸이 汝立의 謀叛狀을 알고 도주하자 거사가 사전에 발각될까봐 두려워하여 변란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비밀리에 副署를 정하고 己丑年末을 기하여 湖南과 海西가 동시에 擧兵하여 서울로 쳐들어가 武器庫를 불사르고 江倉을 빼앗고 심복을 서울 都城   안에 보내어 기회를 보아 內應토록 작전계획을 수립해 놓고, 사전에 刺客을 보내어 대장 申砬(1546-1592)과 兵曹判書를 죽이고 王命을 거짓 꾸며 兵使, 水使, 方伯을 죽이고 臺官에 부탁해서 全羅監司와 全州府尹을 論劾하여 罷職 시킨 뒤에 틈을 타서 擧兵키로 했다

위의 거병계획이 事實이라면 역모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擧兵計劃이 누구에 의해서 밝혀졌느냐 하는 것이 하나의 문제다, 汝立은 말없이 죽었고 역도들이 謀主라고 지적했던 崔永慶도 역모사실을 일체 부인  했으며  海西의 愚氓들 외에는 謀叛事實을 자백한 사람들이 없었으니 해서우민들 중 누군가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己丑獄案을 보면 韓準의 告變狀啓에 역적이 장차 錦江을 건너 漢江에 이르러 烽燧와 驛人을 단절한 뒤 대궐을 칠 계획을 하고 있다고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문헌상으로 볼 때 이 告變書가 趙球와 李綏의 자백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위 擧兵計劃도 이 두 사람의 진술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趙球나 李綏가 擧兵計劃을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들은 최소한 丁亥倭變 때 倭寇를 물리친 將領들이 아니었는데, 당시의 將領이었던 汝立의 親密武士들도 모르는 작전계획을 이들 졸병이 알 까닭이 없으며 도 거사 직전이라면 작전계획을 隷下 장병들에게 주지시켰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가능하겠지만 거사 2개월여 전에 그런 無謀한 행동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擧兵計劃은 告變者나 배후 조종자에 의해서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조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게  된다.


4. 獄事의 蔓延

鄭汝立의 자살과 역도들의 自服으로 역모가 사실화한 이상 조정이 조용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열세에 놓여 있던 西人들은 축배를 들게 되었고, 집권당이었던 東人들은 일대 곤욕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西人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앞을 다투어 汝立과 아는 사이거나 親戚이거나 東人이면  마구 죄를 얽어 誣告했음으로 옥사는 그칠 줄을 모르고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4.1. 李潑(1544-1589)의 獄事

東人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맨먼저 동인공격의 砲門을 연 사람은 湖南出身의 生員 梁千會였다. 그는 宣祖 22년(1589)11월3일에 上疏를 올려 李潑 李洁 金宇顒(1540-1603) 白惟讓 鄭彦信 등이 汝立과 密交를 했다고 논척했다. 뒤를 이어 11월 4일에는 禮曹正郞 白惟咸이 疏를 올려 같은 내용으로 論罪했으며 11월 12일에는 汝立의 조카 鄭緝이 鄭彦信, 鄭彦智, 洪宗祿, 鄭昌衍 李潑 등이 逆謀에 關與하였다고 供招하여 이발은 宣政殿에서 宣祖의 親鞫을 받고 鍾城으로 귀양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樂安校生 宣弘福이 李潑의 모반 참여를 진술했고 鄭汝立의 집에서 潑의 편지가 많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편지에서 時事를 거리낌없이 通論했던 事實이 밝혀져서 귀양길에서 다시 불려 들어와 온몸에  살이 온전한 곳이 없을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발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자백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으며 오히려 龍洲撰相彦信碑에 보면 鄭緝이 처형될 때 크게 울부짖기를 <公卿과 士大夫를 많이 끌어들이면 살려주겠다고 말하더니 왜 나를 죽이느냐?>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宣祖實錄에 보면 宣弘福의 집에서 발견됐다던 李潑과 汝立 간에 내왕된 문서도 실은 鄭澈등이 꾸며낸 것이며 또 李潑 李洁 白惟讓등을 모반사건에 이끌어 넣은 것도 그렇게 하면 살려주겠다고 교사했던 때문이라고 宣弘福이 실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掛一錄에는 宣弘福이 處刑에 임하여 <내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나  (趙)永宣의 말을 믿고 無辜한 사람을 죄에 빠뜨렸으니 부끄럽고 한스러움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통탄했는데 이것은 鄭澈이 醫員 趙永宣을 시켜 비밀리에  弘福이를 교사한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西人인 尹宣擧(110-1669)도 魯西集이서 李潑이 逆獄에 중하게 걸려 있으나 뚜렸한 죄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부의 의논이 그를 가엾게 여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鄭澈(1536-1593)을 수령으로 한 西人들의 모함과 죄상의 날조로 무고한 李潑이 희생의 祭物이 되었던 것이다.

4 . 2 鄭彦信(1527-1591)의 獄事  

고변초 右相으로서 역도들을 治罪하는 委官이 되어 옥사를 담당하던 彦信이 역모 혐의를 받게 된 것은 역시 己丑년 11월 3일의 梁千會의 上疏에 의해서였다. 梁千會가 彦信에 대한 論斥의 신호를 올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이어 동 7일에는 兩司가 彦信이 역적 鄭汝立과 친절하다는 이유로 右相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論劾했고 다음 날에는 그들의 요구대로 彦信이 파직되고 말았다. 뒤를 이은 鄭緝의 供招에 의하여 宣政殿에서 이발과 함께 선조의 친국을 받고 中途付處되었으나 이때 彦信의 아들 慄이 자기 아버지와 汝立이 親厚하지 않음을 변명하는 彦信의 自明疏를 대신 써서 올렸는데 뒤에 여립의 집에서 언신의 편지가 나오게 되자 彦信이 人君을 欺罔했다는 이유로 다시 義禁府에 넘겨지게 되었다.

12월 4일에는 다시 사헌부에서 들고일어나 彦信이 告變 초에 역적을  斗護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위관이 되어서는 告變者를 推鞫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옥사를 지연시켰다고 밝히면서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 이리하여 언신은 남해로 유배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한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庚寅년 5월 16일에는 湖南人 梁詗(형), 梁千頃 등이 鄭彦信이 委官으로 있을 때 고변자 십여인을 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소를 올려 언신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에 선조는 대로하여 이 발언이 사실인가를 鞫廳에 참여했던 朝臣들한테 확인했다. 이때 兪泓 洪聖民 등은 彦信이 韓準의 고변서가 載寧郡守 朴忠侃을 告變者로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런 중대사는 마땅히 누가 누구의 진술에 의하여 고변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내용을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朴忠侃의 말이라고만 되어 있으니 이런 無根한 말을 만일 다스리지 않으면 장차 어지러움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같은 무근한 말을 하는 사람 十餘人만 참하면 허튼 소문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증언했으며 己丑錄에도 대체로 같은 기사가 보이며 宣祖實錄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언신의 위 발언은 아마도 사실이었던 것 같다.

위 발언이 문제가 되어 庚寅 7월 5일에는 彦信이 南海로부터 다시 잡혀왔는데 이번에는 언신을 어떻게 처벌하느냐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政院의 대신을 推鞫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 朝臣들의 지배적인 여론이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선조의 단안을 요청하게 되자 7월 18일에  賜死의 命이 내렸으나 대신들의 상소로 감형되어 7월 21일에 甲山으로 流配되었다가 선조 24년(신묘)10월에 謫所에서 죽었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彦信의 경우도 鄭緝의 진술이 날조라는 것이 판명된 이상 모반에 가담했다는 흔적은 전혀 없으며 彦信의 자명소가 문제되었었지만 역시 彦信에게는 역모에 가담해야 할 하등의 객관적인 이유가 없었다. 당시 우상이었던 그에게 바램이었다면 좌상이나 영상의 자리였겠는데 그 한두 계급의 승진을 위해서 실패할 경우의 滅門의 患을 감수할 만큼 그렇게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彦信이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告變者를  참해야 한다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을 한 경위를 보면 명확한 제시가 없는  無根之說로 잘못하면 국가를 소란케 할 것이라는 염려에서  취해진 하나의 강경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발언은 汝立이 결코 역모할  리가 없다는 확신의 표현이요, 서인들이 捏造했을 가능성에 대한 시사며, 동시에 彦信자신이 동사건과 관계없음을  반증해 주는 웅변이었다. 彦信이 만일 汝立에 관한 모종의 혐의라도 알고 있었다면 汝立을 斗護하는 결과가 될 무모한 발언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4 . 3 崔永慶(1529-1590)의 獄事

永慶의 字는 孝元, 號는 守愚이며 曺植의 門人으로 벼슬이 持平에 이르렀으나 辭退하고 山林에 隱居하던 處士였다. 宣祖修正實錄을 보면 逆變이 일어났던 초기에 역도들이 모두 三峰으로 上將을 삼았다 함으로 三峰이 있는 곳을  探聞하여 혐의가 있을 만한 사람을 많이 잡아 들였으나 모두 변명을 하고 풀려났다. 이 때 역적의 도당인 李箕, 李光秀 등이 말하기를 三峰은 나이 60쯤에 몸이 비대하다 했고 어떤 이는 三峰은 나이 30쯤에 귀가  크고 얼굴이 수척하다고 했으며, 어떤 자는 삼봉은 나이 50쯤에 수염이 길고 키가 크다고 했다. ‘

賊黨 金世謙은 三峰의 姓이 吉가이고 晋州에 산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三峰은 羅州士族이라 했으며 朴文長은 三峰의 성이 최가이며 진주 私奴라고 하여 드디어는 三峰이 崔永慶이라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梁千頃이 만들어낸 말로 永慶을 해치려는 계책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李恒福(1556-1618)역시 白沙集에서 逆徒들이 供述한 말이 서로 다른데, 공술 가운데 永慶과 유사한 몇 말만 모아서, 한 역도의 공술에 따라 모두 三峰이 바로 崔永慶이라 하니 이것은 막연히 외부에 떠도는 말이 아니고 틀림없이 鞫獄이 진행되어 가는 내용을 소상하게 아는 자가 永慶을 三峰으로 만들려고 뜬소문을 퍼뜨려 사람의 귀에 익게한 것이라고 하여 三峰則 永慶說이 捏造임을 指摘하고 있다.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서 날조된 三峰則永慶說은 汝立의 妻族으로 평소에 汝立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金溝 儒生 金克寬에 의해서 諸元察訪 趙騏에게 傳해졌고 趙騏는 다시 監司 洪汝諄에게 알렸다. 이에 汝諄이 한편으로 狀啓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慶尙右兵使 梁士瑩에게 편지해서 永慶을 잡아 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永慶을 推鞫해도 모반의 흔적이 나타나지를 않았고 또 永慶이 三峰이라는 설도 無根한 말이었음이 判明되어 結局 釋放이 허용되었다. 이때 諫院에서 永慶이 汝立과 상종했다고 주장하면서 永慶을 다시 推鞫할 것을 청하자 선조가 그 말을 누구한테서 들었느냐고 물으니 正言 具宬이 대답하기를 慶尙道事 許昕이 監司  金晬한테서 들은 말이라 했으므로 永慶이 재차 투옥되었다. 再鞫에서도 永慶은 汝立과의 相從說을 부인하므로 許昕을 잡아다 물으니 許昕은 金晬에세서 들었다 했고, 晬는 姜景禧에게서 들었다 했으며 景禧는 晋州判官 洪廷瑞에게서 들었다했고 洪廷瑞는  晋州品官 鄭弘祚에게서 들었다 하여 弘祚를 잡아다 問招했지만 끝내 不服했고 이렇게 獄事가 지연되는 동안에  永慶은 獄에서 病으로 죽고 말았다.

永慶의 죽음에 대하여는 病死냐 自殺이냐 아니면 他殺이냐 등등의 많은 의문이 있다. 金尙憲의 石室語錄에는 鄭弘祚가 잡혀오게 되자 永慶이 汝立과의 相從했던 사실이 탄로될까봐 겁이 나서 죽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의심했다고 기록되어있다.(연여실 기술 3)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鄭弘祚가 相從說의 발설을  부인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대하여 “桐巢漫錄”에는 무근한 말을 만들어낸 洪廷瑞가 鞫廳에 잡혀가게 되자 겁이 나서 監官 鄭弘祚에게 <너한테 들은 말이니 숨기지 말라, 다른 말 말고 나 하라는 대로해서 患亂도 富貴도 함께 누리자>고 말하여 그렇게 못하겠다는 홍조를 半懷柔 半脅迫으로 發說者를 만들어 놓고, 鞫廳에 나아가 弘祚한테서 들었다고 供述하여  弘祚가 鞫廳에 끌려갔으나 6차나 刑을 받으면서도 끝내 발설을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廷瑞가 무근한 말을 만들어 놓고 지적할 사람이 없으므로 자기를 증거로 삼으려 하나 비록 무상한  사람이지만 어떻게 永慶 같은 어진 분을 모함에 빠뜨릴 수가 있느냐고 실토했다. 이에 反坐律로 처벌될 것을 두려워한 廷瑞가 獄卒을 매수하여 병으로 하루에 한두 잔의 술밖에는 식음을 거의 전폐하고 있는 永慶을 독주로써 殺害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宣祖도 <내가 이 무렵의 일을 알 수 없고 또한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永慶이 毒物로 살해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永慶이 독살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혐의도 없는 處士를 죽게 한 것만은 부정 못할 사실이며 또 하나 분명한 것은 永慶이 三峰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三峰을 謀主로  계획되었다던 汝立의 모반사건도 근본적으로 회의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4 . 4 . 그  밖의 獄事 

  위의 논술한 세 경우 외에도 白惟讓 鄭介淸 曺大中의 죽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公論의 대표적인 경우이며 東人이라는 이유로, 汝立의 친족이라는 명목으로, 汝立과 아는 사이라는 죄목으로 己丑年에서 辛卯年에 이르는 3년 동안에 죽고 귀양가고 투옥된 자가 무려 천여명에 달했다 하니 그 참상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5.  鄭汝立 모반사건의 진상

위에서 고찰한 모반사건의 전모와는 전연 다른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사료들을 검토하고 지금까지에 밝혀진 분명한 사실과 문제점을 綜合分析하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보려 한다.

5 . 1  異說의 檢討    

宋翼弼이 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날조했다고 주장하는 기록으로서 翼弼이 사건을 날조하게 된 동기와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安塘(1460-1521)의 아버지 司藝 安敦厚가 늙어서 喪妻하고 그의 형 寬厚의 婢인 重今으로 하여금 가사를 돌보게 했는데 重今에게는 甘丁이란 딸이 있었다. 甘丁은 白川의 甲士 宋者斤金(송자근쇠)의 아들 宋璘에게 出嫁하여 祀連을 낳았다. 安敦厚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塘과 璁 兄弟와 金相 應箕의 부인을 모두 重今이 길렀으므로  安氏家에서는 重今을 마치 庶母처럼 생각했으며 중금의 外孫인 祀連에 대해서도 安氏家의 친 식구처럼 대접했고 집안의 모든 일을 祀連에게 맡겼다.

그런데 辛巳년(1521) 겨울에 祀連이 그의 妻甥 鄭瑚와 謀議하여 安塘 부인 殯葬時의 弔客錄과 役人名簿를 훔쳐내어 이것을 증거로 安塘의 아들 處謙(?-1521)이 無賴들과 大臣 죽일 謀議를 했다고 上變하여 獄事(辛巳誣獄)가 이우러져서 安塘의 집안이 滅族되고 그의 家産과 田民은 모두 祀連이 소유하게 되었다.(桐巢漫錄)   그리고 上變한 공로로  祀連은 堂上官이 되어 中宗에서 宣祖에 이르는 四朝를 대대로 섬겼으며 벼슬이 侍衛扈從大將에 이르렀는데  祀連이 바로 翼弼의 아버지다.  宋翼弼(1534-1599)은 賤人 出身으로 學問과 文章이 뛰어나서 李珥(1536-1593), 鄭澈(1536-1593), 成渾(1535-1598)등과 親分이 두터웠으므로 權力이 대단했다..

安氏家가 滅族될 때 處謙의 아우 處謹에게 賤妾이 있었는데 姙娠한 몸으로 避亂하여 아들 玧(一名 廷蘭)을 낳았다. 玧이 장성하여 明宗朝에 상소하여 安塘이 復官되었고 宣祖 때 塘에게 貞愍이란 諡號가 내려졌다. 宋祀連의 上變이 誣告였음이 밝혀진 뒤 玧은 宋家가 원래 安氏家의 婢의 一族으로 아직도 贖身 從良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安氏家에 부속되어야 한다고 掌隷院에 訴訟을 제기하여 권력이 대단한 송가를 判決事 丁胤禧의 機智로 패소케 했다. 패소로 인해서 안씨가의 노복으로 전락하게 된 翼弼 翰弼兄弟는 멀리 도망하여 성명을 바꾸고 海西에 숨어살면서 東人에 대한 復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桐巢漫錄]

기회를 노리고 있던 翼弼이 때마침 汝立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大同契를 만들어 鄕射禮를 빙자하고 無賴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연백지방을 드나들면서 시골 사람들에게 讖文을 보이며 李氏王朝가 망하고 鄭氏王朝가 설 때가 바로 이 때라고 속이고, 또 湖南에 王氣가 왕성하니 너희는 빨리 가서 鄭姓 가진 사람을 찾아 이 讖文을 보이고 함께 거사하면 부귀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궁벽한 시골의 무식한 무리들이 호남에 달려가니 鄭汝立의 명성이 자자하고 道內의 많은 인사들이 汝立의 집에 드나든다는 말을 듣고 이들도 汝立과 인연을 맺고 자주 드나들더니 술자리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점차로 퍼져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桐巢漫錄]

宋翼弼의 도피 경위에 대하여 ‘黨議通略’에는 봇둑 싸움으로 刑官에게 쫓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宣祖實錄”과 “掛一錄”을 보면 安氏家와의 爭訟에서 패한 것이 도피의 원인이었던 것 같으며  東人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汝立의 모반사건을 翼弼이 捏造했다는 위 주장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汝立이 일시적인 실의로 역모를 했을 가능성보다는 翼弼이 直接的으로 죄에서 탈피하고 東人에 대한 설욕을 위해서 사건을 날조했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며, 翼弼이 날조한 사건으로 보는 경우에  海西告變이나 海西逆徒들만의 逆謀自白도 쉽게 理解되기 때문이다.

5 . 2  眞相의 推定

이상의 검토에서 발견된 허다한 의혹과 모반사실을 단정함에 있어서의 모순과 모반혐의의 날조의 가능성과 분석과정에서의 분명해진 사실들을 종합하여 모반사건의 진상을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본다.

죄를 지어 숨어살아야 하는 宋翼弼이  免罪할 길을 백방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표적이 떠올랐다. 그가 바로 鄭汝立이었다. 汝立은  博學多才하여 李珥와 친교가 두터웠으므로 일찍이 李珥의 천거를 받아 벼슬이 弘文館修撰에까지 이르렀으나 栗谷이 죽은 뒤에 공공연하게 그를 詆斥함으로 인해서 徐益과 李景震등의 論斥을 받는 등 西人들의 집중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宣祖도 汝立을 邢恕같이 번복무쌍한 사람이라고 미워했으므로 汝立은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있었다.

낙향해 있는 동안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존경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汝立은 실의와 불만을 달래며 모여든 무사 선비들과 大同契를 만들어 매월 15일미면 활도 쏘고 술도 마시며 놀았다. 이 소식을 들은 趙憲(1544-1592)은 汝立이 꼭 역적을 圖謀할 것이라고 酷評을 했다. 이와 같은 汝立에 대한 西人들의 증오와 宣祖의 철저한 불신과 趙憲의 毒舌이 翼弼로 하여금 안심하고 汝立을 모함의 대상으로 택하게 한 동기였다.

그리하여 翼弼은 汝立을 역적으로 몰 심산으로 三峰과 汝立을 결부시켜 浪說을 퍼뜨리고, 구월산 중 義岩을 시켜 민간에 讖說을 유포시켰으며 해서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사주하여 汝立과 통하게 하여 汝立의 동정과 결부시켜 허다한 혐의를 만들어 놓은 다음 擧兵計劃까지 事前에 造作해 놓고서 義岩으로 하여금  載寧郡守 朴忠侃에게 밀고케 했던 것이며  한편 李綏, 趙球 등을 시켜 自服케 했다. 이렇게 날조된 사건이었으므로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鎭安 竹島에서 놀고 있던 汝立을 成渾의 門人인 閔仁伯을 시켜 때려죽이고는 自殺이라고 퍼뜨렸고  玉男이와 逆徒로 지목된 海西의 愚氓들을 위협과 誑誘와 酷刑으로 自服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           렇게 해서 鄭汝立의 謀叛事件은 부인 못할 엄연한 事實로 되어 버렸고 東人들은 受難을 당해야만 했으며 반면에 李綏. 趙球, 南截, 閔仁伯 등은 平難二等功臣의 勳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謀主라고 지적해 놓은 三峰이란 가공의 인물이 문제였다. 사건의 드라마는 翼弼이 만들었고 연출하는 현장에서 골치를 앓게 된 것은 정철이었다. 三峰을 입증하는 과정에서의 무리가 結局 三峰의 존재를 부정케 했고, 三峰의 부정이 모반사건의 날조의 가능성을 시사하게 되었다.


6 . 結語

이상의 서술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鄭汝立의 모반사건은 누구에 의해서건 날조된 사건이었다. 李珥가 죽은 뒤 宣祖의 李珥에 대한 禮遇가 엷어지면서 東人들은 매일같이 西人들을 彈劾함으로서 甲申年(1584)이래 西人들은 완전히 敗勢에 몰리게 되었고 朝廷은 東人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 때 이래 5-6년을 不運하게 지내던 西人들이 劣勢를 挽回하기 위하여 조작한 사건이 鄭汝立의 謀叛事件이었다.

서인들은 이러한 날조된 사건을 바탕으로 己丑鞫獄이라는 당쟁 초유의 참담한 옥사를 일으켰고, 東人들은 이 옥사에 연루되어 허다하게 투옥되고 처형되어 갔다. 그러나 옥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東人 名士들의 組織이 모두 鄭澈을 求心點으로 한 西人들의 모함과 무고였음이 폭로되었고, 다음 단계에는 西人의 領袖였던 鄭澈이 東人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실각했으며 鄭澈의 실각으로 옥사는 반전되어 이번에는 東人들이 걸었던 流配의 길을 西人들이 걸어야 했다. 이처럼 謀叛事件과 己丑鞫獄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당초부터 계획된 黨爭의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모든 史記들이 己丑鞫獄이 黨爭의 産物임은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鄭汝立의 謀叛事件만은 黨爭과 無關한 엄연한 하나의 旣存事實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汝立의 모반사건도 당쟁과 유리된 旣存事實이 아니고, 東人打倒를 목적으로 날조된 하나의 黨爭의 산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호남 산천 배역론과 정여립의 모반-상

 

호남에 대한 편견의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를 꼽는다. 이것은 태조 26년(943년) 중신인 박술희에게 내려 준 비밀 유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니시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후세 사람들의 조작이라 주장한 바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태조 자신이 직접 말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여기서 그 시비를 가릴 처지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설혹 태조가 직접 말한 것이 아니고 후세인들의 조작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전문이 실려 있는 글이라면 고려시대에 그와 같은 얘기들이 공공연히 나돌아다녔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고 따라서 당시 사람들의 호남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실마리는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훈요십조에서 호남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제8훈으로, 그 내용은 차령과 금강 이남은 지리적 형세가 배역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의 인성 또한 그러할 것인 즉 그들을 조정에 참여케 하거나 왕실과 혼인을 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역의 조짐이 보인다는 뜻일 게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령과 금강 이남이 과연 호남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냐는 데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제2훈에서는 도선 국사의 뜻을 받들라는 대목이 있는데 도선은 그 고향이 전남 영암이며 태조 또한 그의 제자에 제자 뻘 되는 경보나 윤다 같은 승려와 최지몽 같은 전남 사람을 중용하고 있는 외에 장화왕후 나주 오씨를 목포에서 맞이한 사실 등을 들어 호남 전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의 본질에 근접한 비판은 아니다. 이것은 결국 호남에서 나주, 목포, 영암 등 서남지방 일부를 제외하자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은 후백제의 견휜에 비하여 약세에 처해 있던 태조가 전략적으로 그 지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 것일 뿐 그의 본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왕건은 지방 호족과의 유대를 위하여 무려 스물아홉명의 후비를 두었던 사람이란 사실을 상기해볼 일이다.

 

뿐만이 아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우리나라 3대 배역의 강으로 영산강, 섬진강과 함께 낙동강을 꼽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왕건은 그의 출신 기반인 중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령과 금강 이남의 산천을 배역의 형세라고 적시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지방이 당시로서는 최대의 산업인 농업 생산력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곡창지대란 점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호남의 물길이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의 지적대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형세(산발사하·散髮四下)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을 물길이 배역의 형세를 취한 것이라고 풀이한 것인데, 금강은 북쪽으로, 동진강·만경강은 서쪽으로, 영산강은 남서쪽으로, 탐진강·섬진강은 남쪽으로, 심지어 낙동강의 한 지류인 남강의 발원지가 전북 남원의 운봉인데 여기서 남강은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반면 낙동강은 모든 물길이 하나가 되어 다대포 앞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호남은 인심이 흩어지고 영남은 인심이 뭉쳐 충신이 배출된다는 논리다.

 

고려 때만 하더라도 낙동강은 3대 배역수의 하나였는데 조선 영조 때에 이르러 충신 배출의 물길로 승화된 것은 그 사이에 곡절이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 점은 다른 기회에 생각해보기로 하자. 다만 물길이 흩어지는 것과 모여드는 것이 풍토와 인성 형성에 과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이미 프랑스와 독일의 물길을 영호남의 물길과 비교하며 프랑스적 호남, 독일적 영남이란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이 때 프랑스가 더 좋으냐 독일이 더 좋으냐를 묻는 것은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영호남의 물길에 관한 풍수적 차이는 당연히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역시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역 차별과 지역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지역에 풍토적이거나 인성적인 차이는 반드시 있다. 다만 그것을 차별의 구실로 삼는데 문제가 있을 뿐이다. 본래 호남 푸대접으로 시작된 지역 차별론은 이제 김대중 정권의 등장으로 역차별 얘기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정말 지루하고도 짜증나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어느 편을 들 생각은 없다. 호남이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는 의식했든 아니든 간에 호남 쪽에 기울며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호남인들에게 배역의 참 뜻을 새기고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를 권하고 싶다. 그 단초를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시작해 보자.

 

선조 때 무려 천여명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그 출생에 관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도 불분명하고 출생지도 막연히 전주 동문 밖 또는 남문 밖이라는 설만 나돌 뿐이다. 그런데 모악산의 지맥인 제비봉 아래 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이 그가 태어난 곳이란 얘기를 그곳 사람들은 상당히 믿고 있는 눈치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지금까지도 전라도에 대한 편견의 한 이유처럼 거론되는 것이어서 흥미를 끈다. 일찍이 이병도 박사도 정여립이 죽은 뒤 전라도를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호남인의 등용을 일시 제약, 차별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거니와, 전주시사(1986년 간행)는 이 사건이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기록할 정도이다. 이런 사건의 출발이 모악산 언저리에서 시발되었다는 것은 땅의 이치(地理)로 보아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남한 2대 신흥종교 발상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 증산교의 창시자가 이곳에서 도를 얻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증산은 옛 구도자들이 자기를 계발하기 위하여 산으로 광야로 퇴수(退修)하였다가 힘과 영광에 가득 찬 초인으로 변모하여 동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속세로 복귀하였다는 인퇴(引退)와 복귀의 율동처럼, 드디어 서른 한살 되는 여름 큰 비가 쏟아지고 다섯마리 용이 심한 폭풍우를 불어내는 조화 바람 속에서 천지의 큰 도를 깨닫고 거칠 것이 없는 큰 차원으로 접어들어 겁액의 환난에서 몸부림치는 창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모악산을 하산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의 출생지란 설이 있는 동곡마을은 증산이 깊은 인연을 맺었던 오리알터와는 지척지간이다. 정여립처럼 산 기운이 사람을 낸 것인지, 강증산처럼 사람이 그런 산 기운에 이끌려 들어간 것인지는 분간키 어렵다. 하지만 정여립이 간단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그를 낳을 때 아버지의 꿈에 고려 무신정권의 문을 연 정중부가 나타나 “잠시 너희집에 머물다 가겠다”고 한 대목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는 처음 율곡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훗날 스승을 공격함으로써 인품을 의심케 한 전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당쟁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