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13)정도전 삼봉집 제5권 / 불씨잡변(佛氏雜辨) /불씨를 섬겨 화를 얻음[事佛得禍]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5. 05:15

불씨를 섬겨 화를 얻음[事佛得禍]

 

양무제(梁武帝)는 중대통(中大通 양무제의 연호) 원년(529) 9월에 동태사(同泰寺)에 나아가 사부(四部) 대중을 모아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어복(御服)을 벗고 법의(法衣)를 걸친 후 청정대사(淸淨大捨 몸을 바쳐 희사함)를 행하니 모든 신하들이 돈 1억만(一億萬)을 가지고 삼보(三寶 불ㆍ법ㆍ승(佛 法 僧))앞에 빌고 황제의 몸을 굽혀 속죄하는데, 중들은 그대로 절을 받으면서 말 한마디 없었고, 임금은 궁궐로 돌아왔다. 무제(武帝)가 천감(天監 양무제의 처음 연호) 연간으로부터 석씨(釋氏)의 법을 써서 오래도록 재계하여 고기를 먹지 않고 하루에 한 끼니만 먹는 것도 나물국에 거친 밥뿐이요, 탑을 많이 쌓아 공사(公私)간에 비용을 많이 소비하였다.

이때에 왕후(王侯)와 그의 자제들이 교만하고 음란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임금은 늙어서 정치에 권태를 느끼고 또 부처의 계율에만 오로지 정신을 써서, 매양 중죄(重罪)를 처단할 때에는 종일토록 괴로워하였고, 혹은 반역을 꾀하는 일이 발각되어도 역시 울면서 용서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후(王侯)들은 더욱 횡포(橫暴)하여 혹은 대낮에 도시의 거리에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혹은 어두운 밤에 공공연히 약탈을 자행하기도 하며, 죄가 있어 망명하기 위해 공주(公主)의 집에 숨어 있으면 관리들이 감히 수사하여 잡지를 못하였으니, 임금은 그 폐단을 잘 알면서도 자애(慈愛)에 빠져 금하지 못하였다.

중대동(中大同 양무제의 연호) 원년(546) 3월 경술(庚戌)에 임금이 동태사(同泰寺)에 나아가 절집에 머물면서 《삼혜경(三慧經)》을 강(講)하기 시작하여 4월 병술(丙戌)에야 강을 끝마쳤다. 그런데 이날 밤에 동태사(同泰寺)의 탑(塔)이 화재를 당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마귀 때문이니, 마땅히 불사(佛事)를 크게 하리라.”

하고,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도(道)가 높을수록 마귀가 성(盛)하고, 선(善)을 행함에는 장애가 생기나니, 마땅히 토목공사를 크게 하여 전날의 배로 증가시키리라.”

하고, 드디어 12층탑을 기공하여 완성되어 갈 무렵에 후경(侯景)의 난(亂)을 만나 중지되었다.

대성(臺城 양나라의 서울)이 함락됨에 이르러서 임금을 동태사에 가두어 두었는데, 임금이 목이 말라 그 절 중에게 꿀물을 요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굶어 죽었다.

진서산(眞西山)이 말하기를,

 

“위진(魏晉) 이후의 임금 가운데에 부처 섬기기를 양무제(梁武帝)만큼 성하게 한 사람은 없었다. 대저 만승(萬乘)의 존귀(尊貴)함으로서 스스로 그 몸을 버려 부처의 시역(厮役) 노릇을 했으니 그 비열하고 아첨함이 극심하다 할 것이다. 채소와 면식(麵食)으로 종묘의 제사지내는 생뢰(牲牢)와 바꾸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명도(冥道)에 누(累)됨이 있을까 두려워함이요, 직관(織官)이 비단에 무늬를 놓는데, 사람이나 금수(禽獸)의 형상을 놓는 것까지를 금하였으니, 그것은 가위로 재단할 때에 인(仁)ㆍ서(恕)에 어그러짐이 있을까 두려워함이며, 신하가 반역을 꾀하여도 용서하여 죽이지 않고, 백주에 도둑질을 자행하여도 차마 금하지 못했으니, 이 모두가 부처의 계율을 미루어 넓히려고 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대개 논(論)하건대,

신선(神仙)을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한나라 무제가 얻었을 것이요, 부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양나라 무제가 얻었을 것인데 두 임금이 얻지 못하였음을 볼 때 그 구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비록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오랑캐의 허황한 교(敎)로는 중국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고 산림(山林)에 도피해 사는 행동으로는 국가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구할 수 없는 것이랴! 한무제는 신선을 탐하다가 마침내 국고(國庫)가 텅 비도록 소모하는 화(禍)를 입고, 양무제는 부처에게 아첨하다가 마침내 위망(危亡)의 액(厄)을 초래하였은즉, 탐하고 아첨하여도 도움됨이 없는 것이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또 그 몸을 버려가면서 부처를 섬기는 것은 어찌 진세(塵世)의 시끄러움이 싫어 공적(空寂)함을 즐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과연 저 가유(迦維 가비라위(迦毗羅衛) 석가가 탄생한 땅)의 맏아들[嫡嗣]처럼 임금 자리를 헌신짝같이 보고 옷을 걷어붙이고 갈 수 있었다면 거의 참으로 부처를 배우는 사람이라 하겠지만, 특히 양무제는 이미 찬탈(簒奪)하고 시역(弑逆)하여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또 공벌(攻伐)로써 남의 땅을 침범했으며, 급기야 늘그막에 그의 태자(太子) 소통(蕭統) 같은 자효(慈孝)한 아들을 끝내 의심하고 못마땅하게 여겨, 죽을 때까지 탐심에 연연하기가 이러하였으니, 또 어찌 참으로 그 몸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옷을 바꿔 입고 수도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부도(浮屠)의 복을 맞이할 수 있다 하겠으나, 돈을 바쳐 속죄하고 돌아와서는 천자(天子)의 귀함을 잃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부처에게 아첨한다기보다 사실은 부처를 속이는 것이라 하겠다.

또 그 비단의 무늬는 실물이 아닌 데도, 오히려 차마 해치지 못하면서, 저 어리석은 백성의 목숨을 어찌 조수(鳥獸)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해마다 정벌하여 죽인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산을 만들고 둑을 쌓아 적의 지경(地境)으로 물을 대어 수만 명의 적군을 물고기로 만들면서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비록 조그마한 인(仁)의 이름은 있으나 실은 크게 불인(不仁)한 것이다.

또 나라가 존립(存立)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강(綱)과 상(常)인데 무제(武帝)는 여러 아들에게 변방을 다 맡기면서 예의(禮儀)를 가르침이 없었으므로, 정덕(正德)은 효경(梟獍)의 자질로 처음에는 아버지를 버리고 적국으로 달아났다가 마침내는 적병을 이끌고 들어와 국가를 전복시켰으며, 윤(綸 무제(武帝)의 여섯째 아들)이나 역(繹 무제(武帝)의 일곱째 아들 양원제(梁元帝))은 혹은 큰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거나, 혹은 상유(上游)에 진(陣)을 치고 있었는데, 군부(君父)가 난을 당하고 있었건만 ‘피를 뿌리고 분연히 싸울 뜻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형제끼리 서로 원수가 되고, 숙질 사이에 서로 싸워 인륜의 악이 극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다름아니라 무제(武帝)의 배운 바가 석씨(釋氏)였기 때문이다.

천륜(天倫)을 가합(假合)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하는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아들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아, 30~40년 동안에 풍속은 모두 무너지고 강상(綱常)은 땅에 떨어졌으니 이같이 극에 이르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로 하여금 요(堯)ㆍ순(舜)ㆍ삼왕(三王 하(夏) 나라 우(禹)와, 은나라 탕(湯)과 주(周)나라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을 말함)을 스승으로 삼아 방외(方外)의 교(敎)를 섞지 않음은 물론, 반드시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삼고, 반드시 예법을 숭상하고, 반드시 형정(刑政)을 밝히게 했다면 어찌 이같음이 있으랴?”

하였다.

 

 

事佛得禍

梁武帝中大通元年九月。幸同泰寺。設四部無遮大會。釋御服持法衣。行淸淨大捨。群臣以錢一億萬。祈白三寶。奉贖皇帝。僧衆默然。上還內。上自天監中用釋氏法。長齋斷肉。日止一食。惟菜羹糲飯而已。多造塔。公私費損。時王侯子弟。多驕淫不法。上年老。厭於萬機。又專精佛戒。每斷重罪。則終日不懌。或謀叛逆事覺。亦泣而宥之。由是王侯益橫。或白晝殺人於都街。或暮夜公行剽掠。有罪亡命。匿於主家。有司不敢搜捕。上深知其弊。而溺於慈愛。不能禁也。中大同元年三月庚戌。上幸同泰寺。遂停寺省。講三慧經。夏四月丙戌解講。是夜同泰寺浮屠災。上曰。此魔也。宜廣爲法事。乃下詔曰。道高魔盛。行善障生。當窮玆土木。倍增往日。遂起十二層浮屠將成。値侯景亂而止。及陷臺城。囚上於同泰寺。上口燥乾。求蜜於寺僧不得。竟以餓死。

 

眞西山曰。魏晉以後。人主之事佛。未有如梁武之盛者也。夫以萬乘之尊。而自捨其身。爲佛之廝役。其可謂卑佞之極矣。以蔬茹麪食。易宗廟之牲牢。恐其有累冥道也。織官文錦。有爲人類禽獸之形者亦禁之。恐其裁翦。有乖仁恕。臣下雖謀叛逆。赦而不誅。剽盜肆行。亦不忍禁。凡以推廣佛戒也。蓋嘗論之。使仙而可求則漢武得之矣。使佛而可求則梁武得之矣。以二君而無得焉。則知其不可求而得也明矣。縱求而得之。戎夷荒幻之敎。不可以治華夏。山林枯槁之行。不可以治國家。況不可求也。漢武貪仙而終致虛耗之禍。梁武佞佛而卒召危亡之厄。則貪佞之無補又明矣。且其捨身事佛。豈非厭塵囂而樂空寂乎。使其能若迦維之嫡嗣視王位如弊屣。褰裳而去之。庶乎爲眞學佛者。而帝也旣以篡弑取人之國。又以攻伐侵人之境。及其老也。雖慈孝如太子統。一涉疑似。忌之而至死。貪戀如此。又豈眞能捨者乎。釋服入道。旣可徼浮屠之福。奉金贖還。又不失天子之貴。是名雖佞佛。而實以誑佛也。且其織文之非實。猶不忍戕之。彼蚩蚩之氓。性命豈能鳥獸比。而連年征伐。所殺不可勝計。浮山築堰。浸灌敵境。擧數萬衆而魚鼈之。曾不小恤。是名雖小仁。而實則大不仁也。且國所與立。惟綱與常。帝於諸子。皆任以藩維。而無禮義之訓。故正德以梟獍之資。始捨父而奔敵國。終引賊以覆宗祊。若綸若繹。或摠雄師。或鎭上游。當君父在亂。不聞有灑血投袂之意。方且弟兄相仇。叔姪交兵。極人倫之惡。此無佗。帝之所學者釋氏也。以天倫爲假合。故臣不君其君。子不父其父。三四十年之間。風俗淪胥。綱常掃地。宜其致此極也。使其以堯舜三王爲師。不雜以方外之敎。必本仁義。必尙禮法。必明政刑。顧安有是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