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83)정도전 삼봉집 제12권/경제문감 별집 하/ [군도]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6. 08:07
[군도]

 



(宋)

 

태조(太祖) 성은 조(趙), 이름은 광윤(匡胤)이니 선조(宣祖)의 둘째아들이다. 화덕(火德)으로 임금노릇을 하여 변(汴)에 도읍하였다. 재위 17년.
제(帝)는 즉위한 초에 원대하게 생각하고 지난 일을 돌아보되, 당나라 말년 이래로 50년 동안에 제왕(帝王)이 무릇 여덟 번이나 성(姓)이 바뀌어 싸움이 쉴 새 없고 민생들이 도탄에 빠진 것은, 모두 번진(藩鎭)들이 너무 강성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지주(知州 주(州)의 장관)로 방진(方鎭)을 바꾸되, 문신(文臣)을 지주로 임명하고 각각 통판(通判)을 두었으며, 또한 조정의 신하 가운데 강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지현(知縣)으로 나가도록 명하여 절제(節制)하는 권한을 분산시킴으로써 번진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또 조용하게 술 마시는 틈을 타 여러 장수들의 병권(兵權)을 해제하니, 이에 번진의 없앨 수 없었던 고질이 하루아침에 풀렸다.
그가 참란(僣亂)을 평정하고 유술(儒術)을 존중한 것이나, 병법을 제정하고 사졸을 돌본 것과, 재부(財賦)를 정리하고 형옥을 보살피고 사치를 억제하였던 것은, 인군으로서의 도리를 갖춘 것으로서, 그가 그렇게 한 까닭을 따져 본다면 어찌 근본한 바가 없겠는가? 제(帝)는 일찍이 ‘도리가 가장 큰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 한 마디 말은 나라를 바로세우는 근본이 되고도 남는 것인데, 그의 정심(正心)ㆍ수신(修身)하는 학문은 실로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다.
일찍이 침전(寢殿)에 앉아 여러 문을 활짝 열어 모두 단정하고 헌칠하게 하며 막히거나 가린 것이 없게 하고서, 이어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나의 마음과 같으니, 조금이라도 사특하거나 잘못된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될 것이다.”
하였다. 주 문공(朱文公 문공은 주희(朱熹)의 시호)이 태조(太祖)를 칭찬하기를,
“언어와 문자로 학문을 하지 않고서도 그의 마음의 정대하고 광명함이 바로 요ㆍ순(堯舜)의 마음과 합치된다.”
하였는데, 정말 옳은 말이다. 이 밖에 주태후(周太后)를 어머니처럼 섬긴 것과 소제(少帝)를 아들처럼 길러 명대로 살다 죽게 한 것, 공신들을 보호하여 모두 편히 살다 늙어 죽도록 한 것 등은 그 충후(忠厚)함이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다.
모후(母后)의 유훈(遺訓)에 따라 천하를 그 아들에게 주지 않고 마침내 그의 아우에게 전수하였으니, 효도하고 우애하는 도리가 또한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아, 태조에게 나는 이의(異議)가 없다.

태종(太宗) 이름은 경(炅). 선조(宣祖)의 셋째아들로 재위 22년.
제(帝)가 즉위한 지 두어 해가 되지 않아서, 진홍진(陳洪進)구본(舊本)에는 진(進)자가 없음. 은 표(表)를 올려 장천(漳泉) 땅을 바치고, 전숙(錢俶)은 표를 올려 오ㆍ월(吳越)을 바치고, 유계원(劉繼元)은 하동(河東)을 가지고 항복했으니, 태조(太祖)의 뜻을 계승하여 통일하는 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제는 즉위한 초기부터 맨 먼저 감사(監司)의 권한을 무겁게 하여 번진(藩鎭)들을 견제하고, 삼사사(三司使)를 두어 재부(財賦)를 정리하며, 재상을 임명하는 데는 반드시 바른 사람으로 하고 사특한 사람으로 하지 않았고, 참정(參政)을 임명하니 마침내 뒷날 어진 재상이 될 사람으로 하고, 대간(臺諫)을 존중하여 거리낌없이 말하는 기풍을 만들고, 경연(經筵)을 설치하여 간사한 습관을 멀리하였다.
순리(循吏)의 선발을 신중하게 하고 장리(贓吏)의 처벌을 엄하게 하며, 공거(貢擧)를 하는 데는 세력 있는 집을 제쳐놓고 외롭고 한미한 사람을 취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데는 훈계하는 글을 지어 주ㆍ군(州郡)에 보냈으며 세납 기한을 연장하고 음형(淫刑)을 금하며, 기아(飢餓)와 빈곤을 구제하고, 주거 없이 방랑하는 것을 돌보며, 형옥을 보살피고 유술을 존숭하였는데 이와 같은 착한 정사를 사책(史冊)에 끊임없이 썼으니, 태평하고 도가 있는 어진 임금이라 할 수 있다.
애석하게 여겨지는 일은 태조(太祖)의 붕(崩)에 의심이 없을 수 없고, 덕소(德昭)의 죽음이 또한 그의 죄가 아니었으며, 정미(廷美 태종의 동생)가 죽은 것은 조보(趙普) 때문이었으며, 태조와 송황후(宋皇后)가 죽었을 때에 당하여서는 군신(羣臣)들이 성복(成服)하지 않았으니, 인륜(人倫)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을 수 없다. 태자를 세울 적에는 구준(寇準)의 한 마디 말에 결정지어 천하를 위하여 사람을 얻었으니, 무엇이 이보다 낫겠는가?

진종(眞宗) 이름은 항(恒). 태종의 셋째아들로 재위 25년.
맨 먼저 학관(學官)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서경(書經)》과 《주역(周易)》을 강론하도록 하였으니, 성학(聖學)을 급선무로 여길 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목ㆍ수(牧守 지방 장관)의 선발을 엄격하게 하고 절약ㆍ검소하는 교화를 숭상하며 거리낌없이 말하는 길을 열었다. 공봉(貢奉)을 막고, 진기한 새나 기이한 짐승 및 모든 상서(祥瑞)로운 것을 바치는 것을 금하며, 공거(貢擧)를 닦아 시행하고 학교를 세우며,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아 주되, 모두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을 본받아 하고 또한 더 확충하였으니, 어진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서ㆍ북 두 변방의 일에 있어서는 할 말이 있으니, 서쪽에서는 우선 편한 대로만 하다가 사기(事機)를 놓쳤고, 북쪽에서는 장수가 군사를 끼고 있을 뿐 진격하지 않는 자가 있었고, 사려(師旅)를 상실한 자가 있었으되 용서하고 베지 않은 것이다. 송나라가 무공(武功)을 세우지 못한 것은 군법이 엄하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고, 인후(仁厚)함이 너무 지나쳐 국세(國勢)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차 약해졌다.
글안(契丹)이 다시 들어와 침범하게 되자 경사(京師)가 진동하며 두려워하고 여러 의논이 분분하였는데, 제가 구준(寇準)의 계책을 받아들여 뜬 의논에 현혹되지 않고 전주(澶州)로 거둥하자, 글안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화친을 애걸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오랑캐들이 이미 물러가자 이로부터는 감히 다시 변방에 침범하지 않았다.
한스러운 것은, 제가 왕흠약(王欽若)의 참소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구준을 대우함이 점차 쇠하여지다가 마침내 정승에서 파직(罷職)시키게 되었고, 또한 그의 요청을 들어주어 천서(天書)을 봉선(封禪)하는 일이 일어났다.
아! 진종(眞宗) 때의 정승으로 앞에는 여단(呂端)ㆍ장제현(張齊賢)ㆍ이항(李沆)ㆍ여몽정(呂蒙正)ㆍ필사안(畢士安)ㆍ구준(寇準)이 있었는데 모두 군자(君子)들이었고, 뒤에는 왕흠약(王欽若)ㆍ진요수(陳堯叟)ㆍ풍증(馮拯)ㆍ정위(丁謂)ㆍ조이용(曹利用)이 있었는데 모두 소인들이었다.
아, 몇몇 군자(君子)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그 남아 있음을 볼 수 없고, 하나의 소인 때문에 망쳐 놓은 것도 그 부족함을 볼 수 없으니, 정승의 도리가 임금의 덕을 성패시키는 데에 관계됨이 이러한 것인가 보다.

인종(仁宗) 이름은 정(禎). 진종의 여섯째아들로 재위 46년.
제(帝)는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상사(喪事)를 마치고서도 슬퍼하는 얼굴로 차마 연락(宴樂)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제가 아들이 없자, 조후(曹后)가 종실(宗室)의 아들을 선택하여 궁중에서 키우기를 권했다. 그래서 황형(皇兄) 윤양(允讓)의 아들 종실(宗實)을 황후의 처소에서 길렀으니, 이가 영종(英宗)이다. 송나라의 어진 황후 중에 조씨(曺氏)를 제일로 치는데, 역시 제가 강단으로 욕심을 억제하여, 규문(閨門)에서 친압(親狎)하는 사정은 없고, 사직을 장구하게 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수문(守文 조업(祖業)을 계승하여 나라를 다스려 지킴)하는 때를 당하여는 태평한 지 오래되어 변방 국경에 일이 별로 없었다. 서하(西夏)가 배반하게 되자, 범중엄(范仲淹)으로 섬서 전운사(陝西轉運使)를 삼았는데, 서하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기를 ‘연주(延州)에 뜻을 두지 말라. 범중엄 늙은이의 가슴속에는 원래 수만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고 했었다.
글안(契丹)이 틈을 타 사신을 보내어 땅을 찾으려고 하므로, 부필(富弼)을 글안에 사신으로 보내어 대의(大義)로써 책망하니 글안의 주(主)가 굴복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이, ‘부필이 오랑캐 뜰에서 굴하지 않았음은 바로 평일에 학문한 공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필이 떠날 때에 제(帝)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모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신이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하였으니, 이것이 굴하지 않게 된 근본이다.
여이간(呂夷簡)이 파직되자 부필(富弼)ㆍ두연(杜衍)ㆍ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이 이부(二府)에 있고, 왕소(王素)ㆍ구양수(歐陽脩)ㆍ채양(蔡襄)이 간원(諫院)에 있었으니, 송나라 때 인재를 얻음은 이때가 가장 융성했다.
얼마 되지 않아, 간사한 무리들이 악(惡)으로 결탁하고 온갖 흉계로 헐뜯으매, 범중엄ㆍ부필ㆍ구양수 등이 서로 잇달아 파직되었는데 이로부터 바른 사람들이 다시 쫓겨나게 되어, 경력(慶曆 송인종(宋仁宗)의 연호) 때의 정사가 쇠퇴했다.
그러나 오집중(吳執中)이 비록 강퍅(剛愎)함으로써 정승노릇을 하였지만 그가 파직되자 드디어 문언박(文彦博)과 부필을 정승으로 삼으니, 진신(搢紳)들이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그 뒤에 한기(韓琦)가 정승이 되고 구양수가 차석이 되었는데, 사직의 부탁을, 한기가 죽자 자신이 책임을 맡았다.
비록 그 동안에 용사(用捨)가 곡절이 많았지만, 인재를 얻은 효과는 또한 볼 수가 있다.
가우(嘉祐 송인종의 연호) 초년에 원제(元帝)가 병이 나자, 문언박이 내신(內臣) 사지총(史志聰)을 불러 제의 기거(起居)하는 상황을 물었는데, ‘궁중 안의 일이어서 감히 누설할 수 없다.’고 대답하니, 언박이 꾸짖기를,
“제(帝)께서 갑자기 병환이 계신 것은 종사(宗社)의 안위와 관계되는 일인데, 재상으로 하여금 임금의 기거하는 상황을 알지 못하게 함은 어찌하려는 것인가? 지금부터 증세가 더하고 덜함을 일일이 그대로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로부터 금중(禁中)의 일을 재상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제가 능히 일을 살피지 못하게 되면 이부(二府)에서 의정(議定)하여 즉시 조서(詔書)라 칭하여 시행하였으니, 이는 옛날에 대신이 근습(近習 곧 내시)들을 통솔하고 백관들의 직책을 총괄하던 것이다.
제가 병이 나자 중외(中外)에서 근심하였는데 문언박(文彦博)이 충성을 다해 조호(調護)하지 않고, 간특하고 용렬한 무리로 하여금 처리하게 했더라면 헤아리지 못할 화가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 구양수(歐陽脩)ㆍ오규(吳奎)ㆍ여경초(呂景初) 등이 황자(皇子) 세우기를 의논했고, 제가 병이 나자 재상들이 또한 세자 세울 것을 권하니 가하다고 하매, 종실을 세우기로 의논을 정하여 조서(詔書)의 초고가 이미 이루어졌었는데, 병이 나아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다.
범진(范鎭)이 ‘천하의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는가?’ 하고 한기(韓琦)를 만나 말하기를,
“지금 의논을 결정하지 않았다가 어떤 날 밤중에라도 종이쪽지를 가져다 아무 사람으로 세자를 삼아 버린다면 감히 말할 수 없게 된다.”
고 하였다. 그래서 한기가 틈을 타 극언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서를 내리고 종실(宗實)을 세워 황태자를 삼았는데, 이듬해 2월에 제(帝)가 붕(崩)하였다.
인종(仁宗)은 지극히 어진 임금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니, 대벽(大辟 사형)이 의심나면 반드시 상주(上奏)하도록 하여, 살아난 자가 한 해에 1천여 명을 헤아렸다. 불에 구운 양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하루 저녁 시장한 것을 참지 못하여 한없이 잡아먹는 길을 열어놓으면 되겠는가?’ 하였으며, 혹 새조개[蛤蜊]를 바치면, ‘한 젓가락에 2만 8천의 돈을 허비하는 것은 내가 감히 하지 못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북사(北使)가, ‘고려(高麗)에 군사를 출동시키자.’고 말하자, ‘백성들을 죄없이 죽이게 된다.’ 하여 드디어 출병을 그만두었고, 궁중에서 통천서(通天犀)를 내어 경사(京師)의 역질(疫疾)을 구호하면서 말하기를, ‘짐이 어찌 특이한 물건은 귀하게 여기고 백성을 천하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어떤 자가, 소철(蘇轍)의 대책(對策)이 지나치게 곧다 하여 폄출(貶黜)하기를 청하자, ‘정직한 말을 구하면서 그를 버린다면 천하에서 뭐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고 유현을 존숭하여 사도(斯道)를 부식함으로써, 위로는 1조(祖 태조)와 2종(宗 태종(太宗)과 진종(眞宗))의 마음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염ㆍ낙(濂洛 정ㆍ주(程朱)를 뜻함) 도학(道學)의 아름다운 성적을 전도(前導)하였으니, 더욱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경연(經筵)에서 시신(侍臣)들에게 말하기를, ‘짐이 한더위라고 일찍이 조금도 게을러지지 않았지만, 오직 경들의 수고로움이 걱정된다.’ 하였고, 주ㆍ현(州縣)에 조서(詔書)를 내려 모두 학궁(學宮)을 세우게 하였으며, 《대기》(戴記 《예기》를 뜻함) 속에서 《중용》과 《대학》 2편을 표장(表章)해 내어 유신(儒臣)들을 격려하였으니, 이는 이미 사서(四書)가 있게 된 단서를 열어놓은 것이다.
아, 제와 같은 이는 마음가짐과 정사를 마련함이 순수하여서, 더 할 말이 없다.

영종(英宗) 이름은 서(曙). 인종(仁宗)의 종형. 복왕(濮王)의 열두째아들로 재위 4년.
제(帝)는 즉위한 처음부터 근심과 두려움 때문에 병을 얻어 거조(擧措)가 정상이 아니었다. 조서(詔書)를 내려 황태후(皇太后)에게 권도(權道)로 같이 청정(聽政)하기를 청하게 되자, 내시(內侍) 임수충(任守忠) 등이 말을 만들어 이리저리 이간하니, 재상 한기(韓琦)가 극력 구원했다.
이듬해 5월에 제의 몸이 회복되자, 한기가 10가지 일을 가지고 품의하니, 제가 재결(裁決)하되 모두 합당하다 하였다. 한기가 즉 동전(東殿 태후가 있는 궁전)에 나아가 복주(伏奏)하니, 태후가 일마다 잘했다고 칭찬하므로, 한기가 태후에게 염정(簾政)을 그만두기를 청하고, 임수충을 귀양보내어 그가 이리저리 이간한 죄를 바로잡았다.
제가 정사에 임한 이래로 임용한 사람이 모두 군자들이었고, 재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는 맨 먼저 한기를 얻고, 다음으로 부필(富弼)을 얻었으며, 참정(參政)의 반열에 있은 사람으로는 전에 구양수(歐陽脩)가 있고 뒤에는 조개(趙槩)가 있으며, 경연(經筵)에 있는 사람으로는 여공저(呂公著)와 유창(劉敞)이 있고, 간관(諫官)이 발탁된 사람으로는 당개(唐介)가 중승(中丞)이 되고 여회(呂誨)가 지잡(知雜 잡사(雜事)를 맡은 어사)이 되고, 범순인(范純仁)ㆍ여 대방(呂大防)이 어사(御史)가 되었다.
송나라 조정에 군자를 등용함이 왕성했던 것은, 오직 태평하게 다스림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니, 제의 사람을 알아보고 벼슬시킨 도리를 볼 수가 있다.

신종(神宗) 이름은 욱(頊). 영종의 태자(太子)로 재위 18년.
제(帝)는 큰일을 할 자질로, 법을 고치고 정사를 창안하여 조정의 형세를 강하게 하려고 맨 먼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으로 고쳤다. 그 신법이 편리하지 못함을 논한 사람으로, 사마 문정공(司馬文正公 문정공은 사마광의 시호)ㆍ조 청헌공(趙淸獻公 청헌공은 조변(趙抃)의 시호)ㆍ범 충문공(范忠文公 충문공은 범진(范鎭)의 시호)ㆍ정명도(程明道 명도는 정호(程顥)의 별호임)와 구(歐 구양수)ㆍ소(蘇 소철) 두 문충공(文忠公) 같은 여러 군자들은 모두 척파(斥罷)되고, 등용된 사람은 모두 신진(新進)으로 일을 저지른 무리들로서, 온 천하가 그 폐단을 감당하지 못하여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안석이 비록 물러났으나, 그의 무리 채경(蔡京)ㆍ여혜경(呂惠卿)ㆍ장돈(章惇)ㆍ채확(蔡確) 등이 서로 잇달아 권세를 부리게 되어 정강(靖康 송흠종(宋欽宗)의 연호) 때에 이르러서는 화란이 극도에 달했었다.
아, 왕안석은 논할 것도 없다. 신종(神宗) 때를 당하여 염계(濂溪)의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도학(道學)을 주창하여 밝히매, 두 정부자(程夫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따라서 호응하여, 도학의 융성함이 더욱 크게 번져 위로는 공ㆍ맹(孔孟)의 천년토록 전승되지 못하던 도를 이어받고, 아래로는 후인(後人)에게 만세의 무궁한 학문을 열어 놓았으니, 실로 전보다 빛나고 뒤에도 없던 일이다.
이 시절에, 강절소자(康節邵子 소옹(邵雍))ㆍ횡거장자(橫渠張子 장재(張載))ㆍ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이 또한 이학(理學)의 연수(淵藪)가 되었는데, 우뚝하여 미칠 수 없는 이들이다.
아, 가령 하늘이 왕안석을 그 중간에 내지 않고 이 여러 군자들로 하여금 사도(斯道)로써 천자를 도와서 큰일을 할 수 있는 뜻을 성취하게 하였다면, 나는 그가 세도(世道)를 당ㆍ우(唐虞)의 융성했던 때와 같이 끌어 올렸으리라고 여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지 않았는지 애석한 일이다.

철종(哲宗) 이름은 후(煦). 신종의 태자(太子)로 재위 15년.
제는 즉위하자, 태황태후(太皇太后)가 함께 정사를 보았다. 겨우 10세이었으나 조정에 임함이 장엄하였다.
수상(首相) 중신(重臣) 사마광(司馬光)과 여공저(呂公著)가 전후하여 좌복야(左僕射)가 되어 신법(新法) 10여 가지 일을 폐기하니, 조야(朝野)가 기뻐했다.
원우(元祐 송철종의 연호) 8년(1093, 고려 선종(宣宗)10) 이전에는 잘 다스린다고 일컬었으니, 그 설시(設施)하고 거행한 것이 모두 선인성렬황후(宣仁聖烈皇后)에게서 나온 것으로서, 사마공(司馬公)과 여공(呂公) 등이 협조하여서, 성취시킨 힘이었다.
뒤에 양외(楊畏)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종(神宗)께서 법을 고쳐 만세에 남긴 것이니, 바라건대, 조속히 강구(講求)하여 소술(紹述 선대의 일을 이어받아 밝힘)하는 공을 성취하소서.”
라고 하여, 양외는 장돈(章惇)ㆍ여혜경(呂惠卿) 등을 소외하였는데, 온백(溫伯)ㆍ이청신(李淸臣) 등이 장돈을 불러들여서 정승 삼기를 바라니, 받아들여 이청신은 중서 시랑(中書侍郞)이 되고 온백은 좌승(左丞)이 되었다.
소술(紹述)에 대한 말을 이청신이 주창하고 온백이 화답하여, 뭇 소인들이 권세를 부리며 사마광(司馬光) 등 33인을 배척하여 내쫓고, 선인황후(宣仁皇后)가 남몰래 폐립(廢立)하려고 도모한다고 무고(誣告)하여 폐위(廢位)하려고까지 하였다.
아, 왕안석의 법을 고친 화는 한때에 그쳤지만 소인들을 끌어들인 화는 한 시대를 끌었다. 사람들이 변도(汴都 송나라 도읍지)가 휘종(徽宗) 선화(宣和 휘종의 연호) 무렵에 망한 것만 알지, 이미 철종(哲宗) 소성(紹聖 철종의 연호) 때에 조짐이 있었음은 알지 못하니, 비통한 노릇이다.

휘종(徽宗) 이름은 길(佶). 신종(神宗)의 열한째아들로 재위 26년.
즉위하자, 맨 먼저 한충언(韓忠彦)을 정승으로 삼고 추호(鄒浩)의 벼슬을 회복시키며, 범순인(范純仁) 이하 20여 명을 모두 거두어 서용하고, 사마광ㆍ문언박(文彦博) 등 33인의 관작을 추복(追復)하며, 범순인(范純仁)을 부르고 장돈(章惇)을 안치(安置)하며 채경(蔡京)을 파직하였으니, 역시 한 시대의 어진 임금이다.
애석한 것은, 그가 비록 한충언을 정승으로 삼고 증포(曾布)를 참여시켰지만 조정(趙挺)이 건의한 ‘소술(紹述)’이란 것을 포유(布諭)함으로써, 이로부터 원우(元祐 송철종의 연호) 때의 옛 신하들을 공격하여 국론이 일변하여 버렸다.
채경이 무릇 네 차례나 정승으로 들어와 전후 20여 년 동안에 소인들이 서로 잇달아 정권을 잡았으니, 채경ㆍ왕보(王黼)는 또한 소인 중에도 더욱 심한 자이었다.
그는 여러 군자들에 대하여 배척하고 원수로 몰기를 못할 짓이 없이 하였고 다시 사마광 등 50여 인의 관작을 빼앗았으며, 원우(元祐) 말년에 글을 올린 사람의 명부를 만들어서 어서(御書)로 쓴 당적(黨籍)을 단문(端門)에 새긴 것이 무릇 1백 90인이나 되었다. 또한 임백우(任伯雨) 등 14인을 귀양보냈으며, 황정견(黃庭堅)ㆍ정이(程頤)를 귀양보내어 제명(除名)하였다.
범순인(范純仁)ㆍ소식(蘇軾)ㆍ정이(程頤)ㆍ장상영(張商英)ㆍ진관(陳瓘)ㆍ유안세(劉安世) 등 제공(諸公)이 죽어 착한 무리가 다 없어져 온 조정에 군자는 하나도 없고 순전히 소인들이었는데, 채경이 실로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때 태평한 지 이미 오래되어 내탕(內帑)과 국고(國庫)가 가득차 넘치므로, 서울에서는 풍형 예대(豊亨豫大)의 말을 주창하여 오로지 방탕과 사치, 사냥과 주색으로 임금을 인도하여 토목(土木)과 신선(神仙) 구하는 일이 차례차례 일어났다.
주면(朱勔)이 화석강(花石綱)을 시작한 것 때문에 동ㆍ남(東南)이 크게 군색하여졌고, 동관(童貫)이 궁실(宮室)을 넓히며 기문(期門 천자의 호위병)의 일이 생겼다. 또한 만세산(萬歲山)을 만드느라 국력을 6년 동안이나 탕진한 뒤에야 이루었고, 도교(道敎)를 숭상하여 존귀한 제왕(帝王)으로서 도군(道君)이라는 이름을 가했으니, 어찌 양무제(梁武帝)가 부처에게 아첨한 것과 다르겠는가?
대체로 소인들이 득세하면 환관이 권세를 잡아 변방을 개방하는 일이 생기게 하므로, 도적들과 이적(夷狄)의 화가 또 한 차례로 일어나게 됨은 필연(必然)의 사세이다. 그런데 환관(宦官) 동관(童貫)으로 원수를 삼게 되어, 금(金)나라와 언약하고 요(遼)를 협공(夾攻)하다가 요나라 땅은 얻지도 못하고 금나라 군사가 이미 대궐을 범하게 되었다.
아, 보건대, 소성(紹聖 철종의 연호) 이래로 모든 음흉한 무리들이 자취를 이어가며 착한 무리들을 소멸하였지마는 그 뜻이 원한을 갚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다시 진출하여 자기들의 권세와 은총을 빼앗기게 될까 두려워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때도 역시 이처럼 혹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본래 자리를 잃게 될까 하는 사심에서 나온 것인데, 그 화가 바로 나라를 상실하는 비참에 이르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가짐은 공사의 분별에 있어서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흠종(欽宗) 이름은 환(桓). 휘종의 태자(太子)로 재위 2년.
제(帝)는 금(金)나라 군사가 대궐에 침범한 때를 당하여 화란이 이미 극도에 달한 후에 즉위하였으니, 참으로 어쩔 수 없었으나, 그래도 일찍이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이강(李綱)이 성을 지킬 계책을 의정(議定)하고 충의(忠義)로써 사졸들을 격려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다소는 강하게 하였으며, 제도(諸道)의 근왕(勤王)하는 군사가 오히려 수백만이 있었고 희하 경략(熙河經略) 요고(姚古)와 진봉 경략(秦鳳經略) 충사도(种師道) 등의 군사가 20만이나 된다고 했으며, 충사도가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저들은 군사 쓸 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외로운 군사로 남의 지경에 깊이 들어왔다가 잘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는 잘할 수 있었던 기회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이방언(李邦彦)이 오로지 화의(和議)를 주장하는데 제 역시 옳게 여겼는가? 이방언은 이강(李綱)ㆍ충사도(种師道) 등이 전공(戰功)을 이룰까 두려워하여, 그가 조금 패전(敗戰)한 것을 틈타 온갖 계책으로 헐뜯었기 때문이다.
오랑캐가 호군(犒軍)할 금은(金銀)ㆍ우마(牛馬)ㆍ폐백(幣帛)을 대고, 중산(中山)ㆍ태원(太原)ㆍ하간(河間) 세 진(鎭)을 떼어 주어야 하며, 친왕(親王)을 인질(人質)로 보내라고 요구하였는데, 강왕(康王) 구(構)가 북경(北京)으로 가서 요구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었다.
무릇 서울을 포위한 지 33일 만에 이미 세 진(鎭)의 문서를 얻어내고 또한 친왕(親王)이 곧 가게 되자, 이강과 충사도 등이 임하(臨河)의 액관(阨關)에서 요격(要擊)하여 무찌르기를 청하였는데, 이방언이 듣지 않고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호위하여 국경을 나가게 하였으니, 금나라가 능히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간 것이 아니라, 바로 국적(國賊) 이방언이 곡진하게 보호하여 잘 돌아가게 하여 준 것이다.
이강은 금나라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올 것을 알고, 변방을 수비하여 적을 방어할 8가지 일을 상주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 양시(楊時)도 또한 말을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방언은 비록 파직되었으나 이강 역시 외직(外職)으로 나갔는데, 금로(金虜)가 다시 와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경성(京城)이 함락되어 이제(二帝)가 사로잡히고, 제왕(諸王)ㆍ공주(公主)ㆍ후비(后妃)ㆍ희빈(姬嬪)들과 재집(宰執)ㆍ관료(官僚)에 이르기까지 수천여 인이 모두 사로잡혔으며, 심지어 다른 성씨(姓氏)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바꾸기까지 했다. 아, 통탄스러운 일이다.

고종(高宗) 이름은 구(構). 휘종(徽宗)의 아홉째아들로서 임안(臨安)에 도읍하였다. 재위 36년.
두 제(帝)가 북수(北狩)하게 되자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였는데, 맨 먼저 이강(李綱)을 불러 우복야(右僕射)를 삼았으니 정승의 적임자를 얻은 것이요, 종택(宗澤)을 명하여 동경(東京)에 머물러 지키도록 하였으니 장수도 또한 적임자를 얻은 것이다.
두 공(公)의 뜻은 회복하는 데 있었는데, 황잠선(黃潛善)ㆍ왕백언(汪伯彦) 등의 뜻은 그대로 보존하는 데에 있어, 물과 불의 성질처럼 원래부터 이미 같지 않았다. 게다가 제(帝)는 부모를 사모하는 생각이 능히 그 두렵고 나태하여 편하고만 싶은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였으니, 이래서 왕ㆍ황(汪黃)의 참소는 들어가기 쉬웠고, 이강과 종택의 계책은 시행되지 못한 것이다.
그 뒤에 진회(秦檜)가, 재궁(梓宮)을 돌려주도록 청하자는 것으로 핑계를 삼아 화의(和議)를 주창하여 재상 자리를 얻음에, 이(利)를 탐하는 무리들이 따라서 호응하게 되어, 간특하고 아첨하는 자는 뜻을 얻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은 배척되고 죄받으며, 무비(武備)는 폐이(廢弛)되고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어, 비록 장준(張浚) 같은 충의(忠義)와 악비(岳飛) 같은 무용(武勇)으로도 능히 회복하는 공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준은 내쫓기고 악비는 죽음을 당했으니, 아, 원통한 일이다.
오직 누인량(婁寅亮)의 한 마디 말에 따라 태조의 후손으로 후계를 삼았는데, 선위(禪位)할 때에 있어 읍손(揖遜)하는 거동을 조금도 미련 없이 하였으니, 태조의 하늘에 있는 영혼이 위로될 수 있었을 것이요, 그 중흥(中興)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게 된 근본이 여기에 있지 않았겠는가?

효종(孝宗) 이름은 신(眘). 태조의 후손 수왕(秀王)의 아들로 재위 27년.
즉위한 초에, 장준(張浚)이 입대(入對)하여 강회 선무사(江淮宣撫使)를 제수받는데, 제(帝)가 말하기를, ‘전에 공(公)의 이름을 들었는데, 지금 조정에서 믿는 바가 오직 공뿐이다.’ 하니, 장준이 답하기를,
“임금은 학문을 힘쓰는 것이 급선무인데, 임금의 학문은 마음 하나를 근본삼으니, 마음 하나가 하늘과 합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른바 하늘이란 것은 천하의 공리(公理)일 뿐입니다.”
하였다.
장준이 제의 영무(英武)함을 보고 화의(和議)함이 잘못임을 힘써 진주(陳奏)하니, 이에 준에게 소보(少保) 벼슬을 주었다.
이때 오랑캐의 장수들이 홍현(虹縣)ㆍ영벽(靈壁)에 둔치하였는데, 준이, 반드시 변방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이때에 소탕해야 한다고 여겨서 들어가 아뢰니, 조서(詔書)를 내리고 친정(親征)하되, 장준에게 명하여 형양 도독(荊襄都督)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마침 장준의 장수 이현충(李顯忠)과 소굉연(邵宏淵)이 서로 좋지 못하여 군사가 무너지니, 장준이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제가 자책하는 조서를 내리고 장준의 벼슬을 선무사(宣撫使)로 좌천시켰다. 제가 장준의 아들 식(栻)을 불러 이르기를,
“짐(朕)이 위공(魏公 장준의 봉호) 대접을 낫게 할 것이니, 뜬 의논에 현혹되지 말라.”
하였으니, 제가 공에게 위임함이 독실하였음을 볼 수 있다.
얼마 되지 않아 금나라 장수가 글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의논하고 당(唐)ㆍ등(鄧)ㆍ해(海)ㆍ사(泗) 4주(州)를 요구하므로, 재집(宰執)들은 화친을 강구하기에 급급하자 제가 장준을 행재소(行在所)로 불러 우상(右相)을 삼았다가 이어 도독(都督)을 삼고, 끝내 4주(州)를 오랑캐에게 주지 않았다. 이로 본다면 제의 원수 갚을 뜻이 얼마나 그 결단스러웠던가?
불행하게도 탕사퇴(湯思退)들이 극력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온갖 계책으로 장준을 헐뜯었는데, 준이 한번 나가게 되자 남의 불행을 다행으로 여기는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준에게 죄를 돌리고, 사퇴는 오랑캐를 달래어 많은 군사로 화친을 강요했으며, 주규(周葵)ㆍ왕지망(王之望)ㆍ홍준(洪遵)도 진회(秦檜)의 소위를 답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한 사람의 장준이 어찌 백 명이나 되는 진회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효종(孝宗)이 회복하려던 뜻은 비록 이루지 못했으나, 융흥(隆興)ㆍ건도(乾道)ㆍ순희(淳熙) 때의 선치(善治)는 속일 수 없다. 용도(用度)를 절약하고 백성을 아끼며, 학문을 좋아하고 정사에 부지런하며, 남의 말을 들어주고 간하는 것을 좋아하며, 도를 존중하고 유학을 숭상하며, 환관을 소외하여 배척하고 장리(贓吏)를 엄하게 단속하여 제왕(帝王)들의 모든 선(善)을 능히 겸비하였으니, 참으로 송나라 왕실의 어진 임금이다.
다만 그 말년에 진가(陳賈)가 위학(僞學)을 금하자고 주청(奏請)하여 주희(朱熹)를 공격함으로써, 사정(邪正)이 혼란하게 되어 화가 차차 늘어나 퍼졌으니, 깊이 애석할 일이다.

광종(光宗) 이름은 돈(惇). 효종의 다섯째아들로 재위 5년.
제(帝)는 소희(紹熙)로 연호를 고친 다음해에 병이 있어 편치 못했다. 이때 유정(留正)과 갈필(葛邲)이 좌상ㆍ우상[左右相]으로 있고, 조여우(趙汝愚)가 동지(同知)로 있으며 주희(朱熹)가 회남 안무(淮南安撫)로 있었다.
수황(壽皇 효종)이 붕(崩)하였는데, 제가 병으로 집상(執喪)을 하지 못하매 중외(中外)에서 근심하고 두려워하게 되자, 조여우가 태황태후(太皇太后)에게 아뢰고 황자(皇子) 가왕(嘉王)을 받들어 즉위시키니, 사람들이 광종(光宗)의 병이 중하기 때문에 영종(寧宗)을 세웠다고 여겼다. 조여우는 동성(同姓)의 경(卿)인데, 대체로 그 힘이 많았다.

영종(寧宗) 이름은 확(擴). 광종의 장자로 재위 30년.
제(帝)는 조여우(趙汝愚)로 정승을 삼고 주희(朱熹)로 강관(講官)을 삼아 군자들이 곁에 있었으며, 착한 사람들을 추천하여 서로 함께 임금으로서 덕을 양성하고 정사를 닦고 밝히니 거의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어쩌다가 한탁주(韓侂冑)가 한낱 소인(小人)으로서 자기가 정책(定策)의 공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인연하여 권세를 잡아 조여우와 주희를 축출하고 착한 무리들이 서로 잇달아 귀양가고 내쫓겼다.
아, 사도(斯道)가 불행하여서일까, 아니면 송나라가 불행하여서일까?

이종(理宗) 이름은 윤(昀). 영종의 둘째아들로 재위 40년.
제(帝)는 즉위하여 왕위에 임어(臨御)한 지 40년 동안에 이학(理學)을 표장(表章)하여 염락자양(濂洛紫陽)의 도(道)가 크게 천하에 밝혀져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으니, 묘호(廟號)를 이(理)라고 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국세(國勢)가 오랫동안 약화된 나머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제유(諸儒)들의 이학(理學)으로 마침내 무너져 가고 위태하여진 국운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한두 번 전하지도 못하고 드디어 멸망했다.
아아, 주공(周公)이 죽으매 성현의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였고, 맹가(孟軻)가 죽으매 성현의 학문이 밝지 못했다. 공자와 맹자도 도가 밝아지게는 하였지만 오히려 반드시 도가 행해지게는 못하였다. 더구나 주ㆍ정(周程 주돈이와 정이)이 희령(熙寧 송신종(宋神宗)의 연호)ㆍ원우(元祐 송철종의 연호) 때에 있어서와, 주 문공(朱文公 문공은 주희의 시호)이 건도(乾道)ㆍ순희(淳熙 건도와 순희는 효종의 연호)ㆍ경원(慶元 영종(寧宗)의 연호)의 때에 있어서와, 진 문충공(眞文忠公 문충공은 진덕수(眞德秀)의 시호)이 단평(端平 이종(理宗)의 연호) 시절에 있어서 일찍이 조금도 득군(得君)하여 정치를 행해 보지 못하였고, 소인들이 모두 뒤를 이어가며 오래도록 권세를 잡았는데, 제유(諸儒)들이 혹은 일찍 죽거나 끝내 곤궁하게 지냈으니, 어찌 도(道)가 행해지지 못한 것과 나라가 좋아지지 못한 것으로 책망할 수 있겠는가?

도종(度宗) 이름은 기(禥). 이종의 조카며 복왕(福王)의 아들로 재위 10년.
권신(權臣)과 간신(姦臣)들이 권리를 잡아 한없이 탐하고 극도로 악했다. 나이 어린 임금 덕우(德祐 공종(恭宗)의 연호) 원년에 이르러 천명(天命)이 끝났다.

 

(元)

 

태조(太祖) 이름은 철목진(鐵木眞)이며 성은 기악온씨(奇渥溫氏)인데, 국어(國語)로는 성길사(成吉思)이다. 재위 22년.
제(帝)는 즉위하자 공덕(功德)이 날로 융성하여져 제부(諸部)가 모두 의리를 사모하며 항복하여 왔다.
재차 서하(西夏)를 정벌하고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으로 치되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일제히 진격하여, 우군(右軍)은 태항산(太行山)을 따라 남하하고 좌군(左軍)은 바다를 따라 동으로 가고, 제는 스스로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연남(燕南)ㆍ산동(山東)ㆍ하북(河北)의 50여 군(郡)을 차지했다. 목화려(木華黎) 등에게 명하여 금(金)나라의 항복받지 못한 주성(州城)을 차지하도록 하고, 드디어 서역(西域)을 친정(親征)했다.
제는 몹시 침착하고 큰 지략(知略)이 있어 군사를 지휘함이 귀신같았다.
그러므로 40여 나라를 멸하고 드디어 서하(西夏)와 서역(西域)을 평정할 수 있었다.

태종(太宗) 이름은 와활태(窩闊台). 태조의 셋째아들로 재위 13년.
제(帝)는 즉위하자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을 정벌하여 6년(1234)에 금나라가 멸망하고, 7년에는 송나라를 쳤다.
제는 너그럽고 큰 도량과 인자하고 두남두는 마음을 가져, 때를 짐작하고 힘을 헤아려 하므로 잘못되는 일이 없었다. 화하(華夏 중국의 온 나라)가 부요해지고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되었으며 행려(行旅)들이 양식을 가지고 다닐 것이 없게 되어, 당시에 태평한 세상이라고 일컬었다.

정종(定宗) 이름은 귀유(貴由). 태종의 장자로 재위 3년.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죽었는데, 내마진(乃馬眞)씨가 칭제(稱制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하는 것)한 이래로 법도(法度)가 한결같지 못하여 안팎의 인심이 이탈되어서, 태종(太宗)의 정사가 쇠퇴하여 갔다.

헌종(憲宗) 이름은 몽가(蒙哥). 예종(睿宗) 타뢰(拖雷)의 장자로 재위 9년.
소년 시절에 정벌(征伐)하는 데 따라가 누차 기이한 공을 세웠다. 강명(剛明)하고 웅의(雄毅)하며 침착하고 과단스럽고, 말이 적으며 술마시고 노는 것을 즐기지 않고, 사치하거나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조(世祖) 이름은 홀필렬(忽必烈). 예종(睿宗)의 넷째아들이다. 국어(國語)로는 설선(薛禪)인데 재위 35년.
인자하고 밝으며 영특하고 지혜로웠는데, 태후(太后)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더욱 아랫사람을 돌보기를 잘하였다.
도량이 크고 넓어 사람을 알아보고 신임하여 부리기를 잘하되, 유술(儒術 유학)의 선비를 믿고 쓰며 백성들의 힘을 아끼고 길러, 매양 재상(災傷)을 만나게 되면 조세(租稅)를 면해 주고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되 오직 제대로 미치지 못할까 염려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능히 중화의 문화로써 오랑캐 풍속을 개혁하여 천하를 혼일(混一)하고 강령을 세워 조목을 마련하였으니, 일대(一代)의 제도를 만든 것이 규모가 크고 원대했던 것이다.

성종(成宗) 이름은 철목이(鐵穆耳). 세조(世祖)의 손자요, 유종(裕宗) 진금(眞金)의 셋째아들이다. 국어(國語)로는 완택독(完澤篤)이다. 재위 13년.
천하가 혼일된 뒤를 이어받아 수공(垂拱 팔짱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하고서 다스렸으니, 수성(守成)하기를 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그 말년에 여러 해 병을 앓아, 무릇 국가의 정사가 안으로는 궁중에서 결정되고 밖으로는 대신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방치하거나 추락하게 되지 아니한 것은, 세조(世祖) 때가 지나간 지 멀지 않아 성헌(成憲)이 모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종(武宗) 이름은 해산(海山). 순종(順宗) 답랄마팔랄(答剌麻八剌)의 장자로서, 국어(國語)로는 곡률(曲律)이다. 재위 22년.
부요(富饒)한 왕업을 이어받아서, 개연히 정사를 새로 하고 법을 고쳐 일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므로 봉작(封爵)이 너무 번다하여 먼데 사람에게 제수하는 벼슬이 많았고, 하사(下賜)하는 것이 너무 융숭하여서 응당 상을 주어야 할 자리에 은혜가 박해지므로, 지원(至元 원세조(元世祖)의 연호)ㆍ대덕(大德 원성종(元成宗)의 연호) 때의 정사가 이에 차차 변해갔다는 것이다.

인종(仁宗) 이름은 애육려발력팔달(愛育黎拔力八達). 순종(順宗)의 차자로서, 국어(國語)로는 보고독(普顧篤)이다. 재위 9년.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총명한 데다가 공손하고 검소했으며, 유술(儒術)에 통달하고 또한 석전(釋典 불경)에도 마음을 두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마음을 밝혀 천성을 보는 데에 있어서는 비록 불교(佛敎)로 으뜸을 삼지만, 수신(修身)하고 치국(治國)하는 데에는 유도(儒道)가 더 크다.”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유자들이 숭상되는 까닭은 능히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도리를 유지하여 가기 때문이다.”
하였다.
평상시에도 의복ㆍ거마 등속을 질박하고 검소하게 하여 담연(澹然)히 욕심이 없었고, 놀이나 사냥을 일삼지 않고 정벌(征伐)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며 재물과 이득을 숭상하지 않았다.
황태후(皇太后)를 섬기되 종신토록 안색(顔色)을 변치 않았고 종친(宗親)과 훈구(勳舊)들의 대접을 시종 예(禮)로써 하며, 대신들의 늙은 어버이에게는 특별히 은혜스럽게 내리는 것이 있었고, 유사(有司)가 대벽(大辟 사형죄)을 아뢰면 매양 비참하고 측은하게 여겼고, 언제나 부지런하게 정사하여 한결같이 세조(世祖)의 성헌(成憲)대로 따라 하였다는 것이다.

영종(英宗) 이름은 석덕팔랄(碩德八剌). 인종의 적자(嫡子)로서 국어(國語)로는 격견(格堅)이다. 재위 3년.
즉위하면서부터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하되,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위임하여 폐단스러운 정사를 개혁하도록 했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철실(鐵失)이 탐오(貪汚)하고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베기로 의논한 일이 누설되어, 드디어 그에게 시해(弑害)되었다.

태정제(泰定帝) 이름은 야손철목아(也孫鐵木兒). 현종(顯宗) 감마랄(甘麻剌)의 장자로 재위 5년.
철실(鐵失)이 영종(英宗)을 시해하고 진저(晉邸)에서 맞아다가 세웠는데, 제가 즉위하자 곧 철실을 베어 시역(弑逆)한 죄를 바로잡았다.

명종(明宗) 이름은 화세련(和世瑓). 무종(武宗)의 장자로서 국어(國語)로는 호도독(護都篤)이다. 재위 8개월.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갑자기 붕하였다.

문종(文宗) 이름은 도첩목이(圖帖睦爾). 무종(武宗)의 차자로서 국어(國語)로는 예아독(禮牙篤)이다. 재위 5년.
왕위에 선 지 5년 만에 붕하였다.

영종(寧宗) 이름은 의린질반(懿璘質班). 명종(明宗)의 둘째아들로 재위 1개월.
왕위에 있은 지 43일로서, 나이 7세에 붕하였다.

순제(順帝) 이름은 타환첩목아(妥驩帖木兒). 명종(明宗)의 장자로서 재위 36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왕위에 있은 지 36년 만에,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

 

고려국(高麗國)

 

태조(太祖)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금성태수(金城太守) 왕융(王隆)의 큰아들로 재위 26년.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용안(龍顔)의 일각(日角)이 너그럽고 후중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양(梁)나라 정명(貞明 후량 말제(後梁末帝)의 연호) 4년(918, 신라 경명왕2, 후백제 진훤27)에 여러 장수들이 궁예(弓裔)가 무도(無道)하기 때문에, 태조를 받들어 즉위하게 했다.
그가 정사를 설시(設施)할 적에,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되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하였으며, 공신(功臣)에게는 성의를 보이고 피폐한 백성들을 돌보아 주었다.
견훤(甄萱) 부자(父子)가 서로 해치매 정벌하여 차지하고, 김부(金傅 신라 경순왕) 군신(君臣)이 와서 의탁하매 예(禮)로써 대접했다. 글안(契丹)이 강성하여 동맹국을 침략하매 사귐을 끊었고, 발해(渤海)가 약하여 땅을 잃고 돌아갈 데가 없으매 돌보아 주었다.
여러 번 서도(西都)에 행행하고 친히 북쪽 국경을 순행하였으니, 그의 뜻이 대개 동명왕(東明王) 때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야 말려고 한 것이요, 초창기(草創期)이고 새로 시작하는 때이어서 비록 예악(禮樂)에 틈이 없었지만, 그의 큰 규모와 원대한 방략(方略), 깊은 인정(仁政)과 후한 혜택이 실로 이미 5백 년 동안의 나라의 명맥(命脉)을 배양하였다.
【안】 이 이하 공양왕(恭讓王)에 이르기까지는 이제현(李齊賢)의 찬(贊) 및 사신(史臣)의 찬을 채택했다.

혜왕(惠王) 이름은 무(武). 태조의 큰아들로 재위 2년.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백제(百濟)를 토벌하는 데 따라가 공이 있었으므로 태조가 더욱 소중히 여겼다. 진(晉)나라 천복(天福 후진 고조(後晉高祖)의 연호) 8년(943) 5월에 유명(遺命)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왕규(王規)가 왕의 두 아우를 참소하였으나, 왕은 죄주지 않고 도리어 좌우에 있도록 했으니, 그가 칼을 소매 속에 숨기고 벽 속에 사람을 숨긴 음모를 면하였음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안】 구본(舊本)에는 ‘이르다[謂]’ 아래에 ‘다행[幸]’이 없었는데, 본문(本文)을 상고하여 메웠다.
이때는 태조(太祖)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왕규가 의리 아닌 짓으로 대중을 얻기를 이미 한(漢)나라의 조조(曹操)와 위(魏)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같이 한 것이 아닌가? 그를 귀양보내거나 베지 않았음은 무슨 일일까? 아, 소인을 멀리하기 어렵기가 이와 같은 것이니,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왕(定王) 이름은 요(堯). 태조의 둘째아들로 재위 4년.
성격이 부처를 좋아하고 두려움이 많았다. 진(晉)나라 개운(開運 후진 출제(後晉出帝)의 연호) 2년(945) 9월에 혜왕(惠王)의 유명(遺命)을 받아 즉위했다.
왕은 존귀한 임금의 몸으로서, 걸어서 10리 밖에 있는 부도(浮屠 부처)의 궁(宮)에 가서 사리(舍利)를 봉안했으며, 또한 7만 석의 곡식을 하룻동안에 여러 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한 번 하늘의 벌을 만나게 되자 상심(喪心)하여 병이 생겼으니, 이른바 ‘군자는 복을 구하기를 사곡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을 또한 일찍이 들었겠는가?
병이 이미 매우 중해지자 능히 종사(宗社)를 친아우에게 부탁함으로써, 왕규와 같은 자가 그 중간에 넘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또한 가상하게 여겨야 할 뿐이다.
【안】 구본에는 가(可)자 아래에 위(謂)자가 있었는데, 본문(本文)을 상고하여 삭제했다.

광왕(光王) 이름은 소(昭). 태조의 셋째아들로 재위 26년.
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즉위하자 신하들을 예의로 대접했고 청단(聽斷)에 밝으며,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유아(儒雅)한 선비를 존중했다.
왕이 쌍기(雙冀)를 등용한 것은, 어진 이 쓰기를 차별 없이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쌍기가 과연 어질었다면 어찌 그 임금을 착한 데로 인도하여 참소를 믿거나 형벌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지 못하였을까?
가령 그가 과거(科擧)를 설시하여 선비를 뽑게 한 것은, 광왕(光王)이 유아(儒雅)하여 문(文)을 사용해서 풍속을 교화할 뜻이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쌍기가 또한 그대로 따라서 하여 그의 아름다움을 성취시켰으니 도움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가 부화(浮華)한 문장만 주창함으로써, 후세에 그 폐단은 말할 수 없게 되어, 선비를 뽑는 데에 시(詩)ㆍ부(賦)ㆍ논(論) 세 가지로만 하고 시정(時政)을 책문(策問)하는 것은 하지 않았는데, 그 문장을 보면 당(唐)나라 때의 남은 폐단과 방불하다는 것이다.

경왕(景王) 이름은 주(伷). 광왕(光王)의 장자로 재위 6년.
온화하고 선량하며 인자하고 후덕하였으며, 오락과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광왕(光王) 말년에 참소와 사특한 짓이 마구 일어나 감옥에 죄수가 넘치므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니, 사람들이 위구(危懼)하게 여겼다. 왕이 비록 동궁(東宮)에 있었으나 역시 의심하고 저해(阻害)함을 보게 되었다. 즉위하게 되자, 전조(前朝) 때의 참소한 글을 모조리 가져다가 불사르니 중외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왕이 시작한 전시과(田柴科)가 비록 소략(疏略)한 점은 있었으나, 역시 옛날의 세록(世祿)을 주던 뜻이었다. 9분의 1을 받는 조법(助法)과 10분의 1을 받는 부법(賦法)이나 부리포(夫里布)에 이르러서는 특권층을 우대하기 위한 것이요, 서민에게는 미치지 못한 것인데, 후세에 누차 시행하려고 하였지만 마침내 구차하다가 말았다.
대개 경계(經界 정전(井田)의 구획)를 급하게 여기지 않아, 그 근원을 흔들어 놓고서 말류(末流)가 맑기를 바란 격이니, 어찌 될 수 있었겠는가? 애석한 것은, 당시의 군신(羣臣)들이 맹자(孟子)의 말대로 법제(法制)를 강구하여 권유하고 지도해서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성왕(成王) 이름은 치(治). 태조의 일곱째아들로 재위 61년.
천품이 엄숙하고 정직하며 도량이 너그러웠다. 경왕(景王)이 병이 중하자 나라를 전하니, 사양하다 못하여 즉위했다.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며, 섬학전(贍學錢 선비를 양성하기 위해 임금과 문ㆍ무관이 내는 돈)으로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覆試)로 어진 이를 구했으며, 수령(守令)들을 격려하여 그 백성들을 돌보게 하고 효절(孝節)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내려 그 풍속이 아름다워지게 하며, 번번이 수찰(手札)을 내리면 글 뜻이 간절하고 측은하여 풍속을 바꾸는 것으로써 일을 삼았다.
글안이 탄서(呑噬 병합)하려는 뜻이 있어 장수를 보내어 침범함에 미쳐서는 서도(西都)로 곧 동가(動駕)하여 군사를 안북(安北)
【안】 ‘안북’은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으로 출동시켰으니, 곧 구준(寇準)이 전연(澶淵)에서 쓰던 계책이다.
늙기 전에 계사(繼嗣 세자)를 세웠으니 국가를 위한 생각이 원대했고, 죽음에 임해서도 죄인을 용사하는 것을 아꼈으니, 사생(死生)의 이치를 밝게 통달한 것이니, 이른바 ‘뜻이 있어서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어질도다.

목왕(穆王) 이름은 송(誦). 경왕(景王)의 장자로 재위 12년.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음란하여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왕이 시초에 막지 못하였다가 아들과 어머니가 모두 재앙을 입었고, 사직(社稷)이 거의 멸망할 뻔하였다.
아, 선양(宣讓)의 불행일까, 아니면 불행이 아닐 것인지?
【안】 ‘선양’은 목왕의 시호이다.

현왕(顯王) 이름은 순(詢). 태조의 손자로 재위 22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인자하며 학문에 민첩하여 문장에 능숙하였다. 즉위하여서는 강성한 나라들과 화친(和親)하여 무기를 없애고 글을 닦았으며, 부세(賦稅)를 줄이고 무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사람과 선량한 사람을 등용하여 높이고 정사를 공평하게 닦아 백성들을 안정되게 하니, 안팎이 편안하여지고 농사가 자주 풍년이 들었다.
시중(侍中) 최충(崔冲)의 이른바 ‘하늘이 일으켜 주는 바를 누가 능히 막으랴.’라고 한 것이 어찌 그렇지 않으랴?

덕왕(德王) 이름은 흠(欽). 현왕의 장자로 재위 3년.
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강단(剛斷)과 고집이 있었다. 거상(居喪)을 하는 데 아들로서의 효성을 다하였고, 정사를 하되 아버지 때의 방법을 고치지 아니하여, 옛날 신하 서눌(徐訥)ㆍ왕가도(王可道)ㆍ최충(崔冲)ㆍ황주량(黃周亮) 등을 임용하니, 조정에서는 속이거나 숨기는 짓이 없고, 백성들은 그의 생업(生業)이 안정되었으니, 존호(尊號)를 ‘덕(德)’이라고 한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정왕(靖王) 이름은 형(亨). 덕왕의 모제(母弟)로 재위 12년.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러워 소소한 절목에 구애받지 않으며, 영특하고 지혜로우며 과단성이 있었다.

문왕(文王) 이름은 휘(徽). 현왕(顯王)의 셋째아들로 재위 37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뜻과 지략이 크고 원대하며 너그럽고 인자하게 사람들을 포용하였다.
즉위하자 몸소 절약과 검소에, 부지런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며, 백성을 아끼고 형벌을 보살피며, 학문을 숭상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며, 명기(名器 임금의 권한)를 올바르지 못한 사람에게 주지 않고 위권(威權)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비록 가까운 척리(戚里)라도 공이 없이는 상을 주지 않고, 좌우에 보좌하는 아끼는 자라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며, 부리는 환관(宦官)이 열두어 명에 지나지 않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능력이 있는 자를 뽑아 충당하되 또한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불필요한 관원을 없애어 일이 간소해지고 비용을 절약하여 나라가 부유해지므로 태창(太倉)의 곡식이 곳집에 묵어 쌓이고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당시에 태평하다고 했었다.
다만 경기 고을 하나를 옮기고 절 하나를 짓되,
【안】 문종(文宗)이 흥왕사(興王寺)를 덕수현(德水縣)에 창건하고 그 현(縣)을 양천(楊川)으로 옮기매, 한림(翰林) 최유선(崔惟善)이 극력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집은 높기가 궁궐보다도 사치스럽고 높은 담장은 나라의 도성(都城)과 같이 하였으며, 황금으로 탑을 세우고 온갖 것을 이에 맞추어 하여 자못 소량(蕭梁 양무제(梁武帝)를 가리킴)에 견줄 만한데도 알지 못했으니, 임금의 미덕을 성취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탄식했을 것이다.

순왕(順王) 이름은 휴(烋). 문왕의 장자로 재위 4개월.
아버지 문왕(文王)의 상사를 당하여 애훼(哀毁)하다가 병이 되어 4개월 만에 죽었다. 비록 성인들의 법제에 비해서는 지나침이 있었으나, 그 부모를 사랑하는 정성에는 지극한 일이다.

선왕(宣王) 이름은 운(運). 문왕(文王)의 셋째아들로 재위 11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구본(舊本)에는 혜(惠)자로 되었다. 장성하여서는 효성스럽고 공경하며 공손스럽고 검소하였으며, 식견과 도량이 크고 원대하였다.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했고 더욱 제술(製述 글짓는 것)에 솜씨가 있었다.

헌왕(獻王) 이름은 욱(昱). 선왕의 원자(元子)로 재위 1년.
천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 구본(舊本)에는 혜(惠)자로 되었다. 9세 때부터 서화(書畫)를 좋아하고, 무릇 보고 들은 것은 일찍이 잊어버리지 않았다.

숙왕(肅王) 이름은 옹(顒). 문왕(文王)의 셋째아들로 재위 10년.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장성하여서는 효도하고 공경 구본에는 경(經)자로 되었다. 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했으며, 웅걸하고 굳세며 과단스러웠고, 육경(六經)과 제자ㆍ사서[子史]를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문왕(文王)이 사랑하며 항시 말하기를,
“왕실(王室)을 부흥(復興)시킴은 너에게 있다.”
하였는데, 번후(藩侯)로 있다가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지혜로써 난리를 평정하고 인애로써 태평을 이루어, 아들과 손자들이 대대로 계승하여 4백여 년에 이르렀으니, 이는 역시 천명(天命)이다.

예왕(睿王) 이름은 우(俁). 숙왕의 장자로 재위 17년.
매우 침착하여 도량이 있었고 본디 문학(文學)을 좋아했다. 일찍이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어진 선비들을 예로 대우하고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실행하였다. 즉위하여서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염려하고 부지런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바랐었다.
다만 뜻이 국경을 개척하는 데에 있어 변방에서 공 세우기를 바라므로 원수짐이 그치지 않았고, 중화(中華)의 풍도를 흠모하고 호종단(胡宗旦)을 신용하여 자못 그의 말에 현혹됨으로써, 실수가 있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용병(用兵)하기가 어려움을 알고서 원한을 버리고 호의(好意)를 보임으로써 이웃 나라들이 감동하고 사모하여 와서 복종하도록 하였고, 환과(鰥寡)를 돌보고 기로(耆老)를 봉양하며 학교를 개설하여 생원(生員)들을 양성하였다.
청연(淸讌)ㆍ보문(寶文) 두 각(閣)을 설치하고 날마다 문신(文臣)들과 더불어 육경(六經)을 강론하되, 무기를 버리고 글을 닦고 예악(禮樂)으로써 풍속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안인(韓安仁)이 말하기를, ‘17년 동안의 사업이 그 후세에 남길 만하다.’고 한 것이니, 이 말이 사실이다.

인왕(仁王) 이름은 해(楷). 예왕의 장자로 재위 24년.
천성이 인자하고 효도하며 너그럽고 자상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재예(材藝)가 많으며, 사우(師友)와 관료(官僚)들을 예법으로 대우하므로 예왕(睿王)이 총애하였다.
즉위하여서는 명경(明經) 출신 신숙(申淑)이 몹시 가난하므로, 궐내(闕內)로 불러들여 《춘추(春秋)》와 경전(經傳)을 배웠고, 뜻이 검소와 절약을 숭상하여 거처하는 침석(寢席)에 누른 비단으로 가를 두른 것이 없었고, 침의(寢衣)를 비단으로 장식한 것이 없었다.
즉위한 처음에 전조(前朝)의 폐단을 이어받아 환시(宦寺) 및 근신(近臣)의 무리가 매우 많았는데, 매양 미미한 죄를 핑계로 내쫓아, 말년에 이르러서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날마다 반드시 정전(正殿)에 거둥하여 정사를 보고, 혹시 일을 아뢰는 것이 지체되면 반드시 소신(小臣)으로 하여금 재촉하도록 하였으며, 오로지 덕과 은혜로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사를 일으켜 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으며, 북쪽 사신을 예로 대접하되 매우 공손하게 하므로, 북쪽 사람들이 모든 친애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신(詞臣)이 응제(應製)할 때에 혹시 북조(北朝)를 가리켜 호적(胡狄)이라고 하면, 놀라며 말하기를,
“어찌 대국(大國)을 신하로 섬기면서 이와 같이 업신여겨 지칭할 수가 있는가?”
하여, 반드시 삭제하고 고치도록 하였다.
금(金)나라가 갑자기 일어남에 미쳐서는, 모든 신하들의 의논을 물리치고 표(表)를 올려 신(臣)이라고 일컬으니, 이로부터 대대로 기뻐하며 동맹(同盟)을 맺어 변방의 근심거리가 없었다.
불행히 이자겸(李資謙)이 방자하여 궁중에서 변란이 생기매, 몸이 갇히는 모욕을 당했다. 그러나 반정(反正)함에 미쳐서는 외조(外祖)이기 때문에 곡진하게 그 생명을 보존해 주되 그 자손과 종족(宗族)까지 하였고, 비록 대간(臺諫)이 번갈아가며 척준경(拓俊京)을 공격하였으나 허물은 버리고 공만 기록하여 목숨을 보존하도록 하였는데, 왕이 재위한 지 오래되어서 조야(朝野)가 아무 일이 없었다.
왕이 훙서(薨逝)하게 되자 중외(中外)에서 슬피 사모했고, 비록 북쪽 사람이더라도 듣고선 또한 애도(哀悼)했으니, 묘호(廟號)를 ‘인(仁)’이라 한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애석한 것은, 요승(妖僧) 묘청(妙淸)의 도읍을 옮기라는 말[說] 어떤 본에는 청(請) 자로 되었다. 에 현혹되어 누차 서도(西都)에 거둥하여 크게 토목(土木)을 일으키니, 서도 사람들이 원망하며 군중을 충동시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부식(金富軾)을 보내어 삼군(三軍)을 통솔, 외로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하였으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여, 사졸(士卒)들이 피곤하고 양식을 허비하며 여러 날이 되도록 오래 끌다가 겨우 이겼다.
인왕(仁王) 같은 현명함으로 이런 일이 있은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대개 묘청(妙淸)이 비기(秘記)와 사술(邪術)을 빙자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사직(社稷)이 편안하여지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롭게 된다.”
하였으니, 인군된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그 편안한 것을 좋게 여기고 위태한 것을 싫어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인왕(仁王)도 이에 혹하게 된 것이다.
사단(事端)이 싹트고 화가 일어나 군사가 연달아 풀리지 않음에 미쳐서는 뉘우치나 소용이 없었다. 비록 묘청을 베었지만 성덕(盛德)에 누(累)가 됨을 면하지 못했다.

의왕(毅王) 이름은 현(睍). 인왕의 장자로 재위 24년.
성품이 총명하였고 엄하며 굳세었는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 왕이 태자로 있을 적에 인왕(仁王)이 훙(薨)하기에 임하여,
“나라 다스리기를 모름지기 승선(承宣) 정습명(鄭襲明)의 말을 들어서 하라.”
하였다.
정습명은 본디부터 정직하였지만, 더구나 중요한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충성된 말을 다 아뢰어 잘못되는 일들을 보충하여 가니, 김존중(金存中)과 정함(鄭諴) 등이 낮이나 밤이나 정습명을 참소하여 제거하려 하므로, 왕이 김존중으로 그 직을 대신하게 했다.
이로부터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권세를 부리고 정직한 선비들은 소원(疎遠)하여지므로, 왕이 더욱 방자하여져 안일한 데에 빠지고 즐겁게 놀이하기를 법도 없이 하여, 처음에는 격구(擊毬)를 하며 정중부(鄭仲夫) 등과 친압하므로 대간(臺諫)이 말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나중에는 사장(詞章)으로써 한뇌(韓賴) 등과 친압하니, 무인(武人)들이 격분하여 원망하나 깨닫지 못하다가, 마침내 한뇌가 난을 불러들이매 몸이 정중부의 손에 죽고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섬멸당했다.
대개 그가 좋게 여긴 바는 시종이 달랐으나, 그 난을 가져옴은 한 가지였다. 그러므로 임금은 좋아하는 바를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왕(明王) 이름은 호(皓). 인왕(仁王)의 셋째아들로 재위 27년.
성품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인자하고 효성스러웠으며, 문학을 좋아하여 자못 경사(經史)를 통했었다.
정중부(鄭仲夫)ㆍ이의방(李義方)ㆍ이의민(李義旼) 등이 의왕(毅王)을 시해(弑害)하고 나라의 권세를 탈취하여 농간함으로부터 명왕(明王)이 하여야 할 계책은, 마땅히 마음에 맹세하기를 스스로 굳세게 하여, 반드시 역적을 토벌하고야 말았어야 했다. 만약 힘이 부족하였다고 한다면, 경대승(慶大升)이, 왕실(王室)의 미약함을 분개하고 강한 신하가 발호(跋扈)하는 것을 미워하여 하루아침에 거의(擧義)해서 정중부 부자를 마치 여우나 토끼 사냥하듯 베었고, 이의민이 머리를 싸매고 쥐처럼 도망하여 시골집에 가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이때는 바로 현량(賢良)한 사람들을 임용하고 기강을 닦고 밝혀 왕실을 다시 경장(更張)했어야 할 시기였는데, 왕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연안(宴安)에 빠져 그의 하는 일이 평상시의 일 없는 때와 같았다.
이의민(李義旼) 같은 자는 다만 하나의 필부(匹夫)이니, 사자(使者) 한 사람을 보내 임금을 시해(弑害)한 그의 죄를 따져 베는 것이 옳은데, 도리어 예(禮)로써 청해다가 갑자기 작위(爵位)를 더 높여 줌으로써, 왕실(王室)을 유린하고 조신(朝臣)들을 학살하며 관작을 팔고 죄인을 팔아먹어 조정의 정사를 흐리게 하고 어지럽혔으니, 그 화가 진실로 너무나 참혹했다.
최충헌(崔忠獻)이 틈을 타 일어나매, 왕이 또한 추방당하게 되고 자손들도 보존하지 못하였는데, 이로부터 권신(權臣)들이 서로 잇달아 국권을 좌우하여 왕실의 멸망되지 않음이 깃술[綴旒]과 같은 지 몇 백 년이었으니, 명왕(明王)이 이 점에 있어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신왕(神王) 이름은 탁(晫). 인왕(仁王)의 다섯째아들로 재위 7년.
신왕은 최충헌(崔忠獻)이 옹립하였는데,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일을 폐지하고 그대로 둠이 모두 최충헌의 손에 달렸고, 왕은 한갓 헛된 자리만 차지하고 신민(臣民)들의 위에 서 있게 되어, 마치 나무로 만든 인형이 사람의 수중에 있는 것과 같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희왕(熙王) 이름은 영(韺). 신왕의 장자로 재위 7년.
천품이 웅걸차고 크며 도량이 크고 깊었다. 이때 최충헌이 국가의 운명을 쥔 지 이미 여러 해가 넘었는데, 널리 당여(黨與)를 배치해 두고 권한을 제 마음대로 하였으니, 희왕(熙王)이 비록 일을 하려고 한들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왕으로서 할 계책은, 마땅히 올바르게 스스로 처신하면서 어진 이를 임용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 왕실(王室)을 스스로 강화하였다면 비록 강성하고 참람한 신하가 있었더라도 그들이 악한 짓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왕이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왕준명(王濬明)의 경박한 계책을 받아들여 한때의 분을 통쾌하게 하려다가 마침내 내쫓기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다.

강왕(康王) 이름은 오(祦). 명왕(明王)의 장자로 재위 2년.
왕위에 있을 때, 무릇 하는 일이 모두 강한 신하에게 견제를 받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 짧았으니 슬픈 일이다.

고왕(高王) 이름은 철(㬚). 강왕의 아들로 재위 46년.
고왕 때는, 안으로는 권신(權臣) 최이(崔怡)ㆍ최항(崔沆)ㆍ최의(崔竩)ㆍ김인준(金仁俊)이 서로 잇달아 국가의 운명을 장악했고, 밖으로는 여진(女眞)과 몽고(蒙古)가 군사를 보내어 침략하지 않은 해가 없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나라 형세가 위급했었다.
왕이 소심(小心)하게 법을 지키고 행동하기를 예(禮)로써 하였기 때문에 권신들이 발호(跋扈)하면서도 감히 범하지 못하였으며, 오랑캐 군사가 침범하여 오면 성벽(城壁)을 견고하게 하고 굳게 지키다가,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어 통호(通好)하고 세자(世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친히 조회하였기 때문에, 비록 강포한 나라들과 이웃을 하였어도 마침내 화호(和好)할 수 있어 백성들과 사직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그가 나라를 오래 다스려서 자손들에게 복을 전하게 된 것이 당연하다.

원왕(元王) 이름은 정(禎). 고왕의 아들로 재위 15년.
원왕이 세자로 있을 때에, 권신(權臣)들이 마음대로 불의(不義)를 자행하되, 상국(上國)이 토죄(討罪)할까 두려워하여 내부(內附)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몽고(蒙古)의 군사가 해마다 국경을 덮치므로 중외(中外)가 소연(騷然)
【안】 구본(舊本)에는 소연(騷然)의 연(然)자 아래에 이(而)자가 있는데, 본문을 상고하여 삭제했다.
하였는데, 왕(王)이 군부(君父)의 명을 받들어 친히 상국에 조회하여 권신들의 발호(跋扈)하는 뜻을 꺾어 복종시킴으로써 드디어 등창이 나 죽게 하였다. 또 아리패가(阿里孛哥)가 헌종(憲宗)의 적자(嫡子)로서 상도(上都)에서 군사를 믿고 잔인한 짓을 하였다. 세황(世皇 원세조를 말한다)이 번왕(藩王)으로서 멀리 양ㆍ초(梁楚)의 교외에 있으면서도 천명과 인심의 거취(去就)를 알고서 가까운 데를 놓아두고 먼데까지 왔다 하여 가상히 여기고, 공주(公主)를 왕자(王子)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하였었는데, 이로부터 대대로 구생(舅甥)의 사이를 맺게 됨으로써 동방(東方) 백성들로 하여금 백 년 동안의 태평한 낙을 누리게 했으니, 또한 가상한 일이다.
다만 삼별초(三別抄)의 내란이 일어나서 주ㆍ군(州郡)을 침해하고 약탈하므로, 상국(上國)에서 장수를 보내어 탐색하기를 끊임없이 하니, 이는 밤낮으로 다스리기를 도모해야 할 때인데, 도리어 연안(宴安)에 빠져 궁녀(宮女)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고혹(蠱惑)하게 하고 환관이 그 명령을 출납(出納)하게 함으로써, 홍자번(洪子藩)의 기롱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안】 우부승선(右副承宣) 홍자번이 간하기를, ‘요사이 친히 정사를 보지 않고, 유사(有司)들의 장주(章奏)를 모두 환관(宦官)에게 맡겨 출납(出納)시키므로 중외(中外)에서 실망하고 있으니, 청컨대 친히 모든 정사를 하여 사람들의 소망을 위로하여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이름은 거(昛). 원왕의 장자로 재위 24년.
세자로 있을 때에 국가의 전고(典故)를 밝게 익혔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아 너그럽고 후덕한 장자(長者)였다.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알았는데, 일찍이 대사성(大司成) 김구(金坵)ㆍ좨주[祭酒] 이송진(李松縉)과 함께 창화(唱和)하여, 문집 《용루집(龍樓集)》 이 세상에 전한다.
충렬왕 부자 때를 당하여, 안으로는 권신(權臣)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독을 부리고, 밖으로는 강성한 적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학정(虐政)에 죽어 가지 않으면 반드시 적들의 칼날에 죽어 가게 되어, 화변이 극도에 달했다.
하루아침에 하늘이 화를 뉘우치게 하여, 권신들을 주륙하고 상국(上國)에 귀부(歸附)하자, 천자(天子)가 가상하게 여겨 공주(公主)를 내려보냈었는데, 공주가 오게 되자 부로(父老)들이 기뻐하며 서로 경하하기를,
“백 년 동안의 난리 끝에 다시 태평시대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 않았다.”
하였다.
또한 왕이 재차 경사(京師 중국 서울)에 조회하고 동방(東方)의 폐단을 진주(陳奏)하였더니, 제(帝)가 윤허하고는 관군(官軍)을 소환하여 동방 백성들이 안정되었으니, 이때야말로 왕(王)이 일을 할 수 있는 때였다.
어찌하여 교만한 마음이 갑자기 생겨 놀이와 사냥에 빠져 응방(鷹坊)을 확장하였고, 악한 소인배 이정(李貞)으로 하여금 주ㆍ군(州郡)을 침해하여 학대하게 하였을까? 연락(宴樂)에 빠져 용루(龍樓)에서 창화(唱和)하고 음란한 중 조영 祖英 구본(舊本)에는 영(英)이 윤(倫)으로 되었다. 등을 좌우에 두고 친압하매, 공주(公主)와 세자(世子)가 말려도 듣지 않고, 재상과 대간이 논해도 듣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좌우의 참소를 지나치게 믿어 그의 적자(嫡子)를 폐하고 그 조카를 세우려고까지 하였다.
【안】 왕이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폐하고 조카 서흥후(瑞興侯)로 후계(後繼)를 삼으려고 하니, 찬성사(賛成事) 최유엄(崔有渰)이 울며 간하자 드디어 그만두었다.
그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비록 전고(典故)를 밝게 익히고 독서하여 대의(大義)를 알았다고 하지만,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아, ‘시작이 없지는 않으나 결과가 있기 어렵다.’고 한 것이 충렬왕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충선왕(忠宣王) 이름은 원(謜)인데 몽고(蒙古) 이름으로는 익지례보화(益知禮普化)이다. 충렬왕의 장자로 재위 5년.
성품이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했다. 16세에 원나라에 들어가니 세조 황제(世祖皇帝)가 보고서 무슨 글을 읽느냐고 묻자, 정가신(鄭可臣) 등에게서 《효경》ㆍ《논어》ㆍ《맹자》를 배운다고 대답하니, 제(帝)가 기뻐했다.
대덕(大德 원성종(元成宗)의 연호) 2년에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여, 어진 이를 임용하고 사특한 자를 내쫓으며 이익될 일을 일으키고 폐단을 개혁하여, 숙위(宿衛)를 불러들인 지 10년이었다.
대덕(大德) 11년에, 승상(丞相) 달천(達穿) 등과 무종(武宗)을 맞이하였는데, 그 공로로 심왕(瀋王)에 봉작(封爵)되고, 지대(至大 원무종(元武宗)의 연호) 원년에 충렬왕(忠烈王)이 훙(薨)하자 분상(奔喪)한 지 10여 일 만에 왕경(王京)에 이르러 상복(喪服)ㆍ빈소(殯所)ㆍ염습(斂襲)하는 것을 모두 예(禮)에 맞게 했다.
그가 세자로 있을 적에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입시(入侍)하면서 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 등 제공(諸公)과 교유하면서, 간혹 조정 정사를 참여하여 들었기 때문에 그의 의논이 볼만한 바가 있었고, 그가 즉위하여서는 상국(上國)의 제도를 피하여 벼슬 명칭을 고치고 바꾸었으니, 사대(事大)하기를 예(禮)로써 한 것이요, 전부(田賦)를 바로잡고 염법(鹽法)을 세웠으니 근본되는 바를 안 것이다.
다만 제후(諸侯)의 자리를, 안으로는 선군(先君)의 전함을 받았고 위로는 천자(天子)의 명을 받은 것이어서 하루도 비울 수 없는데, 왕이 이미 제(帝)의 명으로 그 자리를 회복하고도 연경(燕京)에 체류하고 즉시 나라로 가지 않으매, 따라간 신하들이 돌아가기를 생각하여서 서로 모함하기를 도모하게 되었고, 나라 사람들은 공궤(供饋)의 노고를 감당하지 못했으니, 진실로 이미 잘못되었다.
원나라 역시 싫증이 나 왕이 귀국하였으면 하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에 그 자리를 세자(世子)에게 사양하였고 또한 조카 호(暠)로써 세자를 삼아, 부자 형제간에 마침내 시기와 혐의를 갖게 됨으로써, 그 화가 여러 대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다.
계책의 착하지 못함이 이와 같았으니, 토번(吐蕃)으로 귀양간 것이 당연한 일이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충숙왕(忠肅王) 이름은 도(燾). 충선왕의 둘째아들로 재위 25년.
성품이 엄숙하고 굳세며 침착하고 묵직했으며, 총명했고 정결한 것을 좋아했는데, 제술(製述)을 잘하고 예서(隸書)에 솜씨가 있었다.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ㆍ충혜(忠惠) 4대를 내려오는 동안에 부자끼리 서로 해치되, 심지어 천자의 조정에까지 가서 송사하여, 천하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또 부자 사이는 천성으로 타고난 지친(至親)으로서 효도는 온갖 행실의 으뜸이며 정사를 하는 근본인데, 근본이 이미 틀렸으니 그 나머지 것은 비록 말한 것이 있더라도 족히 보잘 것이 없는 것이다.
충숙왕이 말년에는 나라일을 내치고 교외(郊外)에 나가 있으며, 박청(朴靑) 등 세 내시를 신임하였으니 혼미와 잘못이 심했다. 그러나 임금으로서 먼저 인륜을 무너뜨렸으니, 이런 것은 또한 책망할 것이 못된다.

충혜왕(忠惠王) 이름은 정(禎). 충숙왕의 장자로 재위 7년.
충혜왕은 영특하고 예리한 재질을 착하지 못한 것에 사용하여, 악한 소인배들과 친압하며 방탕한 짓을 마음대로 하여, 안으로는 부왕(父王)에게 책망을 받고 위로는 천자에게 죄를 얻어 그 몸이 나그네로 억류되어 도로에서 죽은 것이 당연하다.
비록 일개 노신(老臣) 이조년(李兆年)이 간절하게 말하였지만 그 말을 듣지 않는데야 어찌하겠는가?

충목왕(忠穆王) 이름은 흔(昕). 충혜왕의 장자로 재위 4년.
어려서 즉위하였으나 성품이 총명하여 듣고 판단하기를 잘했다. 그러나 모비(母妃)가 왕성한 나이로 중간에 있었고, 신예(辛裔)ㆍ강윤충(康允忠)ㆍ배전(裵佺)ㆍ전숙몽(田淑蒙) 등이 서로 잇달아 권세를 부리며 위엄을 부리고 복을 내리기를 마음대로 하였다.
정승 왕후(王煦)ㆍ김영돈(金永暾) 등이 제(帝)의 명을 받아 옛 폐단을 정돈하여 다스리려 했으나, 마침내 권신(權臣)들에게 모함을 당하였고, 왕 역시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충정왕(忠定王) 이름은 저(㫝). 충혜왕(忠惠王)의 차자로 재위 3년.
충목왕과 충정왕은 모두 어려서 즉위했는데, 덕녕희비(德寧禧妃)가 높은 어머니의 처지로서 안에서 권세를 부리고, 간신들과 외척(外戚)들은 밖에서 권세를 부리게 되니, 두 인군이 비록 총명한 자품이 있은들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충정왕 때를 당해서는, 강릉군(江陵君)구본(舊本)에는, 능(陵)자가 영(寧)자로 되어 있다. 강릉군(江陵君)은 곧 공민왕(恭愍王)이다. 이 숙부(叔父)로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고, 또한 상국(上國)의 원조가 있었는데도, 제윤(諸尹)
【안】 제윤은 희비(禧妃)의 친족임.
들이 이것을 생각하지는 않고 당을 만들어 욕심을 부림으로써 화를 양성하여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불행하게도 독살(毒殺)당하게 했으니, 슬픈 일이다.

공민왕(恭愍王) 이름은 기(祺). 충숙왕(忠肅王)의 차자로 재위 23년.
천품이 엄숙하고 묵직하여 동작이 예법에 맞았고, 성격이 자못 총명하여 인자하고 후덕하므로, 사람들의 신망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다.
즉위하게 되자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하므로 중외(中外)에서 크게 기뻐하여 태평한 시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으면서부터는 지나치게 슬퍼하며 지기(志氣)를 상실하여, 정사를 신돈(辛旽)에게 위임하고 훈신(勳臣)과 현자(賢者)를 내쫓거나 죽이며, 크게 토목(土木)을 일으켜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완동(頑童)을 친압하여 음란하고 외설한 짓을 마구 부렸다.
말년에는 시기가 포악해지고 기탄이 극성스러워 술에 취하기를 때없이 하고 좌우 사람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또한 후손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이미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을 삼아 장차 뒤를 이으려 하다가, 외부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비밀히 신임하는 신하로 하여금 후궁을 욕보이게 하고서 그가 임신하게 되자 그 사람을 죽여 말이 나지 않게 하려 하였다. 패란(悖亂)이 이러하였으니 망하지 않으려 한들 될 수 있었겠는가?

신우(辛禑) 재위 14년.
신우의 아명(兒名)은 모니노(牟尼奴), 아비는 신돈(辛旽)이요, 어미는 신돈의 비첩(婢妾) 반야(般若)이다.
공민왕(恭愍王)이 후손이 없으매, 신돈을 베고 신우를 태후(太后)의 궁에서 양육하여 자기의 아들이라 하며 강녕대군(江寧大君)으로 봉했는데, 공민왕이 죽자 이인임(李仁任)이 신우를 세웠다.
진(秦)나라 정(政)과 진(晉)나라 예(睿)의 일이 자취가 의아스러웠고, 여씨(呂氏 여태후(呂太后))에 이르러서는 남의 아들을 세워 혜제(惠帝)의 후사를 삼으려 했는데 주문공(朱文公 문공은 주희(朱熹)의 시호)이 직필(直筆)로 특서(特書)하기를 조금도 가차없이 하였으니, 그는 천하와 후세를 위하여 경계하기를 엄하게 한 것이다.
공민왕이 일찍이 아들이 없음을 근심했으면 마땅히 종실(宗室) 중에 현명한 사람을 구하여 대를 이어야 할 것인데, 바로 신돈의 아들을 데려다가 남모르게 궁중에서 양육하여 자기 뒤를 이을 계책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몸도 보존하지 못하였고, 신우는 또한 황음(荒淫)하고 포악하여 패가망신하였다.
아, 신우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거니와, 공민왕은 또한 무슨 마음이었을까?

공양왕(恭讓王) 재위 3년.
휘(諱)는 요(瑤)이니 신왕(神王)의 7대 손자이다. 처음에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으로 봉(封)했었는데, 명(明)나라 홍무(洪武 태조의 연호) 22년(1389) 11월 기묘(15일)에 우리 주상(主上 조선 태조)께서 심덕부(沈德符)ㆍ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ㆍ설장수(偰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조준(趙浚)ㆍ박위(朴葳)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정책(定策)하여 공민왕의 정비(定妃)에게 고하고 왕을 받들어 즉위케 하였다.
아, 거짓 왕 신우가 왕위를 도둑질하여 차지한 이때는 이미 왕씨(王氏)가 없었는데, 16년이 지나도록 오랜 세월을 신우는 주색에 빠지고 포악한 짓을 하였으며, 신창(辛昌)은 또한 혼매(昏昧)하고 유약했다.
하늘이 미친 듯이 날뛰는 철부지로 하여금 명기(名器)를 차지하여 더럽히게 하지 않고 덕 있는 사람을 기다려 주려고 하여, 그 뜻이 소연(昭然)하매 충신들과 의사(義士)들이 기필코 왕씨(王氏)의 후손을 구하여 세우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공양왕이 헌석(軒席) 위를 떠나지 않고 일어나 보위(寶位 왕위)에 오르매, 왕씨의 제사가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왕씨의 나라가 이미 망했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제는 마땅히 공 있는 사람과 어진 이에게 정성을 다하며 충직한 말을 받아들이고 간하는 말을 용납하여, 서로 함께 유신(維新)의 정사를 도모하여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직 인아(姻婭)간의 감정이 섞인 호소와 부시(婦寺)들의 사사로운 간청만 그저 들어 주고 신임하였으며, 원훈(元勳)들을 소외하여 꺼리고, 충성되고 선량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해치며, 정사가 패란(悖亂)하여, 인심이 저절로 이탈되고 천심(天心)이 저절로 가버려, 존귀한 나라 임금으로서 필부(匹夫)처럼 달아나게 되어, 왕씨의 제사가 사라지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君道] 

 







太祖姓趙。名匡胤。宣祖第二子。以火德王。都汴。在位十七年。
帝卽位之初。長慮却顧。以爲唐末以來五十年間。帝王凡八易姓。戰鬪不息。生民塗炭。皆由藩鎭太盛故也。於是。以知州易方鎭。命文臣知州。各置通判。又命朝臣彊幹者出爲知縣。以分節制之權。而革藩鎭之弊。又以從容杯酒之間。解諸將兵權。於是。藩鎭不可除之痼疾。一朝而解矣。其所以削平僭亂。崇重儒術。制兵法。撫士卒。理財賦。恤刑獄。抑奢侈者。人君之道備矣。究其所以然者。豈無所本哉。帝嘗聞道理最大。此一言足以爲植國之根本。而其正心修身之學。實有非他人所能企及者。嘗坐寢殿。令洞開諸門。皆端直軒豁。無有壅蔽。因謂左右曰。此如我心。小有邪曲。人皆見之矣。朱文公稱太祖不爲言語文字之學。而其方寸之地正大光明。直與堯舜之心合。誠哉。是言也。佗如事周太后如母。養少帝如子。逮以壽殂。保全功臣。俾皆老死牖下。其忠厚之至。有可言者矣。至於遵母后遺敎。不以天下私其子。竟以授其母弟。孝友之道又何以加於此哉。吁。太祖吾無間然矣。

太宗炅。宣祖第三子。在位二十二年。
帝踐阼未數年。陳洪進舊本脫進字 表獻漳泉。錢俶表獻吳越。劉繼元以河東降。可謂繼太祖之志而成混一之功矣。帝自卽位之初。首重監司之權。以制藩鎭。置三司使。以理財賦。命宰相則必以正而不以邪。命參政則竟爲他日之賢相。重臺諫。作敢言之風。置經筵。遠姦邪之習。謹循吏之選。嚴贓吏之誅。貢擧則罷勢家以取孤寒。愛民則作戒詞以遺州郡。寬稅限。禁淫刑。賑飢困。撫流亡。恤刑獄。崇儒術。似兹善政。史不絶書。可謂太平有道之令主矣。所可惜者。太祖之崩。不能無疑。德昭之死。又非其罪。廷美之卒。由於趙普。逮太祖宋皇后崩。群臣不爲成服。其於人倫之間。不能不有歉焉耳。至於儲貳之建。決於寇準之一言。爲天下得人。何以尙此。

眞宗恒。太宗第三子。在位二十五年。
首詔學官。講書講易。可謂知以聖學爲急者矣。嚴牧守之選。崇節儉之化。開敢言之路。絶貢奉。禁獻珍禽奇獸及諸祥瑞。修貢擧。建學校。恤民隱。皆視祖宗家法。又從而充廣之。可謂賢主也歟。若夫西北二邊之事有可言者。於西則待以姑息而失事機。於北則將帥有擁兵不進者。有喪失師旅者。貸之而不斬。宋之武功不競。自軍法不嚴始。仁厚信有餘。國勢不期而漸弱矣。及契丹再入寇。京師震恐。群議紛紜。帝用寇準策。不爲浮議所惑。駕幸澶州。契丹駭怖。乞和之不暇。虜旣退。自是不敢復寇邊。所恨者。帝不悟欽若之讒。待準浸衰。竟至罷相。又聽其請。封禪天書之事乃起。嗚呼。眞宗之相。前有呂端,張齊賢,李沆,呂蒙正,畢士安,寇準。皆君子也。後有王欽若,陳堯叟,馮拯,丁謂,曹利用。皆小人也。吁。以數君子成之。不見其有餘。以一小人敗之。不見其不足。相道有關於君德之成敗如此夫。

仁宗禎。眞宗第六子。在位四十二年。
帝天性仁孝。終喪有哀慼容。不忍預宴樂。帝未有嗣。曹后勸選宗子養宮中。於是以皇兄允讓之子宗實養於后所。是謂英宗。宋賢后以曹氏稱首。亦帝之能以剛制欲。無閨門昵比之私。有社稷長久之慮也。帝當守文之時。承平日久。邊境少事。及西夏叛。以范仲淹爲陝西轉運使。夏人相戒曰。毋以延州爲意小。范老子胸中自有數萬甲兵。契丹乘間遣使索地。以富弼使契丹。責以大義。契丹主服之。人謂弼不屈虜庭。乃平日學問之功也。然弼臨行謂帝曰。主辱臣死。臣敢愛死。此所以不屈之本也。夷簡罷。富,杜,韓,范在二府。王素,歐陽脩,蔡襄知諫院。宋之得人。斯爲盛矣。未幾姦黨交惡。百計毀之。仲淹,弼,脩等相繼罷去。自此正人再逐。慶曆之政衰矣。然執中雖以剛愎。相及罷。遂相文彥博,富弼。搢紳相慶。其後琦相脩副而社稷之託琦卒以身任之。雖其間用捨不常。而得人之效亦可見矣。嘉祐初。元帝感風眩。彥博召內臣史志聰問帝起居狀。對以宮禁事不敢洩。叱之曰。帝暴疾。繫宗社安危。不令宰相知上起居。欲何爲耶。自今疾勢增損。宜一一見白。自是禁中事。宰相無不知。帝不能省事。二府議定。卽稱詔行之。此古者大臣統近習總百官之職業也。帝得疾。中外憂之。微彥博盡忠調護。使姦庸處之。禍有不可測者。初歐陽脩,吳奎,呂景初等議立皇子。上之疾也。宰相亦勸立嗣。可之。定議立宗實。詔稿已具。疾瘳中寢。范鎭曰。天下事有大於此乎。見琦曰。不及今定議。異日夜半。出寸紙以某人爲嗣則莫敢言矣。琦乘間極言。遂降詔立宗實爲皇太子。明年二月帝。崩。仁宗可謂至仁之主。大辟疑必讞上所活歲以千計。不食燒羊則曰。可不忍一夕之飢而啓無窮之殺。或獻蛤蜊則曰。一下筯費錢二十八千。吾不敢也。北使言加兵高麗則曰。百姓無辜屠戮。遂寢兵。內出通天犀。救京師之疫曰。朕豈貴異物而賤百姓哉。或以蘇轍對策過直請黜之。曰。求直言而棄之。天下謂何。又好學崇儒。扶植斯道。上承一祖二宗之心。下開濂洛道學之懿。尤爲盛美。經筵謂侍臣曰。朕盛夏未嘗少倦。但恐卿等勞耳。詔州縣皆立學。於戴記中表出中庸大學二篇。以勵儒臣。是已開四書之端矣。噫。若帝者。存心制治。粹乎無以議矣。

英宗曙。仁宗從兄濮王第十二子。在位四年。
帝初立。以憂危得疾。擧措失常。詔請皇太后權同聽政。內侍任守忠等。造言交間。宰相韓琦力救之。明年五月。上康復。琦取十事稟上。裁決悉當。琦卽詣東殿覆奏。太后每事稱善。琦請太后撤簾。竄任守忠。正其交間之罪。帝自臨政以來。所用皆君子。處宰執之地者首得琦。次得弼。與參政之列者前有脩後有槩。居經筵則有呂公著,劉敞。擢諫職則唐介爲中丞。呂誨爲知雜。范純仁,呂大防爲御史。宋朝用君子之盛。惟治平爲然。可以見帝知人官人之道矣。

神宗頊。英宗太子。在位十八年。
帝以大有爲之資。欲變法創治。以強朝廷之勢。首用王安石變新法。其議新法不便者。如司馬文正,趙淸獻,范忠文,程明道,歐,蘇二文忠諸君子。皆爲之斥罷。其所見用者。皆新進生事之徒。天下不勝其弊。莫不怨之。安石雖退。其徒蔡京,呂惠卿,章惇,蔡確等相繼用事。至于靖康。禍亂極矣。嗚呼。安石毋庸論也。當神宗朝。濂溪周子倡明道學。兩程夫子從而和之。道學之盛益大以肆。上以續孔孟千載不傳之祕。下以開後人萬世無窮之學。實光前而絶後也。同時如康節邵子,橫渠張子,司馬溫公。又爲理學之淵藪。卓卓乎其不可及者。嗚呼。使天不生安石於其間。而使諸君子以斯道相天子。以成就其大有爲之志。吾知其躋世道於唐虞之盛矣。奈之何其不然也。惜哉。

哲宗煦。神宗太子。在位十五年。
帝卽位。太皇太后同聽政。甫十歲。臨朝莊嚴。首相重臣司馬光,呂公著。先後爲左僕射。罷新法十餘事。朝野喜之。元祐八年已前。號稱善治。其所設施擧措。皆出於宣仁聖烈皇后。而司馬公,呂公等贊成之力也。後楊畏等上言。神宗更法。以垂萬世。乞早講求以成紹述之。畏疏章惇,惠卿等。溫伯,李淸臣等乞召惇爲相。納之。淸臣中書侍郞。溫伯左丞。紹述之說。淸臣唱之。溫伯和之。群小用事。貶逐司馬光等三十三人。至誣宣仁皇后潛圖廢立。欲廢之。噫。安石變法之禍。止於一時。而引進小人之禍。終於一代。人知汴都亡於徽宗之宣和。不知已兆於哲宗之紹聖也。悲夫。

徽宗佶。神宗第十一子。在位二十六年。
卽位。首相韓忠彥。復鄒浩官。范純仁以下二十餘人並收敍。追復司馬光文彥博等官三十三人。召范純仁安。置章惇罷蔡京。亦一代之賢君也。惜其雖相忠彥而參以曾布。布諭趙挺之建議紹述。自此擊元祐舊臣而國論一變矣。京凡四入相首尾二十餘年。小人相繼秉政。而蔡京,王黼又小人之尤者也。其於衆君子也。排擯追仇。無所不至。再奪司馬光等官五十餘人籍。元祐末上書人。刻御書黨籍於端門凡一百九十人。又竄任伯雨等一十四人。竄黃庭堅,程頤除名。迨純仁,蘇軾,程頤,商英,陳瓘,安世諸公卒而善類凋盡。擧朝無一君子。純是小人。而蔡京實爲之首。時承平旣久。帑庾充溢。京倡爲豐亨豫大之說。專以淫侈荒亡導其君。土木神仙之事以次而作。朱勔起花石綱而東南爲之大困。童貫廣宮室而期門之事起。又作萬歲山。竭國力六年而後成。崇尙道敎。以帝王之尊。加道君之號。何以異於梁武佞佛哉。夫小人道長則宦官當權。開邊生事而盜賊夷狄之禍亦以次而起。必然之勢也。至以宦者童貫爲元帥。與金約夾攻遼。遼地未得而金兵已犯闕矣。噫。觀紹聖以來群凶接跡。以掃滅善類。其意不過欲報怨耳。不過懼其復進奪己權寵耳。亦不必如是之酷也。然其心本生於患失之私。而其禍乃至於喪邦之慘。哀哉。故君子之存心於公私之辨。不可不謹。

欽宗桓。徽宗太子。在位二年。
帝當金兵犯闕之時。卽位於禍亂已極之餘。信不可爲矣。而未嘗無尙可爲之機。當是時。李綱議定城守策。以忠義勸勵士卒。人心差強。諸道勤王之兵尙有數百萬。煕河經略姚古。秦鳳經略种師道等兵至。號二十萬。師道入見曰。彼不知兵。豈有孤軍深入人境而能善歸乎。此非可爲之機歟。奈何李邦彥專主和議。帝亦是之。邦彥恐綱,師道等成戰功。因其小敗。百計毀之。虜需犒軍金銀牛馬幣帛。割中山,太原,河間三鎭。親王爲質。康王構如北京。所求皆與之。凡圍京城三十三日。旣得三鎭書及親王卽去。綱,師道等請臨河阨關要擊敗之。邦彥不聽。令諸將護出境。非金能全師以歸。乃國賊邦彥曲全之。以善其歸也。綱度金虜必再至。上備邊禦敵八事。諫議大夫楊時亦以爲言。不聽。邦彥雖罷。綱亦出外。金虜再至。不交一戰。京城陷二帝虜。諸王公主后妃姬嬪以至宰執官僚數千餘人。俱爲所獲。至立異姓易國號。嗚呼痛哉。

高宗構。徽宗第九子。都臨安。在位三十六年。
二帝北狩。卽位於南京。首召李綱爲右僕射。則相得其人矣。命宗澤留守東京。則將又得其人矣。二公志在恢復。而潛善,伯彥等志在退保。水火之性固已不同。而帝則思慕父母之念。不能勝其畏惰偸安之心。此汪黃之讒易入。而綱,澤之計不行也。其後秦檜以請還梓宮爲辭。首倡和議。取位宰相。嗜利之徒從而和之。姦佞得志。忠良擯戮。武備廢弛。士氣沮喪。雖以張浚之忠義。岳飛之武勇。不能成恢復之功。卒至浚出而飛戮。嗚呼痛哉。惟其因婁寅亮之一言。以太祖之後爲嗣。當內禪之時。揖遜之擧。曾無係戀。太祖在天之靈。可以慰矣。而其所以爲中興治國平天下之005_502c根本者。不在是歟。

孝宗眘。太祖之後秀王子。在位二十七年。
卽位之初。張浚入對。除江淮宣撫使。帝曰。舊聞公名。今朝廷所恃惟公。浚曰。人主以務學爲先。人主之學。以一心爲本。一心合天。何事不濟。所謂天者。天下之公理而已。浚見上英武。力陳和議之非。於是加浚少保。時虜將等屯虹縣靈壁。浚謂必爲邊患。當及時掃蕩。浚入奏。下詔親征。命浚兼都督荊襄。會浚將顯忠,宏淵不相能。師潰。浚上疏待罪。上下罪己之詔。貶浚官。改宣撫使。上召浚子栻。謂之曰。朕待魏公有加。不爲浮議所惑。可以見帝委公之篤矣。未幾。金師移書議和。求唐,鄧,海,泗四州。宰執急於求和。帝召浚至行在。爲右相。仍都督。竟不以四州與虜。觀此則帝復讎之志。何其決也。不幸思退等力主和議。百計毀浚。浚一出而幸災者蜂起。歸罪於浚。思退諭虜以重兵脅和。周葵,王之望,洪遵無非襲檜之所爲。一浚豈能勝百檜哉。孝宗恢復之志。雖不得遂。而隆興,乾淳之治則不可誣矣。節用愛民。好學勤政。聽言好諫。重道崇儒。疏斥宦官。嚴飭贓吏。帝王衆善。能兼有之。眞宋室之賢主。獨其末年。陳賈請禁僞學。以攻朱熹。使邪正混淆。貽禍滋蔓。深爲可惜也。

光宗惇。孝宗第五子。在位五年。
帝紹煕改元之次年。感疾不豫。時留正,葛邲左右相。趙汝愚同知。朱熹安撫淮南。壽皇崩。帝疾不能執喪。中外憂懼。汝愚白太皇太后。奉皇子嘉王卽位。人以爲光宗以疾亟立寧宗。汝愚同姓之卿之力居多焉。

寧宗擴。光宗長子。在位三十年。
帝以趙汝愚爲相。朱熹爲講官。君子在側。薦進善類。相與養成君德。修明政事。可庶幾矣。奈何韓侂胄以一小人。自以爲有定策功。夤緣秉權。逐汝愚出朱熹。而善類相繼竄逐。嗚呼。斯道之不幸歟。抑宋之不幸也。

理宗。寧宗次子。在位四十年。
帝卽位臨御四十年。表章理學。使濂洛,紫陽之道。大明於天下。傳之後世。廟號曰理。固其宜也。然國勢積弱之餘。或者謂諸儒理學。竟莫能以扶顚持危。不一再傳而遂亡。嗟夫。周公沒。聖賢之道不行。孟軻死。聖賢之學不明。孔孟能使道之明。猶不能必道之行也。況周,程之在煕寧,元祐。朱文公之在乾淳,慶元。以至眞文忠之在端平。未嘗略得君而行政也。小人盡接005_503c跡而久於柄用。諸儒或早謝而終以阨窮。烏可以道之不行。國之不競者。責之哉。

度宗壡。理宗姪福王子。在位十年。
權姦柄國。窮饕極惡。迄于幼主德祐之元年。天命有歸矣。



太祖鐵木眞。姓奇渥溫氏。國語曰成吉思。立二十二年。
帝旣立。功德日盛。諸部皆慕義來降。再征西夏。自將南伐。分兵三道並進。右軍循太行而南。左軍遵海而東。帝自將中軍取燕南山東河北五十餘郡。命木華黎等取金未下州城。遂親征西域。帝深沈有大略。用兵如神。故能滅國四十。遂平西夏定西域。

太宗窩闊台。太祖第三子。立十三年。
帝立。自將南伐六年而金亡。七年。伐宋。帝有寬弘之量。仁恕之心。量時度力。擧無過事。華夏殷富。庶民樂業。行旅不齎糧。時稱治平。

定宗貴由。太宗長子。立三年。
立三年而崩。自乃馬眞氏稱制以來。法度不一。內外離心。而太宗之政衰矣。

憲宗蒙哥。睿宗拖雷長子。立九年。
少從征伐。屢立奇功。剛明雄毅。沈斷寡言。不樂燕飮。不好侈靡。

世祖忽必烈。睿宗第四子。國語曰薛禪。立三十五年。
仁明英睿。事太后至孝。尤善撫下。度量弘廣。知人善任使。信用儒術。愛養民力。每遇災傷。免租賑飢。惟恐不及。用能以夏變夷。混一區宇。立經陳紀。所以爲一代之制者。規模宏遠矣。

成宗鐵穆耳。世祖之孫裕宗眞金第三子。國語曰完澤篤。立十三年。
承天下混一之後。垂拱而治。可謂善於守成。惟其末年。連歲寢疾。凡國家政事。內則決於宮閫。外則委於大臣。然其不致於廢墜者。則以去世祖未遠。成憲具在故也。

武宗海山。順宗答剌麻八剌之長子。國語曰曲律。立五年。
承富有之業。慨然欲創治改法以有爲。故其封爵太盛而遙授之官衆。錫賚太隆而應賞之恩薄。至元大德之政。於是稍有變更云。

仁宗愛育黎拔力八達。順宗次子。國語曰普顧篤。立九年。
天性慈孝。聰明恭儉。通達儒術。亦留心釋典。嘗曰。明心見性。雖以佛敎爲先。然修身治國。儒道爲大。又曰。儒者之所以可尙者。以能維持三綱五常之道耳。平居服御質素。澹然無欲。不事遊畋。不喜征伐。不崇貨利。事皇太后終身不違顏色。待宗親勳舊。終始以禮。大臣親老特加恩賚。有司奏大辟。每慘惻移時。其孜孜爲治。一遵世祖成憲云。

英宗碩德八剌。仁宗嫡子。國語曰格堅。立三年。
自卽位勵精圖治。委任丞相拜住。釐革弊政。以御史大夫鐵失貪汚不法。議誅之。事洩遂爲其所弑。

泰定帝也孫鐵木兒。顯宗甘麻剌長子。立五年。
鐵失弑英宗。迎立晉邸。帝立卽誅鐵失。以正弑逆之罪。

明宗和世㻋。武宗長子。國語曰護都篤。立八月。
卽位八月暴崩。

文宗圖帖睦爾。武宗次子。國語曰禮牙篤。立五年。
立五年而崩。

寧宗懿璘質班。明宗第二子。立一月。
在位四十三日。年七歲而崩。

順帝妥驩帖木兒。明宗長子。立三十六年。
沈湎酒色。不恤政事。在位三十六年。而天命歸乎大明矣。

高麗國

太祖王建。金城太守隆之長子。在位二十六年。
幼而聰明。龍顏日角。寬厚有濟世之度。梁貞明四年。諸將以弓裔無道。奉太祖卽位。其設施也。好生惡殺。信賞必罰。推誠功臣。存恤疲民。甄萱父子相夷則伐而取之。金傅君臣來附則禮以待之。以契丹之強而侵伐與國則絶之。以渤海之弱而失地無歸則撫之。屢幸西都。親巡北鄙。其志蓋欲復東明舊境而後已。草創更始。雖未遑於禮樂。而其宏規遠略。深仁厚澤。固已培養五百年之國脈矣。按此以下至恭讓王。採用李齊賢贊及史臣贊。

惠王武。太祖長子。在位二年。
智勇絶倫。從討百濟有功。太祖益重之。晉天福八年五月。奉遺命卽王位。王規譖王兩弟。王不致之罪。顧使居左右。其免於袖刃壁人之謀。可謂幸也。按舊本。謂下脫幸字。攷本文塡補。 時去太祖棄代甫耳。規之不義而得衆。已能如漢魏之曹馬耶。其未有以竄殛之。何也。嗚呼。小人之難遠也如此。其可不戒哉。

定王堯。太祖第二子。在位四年。
性好佛多畏。晉開運二年九月。受惠王遺命卽位。王以人君之尊。步至十里所浮屠之宮。以藏舍利。又以七萬石穀一日而分賜諸僧。一遭天譴。喪心生疾。所謂君子求福不回者。亦嘗聞其說耶。疾旣大漸。能以宗社付之親弟。不使如王規者覬覦於其間。是亦可 按舊本。可下有謂字。而考本文删去。 嘉也已。

光王昭。太祖第三子。在位二十六年。
生而岐嶷有大量。及卽位。禮待臣下。明於聽斷。恤孤寒。重儒雅。王之用雙冀。可謂立賢無方乎。冀果賢也。豈不能納君於善。不使至於信讒濫刑耶。若其設科取士。有以見光王之雅有用文化俗之意。而冀亦將順以成其美。不可謂無補也。惟其倡以浮華之文。後世不勝其弊。取士用詩賦論三題。不策問時政。觀其文章。髣髴唐之餘弊云。

景王伷。光王長子。在位六年。
溫良仁厚。不好嬉遊。光王末年。讒邪交興。獄囚盈溢。至置假獄。人人危懼。王雖在東宮。亦見疑阻。及卽位。悉取前朝讒訴之書焚之。中外大悅。王作田柴之科。雖有疏略。亦古者世祿之意也。至於九一而助。什一而賦。與夫所以優君子小人者則未之及也。後世屢欲治之。終於苟而已矣。蓋不以經界爲急。撓其源而求流之淸者。何可得也。惜乎。當時群臣。未有以孟子之言。講求法制。啓迪而行之也。

成王治。太祖第七子。在位十六年。
天姿嚴正。器宇寬洪。景王寢疾傳國。辭不獲卽位。立宗廟定社稷。贍學以養士。覆試以求賢。勵守令恤其民。賚孝節。美其俗。每下手札。詞旨懇惻。而以移風易俗爲務。及乎契丹意在呑噬。遣將來侵。夙駕西都。進兵安北。按安北。今安州。 卽寇準澶淵之策也。未老而樹繼嗣。爲國家之慮長矣。臨絶而惜肆赦。達死生之理明矣。所謂有志而可與有爲者非耶。嗚呼賢哉。

穆王誦。景王長子。在位十二年。
性沈毅善射御。千秋太后淫亂。通於金致陽生子。王不能防閑於初。子母俱罹其殃。社稷幾至於亡。嗚呼。宣讓按宣讓。穆王諡號。 之不幸也。抑非不幸也。

顯王詢。太祖之孫。在位二十二年。
幼聰悟仁惠。敏於學。工詞翰。及卽位。和好強國。偃革修文。薄賦輕徭。登崇俊良。修政公平。置民安輯。內外底寧。農桑屢稔。侍中崔冲所謂天之所興。誰能廢之者。豈不然哉。

德王欽。顯王長子。在位三年。
生而岐嶷。剛斷有執。居喪能盡子之孝。爲政不改父之道。任用舊臣徐訥,王可道,崔冲,黃周亮之儔。朝廷無欺蔽而民安其生。尊號曰德。不亦宜乎。

靖王亨。德王母弟。在位十二年。
仁孝寬洪不拘小節而英睿果斷

文王徽。顯王第三子。在位三十七年。
幼而聰哲。及長好學善射。志略宏遠。寬仁容衆。卽位。躬勤節儉。進用賢材。愛民恤刑。崇學敬老。名器不假於匪人。威權不移於近昵。雖戚里之親。無功不賞。左右之愛。有罪必罰。宦官給使。不過十數輩。內侍必選有功能者充之。亦不過二十餘人。宂官省而事簡。費用節而國富。大倉之粟。陳陳相因。家給人足。時號太平。獨其徙一畿縣作一僧寺。按文宗創興王寺于德水縣。移縣于楊川。翰林崔惟善力諫不從。 侈峻宇於宮闕。侔崇墉於國都。黃金爲塔。百物稱是。殆將比擬蕭梁而不知。欲成人之美者歎息於斯焉耳。

順王烋。文王長子。在位四月。
遭文考之喪。哀毀成疾。四月而逝。雖於聖人之制有所過焉。其愛親之誠則至矣。

宣王運。文王第三子。在位十一年。
幼而聰慧。舊本作惠 及長。孝敬恭儉。識量宏遠。博覽經史。尤工製述。

獻王昱。宣王元子。在位一年。
性聰慧。舊本作惠 九歲好書畫。凡所見聞。靡嘗遺亡。

肅王顒。文王第三子。在位十年。
幼而聰明。及長。孝敬 舊本作經 勤儉。雄毅果斷。六經子史。無不觀覽。文王愛之。常曰。復興王室。其在爾乎。由藩侯紹大統。智以定亂。仁以底平。而有子若孫。繼繼承承。以至于四百餘年。是亦天也

睿王俁。肅王長子。在位十七年。
深沈有度量。雅好文學。嘗在東宮。禮接賢士。敦行孝弟。及乎卽位。宵旰憂勤。勵精求治。但志存拓境。僥倖邊功。仇隙未已。歆慕華風。信用胡宗朝。頗惑其言。未免有所失矣。然知用兵之難。棄怨修好。使隣境感慕來服。恤鰥寡養耆老。開設學校。敎養生員。置淸讌,寶文兩閣。日與文臣。講論六經。偃武修文。欲以禮樂成俗。故韓安仁曰。十七年事業。可以貽厥後世。信哉。

仁王楷。睿王長子。在位二十四年。
性仁孝寬慈。好學問多材藝。接待師友官僚以禮。睿王寵愛之。及卽位。時明經申淑貧甚。召入內。受春秋經傳。志尙儉約。所御寢席。無黃紬之緣。寢衣無綾錦之飾。卽位之初。承前朝之弊。宦寺及內僚之屬甚多。每託以微罪黜之。至末年。不過數人。每日必御正殿聽政。或奏事稽遲。則必使小臣趣之。專以德惠安民。不欲興兵生事。禮接北使甚恭。故北人無不愛敬。詞臣應製。或指北朝爲胡狄。則瞿然曰。安有臣事大國而慢稱如是耶。必使删改之。及金國暴興。則排群議上表稱臣。自是世結懽盟。邊境無虞。不幸資謙橫恣。變生宮闈。身遭幽辱。及反正。以外祖之故。曲全其生。及其子孫宗族。雖臺諫交攻拓俊京而棄過錄功。俾保首領。而王在位日久。朝野無事。及其薨逝。中外哀慕。雖北人聞之。亦且嗟悼。廟號曰仁。不亦宜哉。惜乎。惑妖僧妙淸遷都之說。一本作請 屢幸西都。大興土木。西人怨之。脅衆以叛。於是遣金富軾統率三軍。攻圍孤城。不能遽拔。士卒疲困。糧餉糜費。曠日持久。僅乃克之。且以仁王之賢而有此擧。何也。蓋妙淸假記術。以爲如是則社稷安。不如是則國家危。爲人君者。孰不樂其安而惡其危哉。此仁王所以惑之也。及其釁萌禍作。兵連不解。悔之無及也。雖誅妙淸。不免爲盛德之累也。

毅王편001。仁王長子。在位二十四年。
性聰明嚴毅。少好學問。王之爲太子也。仁王臨薨謂之曰。治國須聽承宣鄭襲明之言。襲明本自正直。加以託付之重。進盡忠言。裨補闕漏。金存中,鄭諴等日夜譖襲明而去之。王乃以存中代其職。自是憸佞用事。正士疏遠。王益縱恣。淫于逸豫。盤遊無度。始以擊毬昵鄭仲夫等。臺諫言之而不聽。終以詞章狎韓賴等。武夫憤怨而不悟。卒之韓賴召亂。而身死於仲夫之手。朝臣盡殲。蓋其所好終始有異。而其致亂則一也。故人主所好。不可不愼也。

明王晧。仁王第三子。在位二十七年。
性溫恭仁孝。好文學。頗通經史。自鄭仲夫,李義方,義旼等弑毅王。竊弄國柄。爲明王計者。當誓心自強。必欲討賊而後已。若曰力不足則慶大升憤王室之微弱。疾強臣之跋扈。一朝擧義誅仲夫父子如獵狐兔。而義旼奉首鼠竄。假息鄕閭。此正任用賢良。修明紀綱。復張王室之秋也。王不能然。溺於宴安。其所施爲。如平居無事之時。若義旼者。特匹夫耳。遣一个使。數其弑君之罪而誅之。可也。反以禮請。驟加爵位。使之陵轢王室。虐殺朝臣。賣官鬻獄。濁亂朝政。其禍固已慘矣。崔忠獻乘釁以起。而王又見放逐。子孫不保。自是權臣相繼執國命。王室之不亡。若綴旒者幾百年。明王於此。不得辭其責矣。

神王晫。仁王第五子。在位七年。
神王爲崔忠獻所立。生殺廢置。皆出忠獻。而王徒擁虛器。立于臣民之上。如木偶人在人手耳。惜哉。

煕王韺。神王長子。在位七年。
天資雄偉。器局宏深。是時崔忠獻執國命已有年矣。廣植黨與。專擅威福。煕王雖欲有爲。何以哉。爲王之計。當以正自處。任賢使能。使王室自強。雖有強僭之臣。不能肆其惡矣。王不知此。聽用王濬明輕薄之計。欲快一時之忿。卒見放黜。悲夫。

康王祦。明王長子。在位二年。
在位之日。凡所施爲。皆受制於強臣。遽罹疾病。享國日淺。悲夫。

高王瞮。康王子。在位四十六年。
高王之世。內有權臣崔怡,沆,竩,金仁俊。相繼執國命。外有女眞,蒙古遣兵侵伐。無歲無之。當是時。國勢岌岌殆哉。王小心守法。進退以禮。故權臣跋扈而莫敢犯。狄兵至則堅壁固守。退則遣使通好。至遣世子。執贄親朝。故雖與強暴之國爲隣。而卒得其和好。以保民社。其享年有永。傳祚子孫宜矣。

元王편002。高王子。在位十五年。
元王之爲世子也。權臣專擅。恣行不義。畏上國討罪。不樂內附。蒙古之兵連年壓境。中外騷然。按舊本然下有而字。而攷本文删去。 王承君父之命。親朝上國。摧伏權臣跋扈之志。遂使疽背而死。又阿里孛哥以憲宗嫡子。阻兵上都。世皇以藩王。遠在梁楚之郊。而乃能識天命人心之去就。舍近之遠。世皇嘉之。至以公主歸于王子。自是世結舅甥之好。使東方之民。享百年昇平之樂。亦可尙也。但其三別抄內叛。侵掠州郡。上國遣將帥求索無已。是宵旰圖治之日也。顧乃溺於宴安。使宮女蠱惑其心。閹人出納其命。未免洪子藩之譏。惜哉。按右副承宣洪子藩諫曰。比來不親聽政。有司章奏。悉委宦豎出納。中外觖望。請親庶政。以慰輿望。

忠烈王昛。元王長子。在位二十四年。
爲世子。明習國家典故。喜怒不形於色。寬厚長者也。讀書知大義。嘗與大司成金坵祭酒李松縉唱和。有集 龍樓集 行于世。當忠烈父子之代。內則權臣擅政肆毒。外則強敵率衆來侵。一國之人。不死於虐政則必死於鋒鏑。禍變極矣。一朝上天悔禍。誅戮權臣。歸附上國。天子嘉之。釐降公主。而公主之至也。父老喜而相慶曰。不圖百年鋒鏑之餘。復見太平之期。王又再005_509c朝京師。敷奏東方之弊。帝旣兪允。召還官軍。東民以安。此正王可以有爲之日也。奈何驕心遽生。耽于遊畋。廣置鷹坊。使惡小李貞等侵暴州郡。溺於宴樂。唱和龍樓。淫僧祖英舊本作倫 等昵近左右。公主世子言之而不聽。宰相臺諫論之而不從。及其晚年。過聽左右之譖。至欲廢其嫡而立其姪。按王嘗欲廢忠宣。以姪瑞興侯爲後。贊成事崔有渰泣諫遂止。 其在東宮。雖曰明習典故。讀書知大義。果何用哉。嗚呼。靡不有初。鮮克有終。非忠烈之謂乎。

忠宣王謜。蒙古名益知禮普化。忠烈王長子。在位五年。
性好賢疾惡。年十六入元。世祖皇帝見之。問讀何書。對以從鄭可臣等。受孝經語孟。帝悅。大德二年。受內禪卽位。任賢去邪。興利革弊。召入宿衛者十年。大德十一年。與丞相達穿等。迎武宗。以功封瀋王。至大元年。忠烈王薨。奔喪十餘日。至王京。喪服殯斂皆以禮。其爲世子入侍元朝。與姚燧,趙孟頫諸公遊。間或與聞朝政。其議論有足觀者。及其卽位。避上國之制。改易官名。事大以禮也。正田賦立鹽法。知所本也。第以諸侯之位。內承先君之傳。上受天子之命。不可一日而曠也。王旣以帝命復其位。淹留燕京。不卽之國。從臣思歸。至謀相陷。國人不勝供餽之困。固已非矣。元亦厭之。欲王歸國。無以爲辭。乃以其位遜于世子。又欲以姪暠爲世子。父子兄弟。卒構猜嫌。其禍至于數世而未弭。詒謀之不善如此。吐蕃之竄。宜也。非不幸也。

忠肅王燾。忠宣王第二子。在位二十五年。
性嚴毅沈重。聰明好潔。善製述。工隸書。自烈,宣,肅,惠。世歷四代。父子相夷。至與之訟于天子之朝。貽笑天下後世。且父子天性之親。孝爲百行之先。而政事之本也。本旣失焉。其他雖有所稱。無足觀者矣。忠肅晚年。遺棄國事。出舍外郊。信任朴靑等三豎。迷謬至矣。然以國君而先毀彝倫。此亦不足責也。

忠惠王禎。忠肅王長子。在位七年。
忠惠王以英銳之材。用之於不善。昵比惡小。荒淫縱恣。內則見責於父王。上則得罪於天子。其身爲羈囚死於道路。宜矣。雖有一老臣李兆年言之剴切。其如不我聽。何哉。

忠穆王昕。忠惠王長子。在位四年。
幼沖卽位。性聰明。善聽斷。然母妃以盛年居中。而辛裔,康允忠,裴佺,田淑蒙等相繼用事。威福自恣。政丞王煦,金永暾奉帝命欲整治舊弊。卒爲權臣所陷。王亦早年薨逝。惜哉

忠定王㫝。忠惠王次子。在位三年。
忠穆忠定皆以幼沖卽位。德寧禧妃以母之尊。用事於內。姦臣外戚。用事於外。二君雖有穎悟之資。何能爲哉。且當忠定之時。江陵君舊本。陵作寧。江陵君。卽恭愍。 親爲叔父。得國人之心。又有上國之援。諸尹 按諸尹。禧妃之族。 不此之顧。朋比逞欲。釀成禍胎。卒使王不幸鴆死。悲夫。

恭愍王祺。忠肅王次子。在位二十三年。
天資嚴重。動容中禮。性頗聰明仁厚。民望咸歸焉。及卽位。勵精圖治。中外大悅。想望太平。自魯國薨逝。過哀喪志。委政辛旽。逐殺勳賢。大興土木。以斂民怨。狎昵頑童。以逞淫穢。晚年猜暴忌克。使酒無時。歐擊左右。又患無後。旣取他人子封大君。將以爲後。而慮外人不信。密令嬖臣汚辱後宮。及其有身。欲殺其人以滅其口。悖亂如此。欲免得乎。

辛禑立十四年
禑少字牟尼奴。父旽母旽妾婢般若。恭愍王無後。誅旽養禑于太后宮。稱爲己子。封江寧大君。恭愍王薨。李仁任立禑焉。秦政,晉睿。事涉疑似。至於呂氏立他人子爲惠帝後。朱文公直筆特書。略無假借。其所以爲天下後世戒嚴矣。恭愍王嘗以無子爲憂。宜求宗室之賢者嗣之。乃取旽子陰養宮中。以爲身後之計。卒不能保其身。禑又荒淫暴虐。身亡家敗。嗚呼。禑固不足論。恭愍王亦何心哉。

恭讓王在位三年
諱瑤。神王七代孫。初封定昌府院君。大明洪武二十二年十一月己卯。我主上與沈德符,池湧奇,鄭夢周,偰長壽,成石璘,趙浚,朴葳,鄭道傳等。定策告于恭愍王定妃。奉王卽位。噫。當僞禑盜據王位。是時已無王氏矣。歷十有六年之久。禑淫酗肆虐。昌又昏弱。天不使狂狡之童。姦穢名器。待有德而畀之。其意昭然。忠臣義士必欲求王氏之後而立之。於是恭讓王不離軒席之上。起而登寶位。王氏之祀旣絶而復續。王氏之國旣亡而復興。是宜推誠勳賢。納忠容諫。相與共圖維新之治也。何乃惟姻婭挾憾之訴。婦寺徇私之請。是聽是信。疏忌元勳。陷害忠良。政事悖亂。人心自離。天命自去。以國君之尊。爲匹夫之奔。而王氏之祀忽諸。悲夫。

議論 按此篇。輯易卦五爻程傳說。

君德首出庶物
乾彖曰。首出庶物。萬國咸寧。天爲萬物之祖。王爲萬邦之宗。乾道首出庶物而萬彙亨。君道尊臨天位而四海從。王者體天之道。則萬國咸寧也。

人君至誠任賢。以成其功。
蒙六五。童蒙吉。五以柔順居君位。下應於二。以柔中之德。任剛明之才。足以治天下之蒙。故吉也。爲人君者。苟能至誠任賢。以成其功。何異乎出於己也。

王者顯明其比道。天下自然來比。
比九五。顯比。按舊本脫比九五顯比五字。今塡補。 人君比天下之道。當顯明其比道而已。如誠意以待物。恕己以及人。發政施仁。使天下蒙其惠澤。是人君親比天下之道也。如是。天下孰不親比於上。若乃暴其小仁。違道干譽。欲以求下之此。其道亦挾矣。王者顯明其比道。天下自然來比蒭。來者撫之。固不煦煦然求比於物。此王道之大。所以其民皥皥而莫知爲之者也。聖人以大公無私治天下。於顯比見之矣

聖人未嘗不盡天下之議
履九五。夬履。貞。厲。古之聖人。居天下之尊。明足以照。剛足以決。勢足以專。然而未嘗不盡天下之議。雖芻蕘之微。必取。乃其所以爲聖也。若自任其剛明。決行不顧。雖使得正。亦危道也。可固守乎。有剛明之才。苟專自任。猶爲危道。況剛明不足者乎。

休息天下之否
否九五。休否。大人吉。其亡其亡。繫于苞桑。五以陽剛中正之德。居尊位。故能休息天下之否。大人之吉也。大人當位。能以其道休息天下之否。以馴致於奉。猶未離於否也。故有其亡之戒。否旣休息。漸將反奉。不可便爲安肆。當深慮遠戒。常憂否之復來曰。其亡矣其亡矣。其繫于苞桑。謂爲安固之道。如維繫于苞桑。

人君孚信以接下。又有威嚴。使之有畏。
大有六五。厥孚交如威如。吉。人君執柔守中。而以孚信接於下。則下亦盡其誠信以事於上。上下孚信相交也。以柔居尊位。當大有之時。人心安易。若專尙柔順則陵慢生矣。故必威如則吉。威如。有威嚴之謂也。旣以柔和孚信接於下。衆志說從。又有威嚴。使之有畏。善處有者也。吉可知矣。

威德並著
謙六五。不富以其隣。利用侵伐。無不利。以君位之尊而執謙順以接於下。衆所歸也。故不以富而能有其隣。然君道不可專尙謙柔。必須威武相濟。然後能懷服天下。故威德並著。然後盡君道之宜。而無所不利也。

不自任其知
臨六五。知 舊本脫知字 臨。大君之宜。吉。夫以一人之身。臨乎天下之廣。若區區自任。豈能周於萬事。故自任其知者。適足爲不知。惟能取天下之善。任天下之聰明。則無所不周。是不自任其知。則其知大矣。五順應剛中之賢。任之以臨下。乃己以明知臨天下。大君之所宜也。其吉可知。

止惡之道。在知其本得其要而已。
大畜六五。豶豕之牙。吉。六居君位。止畜天下之邪惡。夫以億兆之衆。發其邪欲之心。人君欲力以制之。雖密法嚴刑。不能勝也。夫物有總攝。事有機會。聖人操得其要。則視億兆之心猶一心。道之斯行。止之則戢。故不勞而治。其用若豶豕之牙也。豕剛躁之物。而牙爲猛利。若剛制其牙則用力勞而不能止其躁猛。雖縶之維之。不能使之變也。若豶去其勢則牙雖存而剛躁自止。其用如此。所以吉也。且如止盜。民有欲心。見利則動。苟不知敎。而迫於飢寒。雖刑殺日施。其能勝億兆利欲之心乎。聖人則知所以止之之道。不尙威刑。而修政敎。使之有農桑之業。知廉恥之道。雖賞之。不竊矣。故止惡之道。在知其本。得其要而已。不嚴刑於彼。而修政於此。是猶患豕牙之利。不制其牙而豶其勢也。

賴人養己。以濟天下。
頤六五。拂經。居貞。吉。六五頤之時。居君位。養天下者也。然其陰柔之質。才不足以養天下。上有剛陽之賢。故順從之。賴其養己。以濟天下。君者。養人者也。反賴人之養。是違拂於經常。旣以己之不足而順從於賢師傅。上。師傅之位也。必居守貞固。篤於委信。則能輔翼其身。澤及天下。故吉也。

通天下之志。勿復自任其明。
晉六五。悔亡。失得勿恤。往。吉無不利。六以柔居尊位。本當有悔。以大明而下皆順附。故其悔得亡也。下旣同德順附。當推誠委任。盡衆人之才。通天下之志。勿復自任其明。恤其得失。如此而往則吉而無不利也。六五大明之主。不患其不能明照。患其用明之過。至於察察。失委任之道。故戒以失得勿恤也。夫私意偏任。不察則有蔽。盡天下之公。豈當復用私察也。

有家之道旣至。則不憂勞而天下治矣。
家人九五。王假有家。勿恤吉。夫王者之道。修身以齊家。家正則天下治矣。自古聖人。未有不以恭己矣。勿恤而吉也。

濟天下之蹇。未有不由聖賢之臣爲之佐。
蹇九五。大蹇朋來。以剛陽中正之君。而方在大蹇之中。非得剛陽中正之臣相輔之。不能濟天下之蹇也。自古聖王濟天下之蹇。未有不由聖賢之臣爲之助者。湯武得伊呂是也。中常之君。得剛明之臣。而能濟大難者則有矣。劉禪之孔明。唐肅宗之郭子儀。德宗之李晟是也。雖賢明之君。苟無其臣則不能濟於難也。蓋臣賢於君則輔君以君所不能。臣不及君則贊助而已。故不能成大功也。

人君能虛中自損。以順從在下之賢。
損六五。或益之十朋之龜。六五於損時。以中順居尊位。虛其中以應乎二之剛陽。是人君能虛中自損。以順從在下之賢也。能如是則天下孰不損己自盡以益之。或有益之之事則十朋助之矣。

至誠益於天下。天下受其大福。
益九五。有孚惠心。勿問。元吉。有孚。惠我德。人君居得致之位。操可致之權。苟至誠益於天下。天下受其大福。其元吉。不暇言也。有孚惠我德。人君至誠益於天下。天下之人。無不至誠愛戴。以君之德澤爲恩惠也。

人君至誠降屈。以中正之道。求天下。而賢未有不遇者也。
姤九五。以杞包瓜。含章。有隕自天。九五尊居君位。而下求賢才。以至高而求至下。猶以杞葉而包瓜。能自降屈如此。又其內蘊中正之德。充實章美。人君如是。則無有不遇所求者也。雖有屈己求賢。若其德不正。賢者不屑也。故必含蓄章美。內積至誠。則有隕自天矣。猶云自天而降。言必得之也。自古人君。至誠降屈。以中正之道。求天下。而賢未有不遇者也。高宗感於夢寐。文王遇於漁釣。皆由是道也。

萃天下之道。當正其位修其德。
萃九五。萃有位。無咎。匪孚。元永貞。悔亡。居天下之尊。萃天下之衆而君臨之。當正其位。修其德。以陽剛居尊位。爲有其位矣。得中正之道。無過咎也。如是而有不信而未歸者。則當自反以修其元永貞之德。則無思不服而悔亡矣。元永貞者。君之德。人所歸也。故比天下之道與萃天下之道。皆在此三者。王者旣有其位。又有其德。中正無過咎。而天下尙有未信服歸附005_514c者。蓋其道未光大也。元永貞之道未至也。在修德以來之。始苗民逆命。帝乃誕敷文德。舜德非不至也。蓋有遠近昏明之異。故其歸有先後。旣有未歸則當修德也。所謂德元永貞之道。元。首也長也。爲君德首出庶物。君長群生。有尊大之義焉。有主統之義焉。而又恒永貞固。則通於神明。光於四海。無思不服矣。乃無咎匪孚。而其悔亡也。
自此以下。卷帙殘缺。未見全書。深可恨也。


 

 



 

[주D-001]덕소(德昭)의 죽음 : 덕소는 태조의 차자(次子). 태종 때 유주(幽州)를 정벌하는 데 따라갔는데 제(帝)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군중(軍中)이 놀라자, 덕소를 세우려고 모의하는 자가 있었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정벌에서 돌아와 북벌이 불리하다 하여 오래도록 포상을 하지 않으므로 덕소가 그것을 말하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네가 스스로 임금노릇하기를 기다렸으니, 아직도 늦지 않다.” 하였다. 그래서 덕소는 물러나와 자결하였다. 《宋史 卷244 燕王德昭傳》
[주D-002]천서(天書)을 봉선(封禪)하는 일 : 진종은 무신년(1008)에 전연(澶淵)의 일을 부끄러워하여 천서(天瑞)에 의하여 봉선(封禪)하여 사해(四海)를 진압하려고, 꿈에 신인(神人)이 천서(天書 :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글)를 내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것을 승천문(承天門)과 태산(泰山)에서 얻어 군신(群臣)과 함께 미친 듯이 기뻐한 일. 《宋史 卷6 眞宗本紀》
[주D-003]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 : 왕안석이 재상이 되어 정치를 개혁하고자 만든 10가지 법. 청묘(靑苗)ㆍ수리(水利)ㆍ균수(均輸)ㆍ보갑(保甲)ㆍ모역(募役)ㆍ시역(市易)ㆍ보마(保馬)ㆍ방전(方田)ㆍ균세(均稅), 《宋史 卷327 王安石傳》.
[주D-004]풍형 예대(豊亨豫大) : 천하가 태평하여 인민이 낙을 극도로 누림을 말한다. 풍(豊)과 예(豫)는 모두 《주역(周易)》의 괘명(卦名). 풍은 성대, 예(豫)는 화락.
[주D-005]화석강(花石綱) : 송휘종(宋徽宗)은 진완(珍玩)을 좋아하여 화석(花石)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주면(朱勔)이 절강(浙江)의 진귀한 것을 가져다가 진상하였는데, 해마다 증가하여 그것을 나르는 배가 회수(淮水)와 변수(汴水)에 서로 잇대어 있었으므로 이름지은 것. 《宋史 朱勔傳》
[주D-006]위학(僞學) : 바르지 못한 학문. 송영종(宋寧宗) 때 한탁주(韓侂冑)가 정권을 잡고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질 자를 제거하기 위해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고 하였다. 즉 탐독방사(貪黷放肆)는 사람의 진정이고, 염결호수(廉潔好修)는 다 거짓이라 하여, 위학(僞學)의 당을 임용하는 것을 금함으로써, 주희(朱熹)의 벼슬을 깎고 채원정(蔡元定)을 폄출(貶黜)하여 조정에 정사(正士)가 없어지게 한 일. 《宋史 胡紘傳》
[주D-007]염락자양(濂洛紫陽)의 도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주창한 송대(宋代)의 성리학(性理學)을 말한다.
[주D-008]본문(本文) :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의 사찬(史贊)을 가리킨다.
[주D-009]한(漢)나라의 …… 같이 한 것 : 조조가 말기에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우고 동탁(董卓)을 주륙한 후 실권을 장악한 것과, 사마의가 가평(嘉平 : 위나라 제왕(齊王)의 연호) 초에 조상(曹爽)을 죽이고 대신 승상(丞相)이 된 것.
[주D-010]부리포(夫里布) : 부포(夫布)와 이포(里布). 포는 돈이란 뜻. 일정한 직업이 없는 남자에게 벌(罰)로 부과하는 세를 부포, 집을 불모(不毛)로 두면 부과한 세를 이포라 한다. 《孟子 公孫丑上》
[주D-011]맹자(孟子)의 말 : 《맹자》 등문공상(滕文公上)에 “대저 어진 정사는 반드시 경계를 바로 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니,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정지(井地)가 고르지 못하다.” 하였다.
[주D-012]구준(寇準)이 전연(澶淵)에서 쓰던 계책 : 송진종(宋眞宗) 초기(1014)에 요(遼)의 군사가 대거 침입하매 천하가 몹시 놀랐으되, 구준이 분분한 중의를 힘써 배척하고 진종의 친정(親征)을 청한 계책. 그래서 진종이 전연(澶淵)에 거둥하였더니, 요가 두려워하여 글을 바치고 화친하기를 애걸하므로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宋史 卷281 寇準傳》 곧 성왕(成王)의 평양 출정을 송진종의 친정(親征)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3]진(秦)나라 …… 의아스러웠고 : 정(政)은 진시황의 이름.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莊襄王)이 조(趙)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을 얻어서 진시황을 낳았는데 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라 한다. 예(睿)는 진원제(晉元帝)의 이름인데, 그는 그의 어머니 하후씨(夏侯氏)가 우씨(牛氏)와 통하여 낳았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