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산에서 본 과거와 미래
ACM직원들과의
미륵신앙이 스며있는
서해의 소금강 龍鳳山行.
드넓은 내포평야의 한복판에
충남도청을 이전한 내포신도시가
이렇게 들어설 줄을 土亭은 몰랐을 것이다.
岩陵의 향연인 峯, 峯, 峯
그 발 아래 드넓은 신도시와 평야를 내려다보며
나의 過去와 未來를 보았다.
스쳐 지나간
수많은 얼굴들, 事件들, 事物들이 떠 오르고
그리고 반가운 얼굴들, 사건들, 사물들도 보이고
하지만 서운한 얼굴들, 사건들, 사물들도 다가오더니
이내
茫茫한 地平線 너머
아지못할 얼굴, 사건, 사물들이
彌勒님의 仁慈한 얼굴 하나로 합쳐지면서
나에게 클로즈업되어 다가왔다.
다가올 것이었다.
용봉초교->용도사(+0.62km)->투석봉(+0.49=1.11km)->최고봉(+0.23=1.34km)
->노적봉(+0.36km=1.7km)->악귀봉(+0.23km=1.93km)->임간휴게소(+0.38=2.31km)
->매표소(+0.33=2.64km)->주차장(+0.2=2.84km) 3시간여 천천히
배달9213/개천5914/단기4349/서기2016/10/1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행운바위
그대 그리운 저녁 (Evening yearning for you)
용봉산(龍鳳山)
높이 381m로 큰 산은 아니며 험하지도 않으나
산 전체가 기묘한 바위와 봉우리로 이루어져 충남의 금강산이라 불릴만큼 아름답다.
정상까지 산행하는 동안 수백장의 한국화를 보듯이
시각각으로 풍경이 바뀌는 것이 용봉산의 특징이다.
이 산의 이름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듯한 형상인데서 유래했다.
남방향 중턱과 서편산록에 완만한 경사가 길게 펼쳐져 있고
요소요소에 소나무 군락이 자연발생적으로 있으며,
장군바위 등 절경과 백제 때 고찰인 용봉사와
보물 제355호인 마애석불을 비롯한 문화재가 곳곳마다 산재한다.
용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예산의 덕숭산(수덕사), 서산의 가야산, 예당 평야의 시원한 경치도 일품이다.
“서해의 지역이라 명산은 적고
기름진 넓은 들만 깔리었는데
뜻밖에도 본질을 탈바꿈하여
머리 빗고 몸 씻어 평지에 나와
뭇 봉우리 드높이 솟아오르니
가팔라 투박한 살 털어버렸네”
다산 정약용이 용봉산의 기암괴석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용봉사에 들러’(過龍鳳寺)라는 시를 남겼다.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한 용봉산(龍鳳山)은
해발 381m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산 전체가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세가 수려하다.
옹골찬 산세와 풍경이 여느 명산에 못지않아‘작은 금강산’으로 불린다.
다산이‘가팔라 투박한 살 털어버렸네’로 표현한 용봉산은
고려 시대에는 북산(北山), 조선 시대에는 팔봉산(八峰山)으로 불리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홍성 쪽은 용봉산으로, 예산 쪽은 수암산(210m)으로 바뀌었다.
이제 내포신도시의 진산인 용봉산은 사계절 절경이 뛰어나
일 년 내내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미륵신앙
개설
미륵신앙이란 지난날 석가모니불이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하여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授記)한 것을 근거로 삼고,
이를 부연하여 편찬한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이 삼부경은 각각 상생(上生)과 하생(下生)과 성불(成佛)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閻浮提:사바세계)로 내려와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미륵신앙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다.
원래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된 마이트레야는
자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한자문화권에서는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불러 왔다.
관세음보살을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 부르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미래불 미륵은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을 근거로 출현하여, 자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미륵하생경≫과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고,
지금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하여 56억7000만 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차 늘어 8만 세가 될 때
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며,
3회의 설법[龍華三會]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다시 태어날 때까지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심을 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자세가
곧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미륵보살을 믿고 받드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때는
현재 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上生],
또는 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下生]염원하며 수행하는 신행법이
인도·중국·티베트·한국·일본 등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현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이념으로,
지나치게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불교가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형태가 곧 미륵신앙이다.
미래세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불교사 속에서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
삼국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미륵신앙은 면면히 이어 오면서 많은 영향을 끼쳐 오고 있다.
우리 나라 지명이나 산이름·절이름 등에
미륵·용화·도솔 등이 자주 쓰였던 것도,
각 절에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彌勒殿)이 흔히 있는 것도,
상당수의 미륵불상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미륵신앙에 얽힌 설화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도 모두 미륵신앙의 영향이었다.
신라시대의 화랑(花郎)과 미륵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은 분명 미륵신앙의 신라적 수용의 한 특징이었다.
미륵신앙의 이상세계를 신라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미륵이 출현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미륵신앙은 주로 하층민의 희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우리 나라에서의 미륵신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그 초창기에 관한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으나,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순도(順道)를 파견하였던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
간절한 마음으로 미륵불상을 구해 왔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미륵신앙이 전개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평양에서 발견된
신묘명금동삼존입상(辛卯銘金銅三尊立像) 광배(光背) 뒷면에 있는
명문을 통하여 미륵신앙의 전개를 살필 수 있다.
여기에는 죽은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하여
미륵상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부터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미륵사·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 등의 절이 세워졌고,
미륵반가사유상의 조상(造像)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미륵불광사는 그 사적의 문맥으로 보아
성왕 때의 중요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552년(성왕 30)에는 왕이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보내 주었는데,
이 때 전해준 불상은 석가불과 미륵석불(彌勒石佛)이었다.
또한 미륵선화설화(彌勒仙花說話)에 의하면,
위덕왕 때 신라의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화신(彌勒化身)을 친견하고자
웅진(熊津)의 수원사(水源寺)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 설화는 삼국시대의 미륵신앙이 공주지방에 전래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유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634년(무왕 35) 낙성된 미륵사는 왕이 익산에 별도(別都)를 경영함에 따라
세운 삼국 제일의 규모를 가진 대가람이었다.
창건 연기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절은 왕과 왕비의 원찰(願刹)이었고, 백제 미륵신앙의 중심 사원이었다.
특히,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미륵신앙은 주로 하생신앙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신라사회에 미륵신앙이 넓게 퍼져 있었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사와 불상 등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흥륜사(興輪寺)의 주불은 미륵불이었다.
진평왕 때의 흥륜사 승려 진자는 항상 미륵상 앞에서
‘대성(大聖)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출현해 줄 것’을 발원하였다.
그는 미륵선화를 만나기 위하여 웅진 수원사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다시 경주로 돌아온 그가 미시(未尸)라는 아름다운 소년을 만나
7년 동안이나 국선(國仙)으로 받들었다는 미륵선화설화는
화랑도와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아울러, 이 설화는 미래에 상카(Sa○kha)라는 전륜성왕이 다스릴 때
미륵이 출현한다는 미륵신앙의 이상세계를
신라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시키고자 한 욕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진평왕 때 화랑으로 활동하던 김유신(金庾信)은
그의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용화란 미륵보살이 장차 성불할 용화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륵하생신앙과 관련이 있다.
화랑 출신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바 있는 죽지(竹旨)의 탄생설화에도
미륵신앙의 영향이 보인다.
곧, 죽지의 아버지 술종공(述宗公)이
죽지령(竹旨嶺)의 길을 닦는 한 거사(居士)를 죽지령의 북봉에 장사지내고
무덤 앞에 돌미륵상을 안치하였더니,
그로부터 부인이 임신하여 죽지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관련은 귀족층의 합목적적인 의도와
민중의 구원론적 이상이 합일된 데서 나타날 수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 전반적인 불교학의 발달과 함께
미륵사상에 대한 학문적 논리체계를 세우게 된다.
원효(元曉)는 ≪미륵상생경≫에 대한 종요(宗要) 및 소(疏)를,
원측(圓測)은 ≪미륵상생경약찬 彌勒上生經略贊≫을,
의적(義寂)은 ≪미륵상생경요간 彌勒上生經料簡≫을 각각 저술하였고,
특히 태현(太賢)은 미륵삼부경에 대한 고적기(古迹記) 각 1권씩을 저술하였다.
경흥(憬興)은 ≪미륵상생경소 彌勒上生經疏≫·≪미륵하생경소 彌勒下生經疏≫·
≪미륵경수의술문 彌勒經遂義述文≫·≪미륵경술찬 彌勒經述贊≫ 등의
많은 저서를 짓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의 백월산이성설화(白月山二聖說話)에서 볼 수 있듯이
≪미륵하생경≫에 나타나는 미륵 부모의 이름이 신라인의 이름에까지 쓰이고,
수행을 통하여 미륵불로 현신성도(現身成道)했다는 것은
미륵신앙 관계 경전의 폭넓은 유통을 토대로
미륵하생성불사상이 신라적으로 변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덕왕 때의 승려이자 낭도였던 월명(月明)은
<도솔가 兜率歌>를 지어 꽃을 통해서 미륵을 친히 모셔 줄 것을 기원함으로써
미륵왕생의 이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경덕왕 때의 충담(忠談)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불상에게 차공양을 올렸다.
이 삼화령의 미륵불상은 일찍이 선덕왕 때의 승려 생의(生義)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모셔 둔 것이었고,
현재까지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특히, 경덕왕 때의 진표(眞表)는 참회의 행법(行法)을 통하여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받고,
미륵보살로부터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상징하는
두 개의 목간자(木簡子)와 수기를 받은 뒤,
망신참(亡身懺)과 점찰법(占察法)을 통하여
독특한 미륵신앙을 확립시킨 대종주(大宗主)이다.
그는 미륵과 지장을 연결하고 참회와 깨달음을 통하여
새로운 정토를 여는 근본 도량으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는
미륵불상에 얽힌 설화들은 당시 사회에
미륵신앙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게 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719년(성덕왕 18)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감산사(甘山寺)를 창건하고 석미륵상을 봉안하였다.
764년(경덕왕 23) 왕이 백월산에 남사(南寺)를 세운 뒤
금당에 미륵상을 모시고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고 액호하였는데,
이것은 달달박박(怛怛朴朴)과 노힐부득(努肸夫得)이
현신성도하였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경덕왕 때의 고승 태현은 항상 용장사(茸長寺)의 미륵장륙석상을 돌았는데,
그 미륵상이 따라서 얼굴을 돌렸다는 설화,
그리고 죽은 아이를 묻었던 땅에서 미륵석상이 나왔다는 조신(調信)의 꿈 이야기 등,
미륵신앙과 관련된 설화들이 민중의 입을 통해서 유포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사회에 미륵신앙이 그만큼 널리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자칭 미륵불은
후고구려의 왕 궁예(弓裔)이다.
금관을 쓰고 가사를 입은 궁예는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여 협시보살로 삼았으며,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만들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행한다는 등
허무맹랑한 소리로 무고한 대중을 괴롭혔다.
고려시대
신라 이후 올바른 미륵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오늘날까지 미타신앙·관음신앙과 함께 하나의 전통으로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 살아남아 있다.
다만, 고려 초기 이후 특별히 미륵신앙에 관심을 가진 승려가 많지 않았고,
미륵신앙을 중요시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선종(禪宗)이나 화엄종(華嚴宗)의 세력에 밀려났으므로
신라시대와 같이 열렬함과 독특함을 함께 갖춘 미륵신앙은 다시 꽃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특수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미륵신앙은 왕실 및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갔다.
고려의 개경에는 태조 때부터 미륵사에 공신당(功臣堂)을 두고
매년 10월이면 법회를 열어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현종은 모후(母后)의 원찰로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한 뒤
법상종 승려들을 주지로 임명함으로써,
현화사를 근거로 하는 법상종은 미륵을 신봉하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 교단의 하나가 되었다.
현화사에는 대지(大智)·혜소(慧炤)·지광(智光)·영념(英念)·혜덕(慧德) 등의 고승이
차례로 머물면서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이 절에서는 현종의 발원에 의하여 매년 미륵보살회와 미타불회가 열렸다.
특히, 매년 4월 8일부터 3일 동안 개최되던 미륵보살회는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을 축원하기 위함이었다.
현화사 금당의 주불은 미륵불이었고,
특히 혜덕은 미륵보살상을 모시고 매년 승려를 모아 귀의하게 하였으며,
입적하는 순간까지도 미륵의 명호를 염하였을 정도로 미륵신앙에 독실하였다.
1070년(문종 24) 흥왕사 내 자씨전(慈氏殿)이 창건되었고,
1109년(예종 4) 4월 예종은 미륵사에서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용화회(龍華會)가 열렸는데,
1301년(충렬왕 27) 9월과 1302년 2월에 각각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왕사 무외(無畏)가 주관하는 용화회가
조계산에서 7일 동안 열리기도 하였다.
이상은 주로 왕실 주변에 있었던 미륵신앙의 사례이다.
민간에서도 이 미륵신앙은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사원으로는
금산사나 현화사 외도 관촉사(灌燭寺)·금장사(金藏寺)·도솔사(兜率寺) 등이 있었다.
광종 때 혜명(慧明)에 의하여 창건된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의 관촉사에는
1006년(목종 9)에 완성된 미륵석불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미륵불상에 얽힌 영험설화는 당시 사회에
미륵신앙이 폭넓게 유포 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992년(성종 11) 현탄(玄旦)이 창건한
용두산(龍頭山) 금장사 금당의 주불은 미륵삼존이었는데,
1310년(충선왕 2) 당시의 왕사 진감(眞鑑)과 제자 굉지(宏之)가
이 미륵삼존에 금을 다시 입히기도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 南行月日記>에 의하면,
옥구에서 장사(長沙)로 가는 길가에 도솔사가 있었고,
그곳에 미륵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하던 고려 후기의 민간에는
미륵신앙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륵불이 하생하여 교화하는 용화회에 참여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하며,
향목(香木)을 해변에 묻어 두는 풍속이 행해지고 있었음은
곧 미륵하생신앙의 유행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미륵하생신앙은 고성삼일포매향비(高城三日浦埋香碑) 및
사천매향비(泗川埋香碑)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1387년(우왕 13)에 세워진 사천매향비에 의하면
1,000인이 결계(結契)하여 발원하였고,
1309년에 세워진 삼일포매향비에 의하면
지방관 10여 명을 비롯한 존비(尊卑)가 함께 발원하고 있다.
특히, 1309년에 있었던 매향은 동해안의 9곳에 향목 1,500조를 묻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에도 또 한 차례 자칭 미륵불이 나타났다.
곧, 우왕 때의 이금(伊金)이다.
심지어는 나무에서 곡식이 열리게 할 것이라는 말까지 신봉하고 따랐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금도 역시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할 미륵불은 아니었고,
민중들을 우롱하다 처형당한 사이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도 미륵신앙은 하층민을 중심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688년(숙종 14) 요승 여환(呂還)이 일으킨 역모만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여환은 아내 원향(遠香)과 무녀인 계화(戒化), 아전이었던 정원태(鄭元泰),
그리고 황회(黃繪) 등을 규합하여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 하며
양주군 청송면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널리 퍼뜨렸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차차 황해도·강원도 등지에까지 퍼져 갔다.
여환은 “이제부터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아내를 용녀부인이라 불렀고,
그녀의 신통 변화는 가히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정씨 성을 가진 무당 계화는
정성인(鄭聖人)으로 탈바꿈하여 민중들을 유혹하였고,
“7월에 큰 비가 와서 도성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미륵 신봉자들에게 장검과 군복을 준비시켰다.
이들은 폭우로 도성이 무너질 때
대궐로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7월 13일 무장한 신도들을 양주 대전리(大田里)로 집결시켰다.
무장한 신도들을 양주에 남겨 둔 채 여환 등 10여 인은
15일에 상경하여 비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하늘은 오히려 맑기만 하였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아직은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늘이 응하지 않는다고 탄식하면서 16일 양주로 돌아갔다.
보름쯤 지나자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졌고,
여환 등 주모자 여러 사람이 처형됨으로써 이들의 허망한 꿈은 무너졌다.
여환 등은 미륵신앙과 민간신앙인 용신앙을 교묘하게 관련지었고,
또한 무녀들이 이에 적극 합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막연히 미륵이 내세하여 이상사회를 구현한다고 믿었던 듯하며,
초월적인 힘과 천변재이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호응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주로 하층민과 노비층이었다.
불안하고 어두운 사회에서 흉년과 질병 등으로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미륵하생신앙은
그들의 소박하고 막연한 기대감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근대
불교계에서 분파된 신흥종교 중
전통적인 불교의 미륵신앙을 그들의 교리 속에 절충하여 가진 경우가 있다.
주로 증산교(甑山敎) 계통과 용화교(龍華敎)가 그 대표적 예이다.
증산은 평소 제자들에게 금산사의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고 한다.
또는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 불양탑(佛養塔)이나 차지하리라.”,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들어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증산은 금산사와 미륵불에 대하여 관심을 표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의 제자들은 금산사를 차지하여
후천세계(後天世界)를 주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의도는 순수한 불교의 미륵신앙이라기보다
증산의 가르침에 의한 미륵불의 출세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증산의 제자 김형렬(金亨烈)은
한때 금산사에 미륵불교라는 한 교파를 세우고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영체(靈體)로 신봉하기도 하였다.
김형렬의 뒤를 이어
유제봉(柳濟鳳)·최선호(崔善湖) 등이 미륵계(彌勒稧)를 조직하고
금산사의 미륵불을 신앙하는 활동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서백일(徐白一)이 세운 용화교는
금산사를 본거지로 삼아 한때 그 교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1966년 교주 서백일이 피살된 뒤 그 교세는 쇠퇴했지만,
금산사 주변의 용화동(龍華洞)을 중심으로 용화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1950년대에는 강성태(姜聖泰)를 중심으로
미륵존불숭배회(彌勒尊佛崇拜會)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금산사 미륵전을 중심으로 찾아들었던
대부분의 미륵 신자들은 증산교 계통의 신흥종교 신도들이었다.
이들의 미륵신앙은 불교의 전통적인 미륵신앙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으므로,
전통적인 미륵신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종익(李鍾益)은 불교십선운동본부(佛敎十善運動本部)를,
송월주(宋月珠)는 미륵정신회(彌勒正信會)를 각각 조직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