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김헌창의난(金憲昌의 亂)

이름없는풀뿌리 2016. 1. 17. 13:47

김헌창의난(金憲昌의 亂)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개설]

반란 세력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지금의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熊津城)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 되어 진압되었다.

 

[역사적 배경]

김헌창의 난은 작게는 원성왕(元聖王, 785∼798)계 귀족들과 무열왕(武烈王, 654∼661)계 귀족들 간의 제2차 왕위계승전이었고, 크게는 신라 하대에 계속된 크고 작은 왕위계승전들 가운데 하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김주원은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785년선덕왕(宣德王, 780∼785)이 죽자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김경신(金敬信: 훗날의 원성왕)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방으로 물러난 사람이다.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뒤, 계속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김헌창은 중앙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807년(애장왕 8)에는 시중(侍中)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인 상대등김언승(金彦昇: 훗날의 헌덕왕)에 버금가는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애장왕(哀莊王, 800∼809)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1월 시중 직에서 밀려났다. 그 뒤 계속 헌덕왕파의 견제를 받아 813년(헌덕왕 5)에는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의 도독, 816년에는 청주(菁州: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의 도독이 되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821년에는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되었다.

 

이처럼 헌덕왕 일파의 견제를 받는 가운데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된 이듬해에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당시 김헌창이 반란의 명분을 표방한 것에 불과하다. 귀족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왕위에 추대된 김주원이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것을 공격한 것은, 원성왕의 즉위에 대한 합법성 및 당시 원성왕계 왕실의 합법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거사에 대한 합리화인 동시에 과거 김주원을 지지했던 귀족 세력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명분이기도 했다.

 

[전개과정]

이러한 김헌창의 반란은 자연히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다른 방계(傍系) 김씨 왕족인 김경신 일파 사이의 제1차 대결이 있은 지 37년 뒤에 제2차 대결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난은 그 같은 양 세력의 충돌이었던 만큼, 전국을 휩쓰는 일대의 내란으로 전개되었다.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청주·사벌주(沙伐州: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國原京: 현재 충청북도 충주)·서원경(西原京: 현재 충청북도 청주)·금관경(金官京: 현재 경상남도 김해)의 사신[仕臣: 소경(小京)의 장관]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이 삽시간에 장악된 것은 이들 지역에 반란 세력과 내통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주에서는 도독 향영(向榮)이 추화군(推火郡)으로 비상 탈출을 했는데, 이 같이 반란 세력에 동조하지 않은 부류들은 피신하거나 탈출해 중앙 정부에 반란이 발생했음을 고하였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은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 주에 이르렀는데, 이는 충청도·0의 거의 전 지역과 경상도의 서부와 남부에 해당하는 범위로 수도인 서라벌을 포위하고 있었다. 초기 반란 세력의 기세는 인근 일대까지도 압도했는데,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추화군(推火郡)굴자현(屈自縣: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의 경우는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반란 세력에 휩쓸리지 않은 공으로 7년간 조세를 면제받았을 정도였다.

 

이처럼 김헌창의 난은 반란의 중심 거점이 웅천주라는 지방이었지만,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과 중앙 왕실에 동조하는 양대 세력으로 신라 전체가 양분되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대규모의 내란이 되었다. 중앙 정부는 난이 일어나자 우선 원장(員將) 8명을 보내 왕도(王都)의 8방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 다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계속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一吉飡)장웅(張雄)이 선발대로 가고 잡찬(迊湌)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제릉(悌凌)이 뒤따라갔으며, 이찬(伊飡)균정(均貞), 잡찬웅원(雄元), 대아찬(大阿飡)우징(祐徵) 등이 주력 부대인 3군을 맡아 정벌하러 갔다. 그리고 각간(角干)충공(忠恭)과 잡찬윤응(允應)은 문화관문(文火關門)을 지키게 하였다. 이 밖에도 2명의 화랑이 낭도들을 이끌고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원성왕 직계 후손들의 결속으로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토벌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전략상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삼년산성 〉(三年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 방면의 반란군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장웅의 부대에게 격파되었고, 이어 장웅의 부대와 합류한 위공·제릉의 연합군에게 삼년산성마저 함락당하자 결국 속리산에 배치된 병력까지도 섬멸당했다. 그리고 왕경(王京)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성산(星山: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의 반란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게 패하였고, 웅진에 진을 친 반란군도 공격을 받아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난이 진압되자 반란 세력에 대한 무장 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일어났다.

 

김헌창은 참시(斬屍)되고, 이에 동조한 종족(宗族)과 도당 239명이 사형 당했다. 그러나 반란 세력에 의해 병졸로 동원된 사민(私民)이나 일반 양민은 방면·해산되었다. 또한 당시 사형을 당한 김헌창의 종족은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척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김헌창 형제의 자손과 근친은 대부분 살아남아 중앙정계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결과와 영향]

김헌창의 난으로 무열계 귀족들은 크게 몰락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많은 귀족들이 죽임을 당했고, 비록 사형은 면제되었을 지라도 골품제에서 신분이 강등되거나 장원(莊園) 등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당한 세력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 난을 분기점으로 무열왕계는 중앙에서 활약을 하더라도 원성왕의 후손들이 주축이 된 각 귀족의 파벌에 가담하는 정도여서, 중앙 정계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당시 토벌군의 진압과정에서 피신해 목숨은 부지했다. 그리고 3년 뒤인 825년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壽神)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로써 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한편, 김헌창의 난과 관련해서는 그것을 백제권역에 새 국가를 건국하려고 시도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김헌창이 백제의 중심지라 할 웅천주의 도독으로 부임한지 채 일 년이 못 되어 반란을 실행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백제 지역이 신라에 대한 반감이 매우 오래도록 상존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옛 권역도 비록 김헌창의 난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라 편에 서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훗날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한산(漢山)을 근거로 다시 반란을 일으켰던 데에는 고구려권의 호응을 내심 기대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볼 때 통일신라는 삼국으로 다시 분리될 소지를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上

• 「신라하대(新羅下代) 김주원(金周元) 직계손(直系孫)의 동향(動向)」(최병헌, 『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1)

• 「신라시대(新羅時代) 반역(叛逆)의 역사적(歷史的) 성격(性格)」(강성원, 『한국사연구』43, 1983)

• 「김주원세계(金周元世系)의 성립(成立)과 변천(變遷)」(김정숙, 『백산학보(白山學報)』28, 1984)

• 「신라(新羅) 하대(下代) 왕위찬탈형반역(王位簒奪型叛逆)에 대한 일고찰(一考察)」(김창겸, 『한국상고사학보(韓國上古史學報)』17, 1994)

• 「신라 하대 김헌창(金憲昌) 난(亂)의 성격」(황선영, 『부산사학(釜山史學)』35, 1998)

 

 

 

김헌창의 난 (대를 이은 반란)

 

822년(헌덕왕 14)에 당시 웅천주 도독(都督)으로 있던 김헌창(金憲昌)은 대규모의 난을 일으키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고 하였다. 한때 9주5소경 가운데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청주(진주), 사벌주(상주)의 4주와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 등 3소경을 장악하여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산주, 우두주(춘천), 삽량주(양산), 패강(평산), 북원(원주)은 김헌창에 반대하였고, 한동안 반란 사실을 몰랐던 중앙정부는 곧바로 수도를 방어하고 토벌군을 보내어 진압하였다. 김헌창의 반란은 왕위 탈취보다도 신라를 분할하여 새 왕국의 건설을 의도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구백제지역의 지역 정서가 배경이 될 것이다. 3년 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도 북한산 일대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 역시 구고구려지역의 정서가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은 이후 벌어지는 후삼국시대 반란의 시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왕위계승 전에서 반란으로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진골 귀족세력의 분열이 심화되어 갔다. 그 결과 귀족연립체제의 정치 운영 아래에서 하대의 신라는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는데, 김헌창의 난은 그러한 분열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헌창의 반란은 그 연원이 그의 부친 김주원(金周元)의 왕위계승 실패로까지 올라간다. 김주원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아들인 문왕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유정(惟靖)이었다. 김주원은 777년(혜공왕 13) 이찬(伊飡)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는데, 혜공왕이 살해되고 선덕왕이 즉위한 780년(선덕왕 1)에는 시중에서는 퇴위하였으나 여전히 세력이 상당하였다. 785년(원성왕 1)에 선덕왕이 죽자 그가 왕위계승의 제1 후보자였다. 그는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경쟁자인 김경신(金敬信)은 780년(선덕왕 1) 선덕왕의 즉위와 더불어 상대등에 오른 인물이지만, 실제 세력 면에서는 김주원의 뒤를 이어 제2인자였다. 이에 김경신은 비상수단을 써서 왕궁을 점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원성왕이다. 사태가 바뀌자 김주원을 지지하던 귀족들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진골: 신라시대 신분계급제도인 골품제의 제2위 신분.

 

왕위 계승에 실패하고 명주 지방으로 퇴거하다

김주원은 왕위 계승에 실패한 뒤에 자신의 장원이 있으며 세력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명주(강릉) 지방으로 퇴거하였다. 김주원은 이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졌다. 그 뒤 명주도독은 대대로 그의 후손에게 세습되었는데,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가문은 고려 초 새로운 왕조에 귀의해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 가운데는 그가 강릉 지방으로 퇴거한 뒤에도 계속 중앙에 남아 활약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장자 종기(宗基)가 790년(원성왕 6)에 시중직에 오른 것을 보면 김주원 세력과 원성왕 세력 사이의 화해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헌창 역시 그 정치적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는 807년(애장왕 8)에 시중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 중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金彦昇 : 헌덕왕(憲德王))에 버금가는 실력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 해 1월에 시중 직에서 물러났다. 813년(헌덕왕 5) 정월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이 되고, 그 뒤 중앙으로 들어와 다시 814년(헌덕왕 6) 8월 시중에 임명되어 1년 5개월간 재직하다가 퇴임하였다. 그 뒤 계속 헌덕왕파의 견제를 받아 816년(헌덕왕 8)에는 청주(진주)의 도독이 되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821년(헌덕왕 13)에는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되었다.

 

원성왕계 왕실을 부정하는 김헌창의 반란

이처럼 헌덕왕 일파의 견제를 받는 가운데 김헌창은 웅천주(공주)의 도독으로 전보된 이듬해인 822년(헌덕왕 14) 3월에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였다.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당시 그가 반란의 명분으로 원성왕계 왕실을 부정하는 입장을 내세웠음을 뜻한다. 즉 김헌창의 반란은 내용상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다른 방계 김씨 왕족인 김경신 일파 사이의 제2차 대결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 셈이다.

 

반란 동조 세력과 왕실 동조 세력으로 나뉘어 충돌한 대규모 내란

반란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청주(진주), 사벌주(상주)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충주), 서원경(청주), 금관경(김해)의 사신(仕臣 : 소경(小京)의 장관)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이 삽시간에 장악된 것은 이들 각 지역에 반란세력과 내통한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란세력이 장악한 지역은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 주에 이르고, 충청도 및 전라도의 거의 전 지역과 경상도의 서부와 남부에 해당해 수도를 포위하고 있었다. 한편, 반란세력에 장악되지 않은 지역들도 전투태세에 들어가 각 지역별로 자체 수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처럼 김헌창의 난은 반란의 중심 거점이 웅천주라는 지방에 있었지만,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과 중앙 왕실에 동조하는 양대 세력으로 신라 전체가 양분되어 충돌한 대규모의 내란이었다.

 

중앙정부의 토벌대에 의해 진압된 반란군

중앙정부는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계속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이 선발대로 가고 잡찬(林飡) 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 제릉(悌凌)이 뒤따라갔으며, 이찬(伊飡)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이 주력부대인 3군을 맡아 정벌하러 갔다. 이는 원성왕계 왕실 구성원들이 서로 결속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김헌창은 전략상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삼년산성(三年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 지역) 방면의 반란군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장웅의 부대에게 격파되고, 이어 장웅의 부대와 합류한 위공과 제릉의 연합군에게 삼년산성을 함락당한 뒤 속리산에 배치된 병력까지 섬멸 당하였다. 그리고 왕경(王京)에 가깝게 깊숙이 자리 잡았던 성산(성주)의 반란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부대에게 패하고, 웅진에 진을 친 반란군도 공격을 당해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난이 진압되었고, 김헌창과 연결된 무열왕계는 이 난을 분기점으로 중앙정계에서 그 힘이 약화되었다.

 

과거 백제와 고구려 지역이라는 통일신라의 지역적 모순을 드러낸 김범문의 반란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이 때 피신해, 3년 뒤인 825년(헌덕왕 17)에 고달산에서 초적의 우두머리 수신(壽神) 등 1백여 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평양(서울 부근, 혹은 평양)에 정하고 북한산주를 공격하였으나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써 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김헌창과 김범문의 반란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신라 왕실의 왕위계승 문제이지만,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지역적 기반이 과거 백제와 고구려 지역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가 갖고 있는 지역적인 모순이 점차 드러나는 시점임을 보여주고 있다.

 

원고 작성 :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교정 및 윤문 : 상명대학교 문화콘텐츠 창작소재연구소

번역분

헌덕왕대의 불길한 조짐

 

813년(신라 헌덕왕 5) 봄 정월에 이찬(伊飡) 헌창(憲昌)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았다. 2월에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현덕문(玄德門)에 불이 났다. -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헌덕왕 5년 816 년(신라 헌덕왕 8) 봄 정월에 시중 헌창을 지방으로 내보내 청주(菁州) 도독으로 삼고 장여(璋如)를 시중으로 삼았다. 농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절동(浙東) 지방에까지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 170명이나 되었다. 한산주 당은현(唐恩縣)에서 길이 10자, 넓이 8자, 높이 3자 5 치 되는 돌이 저절로 100여 보를 옮겨갔다. 여름 6월에 망덕사의 두 탑이 흔들려 싸우는 듯하였다. -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헌덕왕 8년

 

아버지의 왕위를 되찾기 위한 투쟁

822년(신라 헌덕왕 14) 3월에 웅천주 도독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였다.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의 네 주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청주 도독 향영(向榮)이 몸을 빠져나와 추화군으로 달아났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은 헌창의 반역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에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서울로 도망해 와 그 일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마침내 장수 8명을 뽑아 서울을 여덟 방면에서 지키게 한 다음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 제릉(悌凌)이 그 뒤를 이었으며,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雄元) 그리고 대아찬 우징(祐徵) 등이 3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각각 종군할 것을 청하여, 명기는 낭도의 무리들과 함께 황산(黃山)으로 나아가고,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 이에 헌창이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적병을 만나 이를 공격해 이겼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합하여 삼년산성을 쳐서 이기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균정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군과 싸워 이를 멸하였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이르러 적과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여러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열흘 동안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이 머리를 베어 몸과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종족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무리들 무릇 239명을 죽였으며 그 백성들은 풀어주었다.그런 다음 싸움의 공을 논하여 벼슬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는데, 아찬 녹진(祿眞)에게 대아찬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적군에 가까이 있었으나, 반란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7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이보다 앞서 청주(菁州) 태수가 집무하는 관청 남쪽 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는데, 몸 길이가 5자이고 검은 색이었으며, 머리는 5살쯤 되는 아이의 머리만하고 부리 길이가 1자 5치나 되었다. 또 눈은 사람 눈 같았고, 모이 주머니는 5되들이 그릇만 하였는데 사흘 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헌덕왕 14년

  

출처: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AGE&search_div_id=CP_AGE001&cp_code=cp0614&index_id=cp06140012&content_id=cp061400120001&search_left_menu=2

 

 

 

김헌창의 난  

 

[헌덕왕 14년(822)]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고 하였다. 무진(武珍)•완산(完山)•청주(菁州)•사벌(沙伐)의 네 주 도독과 국원경(國原京)•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과 여러 군현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몸을 빠져 나와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주(漢山州)•우두주(牛頭州)•삽량주(歃良州)와 패강진(浿江鎭)•북원경(北原京) 등은 헌창의 반역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에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충(令忠) 등이 왕경(王京)으로 도망해 와 그 일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級飡)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太守)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 마침내 장수 여덟 명을 뽑아 왕도(王都)를 여덟 방면에서 지키게 한 다음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迊湌) 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 제륭(悌凌) 등이 그 뒤를 따랐으며, 이찬(伊飡)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 그리고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이 3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角干)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花郎)이 각기 종군할 것을 청하여 명기는 낭도(郎徒)의 무리와 함께 황산(黃山)으로 나아가고,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

 

이에 헌창이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적병을 만나 이를 공격해 이겼고, 위공과 제륭은 장웅의 군사와 합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쳐서 이기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균정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군과 싸워 이를 멸하였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熊津)에 이르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여러 군사가 성을 에워싸고 열흘 동안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화(禍)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이 머리를 베어 몸과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종족(宗族)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무리를 무릇 239명이나 죽였으며, 그 백성을 풀어 주었다. 그런 다음 싸움의 공을 논하여 벼슬과 상을 차등 있게 주었는데, 아찬 녹진(祿眞)에게는 대아찬의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적군에 가까이 있었으나 반란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7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4년 춘3월 

 

이 사료는 헌덕왕14년(822)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 충청남도 공주)의 도독(都督) 김헌창(金憲昌, ?~822)이 일으킨 반란의 전말을 전하는 기록이다. 신라 하대 왕위 계승전의 전개 과정과 지배층의 분열 등 양상이 잘 나타나므로, 하대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주목되는 사료의 하나다. 김헌창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후손인 김주원(金周元, ?~?)의 아들이다.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 지방으로 물러났다. 이후 그는 ‘명주군왕’으로 불리는 등 중앙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와 같은 세력은 뒷날 호족 형성의 한 유형이 되었다.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뒤에도 그의 자손들은 원성왕계의 조정에 참여하여 중앙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김헌창은 807년(애장왕 8년)에 시중(侍中)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인 상대등김언승에 버금가는 실력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김언승이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1월 시중 직에서 밀려났다. 그 뒤 813년(헌덕왕 5년)에는 무진주(武珍州, 광주광역시) 도독, 816년에는 청주(菁州, 경상남도 진주)의 도독으로 근무하다가, 821년에 다시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22년 웅천주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신라는 계속적인 기근과 초적(草賊)의 등장 등으로 말미암아 민심이 매우 흉흉한 상태였다. 김헌창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가 내세운 대외적인 명분은 37년 전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원성왕이 즉위한 것은 위법이었다는 것이었다. 즉, 원성왕 즉위의 비합법성을 내세워 당시의 원성왕계 신라 왕실을 부정하고, 과거 김주원을 지지했던 귀족 세력의 힘을 모으고자 하였다. 그 결과 김헌창의 난은 전국을 휩쓰는 일대의 내란으로 전개되었다.

 

김헌창은 신라 조정에 대항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면서 반란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3소경을 비롯한 여러 군•현의 수령을 협박하여 반란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곧 반란 사실이 중앙에 알려지면서, 조정에서 대규모 진압군을 편성하여 반란 세력의 근거지인 웅진으로 향했다. 진압군은 웅진에 도착하여 반란군과 격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결국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다.

 

난이 진압되자 반란 세력에 대한 대규모 처형이 행해졌다. 무려 239명에 달하는 김헌창의 종족과 무리가 이 반란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다. 김헌창의 난으로 말미암아 무열왕계 귀족들은 크게 몰락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많은 귀족이 처형당했으며, 살아남은 경우에도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다. 3년 뒤인 825년(헌덕왕 17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 ?~825)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되면서, 두 차례에 걸친 김헌창 부자의 반란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커서, 이 반란은 이후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 계승전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지방에서 호족 세력의 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헌창의 난과 공주

 

백제유민 反신라 감정 폭발… 공산성서 처절한 패배

신라는 신문왕(681-692)대에 이르러 넓어진 영토를 9주(州)로 나누었다. 원 신라 지역에 양주․강주․상주, 옛 고구려 지역에 한주․삭주․명주, 옛 백제 지역에 웅주․전주․무주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인들의 의식 속에는 조국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때로 중앙통제력의 약화와 함께 표출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헌덕왕 14년(822)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의 난이었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김주원은 선덕왕(宣德王)이 죽자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김경신과 싸움을 벌이다 패한 바 있었다. 왕위계승전에서 밀려난 김주원은 강원도 명주(溟州 : 강원도 강릉)에 내려갔다. 그러나 원성왕이 된 김경신은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그를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주고 식읍(食邑)까지 주었다. 그가 거주하던 명주 외에 익령(翼嶺 : 현재의 강원도 양양)․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 : 현재의 강원도 平海)․울진(蔚珍)까지 식읍으로 주었던 것이다. 일종의 독립국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다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에게는 복권이 허락되었다. 중앙에 올라와 관직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애장왕 8년(807)에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러나 헌덕왕이 즉위하면서 시중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동왕 5년(813)에 와서야 외직(外職)인 무진주(武珍州 : 현재의 광주광역시) 의 도독(都督 : 현재의 도지사)이 되었다. 그 이듬해인 헌덕왕 6년 다시 조정에 들어와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2년 뒤인 헌덕왕 8년 그는 다시 지방으로 나아가 청주(菁州 : 현재의 경남 진주) 의 도독(都督)이 되었다. 국무총리를 2번이나 했다가 도지사로 좌천된 것과 다름없었다. 헌덕왕 13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이듬해인 헌덕왕 14년(822)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독립국을 선포하였다.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 원년(元年)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왜 하필이면 웅천주도독이 되었을 때 반란을 일으켰느냐 하는 것이다. 웅천주는 현재의 공주를 말한다. 첫번째 이유는 헌덕왕대 여러 번에 걸친 자연재해로 여기저기서 도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헌덕왕 3년 서쪽 변방의 여러 주군(州郡)에서 기근이 있어 도적이 일어나매 군사를 내어 토벌한 적이 있다. 헌덕왕 11년에는 초적(草賊)이 곳곳에서 일어나니 왕이 여러 주군(州郡)의 도독과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잡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웅천주(공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덕왕 14년(755)의 기록을 보면 민간에 기근이 들어 웅천주의 향덕(向德)이란 자는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할 수 없게 되자 자기의 다리살을 베어 아버지를 먹이기까지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에게 곡식 5백 석을 주어 표창하였다 한다. 이 같은 상황은 공주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따라서 경덕왕이 특별히 향덕에게 곡식을 후히 주고 정표(旌表)까지 한 것은 그의 효행에 감동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이 지역의 민심을 가라앉히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웅천주(공주)가 가지는 역사지리적 특성에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한다. 웅천주는 예전에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에 반신라적 감정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백제부흥운동이 공주 주변에서 일어났음에서 알 수 있다. 이에 신라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웅천주정(熊川州停)이라는 군단을 설치하여 공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러한 백제 유민의 동향을 이용해 신라 정부를 전복하려 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공주 지역 백제 유민들의 동향은 헌덕왕대까지 이어져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의 세력에 포함된 지역도 대부분 옛 백제 지역이었다. 여러 주군의 도독(都督)과 사신(仕臣), 그리고 수령들을 위협하였지만 청주도독(菁州都督) 향영과 한산주(경기도 광주)․우두주(강원도 춘천)․삽량주(경남 양산)․패강진(평안도 평산)․북원경(강원도 원주) 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도망하거나 군사를 모아 스스로 불측의 변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청주(菁州 : 현재의 경남 진주)와 삽량주는 옛 신라 지역이었고 한산주․우두주․패강진․북원경은 옛 고구려 지역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웅주를 비롯하여 무주(광주광역시)․완산주(전북 전주)․사벌주(경북 상주)․국원경(충북 충주)․서원경(충북 청주)․금관경(경남 김해) 만이 남았다.

 

완산주의 경우 하급 관리들 일부가 신라로 도망하였지만 도독은 그대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지역 중 사벌주와 금관경은 옛 신라 지역이었고 국원경은 옛 고구려 지역이었지만 난의 중심이 된 웅주․완산주․무진주․서원경은 옛 백제영역의 핵심지역이었다. 이처럼 옛 백제 지역이 중심이 된 것은 백제 유민들의 반신라 감정과 불만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관군이 동원되어 장웅은 도동현에서 헌창군을 격파하고 위공․제능은 장웅의 군과 합세하여 삼년산성(충북 보은)과 속리산에서 헌창군을 무찔렀다. 균정 등은 성산(현재의 경상북도 성주)에서 헌창군을 격파하였다. 이렇게 각지에서 헌창군을 격파한 관군은 탄현을 넘어 공주로 밀려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김헌창은 공산성에 피신하여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적의 포위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김헌창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김헌창이 난을 일으킬 때 이 난이 성공하면 웅천주(공주)에 도읍할 것이라 공언했는 지도 알 수 없다.

 

김헌창의 난이 진압된 뒤 공주를 방문했던 최치원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비단 띠 두른 강산은 그려서 만든 것 같은데/

기쁘도다. 오늘에는 병란의 티끌이 사라졌네/

음풍(陰風)이 홀연히 놀란 파도 일으키니/

당시의 북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네.’

 

지금도 공산성 입구에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어 당시의 전운을 느끼게 하고 있다. 참혹하게 사라져간 백제의 원혼들이 깃발을 따라 하늘 위를 떠도는 듯 하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