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인릉(獻仁陵)에서
둘째 얘를 따라
그 아이 德에 헌인릉에 가게 되다.
天下를 발 아래 두고
호령하던 임금님은 오늘
파르란 잔디의 丘陵 양 옆으로
휘늘어진 赤松을 거느리고 구구만년 石像들의 泣訴를 받으며
文字로 전해오는 그들의 傳說은
모래알보다도 많은은 잔딧 잎처럼 깔려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帝王의 위엄을 지니고
감히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斷絶로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彼岸의 世界에 갇힌 채로
흘러가는 시간의 벽 속에서
내가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배달9213/개천5914/단기4349/서기2016/09/03 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태종의 어진은 전해지는 것이 없으나 태조의 용안을 많이 닮았다 함.
불에 타 버린 순조의 어진은 일부만 전해져 복원이 불가능하다 함.
전주 경기전에 있는 복원한 철종 어진
청초한 물봉선도 우리 둘째를 어서 오라 하는 듯
사위질빵도 이 가을의 상쾌한 바람에 만개했다
야생에서 처음보는 마열매가 헌인릉 뒤쪽 산책길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하얀 백당나무 열매가 가을이면 이렇게 영롱하게 익어갈 줄은...
언제 보아도 고하게 보이는 작살나무의 열매
제3대 태종(太宗, 1367∼1422년)
남다른 총명함과 재능으로 집안의 자랑이었던 이방원
태종은 1367년(공민왕 16)에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이며,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이다.
방원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태조의 사랑을 받았다.
자라면서 유학 공부에도 심취해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17세가 되던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인 집안에 학자가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원에게 특별히 학식이 높은 선생님을 붙여주고
여러 선비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방원은 글만 읽는 유생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버지 못지않은 무인의 기질과 그보다 큰 야망이 있었다.
방원의 야망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392년(공양왕 4)에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정몽주는 신진사대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이성계가 이색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같은 친명파로서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고려의 정치 개혁에도 동참했다.
그러나 역성혁명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역성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방원은 1389년(창왕 1) 10월 11일 이성계의 생일날
정몽주와 변안렬을 불러 〈하여가〉를 부르며
최종적으로 역성혁명에의 동참 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단심가〉를,
변안렬은 〈불굴가〉를 불러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래서 아버지 이성계의 반대에도 기어이 정몽주를 죽이고 만 것이다.
이 일로 방원은 이성계의 미움을 사게 되었지만,
그것이 조선 창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새 왕조를 열고자 했던 꿈은 방원의 꿈이기도 했다.
방원은 민제(閔霽)의 딸(원경왕후 민씨)과 혼인해 4남 4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 중 첫째 아들이 폐세자된 양녕대군이고,
셋째 아들이 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이다.
이 밖에 11명의 후궁에게서 8남 13녀를 두었다.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 준 태종
정몽주를 격살하고 역성혁명의 1등공신이 된 태종.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스스로 왕좌에 오르기까지 자신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 나갔으며,
형제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실록에는 1, 2차 왕자의 난 모두 이방원이 아닌 그의 정적이 먼저 난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이를 제압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방원에게 먼저 난을 일으키고자 했던 마음이 없었을까?
1차 왕자의 난만 하더라도 명백히 이방원의 쿠데타였다.
정몽주를 죽인 일로 태조의 미움을 받고 있던 방원이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의 경우도 방간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권력이 이방원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특히 방원은 정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며 세제가 아닌 세자에 책봉되는데,
이는 '적장자 무후(無後)이면 중자(衆子),
중자 무후이면 첩자(妾子) 승중(承重)'이라는 종법(宗法) 정신을 따른 것이다.
정종은 동생 방원을 왕세자로 삼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부터 왕 노릇 하는 자가 저이(儲貳, 세자)를 세우는 것은
종사를 높이고 국본(國本)을 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문(禮文)을 상고하면, 적자와 동모제(同母弟)를 세운다는 말이 있는데,
혹은 세대로 하든지 혹은 차제(次弟)로 하든지 오직 지당하게 할 뿐이었다.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한 몸으로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공경하고 근신해 다스리기를 생각한 지가 이제 2년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적사(嫡嗣)가 없고 다만 서얼이 있는데,
혼매하고 유약해 지혜롭지 못하니,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
마땅히 어진 모제(母弟)를 세워 굳건한 국본을 정해야만 하겠다.
- 《정종실록》 권 3, 정종 2년 2월 4일”
그러나 왕의 동생이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된 것이
종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신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이때 대신으로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했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로 아들을 삼겠다." 했다.
- 《정종실록》 권 3, 정종 2년 2월 4일 ”
방원이 형인 정종의 양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해서 세자로 만든 것은
태조의 적통자임을 자임하는 방원의 뜻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자가 된 방원은 곧바로 사병 혁파를 단행해 병권을 장악했다.
2차 왕자의 난 때 정종의 갑사(甲士) 몇 명이
방간의 측에 섰던 것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
갑사란 중위(中衛)인 의흥위(義興衛)에 속한 군사로
궁내에서 왕을 호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왕의 사병이라 할 수 있는 갑사 중 일부가
반란군에 참여했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방원은 정종과 공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반발하는 세력은 과감히 제거했다.
결국 병권까지 장악한 방원은 세자에 오르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정종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400년 11월의 일이었다.
이복형제들의 피를 묻히고 왕위에 오른 태종.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과감히 제거해 나갔다.
또한 정동(貞洞)에 있던 신덕왕후의 묘를 훼손하고
동소문 밖(지금의 정릉)으로 옮겼을 뿐 아니라 신덕왕후의 묘지석을
광통교(廣通橋)에 깔아 도성의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만들었다.
자신이 죽인 이복형제들의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적통을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자행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계비라도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닌가?
이것이 바로 태종이 권력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이 밖에도 태종은 왕실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재정리해
태조와 자신의 직계만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정종과 자신의 서자는 물론이고
태조의 방계인 이원계(李元桂)와 이화 역시 왕실 족보에서 제외시켰다.
자신이 죽은 후에 종친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조치한 것이다.
특히 태조의 이복동생인 이화는 조선 건국에 공이 크고,
태종이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좌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또한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외척인 민씨 형제를 몰아내는 데 앞장설 만큼 태종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런데도 그를 왕실 족보에서 제외시킨 것을 보면 태종의 과단성을 엿볼 수 있다.
태종의 철저함은 왕실 족보 정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을 만들어
적자가 아닌 사람은 아예 문과 시험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재가녀(再嫁女)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출세를 제한했다.
서얼과 재가녀 자손에 대한 금고법은 조선 시대 최고의 악법으로 꼽힌다.
내가 조선의 창업 군주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개선했다.
첫 신호탄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왕의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받은 것이었다.
고명은 중국 황제가 주변국 왕에게 주는 일종의 임명장이고,
인신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도장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에서 종주국인 중국으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개국 후 10년이 지나도록 명나라의 고명과 인신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 개국 초기 정도전의 요동 정벌 계획 등으로 인한
외교적 마찰과 명나라의 내부적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태종이 즉위한 후에야 드디어 고명과 인신을 받게 된 것이다.
태종이 스스로를 창업 군주로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외적으로 친명 노선을 강화한 태종은 1401년(태종 1)에
명나라 혜제(惠帝)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은 데 이어,
1402년(태종 2)에는 하륜(河崙)을 명나라에 보내
새로 등극한 성조(成祖)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고명과 인신을 새로 내어 줄 것을 요청했다.
명나라 성조는 조카인 혜제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미 혜제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은 조선에서
자신에게 새로 고명과 인신을 받겠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태종의 외교적 수완이 그만큼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이와 같은 대외적 안정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도 정국의 안정을 꾀하며 창업 군주다운 업적을 하나둘 이루어 나갔다.
우선 정종이 개경으로 옮긴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버지 태조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태종이
아버지 때에 설계한 한양에 수도를 다시 옮겨 온 것이다.
그는 1405년(태종 5)에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새로 지어
경복궁과 번갈아 가며 머물렀다.
경복궁은 태종이 죽인 정도전이 세우고
왕자의 난으로 희생된 방석과 방번 형제가 머물던 곳이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태종이 경복궁에 머무는 것을 싫어해서
새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어쨌든 태종이 새 궁궐을 지어 법궁(法宮)과 이궁의 양궐(兩闕) 체제가 시작되었고,
이로써 강력한 왕권의 통치 기반이 될 한양도 그에 걸맞는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태종은 이 밖에 서적을 인쇄하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불교 개혁을 단행해 국고를 충실히 하는 등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진했다.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
태종이 재위하는 동안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이었다.
그는 먼저 관제 개편을 단행해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六曹)가 분장하게 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채택했다.
육조직계제는 육조에서 각각의 담당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으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대부분의 정사를 직접 처리하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는 건국 초기에 정도전이 펼친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와는 다른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였다.
그러나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는 정도로 만족할 태종이 아니었다.
태종이 빼어 든 보다 강력한 왕권 강화 카드는 외척 세력의 견제였다.
외척은 왕이 힘이 없을 때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지만
지나치게 득세할 경우에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절대 권력을 꿈꾸었던 태종에게
외척의 득세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태종이 가장 경계한 외척은 처갓집인 여흥 민씨 집안이었다.
여흥 민씨 집안에는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를 비롯해
아들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민무휼(閔無恤), 민무회(閔無悔)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원경왕후가 누구인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좌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여장부가 아닌가?
민무구와 민무질도 방원이 왕이 되는 데 원경왕후 못지않게 공이 컸다.
태종은 바로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공신인데다 세자의 외숙이라는 지위까지 가진 민씨 집안 형제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1406년(태종 6) 8월, 태종은 느닷없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섰다.
갑작스러운 왕의 선위 발언에 놀란 백관과 종친 들이 펄쩍 뛰며 명을 거두라 아뢰었다.
선위는 불가하다는 반대 상소도 빗발쳤다.
그러자 태종은 며칠 만에 못 이기는 척 선위하겠다는 명을 철회했다.
태종의 이 선위 파동으로 화를 입게 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였다. 태종이 선위를 하겠다고 했을 때
이들은 내심으로 좋아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들의 죄를 제일 먼저 청하고 나선 사람은 영의정 부사 이화였다.
“전하께서 장차 내선(內禪)을 행하려 할 때,
온 나라 신민(臣民)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전하께서 여망(輿望)에 굽어 좇으시어 복위(復位)하신 뒤에 이르러서도,
온 나라 신민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도리어 슬프게 여겼습니다.
이는 대개 어린아이를 끼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고자 한 것이니,
불충한 자취가 소연(昭然)히 나타나 여러 사람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
이화는 상소를 통해 민무구, 민무질 등을 금장(今將)의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금장의 죄란 그들이 태종에 대해서 역심을 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 일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공신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고,
결국 1410년(태종 10)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이런 과정을 볼 때 태종의 선위 파동은
외척인 민씨 집안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의도대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죽음으로 민씨 집안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민씨 집안에 대한 태종의 견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민씨 형제의 막내인 민무회가 태종에 대해서 불충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며,
그의 형인 민무휼 역시
민무회가 불충의 죄를 지은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 두 사람 역시 1416년(태종 16)에 각각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태종은 이들 형제의 누나인 원경왕후마저 폐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왕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간신히 폐서인이 되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태종의 외척에 대한 견제는 민씨 집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태종의 다음 견제 대상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의 외척 청송 심씨 집안이었다.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 심온(沈溫)은
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1420년(세종 2), 심온은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
동생 심정(沈泟)이 상왕인 태종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평한 것이 알려져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심온 역시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고, 사약이 내려지자 자진했다.
태종은 외척뿐만 아니라 공신들도 견제했고,
그 결과 이무(李茂), 이숙번 등이 제거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태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으며,
조선 건국 초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다
정적에 대한 과감한 제거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한 태종은
창업에서 수성(守成)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의 대를 이어 수성 군주가 되어 줄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1404년(태종 4)에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왕세자에 책봉했다. 이때 양녕의 나이 11세였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자유분방한 기질을 타고난 양녕은
착실히 공부를 하기보다는 말타기, 활쏘기 등을 즐겼다.
성인이 된 후에는 여색을 즐겨 자주 궁궐 밖으로 나가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다.
완벽을 추구하는 태종에게 이런 양녕이 눈에 찰 리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왕위에 오른 것에 부담을 느낀 태종은 장자인 양녕을 쉽게 내칠 수 없었다.
그래서 양녕이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도 보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태종도 더 이상 참지 못할 일을 양녕이 저지르고 말았다.
평소 기생부터 여염집 여자까지 가리지 않고 놀아나던 양녕이
급기야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와 간통을 저지른 것이다.
양녕은 어리에게 완전히 빠져서 아예 동궁전에 데려다 놓고 매일 정을 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어리를 궁중에서 내쫓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양녕은 조금도 반성하는 빛이 없이
어리를 장인인 김한로(金漢老)의 집에 숨겨 두고 몰래 만났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노해 김한로를 귀양 보내고,
양녕을 폐위시키는 절차에 들어갔다.
1418년(태종 18), 마침내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태종이 충녕을 세자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태종은 여러 대소신료들에게
"양녕의 두 아들 중 첫째로 하여금 세자의 자리를 잇게 할 것이니
왕세손(王世孫)이라 칭할지, 왕태손(王太孫)이라 칭할지 의논해 아뢰라."라고 했다.
비록 양녕의 행실이 바르지 못해 폐하지만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또다시 깨고 싶지는 않았기에
양녕의 첫째 아들로 그 뒤를 잇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양녕의 첫째 아들은 불과 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박은(朴訔), 유정현(柳廷顯), 조말생(趙末生) 등이
양녕의 어린 아들 대신 어진 사람으로 세자를 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셋째 아들 충녕이었다.
충녕은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해 왕의 재목으로 손색이 없었다.
다만 그가 장자가 아닌 것이 마음에 걸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터였다.
태종은 원경왕후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평소 양녕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원경왕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됩니다."라며
충녕을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 태종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하지만 결국 태종은 "금일의 일은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며
충녕을 세자로 삼을 것을 명했다.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부(儲副), 세자를 어진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곧 고금의 대의요, 죄가 있으면 마땅히 폐하는 것은
오로지 국가의 항구한 법식이다.
일에는 하나의 대개(大槪)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리에 합당하도록 기대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적장자 제(禔)를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가 성년에 이르도록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에 빠졌다.
나는 그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여겨
장성해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랐으나,
나이가 스물이 넘어도 도리어 군소배(群小輩)와 사통(私通)해 불의한 짓을 자행했다.
지난해 봄에는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몇 사람이었다.
제가 이에 그 허물을 모조리 써서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상서(上書)해 스스로 뉘우치고 꾸짖는 듯했으나,
얼마 가지 아니해 또 간신 김한로의 음모에 빠져 다시 전철(前轍)을 밟았다.
내가 부자(父子)의 은의(恩誼)로써 다만 김한로만을 내쳤으나,
제는 이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노여운 마음을 품어 분연(憤然)히 상서했는데,
그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해 전혀 신자(臣子)의 뜻이 없었다.
정부, 훈신(勳臣), 육조, 대간, 문무백관이 합사(合辭)하고
소장(疏狀)에 서명(署名)해 말하기를
"세자의 행동이 종사를 이어받아 제사를 주장하거나
막중한 부탁(付託)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태조의 초창(草創)한 어려움을 우러러 생각하고,
또 종사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생각해
대소신료의 소망(所望)에 굽어 따르시어 공의(公義)로써 결단해,
세자를 폐해 외방으로 내치도록 허락하고,
종실에서 어진 자를 골라서 즉시 저이(儲貳)를 세워서 인심을 정하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충녕대군은 영명공검(英明恭儉)하고 효우온인(孝友溫仁)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으니,
진실로 저부(儲副)의 여망(輿望)에 부합합니다." 했다.
내가 부득이 제를 외방으로 내치고 충녕대군 도(祹)를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화(禍)와 복(福)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니,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증(愛憎)의 사심(私心)이 있었겠느냐?
아아! 중외(中外)의 대소신료는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으라.
- 《태종실록》 권 35, 태종 18년 6월 3일“
항간에는 양녕이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 기행을 일삼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진위를 알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양녕이 왕세자로서 적절치 못한 행실로
부왕인 태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무엇보다도 태종이 단단하게 다져 놓은 강력한 왕권을 물려받기에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았다.
결국 새 왕조를 안정시키고 번성하게 하려는 태종의 원대한 포부는
왕세자의 교체로 그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게 되었다.
수성 군주 세종의 시대를 위한 태종의 마스터 플랜
세자를 교체한 태종의 마음은 급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충녕이 수성 군주로서의 면모를 갖춰 주기를 바란 것이다.
기본적인 성품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직접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또 다른 것이었다.
결국 태종은 충녕이 세자로 책봉된 지 두 달여 만에 선위를 발표했다.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왕위를 물려주고 뒤를 봐주어야 한다는 결심이기도 했다.
태종은 그만큼 뛰어난 정치력과 결단력을 가진 왕이었다.
1418년(태종 18) 8월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것으로 태종의 소임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태종의 상왕 정치가 시작되었다.
태종은 여러 대소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상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에는 군사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할 것이다.
또 나라에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해
각각 가부를 진달(陳達)하게 해 시행하게 하고,
나도 마땅히 가부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가(可)하다.
- 《태종실록》 권 36, 태종 18년 8월 10일 ”
태종은 세종이 성군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챙겼다.
심지어 "예로부터 제왕은 자손이 번성한 것을 귀하게 여겼다."라면서
세종에게 빈(嬪)과 잉첩(媵妾)을 더 들이도록 권하기도 했다.
다만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불충의 죄를 지었으니
그의 딸인 소헌왕후를 폐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에는 반대했다.
이처럼 창업 4대 만에 해동의 요순 시대를 연 수성 군주 세종의 탄생은
태종의 철저한 마스터 플랜에 따라 이루어졌다.
태종은 할 수만 있다면 세종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계속 뒤를 봐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세종이 즉위한 지 4년 만인 1422년(세종 4)에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부터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세종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왕이었고,
그를 만들어 낸 것이 태종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제23대 순조(純祖, 1790∼1834년)
어린 왕의 즉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
순조는 1790년(정조 14) 6월 18일에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의빈 성씨가 낳은 첫째 아들 문효세자는 5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순조는 왕실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정조는 효의왕후로 하여금 순조를 아들로 삼게 하고
1800년(정조 24) 1월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휘(諱)는 공(玜)이며, 자(字)는 공보(公寶)이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죽고 그해 7월 4일 순조가 즉위했다.
당시 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였다.
따라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대표적인 공한파 김한구(金漢耉)의 딸이자
김귀주(金龜柱)의 동생으로, 정조 즉위 후에는 노론 벽파를 옹호하며 시파와 대립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정조가 고수했던 탕평의 원칙은 사라졌고,
정조와 시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장용영은 혁파되었다.
다만 임오의리에 대해서는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던 정순왕후의 뜻에 따라 정조가 천명한 바를 따랐다.
그러나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정적인 시파,
그중에서도 남인 시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맨 먼저 문제 삼은 것은 천주교였다.
이가환(李家煥)을 비롯해 정약용,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3형제 등
남인에는 유독 천주교 신봉자가 많았다.
결국 시파 제거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그 규모가 점점 확대되어 희생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당시 은언군(恩彦君)과 그의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등 왕실 일족,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 등도 천주교와 관련된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 밖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순조 재위 초기에는
공노비의 혁파, 서얼 소통의 시행 등
조선 사회 신분 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주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순조는 1802년(순조 2) 10월에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를 왕비로 맞이했다.
정조가 생전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기 위해 재간택까지 해 놓은 상태였지만,
김조순이 시파였기 때문에 노론 벽파들은 김조순의 딸을 순조비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정조가 정해 놓은 일을 쉽게 저버리지 못했다.
결국 안동 김씨 집안과의 국혼이 성사되었고,
이것이 이후 3대에 걸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순원왕후는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3명의 공주를 낳았으며,
24대 헌종은 효명세자의 아들로, 순조의 손자이다.
벽파의 몰락과 안동 김씨의 집권
1803년(순조 3)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14세가 된 순조가 친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순조의 정치력은 여전히 미약했다.
이러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것은 외척인 김조순의 집안이었다.
시파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가는 비변사를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한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노론 벽파는
'김달순(金達淳)의 옥사'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관주(金觀柱)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후원자인 정순왕후가 죽자 앞날이 걱정되었다.
순조가 벽파에 대한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김관주는 순조가 장성하기 전에
사도세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관주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조카 박종경(朴宗慶)을 만났다.
그리고 박종경에게 영조 때 사도세자의 잘못을 간했던
박치원(朴致遠)과 윤재겸(尹在謙) 두 사람을 포상하도록 주청할 것을 시켰다.
그렇게 해서 사도세자가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덕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 김관주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오른 김달순이
순조에게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면
그것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벽파의 입장이 정리될 것이라고 했다.
박종경은 이 말에 동의하고 김관주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박종경이 입궐하려는 날,
공교롭게도 박종경의 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이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되었다.
박준원은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박종경의 입궐을 막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우의정 김달순은
김관주의 계획대로 박종경이 이미 순조를 만나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순조에게 〈영남만인소〉의 주모자인 이우(李瑀)를 처벌하고
박치원과 윤재겸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조는 김달순의 주청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상의 거조 가운데 이우, 박하원(朴夏源) 등의 일은
바로 근래에 관계되는 일이니, 으레 상량(商量)해 처분해야 한다.
그리고 박치원, 윤재겸의 일에 이르러서는 오래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크게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것이니, 상세히 살펴서 조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를 일컬음)이 간언을 용납한 성덕(聖德)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흠앙하지만 조(祖), 자(子), 손(孫)은 본래 일체(一體)인데,
선조(先朝)께서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일을
내가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 포증(褒贈)할 수가 있겠는가?
경 등은 모두 선조의 구신(舊臣)들이니, 모쪼록 차례대로 상세히 진달하는 것이 옳겠다.
- 《순조실록》 권 8, 순조 6년 1월 6일 "
순조는 박치원, 윤재겸 두 사람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릴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임오의리는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평소 김달순과 정적 관계였던 김명순(金明淳)이
김달순을 비난함과 동시에 조득영(趙得永)으로 하여금 김달순을 탄핵하게 했다.
결국 김달순은 유배되었다가 그해 4월에 사사되었다.
김달순의 처형으로 김관주, 심환지(沈煥之) 등
벽파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권력에서 밀려나고 시파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벽파의 몰락과 시파의 집권은
사실상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는
또 다른 외척인 반남 박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의 협력을 얻어 권력을 장악했다.
정조 때 홍국영의 세도정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도정치 아래서는 정승을 비롯한 모든 관료들이 세도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국가의 모든 사무와 결정도 세도가를 통해야만 왕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홍국영의 경우에는 그런 세도가 불과 3년 만에 끝이 났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는 대를 이어 60년간 계속되었다.
안동 김씨는 충절과 학문을 숭상해 온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형제의 집안으로, 대대로 명문가로 명성을 이어 왔다.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좌근(金左根), 김문근(金汶根), 김병기(金炳冀)로 이어졌다.
그들은 조정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을 행사했다.
세도정치의 폐단과 농민반란
조선의 지배층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을 시작한 이래,
당쟁은 당파들 간의 지나친 반목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실정을 견제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에서는 그들의 실정을 바로잡을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왕권조차 세도가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견제 세력이 없는 권력은 결국 부패하기 마련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순조 재위 기간 동안
삼정(三政, 전정·군정·환정)이 문란해지고 지방관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세도가들은 부패한 관리들의 뇌물로 가산을 늘렸다.
이런 가운데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11년(순조 11)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대표적이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스로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고 병서를 익힌 홍경래는
뿌리 깊은 조선 조정의 서북인 차별과
부패한 관리들의 가혹한 착취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우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새롭게 성장한 부호 세력,
즉 상업과 광산업의 발달로 탄탄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과 천민들을 모아 봉기를 준비했다.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홍경래는 우군칙(禹君則), 김창시(金昌始) 등과 함께 거병해
10여 일 만에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했다.
반란군은 1812년(순조 12) 1월에 정주성을 함락하고 남진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부 토벌대의 공격에 막혀 정주성에 고립된 채 4개월가량 버티다가 섬멸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조선 시대 내내 모순된 신분 제도와 세금 제도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삶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피폐해졌다.
순조 대 이후 빈번해진 농민들의 무력봉기는
불만이 극에 달한 백성들의 저항의식이 표출된 것이었다.
순조, 안동 김씨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순조는 병중에 있었고,
김조순과 박종경이 함께 의논해 정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당시 박종경은 훈련대장으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조득영이 반남 박씨의 부정부패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자 스스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순조는 안동 김씨 세도에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827년(순조 27)에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김으로써
세자의 처가인 풍양 조씨 가문을 안동 김씨 가문의 견제 세력으로 키우고자 했다.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에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12년(순조 12)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1819년(순조 19)에 풍양 조씨 조만영(趙萬永)의 딸과 혼인했다.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집권한 효명세자는 자기 세력을 요직에 등용했다.
김노(金路), 홍기섭(洪起燮), 이인부(李寅溥), 김노경(金魯敬) 등이
권력의 핵심 기구인 비변사를 장악했다.
이들은 모두 안동 김씨 세력의 반대파였다.
또한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들이 측면에서 세자를 도왔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에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했던 효명세자가 죽으면서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세자의 측근 세력인
김노, 홍기섭, 이인부, 김노경을 4간신으로 몰아 유배시켰다.
한편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위축되었던 풍양 조씨 세력은
1832년(순조 32)에 순조가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에게
세손(훗날의 헌종)의 보도(輔導)를 맡김으로써 다시 한 번 회생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후 조인영을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가문은
헌종의 즉위와 함께 세도정치를 펼치게 되었다.
순조는 1834년(순조 34) 11월 13일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먼저 죽은 효명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왕위를 물려받으니, 그가 24대 헌종이다.
순조는 검소하고 덕이 높으며 학문을 사랑한 왕이었다.
그러나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밀려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34년의 통치 기간 동안 잦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은 고통스러웠으며,
신유박해와 농민반란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다.
능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인릉(仁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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