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
[역사적 배경]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 법을 어김)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 서얼 출신 7인이 은상인을 살해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옥사)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다. 선왕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유훈을 받들은 일곱 신하) 중 재직자인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서성(徐渻)·한준겸(韓浚謙)을 내쫓았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하였다. 또,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아버지로 뒤에 원종으로 추존)의 아들 능창군 전(綾昌君佺: 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금고하였다가 살해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에 이르러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및 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반대하자, 오히려 이들을 멀리 귀양보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발론(發論)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尊號)를 폐하여 다만 서궁(西宮)이라 칭하고, 공봉(供奉: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바침)을 감하고 조알(朝謁: 왕을 조정에서 찾아뵘.)을 중지시켰다.
그런 뒤에도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白大珩)을 시켜 이위경(李偉卿)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慶運宮)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등이 급히 이르러 추방해 실패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죽이고 동생을 살해함.) 등의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중요한 구실을 주었다.
[내용]
서인의 이귀·김자점(金自點)·김류(金瑬)·이괄(李适) 등은 마침내 이를 이유로 무력정변을 기도하게 되었다. 일찍이 함흥판관으로 있었던 이귀는 북우후(北虞候) 신경진(申景禛)과 맺고, 또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과 통하여 인망이 높던 전 부사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대북 정권을 타도하고 능양군 종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 신경진은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있었다. 마침 평산 지방에는 호환(虎患)이 심해, 이귀는 범사냥하는 군사에게는 경계의 제한을 두지 않기를 청해 그것을 기회로 거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가 누설되어 실패하였고, 다음해에는 그의 모계(謀計)가 도하에 떠들썩하여 이귀 등은 서둘러 계획을 실천하게 되었다.
마침내 1623년 3월 13일 밤에 이귀·심기원·최명길(崔鳴吉)·김자점 등은 병력 600∼700명으로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은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고양 연서역(延曙驛)에 나아가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병력 700여명과 합류하였다. 먼저 창의문(彰義門)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궁중에서의 연회(宴會)가 한창이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피신하였다. 그러나 반군의 횃불이 창덕궁의 제전(諸殿)에 인화되어 모두 불탔다. 능양군은 보새(寶璽)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바치니, 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이가 곧 인조이며 이 정변이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었다. 대비 김씨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처형하려 하였으나, 새 왕의 간청으로 서인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로 귀양보내고,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이위경 등 몇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명을 귀양보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김류 등 33명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논공이 공평하지 못해 서인간에 다소의 반목이 있었으며, 1년 뒤 이괄의 난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남인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들어와 상위(相位)에 오름으로써 남인이 제2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괄의난 (李适의 亂)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내용]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북방 정세와 부원수 임명 경위 등으로 보아 미흡한 점이 많다. 당시는 후금의 강성으로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매우 긴박한 정세였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장만(張晩)의 도원수직 못지 않게 부원수직은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임무로서 전략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인물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이괄의 택정은 그만큼 신중한 배려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괄 역시 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출진한 뒤에 군사조련, 성책(城柵) 보수, 진(鎭)의 경비 강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에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반역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그 피해자의 하나였다.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은 이괄과 아들 전(栴),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이 불측한 생각으로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져 조사 담당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층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진상을 국문하고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를 하였다.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는 묵살하였으나, 군중(軍中)에 머무르고 있던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냈다.
이에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조정의 사자(使者)들을 목베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사전 계획에 의한 반란이라기보다는 집권층의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이었다. 즉, 난의 원인은 이괄 자신 못지않게 집권층의 잘못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작전에 능한 인물로서 이 후부터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월 22일 이괄은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휘하의 전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하였다.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하고 샛길로 곧장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당시 장만은 이괄의 반란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휘하의 군사가 수천 명에 불과해 이괄의 정예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괄의 반란군은 개천·자산 등지를 거쳐 26일에는 강동의 신창(新倉)에 주둔하고, 28일에는 삼등(三登)을 지나 상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괄군이 관군과 처음 접전하게 된 곳은 황주 신교(薪橋)에서였다. 이괄은 이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인 박영서(朴永緖)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돈(遯)을 능지처참하였다. 이괄은 서울로의 진격을 쉬지 않았다. 그의 행군 속도는 무척 빨라 관군측에서는 소재조차 확인하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이괄은 평산에 관군의 방비가 엄한 것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시켜 마탄(馬灘 : 예성강 상류, 지금의 猪灘)에서 또 한차례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臨津)을 지키고 있던 관군을 기습공격해 붕괴시켰다.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공주로 피난하였다. 2월 11일 이괄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興安君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들로 하여금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행정 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이 무렵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 숙의 끝에 지형상 유리한 길마재[鞍峴]에 진을 쳤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이괄은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관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날 밤 이괄·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 지금의 光熙門)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관군의 추격으로 이괄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이괄과 한명련 등은 그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이괄 등의 수급(首級)이 공주의 행재(行在)에 이른 뒤 인조는 22일 환도하였다. 인조는 환도한 뒤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참고 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야집요(朝野輯要)』
• 『난중잡록(亂中雜錄)』
• 『묵재일기(默齋日記)』
• 「길마재에 꿈을 묻고-이괄(李适)-」(하현강, 『한국의 인간상』 2, 신구문화사, 1965)
떠드렁섬과 이괄의 부친 이육 이야기
양평읍 오빈리와 양근리 사이 강가에 조그마한 바위섬이 있는데 일명 떠드렁섬이라 한다. 용문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하나가 덕평리를 지나 오빈리와 양근리를 경계 지으며 강가로 뻗어나 왔는데 마치 물 위에 청둥오리 한 마리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 형국이다. 위쪽은 바위산이고 그 아래로 모래가 쌓여 크기는 작지만, 제법 섬의 모양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떠드렁섬 방향으로 돌아 국도가 나있어서 매일 보고 다녔는데, 몇 해 전 중간을 관통하여 길을 곧장 뚫으며 섬 같은 동산 하나를 더 만들어 놓았다. 바로 그 떠드렁섬이 인조반정의 주역 이괄의 부친(이육) 묘가 있었다는 곳이다.
평소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이육은 용문산의 정기가 힘차게 뻗어 강가에 뭉쳐 있는 떠드렁섬을 보고 아들들에게 죽으면 그곳에 묻어달라 유언했다 한다. 그리고 시신을 바위 밑에 강 아래를 향해 거꾸로(엎어져) 묻어 달라고 했다. 氣(기)가 모여 있는 곳에서 금개구리가 한양을 향해 내려가는 형국(金蛙臥形)이다. 그러나 평소 아버지 말씀에 늘 반대로만 하던 이괄이 정작 부친이 돌아가자 떠드렁섬에 묻기는 하되 마지막 효도를 한답시고 위를 향해 똑바로 묻어 장사지냈다. 그리고 몇 해 후, 이괄이 광해군을 물리치고 인조반정을 성공했으나 논공행상에서 밀려 다시 반정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했다. 그러나 정충신이 이끈 관군에게 패하고 수하장수들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하여 결국 삼일천하로 끝나고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평소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이란 글귀를 좋아했다 했는데 그렇게 된 셈이다. 역적으로 몰린 이괄은 삼족이 멸하게 되고 당연히 그의 부친묘는 파헤쳐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때 이괄 부친 묘를 파헤쳐 보니 똑바로 묻었던 시신이 개구리가 한양을 향해 가려고 몸부리치 듯 반쯤 돌아간 상태로 있었다 한다. 그 후 떠드렁산은 버려진 섬이 되고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갔다. 다행히 근래 양평군에서 떠드렁산 일대를 공원화 하기로 하고 인공폭포, 정자를 세우는 등 대대적인 공사를 마치고 ‘물안개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설화는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청개구리이야기’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말씀이라면 늘 거꾸로 행동할 정도로 말썽꾸러기 청개구리 소년에게 반대로 일러주면 똑바로 행동할 것 같은 생각에 어머니가 마지막 유언을 내렸다. “내가 죽으면 강가 모래에 묻어다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어머니 묘를 산에 쓸 줄 알았지만, 청개구리 아들은 마지막 효도를 한답시고 유언대로 강가에 묻었다. 그 후 비만 내리면 어머니 무덤이 쓸려갈까 봐 비만 내리면 ‘개골개골’ 운다고 전해져 온다.
이야기가 원형에서 약간 변형되기 했지만, 청개구리 설화는 분명 “양평 떠드렁섬 이괄의 부친 묘 설화”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 고증[考證]과 문헌[文獻] 그리고 설화를 바탕으로 ‘떠드렁 섬’을 잊는 구름다리를 만들고 묘각이나 이야기 내용을 조명하고 설치 뒤, 홍보해 효<孝>의 근본과 부모에 대한 참뜻을 헤아릴 줄 아는, 내용 있고 교육적 가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많은 사람이 공감 가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재 도시마다 내려져 오는 옛 이야기들로 그 도시의 문화산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양평군의 ‘점진적’ 노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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