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이 중국에 들어 옴[佛法入中國]
【안】 여기서부터 “부처 섬기기를 극진히 할수록 연대는 단촉(短促)되었다[事佛甚謹年代尤促].”까지는 진씨(眞氏 덕수(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설을 인용한 것이다.
한(漢)나라 명제(明帝)는, 인도[西域]에 신(神)이 있어 그 이름이 불(佛)이라는 말을 듣고 사신(使臣)을 천축(天竺)에 보내어 그 글과 중[沙門]을 얻어 들여왔는데 그 글은 대개 허무(虛無)를 으뜸으로 삼고, 자비(慈悲)와 살생(殺生)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겨 말하기를,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아 다시 형체(形體)를 받아 태어나는데, 살아 있을 때에 선(善)한 일을 하고 악(惡)한 일을 한 바에 따라, 다 보응(報應)이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수련(修鍊)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굉원 광활[宏濶]하고 수승 방대[勝大]한 말을 잘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였는데, 그 도(道)에 정통(精通)한 사람을 사문(沙門)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중국에 그 법이 전하여져 그 형상(形像)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런데 왕공(王公) 귀인(貴人)으로는 유독 초왕(楚王) 영(英)이 가장 먼저 좋아하였다.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의 호)이 말하기를,
“신(臣)은 상고하건대, 이것은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온 시초입니다. 이때에 얻어온 것은 불경(佛經) 42장인데 난대(蘭臺) 석실(石室)에 감추어 두었을 뿐이었고, 얻어온 불상(佛像)은 청량대(淸凉臺)와 현절릉(顯節陵)에 그림으로 그렸을 뿐이었습니다.
초왕 영(英)이 비록 불교를 좋아하였으나 재계[齋]를 정결하게 하여 제사를 지내는 데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은 이내 죄에 걸려 목 잘려 죽었고, 복리의 보답을 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한(漢)의 영제(靈帝)가 처음으로 궁중(宮中)에 사당(祠堂)을 세웠고, 위진(魏晉) 이후로 그 법이 점점 성하여, 오호(五胡)의 임금으로서, 이를테면, 석늑(石勒)이 불도징(佛圖澄)에게, 부견(符堅)이 도안(道安)에게, 요흥(姚興)이 구마라습(鳩摩羅什)에게 이따금 스승의 예(禮)로써 받들었으며, 원위(元魏)의 효문제(孝文帝)는 현명한 임금이라고 칭하지만, 역시 절에 나아가 재(齋)를 올리고 설법을 들었으니, 이때부터 소량(蕭梁)에 이르기까지는 그 성(盛)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원은 영평(永平 후한명제(後漢明帝)의 연호) 연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명제(明帝)를 책(責)하지 않고 누구를 책하겠습니까?”
하였다.
佛法入中國 按此以下至事佛甚謹年代尤促。引用眞氏大學衍義說。
漢明帝聞西域有神。其名曰佛。遣使之天竺。得其書及沙門以來。其書大抵以虛無爲宗。貴慈悲不殺。以爲人死精神不滅。隨復受形。生時所作善惡。皆有報應。故所貴修鍊。以至爲佛。善爲宏闊勝大之言。以勸誘愚俗。精於其道者。號曰沙門。於是中國始傳其術。圖其形像。而王公貴人。獨楚王英最先好之。
眞西山曰。臣按此佛法入中國之始也。是時所得者。佛經四十二章。緘之蘭臺石室而已。所得之像。繪之淸涼臺顯節陵而已。楚王英雖好之。然不過潔齋修祀而已。英尋以罪誅。不聞福利之報。其後靈帝始立祠於宮中。魏晉以後。其法寢盛。而五胡之君。若石勒之於佛圖澄。符堅之於道安。姚興之於鳩摩羅什。往往尊以師禮。元魏孝文。號爲賢主。亦幸其寺。修齋聽講。自是至于蕭梁。其盛極矣。而其源則自永平始。非明帝之責而誰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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