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15)정도전 삼봉집 제5권 / 불씨잡변(佛氏雜辨) /부처 섬기기를 극진히 할수록 연대는 더욱 단촉되었다[事佛甚謹年代尤促]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5. 05:16

부처 섬기기를 극진히 할수록 연대는 더욱 단촉되었다[事佛甚謹年代尤促]

 

원화(元和 당헌종(唐憲宗)) 14년에 불골(佛骨)을 경사(京師)에 맞아들여 왔는데, 이보다 먼저 공덕사(功德使)가 아뢰기를,

 

“봉상사(鳳翔寺) 탑에 부처의 지골(指骨)이 있어 전하여 오는데, 30년 만에 한 번씩 탑문(塔門)을 열며, 탑문을 열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며 백성들이 편안하게 지낸다고 합니다. 내년에 응당 탑문을 열 것이니 청컨대 맞이하여 오소서.”

하였으니, 이에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이 불골(佛骨)이 경사(京師)에 이르렀을 때 궁중에 3일 동안을 두었다가 여러 절을 거쳐가는데 왕공(王公)들과 사민(士民)들이 쳐다보며 받들어 시주하기를 남보다 뒤질까봐 두려워할 정도이었다.

형부 시랑(刑部侍郞) 한유(韓愈 자(字)는 퇴지(退之)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가 표(表)를 올려 간(諫)하여 말하기를,

 

“부처라는 것은 이적(夷狄)의 한 법일 뿐입니다. 황제(黃帝)로부터 우(禹)ㆍ탕(湯)ㆍ문무(文武)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수(長壽)하였고, 백성들도 안락(安樂)하게 지냈는데, 그때에는 부처가 있지 않았습니다.

한명제(漢明帝) 때에 비로소 불법(佛法)이 들어왔는데, 그 후부터 어지럽고 망함이 서로 계속되어 나라의 운수(運數)가 길지 못하여,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ㆍ원(元)ㆍ위(魏) 등의 나라 이후에는 부처 섬기기를 점점 정성스럽게 하였는데, 나라의 연대(年代)는 더욱 단촉(短促)되어졌습니다.

오직 양무제(梁武帝)가 48년 동안 제위(帝位)에 있으면서 전후 세 차례나 몸을 부처에게 희사(喜捨)하였으나, 마침내는 후경(侯景)의 핍박을 받아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으니, 부처를 섬겨 복을 구하다가 도리어 화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부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는 본시 이적(夷狄)의 사람이어서, 중국과는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의복 제도도 다르며 군신(君臣)ㆍ부자(父子)의 정도 알지 못하니, 가령 그의 몸이 아직 살아 있어서 경사(京師)에 들어와 조현(朝見)을 한다 할지라도 폐하께서는 그를 받아들이되 그저 선정전(宣政殿)에서 한번 보고 손[賓]으로 대접하는 예를 한 번 베풀고, 옷이나 한 벌 주어서 호위해 내보내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며, 여러 사람들을 미혹(迷惑)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그의 몸이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거늘 말라빠진 뼈를 어찌 궁중에 들어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옵건대 유사(有司)에게 맡기시어 물에나 불에 던져 버려 화(禍)의 근본을 영원히 끊어 버리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당헌종(唐憲宗))이 크게 노하여 장차 극형을 가하려고 하였으나 재상(宰相)인 배도(裵度)와 최군(崔群) 등이 말하기를,

 

“한유가 비록 지나치긴 했으나 충성에서 나온 말이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셔서 언로(言路)를 열어 주시옵소서.”

하니, 이에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시켰다.

진서산(眞西山)이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후세의 임금들이 부처를 섬긴 것은 대저 복전(福田 부처의 법력(法力))에 대한 이익을 구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익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유가 간하여 ‘옛날 제왕(帝王) 때에는 부처가 있지 않아도 장수(長壽)를 하였는데 후세의 임금들은 부처를 섬기는데도 일찍 죽는다.’고 진술하였으니, 깊고도 간절하게 나타낸 말이라 하겠거늘, 그런데도 헌종(憲宗)은 깨닫지 못한 채 바야흐로 이때 금단(金丹) 약을 먹고 또 불골(佛骨)을 맞이하였습니다. 신선을 구하고 부처에게 아첨하는 두 가지를 다하였으나 1년이 못되어 효과가 그러하였으니, 복전의 보응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신(臣)이 이 때문에 이 사실을 모두 아울러 임금 된 사람으로서 신선(神仙)이나 부처에게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事佛甚謹。年代尤促。

 

元和十四年。迎佛骨于京師。先是功德使上言。鳳翔寺塔有佛指骨。相傳三十年一開。開則歲豐人安。來年應開。請迎之。上從其言。至是佛骨至京師。留禁中三日。歷送諸寺。王公士民。瞻奉捨施。如恐不及。刑部侍郞韓愈上表諫曰。佛者。夷狄之一法耳。自黃帝至禹湯文武。皆享壽考。百姓安樂。當是時。未有佛也。漢明帝時始有佛法。其後亂亡相繼。運祚不長。宋齊梁陳元魏以下。事佛漸謹。年代尤促。唯梁武在位四十八年。前後三捨身。竟爲侯景所逼。餓死臺城。事佛求福。乃反得禍。由此觀之。佛不足信可知矣。佛本夷狄之人。與中國言語不通。衣服殊製。不知君臣父子之情。假如其身尙在。來朝京師。陛下容而接之。不過宣政一見。禮賓一設。賜衣一襲。衛而出之。不令惑衆也。況其身死已久。枯槁之骨。豈宜以入宮禁。乞付有司。投諸水火。永絶禍本。上大怒。將加極刑。宰相裴度,崔群等言。愈雖狂。發於忠懇。宜寬容以開言路。乃貶潮州刺史。

 

眞西山曰。按後世人主之事佛者。大抵徼福田利益之事。所謂以利心而爲之者也。故韓愈之諫。歷陳古先帝王之時未有佛而壽考。後之人主事佛而夭促。可謂深切著明者矣。而憲宗弗之悟也。方是時。旣餌金丹。又迎佛骨。求仙媚佛。二者交擧。曾未朞年。而其效乃爾。福報果安在耶。臣故幷著之。以爲人主溺意仙佛者之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