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82)정도전 삼봉집 제11권/경제문감 별집 상/ 군도(君道)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6. 08:04
군도(君道)

 



(唐)

 

(堯)도당씨(陶唐氏)이니 제곡(帝嚳)의 아들이다. 성은 이기(伊耆), 제곡을 계승하여 화덕(火德)으로 임금 노릇하고 평양(平陽)에 도읍하였다. 재위 72년.

요(堯)는 당후(唐侯)에서 올라가 천자(天子)가 되었으니, 요의 훌륭한 덕은 참으로 표현하여 말하기 쉽지 않으나, 만약 요전(堯典)을 되풀이하여 본다면 거의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마음가짐으로 말하자면, ‘공경스럽고 통명하며 문채가 있고, 생각하되 자연스럽다.’ 하겠고, 그의 몸가짐으로 말하자면 ‘참으로 공손하고, 능히 사양한다.’ 하겠다.
‘능히 큰 덕을 밝혀 구족을 친하여지게 했다.’고 한 것은, 몸이 닦아지매 집이 다스려진 것이요, ‘구족이 이미 화목하게 되자 백성들을 골고루 계명시켰다.’고 한 것은 집이 다스려지매 나라가 다스려진 것이요, ‘백성들이 밝아지며 만방을 합하여, 화목하게 했다.’고 한 것은, 나라가 다스려지매 천하가 태평해진 것이다.
대개 몸과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과 나라 및 천하에 미루어나가 안팎이 다 양성되고 근본과 끝이 모두 다스려졌으니, 이로 본다면 성인으로서의 학문이 근본이 있고, 성인으로서의 다스림이 차서(次序)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서,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하늘을 공손히 받들어 일ㆍ월ㆍ성ㆍ신을 역(曆)으로 하고 상(象)으로 하였다.’는 것은, 요(堯)가 천도(天道)를 이회(理會)한 것이요, ‘때에 맞게 일할 사람을 물어 등용했다.’는 것과, ‘그의 일을 순조롭게 해 갈 사람을 물었다.’고 한 것은, 요가 인도(人道)를 이회한 것을 말한 것이다.
“제(帝 곧 요를 뜻함)가 말하기를, ‘아아, 사악(四岳)아, 큰 홍수가 바야흐로 수해를 일으켜 한없이 산을 뒤덮고 언덕을 넘어 호호하게 하늘에 닿으므로 아래 백성들이 한탄하고 있으니, 감당할 사람이 있으면 다스리도록 하리라.’ 하였다.”
고 한 것은, 요가 지도(地道)를 이회한 것을 말한 것이요,
“제(帝)가 말하기를, ‘아아, 사악아, 내 자리를 사양하겠다.’ 하니, 모두들 제에게 아뢰기를, ‘홀아비가 아래 있으니, 우순(虞舜)입니다.’ 하자 제가, ‘알았다.’ 하고, 두 딸을 규예(嬀汭)에 내려보내 우순에게 시집보낸 다음 제가 말하기를, ‘공경하여 섬기라.’ 하였다.”
한 것은, 선양(禪讓)한 일을 말한 것이다.
대개, 임금의 직책이란 사람 쓰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 알아 보기를 어렵게 여기는 것인데, 첫번째 물어 단주(丹朱 요의 아들)의 완악함을 알았고, 두번째 물어 공공(共公)이 가만히 있을 때 말로는 잘 하면서도, 써 주면 그르치는 것을 알았고, 세번째 물어서 곤(鯀)이 명령을 어기고 동족을 해치는 것을 알았고, 사악(四岳)에게 묻자 순(舜)을 천거함에 이르러서는 천하를 위하여 사람을 얻었었다.
임금 한 몸이 나와서 천지와 인물(人物)의 종주(宗主)가 됨은, 생민(生民)을 위하여 표준을 세움으로써, 보상(輔相)ㆍ재성(財成)하는 도리를 다하여 그 극진한 대로 밀고 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삼재(三才 곧 사람을 뜻함)의 구실을 다하게 되면, 성인의 할 일이 끝나는 것이다.

 

(虞)

 

(舜)유우씨(有虞氏)이니 전욱(顓頊)의 6대 손자이다. 성은 요(姚)이며, 요(堯)에게서 선양(禪讓)을 받았다. 토덕(土德)으로 왕 노릇하였고 포판(蒲阪)에 도읍하였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거듭 광화(光華)하여 제와 합치했다.’ 하였으니, 이는 순(舜)의 덕이 요(堯)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지금 살펴본다면 ‘심오하고 지혜로우며 문채나고 밝다.’ 한 것은 곧 순의 마음가짐이요, ‘온화하고 공손하고 미덥고 독실했다.’고 한 것은 곧 순의 몸가짐이며, ‘아비는 완악하고 어미는 사납고 상(象 순임금의 동생)은 거만하였는데도 능히 화합하되 효도로써 하여, 차츰차츰 착해지고 간악하여지지 않게 하였다.’ 한 것과, ‘백성들이 중도에 맞게 하매 사방이 고무되어, 만방의 어진 사람이 모두 제(帝 순임금을 말함)의 신하가 되었다.’ 한 것은 역시 순(舜)의 집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져 천하가 태평해진 것을 말한 것이다.
먼저, 선기 옥형(璿璣玉衡)을 관찰하여 칠정(七政)을 정돈한 것은, 순이 이 천도(天道)를 이회(理會)한 것이요, 이를테면 ‘오전(五典 곧 오륜(五倫))을 아름다워지게 하라 하니 오전이 순조롭게 되고, 백규(百揆)에 들이니 백규가 펴졌다.’ 한 것은 교화(敎化)가 행해지고 정사가 다스려진 것이며, ‘사방 문에 오는 손님이 화목했다.’ 한 것은 사람들이 교화된 것이요, ‘센 바람과 우레 치는 비에도 혼미하지 않았다.’ 한 것은 신명(神明)이 도운 것을 말한 것이다.
‘상제에게 유제(類祭 제사의 한 가지)하고 육종(六宗)에게 인제(禋祭 제사의 한 가지)하고 산천에 망제(望祭 제사의 한 가지)하고 여러 귀신에게 두루 제사했다.’ 한 것은 이른바 제사를 맡도록 하매 온 귀신이 흠향했다는 것이다.
오서(五瑞)를 모으되, 날마다 사악(四岳 관직명, 혹은 사방 제후의 장)과 여러 목(牧)들을 만나 보아 같이 새해 일을 시작한 것은 일통(一統)을 중대하게 여긴 것이며, ‘다섯 해에 한 번씩 순수하며, 제후들은 네 번 조회하였다.’ 한 것은 상하(上下)의 사정이 통하게 한 것이요, ‘시(時)와 월(月)을 맞추고 일(日)을 바르게 하였다.’ 한 것은, 정삭(正朔)을 중하게 여긴 것이며, ‘율(律)ㆍ도(度)ㆍ양(量)ㆍ형(衡)을 동일하게 하였다.’ 한 것은 제도를 일정하게 한 것이다.
인(仁)으로써 오형(五刑) 쓰는 것을 근심하고, 의(義)로써 사흉(四凶)의 죄를 처단하매,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
‘사방 문을 열며, 사방의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의 귀를 통하게 했다.’ 한 것은, 천하의 현준(賢俊)들이 모여오고, 사방 사람들이 누구나 보고 듣도록 한 것이요, 덕 있는 이에게 후하고, 어진 사람을 신임한 것은 군자(君子)를 옹호한 것이며, 임인(任人 흉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거절한 것은, 소인을 억제한 것이다.
제(帝 요임금을 말함)의 업적을 넓히고자 하여 분발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물어서 백우(伯禹)를 발탁하여 백규(百揆)를 맡도록 하였으며, 백성들이 기아로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기(棄)를 후직(后稷)으로 삼았으며, 오륜이 순조롭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설(契)을 사도(司徒)로 삼았고, 고요(皐陶)를 명하여 사사(士師)로 삼고, 수(垂)를 명하여 공공(共工)으로 삼았으며, 산천 초목을 순조롭게 하는 일은 익(益)을 우(虞 산천을 맡은 관원)로 삼았고, 삼례(三禮 천지와 사람에게 제사하는 예)를 맡는 일은 백이(伯夷)를 질종(秩宗 온 귀신을 서차하는 일을 맡은 관원)으로 삼았다.
기(夔)에게 음악을 맡도록 한 것은 주자(冑子 천자와 경대부의 큰 아들)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용(龍)에게 납언(納言 말을 받아들이는 벼슬 이름)을 맡도록 한 것은 참소하는 말을 미워해서이다.
이것들은 곧 요(堯)가 물어서 한 뜻으로서, 어느 것이나 인사(人事)를 이회(理會)한 것 아님이 없다.
12주(州)를 비로소 마련하고, 12산(山)을 봉(封)하고, 내를 준설(浚渫)한 것에 이르러서는 곧 지도(地道)를 이회한 것이며, 모기(耄期 모는 90세, 기는 1백 세를 말함)가 되어 일을 할 수 없자 우(禹)에게 명하여 모든 일을 보살피게 하였다가 마침내 원후(元后 임금)가 되게 한 것은, 곧 요가 사악(四岳)에게 물어 순을 들어 쓴 뜻이다. 이밖에 남은 일이 없는 것이니, 대개 임금으로서의 직분(職分)의 대강(大綱)은 위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아, ‘중을 잡는다[執中]’란 한 마디 말은, 위로 요에게서 받아 아래로 우에게 전한 것인데, ‘도심(道心)은 은미하고 인심은 위태로우니,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라.’는 세 마디 말을 더하여 성학(聖學)의 연원(淵源)을 열어 놓았으니, 실로 만세의 백성들이 힘입게 된 바이다. 어찌 그의 도(道)가 한때에만 행했을 뿐이라고 하겠는가?

 

(夏)

 

(禹)성은 사(姒), 곤(鯀)의 아들이다. 순(舜)의 자리를 전해 받아 안읍(安邑)에 도읍하였다. 금덕(金德)으로 왕 노릇을 하였다. 재위 15년.

8년 동안을 밖에서 지내며 세 차례 자기집 문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계(啓)가 고고하게 우는데도 자식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우(禹)가 나라 일에 부지런한 것이다.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가정에서 검소하여,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거나 존대(尊大)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우의 어짐이며, 잘하는 체하지 않고 공 있는 체하지 않아도 천하에 그와 공이나 능함을 다툴 사람이 없는 것은, 우의 덕이다.
홍수와 토지를 다스려서 백성들로 하여금 살 곳을 얻게 하고, 직(稷)으로 하여금 백성들이 농사짓도록 가르치게 하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고, 봉건(封建)과 정전(井田)의 경계(經界)를 세워 사람들이 다투지 않도록 하고, 구목(九牧)에게 쇠[金]를 바치도록 하여 구정(九鼎)을 부어 만들되 구주(九州)를 세우게 된 제도(制度)를 실었고, 인월(寅月)을 세수(歲首)로 삼아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합당한 길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만세의 공로이다.
종ㆍ고ㆍ경ㆍ탁(鍾鼓磬鐸)을 설비하여 사방의 선비들이 오도록 하고, 정ㆍ기ㆍ유ㆍ조(旌旗斿旐)를 세우도록 하여 존비(尊卑)의 차등을 구별하고, 학교를 세워 인륜을 밝히고, 죄인을 보고서는 울며 딴 마음 먹음을 슬퍼하였고, 착한 말을 들으면 절하고 맛난 술을 미워하였으며, 기강(紀綱)과 전칙(典則), 석(石 1석은 1백 20근으로 무거운 것을 다는 저울)을 통하고 균(鈞 30근이 1균임)이 고루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우(禹)의 공이 두텁고 덕이 성하여 표준을 세우고 계통을 전해 주어 만세의 기준됨이 지극하다.
‘소리로 율(律)이 되고 몸으로 법도가 되며, 좌로 운용(運用)하면 준승(準繩)이 되고 우로 거동(擧動)하는 바는 규구(規矩)에 맞았다.’고 한 것은 그 본바탕을 요약하여 한 말이다.
아아! 우(禹)는, 그 아버지가 홍수(洪水)를 다스리다가 베임을 받은 것을 슬프게 여겼기 때문에, 바로 그 일을 스스로 책임 맡아 훌륭한 공적을 세워 전의 허물을 덮었고, 제곡(帝嚳)에게 체제(禘祭)를, 곤(鯀)에게 교제(郊祭)하게 되었으니, 우로서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종묘(宗廟)에는 효성을 다하고, 제사에는 아름다운 것을 다하고, 구혁(溝洫 농토의 배수로)을 다스리는 데에 그 힘을 다하였으며, 음식이 박한 것과 의복이 나쁜 것이나 궁실(宮室)이 낮은 것에 있어서는 모두 감히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은, 그의 마음이 하루도 천자의 상봉(常奉)에 편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들어 계(啓)에게 전수(傳授)함으로써 만세의 참람하고 어지러운 근본을 막은 것에 이르러서는, 우(禹)가 부자간에 처리한 일이 부끄럽거나 저버림이 없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논하건대, 우가 순에게서 전수(傳授) 받은 것은 집중(執中)이라는 한 마디 말이요, 하늘에게서 얻은 것은 홍범 구주(洪範九疇)인데, 대개 황극(皇極)이 중앙에 처하여 하나로써 여덟을 어거하고, 안에 있으면서 밖을 제어하니, 역시 중(中)일 뿐이다. 성학(聖學)이 밝아지고, 이륜(彝倫 인륜)이 펴져 더욱 세교(世敎)에 공이 있음이 이와 같았으니, 아아 훌륭하도다.

(啓) 우(禹)의 아들로 재위 10년. 아들에게 전위(傳位)함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우가 붕(崩)하자, 익(益 우의 신하)이 우의 아들을 피하여 남하(南河)의 남쪽에 있었는데, 천하의 조근(朝覲)하려는 제후(諸侯)들이 익(益)에게로 가지 않고 계(啓)에게로 가며, 구가(謳歌)하는 사람들은 익을 구가하지 않고 계를 구가하였다. 그래서 즉위하였으니, 계는 현능하여 일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호씨(有扈氏)가 배반하자, 계가 육경(六卿)을 불러 몸소 하늘을 대신하여 토벌하되, 그가 오행(五行)을 위모(威侮)하고 삼정(三正)을 태기(怠棄)한 죄를 들어 멸망시켰다.
‘감(甘) 땅에서 크게 싸웠다.’고 한 것은 계(啓)가 분발하여 훌륭한 일을 함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며, 또한 유호씨의 신하답지 못한 죄를 밝힌 것이니, 제왕(帝王)의 승강(升降 번성과 쇠퇴)하는 기미와 세상 변천의 한 기회를 이것으로 알 수 있다.

태강(太康) 계(啓)의 아들로 예(羿)가 폐위(廢位)하였다. 재위 30년.
안일하게 즐기는 것으로 덕을 잃자 백성들이 모두 반심을 갖게 되니, 즐겁게 놀아나기를 법도 없이 하여 낙수(洛水) 밖에서 사냥하며 십순(十旬)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었다.
유궁후(有窮后) 예(羿)가, 백성들이 참을 수 없음을 좇아, 하수가에서 막으니, 그 아우 다섯 사람이 오자지가(五子之歌 《서경》의 편명)를 지어 형을 원망하였다.

중강(仲康) 태강(太康)의 아우인데, 유궁후 예가 태강을 폐위하고 세웠다. 재위 14년.
유궁후 예가 중강을 왕으로 세우고 정승 노릇을 하였다. 중강이 사해를 다스리는 자리에 나아가자마자, 맨 먼저 윤후(胤侯)를 명하여 육사(六師 대사마(大司馬)이다)를 맡게 했다.
이때 희씨(羲氏)와 화씨(和氏)가 술에 빠져 그들의 직책을 버리고, 심지어 일식(日食)의 큰 변괴도 오히려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왕이 윤후를 명하여 정벌했다.
유궁후 예가 태강(太康)을 폐하고 중강을 세웠으며, 그가 찬역(簒逆)한 것은 바로 상(相 중강(仲康)의 아들) 때의 일이니, 이는 중강이 그래도 제어했기 때문이다.

(相) 중강의 아들인데 상구(商丘)에 옮겼다. 재위 29년. 예가 상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은 지 2년 만에 그의 신하 한착(寒浞)이 시해(弑害)하였다.
권세가 유궁후 예에게 돌아가게 되자 예에게 쫓겨 상구(商丘)에 있었고, 예도 활 잘 쏘는 것을 믿어 정사는 닦지 않고 들판의 짐승 사냥에 빠졌다가 마침내 한착(寒浞)에게 멸망되었다.

소강(少康) 상(相)의 아들로 한착을 멸하고 우(禹)의 옛 업적을 회복하였다. 재위 21년.
상의 유복자(遺腹子)로 출생한 지 40여 년 만에 1성(成 사방 10리)의 땅과 1여(旅 5백 명)의 군사로 능히 덕을 펴고 하(夏)나라의 민중을 수합하고 그 관원들을 무마하여 한착을 멸망시키니, 유궁후 예가 드디어 멸망하게 되었다.
소강이 이러한 난리 속에 우(禹)의 업적을 회복하고 옛 도읍에 돌아와, 하나라를 제사하되 하늘에 배향(配享)하여 옛 제도를 잃지 않으니, 한나라가 중흥하게 되었다.

공갑(孔甲) 불항(不降)의 아들로 재위 20년. 소강(少康)으로부터 공갑까지 9대(代)이다.
귀신을 좋아하고 음란한 짓을 일삼아 덕이 쇠퇴하니, 제후들이 배반하는 자가 많았다.

(桀) 발(發)의 아들로 재위 50년 만에 탕(湯)이 내쫓았다. 공갑(孔甲)으로부터 걸에 이르기까지 4대이다.
공갑 때부터 제후(諸侯)들이 배반하는 자가 많았는데, 걸은 더욱 무도(無道)하고, 힘이 세어 능히 쇠갈고리를 펴며, 덕은 없고 위엄만을 부리므로 천하가 원망하였다.
말희(妺喜)를 사랑하여 경궁(瓊宮)과 요대(瑤臺)를 짓고 주지 육림(酒池肉林)을 이루어, 한 번 북을 치면 소가 물을 마시듯 하는 자가 3천 명이나 되니, 말희가 기뻐하여 웃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곧은 신하 관용방(關龍逄)을 죽이고, 탕(湯)을 하대(夏臺)에 가두었었는데, 탕이 풀리게 되자 이윤(伊尹)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걸을 치되, 명조(鳴條)에서 싸워 이기고, 남소(南巢)로 추방하였다.

 

(殷)

 

(湯) 성은 자(子)요, 이름은 이(履)이니 설(契)의 13대 손자이다. 박(亳)에 도읍하여 수덕(水德)으로 임금 노릇을 하였다. 재위 13년.
처음에 70리를 가진 제후(諸侯)로 방백(方伯)이 되었다. 갈백(葛伯)이 제사를 지내지 않자 탕이 비로소 이를 쳤고, 이윤(伊尹)을 맞아다가 그에게 배운 뒤에 신하를 삼아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탕이 들에 나갔다가 그물 쳐놓은 것을 보고 3면을 터 놓았다. 제후들이 이 말을 듣고서, ‘탕의 덕이 지극하여 금수(禽獸)에게까지 미쳤구나.’ 하고 그에게 돌아온 자가 40여 나라나 되었다.
걸(桀)이 더욱 무도하자, 이윤이 탕을 도와 쳤는데, 탕이 자신의 덕에 수치가 됨을 느끼며 말하기를,
“나는 후세에 나로써 구실을 삼을까 두렵다.”
하니, 중훼(仲虺)가 고(誥)를 지어 해명하였다.
큰 가뭄이 들자, 탕은 자기 자신 희생(犧牲)이 되어, 상림(桑林) 들에서 빌되 여섯 가지 일로 자책(自責)하기를,
“정사의 절도가 없는가? 백성들이 업을 잃었는가? 궁실(宮室)이 고대(高大)한가? 궁녀들의 청촉(請囑)이 심한가? 뇌물이 행해지는가? 참소하는 자가 많은가?”
하니, 말이 끝나기 전에 큰 비가 왔다.
관부(官府)의 형벌을 마련하여 지위가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기를,
“감히 항상 궁에서 춤이나 추고, 집에서 술에 취하여 노래 부르는 것을 무풍(巫風)이라 하고, 감히 재물과 여색을 탐하고 항상 놀이와 사냥만 하는 것을 음풍(淫風)이라 하고, 감히 성인의 말을 업신여기고 충직을 거역하며 기덕(耆德)을 멀리하고 완동(頑童)을 가까이하는 것을 난풍(亂風)이라 하는데, 이 삼풍(三風)과 십건(十愆)이 경사(卿士)에게 한 가지라도 그것이 몸에 있게 되면 집이 반드시 망할 것이요, 나라 임금이 한 가지라도 몸에 있게 되면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
하였다.
그의 덕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무(聖武)를 펴 밝혀서 잔학(殘虐)을 대신하되 관후하게 하였다.”
하였고, 또,
“비로소 사람의 기강(紀綱)을 닦아 간하는 것을 거슬리지 않고 따르며 덕이 있는 선배를 그대로 따르고, 위에 있어서는 총명하게 하고, 아래가 되어서는 충실하게 하였으며, 남에게는 구비하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을 단속하기는 미치지 못한 듯이 하였다.”
했으며, ‘어진 이를 임용하되 차별이 없이 하였다.’ 하였으니, 탕(湯)의 덕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르기를, ‘상제가 사람에게 천성을 내려 순하게 떳떳한 성품이 있었다.’ 한 것은 실로 뒷날 맹자(孟子)의 성선론(性善論)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니, 그 성학(聖學)에 공 있음이 또한 크다 하겠다.

태갑(太甲) 탕의 손자로 재위 33년. 탕으로부터 태갑까지 4대이다.
이윤(伊尹)이 선왕에게 제사하되, 사왕(嗣王)을 모시고 공손히 그의 할아버지를 뵈니, 후(侯)와 전(甸)의 뭇 후(后)가 다 모이고, 백관들이 그 직책을 가져서 총재에게 명을 받았다. 이윤이 열조(烈祖)들의 성취한 덕을 말하여 밝혀 왕에게 훈계하였는데도, 태갑이 현명하지 못하여 욕심으로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으로 예를 무너뜨리므로 이윤이 동(桐 탕(湯)의 능(陵)이 있는 곳)에 궁을 지어 선왕에게 가까이 있도록 하며 왕을 훈계하였다. 왕이 동궁으로 가서, 3년을 거상(居喪)하며 허물을 뉘우쳐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을 닦아 인(仁)하게 처신하고, 의(義)에 옮겨가므로, 이윤이 면복(冕服)을 가지고 왕을 모셔 박(亳)으로 돌아와 정사를 왕에게 바치니 이로 말미암아 덕을 닦고 은혜를 펴서 탕의 업적을 계승하였다.

태무(太戊) 옹기(雍己)의 아우로 재위 7년. 태갑으로부터 태무에 이르기까지 6대이다.
이에 앞서 상(商)나라의 도가 점차로 쇠퇴하여 제후(諸侯)들이 더러 조회를 오지 아니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亳)에 요괴(妖怪)가 생겨서, 상(桑)과 곡(糓)이 하루아침에 함께 나와 그날 저녁에 손아귀에 차게 자랐다.
이척(伊陟)이 말하기를,
“요망한 것은 덕을 이기지 못하는 법인데, 임금께서 정사가 잘못된 데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태무가 그제야 선왕의 정사를 닦고 양로(養老)하는 예를 밝히며, 일찍 조회하고 늦게 파하며, 병자를 문병하고 상사(喪事)를 조위하니, 3일 만에 상(桑)과 곡(糓)이 말라 죽고, 3년이 되자 먼 지방에서 중역(重譯 아주 멀어 언어가 달라 통역을 이중으로 함)하여 오는 자가 76국이 되었다.

반경(盤庚) 양갑(陽甲)의 아우로 상나라를 고쳐 은(殷)나라라 했다. 재위 28년. 태무로부터 반경에 이르기까지 11대이다.
중정(仲丁)으로부터 양갑(陽甲)에 이르기까지는 적자(嫡子)를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일이 많아, 자리를 다투느라고 서로 쳐서 난리가 무릇 9대나 계속되어 제후(諸侯)들이 조회하지 않았다.
반경의 초기에는 은나라 도가 더욱 쇠퇴하였고, 경도(耿都)에는 또 황하(黃河)가 터지는 근심이 있으므로 박(亳)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신민(臣民)들이 그 땅을 편하게 여기며 옮기기를 어렵게 여겼다. 반경이 글을 지어 타이르자 백성들이 비로소 따랐다.
반경이 옮기고서는 상(商)을 고쳐 은(殷)이라 하고, 탕(湯)이 행하던 정사를 거행하니 은나라 도가 다시 일어났다.

무정(武丁) 소을(小乙)의 아들로 재위 59년. 반경으로부터 무정에 이르기까지 4대이다.
공손하고 말없이 도(道)를 생각하자, 꿈에 상제(上帝)가 어진 보필(輔弼)을 주었다. 형상을 가지고 두루 천하에 찾으니, 열(說)이 부암(傅巖) 들에서 담을 쌓고 있는데 초상과 같으므로 그를 정승으로 세워 좌우(左右)에 있게 하며,
“조석으로 훈계 말을 올려 나의 덕을 돕도록 하라.”
고 명하니, 열(說)이 글 3편을 지어 왕에게 고하였는데 말이 모두 순근(諄勤)하고 간절했다. 그 중에,
“나무는 먹줄을 맞으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어질어진다.”
는 말과 또,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오직 어렵다.”
는 말과 또,
“옛 교훈을 배워야 소득됨이 있는 것이니, 일을 예대로 하지 않고서 장구한 세상이 됨은 열(說)이 들은 바가 아니다.”
라고 한 말과, 또
“학문은 뜻을 겸손해야 하는 것이니, 힘써서 때로 민첩하면 닦여지게 되는 것이니, 생각을 종시 학문에 두면 모르는 사이에 그 덕이 닦여진다.”
라고 한 말은 더욱 인군들의 마땅히 법받아야 할 바이다. 성탕(成湯)에게 제사할 때, 꿩이 우는 괴이한 일이 있자, 조기(祖己)가 왕에게 훈계하기를
“먼저 왕이 바르게 해야 그 일을 바로잡게 된다.”
하였다. 고종이 그대로 따라 감히 편하려 하지 않고 은나라를 아름답고 편안하게 하니, 대소간에 혹시라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고, 3년이 되자, 만이(蠻夷)들이 머리를 땋고 중역(重譯)하여 조회하러 오는 자가 여섯 나라나 되었다.
이윽고 형ㆍ초(荊楚)를 토벌하고 귀방(鬼方)을 정벌하여 참란(僣亂)한 것을 평정하니, 은나라 도가 다시 일어났다. 나라를 누린 지 59년이며 고종(高宗)이라 이름하였다.

조갑(祖甲) 조경(祖庚)의 아우로 재위 33년. 무정으로부터 조갑에 이르기까지 3대이다.
왕이 젊었을 때 의롭지 못하므로 고종(高宗)이 멀리하였는데, 험난한 곳에서 지내며 뜻을 얻지 못하였다.
즉위하게 되자, 소인(小人 서민)들을 의지하게 할 것을 알고 서민들이 보전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감히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또 반우(盤盂)에 글을 써서 자신을 경계하였다.

무을(武乙) 경정(庚丁)의 아들로 도읍을 하북(河北)으로 옮겼다. 재위 5년. 조갑으로부터 무을에 이르기까지 4대이다.
왕은 무도(無道)하여, 허수아비를 만들어 천신(天神)이라 하여 욕을 보였고, 또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피를 담아 매달고서 활로 쏘되, 석천(射天)이라고 하였다.
하수(河水)와 위수(渭水) 사이에서 사냥하다가 갑자기 천둥이 쳐서 벼락맞아 죽었다.

제을(帝乙) 태정(太丁)의 아들로서 재위 37년. 무을로부터 제을에 이르기까지 3대이다.
은 나라의 도가 더욱 쇠퇴했다. 서자(庶子) 중에 맏인 미자(微子) 계(啓)가 어질므로, 기자(箕子)가 왕에게 권하여 후사(後嗣)로 삼게 했는데, 왕이 그 어머니가 천하다고 하여 세우지 않고 적자(嫡子) 수신(受辛)을 세우니, 이가 주(紂)다.

(紂) 제을의 아들. 재위 34년 만에 무왕(武王)이 정벌하자 왕이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말재주가 민첩하고 빠르며 재주가 월등하며 손으로 맹수(猛獸)를 잡았고 지혜는 족히 간하는 말을 막아내며, 말은 족히 잘못을 꾸며댔다.
늙은 사람을 유기하고, 죄인들과 친압하여 가까이하므로, 천하의 죄짓고 도망하는 자들의 주인과 소굴이 되어 체모 없이 지내며, 상제(上帝)ㆍ신기(神祇)ㆍ종묘(宗廟)에 제사하지 않고, 전쟁을 숭상하여 백 번 싸우면 백 번 다 이겼다.
유소씨(有蘇氏)를 정벌하여 그의 딸 달기(妲己)를 사로잡아다가 이를 총애하되 오직 말하는 대로 들어 주어, 교묘한 기예와 방탕한 기교를 부려 기쁘게 하여 주고, 사연(師㳙)으로 하여금 새로 음탕한 소리와 북리(北里)의 춤과 퇴폐한 음악을 짓게 하였다.
부세(賦稅)를 많이 받아, 녹대(鹿臺)의 재물과 거교(鉅橋)의 곡식을 채우고, 사구(沙口)의 원대(苑臺)를 넓히고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그 속에서 남녀가 발가벗고 뛰놀게 하고 밤을 세워가며 술을 마시었다.
포락(炮烙 불로 지지는 형벌)의 형벌을 시행하여 달기가 웃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고, 아이 밴 여자의 배를 째고, 추운 아침에 물 건너는 사람의 정강이를 쪼개고 보았으며, 구후(九侯)를 젓 담고, 악후(鄂侯)를 포 떴다.
주후(周侯 곧 주나라 문왕(文王)을 말함)를 유리(羑里) 옥에 가두자, 주후(周侯)의 신하들이 아름다운 계집과 기이한 물건과 좋은 말을 바치므로 놓아 주고, 다시 궁시(弓矢)와 부월(斧鉞 처형하는 형구로 정벌하는 대장에게 주어서 처형을 전단하게 하는 신표)을 주어 정벌(征伐)을 전담하게 하고 서백(西伯)을 삼았다.
서백이 죽고 아들 발(發 무왕(武王)의 이름)이 섰는데, 이때까지 주(紂)의 악이 고쳐지지 않자, 미자(微子)는 버리고 떠나서 종사(宗祀)를 보존하고, 비간(比干)을 간하다가 심장이 해부되었으며, 기자(箕子)는 거짓 미친 척하고 노예가 되었다.
서백(西伯) 발(發)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를 치자, 주가 녹대(鹿臺)로 달아나 보옥(寶玉)으로 꾸민 옷을 입고 분신(焚身)하여 죽었다.

 

(周)

 

무왕(武王) 성은 희(姬), 이름은 발(發)이니 문왕(文王)의 아들이다. 호(鎬)에 도읍하여 목덕(木德)으로 임금 노릇을 했다.
태공(太公)은 스승이 되고 주공(周公)은 보필이 되었으며, 소공(召公)ㆍ필공(畢公) 등은 좌우에서 왕의 스승이 되었다. 9년에 여(黎)를 평정하고, 13년에는 주(紂)를 정벌하여 천자(天子)의 자리에 나아가되, 상(商)나라의 학정을 번복하고 선왕의 옛날 정치대로 하였다.
갇혀 있는 기자(箕子)를 풀어 주고 비간(比干)의 묘(墓)를 봉(封)하고, 상용(商容)의 여리(閭里)를 정표(旌表)하고, 녹대(鹿臺)의 재물을 흩어 주고,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어 널리 사해(四海)에 나누어 주니, 만백성들이 기뻐하며 감복했다.
홍범(洪範)을 펴니 만세의 이륜(彝倫)의 도가 밝아지고, 《단서(丹書)》(경계하는 글)를 훈계삼으니 공경하고 태만한 것과 의리 있고 욕심스러운 분별이 나타났으며, 보본 반시(報本反始 조상의 은혜에 보답함)하는 데에는 왕을 추존(追尊)하여 제사드리는 예를 숭상하고, 후손들을 유족하게 하는 데에는 세자(世子) 가르치는 법을 세웠다.
관원을 임용함에는 어진 이로 하고, 일을 맡기는 데는 유능한 사람으로 하며, 백성에게는 오교(五敎 오륜(五倫))를 중히 여기되 먹는 것과 상사ㆍ제사를 더욱 신중히 여겼고, 신의를 두터이 하고, 의리를 밝히며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는 것을 겸하여 다하였다.
이래서, 공수(拱手)하고 있으면서도 천하가 다스려졌으니 무슨 어려운 일이 있었겠는가?

성왕(成王) 이름은 송(誦), 무왕의 아들이다. 재위 37년.
주공(周公)은 묻는 대로 무궁하게 응답하되 도(道)로써 인도하고, 태공(太公)은 성(誠)이 세워져 과감히 결단하되 선(善)으로 보도(輔導)하고 의(義)로 도와 그 의지를 보충 확대하며, 소공(召公)은 청렴하고도 정직하여, 과오를 시정하고 사특한 일을 간함으로써 그의 행실을 바로잡았고, 사일(史逸)은 문견이 넓고 기억을 잘하며, 말이 민첩하고 글을 잘하여, 그의 잊어버리는 일을 도우니, 왕이 어렸으나 네 신하가 유지하여 조정에 그르치는 일이 없었다.
왕이, 바람 불고 우레 치는 천변으로 말미암아, 주공(周公)이 원성(元聖)임을 알고 여러 숙부(叔父)를 죄주었고, 무일(無逸)의 글에서 농사짓는 것이 어려움을 알고서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사업을 회복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협조를 바라면서 말하기를,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하늘의 도는 밝기만 하다.”
하였고 또,
“날로 나아가고 달로 진보해야 학문이 계속 밝아져 광명해질 것이며, 이 소임을 보필하되 나에게 밝은 덕행을 보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두 주공(周公)에게서 배운 것이요.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법제(法制)를 세웠으니 삼대(三代)의 어진 임금이 된 것이 당연하다.

강왕(康王)이름은 교(釗), 성왕의 아들로 재위 26년.
천자의 자리에 있게 되자 제후(諸侯)들에게 유고(諭誥)하는데, 태보(太保)는 서쪽 지방 제후를 거느리고 응문(應門)으로 들어와 왼편에 서고, 필공(畢公)은 동쪽 지방의 제후를 거느리고 응문으로 들어와 오른편에 서서 모두 재배(再拜)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제 왕은 공경하되, 육사(六師)를 크게 갖추어 우리 고조의 드물게 얻은 천명을 무너뜨리지 마소서.”
하니,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 나라의 후(侯)ㆍ전(甸)ㆍ남(男)ㆍ위(衛)들이여! 나 교(釗)는 고명(誥命)으로 답하노라. 옛 임금 문왕(文王)ㆍ무왕(武王)께서 후(侯)를 두고 번병(藩屛)을 세운 것은 우리 뒷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비록 너희 몸은 밖에 있더라도 너희 마음은 왕실(王室)에 있지 않은 때가 없게 하되 나의 근심 걱정을 순조롭게 받들어 어린 나에게 수치가 없도록 하라.”
하매, 여러 공들이 모두 명령대로 들었다.
또한 필공(畢公)을 책명(册命)하여 성주(成周)의 민중으로 동교(東郊)를 보호하여 다스리도록 하고, 왕은 홍범(洪範) 대로 준행하여 신명과 사람을 공경하고 공대하니, 사방 오랑캐들이 찾아와 복종하여 해내(海內)가 편안하고 백성들은 예의(禮義)에 고무(鼓舞)되어 감옥이 비었다.
성왕(成王)과 강왕 시절은 천하가 평안하여 형벌을 버려 두고 쓰지 않은 지 40여 년이나 되어, 당ㆍ우(唐虞) 때의 풍조가 있었다.

소왕(昭王) 이름은 하(瑕), 강왕의 아들로 재위 51년.
왕은 재위한 지 오래였으나 정사에 강력(彊力)하지 못하여 풍화(風化)가 점점 쇠퇴했는데, 이때 달에 이상한 오색(五色) 빛이 있어 자미성(紫微星)을 꿰었고, 우물은 물이 넘쳤다.
초(楚)나라 사람들이 조회하러 오지 않으므로, 왕이 남방(南方)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 한수(漢水)를 건너는데, 한수 가의 사람들이 아교로 만든 배[膠船]로 건네주니, 중류에서 아교가 녹아 왕 및 채공(祭公)이 모두 빠져 죽었다.

목왕(穆王) 이름은 만(滿), 소왕의 아들로 재위 55년.
초년에 어진 인재를 들어 쓰되, 군아(君牙)를 명하여 대사도(大司徒)를 삼으며 군아(君牙 《서경》의 편명)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마음이 위태롭고 근심스러움이 마치 범의 꼬리를 밟고, 봄 얼음을 건너는 것 같다.”
하였다.
백경(伯冏)을 명하여 대복정(大僕正)을 삼으며 《경명》(冏命 《서경》의 편명)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두렵고 위태로워 밤중에 일어나 허물없게 되기를 생각한다.”
하였으니, 이때는 왕의 마음이 방자하지 않았다.
장차 견융(犬戎)을 정벌하게 되자, 채공(祭公) 모보(謀父)가 간하기를,
“선왕(先王)들께서는 덕을 빛내셨고 군사를 보이지 않으시어, 위엄으로 꾸짖는 명령이 있었고 글로 이르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오지 않으면 더욱 덕을 닦았으니, 백성들을 먼 데까지 근로하게 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흰 이리 네 마리와 흰 사슴 네 마리를 사냥하여 돌아왔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황복(荒服 경기(京畿)에서 가장 먼 곳. 즉 만이(蠻夷))들이 오지 않고 제후들이 화목하지 않은 자가 있게 되어 주나라의 덕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또한 동(東)으로 순수(巡狩)하여 정(鄭)나라 대암(大) 골짜기까지 가서 춘소궁(春霄宮)을 세우고 모든 방사(方士)들을 모아 신선(神仙)되는 일을 이야기했고, 조보(造父)가 팔준마(八駿馬)를 구득하여 왕에게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두루 천하를 다니면서 신선을 구하려 하였다.
이에 서쪽으로 순수(巡狩)를 나가 즐거워 돌아오기를 잊고 백운(白雲)ㆍ황죽(黃竹)의 노래를 지으니,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고 원망했는데, 서언(徐偃)이 인의(仁義)를 닦는 체 가장하자, 제후(諸侯)들이 그에게 돌아가는 자가 많으므로 참람하게 왕이라 일컬었는데, 왕이 듣고 급히 돌아오자 조보(造父)가 어자(御者)가 되었다. 제후들의 군사를 일으켜, 형(荊)ㆍ초(楚)와 합세하여 서(徐)를 쳐 패멸시키니, 서언이 도망가 죽었다.
얼마 안 되어 왕이 또 나가 놀려고 하므로 채공(祭公) 모보(謀父)가 기초(祈招)의 시(詩)를 지어 왕을 풍자(諷刺)하매, 왕이 감동하여 중지하고 사령(辭令)을 닦아 제후들을 포섭하고 사이(四夷)들을 회유하도록 명하니, 주나라 왕실(王室)이 다시 편안해졌다.
말년에 이르러 왕이 재위한 지 오래여서 교화(敎化)가 쇠퇴하고 형벌이 번거롭자 안정시키려고 생각했으니, 그래서 여형(呂刑 《서경》의 편명)을 짓게 된 것이다.

공왕(共王) 이름은 예호(繄扈), 목왕의 아들. 재위 10년.
왕이 경수(涇水) 가에 놀러가자, 밀(密)의 강공(康公)이 따라갔는데 그에게로 도망온 여자 셋이 있었다. 그 어미가 말하기를,
“반드시 왕께 바쳐라. 대체로 계집이 셋이면 찬(粲)이 되는 법인데, 찬(粲)이란 아름다운 것이니, 무슨 덕(德)으로 감당하겠는가? 왕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 터인데, 더구나 너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겠는가?”
하였는데도, 강공이 바치지 않았는데, 1년 뒤에 왕이 밀(密)을 멸망시켜버렸다. 여색(女色)이 나라를 기울어뜨림이 진실로 이러한 것인가 보다.

효왕(孝王) 이름은 벽방(辟方), 의왕(懿王)의 아우로 재위 15년.
악래(惡來)의 후예에 비자(非子)란 자가 있었는데, 말을 좋아하여 잘 기르므로 왕이 말을 맡아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에서 기르도록 하니, 말이 크게 번식했다.
왕이 진(秦)에 도읍하게 하였는데, 이때 크게 우박이 내리며 강한(江漢) 지방이 얼어붙어 소와 말이 죽었었다. 진(秦)나라가 처음 봉작(封爵)될 때에 재변이 나타나 살기(殺氣)가 이와 같았으니, 서리를 밟는 형상[履霜之象]의 조짐이 이미 이때 있었다. 천도(天道)란 화복(禍福)이 붙어 다니는 것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이왕(夷王) 이름은 섭(燮), 효왕의 아들로 재위 16년.
조근(朝覲)하는 예가 밝지 못하여 왕이 비로소 당(堂)에서 내려와 제후(諸侯)를 보았으니, 강상(綱常)이 이때부터 문란해졌다.
이때 형(荊)의 웅역(熊繹)의 손자 웅거(熊渠)가 강한(江漢) 백성들의 인심을 많이 얻어, 서쪽으로 용(庸)을 치고 동으로 양월(楊粤)을 침략하며 참람하게 삼자(三子)를 세워 왕을 삼았고, 위(衛)의 강공(康公)의 7대 손자 경공(頃公)이 맨 먼저 왕제(王制)를 무시하고 패ㆍ용(邶鄘)의 땅을 병합(並合)하였다.

여왕(厲王) 이름은 호(胡), 이왕의 아들로 재위 40년.
《시경(詩經)》의 변아(變雅)가 처음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영이공(榮夷公)이 이(利)를 전력(專力)하기 좋아하여,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대부(大夫) 예양부(芮良夫)가 간하기를,
“대체로 이(利)라는 것은 온갖 것이 나게 되는 바이고, 천지가 싣고 있는 바입니다. 남의 임금 노릇하는 자는 장차 이롭도록 인도하되 상하(上下)에 펼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함이 없게 하고도 오히려 날마다 조심조심하여 원망이 올까 두려워하는 것인데, 지금 왕께서는 이(利)에 전력하기를 좋아하시니 되겠습니까? 필부(匹夫)가 이(利)에 전력하더라도 오히려 도둑이라 하는데, 왕께서 행하시니 잘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영공(榮公)을 만약 임용한다면 주나라가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경사(卿士)를 삼았는데, 용사(用事)하여 정사가 더욱 포악하므로 사이(四夷)가 서로 침략하고, 취렴(聚斂)이 잦아 백성들을 혹독하게 부리므로 백성들이 그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여 모여서 왕을 비방하였다.
왕이 위무(衛巫)를 얻어서 비방을 감시하여 고하도록 하여 문득문득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왕이 기뻐하여 소공(召公)에게 말하기를,
“내가 능히 비방을 없앴다.”
고 하니, 소공이 말하기를,
“이는 막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입을 막기란 개울을 막기보다 심하여, 개울이 막혔다가 터지면 반드시 사람이 많이 상하게 되는데, 백성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물을 다스리는 자는 터 놓아 잘 흐르도록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알리어 말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3년이 되자, 백성들이 왕의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여 난을 일으켜 왕을 체(彘) 땅으로 내쫓았는데, 14년에 왕이 체에서 붕(崩)하였다.

선왕(宣王) 이름은 정(靖), 여왕의 아들로 재위 46년.
왕이 즉위하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으로 보필(輔弼)을 삼았다. 왕은 쇠퇴하고 혼란한 뒤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가뭄이나 재난을 두려워할 줄을 알아 몸을 조심하고 행실을 닦아 천변(天變)을 풀며, 어진 이를 임용하고 유능한 사람을 써 쇠퇴함을 일으키고 혼란을 수습했다.
산보(山甫)는 임금의 실수를 보조하도록 하고, 신백(申伯)은 사방 나라와의 관계를 번창하도록 하였다.
소공(召公)에게는 회이(淮夷)를 평정하도록 하고 길보(吉甫)는 험윤(玁狁)을 정벌하도록 하며, 방숙(方叔)은 만형(蠻荊)을 정벌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능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때의 강토를 회복하고 제후(諸侯)들을 동도(東都)에 모아 주나라 왕실이 중흥(中興)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때에는 안에 어진 강후(姜后)가 있어 비녀와 귀걸이를 빼며 간하여, 일찍 조회하고 늦게 파하도록 보필하여 정사에 부지런하게 한 일이 많았었다.
애석하게도 적전(籍田)을 닦지 않아 괵공(虢公)이 간하였으나 허사였고, 천묘(千畝)에서 싸워 패하자 인구 수를 헤아렸고, 두백(杜伯)을 애매한 죄로 죽임으로써, 기보(祈父)ㆍ백구(白駒)ㆍ황조(黃鳥)의 시(詩 3편 모두 《시경》 소아(小雅)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시인(詩人)의 풍자를 면하지 못하였는데, 당시에 사마(司馬)의 직책이 적임자가 아니고, 어진 이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려 했지만 되지 않아, 말년에는 민생들이 대개 제 곳을 잃은 자가 있었다.

유왕(幽王) 이름은 궁열(宮涅), 선왕의 아들로 재위 11년. 유왕으로부터 25대 만에 난왕(赧王) 연(延)에 이르러 멸망했다.
주색(酒色)에 빠져 방탕하므로 참소하는 자들이 판을 치고, 취렴(聚斂)이 번다하고 무거워 백성들이 시름하고 원망했으며, 예(禮)와 신의로써 제후(諸侯)를 대하지 않고 상벌(賞罰)이 합당하지 않아 제후들이 원망하며 배반했다.
처음에 왕이 신후(申后)를 사랑하여 태자 의구(宜臼)를 낳았는데 뒤에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백복(伯服)을 낳았다. 괵석보(虢石父)와 포사가 신후(申后)와 태자를 참소하니, 왕이 그들을 폐하고 포사를 후(后),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포사가 교태를 부리며 방자하여 왕이 혹하니, 시인(詩人)이 그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이 풍자하였다.
한창 타는 불 / 燎之方揚
끌 수 없는 법 / 寧或滅之
혁혁하던 주나라를 / 赫赫宗周
포사가 망치네 / 褒姒滅之
의구(宜臼)가 신(申)으로 달려가자, 신후(申侯)가 노하여 견융(犬戎)과 함께 주나라를 쳐 왕을 여산(驪山) 아래에서 죽이니, 제후들이 동쪽으로 옛 태자를 신(申)에서 맞이하여 돌아와 왕으로 세우니 이가 평왕(平王)으로서, 주나라 도가 드디어 동쪽으로 옮기었다.
이 뒤부터 주나라 왕실이 미약해지고 제후들이 강성, 참람하여 평왕(平王) 때의 시(詩)가 국풍(國風)으로 내려지고, 환왕(桓王)의 정(鄭)나라 정벌이 마침내 공효가 없게 되어, 오패(五覇)의 일어남이 장왕(莊王) 때에 시작하여 정왕(定王) 때에 끝났는데, 일곱 왕을 거치는 동안 75년의 오랜 세월을 정권이 패주(覇主)에게 있게 되니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어 기록했다.
위렬왕(威烈王)에 이르러 진(晋)나라 대부를 봉하여 제후(諸侯)를 삼자, 왕법(王法)이 더욱 무너져 일곱 나라가 기세를 올리며 저희끼리 서로 침략하고 멸망시켜, 주나라의 예악(禮樂)과 정벌이 천자(天子)에게서 나오지 않고 한갓 헛 명칭만 제후들 위에 띠고 있었으니, 이는 역시 취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그윽히 논하여 보건대, 주나라의 쇠퇴하고 미약함이 이러하였는데도 오히려 또한 수백 년 길게 끌고 간 다음에 망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대개 문왕(文王)ㆍ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강령[經]을 세우고 기율(紀律)을 마련함과, 법령을 창건하고, 도를 작정하기를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이 하되, 인(仁)으로써 굳게 결속(結束)하고 예(禮)로써 유지(維持)시켜, 근본이 단정하고 근원이 깊게 하여서 저절로 하늘과 더불어 한이 없을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진후(晋侯)가 강성했지만 그가 청하는 수도(隧道)를 왕장(王章 천자의 법)을 들어 허락하지 않을 수 있었고, 초자(楚子)가 참람했지만 그의 문정(問鼎)을 천명(天命)이 변함없는 것으로써 저지했으며, 진(秦)나라를 황제로 하자는 말에 이르러서도 필부(匹夫)의 의론에 굴하게 된 것이다.
아아, 난왕(赧王)같이 지나치게 유연(柔軟)하고 나약(懦弱)하여 쇠퇴하고 침삭(侵削)당하는 인군이 있지 않았던들 비록 호랑(虎狼)과 같은 진(秦)나라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자가 영왕(靈王) 21년, 경술(庚戌)에 출생하였다. 비록 왕위(王位)는 얻지 못했으나, 《서전(書傳)》ㆍ《예기(禮記)》를 서(叙)하고, 악(樂)을 바로잡으며 《역(易)》에 계사(繫辭)를 짓고 《춘추(春秋)》를 지어, 실로 복희(伏羲)ㆍ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의 도통(道統)을 계승, 후세에 전했으니, 비록 그때에 있어 동주(東周)를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대체로는 역시 만세토록 동주(東周)가 실현되게 한 것이니 아아, 훌륭한 일이다.

 

(漢)

 

고조(高祖) 성은 유(劉), 이름은 방(邦).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화덕(火德)으로 임금 노릇하였다. 재위 12년.
제(帝)는 포의(布衣) 출신으로, 삼척검(三尺劍)을 차고 진(秦)나라를 항복시키고 항우(項羽)를 무찌르며, 위(魏)나라 임금을 사로잡고 조(趙)나라를 무너뜨리고 연(燕)나라를 항복받고, 제(齊)나라를 쳐부수어 5년이 못되어 드디어 제위(帝位)에 올랐으니, 어찌 그리 성공이 빨랐는가?
제(帝)가 말하기를,
“유악(帷幄)에서 전쟁 계획을 짜 천리 밖의 승부(勝負)를 결단하는 것은 내가 자방(子房 장량(張良)의 자)만 못하고, 국가를 진정시켜 백성들을 돌보고 군량(軍糧)을 공급하여 식량이 끊어지지 않게 함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고, 백만 군사를 동원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들은 모두 인걸(人傑)인데 내가 잘 썼으니, 이래서 내가 천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하지만 어찌 그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제(帝)가 너그럽고 인자하게 사람을 사랑하여 마음이 활달했고, 언제나 큰 도량으로 사람을 알아보아 판단하기를 잘했으니, 이는 아름다운 덕성(德性)을 천품(天禀)으로 받은 것이다.
관중(關中)에 들어간 처음에 부로(父老)들과 삼장(三章)의 법으로 약속하기를,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사람을 상(傷)하거나 도둑질한 자는 죄를 주고, 그 나머지 진(秦)나라 법은 모두 없앤다.”
고, 하였으며,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시해(弑害)함에 미쳐서는 그를 위해 발상(發喪)하고 삼군(三軍)에게 상복을 입혔으니, 이는 인의(仁義)의 마음이 행사에 나타난 것으로서, 삼대(三代) 때에 천하를 얻은 것도 역시 이에 지나지 않는다.
천하가 이미 정해지자, 계포(季布)를 놓아 주고 정공(丁公)을 베어군신(君臣)의 큰 의리를 보이고, 공신(功臣)을 봉하고 동성(同姓)을 봉하되 말하기를,
“공이 있는 자가 아니면 후(侯)가 되지 못하고,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한다.”
한 것은, 깊고 원대한 생각을 한 것이다.
율령(律令)을 서차하고 군법(軍法)을 밝히며 장정(章程 조목으로 나누어 정한 규정)을 정하고 조의(朝儀)를 제정하였는데, 이는 모두 제작해야 할 중요한 것으로서 자손들이 가지고 지켜가야 할 것들이다.
노(魯)나라를 지나다가 공자께 제사하고, 군국(郡國)에 조서를 내려 덕이 밝은 사람을 천거하며, 전조(田租 세금)를 15분의 1세(稅)로 감하였으니, 그 선성(先聖)을 존숭하고 어진 선비를 예우(禮遇)하고 백성들을 아낀 뜻이 어떻다고 하겠는가?
한스러운 것은, 제(帝)의 천성(天性)이 비록 총명하고 활달했지만 학문의 힘으로 연마하고 다스림이 없어서, 공업(功業)을 가지고 부형들에게 교만을 부리고, 작록(爵祿)을 가지고 신자(臣子)들에게 교만을 부리되, 운몽(雲夢)에 위유(僞遊)하여 공신(功臣)이 보호되지 않기 시작하였고, 사사로운 사랑에 끌려 국본(國本 세자(世子)를 뜻함)이 흔들릴 뻔했으니, 인도(人道)의 큰 윤리에 있어서는 다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
또한 그의 대풍가(大風歌) 한 편은 의기가 호방하고 역량이 웅장하여, 비록 나라 세력을 4백 년이란 오랜 동안 떨칠 수 있었지만, 패업(覇業)에 마음이 있어 삼대(三代)의 성왕(聖王)들을 따르지 못했으니 아까운 일이다.

혜제(惠帝) 이름은 영(盈), 고조의 아들로 재위 7년.
전조(田租)를 감하고 관원의 녹(祿)을 후중하게 주며, 효도하고 우애하며 농상에 힘쓰는 사람을 천거하여 그 자신을 복호(復戶 충신ㆍ효자 등 공이나 절행이 있는 집안의 부역을 면제하는 일)하고 협서율(挾書律)을 없애며, 백성들의 나이 70세 이상과 10세가 되지 못한 자는, 죄가 있어 형벌해야 하더라도 모두 용서해 주었으니, 이는 다 정사를 잘한 것이다.
이때에 있어 조참(曹參)이 정승이 되어 청렴하고 조용하게 직책을 지키므로, 제(帝)는 공수(拱手)하고 바라만 보고 있어도 공이 이루어져, 천하가 태평하고 의식이 풍족하여지매, 안으로는 친친(親親)의 도리를 닦고, 밖으로는 재상(宰相)들을 예우(禮遇)하여 제도(齊悼)와 조은(趙隱)을 우대하고 신임했으니, 은혜와 공경이 두터웠다.
모후(母后)가 지덕(至德)을 손상함에 당해서는 노원(魯元)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생녀(甥女)를 맞아 후(后)를 삼았고, 장후(張后)가 후손이 없기 때문에 궁인(宮人)을 죽이고 그 아들을 데려다가 후사(後嗣)를 삼았으니 제(帝)가 인륜의 큰 대목에 있어서는 모두 정당하지 못하였다.

문제(文帝) 이름은 항(恒), 고제(高帝)의 차자이다. 대(代) 땅에 봉작(封爵) 되었다가 여씨(呂氏)들이 멸망하자 맞아서 세웠다. 재위 23년.
제(帝)가 재위한 23년간의 좋은 정사를 찾아본다면, 국본(國本)을 세우고 절검을 장려하며, 덕화를 숭상하고 형옥을 돌보며, 근본에 힘쓰고 백성을 아끼며, 언로(言路)를 트고 현량을 들어 쓰며, 공헌(貢獻)을 억제하고 겸손을 숭상하여, 관원들은 그의 직책에 안정되고 백성들은 그의 생업에 안락했다.
그러므로 저축이 해마다 늘고 호구(戶口)가 번식되며, 법망(法網)을 늦추고 형벌이 크게 줄어져, 수백 명의 옥사를 결단하여 거의 형벌을 놓게 되었으니, 아아, 어진 임금이었다.
유독 등통(鄧通)을 총애하여 수만 금을 상사(賞賜)하고, 황로(黃老 도교(道敎))의 말을 좋아하여, 그 존숭하는 바가 틀렸었다.
조조(鼂錯)의 술수설(術數說)을 좋게 여겨 그를 태자 가령(太子家令)으로 제배(除拜)하여, 오로지 형명(刑名)을 숭상하여 너무 준엄하고 각박하게 하다가 7국(七國)의 변이 일게 하였고, 경제(景帝)를 마침내 각박하고 술수를 부리는 인군이 되게 하였으니, 자손에게 계책을 남기는 도리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제(高帝) 이래 수십 년 동안의 제도를 마땅히 세워야 할 것과 교화(敎化)의 마땅히 닦아야 할 바를 그야말로 가생(賈生 가의(賈誼)를 말함)이 청하였는데도, 미루기만 하여 겨를을 내지 못하다가, 드디어 고루한 대로 인습(因襲)하고 간략한 대로만 하여서 교화가 시행되지 못하여, 부민(富民)은 금수(錦繡)로 담장과 집을 덮게 되고, 공경 대부(公卿大夫) 이하가 다투어 사치를 법도 없이 하게 되어 호협(豪俠)한 무리가 여리(閭里)를 횡행하고, 군상(君上)의 은혜는 삼대(三代) 때보다 지나치고, 아래 백성들의 고통은 망한 진(秦)나라보다도 심각하였으니, 이는 제(帝)를 위하여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경제(景帝) 이름은 계(啓), 문제의 아들로 재위 16년.
즉위 초에 전세(田稅)의 반을 면제하고 태율(笞律)을 가볍게 하는 법을 정하여, 족히 칭도할 만한 것이 있었으나, 아깝게도 은혜가 박하여 황후(皇后)를 폐하고, 죄 없는 태자를 베었으며, 양왕(梁王)에게 전위(傳位)한다고 경솔하게 허락하여서 왕으로 하여금 좋게 마칠 수 없게 했고, 신도가(申屠嘉)는 강직하여 가상한데도 폄출(貶黜)되어 죽었고, 주아부(周亞夫)는 7국(七國)을 평정한 공을 잊을 수 없는데도 귀양을 가서 죽었으며, 오왕(吳王)이 반역한 것은, 태자를 죽일 때에 쌓였던 원망이 특히 땅을 깎이던 날에 터졌던 것인데, 갑자기 조조(鼂錯)를 베는 것으로써 답했으니, 조조는 실로 돌볼 것이 없지만, 어찌 대체(大體)에 손상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장석지(張釋之)의 핵주(劾奏)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회남(淮南)으로 내쫓아 죽게 하고, 등통(鄧通)이 등창을 빤 것을 원망하여서는 괴롭게 강박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가 인륜(人倫) 사이에 있어서 각박하고 술수를 부려, 장해(戕害)하고 살륙(殺戮)하기를 일찍이 조금도 참지 않고 하였으니, 자부(慈父 문제(文帝)를 가리킴)와 동일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문제(文帝)는 너그럽고 인자하며 큰 도량이 고조(高祖)의 풍모가 있어 덕(德)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되, 일이 없을 때는 겸손하여 마치 무능한 것 같았으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영무(英武)를 분발하였다. 경제는 시기하고 각박하여 은혜가 없으며, 인군의 역량은 없이 권모 술수로 아랫사람을 단속하되, 평소에는 베이고 상주기를 마음대로 하다가, 급박할 때에는 두려워하며 어쩔 줄을 몰랐으니, 부자이지만 마음가짐과 일 처리함이 크게 서로 반대되었다.
역사에 문제와 경제를 병칭(並稱)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개 절약하고 검소하여 망령되이 허비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길러 풍성하고 부(富)하게 하였으니, 비록 큰 왕업(王業)을 잘 지켰다고는 할 만하나 그 소위 풍속이 순후(淳厚)해졌다는 것은, 어찌 제(帝)가 그 아버지 문제의 깊은 인자와 후한 덕택 배양(培養)하기를 흡족하게 한 결과를 힘입어서, 따라서 같이 일컫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무제(武帝) 이름은 철(徹), 경제의 아들로 재위 54년.
젊은 나이에 영특하고 예민한 자질과 웅걸한 재주에 큰 도량을 천품(天禀)으로 타고났다. 즉위 초에 탁연히 백가(百家)를 물리치고 육경(六經)을 표장(表章)하였으며, 해내(海內)에 두루 물어 준걸(俊傑)들을 임용하여 같이 공을 세웠고, 또한 천하의 문학(文學)ㆍ재지(才智)의 선비를 초빙 선발하여, 차서를 뛰어넘은 지위로 우대하니, 역사에 그가 인재를 얻음이 성대하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신진(新進)들이 권세를 부리고 대신들은 물러가 위축(萎縮)되고, 환관(宦官)들이 상서(尙書)의 자리를 차지하여 외정(外庭)이 소원(疎遠)해졌으며, 승상(丞相)을 가려 쓰지 않은 사람이 많은 데다가 베임을 당한 자가 다섯인데, 곡학아세(曲學阿世)한 공손홍(公孫弘)이나 예관(兒寬) 같은 무리야 말할 것이 없지만, 노유(老儒) 신공(申公) 같은 사람은, ‘역행(力行)’ 하라는 한 마디 말을 했다가, 마침내 방귀(放歸)되었고,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 같은 이는 《춘추(春秋)》의 삼책(三策)을 건의하였는데도 겨우 강도(江都)에서 상승(相丞) 노릇을 했으며, 정직한 급암(汲黯) 같은 사람은 ‘욕심이 많다.’는 대답을 했다가 하내(河內)에서 내사(內史) 노릇을 했으니 인재 얻기를 성대하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얼마 되지 않아 제사 지내고 빌기를 숭상하여 신선(神仙)을 구하고, 토목(土木)을 일으키고 순행(巡幸)을 일삼으며, 상서가 있기를 믿는 데다가, 형을 엄하게 하고 벌(罰)을 가혹하게 하여, 무공(武功)을 세우려 군사를 남발(濫發)하다가 용도가 부족하게 되자, 취렴(聚斂)이 한이 없게 되어 민력(民力)이 탕진되고 재용(財用)이 고갈되었으며, 따라서 흉년이 들고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도로가 통하지 못했다.
제(帝)는 그래도 스스로 반성하지 아니하여, 강충(江充)이 난을 꾸미매 화가 태자(太子)에게 미치고, 위후(衛后)가 정당한 죽음을 얻지 못했었다. 화변(禍變)이 이미 극심해진 연후에야 서서히 통폐가 진정되어 그제야 비로소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 이에 방사(方士)를 파하고 윤대(輪臺)를 버리고서, 애통하게 여기는 조서(詔書)를 내려 근본에 힘쓰며 농사를 권장하였고, 곽광(霍光)과 김일제(金日磾)를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발탁하여 탁고(託孤)하는 부탁을 하였으니, 역시 밝고 원대하다고 하겠다.
대저 제(帝)의 소위는 모두 진시황(秦始皇)이 실패한 길을 답습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끝내 회복할 줄을 몰라, 호해(胡亥)ㆍ조고(趙高)가 이를 계승한 것이 마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제는 뉘우치고 깨달아 간절하게 자책하였으니, 소제(昭帝)와 곽광이 계승하되 착하게 하였기 때문에, 진나라와 한(漢)나라의 흥망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아아, 뉘우침이 비록 늦기는 하였지만, 한 번 생각의 착함이 그 효과가 이러하였으니, 왕통(王通)이 추풍가(秋風歌)는 그야말로 뉘우치는 마음이 싹튼 것이라고 한 말은 사실이라 하겠다.

소제(昭帝) 이름은 불릉(弗陵), 무제의 소자(少子)로 재위 13년.
14세에 상관(上官)ㆍ연(燕)ㆍ개(蓋)의 거짓말을 분간하고, 곽광(霍光)의 충성을 믿었다. 무제(武帝)의 사치하고 군사를 남용한 뒤를 이어받아, 나라 안이 비게 소모되고 호구(戶口)가 반으로 줄었는데, 곽광이 시무의 요점에 밝아, 먼저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의 선비를 들어 쓰고,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 전조(田租)를 없애고 말[馬] 내는 것을 중지하게 하였으며, 염철(鹽鐵)의 각고[榷 전매(專賣)]를 의논해서 파하고 마구전(馬口錢)을 면제하며, 민부전(民賦錢)을 10분의 1로 감하니, 누란(樓蘭)이 목을 바치고, 흉노(匈奴)가 화친하여 오며, 백성들이 충실해져, 차차 문제(文帝)ㆍ경제(景帝)의 업적을 회복했으니, 국맥(國脈)을 배양함이 어떠하였겠는가? 하늘이 나이를 더 주어서, 다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같은 보좌(輔佐)를 얻게 하였다면,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라도 짝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제(宣帝) 이름은 순(詢), 무제의 증손이다. 곽광이 정책(定策)하여 세웠다. 재위 25년.
제(帝)는 민간에서 자랐고, 재주가 높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시경(詩經)》ㆍ《논어(論語)》ㆍ《효경(孝經)》을 배웠고, 여염(閭閻) 백성들의 간난(艱難)함과 또한 관리들이 급박하게 구는 것을 괴롭게 여김을 알아, 즉위 초에 맨 먼저 군국에 조서(詔書)를 내려 양민(養民)을 삼가고 힘쓰도록 하되, 덕화(德化)를 두루 펴고 너그러움과 온화함을 숭상했다.
곽광이 죽은 뒤에는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를 하여, 5일에 한 번씩 정사를 들어 승상(丞相) 이하가 직책을 잘 거행하여 일의 성과를 올렸다.
현량(賢良)을 들어 쓰고 둔전(屯田)을 혁파하며, 행행(行幸)하지 않는 지어(池籞 원유(苑囿))는 폐지하도록 하고, 군국(郡國)의 궁관(宮館)을 다스리지 말고 빈민(貧民)들에게 빌려 주도록 하여 소금 값을 감하고 갇힌 죄수를 엄하게 다스렸다.
매양 자사(刺史)를 제배(除拜)하려면 곧 친히 보며 백성 다스리는 일로 물어 보아 다스린 공효가 있는 사람이면 곧 새서(璽書)하여 권면 격려하고, 공경(公卿)의 자리가 비면 차례로 임용하며, 문학(文學)을 중히 여기고, 장상(將相)을 가리니, 무릇 정사(政事)ㆍ문학ㆍ법리(法理)의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재능이 정밀해졌으며, 이적(夷狄)들이 와서 복종하고, 변경에 일이 적었으니, 역사에, 공은 조종(祖宗)들보다 빛나고 업적은 주선왕(周宣王)과 비등하다고 일컬은 것이 틀리겠는가?
그러나 당시의 법제(法制)가 지나치게 자상하고 도덕이 부족했었다. 그러므로 인심(人心)의 간사함이 더욱 심각해져서 공도 없는 자들이 상을 받게 되고 죄 있는 자들이 형벌을 면하여서, 속이고 엄폐하는 일이 쏟아져나와 금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홍공(弘恭)ㆍ석현(石顯)을 임용(任用)하고 허ㆍ사(許史 허는 선제의 황후 친정을 말하며 사는 선제의 외가집)를 귀하게 여기다가 뒷날 환관(宦官)과 외척(外戚)의 화를 열어 놓았고, 양운(楊惲)ㆍ한연수(韓延壽)를 멸족(滅族)함으로써 뒷날 대신을 살륙하는 발단을 열어 놓아, 이 세 가지 흔단(釁端)을 만들었다가 마침내 한(漢)나라를 망하게 했다.
이로 본다면, 사물(事物)의 본말을 밝혀 정신을 가다듬어서 한 정사는 비록 한때 관원들이 그 직책을 다하게 되고 백성들이 그 업에 안정되도록 하기는 하였으나, 고제(高帝)와 문제(文帝)의 충후(忠厚)하고 관인(寬仁)한 국맥(國脈)은 여지없이 깎이어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시서(詩書)와 법률(法律),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나머지 형벌이 한(漢)나라 왕실의 화가 터잡는 근본이 되었다.’고 한 것이니, 이 말이 옳다.

원제(元帝) 이름은 석(奭), 선제의 아들로 재위 16년.
즉위하면서부터 공전(公田)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주어 진휼하고 업(業)을 삼게 하고 종자(種子)를 빌려 주어 갈아 먹게 하며, 악부(樂府)의 관원을 감하고 원유(苑囿)의 말[馬]을 줄여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며 궁관(宮館)을 폐지하고, 말ㆍ짐승과 육식(肉食)을 감하여 가난한 백성에게 빌려 주며, 부모 없는 사람과 과부, 나이 많은 자에게 비단을 내리고, 사신(使臣)을 보내어 기로(耆老)와 부모 없는 사람과 직업 잃은 사람을 위로하되, 거의 거르는 해가 없이 하였으니, 인자하고 어진,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유술(儒術)을 좋아함에 있어서도 모두 임금의 아름다운 일이었으나 유독 애석한 것은 강단(剛斷)이 부족하고 유약이 지나쳐 허ㆍ사(許史)가 정사에 간여하고 공ㆍ현(恭顯)이 권세를 부리게 하여 소망지(蕭望之)ㆍ주감(周堪)ㆍ경방(京房)ㆍ장맹(張猛)ㆍ소건(蘇建)이 모두 충성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매, 공경 이하가 현(顯)을 두려워하여 옆으로 발을 비켜섰고,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환시(宦寺)에게 달려 있었으니, 서한(西漢)의 쇠퇴가 이에서 결정된 것이다.

성제(成帝) 이름은 오(鷔), 원제의 아들로 재위 26년.
용의(容儀)를 잘 다듬고 조회(朝會)에 임하여 침묵하고 있으면 존엄(尊嚴)하기가 신(神)과 같아, 천자(天子)의 목목(穆穆)한 모습이 있었다.
천하의 전해 오는 책을 구하여 들이되, 유향(劉向)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교서(校書)하도록 하였으니, 문학(文學)을 숭상할 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즉위 초년에 맨 먼저 원구(元舅 임금의 맏 외삼촌) 왕봉(王鳳)을 임용, 대사마 영상서사(大司馬領尙書事)를 삼았고, 하루 동안에 후(侯)로 봉작(封爵)된 자가 다섯 사람이나 되었다.
석현(石顯)을 벼슬에서 내쫓아 환시(宦寺)들의 피해를 비록 없애기는 했지만, 정사를 왕씨(王氏)에게 맡겨서 외척의 화가 더욱 심해졌고, 제는 바야흐로 주색에 빠져 비연(飛燕)에게 고혹(蠱惑)되고, 적봉(赤鳳)이 내란을 일으켰으며, 허후(許后)를 폐위시켜 죽였다.
유향(劉向)ㆍ왕장(王章)ㆍ주운(朱雲)ㆍ매복(梅福)의 정성과 충성이 간절했으나 마치 돌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 마음을 피력(披瀝)한 정직한 의논이 걸핏하면 칼을 겨누는 일을 당하였고, 유독 두흠(杜欽)ㆍ곡영(谷永) 장우(張禹)ㆍ공광(孔光)의 무리들이 권신(權臣)에게 아첨하여 상의 총애를 보존하고 녹을 굳히었다.
제의 일을 고찰하건대, 혼매하고 나약함과 유연(柔軟)하고 악함이 이러하였으니, 한(漢)나라 국운이 자신에게서 옮겨지지 않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애제(哀帝) 이름은 흔(欣), 원제(元帝)의 서손(庶孫). 재위 6년.
제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정사가 외가(外家)에 맡겨져 왕씨(王氏)가 참람하고 강성함을 보았기에, 맨 먼저 이들을 파면하여 정사가 자신에게서 나오도록 했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부(丁傅)와 동현(董賢)이 서로 이어 총애를 받아 임용되어 권세를 부렸고, 대신을 베어 죽였으니, 제는 어찌 이다지 생각이 부족했었는가? 왕씨는 제거해야 하고 정부는 유독 써야 했단 말인가?
제는 또한 동굉(董宏)의 말을 들어 주어, 차라리 선제(先帝)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친(私親)의 칭호를 높이려 하여, 한 번 생각을 잘못 먹자 드디어 여러 사람의 마음에 거슬렸는데, 소인 왕망(王莽)이 공론(公論)이 이러함을 알았기 때문에, 동굉을 탄핵하므로서 누차 내쫓기는 것을 달갑게 여겨 그의 간계를 좋게 보이도록 하매, 공경 대부(公卿大夫)들이 듣고서 정직하게 여겨 왕망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1백이 넘어, 왕망이 뜻을 얻게 되었다.
망은 이로부터 뜬 칭찬이 날로 높아지자, 드디어 큰 권세를 잡아, 한(漢)을 고쳐 신(新)이라 하였으니, 화의 조성(造成)이 이에서 비롯한 것이요, 또한 제의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 스스로 인심을 잃게 되어, 태아(太阿 보검(寶劍)의 이름. 여기서는 왕위를 뜻함)를 거꾸로 들어 왕망에게 주게 된 것이다.

광무(光武) 이름은 수(秀), 고제(高帝)의 9대 손자이다. 낙양(洛陽)에 도읍했다. 재위 33년.
제는 재주 있고 총명하여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어서 진실로 상대될 사람이 없었고, 또한 마음을 터놓고 정성을 내보여 숨기는 바가 없었으며, 영웅들을 맞아들이고 민심을 기쁘게 하려고 힘써, 넓고 큰 도량이 고조(高祖)와 같았다.
28명의 장수가 모두 지혜와 용맹을 분발하여 좌명(佐命)의 공적을 성취시키되, 뭇 간웅(姦雄)들을 베어 없애고 참람하고 반역하는 자를 토벌, 제거하여 10여 년 동안에 나라 안이 평정되어 고조(高祖)의 업적을 수립(樹立)하고 만백성의 생명을 구제하여, 혁연(赫然)하게 중흥하였다.
또한 그 노리(老吏)들은 한(漢)나라 관원의 위의를 보자 눈물을 흘렸고, 아전과 백성들은 절ㆍ월(節鉞)을 든 행렬을 환영했던 것은, 인심(人心)이 돌아온 것이요, 호타하(滹沱河)가 얼어 왕낭(王郞)의 구구(購求)를 면하게 된 것은, 천심이 돌아온 것이다.
지금에 본다면, 명유(名儒)들을 초빙(招聘)하고 옛 제도를 확정하며 순리(循吏)를 불러내고 관인(寬仁)한 사람을 임용하며, 은자(隱者)에게 좌석을 비켜 주어 명절(名節)을 제창하고, 공신을 보호하여 같이 부귀를 누렸다.
농사짓기가 힘드는 것을 보고서는 까다로운 정사를 없애고, 가벼운 법을 회복했으며, 호구(戶口)가 감소되는 것을 염려하여 군현(郡縣)을 합병,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했다.
둔전(屯田)을 하여 식량을 저축하고, 30분의 1세제(稅制)를 회복하였으며, 오랜 전쟁에 싫증이 나서 군사의 공전(攻戰)하는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역(西域)에서 자식을 보내어 입시(入侍)하는 것과 흉노(匈奴)가 사신을 보내어 신하라 일컫는 것도 모두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더구나 몸에는 굵은 베옷을 입되 두 가지 채색이 없도록 하고, 방탕하고 퇴폐한 풍류를 듣지 않았으며, 애완물을 거절하여 없애며, 궁방(宮房)에는 사사로이 애완하는 것이 없고 좌우에는 치우치게 은혜를 입는 사람이 없었다. 상림(上林)과 지어(池籞)의 관원을 줄이고 빙망(騁望 유람하는 것)과 익렵(弋獵 사냥)하는 일을 모두 폐지하니, 부지런하고 검약하는 풍조가 상하(上下)에서 일어났다.
이러므로 30년 동안에 사이(四夷)가 와서 복종하고 백성들이 부요(富饒)했으며 정교(政敎)가 청명하고 풍년이 들고 상서로운 일이 자주 나타났으니, 이는 진실로 평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유독 한흠(韓歆)과 구양흡(歐陽歙)을 애매한 죄로 죽였고, 하남윤(河南尹) 장급(張汲)과 군수(郡守) 10여 명이 모두 옥에서 죽었으며, 심지어 곽후(郭后)를 폐위하고 태자를 바꾸고, 마원(馬援)을 폄출(貶黜)하였으며, 환담(桓譚)을 내쫓고 참언(讖言)을 듣고서 봉선(封禪)을 거행하고 적복(赤伏 부적의 한 가지)을 믿어 왕량(王梁)에게 벼슬을 제수하였으며, 의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자밀(子密)을 후(侯)로 삼은 것은 너무 인자하고 밝은 덕에 누가 되는 일이다.
전대의 강한 신하들이 나라를 빼앗은 것을 분하게 여겨, 관원이 하는 일을 삼공(三公)에게 책임지우고, 큰 정사를 맡기지 아니하여서, 권세가 모두 대각(臺閣)에 돌아가고, 묘당(廟堂)은 경미하게 되었는데, 그 폐단이 말기(末期)에 이르러서는 비록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서로 이어 자리에 있으면서 강개하고 분발하였으나 한나라 왕실의 위망을 마침내 구출할 수 없었으니, 역시 제(帝)가 잘못 바로잡기[矯枉]를 너무 지나치게 한 실수였다.

명제(明帝) 이름은 장(莊), 광무의 넷째아들. 재위 18년.
천품이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능히 《춘추(春秋)》에 통했고 이독(吏牘) 서설(書說)을 알아 보아, 그 밝은 지혜가 이미 모든 사정을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즉위하자, 예문(禮文)의 일에 뜻을 쏟되, 더욱 고전(古典)에 마음을 쓰고 경ㆍ예(經藝)에 뜻을 두어, 벽옹(辟雍 학궁)에 나아가 늙은이에게 절하고 정좌(正坐)하여 도를 강론하니, 제유(諸儒)들이 경서를 들고 질문 논란하매, 구경하며 듣는 자가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황태자 이하 모든 왕과 외척의 자제들로부터 기문(期門 관명(官名))ㆍ우림(羽林)의 군사들에 이르기까지 배우지 않는 자가 없었고, 흉노(匈奴)들도 또한 자식을 보내어 입학시켰다.
노(魯)나라에 행행(行幸)하여서는 공자 및 제자들에게 제사하고, 친히 강당(講堂)에 거둥하여 황태자와 모든 왕에게 명하여 경서를 강설하도록 했으며, 더욱 형리(刑理)를 잘 알아 법령(法令)이 분명해졌다.
늦도록 조정에 앉아, 억울하게 되는 일을 반드시 펴이도록 하므로 안팎에 요행과 그릇된 사(私)가 없었으며, 위에 있어도 큰 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옥사(獄事)의 결단을 실정에 맞게 하여서 형정(刑政)이 간이했고, 건무(建武)의 법제를 준행하여 감히 조금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였으며, 후비(后妃)의 가문은 봉후(封侯)되거나 정사에 간여할 수 없고, 관도공주(館陶公主)가 아들을 위해 낭(郞) 벼슬을 요구했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공거(公車)의 제도를 줄이고 날마다 장주(章奏 상소문)를 받아 처리하였으니, 정사하는 체통을 알았다고 할 만하다.
이로부터 위엄이 사이(四夷)에 떨치어, 자식을 보내 입시(入侍)하거나 칭신(稱臣)하거나 입공(入貢)하지 않는 곳이 없고 보정(寶鼎)ㆍ기린(麒麟)ㆍ백치(白雉)ㆍ예천(醴泉)ㆍ감로(甘露)ㆍ지초(芝草) 같은 상서가 모두 생겼으니, 역시 훌륭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스럽게도 주부(朱浮)를 죽이고, 우연(虞延)을 죽였으며, 약숭(藥崧)을 장형(杖刑)하고, 근신(近臣)을 잡아 끌고 공경(公卿)을 배척, 모욕하여 군신의 예(禮)가 없어졌고, 광릉왕(廣陵王)ㆍ초왕(楚王)이 서로 이어 귀양가서 죽어, 형제간의 은혜가 어긋나며, 초옥(楚獄)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1천 명을 헤아렸다. 형옥(刑獄)은 한편만 살피는 데에서 비롯되어 듣고 보는 대로 남의 비밀 들추는 것을 현명하게 여겨서, 남에게 관대한 도량이 넉넉하지 못하였으며, 천축(天竺)에 사신을 보내어 부도(浮屠)의 글을 구득해 와서 억만 세에 석씨(釋氏 불교)의 화를 열어 놓았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장제(章帝) 이름은 훤(烜), 명제의 다섯째아들. 재위 13년.
제는, 사람들이 명제(明帝)의 까다롭고 심각한 것을 싫어하는 줄을 알고, 장자(長者)다운 자품으로 온화한 정사를 시행하였다.
금고(禁錮)를 없애고, 너그럽고 후하게 하기를 힘쓰며 엄하고 혹독함을 경계하여, 함부로 죽이는 죄를 적발하고 참혹하고 각박한 과조(科條)를 없애며 죄수를 결단하는 기한을 정하였다.
균수법(均輸法)을 폐지하고 태교법(胎敎法)을 만들었으며 행의(行義)가 있는 자에게 곡식을 하사하고, 선거(選擧)는 오직 유순하고 선량한 사람을 진출시키고 관리의 임용은 오직 안정되고 차분한 사람을 취하였으며 이외에도 요역(徭役)을 줄이고 부세(賦稅)를 적게 하니, 백성들이 힘입어 경사롭게 여겼다.
태후(太后)를 모시는 데 있어서도 마음을 다하여 효도하였고, 여러 아우들과도 우애하여 국(國)으로 보내 주지 않았으며, 제자 의식(弟子儀式)을 마련하여 스승을 존대하도록 하고, 사과(四科)를 세워 선비를 뽑으며, 제유(諸儒)들에게 명하여 각자의 의견을 강론하도록 하되 칭제(稱制)하여 임어(臨御)해서 결단하고, 우수한 인재를 뽑아 《춘추(春秋)》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을 배워 학문을 일으키고 글 뜻을 넓히게 하며, 공경 대부(公卿大夫)로부터 군현(郡縣)의 관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의(經義)에 밝고 행실이 수양된 사람을 뽑아 쓰므로, 호분위(虎賁衛)의 사졸들도 모두 《효경(孝經)》을 익히고 흉노(匈奴)의 자제들 또한 와서 입학하였다. 삼대(三代) 이하로는 풍속이 융성함이 이와 같은 때가 없었으니 훌륭한 일이다.
다만 애석한 것은, 두후(竇后)의 참소를 믿어 태자(太子)를 바꾸고, 비서(飛書 익명(匿名)으로 쓴 글)의 비방 때문에 귀인(貴人)을 죽였으며, 두헌(竇憲)의 횡포를 그대로 두어 공주(公主)의 전원(田園)을 빼앗게 되었는데도 그 죄를 바로잡지 않다가, 뒷날에 여주(女主)가 조정에 나오고, 외척이 권세를 부리게 된 일이 모두 이에서 시작되었으니 세 가지 한탄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화제(和帝) 이름은 조(肇), 장제의 넷째아들로서 재위 17년.
제는 나이가 어려서 즉위하였으므로 모후(母后)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였는데, 두헌(竇憲)이 정사를 전횡하여 위엄과 권세가 날로 심해지자 비밀히 참역(僣逆)을 도모하니, 조신(朝臣)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형세만 보고 뜻에 순종했다.
제가 나이 14세가 되자, 혁연(赫然)하게 발분하여 죽일 것을 도모하려고 정홍(丁鴻)ㆍ정중(鄭衆)과 결의하여 마침내 원악(元惡)들을 제거하고 몸소 만기(萬機)를 보았다.
이로부터 17년 동안에, 원유(苑囿)를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 주고 피지(陂池 방죽)를 풀어 백성들에게 채취하도록 하여, 백성들이 채소를 가꾸어 오곡(五糓)에 보태게 하고, 사신을 보내어 창고를 열어 수재ㆍ한재ㆍ충재(蟲災)를 구제하고, 백성들의 전조(田租)를 감해 주기를 거의 비는 해가 없었다.
정위(廷尉) 진총(陳寵)은 관대하게 용서하기를 힘써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구제하였으며, 사공(司空) 장분(張奮)은 구두(口頭)로 시정(時政)을 말해 주며 즉시 원통한 옥사(獄事)를 풀어 주어서, 단비[甘雨]가 내리게 되었다.
원안(袁安)ㆍ정홍(丁鴻)ㆍ노공(魯恭)ㆍ한능(韓稜) 같은 여러 어진 이들이 서로 잇달아 등용되어 크게 유익한 일들이 많았으며, 먼 지방에서 바치는 음식은 태관(太官)을 신칙하여 다시는 받지 못하게 하고, 전후의 부서(符瑞)를 덕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칭하며 억제하여 말을 퍼뜨리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개척하는 토지가 날마다 넓어져, 북쪽에는 삭정(朔庭 북방 흉노를 가리킴)이 비게 되고 서쪽으로는 중역(重譯 사이(四夷)를 가리킴)과 서로 통하게 되었으니, 장제(章帝)에 비하건대 진실로 더 우월하다.
만일 제 같은 이를, 하늘이 나이를 더 주었더라면 효문제(孝文帝)에게 비해 그다지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상제(殤帝) 이름은 융(隆), 화제의 작은아들로서 재위 1년.
등후(鄧后)가 조정에 임어(臨御)하고, 장우(張禹)ㆍ등즐(鄧騭)과 등즐의 아우 회(悝)ㆍ홍(弘) 등이 정사를 보필했는데, 등즐이 겸손했지만 외척이 권세를 독차지함이 또한 여기에서 일어났다.
화제(和帝)와 상제 이후로 황후(皇后)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는 어리고 어두운 임금이 이로우므로 밖에서 들어와 즉위한 임금이 넷이요, 임조(臨朝)한 왕후가 여섯이다.
대체로 사왕(嗣王)이 어려 여후(女后 황후)가 정사를 전담하게 되면, 외척이 반드시 권세를 부리고 환시(宦寺)가 정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안제(安帝) 이름은 호(祜), 장제(章帝)의 손자로 재위 19년.
즉위한 때의 나이는 이미 13세였으나 태후가 오히려 조정에 임어하여 15년 동안 외척이 권세를 부려 중관(中官 내시)이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천재 지변이 없는 해가 없었다.
태후가 붕(崩)하자 제가 겨우 친히 정사를 본 지 5년이었다. 오직 유모의 말만 듣고 오직 환관의 참소만 따랐는데, 등후(鄧后)가 이미 실각당하고 태자 또한 폐위(廢位)되자, 외척이 병권(兵權)을 맡고 환관이 봉후(封侯)되고 제수(除授)되어, 총애(寵愛)와 신임이 비할 데가 없고, 충성스러운 말, 간하는 말이 모두 다 들어가지 않았다.
태위(太尉) 양진(楊震)이 누차 상소하기를 더욱 간절하게 하다가 역시 참소 때문에 죽었으니, 혼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순제(順帝) 이름은 보(保), 안제의 아들로 재위 20년.
제가 처음 즉위하자, 정책(定策)한 공으로 중황문(中黃門) 손정(孫程) 등 19명을 봉하여 열후(列侯)를 삼았는데, 차차 정사에 간여하여 권세가 날로 왕성해 갔다.
사예(司隷) 우허(虞詡)가 탄핵(彈劾)하여 아뢰어, 감히 말하는 기풍을 일으킴에 힘입어, 이로부터 좌웅(左雄)ㆍ고(李固)ㆍ주거(周擧)ㆍ황경(黃瓊)ㆍ장형(張衡)ㆍ왕공(王龔)ㆍ황보규(皇甫規)의 무리가 모두 과감하게 지적해서 추방하여 배척하고자 청하였다. 그러나 환관들이 뿌리 박고 결탁하여, 말을 들어 주지 않고 간한 것이 시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참소를 받아 내쫓기는 사람까지 있었다.
황후의 아버지 양상(梁商)이 정권을 잡아 비록 겸허하고 어진 이를 등용하였으나, 겁이 많고 약하여 강단이 없었고, 심지어 그의 아들을 보내어 내수(內竪)들과 사귀게 하였다.
양상이 죽자, 양기(梁冀)가 이어받았는데, 대장군 양불의(梁不疑)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어 한없이 탐내고 악한 짓을 몹시 하되 날이 부족하게 여겼다.
여덟 사신을 보내어 풍속을 순찰하게 하매 장강(張綱)은 심지어 도정(都亭 군현(郡縣)의 객사(客舍))에 수레바퀴를 묻기까지 하고, 또한 말하기를, ‘시랑(豺狼)이 조정에 있는데 어찌 호리(狐狸)를 따지겠는가?’ 하며, 앞질러 양기와 양불의의 좌상을 탄핵하니, 제가 비록 그 충언임을 알았으나 능히 시행하지 못하였다.
나머지 사신이 탄핵한 것도 모두 양기(梁冀)와 엄관(閹官 내시)의 친속(親屬)인 까닭에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않고 충직된 말이 좌절되었으니, 그가 능히 난을 구출할 수 있었겠는가?

충제(冲帝) 이름은 병(炳), 순제의 아들로 재위 3개월.
양후(梁后)가 조정에 임어하여 정사를 재보(宰輔)들에게 맡기니, 이고(李固)의 말이 많이 채택되었다. 환관들의 악한 짓 하는 자를 한결같이 모두 배척하여 보내니, 천하가 바야흐로 태평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양기가 권세를 부리며 걸핏하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여, 이고마저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 뻔했으니, 아아, 위태한 일이었다.

질제(質帝) 이름은 찬(纘), 장제(章帝)의 현손(玄孫)으로 재위 1년.
태후(太后)가 조정에 임어했었는데, 제가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慧] 구본(舊本)에는 혜(惠)자로 되었다. 양기의 교만하고 횡포함을 알아차리고 평소 여러 신하들과 조회할 적에 말하기를, ‘이는 발호장군(跋扈將軍)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채 입밖에 떨어지지도 못하여 독약을 넣은 떡이 이미 진상되었다.

환제(桓帝) 이름은 지(志), 장제(章帝)의 증손으로 재위 21년.
태후(太后)가 아직도 조정에 임어하고, 양기(梁冀)가 정사를 전담하며 방자하게 위엄도 부리고 복도 주어서 이고(李固)ㆍ두교(杜喬)를 죽여 자기의 위엄을 엄중하게 하고, 이어 원저(袁著)를 죽여 천하에서 자기를 의론하는 것을 막았으며, 심지어 진수(陳授)와 병존(邴尊)마저 죽였다.
제가 그제야 진노하여, 환자(宦者) 선초(禪超) 등 다섯 사람과 의논을 결정하여 양기를 베이니, 원악(元惡)은 비록 제거되었으나 오후(五侯)가 이어 학정(虐政)을 하여 그 독이 사해(四海)에 퍼지고, 성진(成瑨)ㆍ유질(劉瓆)ㆍ책초(翟超)ㆍ황부(黃浮)ㆍ이응(李膺) 등 여러 어진 이가 모두 환관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이응 등을 무고하되,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고 풍속을 현혹시킨다고 하였다.
제가 진노하여 이응 등을 하옥(下獄)하였는데, 옥사(獄辭)가 두밀(杜密)ㆍ진허(陳詡)ㆍ진식(陳寔)ㆍ범방(范滂)의 무리에게 연루되어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영제(靈帝) 이름은 굉(宏), 장제(章帝)의 맏손자로 재위 22년.
제가 처음 즉위하매, 태후(太后)가 조정에 임어하고, 진번(陳蕃)ㆍ두무(竇武)가 마음을 같이하여 정사를 보필하되, 명사(名士) 이응(李膺)과 두밀(杜密) 등을 불러 등용하니 천하가 태평하기를 기대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환관들을 베이려다 계책의 사기(事機)가 엄밀(嚴密)하지 못하여, 도리어 조절(曹節)ㆍ왕보(王甫) 등이 위조한 조서(詔書)로 죽이는 바 되었다.
이에 많은 음흉한 자들이 뜻을 얻게 되었는데 후남(侯覽)이 주병(朱並)을 풍자하여 장검(張儉)의 당인(黨人)을 무고하고, 조절이 유사(有司)를 풍자하여 다시 이응(李膺) 등의 당고(黨錮)를 검거하매, 명절(名節)이 주륙(誅戮)을 당함이 지나쳐서 죄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생민(生民)의 무리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제는 또한 서원(西園)에서 벼슬을 팔고 후궁(後宮)에서 유흥을 벌였고, 개를 희롱하고 나귀나 타고 다니며 하류배들이 하는 짓을 하기를 달게 여겼고, 취렴(聚斂)에 주력하며, 오직 내시들의 말만 듣다가, 얼마 안 되어 붕하였다.

헌제(獻帝) 이름은 협(協), 영제의 차자(次子)로 재위 31년.
동탁(董卓)이 난을 일으키고 이각(李傕)이 화(禍)를 조작(造作)한 이후부터 음흉한 무리들이 뜻을 얻어 위엄과 권세를 도둑질하여 누린 지 4년 만에, 이각과 곽범(郭氾)이 군사를 다스려 서로 공격하고, 제를 위협하여 영(營)으로 거둥하게 하고서 궁실을 불태워, 승여(乘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파천(播遷)하였다.
겨우 낙양(洛陽)으로 돌아오자, 조조(曹操)가 대궐에 나아가 도읍을 허창(許昌)으로 옮기니, 백관(百官)들이 조조에게 통솔되어서, 대권(大權)이 드디어 모두 조조에게 돌아갔다.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여 그의 사욕을 채우니, 25년 동안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과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천자의 손에서 나오지 않고 다만 헛 명칭만 신민(臣民)들의 위에 붙어 있었다.
조조가 죽자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를 찬탈(簒奪)했다.

 

삼국(三國)

 

촉한(蜀漢)의 선주(先主 유비(劉備)를 가리킴)는 한(漢)나라의 후손[神明之冑]으로, 공명(孔明 제갈량의 자) 같은 왕을 보좌하는 인재를 만나 군사를 출동하여 역적을 토벌하되 삼대(三代 하(夏)ㆍ는(殷)ㆍ주(周)) 때의 군사를 동원하는 도(道)와 맞아, 거의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듯했다.
비록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선주(先主)가 붕(崩)하고 무후(武侯 제갈량의 시호)도 훙(薨)하여 비록 공업(功業)은 끝맺지 못하였으나, 그 성취한 바는 참으로 컸었다.
위(魏) 나라 조비(曹丕)가 북쪽 지방을 빼앗아 차지한 것과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한편으로 동오(東吳)에서 패권(覇權)을 쥐게 됨과 같은 것은 그 사이에 어찌 한두 가지 잘잘못을 말할 것이 없겠는가?
그러나 천하가 분열되고 연대(年代)가 또한 단축되며, 정사나 한 일이 법받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생략한다.

 

(晋)

 

무제(武帝)는 즉위한 처음에는 한(漢)나라와 위(魏)나라가 각박했고 사치하던 잘못을 바로잡아, 한결같이 검약(儉約)하게 하고 사특한 풍속을 버리기 힘썼으며, 거상(居喪)하는 제도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였으나 홀로 천성(天性)에 따라 바로잡아 거행하였으니, 역시 어진 인군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오(吳)를 평정한 뒤로는 교만한 마음이 갑자기 생겨, 성색(聲色)을 숭상하고 놀이와 사냥을 일삼아 마음씨가 타락하고 정사가 무너졌는데, 사자(嗣子)가 어둡고 어리석으며 가후(賈后)가 포악하였다.
더욱이 부박(浮薄)과 허탄(虛誕)을 서로 숭상하고 예의를 폐기(廢棄)하여 골육(骨肉 친족)간에 서로 해쳐 다시 사람된 도리가 없었는데, 오호(五胡)가 이 틈을 타게 되어 회제(懷帝)와 민제(愍帝) 두 임금이 모두 사로잡히므로서 만백성이 붕궤되었으니, 예로부터 화란의 심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원제(元帝)가 비록 건강(建康)에 나라를 세우고 중흥하였다고 하나 나라의 큰 원수를 잊고 회복시킬 뜻이 없었고, 명제(明帝)는 재력이 가장 뛰어났으나 수(壽)가 길지 못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셀 만한 것이 없다.

 

남북조(南北朝)

 

남조(南朝)는 서진(西晋)의 난리통에 일어났는데, 동진(東晋)의 원제(元帝)가 양자강 좌안(左岸)에 나라를 정했다. 그 계통을 이은 자로서 유유(劉裕)는 송(宋)이라 일컫고, 소도성(蕭道成)은 제(齊)라 일컫고, 소연(蕭衍)은 양(梁)이라 일컫고, 진패선(陳覇先)은 진(陳)이라 일컬었는데 이들을 남조(南朝)라 한다.
그 외에 중원(中原)을 차지하고 존호(尊號)를 참람하게 도둑질한 탁발규(拓拔珪)가 위무제(魏武帝)라 일컬어 장안(長安)으로 들어와 서위(西魏)라 일컬었고, 선견(善見)은 동위(東魏)라 일컬었고 고양(高洋)은 북제(北齊)라 일컫고 우문각(宇文覺)은 후주(後周)라 일컬으며 남북으로 갈라 차지하여, 제마다 서로 영웅인 체하며 무력으로 서로를 공격하여 백성들이 편한 날이 없었는데 그들의 한때 임금이나 신하의 행사나 한 일은 족히 취사(取捨)할 것이 없다.

 

(隋)

 

문제(文帝) 성은 양(楊), 이름은 견(堅). 홍농(弘農) 화음(華陰) 사람으로 재위 24년.
주(周)나라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다가 드디어 그 자리를 찬탈(簒奪)했다. 그러나 부역(賦役)을 감하고 주방(酒坊)을 폐지하며, 형법을 줄이고 의창(義倉)을 세우며, 백성들의 먹을 것을 염려하여 감선(減膳)하고 공헌(貢獻 진상(進上))을 막으려고 문채 있는 옷감을 불태웠으니, 이는 위정(爲政)의 잘한 것들이다.
유독 애석한 것은, 제(帝)가 본래 배우지를 못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각박하고 시의(猜疑)하기 일쑤여서 오로지 소수(小數)만 신임(信任)하고 살피는 것이 밝은 것으로 여겨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며, 참소를 믿어 태자(太子)를 폐위하고 죄없이 여러 아들을 죽이며, 원훈(元勳)과 숙장(宿將 노장)을 거의 다 베이거나 물리쳤다. 이는 큰 잘못들인데, 제의 몸 역시 자식의 화를 면하지 못했으니, 아아, 슬픈 일이다.

양제(煬帝) 이름은 광(廣) 문제(文帝)의 둘째아들로 재위 12년.
제는 번왕(藩王)으로서, 억지 감정과 꾸민 속임수로 헛 명예를 낚되, 안으로는 태후(太后)와 결탁하고 밖으로는 당여(黨與)와 결탁하여 마침내 적자(嫡子)의 자리를 탈취했다.
왕위를 계승하기에 이르러는 그 부강(富强)한 재물을 믿고 한없는 욕심을 부리려고 생각하여, 궁원(宮苑)을 경영하고 하거(河渠 운하(運河))를 파며 용주(龍舟)를 만들고 장성을 쌓았으며 악공(樂工)을 모으고 여복(輿服)과 의위(儀衛 의장)를 만들어, 마음대로 순행(巡幸)하고 서역(西域)과 통하고 고구려[高麗]를 정벌했다.
온갖 세금을 받으매 온 중국(中國)이 지치고 곤란하여, 백성들이 그 명령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도둑 떼가 천하에 가득 차게 되었으니, 몸이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손에 죽은 것이 당연하고 불행한 일이 아니다.

 

(唐)

 

고조(高祖) 성은 이(李), 이름은 연(淵)이다. 토덕(土德)으로 임금 노릇하여, 장안(長安)에 도읍했다. 재위 9년.
그의 아들 세민(世民 당태종의 이름)의 계책에 따라 진양(晋陽)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하(西河)를 정벌하고 고덕유(高德儒)를 베어, 임금 속인 죄만 책망하고 나머지 것은 터럭만큼도 범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곽읍(霍邑)을 수복하고 승전한 기세를 타 드디어 장안(長安)을 이기고 들어가, 대왕(代王)을 세워 제(帝)를 삼고 정승 노릇하다가 스스로 당왕(唐王)이 되고, 약법(約法) 12조목을 마련하고 까다로운 법을 모두 없앴다.
양제(煬帝)의 흉한 소문이 이르게 되자, 공제(恭帝)에게서 선위(禪位)받아 제위(帝位)에 올랐는데, 이로부터 이밀(李密)을 항복받고 인고(仁杲)를 멸하여 흑달(黑闥)을 베고 소선(蕭銑)을 평정하며, 금강(金剛)을 부수고 무주(武周)를 내몰며 건덕(建德)을 사로잡고 세충(世充)을 항복받아, 6년 동안에 천하가 모두 복종했으니 어찌 성공이 그리 빨랐던가? 대개 태종(太宗) 같은 자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령(律令)을 정하고 경서의 뜻에 밝은 사람을 들어 쓰며, 관제(官制)를 세우고 균전(均田)과 조ㆍ용ㆍ조(租庸調) 법을 정한 것과 또한 아악(雅樂)을 제정하고 승니(僧尼)를 도태한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정사하는 요법(要法)이 되었고, 맨 먼저 수씨(隋氏)의 자손들에게 조서(詔書)를 내리고 이들을 모두 유사(有司)에게 넘겨 재질을 헤아려 서용(叙用)함으로써, 한(漢)나라 이래로 가장 충후(忠厚)하게 하였으니, 그 오랜 세대토록 나라를 누림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만 애석한 것은, 그가 배적(裵寂)의 사특함에 친근하여 궁녀(宮女)를 받아들이고 유문정(劉文靜)의 말을 들어 돌궐(突厥)을 신하로 삼은 일이다. 이 때문에 당나라 시대의 임금들은 가정을 바로잡는 법이 없었고, 이적(夷狄)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난리가 많았으니, 역시 고조(高祖)가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태종(太宗) 이름은 세민(世民), 재위 23년.
고조(高祖)의 차자(次子)인데, 난 지 4세 때에 서생(書生)이 보고서 말하기를, ‘나이 약관(弱冠 20세)이 되면 반드시 세상을 구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겠다.’ 하였는데, 고조(高祖)가 군사를 일으켜 참란(僣亂)을 평정할 때 신묘한 계책과 전략(戰略)이 모두 제에게서 나왔었다.
그가 정사에 임하여 설시(設施)할 때에 맨 먼저 원수의 신하들을 임용하고 궁녀들을 놓아 보내며 사치를 금하였다.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학사(學士)들과 더불어 앞날의 일과 지나간 행적을 강론하고, 학교(學校)를 일으켜 경술(經術)을 숭상하고 부병(府兵)을 세워 무비(武備)를 닦았다.
이후부터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를 하되, 청납(聽納)을 부지런히 하고 형옥(刑獄)을 돌보며 음교(淫巧)를 금하고 이(利)를 말하는 것을 미워하며 풍속을 엄하게 하고 충효(忠孝)를 권장하였다.
즉위한 뒤 겨우 4년이 되자, 쌀값이 한 말에 3전(錢)이고 바깥 문도 닫지 않고 살아, 태평한 세상이라고 일컬었으니, 옛날부터 중국의 융성함이 이와 같은 때가 없었다.
제가 말하기를, ‘이는 모두 위징(魏徵)이 인의(仁義)를 권장하여 시행한 힘이다.’고 했으니, 근본이 되는 바를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가 부도(浮屠 불교)를 회복하므로서 정교(政敎)가 어지러워지고 고구려를 침으로써 무사(武事 군사 행정)가 잘못되며, 죄없는 사람을 죽여 형옥이 지나쳤고, 총애하는 아들에게 혹함으로써 저위(儲位 태자(太子))가 결정되지 못하여 사직(社稷)의 근본이 변동될 뻔했다.
또한 그 중에서도 큰 것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위협하여 오랑캐에게 신하 노릇하게 하고 형과 아우를 죽였으며, 뒷날에는 아우의 아내에게 난행(亂行)하여 그에게서 자식을 낳음으로써 인륜(人倫)에 있어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고종(高宗) 이름은 치(治), 태종의 아홉째아들로 재위 34년.
계통을 이어받은 처음에는 날마다 자사(刺史)들을 불러들여 백성들의 병폐와 고통을 물었고, 정사에 이르러서는 대신들을 높이 대접하며 몸을 공손히 하여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영휘(永徽 당고종(唐高宗)의 연호) 때의 정사 때는 백성들이 부요해지고 편안하여 정관(貞觀 당태종(唐太宗)의 연호) 때의 기풍이 있었으니, 어찌 어진 임금이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아버지의 첩을 아내로 삼아 취우(聚麀 혼음(混淫), 곧 난륜(亂倫))의 수치(羞恥)로 생각하지 않고, 여후(女后)가 정사에 참여하도록 내버려 두어 마침내 신빈(晨牝 빈계 사신(牝雞司晨)이란 말로, 암탉이 새벽에 운다는 뜻)의 불상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무씨(武氏)의 찬탈을 조장했으며, 무씨가 즉위하게 되자 충신들이 내쫓기고 간사한 무리들이 권세를 부려, 마침내는 종사(宗社)를 망치는 화를 일으켜 거의 구원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누구의 과오이겠는가?

중종(中宗) 이름은 현(顯), 고종의 일곱째아들이다. 무씨(武氏)의 소생으로 재위 6년
제는 태자(太子)로서 즉위하였는데 곧 유폐(幽廢)되었다가, 15년이 지나서 소환되어 다시 태자가 되고, 또한 7년 만에 간신(奸臣)이 복주(伏誅)되자 즉위하였으니, 이는 고조(高祖)와 태종(太宗)의 덕이 백성들의 마음에 맺혀 있어 차마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흥복(興復)한 공로는 모두 충신과 의사(義士)들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다시 왕위에 오른 첫머리에 위후(韋后)에게 한 천일(天日)의 맹세만 추종(追從)하고 전대(前代)의 암탉이 우는 경계는 잊어버려서 매양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들을 적에 황후(皇后)가 같이 들음으로써 정사의 권한이 모두 중궁(中宮)에게 돌아가게 되어, 오왕(五王)이 무고(誣告)를 입어 죽음을 당하고, 무삼사(武三思)가 다시 일어나 권세를 탈취했다.
얼마 되지 않아 제가 또한 독약 넣은 떡에 죽고 네 아들이 전후에 모두 제대로 죽지 못했으며 후사(後嗣) 역시 전승(傳承)되지 못했다. 아, 화가 너무도 참혹하다.

예종(睿宗) 이름은 조(朝), 고종(高宗)의 여덟째아들로서 무후(武后)의 소생인데 재위 3년.
정사에 임한 처음에는 요숭(姚崇)ㆍ송경(宋璟)이 마음을 합하여 정사를 보필하되, 문무(文武) 관원을 법에 의해 뽑고 강어(彊禦)를 두려워하지 않아, 선거(選擧 인재 임용)와 법이 다같이 다스려지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정관(貞觀 당태종의 연호) 때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후계자를 세우되 공로로 하였고 혜성(彗星)이 변괴를 알리자 덕 있는 사람에게 전위(傳位)하여 재앙을 피했으니 어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태평공주(太平公主)가 권세를 부려 요숭(姚崇)이 내쫓기고, 마침내 여동생에게 현혹되어 밝은 판단이 부족하였다. 비록 왕위를 전했다고 하였지만, 정사를 맡기지 않고서 태상황(太上皇)이라 자칭하며, 큰일을 도맡아 태평공주의 죄악을 양성(釀成)하매 간사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따라 붙어서 거의 반역하게 되어, 드디어 현종(玄宗)으로 하여금 천하에 고모(姑母)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현종(玄宗) 이름은 융기(隆基), 예종의 셋째아들로 재위 45년.
개원(開元 현종의 연호) 초년에 비로소 정사를 친히 다스려서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를 하되, 군사 일을 강론하고 승니(僧尼)를 도태하며, 여악(女樂)을 금하고 궁인(宮人)을 내보내며, 의복과 노리개를 치우고 금수 비단을 불사르며, 비단짜는 집을 폐지하였다.
천성이 우애하여 형제간에 돈목(敦睦)하였고, 안팎의 출입하는 법식을 균형하게 하였으며, 원외(員外)ㆍ검교(檢校) 등 쓸데없는 관원을 폐지하고 유학(儒學)의 선비를 뽑아 시독(侍讀)으로 두며, 학술(學術)이 있는 선비를 가려 여러 서적을 교정하고 사관(史官)을 복구하여 대장(對杖 무기를 가지고 호위함)하고서 일을 아뢰도록 하였다.
현령(縣令)을 시험 보이고 자사(刺史)를 뽑으며, 혹리(酷吏)를 금고(禁錮)하고 악공(樂工)을 억제하였다.
사책(史冊)에 선정(善政)을 누차 쓴 것이, 진실로 즉위한 이래부터 어진 정승을 계속해서 임용하여, 요숭(姚崇)은 도(道) 구본(舊本)에는 통(通)으로 되어 있음. 를 숭상하고, 송경(宋璟)은 법을 숭상하고 장가정(張嘉貞)은 이도(吏道)를 숭상하고, 장열(張說)은 문(文)을 숭상하고 이원굉(李元紘)ㆍ두섬(杜暹)은 검소함을 숭상하고 한휴(韓休)ㆍ장구령(張九齡)은 정직을 숭상하여, 각기 그의 장정에 따라 서로가 보필하였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20년 동안에 사이(四夷)들이 와서 복종하게 되고, 의식(衣食)이 풍족하여 서경(西京)과 동도(東都)의 쌀 한 섬 값이 2백이 되지 못하고 직물도 같았으며, 천하가 넉넉하고 편안하여 아주 먼 길을 가는 자가 척병(尺兵 간단한 무기)도 지닐 것이 없고, 형부(刑部)에서 결단한 천하의 죽일 죄인이 24명뿐으로 거의 형벌을 놓아 두게 되어, 태평하다고 일컬었으니,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뜻과 욕망이 이미 차고 사치할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여, 충직(忠直)한 사람은 차차 소원해지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가 모두 진출(進出)하게 되어, 장구령(張九齡)을 파직하고 이임보(李林甫)를 정승을 삼고, 주자량(周子諒)을 죽이고 우선객(牛仙客)을 총애하며, 고역사(高力士)를 귀하게 여기므로서 환관의 화가 싹트고 10절도(節度)를 두어 번진(藩鎭)의 화를 빚었으며, 소모(召募)로 인하여 군사가 날로 더욱 무너지고 취렴(聚斂) 때문에 재정이 날로 더욱 번다해져 무비(武備)가 점차 경감(輕減)되고 백성의 힘이 이미 고갈되어, 나라의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더 심한 일은, 황후를 폐위하고 세 아들을 죽였으며, 수왕(壽王)의 비(妃) 옥환(玉環)을 받아들여 매혹(魅惑)되고 안녹산(安祿山)을 세아(洗兒)하였다가 추한 소문이 퍼졌으되 또한 어찌하지 못했다. 성색(聲色)에 미혹되어 정사(政事)가 방치되고 해이되매, 양국충(楊國忠)이 옥환(玉環)을 인연하여 정승으로 들어와, 어진 이와 능한 이를 질투하며 권세를 탐하고 총애를 굳혔다.
또한 안녹산과 틈이 있어, 속히 반역(反逆)하도록 자극하여 그의 말한 바로 증험되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녹산이 어양(漁陽)에서 배반하여 양경(兩京)을 함락시키매, 국충은 주륙당하고 옥환도 죽었으며 제 또한 촉(蜀)으로 달아나야 했으니, 천하가 붕괴되어 만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아, 한 번 생각을 잘못하여 그 화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계삼지 않아서 되겠는가?

숙종(肅宗) 이름은 형(亨), 현종의 셋째아들로 재위 7년.
녹산의 난으로 말미암아 태자(太子)로서 군부(君父)를 따라 촉으로 들어가 마외(馬嵬)에 이르렀는데, 현종이 부로(父老)들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나누어 제를 따르도록 하고, 또한 전지를 내려 전위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이미 두홍점(杜鴻漸)ㆍ배면(裵冕) 등을 머물러 두었었는데, 모두 삭방(朔方)으로 가기를 권하고, 영무(靈武)에 이르러서는 마외(馬嵬)에서의 명을 따르기를 청하니, 즉위하였다. 맨 먼저 배면ㆍ두홍점ㆍ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을 임용(任用)하고, 산인(山人) 이필(李泌)을 불러 군국(軍國)의 참모를 시켰으며, 광평왕(廣平王)으로 원수(元帥)를 삼아 팽원(彭原)으로 진격(進擊)하였다가, 이듬해에 군사를 봉상(鳳翔)으로 옮겨 그 해에 양경(兩京)을 회복하였는데, 상황(上皇)이 서울로 돌아와 부자(父子)가 다시 반겼고 종묘 사직이 도로 편안해졌으니 어찌 이렇게 중흥(中興)이 빠르게 되었는가?
이는 실로 곽자의ㆍ이광필과 광평왕에게 책임을 맡기되, 큰아들로써 군사를 거느리는 책임을 맡게 하고, 안고경(顔杲卿)ㆍ안진경(顔眞卿)은 하북(河北)에서 충의(忠義)의 군사를 일으키고,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은 수양(睢陽)에서 적의 세력을 막았기 때문에 마침내 능히 이겨 회복한 공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있어 적의 형세가 비록 패하였지만 여얼(餘孽)이 아직도 남았기 때문에, 마땅히 권강(權綱)을 진작시키고 헌전(憲典)을 닦아 중흥의 공을 키웠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원대하게 경영하는 계책을 하지 않고 당장 편할 계책만 오로지 힘써, 명기(名器 관작(官爵))가 아래에서 외람하게 주어지고 파직(罷職)과 등용(登用)이 위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되매 강기(綱紀)가 크게 무너져 수습할 수 없었다. 더구나 사조은(史朝恩)에게 군사의 위용(威容)을 구경시키기 위하여 이광필ㆍ곽자의 같은 명장(名將)들로 하여금 지휘를 받게 하였고, 이보국(李輔國)이 오로지 금병(禁兵)을 장악하여 비록 임금의 제칙(制勑 명령)이라도 반드시 서명(署名)을 거친 뒤에야 시행되었으니, 이 두 가지 것에서 더욱 문란하게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밖으로는 보국이 병권(兵權) 잡은 것을 두려워하고, 안으로는 장후(張后)의 사납고 고약한 것을 두려워하여’ 상황(上皇)에 대한 효도가 쇠퇴하다가 마침내 근심으로 붕(崩)하매, 제 또한 애모(哀慕)만 하다가 몰(沒)하였고, 장후(張后) 모자 역시 보국에게 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
아, 지존(至尊)한 천자로서, 위로는 그의 아버지를 보호하지 못하고 중간으로는 그 자신을 보존하지 못했으며 아래로는 그의 처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소인을 가까이한 화가 그 맹렬함이 이와 같았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종(代宗) 이름은 예(豫), 숙종의 장자로 재위 17년.
정사에 임한 처음에는 다시 동경(東京)을 수복하고 사조의(史朝義)가 목을 바치어 대하(大河) 남북 지방이 도로 당나라 땅이 되었으니 그 공이 찬양할 만하다.
다만 애석한 것은, 지나치게 우선 편할 계책만 하여, 적장(賊將)들로 하북(河北)을 나누어 거느리게 하여 여러 번진(藩鎭)들과 서로 안팎이 되게 하므로, 각기 토지를 넓히고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게 되어, 이름만 번신(藩臣)이지 실지는 모두 만맥(蠻貊)의 이방(異邦)인데, 한결같이 우선만 편하게 지내고 다시 제어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복고 회은(僕古懷恩)이 도적을 끌고 다시 장안(長安)을 침범하매, 제가 섬주(陝州)의 행행(行幸)과 봉천(奉天)의 핍박이 있게 되었으나, 천행으로 곽자의(郭子儀)의 힘을 입어 못된 오랑캐가 퇴각하게 되어 왕실이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제가 인자하기만 하고 무기(武氣)가 없으며, 유약(柔弱)함이 너무 지나치고 강단이 부족하여, 권세가 환관(宦官)에게 돌아가매 훈신(勳臣)들이 배척되고 내쫓기어 원통하게 죽어간 자가 있게 되었다. 또한 불교를 숭상하여, 중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절을 세우며 재를 올리니 중외(中外)에서 서로 본보아 인사(人事)를 폐하고 불법(佛法)을 받으므로서 법과 정사가 날로 어지러워졌으니, 당나라 왕실의 크게 무너짐이 이에서 결정된 것이다.

덕종(德宗) 이름은 괄(适), 대종의 장자로 재위 26년.
즉위한 처음에는 공헌(貢獻 공물을 상납함)을 폐지하고 이원(梨園)을 해산하며, 상서(祥瑞)를 믿지 않고 금은(金銀)을 물리치며, 궁인(宮人)을 내보내고 응견(鷹犬)을 놓아 주었으며, 승여(乘輿)와 복어(服御)를 감하고 사관(寺觀)의 설치와 중에게 도첩을 주자고 아뢰는 것을 금했다.
또한 조서를 내려, 재물과 공물을 모두 좌장(左藏 국고(國庫))으로 돌리니, 몇 달이 되지 않은 사이에 좋은 정사가 여기저기에서 나와 온 나라 안이 소문을 듣고 고무(鼓舞)되었다.
이는 모두 최우보(崔祐甫)가 정승이 되어 힘써 관대하게 하기를 숭상했기 때문에, 당시에 정사를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정관(貞觀) 때의 기풍이 있다고 했었는데, 불행하게도 어진 정승이 죽게 되자, 양염(楊炎) 노기(盧杞)가 서로 잇달아 권세를 부리되, 양염은 사의(私意)로 유안(劉晏)을 참소하여 죽이고, 노기는 의사(疑似)한 일로 모든 신하들을 이간하였다.
또한 총애(寵愛)를 굳히고자 하여, 제에게 엄하고 각박하게 하도록 권하니 중외에서 실망하고, 가혹한 정사가 날로 더하여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방진(方鎭)들이 강한 것을 믿고 서로가 난을 부채질하므로, 마침내 봉천(奉天)으로 행행하여 주자(朱泚)의 난을 피하였는데, 그러느라고 궁핍해져서 취렴(聚斂)에 뜻을 두게 되었다.
제는 본디 성격이 시기하고 의심했는데, 봉천에서 돌아오면서는 장상(將相)들을 소외하고 꺼려서 환관들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범씨(范氏)의 논에 이르기를,
“제(帝)는 비정(粃政)이 가장 많은데 그 중에 큰 폐단이 세 가지 있었으니, 첫째는 방진(方鎭)을 임시 조치만 한 것이요, 둘째는 환관에게 정사를 위임한 것이요, 셋째는 재화(財貨)를 취렴(聚斂)한 것이다.”
하였으니 당나라의 멸망은 마침내 이 세 가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순종(順宗) 이름은 송(誦), 덕종의 장자로 재위 1년.
제는 불행히도 병중에 즉위하였는데, 간사한 신하들이 마음대로 하고 내시(內侍)들이 권세를 농간하여서 당나라 왕실이 거의 위태로울 뻔하였는데, 마침내 정사를 계승할 왕에게 위임하여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족히 어질다고 하겠다.

헌종(憲宗) 이름을 순(純), 순종의 장자로 재위 15년.
맨 먼저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소인들을 배척하여 내쫓았다. 이 때문에 조정의 권한이 날로 줄어들고 방진(方鎭)이 점차 횡포해졌는데, 개연(慨然)히 분발하여 참란(僣亂)을 평정할 뜻을 두어, 법도(法度)로써 제어하되, 마침내 능히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일으켜 못된 역적들을 평정하니, 강한 번진(藩鎭)들이 토벌할까 두려워하여 자식을 인질(人質)로 하고 땅을 바치었다.
이에 천하의 뿌리박힌 도둑들이 모두 이마를 조아리며 입조(入朝 조회 옴)하게 되어, 백 년 동안의 근심거리가 하루아침에 해소되어 당나라의 위엄과 명령이 거의 다시 떨치게 되었다.
웬일인지, 세상의 난이 점차 평정되자 사치할 마음이 갑자기 생겨, 토목 공사가 차차 벌어지고 간사한 신하가 다시 등용되며, 선약(仙藥)을 구해들이고 불골(佛骨)을 맞아들인 것도 진실로 이미 의혹된 것이다.
이강(李絳)이 파직되고 승최(承璀)가 총애를 받았으며, 황보박(皇甫鎛)ㆍ영호초(令狐楚)가 정승이 되매 배도(裵度)ㆍ최군(崔羣)이 모두 내쫓기게 되었으니, 대개 군자와 소인이 함께 있을 수 없음이 이러하다.
제가 또한 금단(金丹)의 약을 먹어 화내기를 잘하고 사람을 망령되이 죽이다가, 마침내 환관(宦官) 진홍지(陳弘志)의 손에 죽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목종(穆宗) 이름은 항(恒), 헌종의 셋째아들로 재위 4년.
왕위를 이어받은 처음에 겨우 황보박(皇甫鎛)을 폄출(貶出)하고 유필(柳泌)을 장살(杖殺)한 두 가지 일을 하여 다소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였다.
그러나 몸이 상중(喪中)에 있고 널이 바야흐로 빈소(殯所)에 있을 때에 있어, 공경(公卿)들에게 분명하게 조서(詔書)하여 죄인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갑자기 군신(羣臣)들과 같이 복을 벗고서, 성대하게 광대놀이를 차려 각저(角觝 씨름의 일종)를 재미있게 구경하고, 자주 큰 잔치를 벌여 조지(藻池)에서 고기를 잡고, 화청지(華淸池)에 행행(行幸)하여 사냥하고 공차기를 마음대로 하여, 내키는 대로 예의를 방치하고 놀이하기를 법도 없이 하였다.
또한 재상들이 모두 원대한 계획이 없어서 무비(武備)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모든 번진(藩鎭)들이 서로 잇달아 배반하여 비록 제도(諸道)의 군사와 원신(元臣)과 명장(名將)으로 토벌하였으나 마침내 공을 이루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 하삭(河朔 황하(黃河)의 북쪽)을 잃게 되어, 원화(元和 당헌종(唐憲宗)의 연호) 때의 공적이 이때에 와서 추락되고, 제 또한 금단(金丹)의 약 때문에 발 돌릴 새도 없이 죽었던 것이다.

경종(敬宗) 이름은 담(湛), 목종의 장자로 재위 2년.
정사에 임한 처음에는, 비록 이신(李紳)이 비방을 받아 폄척(貶斥)된 것을 알면서도 마침내 불러오지 못하였고, 비록 배도(裵度)ㆍ이강(李絳) 같은 어진 사람을 등용했었지만 마침내 저지(沮止)되고 말았으며, 이봉길(李逢吉) 같은 한낱 소인이 권세를 부리매 팔관 십육자(八關十六子)가 서로 결탁하고 들어붙어 어진 이와 능한 이를 질투하여 조정의 정사가 마침내 흐리고 어지러워졌다.
비록 위처후(韋處厚)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부족한 것을 바로잡고 유익하게 되도록 하였으나 마침내, 그 당여(黨與)의 무리를 이겨내지 못했다.
제가 청납(聽納)에 있어서는 또한 칭찬할 만한 것이 있으니, 이정(李程)의 간하는 말에 따라 궁전(宮殿) 경영을 중지한 것이나, 위처후의 말에 감동되어 비단[錦綵]을 내린 것과, 이덕유(李德裕)는 반조(盤條)를 만들라는 조서를 받들지 않았고, 위처후는 지(鷙 매)ㆍ능(綾)ㆍ금(錦)을 거두라는 명을 받들지 않았으며, 배도(裵度)는 낙양(洛陽)에 순행(巡幸)가는 것을 간하였는데, 모두 그만두었던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것이 하나만이 아니니, 덕종(德宗)이 간하는 말을 거절한 것과 비교한다면 어찌 우월하지 않겠는가?
실수는 어렸을 때에 사부(師傅)를 친근히 하지 않아 사치에 물든 데에 있다. 이러므로 왕위를 계승한 지 겨우 한 달 만에 애통(哀痛)을 잊고 잔치하여 즐기며, 소인들과 친근하고 놀이를 법도 없이 하며, 사여(賜予)에 절도가 없고 격구를 치되 손으로 쳐, 하류(下流)들이 하는 짓 하기를 좋아하였다.
성질이 또한 편협하고 조급하여 환자(宦者)들을 매질하고, 밤에 사냥 갔다가 환궁(還宮)하여 술이 취해 방에 들어갔는데, 멸촉(滅燭 전(殿) 위의 촛불이 갑자기 꺼짐)의 변에 몸이 유극명(劉克明)의 손에 죽었으니, 스스로 그런 슬픔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문종(文宗) 이름은 앙(昻), 목종(穆宗)의 차자(次子)로 재위 14년.
공손하고 검소함과 유아(儒雅 문아(文雅))함을 천품(天禀)으로 타고났다. 즉위한 첫머리에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려지기를 바라되, 사치를 없애고 검소하게 하며, 궁인(宮人)을 내보내고 응견(鷹犬)을 놓아 주며, 교방(敎坊) 등 쓸데없이 먹는 사람 1천 2백여 명을 줄이고, 조수(組繡)하고 조루(雕鏤 조각)한 물건을 없애니, 중외(中外)에서 서로 하례하기를 태평한 세상이 되겠다고 하였다.
이때에 있어, 배도(裵度)와 위처후(韋處厚) 두 정승을 신임하며 책성(責成)하도록 하였다면 누가 불가하다고 하였겠는가마는, 어찌하여 비록 허심 탄회(虛心坦懷)하게 청납(聽納)하면서도 능히 굳게 결정하지 못하고, 의논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이내 다시 중간에 변경되었으니, 사책(史冊)에 그를 말하되, ‘인자하기만 하고 과단이 적었다.’고 한 것이, 한 마디 말로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윽고 붕당(朋黨)이 서로 알력하여 사정(邪正)을 분별할 수가 없고, 환관(宦官)이 날뛰어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붕당의 알력은 우승유(牛僧孺)ㆍ이종민(李宗閔)에게서 시작하여 양 여사(楊汝士)에게서 이루어져, 우승유와 이종민이 서로 노리는 전후 40여 년 동안에 당나라의 정사가 따라서 쇠퇴했다.
환관의 화는 명황(明皇)에게서 시작하여 숙종(肅宗)ㆍ대종(代宗)에게서 이루어지고 덕종(德宗)ㆍ헌종(憲宗) 때에 만연되어, 병권(兵權)이 수중에 있게 되어 시역(弑逆)하기가 일쑤였다.
감로(甘露)의 변을 당해서는 재상이 죽음을 당하고 조신(朝臣)이 다 섬멸되며, 제는 ‘집 종에게 제재를 받는다.’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으니, 슬픈 일이다.

무종(武宗) 이름은 염(炎), 목종(穆宗)의 다섯째아들로 재위 6년.
제는 영특하고 민활함이 특히 뛰어나 웅걸찬 계책으로 독단(獨斷)하였다. 이덕유(李德裕)에게 정승을 맡기면서부터 한결같은 뜻으로 위임하였기 때문에, 이미 사라졌던 위엄과 권력을 진작(振作)할 수 있게 되어, 상당(上黨)에서 이기고, 태원(太原)을 취하여 화란(禍亂)이 대략 평정되고 기율(紀律)이 다시 신장(伸張)되었으니, 역시 제(帝)가 사람을 알아보기에 밝아 오로지 이덕유를 신임하여서 이루게 된 것이다.
유독 애석한 것은, 환관(宦官)의 권세를 빼앗지 않아, 구사량(仇士良)으로 하여금 그의 무리들에게 은총(恩寵)을 굳히는 방법을 가르치게 하고, 방사(方士)의 말에 현혹되어 조귀진(趙歸眞)으로 하여금 잘못 금단(金丹)의 약을 올리게 해서, 제가 더욱 조급해져 10일 동안이나 말을 하지 못하다가 붕(崩)하기에 이르렀다.

선종(宣宗) 이름은 침(忱), 헌종(憲宗)의 열셋째아들로 재위 13년.
제는 성격이 엄숙하고 침중하여 말이 적으므로, 궁중에서는 더러 지혜[慧] 구본(舊本)에는 혜(惠)자로 됨. 롭지 못하게 여겼는데, 더욱 스스로 감추고 숨기어 여럿이 같이 있거나 노는 장소에서도 일찍이 말을 하지 않았으나 태숙(太叔)이 되어 감국(監國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림)할 적에는 근심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여러 신하들을 접하고 모든 일을 재결함에 미쳐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그가 은덕(隱德)이 있음을 알았다.
즉위하게 되자, 한재를 걱정하고 죄수를 처리하며, 궁녀를 내보내고 유사(儒士)들을 좋아하며, 조종(祖宗)을 본받고 재상(宰相)들을 공경하며, 형제간에 화목하고 외척(外戚)에게 사정(私情)을 두지 않았으며, 어사(御史)를 제수(除授)하되 순리(循吏)의 자손을 임용하고, 변방 장수를 가려 쓰며, 유신(儒臣)으로써 탐하고 포악한 사람을 바꾸었다.
자사(刺史)의 선임(選任)은 중요하게 여겨,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자사가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을 해롭게 한다.’고 하였으며, 관작(官爵)과 상사(賞賜)를 아끼고 장복(章服)을 아끼며, 위의(威儀)를 중히 여기고 청납(聽納)하기를 넓게 하며, 서민들에게 혜택을 입게 하고 부역을 균평하게 했다.
환관(宦官)을 베어 원화(元和 당헌종의 연호)의 역당(逆黨)을 제거하고, 하서(河西)를 평정하고 하황(河湟)을 취하여 1백여 년 동안 상실했던 강토를 수복(收復)한 것에 있어서는, 사책(史冊)에 ‘대중(大中) 때의 정사를 당나라가 망할 때까지 사람들이 사모하고 노래하여 소태종(小太宗)이라 하였다.’고 칭찬하였으니, 어찌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랴?
다만 그의 부족한 바는, 초년에 임금과 신하가 회창(會昌 당무종(唐武宗)의 연호) 때의 정사를 회복하려고 힘썼지만, 이덕유(李德裕) 같은 어진 신하를 폄척(貶斥)하고 승니(僧尼)의 폐단스러운 일을 복구하였으며, 적모(嫡母) 곽태후(郭太后)를 예(禮)로 섬기지 않다가 하루 저녁에 갑자기 붕(崩)하게 하고, 선대(先代)인 목종(穆宗)ㆍ경종(敬宗)ㆍ문종(文宗)ㆍ무종(武宗) 네 임금의 신주(神主)를 출향(出享)하되 기탄없이 하였으며, 만년(晩年)에는 사사로운 사랑에 빠져 저위(儲位 태자)를 정하지 않아서 대신들이 말하여도 듣지 않았으니, 임금의 대체에 어두움이 심했다.
그 자신도 전 사람의 복철(覆轍)을 답습하여 금단(金丹)을 먹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조갈(燥渴)이 났고, 이듬해에 등에 종기가 나 치료할 수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의종(懿宗) 이름은 최(漼), 선종의 장자로 재위 14년.
제는 평범한 자질로 교만하고 사치하는 습관에 흘러, 계단(戒壇)에서 중에게 도첩을 주고 부처에게 아첨하느라 정사에 게을렀으며, 자주 여러 절에 행행(行幸)하여 사여(賜予 하사)를 절도 없이 하였다.
혜성(彗星)이 변괴를 예고하여 하늘의 경계가 분명한데도, 제는 어리석어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중외(中外)에 선포하되 상서(祥瑞)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노암(路巖)ㆍ위보형(韋保衡)이 이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명덕(名德)이 있는 사람들을 폄척(貶斥)하고, 뇌물을 받으며 사(私)를 숭상하여 나라의 기강을 흐리고 어지럽혔다.
제가 또한 음악을 즐기고 좋아하여 궁전 앞에서 공봉(供奉)하는 영인(伶人 광대)이 항시 5백 명에 가까웠고, 자주 놀이를 다녀 내외(內外) 제사(諸司)의 호종(扈從)하는 사람이 10여만 명씩이나 되기 일쑤였다.
초년에는 절강(浙江)의 적이 크게 번지고 남조(南詔)가 들어와 침범했는데, 비록 장수를 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으나, 서주(徐州)의 적이 다섯 주(州)를 쳐 함락시키매, 겨우 사타(沙陀 부족(部族)의 이름)의 힘으로 이겨내고 개선(凱旋)하였다.
제가 더욱 주색에 빠져 정사를 친히 돌보지 않으며, 참소하는 말을 믿고 충간(忠諫)하는 사람을 내쫓으며, 군부(軍賦)를 줄이고 백성들의 재물을 고갈시켜 불사(佛事)를 숭상하므로 간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에 말하기를 ‘살아서 부처를 보면 죽어도 또한 한 없겠다.’고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역시 애석한 일이다.

희종(僖宗) 이름은 현(儇), 의종의 다섯째아들로 재위 15년.
제는 어려서 왕위를 이어받아 정사를 신하들이 맡으므로, 이 관사(官司) 저 관사끼리 서로가 알력이 있었는데, 오로지 놀이만 일삼아 정사를 친히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전령자(田令孜)에게 위임하며 ‘아부(阿父)’라고 불렀다.
이때를 당하여 사치하고 군사를 남용하여 부렴(賦斂)이 더욱 급해지고 관동(關東)에 가뭄과 충재가 들어 백성들이 이산(離散)되고 굶주리다가 떼를 지어 일어나 도둑이 되었다.
도적 중에는 황소(黃巢)가 가장 번성했는데 강절(江浙 강소(江蘇)와 절강(浙江))까지 약탈하고, 다시 채석(采石)에서 북으로 강을 건너 한없이 중원(中原)까지 몰고 가 양경(兩京)을 함락시키고서 궁궐을 짓밟고 백관들을 죽이고 종실(宗室)들을 죽인 다음 드디어 대호(大號 임금)를 참람하게 일컬었다.
이에 앞서 전령자(田令孜)가 승여(乘輿)를 받들고 파천(播遷)을 가는데, 제가 떠도는 시기에 있으면서도 낮이나 밤이나 환관(宦官)들과 같이 있고 외신(外臣)을 소외하며, 간관(諫官)과 보필(輔弼)을 죽여 없앴다.
그래도 한때의 충의(忠義) 있는 신하들이 혹은 강개(慷慨)하게 맞아 뵙고 혹은 분발하여 싸워서 반 년이 안 되어 적을 부수고 장안(長安)을 수복하였었는데, 또한 환관들로써 안팎을 전제(專制)하게 되매, 이극용(李克用)ㆍ왕중영(王重榮) 등이 미워하여 임금의 곁을 맑게 하자고 하였으나, 제가 드디어 봉상(鳳翔)ㆍ보계(寶雞)ㆍ흥원(興元)에 거둥하게 되고, 경성(京城)이 거듭 방화와 약탈을 당하여 거의 남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 게다가 양왕(襄王)이 이미 제위(帝位)를 몰래 차지하고 멀리 있는 제를 높여 태상황(太上皇)을 삼으니, 해가 지난 뒤 서울로 돌아왔다가 겨우 한 달이 지나서 붕(崩)하였다.

소종(昭宗) 이름은 엽(曄), 의종(懿宗)의 일곱째아들로 재위 16년.
제는 체모가 환하고 맑아 영특한 기운이 있었는데, 조정이 날로 비루해지는 것을 분하게 여겨서 개연(慨然)히 선대의 업적을 회복할 뜻이 있었다.
번저(藩邸)에 있을 때부터 본디 환관들을 미워하였고, 즉위하게 되자, 정사를 여러 재상(宰相)들과 의논했으니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때에 있어, 환관들이 뿌리박히고 번진(藩鎭)들이 강성하고 횡포하여 힘으로 제어할 수가 없었고, 충성과 사특이 분별없으며 행동거지가 타당하지 못하였는데 반역하는 자가 사방에서 일어나자 세 장수가 병난을 핑계하고 서울로 들어와, 무정(茂貞)은 거듭 경사(京師)를 침범하고, 한건(韓建)은 군사로써 행궁(行宮)을 둘러싸 11왕(王)을 죽이고 사군(四軍)을 해산시켰다. 제는 이때에 있어, 떠돌며 생명을 보존하면서도 오히려 간하는 신하를 내쫓아 이목을 막았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에 최윤(崔胤)이 날마다 환관을 베이는 것으로 일을 삼아, 죽은 사람까지 있었으니, 환관들이 참으로 이미 두려워하게 되었고, 제 또한 술에 빠지고 마구 노여워하니, 사람들이 저마다 위태롭게 여겼는데, 유계술(劉季述) 등이 비밀히 폐립(廢立)할 것을 모의하여 제후(帝后)를 유폐(幽閉)하고 욕을 보였었다.
최윤이 이미 주전충(朱全忠)을 불러들여 성원하도록 하고, 손덕소(孫德昭)의 공을 힘입어 다행히 반정(反正)함으로서, 유계술 등이 복주(伏誅)되고 환관들이 거의 다 없어졌다. 그러나 주전충의 찬탈(簒奪)할 음모가 차차 이루어지고, 얼마 안 되어 최윤은 또한 죽음을 면하지 못했으며, 제도 이어 시해(弑害)를 당하고 말았다.

애제(哀帝) 이름은 축(祝), 소종의 아홉째아들로 재위 4년.
주전충(朱全忠)이 주장하여 즉위하게 되었다. 한 해를 지나자 주전충이 소종(昭宗)의 아들 아홉 왕(王)을 다 죽이고, 배추(裵樞) 등 30여 인을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였으며, 제도 역시 시해당하므로서 당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오대(五代)

 

양(梁)나라 주전충, 당나라 이존욱(李存勗), 진(晋)나라 석경당(石敬瑭), 한(漢)나라 유지원(劉知遠), 주(周)나라 곽위(郭威)는 모두 군사의 힘과 속임수로써 저희들끼리 서로 뜯고 빼앗아, 민생들이 군사의 칼날에 죽지 않으면 반드시 학정(虐政)에 죽어 갔고, 그들의 자손들도 또한 능히 보존하고 지키지 못하여, 50년 동안에 역성(易姓 임금의 성(姓)이 바뀜)하기를 여덟 번 하였으니 민생들의 화가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

 

 

君道

 






陶唐氏。帝嚳子。姓伊耆。繼嚳以火德王。都平陽。在位七十二年。
堯自唐侯。陞爲天子。堯之盛德。固未易名言也。苟卽堯典而反復之。則庶乎可以得之矣。以言其心法。則曰欽明文思安安。以言其身法。則曰允恭克讓。其曰。克明俊德。以親九族者。身修而家齊也。九族旣睦。平章百姓者。家齊而國治也。百姓昭明。協和萬邦者。國治而天下平也。蓋自身心推而至於家國天下。內外交養。本末俱治。可見聖學之有本。而聖治之有序矣。乃命羲和。欽若昊天。曆象日月星辰。是堯之理會天道。咨若時登庸。咨若予采。是言理會人道。帝曰。咨四岳。湯湯洪水方割。蕩蕩懷山襄陵。浩浩滔天。下民其咨。有能俾乂者。是言理會地道。帝咨四岳以巽位。師錫帝曰。有鰥在下。曰虞舜。帝兪之。釐降二女于嬀汭。嬪于虞。帝曰。欽哉。此言禪讓之事。蓋人主之職。以用人爲重。以知人爲難。一咨而得丹朱之頑。再咨而得共工之靜言庸違。三咨而得鯀之方命圮族。直至咨四岳擧舜。爲天下得人。人君以一身。出而爲天地人物之宗主。不過爲生民立極。盡其輔相財成之道。以推其極。三才之責旣盡。則聖人之能事畢矣。



有虞氏。顓頊六世孫。姓姚。受堯禪。以土德王。都蒲阪。在位六十一年。
書曰。重華協于帝。此言舜之德與堯合也。自今觀之。濬哲文明者。卽舜之心法也。溫恭允塞者。卽舜之身法也。其曰。父頑母嚚象傲。克諧以孝。烝烝乂不格姦。曰。民協于中。四方風動。萬邦黎獻。共惟帝臣。則亦舜之家齊國治而天下平也。首察璣衡以齊七政。舜之理會天道也。若夫徽五典而五典從。納百揆而百揆敍。敎化行而政事治也。四門穆穆。人化之也。烈風雷雨不迷。神相之也。類上帝禋六宗。望山川徧群神。所謂使之主祭而百神享之也。輯五瑞。日覲四岳群牧。與之更始。大一統也。五載一巡狩。群后四朝。所以通上下之情也。協時月正日。重正朔也。同律度量衡。一制度也。仁以恤五刑之用。義以斷四凶之罪。而天下咸服矣。闢四門明四目達四聰。所以來天下之賢俊。而廣四方之視聽也。惇德允元。扶君子也。而難任人。抑小人也。咨奮庸煕帝之載。則擧伯禹宅百揆。閔黎民阻飢。則以棄爲后稷。憂五品不遜。則以契爲司徒。命皐陶而作士師。命垂而作共工。若上下草木則以益爲虞。典三禮則以伯夷爲秩宗。命夔典樂。所以敎胄子。命龍作納言。所以堲讒說。此卽堯疇咨之意也。何莫非理會人事也。至於肇十有二州。封十有二山。濬川。卽理會地道也。當耄期而倦于勤。則命禹總師。終陟元后者。卽咨四岳擧舜之意也。此外無餘事矣。蓋人君職分之大綱。不過如此。噫。執中一語。上以受之堯。下以傳之禹。而益之以道心惟微。人心惟危。惟精惟一三語。以開聖學之淵源。實萬世生民之所賴。孰謂其道行於一時而已哉。



姓姒。鯀子。舜授以位。都安邑。以金德王。在位十五年。
八年於外。三過其門而不入。啓呱呱而弗子。禹之勤也。克勤克儉。不自滿暇。禹之賢也。不矜不伐。天下莫與爭功能。禹之德也。平治水土。使民得其居。曁稷奏庶艱食。使民得其養。立封建井田之經界。使人不爭。貢金九牧。以鑄九鼎。載所立九州之制度。以建寅爲歲首。使天時人事。不失其正。此皆萬世之功也。懸鐘鼓磬鐸。以待四方之士。建旌旗斿旐。以別尊卑之等。興學校以明倫。泣罪人而痛異心。拜昌言而惡旨酒。紀綱典則。關石和鈞。無不備焉。禹之功厚德茂。立極垂統。爲萬世之準者至矣。若聲爲律身爲度。左準繩右規矩。則又要其本而言之也。嗚呼。禹傷父治水殛死。故直以此自任。立偉績蓋前愆。至於禘嚳而郊鯀。禹之責塞矣。然其心猶有所歉然。故於宗廟則致其孝。於祭祀則致其美。於溝洫則盡其力。寧飮食之菲。衣服之惡。宮室之卑。皆不敢暇顧者。其心不能一日安於天子之常奉也。至於擧天下以授之啓。杜萬世僭亂之本。禹之處父子之間。可謂無所愧負矣。蓋嘗論禹之傳於舜者。執中一語。得於天者。洪範九疇。蓋皇極居中。以一御八。居中制外。亦中而已矣。聖學明而彝倫敍。尤有功於世敎也如此。吁盛矣哉。

禹子。在位十年。傳子自此始。
禹崩。益避禹之子於南河之南。天下諸侯朝覲者。不之益而之啓。謳歌者。不謳歌益而謳歌啓。於是卽位。啓可謂賢能繼事矣。有扈氏叛。啓召六卿。躬行天討。數其威侮五行。怠棄三正之罪滅之。其曰。大戰于甘者。所以見啓之奮發有爲。且著有扈不臣之罪。而帝王升降之幾。世變之一會。從可知矣。

太康啓之子。羿廢之。在位三十年。
以逸豫滅厥德。黎民咸貳。乃盤游無度。畋于有洛之表。十旬不返。有窮后羿因民不忍。拒于河。厥弟五人。作五子之歌以怨之。

仲康太康之弟。羿廢太康而立之。在位十四年。
羿立而相之。仲康肇位四海。首命胤侯掌六師。惟時羲和沈亂于酒。遐棄厥司。至日食大變。尙罔聞知。王命胤侯征之。羿廢太康而立仲康。其簒乃在相之世。是則仲康猶有以制之也。

仲康子。徙商丘。在位二十九年。羿逐相簒國二年。其臣寒浞弑之。
權已歸羿。爲羿所逐。居商丘。且羿恃善射。不修政事。淫于原獸。而卒爲寒浞所滅。

少康相之子。滅寒浞。復禹舊績。在位二十一年。
以相遺腹之子。生四十餘年。以一成之田一旅之衆。能布德兆。謀收夏衆。撫其官職。以滅浞而有窮遂亡。少康區區亂離之間。復禹績還舊都。祀夏配天。不失舊物。而有夏中興焉。

孔甲不降之子。在位二十年。自少康至孔甲九代。
好鬼神。事淫亂。德衰。諸侯多叛。

帝發之子。在位五十年。湯放之。自孔甲至桀四代。
自孔甲以來。諸侯多叛。桀尤無道。有力能伸鐵鉤索。滅德作威。天下怨之。嬖妺喜。爲瓊宮瑤臺。酒池肉林。一鼓而牛飮者三千人。妺喜笑以爲樂。殺直臣關龍逄。囚湯夏臺。旣免而得釋。湯乃與伊尹。興師伐桀。戰于鳴條克之。放之于南巢。



姓子。名履。契十三代孫。都亳。以水德王。在位十三年。
初以七十里。諸侯爲方伯。葛伯不祀。湯始征之。聘伊尹。學焉而後臣之。任以國政。湯出見野張網。去三面。諸侯聞之曰。湯德至矣及禽獸。歸之者四十餘國。桀尤無道。尹相湯而伐之。湯有慙德曰。予恐來世。以台爲口實。仲虺作誥以釋之。大旱。湯自以身爲犧牲。禱於桑林。六事自責。曰政不節歟。民失職歟。宮室崇歟。婦謁盛歟。苞苴行歟。讒夫昌歟。言未旣大雨。制官刑。儆于有位曰。敢有恒舞于宮。酣歌于室。時謂巫風。敢有殉于貨色。恒于遊田。時謂淫風。敢有侮聖言逆忠直。遠耆德比頑童。時謂亂風。惟兹三風十愆。卿士有一于身。家必喪。邦君有一于身。國必亡。稱其德者有曰。布昭聖武。代虐以寬。有曰。肇修人紀。從諫弗咈。先民時若。居上克明。爲下克忠。與人不求備。檢身若不及。有曰。立賢無方。湯之德。可謂盛矣。其曰。上帝降衷。若有恒性者。實開後曰孟子性善之論。其有功於聖學亦大矣。

太甲湯之孫。在位三十三年。自湯至太甲四代。
伊尹祠于先王。奉嗣王祇見厥祖。侯甸群后咸在。百官總己。以聽冢宰。伊尹乃明言烈祖之成德。以訓于王。太甲不明。欲敗度。縱敗禮。伊尹營于桐宮。密邇先王其訓。王徂桐宮。居憂三年。悔過自怨自艾。處仁遷義。伊尹乃以冕服。奉王歸于亳。還政于王。由是修德布惠。克終湯業。

太戊雍己之弟。在位七年。自太甲至太戊六代。
先時商道浸衰。諸侯或不來王。至是亳有祥桑穀。共生于朝。一暮大拱。伊陟曰。妖不勝德。君之政其有闕歟。太戊於是修先王之政。明養老之禮。早朝晏退。問疾弔喪。三日。桑穀枯死。三年。遠方重譯至者七十六國。

盤庚陽甲弟。改商曰殷。在位二十八年。自太戊至盤庚十一代。
自仲丁至陽甲。多廢嫡立弟。爭位相伐。亂凡九世。諸侯莫朝。盤庚初。殷道益衰。耿都又有河決之患。欲遷于亳。臣民安土重遷。盤庚作書以諭之。乃從。盤庚旣遷。改商曰殷。行湯之政。殷道復興。

武丁小乙子。在位五十九年。自盤庚至武丁四代。
恭默思道。夢帝賚良弼。以形旁求于天下。說築傅巖之野。惟肖。爰立作相。置諸左右。命之曰。朝夕納誨。以輔台德。說作書三篇告王。皆諄勤懇切。其曰。惟木從繩則正。惟后從諫則聖。又曰。非知之艱。行之惟艱。又曰。學于古訓。乃有獲。事不師古。以克永世。匪說攸聞。又曰。惟學遜志。務時敏。厥修乃來。念終始典于學。厥德修罔覺。尤爲人君之所當法者也。祭成湯。有雊雉之異。祖己訓諸王曰。惟先格王。正厥事。高宗從之。不敢遑寧。嘉靖殷邦。至于小大。無時或怨。三年。蠻夷編髮。重譯來朝者六國。旣而伐荊楚。伐鬼方。僭亂旣夷。殷道復興。享國五十有九年。號曰高宗。

祖甲祖庚弟。在位三十三年。自武丁至祖甲三代。
王少不義。高宗遠之。居處困阨。不得志。作其卽位。爰知小人之依。能保惠于庶民。不敢侮鰥寡。又作盤盂之書以自戒。

武乙庚丁子。遷都河北。在位五年。自祖甲至武乙四代。
王無道。爲偶人。謂之天神。僇辱之。又爲革囊盛血。仰射之。命曰射天。獵於河渭之間。暴雷震死。

帝乙太丁子。在位三十七年。自武乙至帝乙三代。
殷道益衰。庶長微子啓賢。箕子勸王以爲嗣。王以其母賤不立。立嫡子受辛。是爲紂。

帝乙子。立三十四年。武王伐之。王赴火而死。
資辯捷疾。才力過人。手格猛獸。智足以拒諫。言足以飾非。播棄黎老。昵比罪人。爲天下逋逃主。萃淵藪。乃夷居不祀上帝神祗宗廟。尙兵百戰皆克。伐有蘇氏。獲其女妲己嬖之。惟言是用。作奇技淫巧以悅之。使師涓作新淫之聲。北里之舞。靡靡之樂。厚賦稅。以實鹿臺之財。盈鉅橋之粟。廣沙丘苑臺。以酒爲池。懸肉爲林。縱男女倮逐其間。爲長夜之飮。作炮烙之刑。取妲己笑樂。刳孕婦。斮朝脛。醢九侯。脯鄂侯。囚周侯於羑里。周臣進美女奇物善馬得釋。更賜弓矢斧鉞。專征伐爲西伯。西伯卒。子發立。時紂惡未悛。微子去之。以存宗祀。比干諫而剖心。箕子佯狂爲奴。西伯發帥諸侯伐紂。紂犇鹿臺。衣寶玉自焚。



武王姓姬。名發。文王子。都鎬。以木德王。在位七年。
太公爲師。周公爲輔。召公,畢公之徒左右王師。九年。戡黎。十三年。伐紂。踐天子位。乃反商政。政由舊。釋箕子囚。封比干墓。式商容閭。散鹿臺之財。發鉅橋之粟。大賚于四海。而萬姓悅服。陳洪範而萬世彝倫之道明。戒丹書而敬怠義欲之辨著。報本反始則崇追王祭祀之禮。垂裕後昆則立敎世子之法。其建官也惟賢。其位事也惟能。重民五敎。而食喪祭之加謹。惇信明義。而崇德報功之兼盡。此其所以垂拱而天下治。尙何難之有。

成王誦。武王子。在位三十七年。
周公應問無窮。導之以道。太公誠立而敢斷。輔善而相義。以充大其志。召公廉潔而切直。匡過諫邪。以矯拂其行。史逸博聞強記。敏給而善詞。以承救其遺忘。王雖童蒙而四臣維之。朝廷無過事。王因風雷之變。知周公之元聖。致辟群叔。於無逸之書。知稼穡之艱難。以復后稷,公劉之業。求群臣之助則曰。敬之敬之。天惟顯思。又曰。日就月將。學有緝煕于光明。佛時仔肩。示我顯德行。此皆得於周公者。其定禮樂立法制。爲三代之令王。宜哉。

康王釗。成王子。在位二十六年。
旣居天子位。誥諸侯。太保率西方諸侯入應門左。畢公率東方諸侯入應門右。皆再拜稽首曰。今王敬之哉。張皇六師。無壞我高祖寡命。王若曰。庶邦侯甸男衛。予一人釗報誥。昔君文武。建侯樹屛。在我後之人。雖爾身在外。爾心罔不在王室。用奉恤厥若。無遺鞠子羞。群公皆聽命。又冊命畢公。以成周之衆。保釐東郊。王克遵洪範。敬恭神人。四夷賓服。海內晏然。百姓興於禮義。囹圄空虛。成,康之際。天下安寧。刑措不用者四十餘年。有唐虞之風焉。

昭王瑕。康王子。在位五十一年。
王在位久。不能彊於政治。風化稍衰。時月有光五色貫紫微。井水溢。楚人不朝。王南征返濟漢。漢濱人濟以膠船。中流膠液。王及祭公皆溺死。

穆王滿。昭王子。在位五十五年。
初年。擧用賢才。命君牙爲大司徒。作君牙。有曰。心之憂危。若蹈虎尾。涉于春氷。命伯冏爲大僕正。作冏命。有曰。怵惕惟厲。中夜以興。思免厥愆。于時王心未肆也。迨夫將征犬戎。祭公謀父諫曰。先王耀德不觀兵。有威讓之。令有文告之辭。又不至則增修於德。無勤民於遠。不聽。遂得四白狼四白鹿以歸。由是荒服不至。諸侯有不睦者。周德始衰。又東巡至鄭大之谷。起春霄宮。集諸方士。言神仙事。造父得八駿馬獻王。王喜。欲周行天下以求神仙。於是西巡。樂而忘返。作白雲黃竹之歌。天下愁怨。徐偃修飾仁義。諸侯多歸之者。僭稱王。王聞之。馳歸。造父爲御。起諸侯師。與荊楚合攻徐破之。偃王走死。未幾。王又欲出游。祭公謀父作祈招之詩以風王。王感而止。命修辭令以懷諸侯。以柔四夷。周室再安。末年。王在位久。敎化衰。刑罰繁。思有以靖之。此呂刑之書所以作也。

共王繄扈。穆王子。在位十年。
遊於涇上。密康公從。受三女之奔。其母曰。必致之王。夫女三爲粲。粲美物也。而何德以堪之。王猶不堪。況爾之小醜乎。康公不獻。一年。王滅密。女色之傾人國。固如此夫。

孝王辟方。懿王弟。在位十五年。
惡來之後有非子者好馬。善養息之。王命主馬。汧渭之間。馬大蕃息。王邑之秦。于時大雹。江漢氷。牛馬死。當嬴秦始封之世。而災異之見殺氣若兹。履霜之象。已兆於此矣。天道之倚伏。可畏也哉。

夷王燮。孝王子。在位十六年。
覲禮不明。王始下堂而見諸侯。綱常自此紊矣。時荊熊繹五世孫熊渠。甚得江漢民和。西伐庸東侵楊粤。僭立三子爲王。衛康公七世孫頃公。首壞王制。幷邶鄘之地。

厲王胡。夷王子。在位四十年。
詩之變雅始作。時榮夷公好專利。有寵於王。大夫芮良夫諫曰。夫利。百物之所生也。天地之所載也。王人者。將以導利而布之上下。使人百物無不得極。猶日怵惕。懼怨之來也。今王好專利。其可乎。匹夫專利。猶謂之盜。王而行之。其濟鮮矣。榮公若用。周必敗也。不聽。卒以爲卿士用事。政益暴虐。四夷交侵。征斂數起。虐用其民。民不堪命。聚而謗王。王得衛巫。使監謗以告。輒殺。國人莫敢言。王喜告召公曰。吾能弭謗矣。召公曰。是障之也。防民之口。甚於防川。川壅而潰。傷人必多。民亦如之。故爲水者。決之使導。爲民者。宣之使言。王不聽。三年。民不堪命。作亂流王于彘。十四年。王崩于彘。

宣王靖。厲王子。在位四十六年。
王卽位。周召爲輔。王承衰亂之後。旱災知懼。側身修行。以銷天變。任賢使能。興衰撥亂。有山甫以補衮職之闕。有申伯以蕃四國之維。命召公平淮夷。吉甫伐玁狁。方叔征蠻荊。故能復文武之境土。會諸侯於東都。而周室中興焉。況當是時。內有姜后之賢。脫簪珥以諫。所以輔成。早朝晏罷。勤於政事者多矣。惜乎。耤田不修。虢公徒諫。戰千畝而料民。殺杜伯非其罪。祈父,白駒,黃鳥之詩。終不能免詩人之刺。則當時司馬之職匪人。賢者之去。欲留不可。末年。生民蓋有失其所者矣。

幽王宮涅。宣王子。在位十一年。自幽王二十六代至赧王延亡。
沈湎淫泆。讒夫並進。賦斂煩重。百姓愁怨。不以禮信待諸侯。賞罰不當。諸侯怨叛。初。王嬖于申。生太子宜臼。後嬖褒姒。生伯服。虢石父。與褒姒譖后及太子。王廢之。而以褒姒爲后。伯服爲太子。褒姒嬌恣。王惑之。詩人知其必亡。刺之曰。燎之方揚。寧或滅之。赫赫宗周。褒姒滅之。宜臼奔申。申侯怒。與犬戎攻宗周。殺王驪山下。諸侯東迎故太子於申。歸而立之。是爲平王。而周轍遂東矣。自是以後。周室微弱。諸侯強僭。平王之詩。降爲國風。桓王之伐鄭。卒至無功。五霸之興。始於莊王。終於定王。歷七王七十五年之久。政在霸主。孔子作春秋以譏之。及威烈王封晉大夫爲諸侯。王法尤壞。七國爭雄。自相侵滅。而周之禮樂征伐。不出於天子。徒擁虛名於百辟之上。是亦無足取矣。然竊嘗論之矣。周之衰微至於如此。尙且綿曆數百載而後亡。何也。蓋文武周公。立經陳紀。創法定制。靡不備具。而仁以固結之。禮以維持之。端本洪源。自足與天無極。故晉侯之強而其請隧也。以王章不許。楚子之僭而其問鼎也。以天命未改沮之。至於帝秦之說。屈於匹夫之議。嗚呼。不有赧王柔懦衰削之甚。雖以虎狼之秦。若我何。然此已矣。孔子生於靈王之二十一年庚戌。雖不得位。乃敍書傳禮記。正樂繫易。作春秋。實紹伏羲堯舜禹湯文武周公之道統。傳之於後。縱未能東周乎一時。蓋亦有以東周乎萬世。嗚呼盛哉。



高祖姓劉。名邦。都長安。以火德王。在位十二年。
帝起自布衣。提三尺劍。降秦蹙項。擒魏仆趙。降燕擊齊。曾未五年。遂登帝位。何成功之速哉。帝曰。運籌帷幄之中。決勝千里之外。吾不如子房。鎭國家撫百姓。給餉饋不絶糧道。吾不如蕭何。連百萬之衆。戰必勝攻必取。吾不如韓信。此三者。皆人傑。吾能用之。此吾所以取天下也。人亦以此稱之。然豈無其本而然歟。帝之寬仁愛人。意豁如也。常有大度。知人善斷。此德性之美。得於天賦者也。入關之初。與父老約法三章。殺人者死。傷人及盜抵罪。餘悉除去秦法。及羽弑義帝。爲之發喪。三軍縞素。此仁義之心。見於行事者也。三代之所以得天下。亦不是過也。及天下旣定。赦季布。斬丁公。示君臣之大義。封功臣封同姓。乃曰。非有功不侯。非劉氏不王。得深長之慮矣。次律令。申軍法。定章程。制朝儀。此皆制作之要。子孫持守之具也。過魯而祠孔子。詔郡國而擧明德。減田租而十五稅一。其崇先聖禮賢士。愛元元之意何如哉。所恨者。帝天性雖明達。無學力以磨治之。以功業驕其父兄。以爵祿驕其臣子。始於僞遊而功臣不保。牽於私愛而國本幾搖。其於人道之大綱。有所未盡者矣。且其大風一歌。氣豪力雄。雖足以振國勢於四百年之久。而霸心之存。不能追跡三代之聖王。惜哉。

惠帝盈。高祖子。在位七年。
減田租。重吏祿。擧孝弟力田復其身。除挾書律。民年七十已上及不滿十歲者。有罪當刑。皆宥之。此皆爲政之善者也。當是時。曹參爲相。淸靜守職。帝垂拱仰成。天下晏然。衣食滋息。而內修親親。外禮宰相。優寵齊悼,趙隱。恩敬篤矣。遭母后虧損至德。過愛魯元。納甥女爲后。緣張后無後。殺宮人取其子以爲嗣。帝於人倫之大者。俱不得其正矣。

文帝恒。高帝次子。封於代。諸呂滅。迎立之。在位二十三年。
跡帝之二十三年政治之美。建國本。崇節儉。尙德化。恤刑獄。務本愛民。開言路。擧賢良。抑貢獻。崇謙遜。吏安其職。民樂其業。是以。蓄積歲增。戶口蕃息。禁網疏闊。刑罰大省。斷獄數百。幾致刑措。嗚呼仁哉。獨其寵愛鄧通而賞賜鉅萬。好黃老之言而所尙差矣。善鼂錯術數之說。拜太子家令。專尙刑名。峭直刻深。啓七國之變。俾景帝終爲刻薄任數之君。貽謀之道有歉焉爾。不惟是也。高帝以來數十年。制度所宜立。敎化所宜修。乃於賈生之請。謙讓未遑。遂使因陋就簡。敎化不行。至於富民以錦繡被墻屋。公卿大夫以下競至奢侈無度。豪俠之徒橫於閭里。君上之恩過於三代。下民之苦刻於亡秦。此不得不爲帝恨之也。

景帝啓。文帝子。在位十六年。
卽位之初。除田半租。定笞律從輕之法。有足稱者。惜其以少恩而廢皇后。無罪而誅太子。輕許梁王以傳位。而俾王不得終。申屠嘉剛直可尙也。見黜而死。周亞夫定七國之功。不可忘也。以竄而死。吳王之叛。積怨於殺太子之時。而特發於削地之日耳。遽斬錯以謝。錯固不足恤。豈非傷於大體乎。恨釋之之劾奏則斥死淮南。怨鄧通之吮癰則困迫至死。其於人倫之間。刻薄任數。戕害殺戮。曾不小忍。豈慈父之所可同日語哉。又文帝寬仁大度。有高祖之風。以德化民。無事則謙抑如不能。有難則英武奮發。景帝忌刻少恩。乏人君之量。以智數繩下。平居則誅賞肆行。緩急則惴懼失措。父子之操心處事。大相反矣。史以文,景並稱。何也。蓋節儉不妄費。育民以致殷富。雖曰克遵洪業。可也。若其所謂風俗淳厚者。豈帝蒙其父文帝之深仁厚澤。醞釀滂沛之所成。而因以同稱耶。

武帝徹。景帝子。在位五十四年。
以少年英銳之資。雄才大略。得於所稟。卽位之初。卓然罷黜百家。表章六經。疇咨海內。擧其俊茂。與之立功。又招選天下文學才智之士。待以不次之位。史稱其得人之盛。然新進用事而大臣退屈。宦官典領尙書而外庭疏遠。丞相多不擇人而被誅戮者五。曲學阿世如公孫弘,兒寬之徒。何足道哉。老儒如申公力行一語。卒使放歸。大儒如董仲舒春秋三策。僅相江都。直如汲黯多欲之對。內史河內。曾謂得人之盛歟。未幾。尙祠禱。求神仙。興土木。事巡幸。信祥瑞。加以嚴刑峻罰。窮兵黷武。至於用度不足。聚斂無所不至。民力屈財用竭。因之以凶年。寇賊並起。道路不通。帝猶不能自反。江充構亂。禍及太子。衛后不得其死焉。禍變已極。然後紓徐痛定。始大悔悟。乃罷方士棄輪臺。下哀痛之詔。力本勸農。其拔霍光,金日磾於無聞之中。以當託孤之寄。亦可謂明遠也已矣。大抵帝之所爲。皆踵秦皇之覆轍。然秦終迷復而胡亥,趙高繼之者非其人。帝悔悟切責而孝昭,霍光繼之以善。故秦漢之興亡。大異焉。嗚呼。悔之雖晚。一念之善。其效如此。王通曰。秋風其悔心之萌乎。信哉。

昭帝弗陵。武帝少子。在位十三年。
年十四而辨上官,燕蓋之詐。信霍光之忠。承孝武奢侈師旅之餘。海內虛耗。戶口減半。霍光明時務之要。首擧賢良文學。問民所疾苦。除田租。止出馬。議罷鹽鐵榷酤。免馬口錢。減民賦錢十之一。樓蘭授首。匈奴和親。百姓充實。稍復文,景之業。其培養國脈爲如何。使天假之年。復得周,召之佐。成,康不足侔矣。

宣帝詢。武帝曾孫。霍光定策立之。在位二十五年。
帝養民間。高才好學。受詩論語孝經。知閭閻民事艱難。又苦吏急。卽位之初。首詔郡國。謹牧養民。而周德化。尙寬和。霍光薨後。勵精爲治。五日一聽政。丞相以下奉職奏事。擧賢良。罷屯田。罷池籞未幸者。勿治郡國宮館。以與貧民貸之。減鹽價。嚴繫囚。每拜刺史。輒親見。問以治民之事。有治效。輒璽書勉勵。公卿闕。以次用之。重文學。擇將相。凡謂之政事文學法理之士。咸精其能。夷狄賓服。邊境少事。史稱功光祖宗。跡比周宣。非歟。然當時法制過詳。道德不足。是以。人情姦詐益深。無功者冒其賞。有罪者逃其刑。欺蔽雜出而不可禁矣。至於用恭,顯。貴許,史。啓後日宦官外戚之禍。族楊韓而啓後日殺戮大臣之端。產三釁。卒以亡漢。由是觀之。綜核勵精之治。雖足使一時吏稱其職。民安其業。而高文忠厚寬仁之脈。斲喪無餘矣。故曰。詩書法律。周召刑餘。爲漢室基禍之主。誠哉。是言也。

元帝奭。宣帝子。在位十六年。
卽位以來。以公田賑業貧民。貸種食。減樂府員。省苑馬。以賑困乏。罷宮館。減馬獸肉食。貸貧民。賜孤寡高年帛。遣使存問耆老孤寡失職之人。幾無虛歲。可謂慈仁愛民之主矣。至於尙節儉好儒術。皆爲君之美節。獨惜其剛斷不足。柔懦太過。許,史與政。恭,顯專權。望之,周堪,京房,張猛,蘇建。皆以忠見死。公卿以下畏顯。側足而立。事無巨細。悉關宦寺。西漢之衰。決於此矣。

成帝驁。元帝子。在位二十六年。
善修容儀。臨朝淵默。尊嚴若神。可謂有穆穆天子之容矣。求遺書於天下。詔劉向校書。可謂知崇文學者。然卽位初年。首用元舅王鳳爲大司馬領尙書事。一日之內。封侯者五人。免斥石顯。奄宦之害雖除。委政王氏。外戚之禍愈熾。帝方耽于酒色。飛燕蠱惑。赤鳳內亂。許后廢死。劉向,王章,朱雲,梅福誠忠懇切。如水沃石。披心讜論。動遭按劍。獨杜欽,谷永,張禹,孔光之徒諂諛權臣。乃保寵固祿。跡帝昏懦柔惡如此。漢祚之移。不在其身幸矣。

哀帝欣。元帝庶孫。在位六年。
帝在東宮。見委政外家。王氏僭盛。首行罷免。政由己出。未爲失也。然丁傅,董賢相繼寵用。誅殺大臣。帝何不思之甚。王氏可去。丁傅獨可用乎。帝又聽董宏之說。寧負先帝之恩。欲尊私親之號。一差意向。遂拂群心。斗筲之莽。知公論在是也。故劾董宏。甘心屢黜。以文其姦。公卿大夫聞而直之。訟莽冤者百數。而莽得志矣。自是浮譽日隆。遂執魁柄。革漢爲新。梯禍自此。亦由帝行乖禮義。自失人心。倒持太阿。授之莽哉。

光武秀。高帝九世孫。都洛陽。在位三十三年。
帝才明勇略。誠非人敵。且開心見誠。無所隱伏。延攬英雄。務說民心。恢廓大度。同符高祖。二十八將。咸奮智勇。以成佐命之功。芟夷群雄。討除僭叛。十餘年間。海內蕩平。樹高祖之業。救萬民之命。赫然中興。且其老吏垂涕於漢官之儀。吏民喜悅於持節之行。人與之也。以至氷合滹沱。得免王郞之購。天與之也。自今觀之。召名儒定舊制。徵循吏用寬仁。側席幽人。以倡名節。保全功臣。共享富貴。見稼穡之艱難則除苛政而還輕法。念戶口之耗少則幷郡縣而去宂員。屯田儲糧。復三十稅一之制。久厭兵革則不言軍旅攻戰之事。西域遣子入侍。匈奴遣使稱臣。皆辭之而不許。加以身衣大練。色無重彩。不聽淫靡之聲。絶去玩好之物。宮房無私愛。左右無偏恩。損上林池籞之官。罷騁望弋獵之事。勤約之風行于上下。是以。三十年間。四夷賓服。百姓富庶。政敎淸明。禾黍豐稔。祥瑞屢應。此固無以議爲也。獨惟殺韓歆,歐陽歙非其罪。河南尹張汲與郡守十餘皆獄死。至於廢郭后移太子。貶馬援斥桓譚。用讖言而行封禪。信赤伏而除王梁。以不義而侯子密。深爲仁明之累耳。若夫憤前代強臣竊命。以吏事責三公。不任大政。事權盡歸臺閣而廟堂輕。其弊至於末世。雖忠臣義士相繼在位。慷慨激發。而於漢室之危亡。竟莫之救。亦帝矯枉太過之失也。

明帝莊。光武第四子。在位十八年。
天資聰察。自少能通春秋。知吏牘書說。其明智已足以切事情。及卽位。加意禮文之事。尤垂情古典。游意經藝。臨雍拜老。正坐講道。諸儒執經問難。觀聽者以萬計。自皇太子以下諸王外戚子弟。以至期門羽林之士。莫不受學。匈奴亦遣子入學。幸魯祠孔子及弟子。親御講堂。命皇太子諸王說經。尤善刑理。法令分明。日晏坐朝。幽枉必達。內外無倖曲之私。在上無矜大之色。斷獄得情。刑政簡易。至於遵奉建武法制。無敢或違。后妃之家。不得封侯與政。館陶公主爲子求郞不許。蠲公車之制。支日受章奏。可謂得爲政之體者也。自是威振四夷。莫不遣子入侍。稱臣入貢。而寶鼎麒麟白雉醴泉甘露芝草之祥畢至。亦云盛矣。嗟夫。殺朱浮。殺虞延。杖藥崧。提曳近臣。斥辱公卿。而君臣之禮闕。廣陵王楚王相繼殛死而兄弟之恩乖。楚獄連逮。死徙千數而刑獄濫傷於褊察。以耳目隱發爲明而弘人之度未優。遣使天竺。求浮屠書而開億萬世釋氏之禍。深可惜耳。

章帝烜。明帝第五子。在位十三年。
帝知人厭明帝苛切。以長者之資。行愷悌之政。除禁錮。務寬厚。戒嚴酷糾擅殺之罪。除慘刻之科。定報囚之期。罷均輸之法。著胎養令。賜行義穀。選擧惟進柔良。用吏惟取安靜。加以輕徭薄賦。民賴其慶。至於奉承太后。盡心孝道。友愛諸弟。不遣就國。備弟子儀以尊師。立四科以取士。命諸儒講論同異而稱制臨決。選高才受春秋詩書。以扶學廣義。公卿大夫至郡縣吏。咸選經明行修之人。虎賁衛士。皆習孝經。匈奴子弟亦遣入學。三代以還。風俗之盛。未有若此者。盛哉。獨惜其信竇后之譖而易太子。以飛書之謗而殺貴人。縱竇憲之橫。至奪公主田園而不正其罪。異日女主臨朝。外戚用事。皆此焉基。可謂三歎矣。

和帝肇。章帝第四子。在位十七年。
帝幼沖卽位。母后臨朝。竇憲專政。威權日盛。潛圖僭逆。朝臣震懾。望風承旨。帝年十四。赫然發憤。欲謀誅之。與丁鴻,鄭衆決議。卒鋤元惡。躬親萬幾。自是十七年間。擧苑囿以假貧民。弛陂池令民采取。勸民畜蔬。以助五穀。至於遣使發廩。救水旱蝗蟲之災。減民田租。幾無虛歲。廷尉陳寵。務從寬恕而活濟甚衆。司空張奮。口陳時政。卽雪冤獄而甘雨隨沛。袁安,丁鴻,魯恭,韓稜諸賢。相繼進用。宏益居多。遠方陳羞則勑太官勿復受獻。前後符瑞。自稱德薄。抑而不宣。齊民歲增。闢土日廣。北空朔庭。西通重譯。方之章帝。實乃過之。若帝者。使天假之年。孝文不足多遜也。

殤帝隆。和帝少子。在位一年。
鄧后臨朝。張禹,鄧騭,騭弟悝弘等輔政。騭雖謙遜。然外戚擅權。又起於此。和殤以後。宮闈定策。利在幼昏。外立者四君。臨朝者六后。蓋嗣主幼沖。女后專政。則外戚必用事。宦寺得與政。其勢然矣。

安帝祜。章帝孫。在位十九年
立年已十三矣。太后猶臨朝。十五年間。外戚用事。中官與政。天災地變。無歲無之。太后崩。帝甫親政。五年之間。惟乳母言是聽。惟宦官譖是從。鄧后旣夷太子。亦廢外戚典兵宦官封拜寵任無比忠言諫諍並皆不入太尉楊震屢疏愈切亦以譖死昏亂可知。

順帝保。安帝子。在位二十年。
帝初卽位。以定策功封中黃門孫程等十九人爲列侯。浸以干政。權勢日盛。賴司隸虞詡劾奏。以作敢言之氣。自是左雄,李固,周擧,黃瓊,張衡,王龔,皇甫規之徒。皆果於指陳。請加放斥。而宦官根據聯絡。非惟言不聽諫不行。反遭譖逐者有矣。后父梁商秉政。雖謙虛進賢。而怯弱無斷。至遣其子納交內豎。商卒。冀嗣大將軍。不疑尹河南。窮饕極惡。爲日不足。八使之遣。巡行風俗。張綱至爲之埋輪都亭。且曰。豺狼當道。安問狐貍。徑劾奏冀,不疑罪。帝雖知其忠言。莫能用也。餘使所劾。皆冀與奄官親屬。事竟不行。忠言屈抑。其能救亂乎。

冲帝炳。順帝子。在位三月。
梁后臨朝。委政宰輔。李固之言。多見採擢。宦官爲惡者一皆斥遣。天下方翹首太平。而梁冀專柄。輒相忌嫉。固幾不免。嗚呼危哉。

質帝纘。章帝玄孫。在位一年。
太后臨朝。帝性聰慧。舊本作惠 知冀驕橫。常朝群臣曰。此跋扈將軍也。言未脫口。而餠中之毒已進矣。

桓帝志。章帝曾孫。在位二十一年。
太后猶臨朝。梁冀專政。肆作威福。殺李固,杜喬。以重其威。繼殺袁著。以杜天下議己。至殺陳授,邴尊。帝始震怒。與宦者單超等五人。定議誅冀。元惡雖除。五侯嗣虐。流毒四海。而成瑨,劉瓆,翟超,黃浮,李膺等諸賢。皆犯宦官之怒。誣告膺等誹訕朝政。疑亂風俗。帝震怒。下膺等獄。辭連及杜密,陳詡,陳寔,范滂之徒。而錮黨之禍作矣。

靈帝宏。章帝元孫。在位二十二年。
帝初卽位。太后臨朝。陳蕃,竇武同心輔政。徵用名士李膺,杜密等。天下想望太平。惜其謀誅宦官。機事不密。反爲曹節,王甫等矯詔所殺。於是群凶得志。侯覽諷朱並告張儉黨人。曹節諷有司復擧膺等黨錮。名節誅戮。濫及無辜。生民之類幾息矣。帝又西園賣官。後宮列肆。弄狗駕驢。甘爲下流之態。一意聚斂。惟奄寺之言是聽。未幾帝崩。

獻帝協。靈帝次子。在位三十一年。
自董卓作亂。李傕構禍之後。群凶得志。竊弄威權者四年。傕與郭汜治兵相攻。脅帝幸營。燒焚宮室。乘輿播遷。甫還洛陽。老瞞詣闕。遷都于許。百官總己。大權遂挈而之操。挾天子令諸侯。以遂其私。二十五年間。殺生除拜。不出於天子之手。特寄空名於臣民之上耳。操死。子丕簒漢。

三國
蜀漢先主。以神明之胄。得孔明王佐之才。出師討賊。得三代行師之道。幾復漢室。雖上天不祚。先主崩而武侯薨。功業未卒。然其所成就。固已大矣。若魏曹丕之竊據北方。吳孫權之偏霸東吳。其間豈無一二得失之可言哉。然海宇分裂。年代又促。政事施爲。無足法者矣。姑闕之。


武帝卽位之初。矯漢魏刻薄奢侈之失。一從儉約。務去邪俗。居喪之制。壞已久矣。獨以天性矯而行之。亦可謂賢君矣。奈何平吳之後。驕心遽生。尙聲色事遊田。心術蠱惑。政事壞敗。而嗣子昏愚。賈后賊虐。加以浮虛相尙。廢棄禮義。骨肉相殘。無復人理。五胡乘之。懷,愍二帝俱爲所虜。萬姓崩潰。自古禍亂之極。未有甚於此者也。元帝雖國於建康。號稱中興。然忘國大讎。無恢復之志。而明帝才力最優。降年又復不永。餘皆不足算矣。

南北朝
南朝起自西晉之亂。東晉元帝國於江左。接其統者。劉裕稱宋。蕭道成稱齊。蕭衍稱梁。陳霸先稱陳而謂之南朝。其據中原僭竊尊號者。拓拔珪稱魏武帝。入長安稱西魏。善見稱東魏。高洋稱北齊。宇文覺稱後周。南北割據。自相雄長。干戈相尋。民無寧日。而其一時君臣行事施爲。皆無足取捨者矣。



文帝楊堅。弘農華陰人。立二十四年。
以周外戚秉政。遂簒其位。然減賦役。罷酒坊。省刑法。置義倉。念民食以減膳。杜貢獻以焚文布。此爲政之善者也。獨惜夫帝素不學。不悅詩書。又濟之以刻薄猜疑。專任小數。以察爲明。任情殺戮。信譖而廢太子。無罪而戮衆子。元勳宿將。誅退略盡。此失之大者。而帝之身亦未免子禍。嗚呼悲哉。

煬帝廣。文帝第二子。立十二年。
帝以藩王。矯情飾詐。以釣虛譽。內諂太后。外結黨與。卒以奪嫡。及嗣位。恃其富強之資。思逞無厭之欲。營宮苑。開河渠。造龍舟。築長城。括樂工。造輿服儀衛。恣巡幸。通西域。伐高麗。徵稅百端。中國疲憊。而民不堪命。卒至群盜遍天下。身死於宇文化及之手宜也。非不幸也。



高祖姓李。名淵。以土德王。都長安。在位九年。
用其子世民之謀。起兵晉陽。伐西河。斬高德儒。責以欺君之罪。餘秋毫無犯。繼收霍邑。乘勝遂克長安。立代王爲帝。相之而自立爲唐王。約法十二條。悉除苛法。及煬帝凶聞至。受恭帝禪。卽帝位。自後降李密。殄仁杲。翦黑闥。夷蕭銑。破金剛。走武周。擒建德。降世充。六年之間。海內咸服。何成功之速哉。蓋以太宗爲之子也。至於定律令。擧明經。立官制。定均田。租庸調法。與夫定雅樂。汰僧尼。皆爲政之要。而首詔隋氏子孫並付所司。量才敍用。由漢以來。最爲忠厚。其享國長世。不亦宜哉。獨惜其昵裴寂之邪而受宮女。聽文靜之說而臣突厥。是以。唐世人主。無正家之法。夷狄多猾夏之亂。亦高祖有以啓之也。

太宗世民。在位二十三年。
高祖次子。生四歲。書生見之曰。年幾弱冠。必能濟世安民。高祖起兵。削平僭亂。神謀武略。皆出於帝。其莅政設施。首用讎臣。放出宮女。禁奢侈。置弘文館。與學士講論前事往行。興學校以崇經術。建府兵以修武備。自是以後。勵精爲治。勤聽納。恤刑獄。禁淫巧。惡言利。厲風俗。勸忠孝。卽位之後。纔及四年。米斗三錢。外戶不閉。號稱太平。自古中國之盛。未之有也。帝曰。此皆魏徵勸行仁義之力。可謂知所本矣。惜其復浮屠而政敎乖。伐高麗而武事黷。殺無罪而刑獄濫。惑寵子而儲位未定。社稷之本幾動。又其大者。初焉劫父臣虜。殺兄及弟。他日亂弟之婦。與之生子。人倫之間。慙德多矣。

高宗治。太宗第九子。在位三十四年。
繼統之初。日引刺史。問民疾苦及其政治。尊禮大臣。恭己以聽。故永徽之政。百姓阜安。有貞觀之風。豈非賢君也哉。奈何蒸父妾爲妻。莫念聚麀之恥。縱女后預政。卒招晨牝之凶。養成武氏之簒。及武氏立。忠臣屛黜。姦邪用事。卒致覆宗之禍。幾不可救。是誰之過歟。

中宗顯。高宗第七子。武氏所生。在位六年。
帝以太子卽位。旋罹幽廢。歷十五年。召還復爲太子。又七年。姦臣伏誅。卽位。是則高祖太宗之德。有以結於民心。不忍忘也。然興復之功。皆出於忠臣義士之力。奈何復辟之初。追韋后天日之盟。忘前代牝晨之戒。每臨朝聽政。皇后與聞。事權盡歸中宮。五王被誣而戮死。三思復起而盜權。未幾帝亦死餠餤之毒。四子前後皆不得其死。嗣亦不傳。嗚呼。禍亦慘矣。

睿宗朝。高宗第八子。武后所生。在位三年。
莅政之初。姚崇宋璟協心輔政。典選文武。不畏彊禦。而選法俱治。當時翕然。以爲有貞觀之風。立嗣以功。彗星告變。傳德避災。足爲賢耳。然卽位未幾。太平用事。姚崇貶黜。終惑女弟。明斷不足。雖曰傳位。不授以政。自稱太上皇。總大事。釀成太平之惡。姦人黨附。幾至叛逆。遂使玄宗負殺姑之名於天下。惜哉。

玄宗隆基。睿宗第三子。在位四十五年。
開元之初。始親政事。勵精爲治。講武事。汰僧尼。禁女樂。出宮人。毀服玩。焚錦繡。廢織坊。天性友愛。敦睦兄弟。均內外出入之式。罷員外檢校宂員。選儒學之士。置侍讀。擇學術之儒。校群書。復史官。對仗奏事。試縣令。選刺史。錮酷吏。抑樂工。載在史冊。善政屢書。良由卽位以來賢相繼用。姚崇尙道。舊本作通宋璟尙法。張嘉貞尙吏。張說尙文。李元紘,杜暹尙儉。韓休,張九齡尙直。各隨其長。相與輔贊。是以二十年間。四夷賓服。衣食富足。西京東都。米斛直錢不滿二百。絹疋如之。海內富安。行者萬里。不持尺兵。刑部所斷天下死罪二十四人。幾致刑措。號稱太平。可謂盛也矣。自是以降。志欲旣滿。侈心乃生。忠直浸疏。讒諛並進。罷九齡而相林甫。殺子諒而寵仙客。貴高力士以基宦官之禍。置十節度。釀成藩鎭之禍。因召募而兵日益壞。以聚斂而財日益煩。武備浸輕。民力已竭。國不可以爲國矣。甚則廢皇后而殺三子。納壽王妃玉環惑之。至洗祿兒醜聲傳播。亦不恤焉。聲色迷亂。政事廢弛。楊國忠因玉環入相。妬賢嫉能。貪權固寵。又與祿山有隙。激以速反。驗其所言。未幾。祿山叛漁陽陷兩京。而國忠誅玉環死。帝亦走蜀。海內崩裂。萬姓塗炭。嗚呼。一念之失而其禍至於知此。可不戒哉。

肅宗亨。玄宗第三子。在位七年。
因祿山之亂。以太子從君父入蜀。至馬嵬。玄宗因父老之請。分軍從帝。又宣旨傳位不受。旣留。杜鴻漸,裴冕等皆以朔方爲勸。至靈武。請遵馬嵬之命卽位。首任裴,杜,郭子儀,李光弼。召山人李泌。侍謀軍國。以廣平王爲元帥。進彭原。明年。移軍鳳翔。其年復兩京。上皇還京師。父子重歡。宗社再安。何其中興之速哉。良由委任郭李。廣平以長子當帥師之任。杲卿,眞卿倡忠義於河北。張巡,許遠遏賊勢於睢陽。所以卒能成克復之功也。然當是時。賊勢雖敗。餘孼猶存。正宜振權綱修典憲。以大中興之功也。奈何不爲經遠之謀。專務姑息之計。名器濫假於下。廢置不出於上。至此綱紀大壞。不可收拾。況以朝恩爲觀軍容使。李,郭名將爲所節制。輔國專掌禁兵。雖制勑必經署而後行。於斯二者。尤爲紊亂。猶未也。外則畏輔國之握兵。內則畏張后之悍戾。孝衰於上皇。竟以憂崩。帝亦徒以哀慕而沒。張后母子。亦爲輔國所戮。嗚呼。以天子之尊。上不能保其父。中不能保其身。下不能保其妻子。近小人之禍其烈如此。可不戒哉。

代宗豫。肅宗長子。在位十七年。
莅政之初。再復東京。朝義授首。大河南北。復爲唐土。其功可尙也已。獨惜夫過爲姑息之計。用賊將分帥河北。與諸藩鎭。互相表裏。各廣土地。自署官吏。名爲藩臣。實皆蠻貊異域焉。而一付姑息。不能復制。自是懷恩引寇。再犯長安。帝有陝州之幸。奉天之迫。所幸賴子儀之力。醜虜退走。王室再造。然帝仁而不武。委靡太過。剛斷不足。權歸宦官。勳臣擯廢。至有冤死者。又崇佛敎。度僧尼。造寺設齋。中外相化。廢人事而奉佛法。刑政日紊。唐室大壞。決於此矣。

德宗适。代宗長子。在位二十六年。
卽位之初。罷貢獻。罷梨園。却祥瑞。却金銀。出宮人。放鷹犬。減乘輿服御。禁奏置寺觀度僧尼。又詔財賦皆歸左藏。不數月間。善政迭出。四海之內。聞風振竦。此皆崔祐甫爲相。務崇寬大。故當時政聲藹然。以爲有貞觀之風。不幸賢相云亡。楊炎,盧杞相繼用事。炎以私意譖殺劉晏。杞以疑似離間群臣。又欲固寵。勸帝以嚴刻。中外失望。苛政日增。民不堪命。方鎭怙強。相與扇亂。卒幸奉天。以避朱泚之亂。因其窘乏。屬意聚斂。帝素性猜疑。還自奉天。疏忌將相。委任宦官。故范氏之論曰。帝粃政最多。而大弊有三。一曰姑息方鎭。二曰委政宦官。三曰聚斂貨財。唐之亡卒坐此三者矣。

順宗誦。德宗長子。在位一年。
帝不幸寢疾踐阼。姦邪肆志。近習弄權。唐室幾危。卒能委政承嗣。以安社稷。足爲賢矣。

憲宗純。順宗長子。在位十五年。
首用忠良。斥逐群小。以朝廷威福日削。方鎭浸橫。慨然發憤。志平僭亂。制以法度。卒能命將興兵。削平醜逆。強藩畏討。質子獻地。於是天下深根固蔕之盜。皆稽顙入朝。百年之憂。一朝渙然。唐之威命。幾於復振。夫何世亂漸平。侈心遽生。土木浸興。姦邪復用。求仙藥迎佛骨。固已惑矣。李絳罷則承璀寵。皇甫鎛,令狐楚爲相則裴度,崔群皆爲所逐。蓋君子小人之不能兩立也如此。帝亦餌金丹之劑。躁怒妄殺。卒死於宦者陳弘志之手而人莫之知也。哀哉。

穆宗恒。憲宗第三子。在位四年。
嗣位之初。僅有貶皇甫鎛。杖殺柳泌二事。略快人意。然身處諒陰。柩方在殯。不能明詔公卿。推擧罪人。遽與群臣釋服。盛陳倡優。戲觀角觝。屢開大宴。浚魚藻池。幸華淸。縱獵擊鞠。恣情棄禮。遊戲無度。又宰相皆無遠略。不以武備爲意。未幾諸藩相繼而叛。雖以諸道之兵。元臣名將討之。竟無成功。由是再失河朔。元和之功。於斯而墜。帝亦以金丹之劑。不旋踵而物故矣。

敬宗湛。穆宗長子。在位二年。
莅政之初。雖知李紳遭謗以貶。竟不能召。雖用裴度,李絳之賢。終被沮撓。李逢吉以一小人用事。八關十六子交結附麗。妬賢嫉能。朝政竟爲之濁亂。雖韋處厚好善惡惡。多所匡救宏益。終莫能以勝其黨與之衆。帝於聽納。亦有足稱者。如從李程之諫而罷營殿。感處厚之言而賜錦綵。德裕不奉造盤條之詔。處厚不奉徵鷙綾錦之命。裴度諫洛陽之巡。皆爲之寢罷。似此非一。方之德宗拒諫。豈不優哉。失在於幼年不親師傅。以化奢侈。是以嗣位甫及易月。忘哀宴樂。昵比小人。遊戲無度。賜予無節。擊毬手博。甘爲下流之態。性復褊急。捶撻宦人。夜獵還宮。酒酣入室。滅燭之變。身死於劉克明等之手。可謂自詒伊戚者矣。

文宗昂。穆宗次子。在位十四年。
恭儉儒雅。出於天性。卽位之初。勵精求治。去奢從儉。出宮人放鷹犬。省敎坊等宂食千二百餘員。罷組綉雕鏤之物。中外相賀。以爲太平可冀。當是時。裴度,韋處厚相。使信任責成。誰曰不可。奈何雖虛懷聽納而不能堅決。議事已定。尋復中變。史稱其仁而少斷。可謂一言以蔽之者矣。已而朋黨相軋而邪正莫辨。宦官縱橫而制御無方。朋黨之隙。始於牛僧孺,李宗閔。成於楊汝士。牛,李相傾前後四十餘年。而唐之政隨以衰矣。宦官之禍始於明皇。成於肅,代。蔓延於德憲。兵柄在手。輒行弑逆。至於甘露之變。宰相見戮。朝臣盡殲。帝有受制家奴之語。泣下霑襟。曾幾何時而物故矣。悲哉。

武宗炎。穆宗第五子。在位六年。
帝英敏特達。雄謀獨斷。自相德裕。一意委任。故能振已去之威權。克上黨取太原。禍亂略平。紀律再張。亦帝之明於知人。專任德裕。有以致之也。獨惜夫不奪宦官之權。使仇士良敎其徒固寵之術。惑於方士之談。使趙歸眞誤進金丹之劑。而帝加躁急。旬日不能言以至於崩。

宣宗忱。憲宗第十三子。在位十三年。
帝性嚴重寡言。宮中或以爲不慧。舊本作惠 益自韜匿。群居遊處。未嘗發言。及爲太叔監國。憂慼滿容。接遇群僚。裁決庶務。人始見其隱德焉。旣卽位。閔旱災。理罪囚。出宮女。好儒士。法祖宗。敬宰相。睦兄弟。不私外戚。除御史。用循吏之子孫。擇邊帥以儒臣。易貪暴。重刺史之選。謂宰相曰。刺史非人則害百姓。惜官賞。惜章服。重威儀。廣聽納。惠小民。均差役。至於誅宦官而除元和之逆黨。平河西取河湟而復百餘年淪汲之疆土。史稱大中之政。迄于唐亡。人思詠之。謂之小太宗。夫豈溢美。但其所不足者。初年君臣務反會昌之政。貶德裕賢臣。復僧尼弊事。事嫡母郭太后不以禮。一夕暴崩。出先代穆敬文武四君之主無所憚。晚年牽於私愛。不定儲位。大臣言之而不聽。其昧人君之大體甚矣。躬蹈前人之覆轍。餌金丹。未幾躁渴。明年疽發於背而莫之救矣。惜哉。

懿宗漼。宣宗長子。在位十四年。
帝以中庸之資。縱驕奢之習。戒壇度僧。佞佛怠政。數幸諸寺。賜予無節。彗星告變。天戒昭昭。帝不惟冥不知悟。反宣示中外。稱以爲祥。未幾。路巖,保衡繼處相位。貶逐名德。納賄崇私。濁亂國紀。帝又耽好音樂。殿前供奉伶人常近五百。頻數遊幸。而內外諸司扈從動至十餘萬。初年浙賊大熾。南詔入寇。雖命將討除。而徐賊攻陷五州。僅以沙陀之力。乃克奏凱。帝益荒淫。不親政事。信讒言。逐忠諫。削軍賦。困民財。以崇佛事。諫者甚衆。乃曰生得見之。死亦無恨。未幾而晏駕。亦可哀也。

僖宗儇。懿宗第五子。在位十五年。
帝幼沖嗣位。政在臣下。南衙北司。互相矛盾。專事遊戲。不親政事。一委田令孜。呼爲阿父。當是時。奢侈用兵。賦斂愈急。關東旱蝗。百姓流殍。蜂起爲盜。而盜賊黃巢爲最盛。轉掠江浙。復自采石北渡。長驅中原。陷兩京。汚宮闕。殺百官。屠宗室。遽僭大號。先期令孜奉乘輿播遷。帝在流離。日夕與宦官同處。疏薄外臣。剿戮諫輔。尙賴一時忠義之臣或慷慨迎謁。或奮發戰鬪。不半載。破賊復長安。又以宦孼專制內外。李克用,王重榮等惡之。表淸君側。上遂有鳳翔,寶鷄,興元之幸。京城荐被焚掠。幾無孑遺。而襄王已姦天位。遙尊上爲太上皇。踰年還京。僅逾月而崩矣。

昭宗曄。懿宗第七子。在位十六年。
帝體貌明粹有英氣。憤朝廷日卑。慨然有恢復先烈之志。其在藩邸時。素嫉宦官。及卽位。政事多謀諸宰相。善矣。然當是時。宦官根據。藩鎭強橫。難以力制。忠邪莫辨。擧措失宜。叛者四起。二帥稱兵入京。茂貞荐犯京師。韓建以兵圍行宮。殺十一王。放散四軍。帝方是時。漂泊寄命。猶且逐諫臣以塗耳目。迨至還京。崔胤日以誅宦官位事。至有死者。宦官固已懼矣。帝又縱酒肆怒。人人自危。劉季述等陰謀廢立。幽辱帝后。胤旣召全忠爲聲援。賴孫德昭之功。幸而反正。季述等伏誅。宦官雖夷滅殆盡。而全忠之簒謀浸成。未幾胤亦不免。帝尋遇弑。

哀帝祝。昭宗第九子。在位四年。
爲全忠所立。踰年。全忠盡殺昭宗子九王。殺裴樞等三十餘人於白馬驛。帝又見弑而唐以亡。

五代
梁之朱全忠。唐之李存勖。晉之石敬瑭。漢之劉知遠。周之郭威。皆以兵力詐謀。自相傾奪。生民不死於兵刃則必死於虐政。而其子孫又不能保守。五十年間。易姓者八。生民之禍。莫此爲甚。



 

[주D-001]요(堯) : 이하의 전편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을 인용하여 서술한 것이다.
[주D-002]화덕(火德) : 왕자(王者)가 수명(受命)한 운을 오행(五行)으로 상징하여 화덕에 해당되는 것.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모든 기ㆍ복식ㆍ희생ㆍ기용(器用) 등에 적색을 숭상함을 말한다. 그 덕은 오행의 이치에 따라 숭상하는 방위ㆍ간지(干支)ㆍ수(數)ㆍ오상(五常)이 정해진다. 예컨대 화덕은 방위는 남방, 간지는 병ㆍ정(丙丁), 수는 27, 오상은 예(禮), 색은 적(赤)이다. 목덕(木德)은 방위는 동방, 간지는 갑ㆍ를(甲乙), 수는 38, 오상은 인(仁), 색은 청(靑)이다. 금덕(金德)은 방위는 서방, 간지는 경ㆍ신(庚辛), 수는 49, 오상은 의(義), 색은 백이다. 수덕(水德)은 방위는 북방, 간지는 임ㆍ계(壬癸), 수는 16, 오상은 지(智), 색은 흑(黑)이다. 토덕(土德)은 방위는 중앙(中央), 간지는 무ㆍ기(戊己), 수는 50, 오상은 신(信), 색은 황(黃)이다.
[주D-003]순(舜) : 이하 전편은 《서경》 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 등에서 인용하여 서술한 것이다.
[주D-004]선기 옥형(璿璣玉衡) : 구슬로 꾸민 천문 측량기로 혼천의(渾天儀)와 비슷한 것.
[주D-005]칠정(七政) : 해ㆍ달과 오성(五星). 오성은 목성(木星)ㆍ화성(火星)ㆍ토성(土星)ㆍ금성(金星)ㆍ수성(水星). 이 천체의 운행은 마치 인군의 정사(政事)와 같다는 말.
[주D-006]백규(百揆) : 서정(庶政)을 총괄하는 관직. 주(周)대의 총재(冢宰)와 같다고 했다.
[주D-007]육종(六宗) : 여섯 신(神)을 제사지내는 것. 여섯 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채침(蔡沈)은 사시(四時)ㆍ한서(寒暑)ㆍ일(日)ㆍ월(月)ㆍ성(星)ㆍ수한(水旱)이라고 하였다.
[주D-008]오서(五瑞) : 천자가 제후(諸侯)에게 신표로 나누어 준 서옥(瑞玉). 공(公)에게는 환규(桓圭), 후(侯)에게는 신규(信圭), 백(伯)에게는 궁규(躬圭), 자(子)에게는 곡벽(糓璧), 남(男)에게는 포벽(蒲璧).
[주D-009]오형(五刑) : 다섯 가지 형벌. 얼굴을 먹으로 뜨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꿈치를 자르는 비형(剕刑), 거세를 하는 궁형(宮刑), 사형에 처하는 대벽(大辟).
[주D-010]사흉(四凶) : 순에게 죄를 얻은 공공(共工)ㆍ환도(驩兜)ㆍ삼묘(三苗)ㆍ곤(鯀).
[주D-011]우(禹) : 이하 전편은 《서경》 대우모(大禹謨)ㆍ익직(益稷)에서 인용하여 서술한 것이다.
[주D-012]인월(寅月)을 세수(歲首)로 삼아 : 지지(地支)의 인(寅)이 든 달을 정삭(正朔)으로 삼았다는 말. 뒤에 은(殷)나라에서는 축월(丑月)로 세수를 삼고, 주(周)나라에서는 자월(子月)로 세수를 삼았다.
[주D-013]삼정(三正) : 자(子)ㆍ축(丑)ㆍ인(寅)으로 정삭을 삼는 것. 역(曆)은 정월을 시초로 하므로 (正)이라 한다.
[주D-014]열(說)이 …… 고하였는데 : 《서경》의 열명(說命) 상ㆍ중ㆍ하를 가리킨다.
[주D-015]주공(周公)이 …… 죄주었고 :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周公)이 섭정하였는데, 성왕의 숙부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주공이 왕위를 엿보는 것으로 의심하여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더불어 반란을 꾸몄다. 그래서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이들을 죄주었다. 《史記 周本紀》
[주D-016]강왕(康王) : 이하는 《서경》 강왕지고(康王之誥)를 인용하여 서술하였다.
[주D-017]기초(祈招)의 시 : 목왕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자 채공(祭公) 모부(謀父)가 이 시를 지어 왕을 말렸다.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左傳 昭公 12年》
[주D-018]계집이 …… 법인데 :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왕에게 바쳐라. 대저 짐승이 셋이면 군(群)이 되고, 사람이 셋이면 중(衆)이 되고 여자가 셋이면 찬(粲)이 된다. 찬이란 미물(美物)이다[必致之王 夫獸三爲群 人三爲衆 女三爲粲 夫粲美之物也].”라 하였는데, 그 주에 “군ㆍ중ㆍ찬은 과다한 것이다.” 하였다.
[주D-019]서리를 밟는 형상[履霜之象] : 서리를 밟게 되면 장차 굳은 얼음이 얼 것을 미리 안다는 뜻으로 화가 닥칠 조짐이 있음을 비유한 말. 《周易坤卦》
[주D-020]변아(變雅) : 주(周)의 왕실이 쇠미해지자 시에 나타난 민심도 왕의 은택을 노래한 것은 사라지고 원망과 개탄하는 노래가 대부분인 것을 일컫는다. 소아(小雅)의 6월(六月)부터 하초불황(何草不黃)까지 58편을 변소아(變小雅)라 하고, 대아(大雅)의 민로(民勞)부터 소민(召旻)까지 23편을 변대아(變大雅)라 하는데 통틀어 변아라 한다.
[주D-021]강후(姜后)가 …… 간하여 : 주선왕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후부인(后夫人)을 방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는 강후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더니, 비녀와 귀걸이를 벗고 선왕에게 대죄하면서 말하기를 “첩이 재주가 없어 군주로 하여금 예를 잃게 하고 늦게 일어나게 만들었으니 죄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列女傳 賢明 周宣姜后傳》
[주D-022]진후(晋侯)가 …… 수도(隧道) : 수도는 묘도(墓道). 주 왕실이 쇠미해지고 제후들이 강성해지자 진문공(晋文公)은 그의 공을 믿고 천자만이 하는 묘도를 청했으나, 양왕(襄王)은 그것은 왕의 제도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通鑑節要 卷1 威烈王 23年》
[주D-023]초자(楚子)가 …… 문정(問鼎) : 정(鼎)은 우(禹)가 주조했다는 구정(九鼎)으로 삼대(三代 : 하ㆍ는ㆍ주)를 전해 내려오던 전국(傳國)의 보물이었는데, 초자(楚子)가 주(周) 왕실을 넘보느라 주정(周鼎)의 대소 경중을 물었다. 그 뒤부터 천하를 취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을 말한다. 주정왕(周定王)의 사자로 위문 나온 왕손만(王孫滿)에게 초자(楚子)가 주정(周鼎)의 경중을 물으니, 왕손만은, “나라란 덕에 달려 있는 것이지 솥의 경중에 달린 것이 아니다……지금 비록 주나라가 쇠미해졌으나 천명이 다하지 않았으니, 솥의 경중은 물을 것이 못된다.” 하였다. 《左傳 成公 3年》
[주D-024]계포(季布)를 놓아주고 : 계포는 본래 항우(項羽)의 장수로 여러 번 유방(劉邦) 즉 한고조를 곤경에 몰아 넣었다.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정하자 계포를 잡아들인 자에게 천금(千金)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등공(滕公)이 그의 어짐을 알고 고조에게 간하여 죄를 사하고 낭중(郞中)을 삼았다. 《史記 卷一百 季布傳》
[주D-025]정공(丁公)을 베어 : 정공은 계포의 모제(母弟)로 역시 항우의 장수였다. 한 번은 유방과 접전하면서 위급하게 된 유방을 살려 주었다. 그 후 유방이 왕위에 오른 뒤에 찾아 온 정공을 군중(軍中)에 조리를 돌리면서 “이자는 항우의 신하가 되어 불충(不忠)해서 항우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했다.” 하고는 죽였다. 《史記 卷100 季布傳》
[주D-026]운몽(雲夢)에 위유(僞遊) : 한고조는 초왕(楚王) 한신(韓信)이 모반한다는 급보를 받자, 진평(陳平)의 계책을 따라 거짓으로 운몽에 놀러가는 척하여 제후들을 진(陳)에 모이도록 하여 거기게 온 한신을 붙잡았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27]대풍가(大風歌) : 한고조가 지은 가요. 그가 경포(黥布)의 반란을 치고 돌아오다가 고향 패(沛)에 들러 고인(故人)ㆍ부로(父老)들을 다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취하자 이 노래를 불렀다. 《史記 漢高祖本紀》
[주D-028]협서율(挾書律) : 진시황(秦始皇)이 제정한 법. 이사(李斯)의 말을 들어 민간에서 의약(醫藥)ㆍ복서(卜書) 외의 책을 들고 다니거나 간직하지 못하게 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주D-029]칠국(七國)의 변 : 한경제(漢景帝) 3년에 있었던 변란. 경제가 조조(鼂錯)의 말에 따라 제후의 봉지(封地)를 깎으려 하자, 오왕(吳王)인 비(濞)가 주동하여 7국의 제후들이 조조를 죽이라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경제는 조조를 죽이고, 한편 주아부(周亞夫) 등을 보내 난을 진압하고 오왕을 참하자, 다른 제후들은 모두 자살하였다. 《漢書 卷5 景帝紀》
[주D-030]등통(鄧通)이 …… 원망 : 등통은 한문제의 총신(寵臣). 그가 일찍이 문제의 종기를 입으로 빨았는데 문제가 좋지 않아 하면서 묻기를 “세상에서 누가 나를 제일 사랑하겠는가?” 하자 등통은 태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문제는 태자를 불러 종기를 빨라고 했더니, 태자는 어렵게 여겼다. 문제가 죽고 태자가 즉위하자, 이 일로 미움을 받아 굶어 죽게 되었다. 《史記 卷125 佞幸列傳》
[주D-031]추풍가(秋風歌) : 한무제(漢武帝)가 하동(河東)에 행행해서 후토(后土)에 제사한 후에 지은 시.
[주D-032]상관(上官) …… 거짓 : 상관걸(上官桀)이 평소 곽광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곽광을 원망하고 있던 개장공주(蓋長公主)ㆍ연왕단(燕王旦)과 짜고 그를 모함하였으나, 당시 나이 14세이던 소제는 이를 간파하고 죄주지 않았다. 《漢書 卷68 霍光傳》
[주D-033]왕낭(王郞)의 …… 것은 :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기 전에 왕낭에게 쫓겨 계주(薊州)로 가자, 왕낭은 광무제를 잡으면 10만 호를 주겠다고 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호타하에 이르러 보니 건널 배가 없었는데 그때 마침 얼음이 얼어서 건널 수 있었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
[주D-034]사과(四科) : 한나라 때 선비를 뽑아 쓰던 제도. 질박(質樸)ㆍ돈후(敦厚)ㆍ손양(遜讓)ㆍ행의(行義). 일설에는 행의 대신 절검(節儉)이라 한다.
[주D-035]천일(天日)의 맹세 : 중종이 유폐되어 있을 때 위후에게 “다행히 다른 날 천일(天日 : 복위되는 것을 뜻함)을 보게 된다면 그대 마음대로 하고자 해도 저지하지 않겠다.”고 한 맹세. 《唐書 卷76》
[주D-036]안녹산(安祿山)을 세아(洗兒)하였다가 : 양귀비(楊貴妃)가 안녹산을 양자로 삼았는데, 녹산의 생일에 현종(玄宗)과 양귀비가 의복ㆍ보기(寶器)ㆍ주찬(酒饌)을 매우 후하게 내렸던 일. 《通鑑節要 卷41》
[주D-037]주자(朱泚)의 난 : 주자의 벼슬은 태위(太尉)였는데, 경원 절도사(涇原節度使) 요영언(姚令言)이 반란을 일으켜 주자를 받들어 황제로 삼고 국호(國號)를 대진(大秦)이라 하였다. 얼마 후 이성(李晟)에게 팽원(彭原)으로 쫓겨 그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唐書 卷200》
[주D-038]팔관 십육자(八關十六子) : 당경종(唐敬宗) 때 이봉길(李逢吉) 당인(黨人)의 일파를 말한다. 팔관(八關) 즉 장우신(張又新)ㆍ이속(李續)ㆍ장권여(張權輿)ㆍ유서초(劉栖楚)ㆍ우(李虞)ㆍ정석범(程昔範)ㆍ강흡급(姜洽及)ㆍ이훈(李訓) 등 8인과 그들에게 부회(傅會)한 사람 8인이 모두 요직에 임명되었으므로 팔관 십육자라 불렀다. 《唐書 李逢吉傳》
[주D-039]감로(甘露)의 변 : 태화(太和) 9년(835)에 재상 이훈(李訓)ㆍ정주(鄭注) 등이 환관(宦官)을 죽이려고 석류나무 위에 감로(甘露)가 내렸다고 속여 그들을 꾀어내려다 도리어 피살당한 변. 《唐書 卷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