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11)정도전 삼봉집 제5권 / 불씨잡변(佛氏雜辨) /유가와 불가와의 같고 다른 변[儒釋同異之辨]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5. 05:12

유가와 불가와의 같고 다른 변[儒釋同異之辨]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유가(儒家)와 석씨(釋氏)의 도(道)는 문자의 구절(句節) 구절은 같으나 일[事]의 내용은 다르다.”

하였다. 이제 또 이로써 널리 미루어 보면, 우리(유가(儒家))가 허(虛)라고 하고, 저들(불가(佛家))도 허라 하고, 우리가 적(寂)이라 하고 저들도 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허(虛)는 허하되 있는 것이요, 저들의 허는 허하여 없는 것이며, 우리의 적(寂)은 적하되 느끼는 것이요, 저들의 적은 적하여 그만 끝나는 것이다.

우리는 지(知)와 행(行)을 말하고, 저들은 오(悟)와 수(修)를 말한다. 우리의 지는 만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갖추어 있음을 아는 것이요, 저들의 오(悟)는 이 마음이 본래 텅 비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며, 우리의 행(行)은 만물의 이치를 따라 행하여 잘못되거나 빠뜨림이 없는 것이요, 저들의 수(修)란 만물을 끊어 버려 내 마음에 누(累)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고, 저들은 마음이 만법을 낳는다고 하니, 이른바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원래 이 이(理)가 있어 바야흐로 이(理)가 정(靜)할 때에는 지극히 고요하여 이 이치의 체(體 본체)가 갖추어지고, 이(理)가 동(動)하게 되어서는 느끼고 통하여 이 이치의 용(用 작용)을 행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아도 감(感)하여 천하의 모든 연고[故]를 드디어 통한다.”

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만법(萬法)을 낳는다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본래 이 법이 없는 것인데 외계(外界)를 대한 후에 법이 생긴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법(法)이 정(靜)할 때에는 이 마음이 머물러 있는 곳이 없고, 법(法)이 동(動)하게 되어서는 만나는 바의 경계(境界)에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그가 말하기를,

 

 

“주착(住著)하는 바가 없음에 응하여 그 마음이 생긴다.”

 

【안】 이 말은 《반야경(般若經)》에서 나온 것으로, 주착하는 바가 없음에 응한다는 것은 안팎이 전연 없으므로 가운데가 허하여 물(物)이 없고, 선악 시비를 가슴 가운데에 두지 않아서 그 마음에 생기는 것은 주착함이 없는 마음으로 밖에 응하여 물(物)에 누(累)되지 않는다는 것이니 사씨(謝氏)가 《논어》의 ‘무적무막(無敵無莫)’이란 글을 해석할 때에 이 말을 인용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一切)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일체의 법도 사라진다.”

【안】 기신론(起信論)에서 나왔다.

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는 이(理)가 진실로 있다고 하는데, 저들은 법(法)이 인연을 따라 일어난다 하니, 어쩌면 그 말은 같은데 일은 이렇게도 다른가?

우리는,

 

“내가 있어서 만 가지 변화를 수작(酬作)한다.”

하는데, 저들은,

 

“나를 떠나서 일체에 수순(隨順)한다.”

하니 그 말이 같은 것 같으나, 그러나 이른바 ‘만 가지 변화를 수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사물이 올 때 마음이 그것에 응하여 각각 그 마땅한 법칙에 따라 알맞게 처하여, 그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아들 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효자(孝子)가 되게 하고 적자(賊子)가 되지 못하게 하며, 여기에 신하 된 사람이 있으면 충신(忠臣)이 되게 하고 난신(亂臣)이 되지 못하게 하며, 물(物)에 이르러서도 소[牛]는 밭을 갈고 사람을 떠받지는 못하게 하며, 말은 물건을 싣되 사람을 물지는 못하게 하며, 호랑이는 함정을 만들어 사람을 물지 못하게 하나니, 대개 그 각각의 진실을 가지고 있는 이치에 인하여 처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석씨(釋氏)의 이른바 ‘일체에 수순(隨順)한다.’는 것은 무릇 남의 아들된 사람의 경우에, 효자되는 사람은 스스로 효자되고 적자(賊子)되는 사람은 스스로 적자되며, 남의 신하된 사람의 경우는, 충성하는 사람은 스스로 충신되고, 난(亂)하는 사람은 스스로 난신(亂臣)되며, 소나 말이 밭 갈고 물건을 싣고 하는 것이 스스로 갈고 싣고 하며, 사람를 떠받고 물고 하는 것도 스스로 떠받고 물고 하여, 스스로 하는 대로 들어 줄 뿐이요, 내 마음을 그 사이에 씀은 없다.

불씨의 학이 이와 같은지라 저들 스스로가 물(物)을 부리기는 하되 물에게 부림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돈 한푼을 주어도 곧 그것을 어찌할 줄을 모른다면 그 일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즉 하늘이 이 사람을 내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재성(財成)ㆍ보상(輔相)의 직책을 준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 설이 반복되어 두서(頭緖)가 비록 많으나, 요컨대 우리는 마음과 이치가 하나라고 본 것이요, 저들은 마음과 이치가 둘이라고 본 것이며, 저들은 마음이 공(空)함으로써 이치도 없다고 보았고, 우리는 마음이 비록 공(空)하나 만물의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우리 유가는 하나이고 석씨는 둘이며, 우리 유가는 연속이고 석씨는 간단(間斷)인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우리와 저들의 같고 다름이 있겠는가? 다만 사람의 보는 것이 옳게 보았느냐 잘못 보았느냐에 있을 뿐이다.

석씨는 그 마음을 체험한 경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네 원소로 된 몸[四大身] 가운데

어느 것을 주(主)라 하고 / 四大身中誰是主

여섯 감관의 번뇌[六根塵] 속에

무엇을 정(精)이라 할까 / 六根塵裏孰爲精

 

【안】 〈대(大)는 그 이상 더 큰 것이 없다는 뜻으로 번역하여 원소라 함.〉지(地 : 뼈) 수(水 : 피ㆍ고름) 화(火 : 온기) 풍(風 : 호흡) 이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었으나 그 네 가지 원소를 따로 떼내면 본래 주(主)가 없는 것이고, 눈에 대한 빛깔과 귀에 대한 소리와 코에 대한 냄새와 입에 대한 맛과 피부에 대한 감촉이 여섯 가지[六根]의 번뇌인데 그것이 서로 대경(對境)이 되어 생기지만, 그 6근(六根)을 따로 떼내면 본래 정(精)이 없으므로, 마치 거울에 비치는 형상을 있다고 하지만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캄캄한 어두운 땅에서 눈을 떠 보라 / 黑漫漫地開眸看

온종일 소리는 들리어도 형체를 볼 수 없다네 / 終日聞聲不見形

 

【안】 지혜로써 용(用)에 비추면 비록 캄캄한 어두운 땅에서 눈을 떠 보아도 그 캄캄한 속에 광명이 있나니, 마치 거울 빛이 어두움 속에서도 광명이 있는 것과 같음이다.

 

하였고, 우리 유가에선 마음의 체험한 경지를 말하기를,

있다고 한들 어찌 자취가 있으며 / 謂有靈有跡

없다고 하면 다시 어찌 있으랴 / 謂無復何存

오직 사물에 응하여 수작할 즈음에 / 惟應酬酢際

다만 통달하여 본근을 볼 뿐이다 / 特達見本根

 

【안】 이는 주자의 시이었다.

 

 

하였다.

또 도심(道心)이란 본래 형체가 없거늘 소리가 있겠는가? 역시 이 이치를 마음에 간직하여 수작의 본근을 삼아야 하리니, 배우는 자가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이 마음의 발현되는 곳에 나아가서 실제로 체험하고 궁구(窮究)해 본다면, 그들과 우리와의 같은 점과 다른 점과 옳게 본 것과 잘못 본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자(朱子)의 설로써 거듭 말하건대, 마음이 비록 한 몸의 주(主)가 되지만 그 체(體)의 허령(虛靈)함은 족히 천하의 이치를 주관할 수 있고, 이치가 비록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용(用)의 미묘(微妙)함은 실로 사람의 한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니, 처음부터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이고, 어느 것이 정(精)하고 조(粗)함임을 논(論)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혹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알지 못하여 이것을 간직함이 없다면 어둡고 뒤섞이어 모든 이치의 묘함을 궁구하지 못할 것이요, 모든 이치의 묘함을 알지 못하여 궁구함이 없으면, 막히어 이 마음의 온전함을 다하지 못하리니 이것은 그 이론으로나 사세로 보아 서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베풀되, 사람들에게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제 스스로가 알아 단정(端正)하고 엄숙(嚴肅)하고 정일(精一)한 가운데에 이 마음을 간직하여 이 이치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게 하며, 사람들에게 모든 이치의 묘함이 있는 줄을 알아,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그 즈음에 궁구하여 마음을 극진히 하는 공(功)을 이룩하되, 크고 작음을 서로 흐뭇하게 하고 동(動)하거나 정(靜)함을 함께 길러갈 뿐, 처음부터 그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이고, 어느 것이 정하고 조함임을 택하지 않게 하나니, 참으로 오랫동안 힘을 쌓아 활연(豁然)히 관통하는 데에 이르면 역시 혼연히 하나가 되는 줄을 알아서 과연 안이고 밖이고 정하고 조함이 없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꼭 이러한 것을 천근(淺近)하고 지리(支離)하게 여겨 형체를 숨기고 그림자를 감추려 하면서 따로이 일종의 궁벽하고 황홀하고 까다롭고 앞뒤가 막힌 논리를 만들어, 힘써 배우는 자로 하여금 막연히 그 마음을 문자와 언어 밖에 두게 하여 말하기를,

 

“도(道)는 반드시 이같이 한 후에야 얻을 수 있다.”

하니 이것은 근세의 불씨의 학의 피ㆍ음ㆍ둔ㆍ사(詖淫遁邪)가 더욱 심한 것인데, 이것을 옮겨와서 옛 사람의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참된 학을 어지럽히고자 하니 그 또한 잘못이다. 주자의 말이 이 모든 것을 되풀이하고 변론하여 친절하게 밝혔으니, 배우는 자는 이에 잠심(潜心)하여 스스로 얻어야 할 것이다.

 

 

 

儒釋同異之辨

先儒謂儒釋之道。句句同而事事異。今且因是而推廣之。此曰虛。彼亦曰虛。此曰寂。彼亦曰寂。然此之虛。虛而有。彼之虛。虛而無。此之寂。寂而感。彼之寂。寂而滅。此曰知行。彼曰悟修。此之知。知萬物之理具於吾心也。彼之悟。悟此心本空無一物也。此之行。循萬物之理。而行之無所違失也。彼之修。絶去萬物。而不爲吾心之累也。此曰心具衆理。彼曰心生萬法。所謂具衆理者。心中原有此理。方其靜也。至寂而此理之體具焉。及其動也。感通而此理之用行焉。其曰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是也。所謂生萬法者。心中本無此法。對外境而後法生焉。方其靜也。此心無有所住。及其動也。隨所遇之境而生。其曰應無所住而生其心。按此一段。出般若經。言應無所住者。了無內外。中虛無物。而不以善惡是非。介於胸中也。而生其心者。以無住之心。應之於外。而不爲物累也。謝氏解論語無適無莫。引此語。 又曰。心生則一切法生。心滅則一切法滅 按出起信論 是也。此以理爲固有。彼以法爲緣起。何其語之同而事之異如是耶。此則曰酬酢萬變。彼則曰隨順一切。其言似乎同矣。然所謂酬酢萬變者。其於事物之來。此心應之。各因其當然之則。制而處之。使之不失其宜也。如有子於此。使之必爲孝而不爲賊。有臣於此。使之必爲忠而不爲亂。至於物。牛則使之耕而不爲牴觸。馬則使之載而不爲踶齕。虎狼則使之設檻置阱而不至於齩人。蓋亦各因其所固有之理而處之也。若釋氏所謂隨順一切者。凡爲人之子。孝者自孝。賊者自賊。爲人之臣。忠者自忠。亂者自亂。牛馬之耕且載者。自耕且載。牴觸踶齕。自牴觸踶齕。聽其所自爲而已。吾無容心於其間。佛氏之學如此。自以爲使物而不爲物所使。若付一錢則便沒奈何他此。其事非異乎。然則天之所以生此人。爲靈於萬物。付以財成輔相之職者。果安在哉。其說反復。頭緖雖多。要之。此見得心與理爲一。彼見得心與理爲二。彼見得心空而無理。此見得心雖空而萬物咸備也。故曰。吾儒一。釋氏二。吾儒連續。釋氏間斷。然心一也。安有彼此之同異乎。蓋人之所見。有正不正之殊耳。四大身中誰是主。六根塵裏孰爲精。按地水火風四大。和合爲一身。而別其四大則本無主。色聲香味觸法六根塵。相對以生。而別其六根則本無精。猶鏡像之有無也。 黑漫漫地開眸看。終日聞聲不見形。按以慧照用則雖黑漫漫地開眸看。暗中有明。猶鏡光之暗中生明也。 此釋氏之體驗心處。謂有寧有跡。謂無復何存。惟應酬酢際。特達見本根。按朱子詩 此吾儒之體驗心處。且道心但無形而有聲乎。抑有此理存於心。爲酬酢之本根歟。學者當日用之間。就此心發見處體究之。彼此之同異得失。自可見矣。請以朱子之說申言之。心雖主乎一身。而其體之虛靈。足以管乎天下之理。理雖散在萬物。而其用之微妙。實不外乎人之一心。初不可以內外精粗而論也。然或不知此心之靈而無以存之。則昏昧雜擾。而無以窮衆理之妙。不知衆理之妙。而無以窮之。則偏狹固滯。而無以盡此心之全。此其理勢之相須。蓋亦有必然者。是以。聖人設敎。使人默識此心之靈。而存之於端莊靜一之中。以爲窮理之本。使人知有衆理之妙。而窮之於學問思辨之際。以致盡心之功。巨細相涵。動靜交養。初未嘗有內外精粗之擇。及其眞積力久。而豁然貫通焉。亦有以知其渾然一致。而果無內外精粗之可言矣。今必以是爲淺近支離。而欲藏形匿影。別爲一種幽深恍惚艱難阻絶之論。務使學者。莽然措其心於文字言語之外。而曰道必如是然後可以得之。則是近世佛學詖淫邪遁之尤者。而欲移之以亂古人明德新民之實學。其亦誤矣。朱子之言。反復論辨。親切著明。學者於此。潛心而自得之可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