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고려사 열전 나세(羅世, 1320-1397)기록

이름없는풀뿌리 2017. 9. 13. 20:08

고려사열전 나세[ 羅世 ]

 

나세(羅世)는 본래 원나라 사람이다. 공민왕 때 장수들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한 공을 기려 이등공신으로 녹훈되었고 여러 번 옮겨 판도판서(版圖判書)가 되었다. 교동(喬桐) 만호로 있을 때 왜적이 침구해오자 나세가 도망쳐오니 왕이 노해 순위부(巡衛府)에 수감시켰다.

 

우왕 초에는 전라도 상원수(上元帥) 겸 도안무사(都安撫使)가 되었는데 당시 왜적의 배 50여 척이 웅연(熊淵 :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곰소)에 배를 대고 적현(狄峴)을 넘어 부령현(扶寧縣 :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을 노략질하면서 동진교(東津橋 : 지금의 동진강에 있던 다리)를 부숴 아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나세는 변안열(邊安烈)·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밤에 다리를 놓고 군사를 나누어 왜적을 공격했다. 적의 보병과 기병 천여 명이 행안산(幸安山 :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자, 아군이 사방에서 그들을 공격해 적군은 패주했고 드디어 대파했다. 곧이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는데 왜적이 강화(江華)를 침구하자 나세는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제가 문학으로 나라를 빛낼 수도 없으며, 고관의 후예라서 호의호식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늘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생각해 왔으니 바라옵건대 군사를 지휘해 강화에 들어가서 왜적을 격퇴하게 허락하소서.”

 

우왕은 그 뜻을 장하게 여겨 대궐에서 기르는 말 두 필을 내려주고 그 휘하 장수들에게 열 필을 나누어 주었으며, 나세는 조사민·이원계(李元桂)·강영(康永)·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왜적을 격퇴하였다. 왜적의 배 50척이 다시 강화를 침구해 부사(府使)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천여 명을 포로로 하였다. 또한 수원(水原)을 침구하자 나세는 원수 양백연과 함께 전함 50척을 이끌고 그들을 격퇴하였다. 나세가 강화 땅을 지나가는데 어떤 아낙네가 물가에 숨은 채로 한 집을 가리키며, 적의 첩자가 저곳에 들어갔다고 일러주었다. 나세가 급히 달려가서 포위한 후 불을 질러 왜적 스물아홉 명을 죽였다.

 

왜적의 배 45척이 신주(信州 : 지금의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옹진(瓮津 : 지금의 황해남도 옹진군)·문화(文化 : 지금의 황해남도 신천군 문화) 등의 현을 침구해 오자 나세는 원수 조인벽(趙仁璧)·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공격하여 여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퇴각한 후, 적의 세력이 너무 강하고 아군은 지쳐서 승리하기가 힘드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왜적이 다시 신주·문화·안악(安岳 : 지금의 황해남도 안악군)·봉주(鳳州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를 침구하자 나세는 심덕부·양백익(梁伯益)·박보로(朴普老)와 함께 공격하였으나 패했다.

 

이후 연안군(延安君)으로 봉해지고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었는데 왜적이 연안부(延安府 :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를 침구하자 나세는 김해군(金海君) 김유(金庾)와 함께 전함 50여 척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했다. 또 김유와 함께 용강현(龍岡縣 : 지금의 남포직할시 용강군) 목관포(木串浦)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배 두 척을 빼앗고 적을 몰살시켰다. 또 심덕부·최무선(崔茂宣) 등과 함께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했는데, 이때 적선 5백 척이 진포(鎭浦 : 금강입구,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군 성산면) 어구로 들어와 정박하고는 군사를 나누어 일방 수비하는 한편 상륙해 각 고을로 흩어져 들어갔다. 적들이 약탈을 자행하니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으며 곡식을 자기들 배로 옮기면서 흘린 쌀이 한 자나 되게 쌓였다. 나세 등이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만든 화포(火砲)를 쏘아1) 적선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렸고, 배를 지키던 적 대다수는 불에 타 죽었으며, 바다로 뛰어들어 죽은 자도 많았다.

 

나세 등이 진무를 보내어 승전보를 올리자 우왕이 기뻐하며 진무에게 각각 은 50냥씩을 하사했으며 백관들은 축하의 말을 올렸다. 아군이 개선하자 잡희를 크게 벌여 환영했으며, 나세 등에게 각각 금 50냥씩을 하사하고 비장(裨將) 정룡(鄭龍)·윤송(尹松)·최칠석(崔七夕)2) 등에게는 각각 은 50냥씩을 하사했다. 뒤에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는데 왜적이 축산도(丑山島)3)를 침구하자 우왕이 나세를 보내어 공격하게 했다. 나세가 바로 가지 않자 우왕이 노해 광주(廣州)의 옥에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석방하였다.

 

각주

1 화포를 쏘아 : 고려 말에 이르러 왜구에 대비한 군사조직의 정비, 강화와 아울러 신무기로서의 화약·화기를 사용해 극성기의 왜구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고려가 일본 원정 당시 원의 군사가 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목격하고 왜구 격퇴를 위해 독자적인 화약 제조에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노력의 결과 최무선이 최초로 화약 제조에 성공하고 그 후 대장군(大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火石砲) 등 20여 종에 가까운 화기가 만들어졌으며 우왕 4년에는 화통방사군(火放射軍)이라는 전문부대가 편성되어 왜구 토벌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으며 나세의 진포싸움과 이후 벌어진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왜구의 침입은 급감하게 된다.

2 최칠석(?~1394) :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친은 상산부원군(尙山府院君) 최선능(崔善能)이다. 고려 우왕~조선 태조 때 해도 만호(海道萬戶), 밀직부사(密直副使), 원수(元帥)를 역임하였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경기우도 수군절제사(京畿右道水軍節制使)를 지내다 군중에서 사망하였다. 아들은 최억룡(崔億龍)과 최만룡(崔萬龍)이다.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5월 신유일, 최칠석 졸기.

3 축산도 :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그 모양이 소[牛]를 닮았다고 해서 축산이라 불리기 됐다. 우왕 7년(1381) 7월에는 축산도에 상륙한 왜구가 안동을 거쳐 보주(甫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시) 보문사(普門社)를 위협하자 여기에 소장한 실록을 내지를 옮기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축산도는 왜구의 내륙 침략 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우왕 8년 정지(鄭地)가 이끈 고려 수군이 관음포(觀音浦)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듬해 10월 윤가관(尹可觀)이 축산도에 선졸(船卒)을 둠으로 축산도를 거점으로 한 왜구 침입은 근절되었다.

 

○ 羅世, 本元人也. 恭愍朝, 與諸將擊走紅賊, 錄功爲二等, 累轉版圖判書. 爲喬桐萬戶, 倭入寇, 世逃還, 王怒命囚巡衛府. 辛禑初, 爲全羅道上元帥兼都安撫使, 倭五十餘艘, 來泊熊淵, 踰狄峴, 寇扶寧縣, 毁東津橋, 使我兵不得進. 世與邊安烈·趙思敏等, 夜築橋, 分兵擊之. 賊步騎千餘, 登幸安山, 我兵四面攻之, 賊徒奔潰, 遂大破之. 尋判開城府事, 時倭寇江華, 世上書曰, “臣非有文章, 可以華國, 又非衣冠之後, 得處肉食之列. 常思効死, 以報萬一, 請提兵入江華, 擊走倭賊.” 禑壯其志, 賜內廐馬二匹, 又賜十匹, 分與麾下, 世與思敏·李元桂·康永·朴壽年等, 擊却之. 倭五十艘, 復寇江華, 殺府使 金仁貴, 虜千餘人. 又寇水原, 世與元帥 楊伯淵, 率戰艦五十艘, 擊走之. 世過江華境, 有一婦, 匿水滸指示一家曰, “賊諜入彼.” 世疾趍, 圍而火之, 殺賊二十九人.

倭四十五艘, 寇信州·瓮津·文化等縣, 世與元帥 趙仁璧·沈德符等擊之, 斬數級. 不克而退, 報于朝曰, “賊勢甚强, 我師疲弱, 難以制勝, 請遣軍助之.” 倭又寇信州·文化·安岳·鳳州, 世與德符·梁伯益·朴普老擊之敗績. 封延安君, 爲海道元帥.

倭寇延安府, 世與金海君 金庾, 以戰艦五十餘艘, 往擊之. 又與庾, 擊倭于龍岡縣木串浦, 獲二艘盡殺之. 又與德符·崔茂宣等領戰艦百艘, 追捕倭賊, 時賊五百艘, 入鎭浦口維舶, 分兵守之, 登岸散入州郡. 恣行焚掠, 屍蔽山野, 轉穀于其舶, 米棄地厚尺. 世等至鎭浦, 用茂宣所製火炮, 焚其船, 烟焰漲天, 賊守船者, 燒死殆盡, 赴海死者亦衆. 世等遣鎭撫獻捷, 禑喜賜鎭撫銀各五十兩, 百官陳賀. 及還, 大設雜戱迎之, 賜世等金各五十兩, 裨將 鄭龍·尹松·崔七夕等, 銀各五十兩.

後拜門下評理, 倭寇丑山島, 禑命世往擊之. 世不卽行, 禑怒繫廣州獄, 尋釋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