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사랑과 야망 그리고 진관사 유래

이름없는풀뿌리 2016. 6. 28. 20:55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사랑과 야망

 

천추태후,

최근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인물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천추태후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간 여인도 드물것이다.

또 그녀의 인생이 파란만장하였던 만큼, 그녀에 대한 평가역시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과연 그녀의 행동은 어디까지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랑도 과연 죄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유교적 기준으로만 본다면 천추태후는 분명 비판받을 인물이지만,

유교적 질서가 아직 정착되기 전인 고려전기를 살다 간 인물이기에,

유교적 기준으로만 평가 할 수는 없는 인물이다.

 

 

개성시에 있는 고려궁터 만월대

 

 

 

불행과 행운의 연속

 

천추태후는 964년

고려 태조(太祖)태조의 제3비인 신정왕후 유씨 소생인 왕욱과

제6비의 소생인 선의왕후에서 태어난,

고려태조의 친손이다. 

즉 이복 남매간의 근친혼에 의해 출생한 것인데,

이것은 고려초기까지만 해도 유교적 질서가 정착되지 않았고,

또 신라시대 행해졌던 왕족의 혈통을 보존하기위한

근친혼이나 친족혼의 결혼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찍이 부모가 돌아가자

그녀의 여동생과 오빠와 함께

고려 4대 광종의 제 3비였던 대목왕후 황보(皇甫)씨에게 모두 입양되었다. 

대목왕후 역시 태조왕건의 딸이었지만

태조의 제4비인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고려시대는 딸의 경우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일이 흔하였으며,

일반인이나 귀족사회에선 아들의 경우라도

어머니의 가문의 더 높으면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다.
 
천추태후 황보씨는 친족간의 결혼풍습에 따라

14세의 나이로 고려 5대 경종(景宗)과 혼인하여 헌애왕후가 되는데,

그녀의 여동생도 함께 간택되어 헌정왕후(獻貞王后)가 되었다.

대목왕후의 입양녀였기 때문에 친남매지간이었지만,

아버지 동생의 자녀로 촌수로는 4촌지간이 된다.

 

경종은 서기 975년 21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는데, 

강력한 공포정치를 펼치며 왕권을 확립한 광종과는 달리

귀족들과의 화합을 추구하였다.

또한 979년에는 발해 유민 수만명을 받아들이는 한편

점점 더 팽창하던 거란족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경종 즉위 6년간 고려사회는

점차 안정된 상태로 접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경종은 그리 강건한 왕이 못되었다.

경종의 지나친 유화책으로 인해,

광종시절 숙청을 당하였던 귀족일파가 다시 일어나 왕실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특히 최지몽은 역술과 점성술이 능한 인물로,

2대 혜종의 어린아들을 왕위로 올리려던 왕규를 역모 혐위로 고변하여

3대 정종과 4대 광종의  즉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술버릇이 매우고약하여 광종앞에서도 술주정을 하여 유배당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다시 등극하자마자 단숨에 대광직을 오르며,

왕승이라는 사람의 역모를 고변하여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왕권이 신권에 의해 좌우지 되자,

그때부터 천추태후는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였으리라 보인다. 

결국 경종은 왕승사건이 일어난지 체 1년이 안된 981년 7월 2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경종은 죽음이 가까와지자 이제 두살인 태자대신

천추태후의 오라비가 되는 왕치에게 선양하니, 그가 고려 6대 성종임금이다.

  

따라서 천추태후는 사사롭게는 성종의 여동생이었지만,

서열상으로는 선대왕의 왕후였기 때문에,

성종임금 역시 쉽사리 어쩔 수 없는 위치에 있게된다.

이처럼 특의하게 형성된 권력을 배경으로삼아 

천추태후를 중심으로한 황보씨 세력은 정치권력의 중핵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 황보씨 외척중 한 일파로 알려진 김치양이

승려를 자칭하며 헌애왕후가 기거하고 있던 천추궁을 수시로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김치양에게 장형과 함께 유배형을 내렸다.

당시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관계가 어느정도까지 발전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성종으로서는 점차 증대하고 있는 황보씨 세력을 견제하고

또 선대왕비와 김치양 사이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추문들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인 경종이 사망한지

거의 10년이 지나 만난 사이인데 과연 불륜이라고 볼 수 있을까?

왕족이라는 족쇄만 없었다면, 고려시대의 개방적인 성풍속상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천추태후가 단지 권력만을 추구하였다면

같은 왕족을 상대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낳았을 것이다.

어쩌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첫만남은 순수하였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그녀는 한편으로는 남들보다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던 불행한 여인 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마다 계속 행운이 따랐다.
 

성종이 재위 16년만인 997년

38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되자,

천추태후의 아들이자 선대왕의 유일한 적자인 왕송에게 양위할 수 밖에 없었다.

양위를 마친 성종은 그해 10월 임종하였다.

 

스스로 태후의 자리에 오르다

 

목종(穆宗)은 왕위에 오를 당시 이미 18세였지만,

천추태후는 주저하지 않고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스스로를 대비나 대왕후가 아닌 천추태후로 부르게 하였다.

즉 경종과 성종시대 친송정책을 펴며 스스로 실추시켰던 황권을 다시 복원시키고자 하였던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경종이나 성종과는 정책방향부터 다른 강경파였다.

 

 

 

 

천추태후가 섭정을 펼치자마자 유배지에서 풀려난 김치양은,

단숨에 우복야(右僕射)자리에 오르며 문무백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천추태후가 김치양에게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킨것은,

단순히 사적인 관계를 넘어  정치적 동반자로서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치양 역시 천추태후의 강경한 대륙정책을 보조하여,

목종으로 하여금 서경(현재 평양)을 네 차례나 행차하게 하였다.

이처럼 국왕이 서경을 자주방문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륙정책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로 비춰졌다.

또 성종시대때 폐지하였던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자신의 출신지 서흥에 성수사(星宿寺)를, 궁성 서북에 시왕사(十王寺)를 짖는 등 대대적은 불교진흥책을 펼쳤다. 

이것역시 경종에서 성종으로 이어지는,

유교적 국제질서에 입각한 친송정책과는 성책방향이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복고정책도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사적인 관계를 넘지 못하였다.

천추태후는 공공연하게 김치양을 천추궁에까지 불러 들이며, 사실상 부부가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었다.
 

또 목종 재위 6년 서기 1003년에는 둘 사이에 아들도 출생하게 된다. 

물론 오늘날이라면 남편과 사별한지 10년이 지나 만난 사람과

다시 6~7년이 지난 후 자녀를 보았다면, 전혀 흠이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 그 시대의 정서를 배제하고 모든 것을 오늘날의 관점으로만 보긴 곤란하다. 

  

고려시대에도 과부의 재가는 허용되었지만,

문제는 그녀의 신분에 있었다.

보다 높은 윤리수준과 희생이 요구되는 자리에 그녀는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모든 도덕성과 체면, 왕실이 지켜야 할 규범을 뒤로하고 사랑을 선택하였기에,

고려왕조는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김치양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정축제를 하였고,

그 재물로 고려 궁궐과 맞먹은 규모인 무려 300여 간이나 되는 대저택을 지었다. 

천추태후역시 그 저택에 수시로 드나들며 김치양과 정을 쌓기 시작하였다.

 

목종은 김치양을 제거할 방법을 강구하였지만, 천추태호의 비호가 있는 더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목종은 왕위에 올랐으면서도, 어떠한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였다.
 

정사를 소흘히 함은 물론, 유행간이란 인물과 동성애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유행간은 김치양이 빠진 권력의 공백을 재빨리 차지하며, 최악의 정치난맥상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사랑은 죄가 되어갔고 그녀의 아들역시 그릇된 애정관으로 인해 동성애만 몰 두 하였다.

목종이 동성애에 빠진 이유로 후사가 없고 또 건강상태도 나빠지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으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동생이었던 헌정왕후가 경종과 사별 후

촌수로 삼촌이 되는 왕옥과 사가에서 만나 나은 왕순이 가장 강력한 정적이 되어 버렸다.

아들이 없었던 목종은 1003년 왕순을 대량원군으로 봉하는 등 양위할 뜻을 비추었고,

천추태후는 이것을 막기위해 왕순을 승려로 만든 후 양주 삼각산에 있었던 신혈사(神穴寺)로 보냈다.

그리고 왕순을 제거하기 위해 몇차례 자객까지 보냈지만,

신혈사 노승이 방안에 굴을 파고 숨겨 겨우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유일한 왕통이었던 왕순을 축출하는데 성공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더욱 확고하게 둘 사이에 나은 아이를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다.

아버지의 성을 따르던 어머니의 성을 따르던 역성혁명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그러나 1009년 서경도 순검사로 재직중이던 강조의 쿠테타에 의해 목종은 폐위되어 결국 죽음을 당하였고,

김치양과 유행간 일당역시 제거되었다.  

 

 

 

 

이렇게 권력투쟁으로 얼룩진 시대를 살아갔던 천추태후였지만

선왕대의 비였기에 유배형으로 낮추어졌다.

그리고 유베지에서도 무려 20년이나 더 살았다. 

993년 부터 23년간 특히 가장 극심했던 1010년 2차와

1018년의 3차 거란족의 침입을 모두 막으며

국가를 수호한  현종의 활약상을 모두 지켜본 후,

1029년 만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아마 드라마의 전개상 그녀의 20년간 유배생활동안에도,

거란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헌신한 것으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내용의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며, 역사적 고증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천추태후는 분명 우리나라역사에 있어 독보적인 여제이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이 어디까지 용서될 수 있는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일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백성들을 보살피고 국정을 책임져야 할 최고통수권자의 자리에서,

권력을 단지 사랑의 보호수단정도로만 이용한 것은 분명 문제있는 행동이라고 본다.

 

 

 

진관사의 유래

고려 제 5대 임금 경종이 승하하자 자매왕비였던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20대의 꽃 같은 젊은 나이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뛰어난 미모와 정결한 성격으로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헌정왕후는

 성안(개경) 10대 사찰의 하나인 왕륜사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관음기도를 하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부처님께 의지하여 살아오기 어느덧 10년.

헌정왕후는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의 분신인

아들이나 딸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 무슨 망상인가. 아냐, 양자라도 하나들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맴돌던 어느 날 밤,

헌정왕후는 송악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는데

온 장안이 소변으로 인해 홍수가 지는 꿈을 꾸었다.


하도 이상하여 복술가를 찾아가 물었다.
왕비의 말을 다 들은 복술가는 얼른 일어나 9번 절을 하더니
「매우 길몽입니다.

 아기를 낳으면 나라를 통치할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고 말했다.


「나는 홀로 사는 몸인데 그 무슨 망발인가.」
「아니옵니다. 이는 천지신명의 뜻이오니

거룩한 아드님을 낳을 징조입니다. 」


「그런말 두 번 다시 입밖에 내지도 말게나.」


그 무렵, 경종의 숙부이자 헌정왕후의 숙부인

(고려왕실의 친족혼인 풍속 때문임) 안종은

 집 가까이 절에서 홀로 지내는 헌종왕후에게

간혹 선물을 보내는가 하면 집으로 초대하여 위로하곤 했다.
숙부의 친절에 감사하던 헌정왕후도 존경하는 마음에 호의를 품게 돼

 손수 수놓은 비단병풍을 답례 선물로 보냈다.


이러는 동안 두 사람은 정을 나누게 됐고

헌정왕후는 홀몸이 아니었다.


헌정왕후는 걱정 끝에 안종을 찾아가 송악산에서 소변보던 꿈과

 아기를 가질 무렵 관음보살께서 맑은 구슬을 주시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멀리 섬으로 도망가 아기를 낳겠다고 상의했다.


「내 어찌 왕후를 멀리 보내고 살 수 있겠소.

 더욱이 아기는 어떻게 하고‥‥」


이런 이야기를 엿들은 안종의 부인은 두 사람을 괘씸히 생각하여

 안종의 방앞에 실나무를 쌓고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소문은 자자했고

이 사실을 안 성종(헌종·헌애왕후의 오빠)은

안종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헌정왕후는 그 자리서 실신하여 가마에 실려오다 산기가 있어

그날 밤 옥동자를 분만하니 그가 바로 후일의 현종 순이다.

 

헌정왕후는 아기를 분만하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편 헌애왕후는 2살된 왕자 송을 기르면서

별궁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본래성품이 포악하고 음탕하여 동생 헌정왕후를 시기 질투하던 그녀는

 외간남자들에게 눈을 돌리던차

간교하기로 소문난 외사촌 김치양과 정을 통하게 됐다.


왕자 송이 18세 되던 해 성종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그 뒤를 이은 이가 바로 목종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니 헌애왕후는 정사를 돌보면서 천추단에 거처하니

「천추태후」라 불리었다.


태후와 놀아나던 김치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호화로움을 누리면서 부정을 저질렀다.


목종은 김치양을 내쫓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하여 실행치 못했다.


어느 날 태후는 거리낌 없이 김치양의 아기를 낳고는

 장차 왕위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태후는 김치양과 모의하여 헌정왕후가 남은 대량원군(순)을

궁중에서 내쫓기로 했다.
이때 순의 나이 12세였다.


매우 총명하고 영특한 순은 백모 태후가시기하는 눈치를 채고

번화로운 궁중으로 떠나 절에 가서 수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궁중에 들어와 설법하는 스님을 따라 개경남쪽에 있는

 숭효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입산했다.


대량군 스님이 남달리 총명하여 10년 공부를 3년에 마쳤다는 소문이 나돌자

태후는 늘 감시했고 자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직감 있는 스님의 경계로 여러 차례 화를 면한 대량군은

 그곳을 떠나 삼각산의 조그만 암자로 들어갔다.


암자의 노스님 진관대사는 대량 군이 옳은 시 한수를 듣는 순간

그가 용성에 오를 큰 인물임을 알았다.


대량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침대를 놓아 대량군을 기르게 했다.


대량군이 3년간의 땅굴생활을 하는 동안 조정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웠다.
왕은 궁중이 어수선하여 심장병에 걸렸고

이틈을 타서 김치양은 역적을 모의했다.


그러나 강보가 먼저 변란을 일으켰다.
그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군을 새 임금으로 모시기로 결심했다.
대량군 나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 임금 맞이하니 신천지 열리고 새 일월이 밝아오네.」
3현 6각의 풍악소리가 울리면서 오색 깃발이 하늘을 뒤덮는 가운데

 금·은·칠보로 장식된 8인교 가마가 산문밖에 멈췄다.


스님들은 정중하게 행차를 맞이했다.


「대군마마! 대위를 이으시라는 어명 받잡고 모시러 왔사옵니다.」


「내 운명 기박하여 세상을 등진 몸,

일생을 조용히 보낼 것이니 어서 물러들 가시오.」


대량군은 거듭 간청하는 사신의 뜻과 진관대사의 권유에

땅굴에서 나와 대궐로 향했다.


대군은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용이라 하고 절이름을

 신혈사라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자신의 심기를 달래며 거닐던 신혈사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스님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명했다.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