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홍산대첩(최영)->진포대첩(라세)->황산대첩(이성계)->남해대첩(정지)

이름없는풀뿌리 2016. 2. 23. 11:37


 

홍산대첩(鴻山大捷) 1376년


1376년(우왕 2) 7월최영(崔塋)이 홍산(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싸움.

이 싸움은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

정지(鄭地)의 남해대첩과 함께 왜구토벌에서 가장 빛나는 전적 중 하나이다.

고려때 왜구 침범은 충정왕 때부터 시작되어 공민왕과 우왕 때 가장 창궐했는데,

특히 우왕 14년 동안 378회에 걸쳐 쳐들어와 최고를 기록하였다.

1376년 7월 왜구가 부여에 침입했다가 공주에 이르렀는데,

이 때 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해 공주가 함락되었다.

왜구는 다시 연산현(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개태사(開泰寺)로 쳐들어와

이를 맞아 싸우던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도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출정을 자청하였다.

이 때 우왕은 그가 나이 들어 말렸으나,

최영은 종사와 왕실을 위해 굳이 출정하기를 거듭 요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최영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홍산에 이르니

왜적이 먼저 험하고 좁은 곳에 웅거하고 있었다.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 길만이 통할 수 있었는데,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자 최영이 앞장서서 예기(銳氣)로 돌격해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때 침입한 왜구의 수가 얼마인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공주와 개태사가 약탈당한 것으로 봐서 대규모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왜구들은 늘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는 백발(白髮)의 최만호(崔萬戶)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최영을 두려워하였다.

이후 왜구의 기세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 전공을 세운 최영에게는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이 내려지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차등 있게 벼슬이 제수되었다.




진포대첩 (鎭浦大捷) 1380년 8월

고려 말기 진포(지금의 충남 서천군 남쪽에 있는 해구)에 대규모로 침입해온 왜구를 물리친 전투.

우왕 6년인 1380년 진포에서 고려 수군이 처음으로 화약 무기를 사용해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1350년부터 왜구는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고려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수도인 개성까지 침입하여 왕조의 근간을 흔들었다.
1380년(우왕 6) 8월 진포에 왜구들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 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 왔으며,

군사의 규모는 대체로 10,0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왜구의 대함대가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은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의 지휘 하에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하였다.
진포 대첩은 1350년 왜구들이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만에 고려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또 대왜구 투쟁에서 고려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이기도 하였다.
진포 대첩으로 인해 해안에 정박하여 있다가 화포로 모든 배를 잃은 왜구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당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육지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살인·약탈을 일삼았다.
왜적의 일부는 옥천과 영동 쪽으로 달아나 약탈 행위를 벌였는가 하면,

일부는 상주와 선산, 금산 쪽으로 달아났다.

특히 상주 쪽으로 달아난 왜군의 주력 부대는 다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산(星州)을 거쳐 함양의 동쪽에 있는 사구 내역에 주둔하였다.

정부는 원수 박수경, 배언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싸움에서 져 박수경배언을 비롯한 아군 5백 여 명이 전사하였다.

승전에 고무된 왜구들은 함양을 노략질하고 다음 달인 9월에는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운봉현으로 물러나 인월역에서 주둔하면서 "장차 말을 금성[潭陽]에서 먹여 북상하겠다"고 기세를 부렸다.

이에 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巡察使)로 임명하고,

왜구 토벌 명령을 내려, 남원 운봉에서 왜구들을 소탕하였다. 이것 황산 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왜구는 단지 70여 명 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으나 곧 토벌되었다.

진포에 침입할 때 왜구의 수가 10,000명이 넘었는데, 진포 대첩과 황산 대첩에 의해 전멸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황산 대첩의 승리로 고려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아 새 왕조를 개창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황산 대첩은 바로 진포 대첩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진포 대첩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진포 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였다.

지금까지 세계 최초로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격침시킨 해전으로는 1571년 레판토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

러나 진포 대첩은 레판토 해전보다 191년 이른 것이다.

둘째, 진포 대첩은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진포 대첩으로 왜구의 기세가 크게 꺾였던 것이다.

셋째, 진포 대첩은 조선 왕조 개창에 일조하였다.

진포 대첩으로 이성계의 황산 대첩이 가능하였다.

이성계는 황산 대첩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져 조선왕조 개창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진포 대첩은 조선 왕조 개창에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진포 대첩은 조선 수군 전술의 모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순신 장군 역시 진포 대첩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진포 대첩의 전술은 200년 이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선진적 전술이었고,

또 조선 수군의 전술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황산대첩(荒山大捷) 1380년 9월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黃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인 화포를 처음 사용해 묶어놓은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어

격렬했던 왜구의 만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목숨을 구한 360여 명의 적들은 옥주(沃州: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했는데,

선박이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영동·옥주 등지로 진출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京山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을 침략하고,

사근내역(沙斤乃驛: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에 집결, 반격하였다.

이때 왜구를 추격하던 9원수[배극렴(裵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勇奇)·오언(吳彦)·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

배언(裵彦)·도흥(都興)·하을지(河乙址)]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 5백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9월 왜구는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 인월리)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

성계를 도와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고려사』열전 변안열(邊安烈)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왜구 부대의 규모나 이성계의 군공이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고려의 왜구대책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어 파편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남해대첩(관음포전투, 觀音浦戰鬪 ) 1383년


1383년(우왕 9) 남해현(南海縣) 북방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한 것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로 몰려와 재산과 인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왜구는 배를 이용해 해안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수군으로 격파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관음포전투도 수군으로 왜구를 대파한 싸움이었다.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는 여러 차례 수군을 이용해 왜구를 무찌른 용장이었다.

그는 1383년(우왕 9)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의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향하였다.

이때 스스로 노를 저어 군사의 사기를 드높였다.

섬진강 어귀에 이르러 합포의 군사를 징집해 군열을 다시 정비했는데 이미 왜구는 관음포에 도달하였다.

그는 지리산 신사(神祠)에서 승전을 기원한 뒤 전투에 임하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순풍이 불어 그의 전선은 나는 듯이 헤쳐나가 순식간에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왜구는 대선(大船)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하여 전진해 왔다.

그는 먼저 선봉함선을 무찌르고, 화포를 이용해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니, 왜구는 전의를 잃고 퇴각하였다.

싸움에 이긴 뒤 정지는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했으나 오늘같이 쾌한 적은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통쾌하게 이긴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는 17척의 대선과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때 왜선에는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던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다.



정지(鄭地)

동의어 준제(准提), 경렬(景烈) 다른 표기 언어 Jeong Ji , 鄭地

1347(충목왕 3)∼1391(공양왕 3). 고려 후기의 무신.

정지(鄭地)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초명은 준제(准提)이다.

1374년(공민왕 23)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중낭장으로 전라도안무사로 발탁되었다.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1377년(우왕 3)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연파하고,

이듬해 다시 영광·광주·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순문사가 되었다.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島元帥)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가 되었다.

정지는 1383년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급보를 받고 경상도로 가서 합포의 군사를 모아 정비하였다.

이때 왜구는 이미 관음포에 도달하였고 그가 이끄는 군사와 박두양(朴頭洋)에서 대치하였다.

관음포전투에서 그는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고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와 이키〔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동참하였다.

이 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節制體察使)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 뒤 광주(光州)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별세하였다.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정지가 왜구를 물리칠때 직접 착용했던 갑옷이 후손에 의해 전해져

현재 보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지장군환삼(鄭地將軍環衫)이라 부른다.

여러 철판에 구멍을 뚫어 철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갑옷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현재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지발도(阿只抜都, 阿其拔都, あきばつ, ?~1380년)는

14세기 당시 고려에 침입한 왜구를 지휘했던 장수이다.

 "아지발도"란 고려측에서 부른 이름이고, 본명은 알 수 없다.  

한국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모두, 고려 말기 황산 지방에서 벌어졌던 고려군과 왜구와의 전투를 기록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고려 우왕 6년(1380년), 5백여 척의 군세를 가진 왜병 선단은 진포(鎭浦)[1]에 상륙하여

밀집대형을 갖추고 성벽처럼 방어태세를 취했는데,

이들이 타고 온 배는 진포에서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火砲) 공격에 격침되고,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는 해안 마을을 휩쓸며 약탈을 일삼는다.

8월에는 함양(咸陽) 동쪽의 사근역(沙斤驛)에서 고려군을 패배시키고(원수 박수경(朴修敬),

배언(裵彦) 및 고려군 5백 명 전사),

9월에는 남원(南原)을 공격하다 실패하여 퇴각, 운봉의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였다.

이때 왜구를 지휘하던 수장이 아지발도였다. 《고려사절요》는 아지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賊植立不動,有一賊將,年纔十五六,骨貌端麗,驍勇無比,乘白馬,舞槊馳突,所向,披靡莫敢當,我軍稱阿只拔都, 爭避之.】

적은 박혀 있는 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 겨우 15, 16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적장은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 부딪치고 가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서 감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은 아기발도(阿只拔都)라고 부르며 피하기 바빴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1, 경신(庚申)2, 신우(辛禑) 6년(1380년)

 

아지발도(阿只抜都)라는 이름은 고려군이 붙인 것으로 정식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지발도의 명칭을 한국어의 「아기」와

몽골어 「바토르(용맹한 자)」의 한자 음차표기인 「발도」가 합쳐진 것이라고[2] 보는 설이 유력하다.

운봉의 인월역에 진을 치고 남원을 포위한 아지발도는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의 물을 먹이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겠다"(《역대병요》)고까지 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고,

이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은 고려군의 장수는 이성계였는데,

록에 따르면 당시 전투 와중 이성계가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을 정도로

당시 왜구의 세는 격렬한 것이었다고 묘사하였다.

 

당시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하고 날쌘 모습을 가상히 여겨 생포할 것을 명했지만,

이지란이 "생포하자면 반드시 사람이 다칠 것이다.

그 사람은 면상에까지 갑옷을 둘러서 활을 쏠 만한 틈도 없다(其人至於面上,皆被堅甲,無隙可射)"며 반대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그의 투구의 꼭지를 쏘아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고 하고는

말을 달려나가며 쏘아 투구 꼭지를 맞혔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아지발도는 급히 바로 썼지만,

이성계가 다시 쏜 화살에 투구가 떨어지고, 뒤이어 이지란이 쏘아 죽였다.

 

아지발도를 잃은 왜구는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져 달아났고,

강물이 피로 물들어 6, 7일이나 붉은 빛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리품으로 얻은 것은 몇 천을 헤아리는 말이었으며,

고려군에게 대부분의 잔병이 죽임을 당하고 지리산(智異山)까지 달아난 왜구는 70명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중기 문인 장유의 문집인 《계곡집》에는

운봉현 동쪽 10리쯤 가면 황산(荒山)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위에 있는

사방 몇 장이 되고 보랏빛으로 피가 스민 듯한 빛이 도는 큰 바위가,

시 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고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는데,

지금의 남원시 인월면의 남천 강변에 남아있는 피바위가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아지발도」라는 왜구 수장의 이름을 두고

당시 규슈(九州)의 무사(武士)였던 아카보시 씨(赤星氏)나

아지히 씨(相知比氏)의 성을 가진 무장의 이름이 고려측에서 와전되어 기록된 것으로 보거나,

규슈(九州)의 수군(해적) 집단이었던 마쓰라토(松浦党) 소속일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나와 있다.

왜구의 종족이 일본인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중국인, 몽골인, 고려인, 류큐인 등)으로 이루어진 다종족 집단이었다는 견지에서

아지발도 또한 몽골 계통의 탐라(제주도)인이거나 고려인, 류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제기되기도 했다.






남원 황산대첩비지(南原 荒山大捷碑址), 사적 제104호

이 곳은 (남원시 운봉면)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군의 최고지휘관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李豆蘭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金貴榮의 글, 송인宋寅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荒山大捷之碑

資憲大夫 戶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 同知經筵 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臣 金貴榮奉 敎撰
奉憲大夫 礪城君 臣 宋寅奉 敎書
嘉善大夫戶曺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 臣 南應雲奉 敎篆

萬曆三年秋。全羅觀察使朴啓賢馳啓曰。

雲峯縣之東十六里有荒山。

寔我太祖康獻大王大捷倭寇之地也。

年代流易。地名訛舛。行路躊躇指點。

有不能辨認。誠恐千百世之後。

高者夷。下者湮。益將昧昧而莫知其所。

願樹一大石以識之。縣之耆倪。相與愬于官。

守土之臣。不敢抑以報。謹上聞。上可其啓。

命其道幹其事。仍命臣貴榮文之。臣承命衹慓。謹案。

麗季。國步臲卼。島夷乘之。屠城燒邑。殺人盈野。

所過波血。千里蕭然。殲咸陽。炎雲峯。屯引月。

聲言穀馬北上。中外大震。

太祖發南原。踰雲峯抵荒山。登鼎峯之上。相視形便。 指授犄角。盡銳奮擊。十倍之賊。不終日而蕩除。

爾來二百年間。海不揚波。嶺湖奠安。

莫非斯役之所賜。則南民之感戴追慕。

思欲封殖而瞻依者。烏得已也。洪惟我聖祖。

宏功峻烈。昭載國乘。照人耳目。軒天地耀古今。

當與玆山而終始不必區區劉石。爲之形容。

然後可以傳示無窮也。雖然。南方之山。巍然高大者。

無慮百數。而聖祖大勳之集。

適在於玆山。則可與天作高山。美儷竝稱。

而崧高維嶽。萬世仰止者矣。

於戲。岐陽蒐狩。簡車徒也。

而石鼓有勒。淮西削平。定藩鎭也。

而群臣請紀。聖武廓淸之功。巍巍蕩蕩。

萬民永賴。則鑱之貞珉。 

閣之龜龍。使居民行旅。瞻望拜稽。

有以寄沒世不忘之思焉。不亦韙哉。

臣貴榮。謹拜手稽首。獻頌曰。


麗運告窮。奸孼內訌。召彼外戎。島夷隳突。
三陲被毒。爲糜爲肉。萬姓暴骨。千里慘目。
執遏亂略。聖祖受鉞。師出爲律。震震爚爚。
神精上格。白虹貫日。勝兆已卜。天與之惎。
地效其利。荒山是界。爰赫一怒。爰奮厥武。
我旆我鼓。凶酋揚鷇。欲抗虓虎。自送其脰。
頂子應發。兜鍪忽側。已洞利鏃。蜂屯蟻雜。
褫氣號笑。萬牛殷谷。策馬先登。四面以崩。
莫我敢承。雷奔電激。竹破瓦裂。胔腦狼藉。
人神協討。會朝迅掃。三韓再造。革面悔罪。
厥篚繹海。垂二百載。南民耕鑿。煦愉事育。
莫非爾極。載慕載祝。銘在心腹。愈久如昨。
明曆五禩。伐石而紀。于山之趾。不鶱不剝。
永世無斁。有如斯石。

萬曆五年丁丑八月 日 朝奉大夫行雲峰縣監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兼春秋館記事官 臣 朴光玉 建
檀紀四二九十年丁酉十月 日 聖蹟奉贊會重建






荒山大捷之碑(황산대첩지비) 해석문

資憲大夫 (정2품)戶曹判書 兼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知 成均館 同知經筵 春秋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臣 金貴榮이 왕명을 받들어서 비문을 짓고
奉憲大夫(정2품) 礪城君 臣 宋寅은 왕명을 받들어서 글을 쓰고
嘉善大夫(종2품) 戶曹叅判 兼 五衛都摠府副摠管 臣 南應雲은 왕명을 받들어서 篆書를 쓰다.

萬曆 3(선조 8, 1577)년 가을에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치계馳啓하기를
운봉현 동쪽 십팔리되는 곳에 황산이라는 데가 있으니, 실상 우리 태조太祖께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승첩을 거두신 곳입니다. 연대가 흘러 바뀌고 땅 이름도 그릇 전해 오가는 사람이 머뭇거리며
지점地點하나 능히 분별해 내지 못하오니 정말로 천백세千百世 후에 내려가서 높은 데가 뭉개지고
낮은 곳이 더 메워지면 그곳은 더욱 모르게 될 것입니다. 원하옵건데 큰 비석 하나를 세워서
표지標識하기가 원이라 하여 고을 노소老小 백성들이 서로 더불어 관官에 소청하오니 그 지방을
지키는 신하로서 감히 억제抑制하지 못하고 삼가 보고하나이다 하였다.

임금(선조)께오서 그 계사啓辭를 옳게 여기시어 전라도에서 이 일을 맡도록 명하고,
이어 신臣 귀영貴榮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셨다. 신이 명을 받아 조심되고 두려워서 삼가 상고하옵건데
고려 말엽에 나라 운수(형세)가 위태로우니, 섬 오랑캐(倭寇)가 그 틈을 타서 성벽을 무찌르고
고을 관아를 불태웠다. 사람을 죽여 들에 가득해서 지나는 곳마다 피바다였다.
천리 사이가 텅 비어서 (밥짓는) 연기(연화煙火)가 싹 없었다. 운봉 인월引月에 둔취屯聚(屯兵)하여
북상한다고 성언聲言하니 중외中外가 크게 놀라와 했다.

그런 가운데 태조께서 남원南原을 출발하여 운봉을 넘어 황산에 도착하셨다. 정봉鼎峯위에 오르시와 형편을 본 다음 의각지세犄角之勢(양면작전의 형세)로 포진布陣하도록 지시하고 정예精銳를 다해 공격하여서 열갑절이나 많은 왜구를 그날 안으로 싹 없애버리시니,

그 후 이백년이 되도록 바다에 물결이 드세지 않고 영남과 호남이 편케 살고 있음은 이 전역戰役의
덕택이 아님이 없다. 그런즉 남쪽 백성이 강복하고 추모해서 봉식封植해 첨앙瞻仰코자 하는 생각이
어찌 없겠는가 우리 성조聖祖(여기서는 태조)의 크고 높은 공덕이 국사國史에 밝게 기재되어서
사람의 이목에 환하다. 하늘이 드높고 땅이 빛나서 예나 지금이나 이 산과 더불어 함께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돌을 깎아서 형용한 다음이라야 무궁하게 전해 보이게 된다는 것이랴.

비록 그러나 남방 산으로써 우뚝하게 높은 큰 것이 무려 수백이지마는 성조의 큰 공훈功勳 세움이
마침 이 산에 있었은즉 하늘이 만든 높은 산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함께 일컬어서 숭고崇高한 메(嶽)를
만만세토록 우러러봄과 같으리라.  아아! 중국 옛날 (주나라 선왕宣王이) 기양岐陽에 사냥하면서
거도車徒를 간략하게 했으나 그 사실을 석고石鼓에 새김이 있었고 당唐 헌종憲宗때 회서淮西를
삭평削平한 것이 번진藩鎭을 평정平定한 것이건만 뭇 신하가 기공紀功하기를 청했다.

그런데 우리 성조의 무위武威가 왜구를 말끔이 없앤 공이 높고 커서 만세萬世가 길이 힘입었을 즉
굳은 돌에 새기고 귀부용수龜趺龍首에다 각閣을 세워서 지방 백성과 행여行旅[나그네]들이 쳐다보며
절하여 이 세상 다하도록 잊지 못하는 생각을 붙임도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신 귀영이 삼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송頌을 바칩니다.

사백년四百年 고려조 운수 다하여 간얼奸孼이 어지럽혔다 저 외융外戎[밖에 도적]을 불러 들이니,
섬 오랑캐가 마구 날뛰어 깨고 부수고, 삼남변방이 화독火毒을 당해, 백성이 어육魚肉이 됐다.
들판에 만 백성의 뼈가 흩어져,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누가 있어 이 난리를 평정하리오.
성조께서 절월節鉞을 받게 되었다. 군사를 출동하고 규율로 하여, 위엄은 우뢰처럼 울리고 번쩍하였다.
신기가 위에로 하늘 닿아서, 하얀 무지개가 눈부시게 해를 꿰었다. 명을 받자 좋은 날을 택하니 하늘이
가르침을 주었다 땅도 이롭게 도와서 황산이 여기 낮으막 했다 이에 한번 벌컥 성을 내어서
지닌 무용武勇을 분발하였다 우리 깃발 펄럭이며 우리 북소리에 흉측한 오랑캐도 활을 들었다
으르렁대는 호랑이에게 대항코자 하다가 스스로 제 목을 갖다 바쳤다 왜장 아기발투의 정자(頂子)를
쏘아 맞추자 투구가 기울어졌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벌써 뚫으니 벌떼 같은 것이 개미처럼 혼잡하였다
왜구들이 호곡하여서 많은 소가 골짜기에 웅성거리듯 말을 채쳐 앞장서서 오르니 사방이 산 무너지듯 하였다

우리들 감히 당하지 못해서 우뢰 달리듯 번개 번쩍 우뢰치듯 대나무가 쪼개지듯 기와 깨지듯
창자와 골이 문드러졌다 사람과 산이 함께 토벌하여서 일조에 재빠르게 쓸어버렸다 삼한을
다시 만들 듯 하니 낯을 바꿔 죄를 후회하였다 조공朝貢이 바다건너 잇따라 와서 이백년이나
오래되었다 남쪽 백성 걱정없이 농사하여서 따뜻하게 부모 섬기고 자녀 기르고 했다 님의 은택
아님이 없어 사모하며 축수하였다 마음속에 새겨져 있어 오랠수록 어젯 일 같다 역서曆書를 밝혀
오이五異(示변)하면서 돌깎아 다듬어 공을 기록했다 여기 황산 기슭에 삼가 세우나니 이즈러짐도
부서짐도 없으리 영원한 세대에 길이길이 변함없어서 여기 이 비석같이 있으리

만력萬曆 5(선조 10, 1577)년 정축丁丑 8월八月 일日

朝奉大夫(종4품)行雲峰縣監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兼春秋館記事官 臣 朴光玉 建
단기 4290년(1957)정유년 10월 일 성적봉찬회에서 중건함





















황산대첩기념비

-다시 옮겨 적는다-

이곳은 고려말기에 왜구를 전멸시킨 전승지이다.

일본은 16세기말에 임진왜란을 일으켜
7년동안 우리의 강토를 유린하였고 최근 36년간에는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여 민족을 압박
착취한 것은 기억이 생생한 바로서 의분을 참을 수 없거니와 그 이전에도 여러차례 왜구라하는
해적단을 조직하고 금수강산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조국에 침입하여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하였다. 특히 고려말기 40년간이 더욱 심하였으니 그중에도 우왕6년(1380)8월 鎭浦口,
충남 舒川에 침입한 왜구가 가장 크고 악한자들이었다. 이 때 왜선 5백여척이 진포구에
들어와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사람을 죽이고 쌀과 어린이를 배에 실어가므로 羅世, 沈億符,
崔茂宣 등이 처음으로 최무선이 제조한 대포를 사용하여 왜선을 다 불태워 버리니
배에 있던 자는 불에 타서 죽지 아니하면 물에 뻐져 죽고 육지에 올라 온 자는 돌아갈 길이
없게되자 이들은 沃川,利山,永同,黃澗,中牟,化寧,功城,靑利,尙州,善山 등지를 통과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폐허를 만들고 咸陽 동쪽 沙斤乃驛에서는 裵克廉 등 9원수와 싸워 朴修敬.
裵彦 등 두 원수와 군인 5백여명을 죽이고 함양을 분탕하고 9월에는 雲峰引月驛에 이르러
장차 光州에서 말을 먹이고 북으로 진격하겠다고 떠드니 왜구의 피해가 이 보다 더 심한 때는
없었으며 中外의 인심은 크게 동요되었다. 이 보다 앞서 나라에서는 贊成事 李成桂를 楊廣,
전라, 경상도순찰사에 찬성사 邊安烈를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王福命,禹仁烈,都吉敷,朴林宗,洪仁桂,
林成味,李元桂를 원수에 임명하여 이들을 토벌케했다. 이성계,변안렬 등 토벌군에 남원에 이르러
적이 引月驛에 있다는 말을 듣고 雲峰을 넘어 荒山 서북쪽 鼎山峰에 올라가 길 오른편에
험한 지름길이 있는 것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아군의 뒤를 습격하리라고
판단하고 이성계 자신이 그 길을 담당하고 다른 장수들은 평탄한 길로 나가게 하자 과연
적의 정예가 험한 길로 튀어나왔다. 이성계가 大羽箭과 柳葉箭을 쏘아 선봉의 적을 거의 다 살하자
적장 阿只拔都는 투구와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白馬를 타고 선봉에서 대항했으나
李成桂와 李豆蘭이 이를 쏘아 죽이니 적진은 크게 무너져 말과 장비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이에 我軍이 일제히 진격하여 적을 전멸시켰는데 적의 시체는 골에 쌓이고
냇물은 피로 물들어 며칠동안 물이 맑지 아니 했으며 노획한 말이 一千六百餘匹이요
병기는 헤아릴 수 없었다하니 왜구 침입이래 이와 같이 大勝한 예는 없었다.
이 승리로 왜구가 차차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였으니 荒山大捷의 의의는 실로 크고
靑史에 빛나는 것이다. 그 후 나라에서는 이곳에 荒山大捷碑와 事蹟碑를 세워
그 날의 승첩을 기리어 왔으나 경술국치이후 일인들에 의해 파괴되어 황폐되었던 것을
남원군에서 국고 보조와 郡費로 경역을 정화하였으니 이는 황산 기슭에 메아리 친
救國의 승전을 널리 선양하고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자주국방정신을 길이 계승케하고자 함이다.

1973년 현충일

신석호(申奭鎬)짓고 김기승(金基昇)쓰고 남원군(南原郡)이 세우다




어휘각(御諱閣)

이 어휘각은 조선 태조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고려 우왕 6년, 1380)이 자기 혼자만의
공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지를 석벽에 새긴 유적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하였던 그 성적(聖蹟)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에
따라 본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운봉의 황산대첩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1979년 8월 2일에 남원시 산동면 이곡리에 사는 오삼문(남, 63)이 구연한 것을

최래옥·강현모가 채록하여, 1980년에 출간한 『한국구비문학대계』5-1에 실었다.

이성계와 아지발도에 관한 전설은 산동면 이곡리 외에도 남원시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 후기로 들어오면서 일본군은 고려를 침략하여 지리산에 진을 치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조정에서는 이성계와 퉁두란에게 왜구를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일본군 장수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린데도 무예가 뛰어나고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어서 화살을 쏘아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를 잡으려고 며칠째 황산에서 기다리는데,

아지발도는 꼭 황산 앞에서 자기들 진지로 되돌아가 계속 실패만 하였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지발도는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누이로부터 조선의 황산을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루는 아지발도가 자고 있는데, 아직 새벽이 되지도 않았는데 닭이 울었다.

아지발도는 닭이 우니까 새벽인가 싶어 일어나 고남산 쪽으로 올라갔다.

이성계는 ‘옳다!’ 싶어서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할머니를 시켜서 아지발도 앞으로 보냈다.

아지발도가 “여기 어디에 황산이란 곳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할머니는, “여기엔 황산이란 곳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아지발도는 안심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왔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밝을 무렵 아지발도가 황산으로 올라오므로

퉁두란이 화살을 쏴서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추었다.

아지발도는 땅에 나뒹굴며 입을 벌렸다.

이때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목구멍에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

그래서 아지발도는 황산에서 많은 피를 흘리고 죽었다.

아직도 황산다리 아래 바위가 벌건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지발도의 피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다.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죽인 것을 계기로 고남산은 태조봉이라고도 불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萬人義塚에 萬人은 없었다

입력 : 2017.05.03 03:02

[79] 남원 만인의총의 비밀과 아기장군 아지발도

정유재란 개전 후 첫 전투… 남원성에서 6만 일본군 맞아 1만 조선 군-민 전원 전사
비겁한 명나라 장수 양원은 전투 중 도주했다가 본국 송환돼 참수형
조선으로 양원 머리 보내자 왕실 "제사를 올려주라"
만인의총은 해방 뒤 붙인 이름… 조선시대에는 벼슬아치들만 제사
권력에 대한 불신은 '왜구 아지발도는 민란 두령 아기장수' 전설 만들어

박종인의 땅의 歷史
역사 교과서에서 이리 배웠다. '정유재란이 벌어진 1597년 추석 무렵 남원성을 공격한 일본 6만 대군에 맞서 싸우던 백성과 의병, 관군 1만 명이 전멸했다. 추석을 하루 넘긴 날이었다. 전후 전사자들을 합장했다. 이를 만인의총(萬人義塚)이라 한다.'

결론부터. 만인의총에 만인(萬人)은 없었다. 남원 만인의총 앞 사당 충렬사는 만인이 아니라 전투 수뇌부 8인을 위한 사당이었다. 사당에 '순절만인(殉節萬人)' 위패가 모셔진 때는 해방이 되고도 28년이 지난 1973년이었다. 게다가 지금 만인의총은 묻힌 이 하나 없는 허묘(虛墓)다. 의로운 죽음에도 계급이 있는가? 420년 전으로 떠나본다.

1597년 한가위, 남원성

임진왜란 말 명과 일본 사이 휴전협상이 결렬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재공격을 명령했다. 그 전쟁에서 육지에서 벌어진 첫 전투가 남원성 전투였다.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終戰)을 하려면 기필코 남원을 점령하고 호남을 차지한 뒤 한양까지 진격해야 했다. 이 같은 사실을 조선도 알고 있기에 조선군은 남원에 있는 교룡산성에 요새를 구축하고 대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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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개전 초기인 1597년 추석 전라도 남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6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상대로 남원성 백성과 군사 1만이 싸워 전멸했다. 그들을 기리는 곳이 만인의총이다. 그러나 조선왕실은 이 의로운‘만인(萬人)’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무관심했다. /박종인 기자
남원 조선군과 합류한 명나라 사령관 이름은 양원(楊元)이었다. 부임 첫날 그가 말했다. "그대 나라 사람들은 흐리멍덩하고 겁이 많으니 적을 보고 붕괴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爾國之人鬆且怯 若臨敵潰散則將奈何)?"(선조 30년 8월 6일자 실록) 기병 출신인 양원은 연합군 사령부를 들판에 있는 남원성으로 옮겼다.

요새를 포기했으니 전투는 불문가지였다. 한가위를 이틀 앞두고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선봉으로 한 일본 육군 6만 대군이 남원성 사방을 포위했다. 명나라 부대가 지키고 있던 동, 서, 남문이 뚫렸다. 조선군과 백성들은 북문 쪽으로 쫓겨 들어갔다. 전황을 눈치 보던 양원이 졸개들과 남원성을 빠져나갔다.

전북 남원
6만 대 1만. 북문 쪽으로 몰린 조선인은 전멸했다. 관군 4000명에 의병과 민간인 6000명, 도합 1만 명이 학살당했다. 일본군 군승 게이넨(慶念)은 이렇게 기록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쳐 죽여서 생포할 놈은 한 사람도 없구나.'(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도주했던 명나라 장수 양원은 본국으로 송환돼 참수당했다. 명나라 정부는 구경거리로 삼으라고 잘린 양원의 머리(斬頭·참두)를 조선으로 보냈다. 그런데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아뢰니, (선조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선조 31년 10월 8일자) 바보였거나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둘 중 하나다.

사흘 만에 남원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호남을 집어삼키고 기세등등하게 북진하다가 이순신에게 황당한 일격을 당했다. 열세 척으로 150척을 무찌른, 이순신조차도 '하늘이 도왔다(天運)'라고 평가한 명량대첩이다.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전주성에 입성했지만, 일본군은 충청도 직산에서 북상을 멈춰야 했다. 1만 남원 의민(義民)들이 일본군을 사흘 동안 지체시키지 않았다면 달리 돌아갔을지도 모를 전황이었다.

만인의총(萬人義塚) 전말사

만인의총 앞 충렬사에 있는‘만인’의 위패.
만인의총 앞 충렬사에 있는‘만인’의 위패.
전투가 끝나고 성문 밖에 시체들이 겹겹이 쌓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신들을 북문 밖 물구덩이에 집어넣었다. 그 위에 봉분 하나를 만들어 표시를 해두었다. 아직 더운 가을이었다. 합당한 예법에 따라 장례할 방법이 없었다.

1612년 지역 유림(儒林)이 순절자들을 위한 사당을 세웠다. 1653년 왕실에서 '충렬사(忠烈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곳에 모신 순국자들은 일곱 명이었다. 만 명이 아니라 일곱 명, 훗날 한 명이 추가돼 여덟 명이었다. 1940년대까지 만인이 묻힌 자리 또한 팔충신묘(八忠臣墓)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 1만 의인을 합장했던 물구덩이에 주택가가 들어섰다. 주택가 옆으로 철로가 나고 남원역이 섰다. 질퍽질퍽한 물구덩이는 증기기관차가 뱉어내는 석탄 찌꺼기 처리장으로 사용됐다.

해방이 되고 4년 뒤 남원국민학교 교장 이기원을 필두로 뜻있는 사람들이 남원역 앞 봉분에 상석을 놓고 주변에 담장을 치고서 제사를 지냈다. '만인(萬人)'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첫 제사였다. 그리고 1964년 3월 14일 왕봉산 기슭, 지금 자리에 의인들을 이장했다. 충렬사도 함께 이건됐다. 그리고 1973년 충렬사 제단 정중앙에 '만인(萬人)'의 위패가 들어섰으니 1만 의민이 순절하고 376년 만의 일이었다. 왕조 시대 희생된 사람들이 20세기 대한민국 공화정 시대에야 대접을 받게 된 일대 사건이었다.

충렬사에 제사를 지내오던 유림 측은 위패 위치와 제사 방법을 놓고 당국과 갈등을 빚다가 1981년 별도로 충렬사를 만들었다. 2017년 5월 현재 남원에는 충렬사가 두 개 있다. 만인의 충렬사, 그리고 유림의 충렬사.

석탄재만 쏟아진 만인의총

한병옥(74)은 전직 교사다. 지금은 사학자다. 남원역 폐역사 한쪽에서 남원성 북문터를 발굴한 사람이다. 남원을 휩쓴 동학 그리고 정유재란의 흔적 또한 한병옥의 마음을 옥죄는 기억들이다. 그가 말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만인을 함께 모신 적이 없었다. 한마음 한뜻으로 싸우다 함께 죽은 영령들인데 벼슬아치라고 추앙받고 무명인이라 하여 귀신 취급도 받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조사해보니 현실이 그랬다." 회한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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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남원역 앞에 있는 옛 만인의총 터(가운데 흰 담장). 1960년대 이장시 석탄재가 쏟아졌다.
"왕봉산으로 이장할 때 아무리 옛 의총 터를 파들어가도 석탄재에 연탄재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뼛조각 하나 수습하지 못하고 흙만 퍼서 이장했다. 백골이 진토(塵土)가 되기에는 세월이 너무 짧다. 옛 만인의총 터 깊은 곳에 의인들이 굉장히 많이, 아주 넓은 면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말이다." 정신적·종교적으로는 왕봉산 양지바른 기슭에서 그들이 쉬고 있을지 모르나 물리적으로 만인의총은 여전히 420년째 옛 물구덩이에 있다. 여기까지가 만인의총 전말사다.

황산대첩과 이성계

1380년 고려의 신흥 권력자 이성계는 지리산에 숨어든 왜구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운봉 땅 황산에서 벌어진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사람들은 그 왜구의 우두머리를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불렀다. '아지'는 '어린'이라는 뜻이고 '발도'는 몽골어로 '장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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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년 황산대첩 때 아지발도가 흘린 피가 남은 남천 피바위.
'아지발도는 나이 15세가량에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 부딪치고 가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서 감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고려사절요) 이성계가 그 무용(武勇)을 아껴서 생포하려고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에 화살로 쏘아 죽였다. 아지발도가 흘린 피가 남원 남천변 바위를 물들여 이를 피바위라고 했다. 지금도 남아 있다. 전투가 어찌나 격렬하고 길었던지 지는 달을 끌어당겨 놓고 싸웠다고 해서 황산 아래 마을 이름은 인월(引月)이다. 남천은 피가 넘쳐 일주일 동안 마시지 못할 정도였다.

훗날 대첩을 기리는 비석이 황산 아래 섰다. 일제 강점기 비석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됐다. 지금은 그 조각난 비석을 눕혀 놓은 파비각(破碑閣)과 중건한 비각이 서 있다.

아기 장수와 아지발도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성계가 죽인 사람이 왜구 두목이 아니라 민란을 지휘하는 아기 장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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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광한루에서 펼쳐지는 평화로운 남원 춘향제.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날개를 잘라버렸지만 용맹하게 자라났다. 훗날 반란을 두려워한 권력자가 관군을 보내 장수로 성장한 아기를 죽여 버렸다.' 전국 팔도에 떠도는 아기 장수 전설이다. 지리산 주변 남원과 구례, 함양 땅에도 똑같은 아기 장수 전설이 있다. '우투리 설화'다. 그런데 지리산 우투리 설화에서 그 아기 장수를 죽인 사람이 바로 아지발도를 죽인 이성계다.

황산대첩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었다. "이후 조선 왕조에 부패와 실정(失政)이 쌓여가며 지리산 주변 민초들에게 각인된 이성계라는 인물이 권력, 관군의 상징으로 정착됐다."(전 부산대학교 한국 민족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정연현) 여기에 이성계에 의해 죽은 왜장 아지발도가 아기 장수로 정착돼 지금까지 전래됐다는 것이다.

만인이 없는 만인의총, 이성계에 대한 원망, 왜구 두목 아지발도에 대한 동정심과 아기 장수의 죽음. 무엇을 말하는가. 백성이 주인이고, 주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이다. 남원 땅에서 그 대한민국을 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3/20170503000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