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금남잡영(錦南雜詠) 연구
김 대 중*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국문학.
東方學志 제161집
<차 례>
1. 서론
2. 금남잡영 개관
3. 절망과 희망의 교차
4. 고독 속의 유대
5. 결론
본고는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ꠓ금남잡영ꠗ(錦南雜詠)에 수록된 시편에 대한 연구이다. ꠓ금남잡영ꠗ은 정도전의 나주 유배기 시집이다. 정도전문학 연구의 진전을 꾀하기 위해서는‘연대기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정도전은 여말선초의 격동기를 산인물로 그 삶 역시 굴곡이 매우 심하기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 본고는 ꠓ금남잡영ꠗ에 주목한다. 나주 유배는 정도전이 신진 사대부로서 처음 겪은 정치적 시련이다. 본고는 ꠓ금남잡영ꠗ을 통해 그 첫 유배기 정도전의 내면세계를 더듬어 보려는 시도이다. ꠓ금남잡영ꠗ은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고, 대신 ꠓ삼봉집ꠗ(三峰集)에 그흔적을 남기고 있다. 본고는 ꠓ삼봉집ꠗ을 토대로 ꠓ금남잡영ꠗ을 재구성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 기초 작업을 토대로 본고는 본격적인 작품분석을 한다. 정도전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유배객으로서 낯선 장소에 유폐되었다. 따라서 극도의 절망감과 불안감이 ꠓ금남잡영ꠗ의 주된 정서를 이룬다.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자신의 고통을 객관화하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정도전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결국 떨칠 수 없었고, 다시 깊은 절망에 빠져야 했다. 이것이 ‘시인 정도전’의 복합적인 내면세계이다. 이런 정도전에게 벗의 존재가큰 힘이 되었다. 자신과 같이 유배형에 처해진 벗들과의 동지적 유대 속에서 정도전은 고통 속에서 신진 사대부로서의 정신 자세를 가다듬었다. 또한 유배기의 다양한 교유는 기쁨과 위안과 생활상의 도움을 주었다. 이런 면면은 그의 사상적‧정치적 논설보다는 시작품을 통해 섬세하게 접근해 들어갈 수 있다. 요컨대 본고는 정도전에 대한 사상적‧역사적‧정치적‧철학적 접근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문학적 접근을 통해서만 가 닿을 수 있는 미묘하고 내밀한 지점에 닿아보기 위한 것이다.
핵심어: 정도전, ꠓ삼봉집ꠗ, 유배 문학, 신진 사대부, 동지적 유대, 염흥방.
1. 서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여말선초의 격동기를 산 인물이다. 그는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시대적 과제에 대응했는바, 불교 비판을 통해 유교의 사상적 정립을 공고히 한 것이 그 이론가적 면모이고, 역성혁명을 주도하여 ‘건국의 정치’를 한 것이 그 실천가적 면모이다. 이 점에서 정도전은 한편으로는 사대부적 전형을 구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여느 사대부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채를 띠는 존재이다. 이제까지 정도전 연구는 그 사상가적‧이론가적‧정치가적 면모에 대한 것이 주도해 왔다.1) 반면 정도전 문학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1) 정도전 연구의 시기별 동향에 대해서는 정재훈, 「정도전 연구의 회고와 새로운 사상사적 모색」, ꠓ한국사상사학ꠗ 28, 2007, 194∼223쪽 참조.
그러나 정도전은 시인이자 산문가로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그 문학작품들은 ‘이론가 정도전’ 혹은 ‘정치가 정도전’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그 중에는 정도전의 철학‧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도 있고, 그 연관이 느슨하거나 거의 없는 것도 있다. 요컨대 정도전의 문학작품은 모두 여말선초라는 시대 현실 속에서 산생된 것으로, 그의 철학 및 사상과 일정하게 연관되는 동시에 온전히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정도전 문학 연구는 철학‧사상‧정치‧역사 분야의 연구와 일정한 접점을 갖는 동시에 또 그와 차별화되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그 동안 축적된 정도전 문학 연구는 이런 가능성을 펼쳐 보이기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2) 그 연구들을 통해 정도전의 시나 산문이 어떤 시대 인식을 보여주는지, 어떤 개인적인 정회를 담고 있는지, 어떤 수사적 특징을 갖고 있는지 등등이 규명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정도전 문학 연구를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가? 정도전문학 연구에서 관건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정도전의 사상 및 정치적 행보와 작품세계의 관련, 그리고 여말선초라는 시대 현실과 작품세계의 관련을 어떻게 논리화할 것인가로 집약될 수 있지 않은가 한다. 방금 지적했다시피 그 관계성은 단일하지 않다.
2) 정도전 문학 연구로 김종진, 「정도전 문학의 연구」, ꠓ민족문화연구ꠗ 15, 1980; 박성규,「정도전 연구」, ꠓ어문논집ꠗ 22, 1982(박성규, ꠓ고려후기 사대부문학 연구ꠗ,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311∼327쪽에 재수록); 문철영, 「시문을 통해 본 정도전의 내면세계」, ꠓ한국학보ꠗ 42, 1986; 이강렬, 「삼봉 정도전의 전원시 考」, ꠓ한문학논집ꠗ 5, 1987;김종진, 「정도전 문학의 연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1990; 정원표, 「정도전 시의 이원적 성격」, ꠓ한국한시작가연구ꠗ 2, 1996; 김남형, 「정도전의 <答田父>와 <錦南野人>에 대하여」, ꠓ한문교육연구ꠗ 13, 1999; 원주용, 「삼봉 정도전 산문의 문예적 특징」, ꠓ한문학보ꠗ 14, 2006; 원주용, 「정도전 산문에 관한 일고찰」, ꠓ한문고전연구ꠗ 14, 2007; 정상균, 「정도전의 <영매(詠梅)>시 연구」, ꠓ국어교육ꠗ 123,2007; 김종서, 「삼봉 정도전 시의 표현 양식과 미의식」, ꠓ한국한시연구ꠗ 18, 2010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그 관계망의 복잡성을 단순화하지 않고, 그 전체상에 육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정도전의 작품세계에 대한 ‘연대기적 접근’은 그 유력한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정도전은 대단히 굴곡이 심하고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삶의 역정에는 여말선초라는 전환기의 시대현실이 개입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문학과 사상의 궤적을 동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간의 정도전 철학 및 사상에 대한 연구는 물론, 문학 연구에서도 이 점에 대한 구체적인 고려는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한다. 다만 일부 연구에서 이런 접근법을 취했으나,3) 시기별 교유 관계를 정리하거나 한정된 분량 내에서 문학세계에 대한 개괄적인 논의를 하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선행연구의 이런 성과와 미비점에 유의하여, 정도전 문학에 대한 연대기적 접근을 전면화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번에 탐구하려는 것은 정도전의 ꠓ금남잡영ꠗ(錦南雜詠)이다. 정도전은 1375∼1377년에 전라도 나주 회진현(會津縣)에 속한 거평부곡(居平部曲)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친원파(親元派) 대신(大臣)들과의 대립 때문이었다. 그 유배기에 지은 글들을 모은 것이 곧 ꠓ금남잡영ꠗ과 ꠓ금납잡제ꠗ(錦南雜題)이다. 전자는 시집이고 후자는 산문집으로, ‘금남’은 곧 나주를 뜻한다. 그런데 정도전의 복권은 많은 시일을 기다려야 했다. 회진현에서의 유배는 시련의 시작일 뿐이었다. 1377년 7월 이후로 정도전은 잠시 고향인 영주로 옮겼다가 7년간 부평‧김포 등지를 떠돌았고, 1384년에야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4) 요컨대 ꠓ금남잡영ꠗ과 ꠓ금남잡제ꠗ는 9년에 걸친 시련의 시기 첫머리에 놓여 있다.
3) 이익주, 「ꠓ삼봉집ꠗ 시문을 통해 본 고려 말 정도전의 교유 관계」, 삼봉 정도전 선생 기념사업회, ꠓ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ꠗ, 경세원, 2004에 정도전의 시문이 일부 연대기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다만 본고와 달리 나주 유배기 시문이 별도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4) 나주에 유배된 이후로 정계에 복귀하기까지의 정도전 삶에 대해서는 한영우, ꠓ왕조의 설계자 정도전ꠗ, 지식산업사, 1999, 31∼39쪽 참조.
따라서 그 수록작들은 여러 모로 주목을 요하는바, 그간 선행연구에서 산발적으로 다루어져 왔다.5) 본고는 이런 성과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기존에 산발적으로 다루어졌던 작품들을 새롭게 조망하는 한편, 그 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작품들을 분석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ꠓ금남잡영ꠗ을 하나의 독립적인 연구 대상으로 부각시키려 한다. ꠓ금남잡영ꠗ을 전면에 내세우면, 회진현 유배기의 창작활동 및 작품세계를 뚜렷하게 실체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판단된다. 같은 시기에 성립한 ꠓ금남잡제ꠗ도 함께 다루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ꠓ금남잡영ꠗ과 ꠓ금남잡제ꠗ를 함께 다루는 것은 분량상 무리가 있다. 따라서 ꠓ금남잡제ꠗ에 대한 연구는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5) 김종진, 앞의 글, 1980; 박성규, 앞의 글, 1982; 문철영, 앞의 글, 1986; 이강렬, 앞의글, 1987; 김종진, 「정도전 문학의 연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1990; 정원표, 앞의 글, 1996; 김남형, 앞의 글, 1999; 김종서, 앞의 글, 2010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2. ꠓ금남잡영ꠗ 개관
ꠓ금남잡영ꠗ은 현재 별도로 전하지 않고 ꠓ삼봉집ꠗ(三峰集)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애초에 정도전은 ꠓ금남잡영ꠗ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 경력에 따라 작은 규모의 시록(詩錄)이나 문록(文錄)을 남겼던 것으로 파악된다. ꠓ금남잡영ꠗ과 ꠓ금남잡제ꠗ 외에도 ꠓ봉사잡록ꠗ(奉使雜錄), ꠓ중봉사록ꠗ(重奉使錄), ꠓ후봉사록ꠗ(後奉使錄) 등의 편린 또한 ꠓ삼봉집ꠗ에 남아 있다. 1791년에 정조(正祖)의 명으로 간행된 ꠓ삼봉집ꠗ의 범례에 의하면, 정도전의 유집(遺集)은, 시(詩)의 경우 ‘잡영’(雜詠), ‘금남잡영’(錦南雜詠), ‘봉사록’(奉使錄)으로 분류되어 있고, 문(文)의 경우 ‘잡제’(雜題), ‘금남잡제’(錦南雜題)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순서상의 착오가 많고 범례가 불분명하다고 판단되어 시는 ‘오언’(五言), ‘칠언’(七言)을 항목으로 삼고 문은 ‘소’(疏), ‘전’(箋), ‘서’(書) 등을 항목으로 삼아 재편집했다고 한다.6) 실제로 ꠓ삼봉집ꠗ에는 어떤 작품이 ꠓ금남잡영ꠗ에 수록되었던 것인지가 밝혀져 있다. 따라서 그 주기(注記)를 토대로, 비록 완벽하게까지는 아니겠지만, ꠓ금남잡영ꠗ을 어느 정도 재구성해볼 수 있다. 그 수록작들을 ꠓ삼봉집ꠗ에 실려 있는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언고시(五言古詩)
「노판관(盧判官)을 전송하며」(送盧判官)
「이호연(李浩然) 집(集)의 시운(詩韻)을 써서 동년(同年) 강자야(康子野) 호문(好文)에게 보이다」(用李浩然集詩韻, 示同年康子野好文)
「자야(子野)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 호연(浩然)의 운을 써서 보이다」(聽子野琴, 用浩然韻示之)
「염동정(廉東亭)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奉次廉東亭詩韻)
「도연명 시를 베끼다」(寫陶詩)
「동정(東亭)에게 삼가 부치다」(奉寄東亭)
「달밤에 동정을 생각하며」(月夜奉懷東亭)
「차운하여 정달가(鄭達可) 몽주(夢周)에게 부치다」(次韻寄鄭達可夢周)
6) ꠓ三峰集ꠗ, 「三峯集凡例」(한국문집총간 5, 282쪽). “是集始刊於洪武丁丑, 重刊於成化丁未. 公之曾孫觀察使文炯跋其卷尾曰: ‘舊有板本, 散落不完.’ 在文炯時已如此, 今經屢百載, 宜其不傳也. 當宁辛亥, 命內閣購公遺集將梓行, 編袠殘缺, 殆不可讀. 攷其凡例, 則詩以雜詠ˎ錦南雜詠ˎ奉使錄分類, 文以雜題ˎ錦南雜題爲目. 然敍次多錯, 類例不明. 故別立標題, 詩以五七言, 文以疏ˎ箋ˎ書等目爲例, 各以類從, 竝攷年紀, 先後無紊, 其不可攷者闕之. 舊本類例, 不可全削, 故詩文篇題下, 書以下幾首某編, 以存本來面目.” 앞으로 ꠓ삼봉집ꠗ을 인용할 때에는 서지사항을 생략한다.
칠언고시(七言古詩)
「한가위 노래」(中秋歌)
칠언절구(七言絶句)
「구월 구일」(重九)
「4월 초하루」(四月初一日)
「동정(東亭)의 대나무 숲에 삼가 적다」(奉題東亭竹林)
「한가위」(中秋)
「김거사(金居士)의 시골집을 찾아가다」(訪金居士野居)
「김익지(金益之)를 찾아가다」(訪金益之)
「정림사(定林寺)의 명상인(明上人)을 찾아가다」(訪定林寺明上人)
「개경으로 돌아가는 이염사(李廉使) 사영(士穎)을 전송하며」(送李廉使士穎還京)
오언율시(五言律詩)
「한가위 노래」(中秋歌)
「신장로(信長老)가 고인사(古印社) 주인의 명으로 와서 흰쌀을 주기에, 이별에 임하여 시를 주다」(信長老以古印社主命來惠白粲, 臨別贈詩)
「함공(咸公)과 누대 위에서 술을 마시다」(咸公樓上飮酒)
「우연히 현생원(玄生員)의 서재 벽 위에 적다. 당인(唐人)의 운을 이용하다」(偶題玄生員書齋壁上, 用唐人韻)
칠언율시(七言律詩)
「해질 무렵」(日暮)
「초가집」(草舍)
「김직장(金直長) 미(彌)가 와서 가원(可遠)의 시를 보여주기에 차운하다」(金直長彌來示可遠詩次韻)
위와 같이 ꠓ삼봉집ꠗ을 통해 잠정적으로 재구성된 ꠓ금남잡영ꠗ에는,
칠언고시 8제(題) 8수(首),
칠언고시 1제 1수,
칠언절구 8제 8수,
오언율시 4제 4수,
칠언율시 3제 3수, 총 24제 24수가 수록되어 있다.
오언절구는 없는데, 원래 없었던 것인지 ꠓ삼봉집ꠗ에 누락된 것인지는 미상이다.
그럼 이상의 개관을 토대로, 지금부터는 ꠓ금남잡영ꠗ의 시세계를 본격 적으로 탐구할 차례이다.
3. 절망과 희망의 교차
앞서 간단히 언급했다시피 정도전의 나주 유배는 친원파와의 마찰로 인한 것이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북원(北元)의 사신 접대 문제였다. 1375년에 북원은 명나라를 공격하는 데 협력을 구하기 위해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 때 영접사로 임명된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다. 그러나 그는 항명하여 심지어 그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에 그는 이인임(李仁任, ?∼1388) 등 친원파 권신(權臣)의 노여움을 샀고, 그 여파로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1375년은 곧 우왕(禑王) 원년이다. 따라서 정도전의 나주 유배에는 공민왕(恭愍王) 시해 이후로 급변한 정국이 개입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왕은 즉위 후에 공민왕의 개혁정책들을 무력화하고 권력을 이인임등의 권문세족에게 되돌렸다. 그 결과 권문세족의 토지겸병이 극단화되는 한편, 왜구(倭寇)의 침입 또한 빈번하여 고려는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은, 친원 정책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세력에 의해 정계에서 축출된 것이다. 정도전 뿐 아니라 이색(李穡,1328∼1396) 문하에서 그와 동문수학했던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김구용(金九容, 1338∼1384), 이첨(李詹, 1345∼1405) 등도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전록생(田祿生, 1318∼1375),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은 유배 도중에 사망했다.
요컨대 정도전은 신진 사대부로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다음 시 「구월 구일」(重九)은 그런 극도의 절망감을 토로한 작품이다. 나중에 조선의 ꠓ청구풍아ꠗ(靑丘風雅)7) 및 중국의 ꠓ명시종ꠗ(明詩綜)8) 등에도 수록된 바 있다.
고향 길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
물이 둘러싼 데다 산은 또 몇 겹인지.
멀리 바라보려 할 제 수심 더욱 깊어지니
높은 곳에 오르걸랑 최고봉엔 오르지 마오.
故園歸路渺無窮, 水繞山回復幾重.
望欲遠時愁更遠, 登高莫上最高峯.9)
이 시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이는 광경으로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광경은 광활하거나 시원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돌아갈 길은 까마득하기만 하고, 산은 또 여러 겹 둘러 있다. 1‧2구는 경물 묘사인 동시에 심리 묘사이기도 하다. 1구의 ‘아득하다’[渺], ‘끝이 없다’[無窮]는 모두 돌아갈 기약이 없는 유배객의 암담한 신세에 대응되는 말이다. 2구의 묘사 또한 나주에 유폐된 시인의 처지를 부각시킨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글자는 ‘또’라는 뜻의 ‘復’이다. 1구에 이어 절망감이 가중되는 느낌을 이 한 글자가 잘 표현하고 있다. ‘또’라는 말이 의문문과 결합됨으로써 그 표현 효과는 배가된다.
7) 金宗直, ꠓ靑丘風雅ꠗ 卷之七, 아세아문화사 영인, 1983, 219∼220쪽.
8) 朱彝尊, ꠓ明詩綜ꠗ 卷95上, 北京: 中華書局, 2007, 4413쪽. 2구의 ‘回’와 ‘復’가 ꠓ명시종ꠗ에는 각각 ‘圍’와 ‘第’로 되어 있다. 참고로, ꠓ명시종ꠗ에 기재된 고려 및 조선의 시에는 오류가 없지 않다.
9) ꠓ三峰集ꠗ 卷之二, 「重九」(305쪽). 이 시의 번역은 신호열 외 옮김, ꠓ국역 삼봉집ꠗ 1,민족문화추진회, 1977, 108쪽을 참조하여 필자가 일부 수정한 것이다. 앞으로 정도전시를 인용할 때는 모두 이와 같이 한다.
3‧4구는 1‧2구의 ‘경치 묘사=심리 묘사’를 이어 받아 시인의 정회를 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3구는 ‘望’(바라보다)이란 글자와 더불어 시작한다. ‘望’은 시인의 행위이며, 1‧2구는 곧 ‘望’의 내용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한 글자를 통해 1‧2구는 3구로 수렴되며, 그와 동시에 1‧2구에서는 아직 전면화되지 않았던 시인의 존재가 부각됨으로써, 시상(詩想)이 정경 묘사에서 시인의 정회로 전환하게 된다. ‘望’ 다음에 행위자의 의지를 표시하는 ‘欲’이란 말이 동반함으로써, 시상의 전환은 더욱 분명해진다. 요컨대 ‘望’은 1‧2구와의 접속과 3구로의 전환을 동시에 한다. 3‧4구에서 전면화된 시인의 정회는 극도의 절망감이다. 그 절망감의 표현은 구중대(句中對)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3구에서 ‘望欲遠’(멀리 바라보려 하다)과 ‘愁更遠’(수심이 더욱 깊어진다)이 한 구 안에서 대를 이루고, 4구에서 ‘登高’(높은 곳에 오르다)와 ‘最高峯’(최고봉)이 또 대를 이룬다. 여기서 구중대의 형식은, 표면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상반된 두 가지를 한 데 묶음으로써 그 정서적 증폭을 극대화한다. 3구에서 ‘望欲遠’의 ‘遠’과 ‘愁更遠’의 ‘遠’은 같은 글자이다. 축자적 의미도 크게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전자는 희망을 담아 멀리 바라본다는 의미인 반면, 후자는 근심이 오히려 더 커졌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4구에서 ‘登高’의 ‘高’와 ‘最高峯’의 ‘高’도 같은 글자이며 그 축자적 의미도 동일하다. 그러나 앞의 ‘高’가 기대와 희망 속에 올라간 곳이라면,뒤의 ‘高’는 낙담과 절망 속에 올라가지 말아야 할 곳이다. 이렇듯 3‧4구는 모두 구중대의 형식을 통해, 유배객으로서 자기 위안을 찾으려는 행위가 그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은 데 따른 시인의 심리를 구조화한다. 이렇게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유배객으로서 정도전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주라는 낯선 땅에 던져져 있다. 그는 나주 회진현 내 거평부곡의 한 촌락인 소재동(消災洞)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황연(黃延)이라는 사람의 집에 세 들어 살다가 몇몇 주민들의 도움으로 초가집을 만들었는데, 그 집의 조성 경위는 「소재동 기문」(消災洞記)에 서술되어 있다. 그 글에서는 소재동 생활이 비교적 평온했던 것으로 그려진다.10) 그러나 다음 시는 그와 다른 면면을 알려준다.
이엉은 안 다듬어 들쑥날쑥하고
흙을 쌓아 만든 계단 기울어졌네.
깃든 새는 머물 곳을 익히 잘 알고
촌사람은 깜짝 놀라 뉘 집이냐 묻네.
아름다운 맑은 시내는 문을 따라 지나고
영롱한 푸른 숲은 문을 향해 가렸구나.
나가보면 강산은 외딴 지역 같은데
문 닫으면 도리어 옛 생활 그대로네.
茅茨不翦亂交加, 築土爲階面勢斜.
棲鳥聖知來宿處, 野人驚問是誰家.
靑溪窈窕緣門過, 碧樹玲瓏向戶遮.
出見江山如絶域, 閉門還似舊生涯.11)
10) 해당 본문을 들면 다음과 같다. “道傳賃居消災洞黃延家. 洞卽羅屬部曲居平之地, 有寺曰消災, 故以爲名. 環洞皆山也, 而其北東則重巒疊嶺, 形勢相屬; 西南諸峯, 低小可以眺望; 又其南, 原野平衍, 樹林煙火, 茅茨十餘戶, 乃會津縣也. (……) 人家門戶藩籬, 往往以竹代木, 其蕭灑淸寒之狀, 使遠人亦樂而安之也. 居人淳朴無外慕, 力田爲業, 延其尤也, 家善釀, 延又喜飮, 每酒熟, 必先觴予, 客至, 未嘗不置酒, 日久益恭. (……) 一日登後岡以望, 愛其西偏稍平夷, 下臨廣野, 遂命僕剔去椔翳, 構屋二間, 不翦茅, 不削木, 築土爲階, 編荻爲籬, 事簡而功約, 而洞人皆來助之, 不數日告成. 扁曰草舍, 因居之. (……)”(鄭道傳, 「消災洞記」, ꠓ三峰集ꠗ 卷之四, 346∼347쪽). 정도전의 소재동 생활에대해서는 이우성, 「고려시대의 부곡과 그 주민」, ꠓ한국중세사회연구ꠗ, 일조각, 1991,116∼130쪽; 류창규, 「나주 회진 유배시절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사람과의 소통과정」, ꠓ역사학연구ꠗ 27, 2006, 139∼163쪽 참조.
11) ꠓ三峰集ꠗ 卷之二, 「草舍」(317쪽). 5구의 ‘靑’은 ‘淸’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이 시는 김종진, 앞의 글, 1990, 93쪽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초가집」(草舍)이라는 시이다. ‘초사’(草舍)는 곧 소재동에 조성된 초가집에 정도전이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이 시의 주된 정서를 이루는 것은 ‘낯설음’과 ‘분리감’이다. 1‧2구는 초가집의 엉성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어서 3‧4구는 이 집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보여준다. 그 반응은 ‘驚問’(깜짝 놀라서 묻다) 두 글자로 압축된다. 왜 깜짝 놀라서 물
었을까? 없던 집이 생겨서 그랬을 수도 있다. 집이 있을 곳이 아닌데 집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람이 살기에는 그 집이 너무나 누추해 보였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정도전의 초가집은 낯설고 의아한 느낌을 자아냈던 것만은 분명하다.마지막 두 구(7‧8구)는 이런 ‘낯설음’과 그로 인한 ‘분리감’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에 앞서 5‧6구에서는 초가집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런데 그 경관 묘사를 이어받은 7구는 급격한 전절감을 동반한다. 그런 경관이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고 ‘절역’(絶域)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인은 주변 경물로부터 정서적으로 소외되었다. 물아(物我)가 분리된 것이다. 그 분리는 8구로 인해 더욱 극대화된다. 7구와 8구는 서로 대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7구가 집 밖으로 나가서 외부를 보는 것인 반면 8구는 문을 닫고 외부에 대한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7구가 낯선 광경에 노출되는 것인 반면 8구는 예전의 친숙한 자기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면서 7구와 8구는 집의 안과 밖이 서로 반대되면서 하나를 이루듯이 그렇게 결합되어 있다. 사실 이 시에서 그려지고 있는 초가집은 결코 편안한 공간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집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도리어 마음 편할 정도로 주변 환경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집의 안과 밖은 단순한 물리적 구분이 아니라 ‘심리적 경계’가 된다. 이렇듯 7‧8구는 유배객으로서 낯선 곳에 내던져진 정도전 본고는 그와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정도전의 ꠓ금남잡영ꠗ(錦南雜詠) 연구 - 169 -
다만 구체적인 작품분석에 있어서의 심리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유배객으로서의 암담한 심정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은 「해질 무렵」(日暮)이라는 시이다.
물빛 산빛 흐릿한 게 연기 같은데
해 저물녘 객의 마음 더욱 처량해지네.
뒤덮인 잡초에 마을이 궁벽지고
비스듬한 울타리에 땅이 외졌구나.
타는 불은 사람 없어 들 밖으로 뻗어가고
봉화는 어디메뇨 구름가에 비치누나.
저물녘마다 다만 본 게 도리어 이러한데
어느덧 세월 흘러 2년이 지났네.
水色山光淡似煙, 羈情日暮倍悽然.
蓬蒿掩翳村墟合, 籬落欹斜地勢偏.
遠燒無人延野外, 傳烽何處照雲邊.
但看暮暮還如此, 不覺流光過二年.12)
12) ꠓ三峰集ꠗ 卷之二, 「日暮」(같은 곳). 이 시는 김종진, 앞의 글, 1990, 94쪽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다. 다만 구체적인 작품분석은 본고와 같지 않다. 東方學志 제161집 - 170 -
시인은 적소(謫所)의 저물녘 풍경 및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의 소회를 읊고 있다. 시인의 정회를 토로하는 부분이 맨 처음(1‧2구)과 맨 끝(7‧8구)에 배치되고, 그 중간(3∼6구)에 경물 묘사가 이루어짐으로써, 이 시는 시인의 감회로부터 정경 묘사가 흘러나왔다가 다시 시인의 감회로 흘러들어가는 구성을 취한다. 1‧2구에서는 파제(破題)와 더불어 ‘처연함’이라는 감정이 직접 토로된다. 그리하여 그 뒤의 정경 묘사는 모두 처연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3‧4구는 사람 사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었고, 5‧6구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들판에 초점을 맞추었다. 3‧4구에서 그려지고 있는 인가(人家)의 모습은 잡초로 가득하고 구석져 있어서, 황폐하고 궁벽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5‧6구는 허허벌판의 적막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네 구에 걸쳐 경치 묘사가 이루어지다가 7‧8구로 접어들면서 시인의 감회가 표출된다. 그럼으로써 시상이 급격히 전환된다. 특히 7구의 맨 앞에 놓인 ‘但’(다만)이란 글자는 전절감을 동반한다. 통상적으로 율시에서는 5‧6구가 ‘전’(轉)이고 7‧8구가 ‘결’(結)인데, 이 시에서는 7‧8구가 전‧결을 모두 맡은 셈이다. 7구에 와서야 이루어지는 급격한 전환은 이 시의 구성을 불완전하게 보이게 할 수도 있지만, 시인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7구는 3∼6구의 경치 묘사를 받는 부분이고, 8구는 시인의 감회를 토로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3∼6구의 경치 묘사가 어떻게 7구로 수렴되는가? 이 점과 관련하여 ‘但’, ‘暮暮’(저물녘마다), ‘還’(도리어) 등의 글자가 주목된다. 이들 단어는 모두 유배객의 ‘하릴없음’을 미묘하게 보여준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유배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황폐한 마을과 허허벌판을 보는 것뿐이다. 그러니 ‘다만’이다. 이런 광경을 어제 저녁에도 봤고 오늘 저녁에도 보고 있고 내일 저녁에도 또 봐야 한다. 매일 매일이 같은 날이다. 그러니 ‘저물녘 마다’이고 ‘도리어’이다. 시인은 이런 상황에 처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런 상황을 매일 직면해야 한다. 8구는 이런 ‘하릴없음’과 그에 따른 절망감을 증폭하면서 여운을 남긴다. 8구는 ‘不覺’(나도 모르게)이라는 말과 더불어 시작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2년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8구의 ‘不覺’은 7구의 ‘但看’과 대비적으로 묶임으로써 시인의 ‘하릴없음’을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매일매일 같은 광경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 2년의 세월은 유배지에서의 하루하루가 쌓인 것이다. 즉, ‘2년’이란 말은 그 하릴없이 지내온 세월의 길이와 그 속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적막감, 절망감, 체념의 무게를 가시화한다.
같은 나날이 반복되어 온 시인에게 아마 시간의 흐름은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렇게 7구와 8구는 대비적으로 결합됨으로써 긴 여운을 남긴다. 따라서 3구에서 6구까지 정경 묘사가 이루어지다가 7구에 이르러 시상이 급격히 전환된 것은, 하루하루 정지된 시간 속을 살다가 어느 순간에 2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체감하게 된 시인의 심리적 추이를 구조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주 유배기 동안에 정도전이 절망감 속에서 살아갔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산새 울음 그쳤고 낙화(落花) 날아다니니
나그네는 못 가건만 봄은 벌써 돌아갔네.
홀연 남쪽 바람에 정다운 생각 있어
뜨락에 불어와 풀이 우거졌다네.
山禽啼盡落花飛, 客子未歸春已歸.
忽有南風情思在, 解吹庭草也依依.13)
13) ꠓ三峰集ꠗ 卷之二, 「四月初一日」(305쪽).
「4월 초하루」(四月初一日)라는 시이다. 음력으로 4월 초하루는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다. 봄이 지나간 것에 대해 상춘(傷春)의 정회를 노래하는 것이 한시에서 일반적이다. 더군다나 정도전 같이 유배객의 신세로 있으면 그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이 시의 1‧2구는 그 슬픔을 읊고 있다. 특히 2구에서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그네와 이미 돌아간 봄이 대비됨으로써 시인의 서글픈 처지가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그런데 3구에서 ‘홀연’이란 말과 더불어 문자 그대로 갑작스러운 전환이 일어난다. 그 전환을 가져온 것은 남쪽 바람이다. 남쪽 바람이 뜰의 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남쪽 바람은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여름 바람이다. 그런데 정도전의 적소도 남방이다. 따라서 남쪽 바람은 정도전이 적소에서 느낀 희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봄은 지나갔고 꽃은 졌다. 하지만 그 대신 여름이 오고 풀이 우거질 것이다. 결국 시인은 비탄의 정서에 머물지 않고 생(生)의 약동과 충만함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 것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유배지를 타향이 아닌 친숙한 곳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마음을 스스로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전에 소란한 조시(朝市)에 있을 젠
한적한 전야(田野)를 무척 그리워했지.
이제는 예전 소원 이루어졌으니
죄의 그물 촘촘하다 한탄할쏜가.
벼 기장이 한창 무성하니
농사일이 장차 끝이 나겠지.
더구나 진귀한 물산 많으니
등귤(橙橘)을 올리는 걸 볼 수 있으리.
내 고향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오
남은 날을 여기서 보낼 만하지.
명(命)을 믿으니 다시 무얼 의심하랴
총애와 이익은 칼끝의 꿀 같은 걸.
원컨대 그대는 내 말 들으오
나는 다시 말하지 않을 테니.
昔在朝市喧, 苦憶田野寂.
今來愜夙尙, 肯歎罪罟密.
禾忝正離離, 歲功將告畢.
況復物產奇, 行看薦橙橘.
莫言非吾土, 可以送餘日.
信命更何疑, 寵利刀頭蜜.
願公取吾言, 吾言勿再出.14)
「염동정(廉東亭)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奉次廉東亭詩韻)이다. 염동정은 곧 염흥방(廉興邦, ?∼1388)이다. 1∼4구에서 시인은 시골 생활이 숙원(宿願)이었는데 나주에 귀양 옴으로써 그 숙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한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말일 수도 있고, 자신을 염려하는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유배 생활을 받아들이는 시인의 심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15) 이어서 5∼8구는 지금의 유배지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를 말하고 있다. 정도전의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하다. 고려 말기에는 왜
구의 피해가 극에 달했는데, 전라도 지역의 피해가 특히 극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연해(沿海)의 고을 중에 나주만은 왜구의 침해를 입지 않았고, 그곳 주민들은 농사를 지어가며 무난히 지내왔다고 한다.16) 정도전은 「나주 동루(東樓)에 올라 부로(父老)들에게 효유한 글」 (登羅州東樓, 諭父老書)에서 이 점을 특기한 바 있다.17) 그렇다면 정도전의 적소인 나주 거평부곡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환경을 갖고 있었을 듯하다.
14) ꠓ三峰集ꠗ 卷之一, 「奉次廉東亭詩韻」(292쪽).
15) 「김직장(金直長) 미(彌)가 와서 가원(可遠)의 시를 보여주기에 차운하다」(金直長彌來
示可遠詩次韻)에 “출처(出處)와 궁통(窮通)일랑 모두 그만두고 / 남방으로 귀양 오니 이 또한 청유(淸遊)로세”(出處窮通事事休, 謫來南國亦淸遊)라는 구절이 보이는데(ꠓ三峰集ꠗ 卷之二, 317쪽), 이 역시 비슷한 심적 태도를 보여준다.
16) 이우성, 앞의 글, 1991, 118쪽 참조.
17) 鄭道傳, ꠓ三峰集ꠗ 卷之三, 「登羅州東樓, 諭父老書」(330쪽). “嗟夫! 羅人田其田宅其宅, 安生樂業, 將五百年于玆, 何莫非祖宗休養生息之恩? 亦父老所知也. 然是州濱海極邊以遠, 所患莫倭寇若也. 沿海州郡, 或虜或徙, 騷然無人, 不能守土地修貢賦, 版籍所載, 生齒所息, 財賦所出, 皆棄於草木之所蕃ˎ狐兔之所穴, 而其人之流散死亡, 皆莫之恤, 倭故也. 而羅介於其中, 繁庶如平日, 桑麻之富, 禾稻被野. 其民晝作夜息, 怡怡煕煕, 以樂其樂. 以及行旅登樓, 顧望山川原野, 極遊覽之娛, 人盛物阜, 仰聖德而歌遺風, 不知行役之勞ˎ遷逐之感也. 是州之在四隣殘破蕩析之中, 劇寇侵略之內, 而安然獨全, 如萬丈之陂以障橫流之衝, 雖有奔蕩激射, 極其怒勢, 而其爲陂自若. 民恃無恐, 豈非祖宗之德入人者深, 非若他州之民無恒產無恒心比也? 豈非牧守得人, 能宣德意, 以結民心, 使不散也, 抑父老之敎有素而民知向義也? 吁可嘉矣!”
이 시의 5∼8구는 이 점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의 내용을 이어받아, 시인은 자신의 적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9‧10구에서 인상적으로 밝힌다. 적소를 제이의 고향으로 삼아 여생을 보내도 괜찮겠다는 말이다. 요컨대 시인은 자신에게 가해진 정치적 시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초연한 마음을 보여준다. 그 초연함은 평소 자신의 인생관, 적소의 안정적인 생활환경 등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운명에 대한 철학적 사고에 기인한다. 11구에서 시인은 명(命)을 믿으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느냐고 말한다. 운명 내지 천명(天命)은 나주 유배기의 정도전에게 실존적인 화두였다. 이 점과 관련하여 ꠓ금남잡제ꠗ 소재 산문들이 참고가 된다. 그 중 「집사람의 문난(問難)」(家難)을 예로 들기로 한다. 이 글은 정도전 아내의 질문과 그에 대한 정도전의 대답으로 구성된다. 부인의 질문은 이렇다. 당신이 고생해가며 공부한 끝에 결국 유배 죄인이 되어 가문이 위태롭고 세상 사람의 비웃음을 받게 되었으니, 현인‧군자(賢人君子)란 과연 이런 존재인가? 여기에 대해 정도전은 성패(成敗)와 이해(利害)는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므로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밖에 「농부에게 답하다」(答田夫), 「금남의 야인」(錦南野人) 등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내용이다.18) 그리고 ꠓ금남잡제ꠗ와 마찬가지로 역시 나주유배기에 지어진 「마음이 묻다」(心問)와 「하늘이 답하다」(天答)도 천리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19) 요컨대 유배기의 정도전에게 인간의 운명과 하늘의 이치는 자신의 실존이 걸린 화두였던바,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천리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합치시켰던 것이다. “명을 믿으니 다시 무얼 의심하랴”라는 싯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18) 「집사람의 문난」에 대해서는 문철영, 앞의 글, 1986, 186∼187쪽 참조. 「농부에게 답하다」와 「금남의 야인」에 대해서는 박성규, 앞의 글, 1982, 284∼286쪽; 김남형, 앞의 글, 1999, 237∼257쪽; 원주용, 앞의 글, 2006, 91∼93쪽 참조.
19) 「마음이 묻다」와 「하늘이 답하다」에 대해서는 한영우, 앞의 책, 1999, 107∼108쪽 참조.
요컨대 정도전은 정치적 시련을 겪으면서 눈앞의 이해득실이 아닌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응시했고, 그런 성찰 속에서 유배기의 삶을‘좋은 곳에서의 살만한 삶’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운명에 대한 믿음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기도 할 터이다. 「염동정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에서 운명 내지 천리에 대한 사고는 다소 단편적인 형태로 반영되어 있다. 그런 사고를 좀 더 확장된 형태로 보여주는 시로 「한가위 노래」(中秋歌)를 들 수 있다. 1375년 작이다. 정도전이 나주에 유배 간 것이 같은 해 5월의 일이므로, 유배 생활한 지 4개월째 되던 때의 작품인 셈이다. 1375년의 한가위는 정도전이 유배지
에서 처음 맞는 한가위이다. 따라서 작년과 올해의 대비가 이 시의 가장 큰 골격을 이룬다. 우선 작년에 대한 언급으로 이 시는 시작한다.
작년 한가위에 달구경할 때
가무(歌舞)에 왁자지껄 잔치 벌였지.
높은 당(堂)에 발[簾] 걷으니 밤이 낮같았고
맑은 빛이 자리에 엉기니 신선이 늘어앉았지.
취중에 달을 불러 금분(金盆)으로 삼고
옥호(玉壺)의 좋은 술에 시를 백 편 지었지.
去年中秋翫月時, 歌舞縱謔開華筵.
高堂簾卷夜如晝, 淸光凝座羅神仙.
醉中呼月作金盆, 玉壺美酒詩百篇.20)
20) ꠓ三峰集ꠗ 卷之一, 「中秋歌」(295쪽).
그 다음으로 올해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올해 회진현에 멀리 귀양을 오니
대 울타리 초가집이 황량한 산 앞에 있네.
가을바람 으스스 숲 덤불을 움직이니
물상(物象)이 쓸쓸한 게 어찌 그리 서글픈지.
이때 달을 대하니 슬픔이 배가 되는데
돌아보니 예전 친구들은 연기처럼 흩어졌네.
今年遠謫會津縣, 竹籬茅屋荒山前.
秋風颼颼動林莽, 物象蕭條何悄然.
是時對月倍怊悵, 回首舊遊散如煙.21)
21) ꠓ三峰集ꠗ 卷之一, 같은 글(같은 곳).
이렇게 보면 작년과 올해가 극명히 대비된다. 작년의 한가위가 호사스럽고 시끌벅적하고 신났다면, 올해의 한가위는 초라하고 쓸쓸하고 서글프다. 으스스한 가을바람은 처량한 느낌을 더한다. 벗들이 연기처럼 흩어진 것에서 인생무상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흩어진 벗이란, 구체적으로는 정몽주, 김구용, 이첨 등 본인과 마찬가지로 유배형에 처해져 각지로 흩어진 신진 사대부들을 가리킬 터이다. 작년, 즉 1374년의 한가위는 아직 공민왕이 시해되기 전이다. 정도전을 포함한 신진 사류에게는 상승기였던 셈이다. 따라서 작년에 대한 추억은 그 좋았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다. 반면 올해의 한가위는 이미 우왕이 집권한 뒤
이다. 게다가 유배형에 처해진 이들 중 몇 명은 이미 죽고 말았다. 따라서 작년과 올해의 대비는 곧 급변한 고려 말의 정치 상황에 대응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대비 속에서 정도전은 그저 비탄에 머물지 않고 다음과 같은 인식을 보여준다.
이 몸은 그대로지 다른 몸이 아니고
올해의 밝은 달은 작년과 비슷하네.
본시 인정(人情)에 다른 느낌 있는 거지
조물주가 부여한 건 원래 치우치지 않다네.
此身由來非異身, 今年明月似前年.
自是人情有異感, 造物賦與原非偏.22)
22) ꠓ三峰集ꠗ 卷之一, 같은 글(같은 곳).
유배지에서 맞은 첫 번째 추석을 계기로 인간사의 극심한 변화를 통감한 정도전은, 그래서 세상사가 허무하다고 말하거나 비탄의 정조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은 원래 그대로이지 다른 몸이 아니고, 올해의 달은 작년의 달과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온갖 변화 속에서도 존재의 본질 내지 본래적인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조물주가 부여한 것이 원래 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그 다양한 변화상은 어째서 생기는가? 인정(人情)상 다르게 느껴져서 그렇다. 요컨대 ‘인간의 감정’에서 ‘조물주의 눈’으로 사고의 도약이 일어난 것이다. ‘조물주가 균등하게 부여한 것’과 ‘인정상의 다른 느낌’의 이원 구조는 성리학 특유의 이원 구조, 즉 ‘이(理)/기(氣)’나 ‘본연지성(本然之性)/기질지성(氣質之性)’ 등의 이원 구조를 연상시킨다. 성리학에서는 자연의 운행과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본체’가 선험적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선험적 규정과 그 현상적 작용 사이의 괴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후천적인 것 내지 경험적인 것이 함께 상정되어야 한다. 정도전은 성리학자로서 이런 사유 방식을 내면화했음은 물론, 앞에서 잠시 거론한 바 있는 나주 유배기 산문 「마음이 묻다」, 「하늘이 답하다」 등의 글을 통해, 비록 하늘의 상도(常道)가 있더라도 그것을 실제 행하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의 행위로 인해 천지의 화기(和氣)가 손상되어 재앙과 상서(祥瑞)가 불합리하게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천도와 무관하다는 생각을 피력한 바 있다.이렇게 보면, 인용 부분은 정도전의 성리학적 사고가 유배지에서의 정회와 결합됨으로써 시적으로 구현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정도전에게 성리학은 불교에 대한 이론 투쟁을 뒷받침하는 사상이자, 사대부적 경세의식을 담지하고 있는 사상이자, 인간 심성을 규명하고 천도와 인륜적 질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사상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에 대한 성찰의 힘을 제공해주는 사상이자 그 시련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보루가 되어준 사상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정도전에게 성리학적 사고는 실존적 깊이를 갖는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한가위 노래」는 일부 철리시(哲理詩)에 방불한 면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이 비탄의 정조를 완전히 탈피하여 달
관의 경지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정도전은 이런 고양된 인식 속에서 암담한 현실을 다시 직면한다. 이런 시적 결말이 주목을 요한다. 다음은 「한가위 노래」의 끝부분이다.
묻노니 밝은 달이 비추는 곳에
몇 사람이 즐겁고 몇 사람이 슬플까.
내년에 달 보는 건 또 어디서일까
즐거울지 슬플지 알 수가 없네.
밝은 달은 말이 없고 밤은 깊어 가는데
홀로 서서 창망히 원망의 시 노래하네.
爲問明月之所照, 幾人歡樂幾人悲.
明年見月又何處, 歡歟悲歟未可知.
明月無言夜將半, 獨立蒼茫歌怨詩.23)
23) ꠓ三峰集ꠗ 卷之一, 같은 글(같은 곳). 인용 부분 중 첫 두 구절은 문철영, 앞의 글, 1986, 183∼184쪽에서도 주목한 바 있다.
인용 부분의 첫 두 구는, 나 말고도 기쁨과 슬픔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하는 통찰을 보여준다. 사실 정도전 같이 정치적 시련을 겪고 있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럽다고 느끼기 쉽다. 그런데 앞에서는 천리(天理)의 관점으로 세상사를 봄으로써 인식의 확장이 일어났다면, 이번에는 ‘나’가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 눈을 돌림으로써 인식의 확장이 일어난 것이다.그런데 인용 부분의 첫 두 구절은 양의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그 구절들은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감을 동반하기도 하는 듯하다. 이 땅 위의 사람 중 몇 명이 즐겁고 몇 명이 슬픈가? 이것은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슬픔 속에 살아간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희노애락를 느끼는 사람이무수히 많고 보면 앞으로의 기쁨과 슬픔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용 부분의 첫 두 구절에 내포된 이 두 가지 의미 중 전자는 그
앞의 철학적 통찰과 이어지고, 후자는 인용 부분의 세 번째‧네 번째 구절을 유도한다. 세 번째‧네 번째 구절은 곧 자기 처지의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다. 지금은 나주에서 달을 보고 있지만, 내년은 또 어떨지 시인은 기약할 수 없다. 의문문이 연달아 사용된 것은 이런 처지에 대응된다. 이런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감을 이어받아 마지막 두 구절은 절망감을 직접적으로 토로한다. 결국 이 시는 철학적 성찰을 통과한 뒤에 다시 비탄의 정서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마지막 두 구에서 ‘夜將半’(밤이 반을 지나려 한다)은 시간의 경과를 표시하는 말이다. 적소에서 한가위를 맞아 달을 보면서 작년 추석을 떠올린 시인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다가 이제 그 상념으로부터 빠져나와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린다. 따라서 ‘夜將半’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를 표시하는 말이 아니라, 상념으로부터 빠져나온 그 시점을 표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시인이 확인하는 것은 홀로 서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뿐이다. ‘夜將半’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獨立’(홀로 서 있다)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런 심리적 추이에 대응된다.
요컨대 정도전은 극심한 삶의 변화를 실감하면서도 비탄과 허무의 감정에 빠지지 않고 철학적 성찰로 나아갔지만,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결국 떨칠 수 없었고, 홀로 이 상황을 견뎌야 하는 지금 이 순간의 처지를 확인하고는 다시 깊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상가 정도전’, ‘정치가 정도전’에게서는 좀처럼 확인하기 힘든 ‘시인 정도전’의 미묘하고 복합적인 내면세계이다.
4. 고독 속의 유대
그렇다면 정도전은 어떻게 시련을 견뎠는가? 벗의 존재가 큰 의지가 되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1375년에 정도전 뿐 아니라 신진 사류 다수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ꠓ금남잡영ꠗ에는 이렇게 본인과 같은 처지로 몰린 정몽주와 염흥방 등을 생각하며 지은 시들이 다수 실려 있다. 우선 정몽주에게 보낸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찌하여 마음 같이한 벗이
제 각각 하늘 한쪽 구석에 있나.
때때로 생각이 여기 미치니
서글픈 마음이 저절로 드네.
봉황새는 천 길 높이 훨훨 날아서
빙빙 둘며 산 동쪽으로 내려오지.
이 사람은 출처(出處)에 어두워
한 번 움직이면 법에 저촉된다네.
지란(芝蘭)은 태울수록 더욱 향기롭고
좋은 쇠는 달굴수록 더욱 빛나네.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서로 잊지 말자고 길이 맹세하네.
夫何同心友, 各在天一方.
時時念至此, 不覺令人傷.
鳳凰翔千仞, 徘徊下朝陽.
伊人昩出處, 一動觸刑章.
芝蘭焚愈馨, 良金淬愈光.
共保堅貞操, 永矢莫相忘.24)
24) ꠓ三峰集ꠗ 卷之一, 「次韻寄鄭達可夢周」(292쪽). “永矢莫相忘”은 劉基의 「送駱起原之新城知縣任」(ꠓ誠意伯文集ꠗ 卷16)의 마지막 구와 같다. 아마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한다.
당시에 정도전은 나주에, 정몽주는 울산의 언양에 유배되었다. 1‧2구는 이런 상황을 읊은 것이다. ‘마음을 같이함’은 신진 사대부로서의 동류의식을 말한 것이고, ‘각각 떨어져 있음’은 친원파 대신들과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시련을 말한 것이다. 1구의 ‘同’과 2구의 ‘各’은 서로 반대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유배형에 처해진 사실로 인해 또 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1‧2구가 대비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서글픔, 절망감, 안타까움이 뚜렷하게 전달된다. 그리고 첫 구부터 의문문으로 시작함으로써 비탄의 정서가 더욱 강하게 부각되면서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끈다. 그러다가 9‧10구에 이르러서 시상이 크게 전환된다. 이 두 구절은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동지적 유대감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란 뜻의 ‘愈’를 연달아 두 번 사용한 것은, 시련에 굴하지 않는 신진 사류의 정신 자세에 상응하는 자법(字法)이다. 지란(芝蘭)과 좋은 쇠 운운한 것은 모두 ꠓ주역ꠗ 「계사전」(繫辭傳)의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을 수 있다. 마음을 함께한 사람의 말이 그 향기롭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구절에 연원을 둔다. 따라서 9‧10구는 1구의 ‘同心’(마음을 함께하다)이란 말과 조응된다. 이어서 11‧12구는 함께 지조를 지키며 서로 잊지 말자는 다짐의 말이다. 일견 평범하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이 두 구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곧은 지조를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동지와 함께 지킨다는 사고이다. 지조를 지키는 것은 한 개인의 고결한 행동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런데 정도전이 말하고 있는 바는, 지조란 것이 그저 고독한 도덕적 수행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동지적 유대와 격려 속에서 함께 지켜진다는 것이다. 11구가 ‘함께’란 뜻의 ‘共’으로 시작한 것은 이런 사고를 반영하지 않은가 한다. ‘保’(지키다), ‘矢’(맹세하다), ‘莫’(하지 말자), ‘永’(영원히), ‘堅’(굳다), ‘貞’(곧다) 등 11‧12구를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글자들은 모두 굳은 의지를 뜻한다. 요컨대 정도전은 강고한 정신 자세를 보여주는바, 그 강고함은 고독한 내면세계 속에서 구축된 것이 아니라 동지적 유대와 결속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정도전은 유폐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고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인용시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있는 신진 사류의 정신세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이어서 살펴볼 것은 염흥방에게 보낸 시이다. 염흥방은 결국 정도전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지만, 우왕 초기까지만 해도 신진 사대부들과 노선을 함께 했던 인물이다.25) 정도전이 나주로 귀양 가게 되자 염흥방은 그를 구제하기 위해 애썼거니와, 그런 염흥방 역시 이인임의 뜻을 거슬렀다가 정도전과 같은 해에 유배형에 처해졌다.26)
25) 염흥방의 행적에 대해서는 도현철, 「고려말 염흥방의 정치활동과 사상의 변화」,
26) 염흥방의 유배지는 미상이다. 곧 인용할 시를 보면 광주일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역시
불분명하다.
ꠓ금남잡영ꠗ과 ꠓ금남잡제ꠗ에는 염흥방을 생각하며 지은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들작품은 결국 엇갈리고 만 두 사람의 교유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음은 「동정(東亭)에게 삼가 부치다」(奉寄東亭)이다. 동정은 곧 염흥방의 호이다.
황천(皇天)이 사계절을 나누었으니
추위와 더위가 제각각 때가 있네.
정월 이미 지났고
입춘 또한 안 더딘데,
추위는 아직도 아니 물러가
으스스 살갗을 찌르는구나.
낯선 땅에 막혀 있는 오랜 나그네
헤진 옷에 헌 솜이 분분하다네.
새벽닭이 좀처럼 울지 않으니
밤새도록 부질없이 서글퍼하네.
광산(光山)의 산마루 높고 높은데
구름은 길이 여기 머물러 있네.
어찌하여 남쪽에 함께 떨어져
서로 따르지 못하는 건지.
거리는 얼마쯤 될까
생각할 적마다 슬퍼지누나.
그대는 부디 자기 몸 아껴
원대한 기약을 해주시기를.
皇天分四節, 寒暑各有時.
原正旣已屆, 立春亦不遲.
寒威尙未收, 凜冽侵人肌.
殊方滯久客, 短綿紛敞衣.
晨鷄不肯鳴, 達夜空悽.
峨峨光山顚, 停雲長在兹.
如何同落南, 不得相追隨.
道里能幾許, 每憶令人悲.
公其自金玉, 遠大以爲期.27)
27) ꠓ三峰集ꠗ 卷之一, 「奉寄東亭」(292쪽).
이 시는 봄이 되었는데도 아직 추운 상황으로부터 시작한다. 봄이 봄같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 시인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초라하고 처량하다. 이런 모습을 한 시인은 염흥방을 생각한다. 벗이 걱정되었을 수도 있고, 마음으로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벗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전고가 주목된다. ‘停雲’(머물러 있는 구름)은 떨어져 있는 벗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도연명(陶淵明)의 「정운」(停雲)이란 시에 그 연원을 둔다.28) 도연명은 정도전과 염흥방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29) 염흥방은 「도연명 시 뒤에 부친 서문」(陶詩後序)에서 도연명을 두고 “배고프고 추운 고통에 초췌했지만 유연(悠然)한 즐거움이 있었고, 술에 취하는 데 빠졌지만 초연한 절조가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30) 정도전은 이 말에 공감을 표하면서, 도연명에 대해 염흥방과 나눈 대화를 「동정의 「도연명 시 뒤에 부친 서문」을 읽고」(讀東亭陶詩後序)에 기록해 둔 바 있다.31) 정도전 자신도 「도연명 시를 베끼다」(寫陶詩)라는 시에서 도연명을 두고 나의 마음을 얻었다고 밝혔거니와,32) 염흥방에게 지어준 「동정(東亭)의 대나무 숲에 삼가 적다」(奉題東亭竹林)라는 시에 서 “도연명을 읽노라니 정오가 되려 하는데 / 바람 불어 맑은 이슬이 옷에 떨어지네”33)라고 읊은 바 있다.
28) 도연명의 「停雲」은 총 4수인데, 그 중 첫 번째를 들면 다음과 같다. ‘靄靄停雲, 濛濛時雨. 八表同昏, 平路伊阻. 靜寄東軒, 春醪獨撫. 良朋悠邈, 搔首延佇.’
29) 정도전의 도연명 시 애호에 대해서는 이강렬, 앞의 글, 1987, 124∼126쪽; 김종진, 앞
의 글, 1990, 43∼56쪽 참조.
30) 현재 염흥방의 글은 전하지 않지만 정도전이 다음과 같이 인용한 덕에 그 일부를 엿볼 수 있다. 鄭道傳, ꠓ三峰集ꠗ 卷之四, 「讀東亭陶詩後序」(356쪽). “今得東亭先生「陶詩後序」曰: ‘憔悴於飢寒之苦, 而有悠然之樂; 沈冥於麴糱之昏, 而有超然之節.’”
31) 鄭道傳, ꠓ三峰集ꠗ 卷之四, 「讀東亭陶詩後序」(356∼357쪽).
32) 鄭道傳, ꠓ三峰集ꠗ 卷之一, 「寫陶詩」(292쪽). “茅簷虛且明, 隨意寫陶詩. 陶翁信高士, 羲皇乃其儔. 委順大化中, 無慮亦無爲. 誰言千載遙, 同得我心期. 珍重尙友志, 歲晚莫相違.”
33) 鄭道傳, ꠓ三峰集ꠗ 卷之二, 「奉題東亭竹林」(305쪽). “臥讀陶詩日將午, 風吹淸露滴衣裳.”
요컨대 정도전과 염흥방은 유배기의 시련 속에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 삶의 태도를 도연명에게서 발견했고, 그런 시각을 공유하면서 서로를격려했다. 정도전이 염흥방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도연명의 시를 전고로 끌어들인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벗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벗과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특히 “거리는 얼마쯤 될까 / 생각할 적마다 슬퍼지누나”라는 싯구는, 벗을 찾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시인의 심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시인이 벗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격려와 당부의 말을 건네는 것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두 구절(17‧18구)은 그 앞, 즉 벗을 찾아가지 못하는 데 따른 서글픈 마음을 토로한 부분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상의 큰 전환을 가져오기도 한다. 마지막 두 구가 나오기 직전에 놓인 글자는 ‘悲’이다. 즉, 16구에서 시인의 슬픈 마음이 직설적으로 표현된 직후에 곧바로 17‧18구가 이어진다. 16구까지의 내용은 지금의 서글픈 처지와 관련된다. 반면 17‧18구의 내용은 앞으로의 원대한 기약을 당부한 것이다. 비탄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서 정도전은 오히려 앞날을 크게 내다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지적 유대와 격려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신진 사대부의 정신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지적 유대 속에서 외로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정도전은 본인과 같은 처지에 놓인 염흥방을 격려하면서 시련의 시기를 버텼지만, 그런 격려로도 끝내 해소할 수 없는 깊은 외로움은 여전히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견지에서 다음 시를 읽어보기로 한다. 제목은 「달밤에 동정을 생각하며」(月夜奉懷東亭)이다.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니
긴 허공이 맑고 고요하네.
한 조각 바다 위 달이
만 리 초가집을 비추네.
차가운 그림자 하늘거리니
도리어 유배객이 불쌍하다는 듯.
그래서 동정옹(東亭翁)을 생각하노니
이러한 유독(幽獨)을 응당 함께하겠지.
半夜獨起立, 長空澹自寂.
一片海上月, 萬里照茅屋.
冷影故依依, 還如憐竄客.
爲憶東亭翁, 應共此幽獨.34)
34) ꠓ三峰集ꠗ 卷之一, 「月夜奉懷東亭」(292쪽). -
이 시는 1·2구에서부터 시인의 ‘홀로 있음’을 정면에 내세우면서 시작 된다. 이어서 3‧4구는 ‘一片’과 ‘萬里’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유배지에 서의 밤이 자아내는 적막감, 쓸쓸함을 부각시킨다. 이어서 5‧6구에서는 ‘차가운 그림자’가 시인의 고독을 확인시켜준다. 주지하다시피 달빛 아래에 ‘나’와 그림자 밖에 없는 구도는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에 연원을 둔다. 그런데 7‧8구로 가서 시인은 염흥방이 자신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벗이 있으니 외롭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고독을 벗도 응당 함께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고독은 해소되지 않은 채 고독으로서 공유된다. 결국 정도전은 고독 속에서 벗과 고독을 공유함으로써 고독하게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지막 구의 마지막 글자인 ‘獨’은 미묘한 의미망을 형성한다. 이 글자는 1구의 ‘獨’과 조응된다. 따라서 이 시는 ‘獨’에서 시작해서 ‘獨’으로 끝나는 구조를 취한다. 그런데 1구의 ‘獨’이 시인 혼자만의 고독을 뜻하는 반면, 8구의 ‘獨’은 시인의 고독인 동시에 벗의 고독이기도 하다. 따라서 8구의 ‘獨’은 ‘공유된 고독’이다. 그것은 공유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독이다. ‘공유’와 ‘고독’은 길항관계를 형성하지만 한 데 결합되어 있다. 요컨대 유배기의 동지적 유대는 ‘고독 속의 유대’이고 시인의 고독은 ‘유대 속의 고독’이다. 고독의 이런 미묘한 의미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8구의 첫 글자 ‘應’(응당)이다. 결국 정도전이 염흥방과 고독을 공유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유는 추측형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35)
35)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고독을 공유하고 있으리라는 시인의 말이 상상과 환상의 투영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천착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지적 유대가 강하기 때문에 그 추측은 강한 추측이다. 그러니 ‘응당’이다. 벗과의 공유가 ‘응당’이란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벗과 떨어져 있으면서 홀로 고독을 견뎌야 했던 정도전의 그 당시 존재 방식에 기인한다.
이상으로 정도전이 정몽주와 염흥방을 생각하며 지은 시들을 살펴보았다. 그밖에도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유했다. 그 교유는 꼭 ‘동인적 유대’ 운운할 정도의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 역시 정도전의 나주 유배기 생활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그 교유 활동과 관련된 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정림사(定林寺)의 명상인(明上人)을 찾아가 다」(訪定林寺明上人)이다. 정도전은 유배기에 승려들과도 교유했는데, 이 시는 그 일단을 보여준다.
말 달려 중 찾으니 유쾌하구나
덩굴을 뒤흔들고 이끼를 부순다네.
탁탁 문 두들겨도 더딜까봐서
사미승 급히 불러 손님 왔다 외치네.
走馬尋僧亦快哉, 蕩搖蘿蔓破莓苔.
扣門剝啄嫌遲晚, 急喚沙彌報客來.36)
이 시는 대단히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走馬’(말 달리다)라는 말이 맨 처음에 놓임으로써, 이 시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빠른 속도감을 도입한다. ‘亦快哉’(또한 유쾌하다)라는 산문투의 표현은 정제되었다기보다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방문길에 오른 시인의 흥분과 들뜬 마음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어서 2구는 말을 달려 급히 가느라 덩굴이 흔들리고 말발굽에 이끼가 부서지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蕩搖’(흔들리다), ‘破’(부서지다)가 1구의 동세(動勢)를 이어받아 역시 대단히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끝으로 3‧4구는 어서 빨리 상대방을 만나려고 서두르는 시인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4구의 맨 첫 글자인 ‘急’은 그저 시인의 동작을 묘사할 뿐 아니라 결국 시인의 심리 상태에 해당한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자야(子野)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 호연(浩然)의 운을 써서 보이다」(聽子野琴, 用浩然韻示之)라는 시이다.37)
36) ꠓ三峰集ꠗ 卷之二, 「訪定林寺明上人」(306쪽).
37) 자야(子野)는 강호문(康好文)의 자(字)이다. 그는 정도전과 동년(同年) 급제생으로, 호
는 매계(梅溪)이다. 「用李浩然集詩韻, 示同年康子野」(ꠓ三峰集ꠗ 卷之一, 291쪽)라는 시의 제목에서 ‘康子野’는 ‘同年’이라고 되어 있으며, 제목 밑에 그 이름이 ‘好文’이고 호
는 ‘梅溪’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맑은 바람은 높은 나무로 들어가고
그윽한 시내는 깊은 숲에서 우네.
구학(丘壑)에 있는가 의심했더니
곁에 거문고 있는 줄 몰랐구려.
내가 아끼는 강자야(康子野)는
세상과 더불어 부침(浮沈)을 맡겼지.
그래서 담박한 그 소리가
나그네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
淸風入高樹, 幽澗鳴深林.
誤疑在丘壑, 不知傍有琴.
我愛康子野, 與世任浮沈.
所以淡泊聲, 能慰羇旅心.38)
38) ꠓ三峰集ꠗ 卷之一, 「聽子野琴, 用浩然韻示之」(291∼292쪽).
이 시에서는 세 겹의 일체화가 이루어진다. 그 일체화 속에서 시인은 위안을 얻는다. 첫 번째는 거문고 소리와 자연의 일체화이다. 1‧2구는 거문고 소리를 묘사한 것이다. 연주자가 거문고를 타니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그윽한 시내 소리가 울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거문고 연주와 더불어 일대는 곧 산골짜기가 된다. 거문고 소리와 자연이 합일된 것이다. 4구의 ‘不知’란 말은 그 일체화를 각인시켜준다. 두 번째는 거문고 소리와 연주자의 일체화이다. 3‧4구에 이어 5‧6구는 연주자의 인간 자세를 언급한다. 거문고 소리에서 연주자로 시상이 전환한 것이다. 5구가 ‘我’로 시작하는 것도 전절감을 준다. 5‧6구를 보면 연주자는 초연한 삶의 자세와 담박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왜 시인은 거문고 소리를 언급한 뒤에 연주자의 인간 자세를 말한 것인가? 7구의 ‘淡泊聲’(담박한 소리)은 1∼4구의 거문고 소리와 5‧6구의 인간 자세를 하나로 합친 말이다. 즉, 시인은 거문고 소리가 연주자의 인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거문고 소리와 연주자가 합일된다. 세 번째는 거문고 소리와 시인, 혹은 거문고 연주자와 시인의 일체화이다. 7‧8구에서 시인은 담박한 거문고 소리가 나그네의 마음, 즉 유배객인 본인의 마음을 잘 위로해준다고 말한다. 거문고 연주자와 시인 사이에 깊은 정서적 교융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교융은 7‧8구로 오기 전에 미리 예견되어 있다. 5구의 ‘愛’라는 글자는 곧 그 깊은 교융을 암시하고 있다. 이 세 겹의 일체화를 통해, 시 전체 내용은 결국 ‘위안’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꼭 마지막 구절에서 ‘慰’라는 글자가 나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 전체에서 마지막 두 구의 구법은 도드라져 보인다. 7‧8구는 매우 산문적이다. 인과 관계를 의미하는 ‘所以’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7‧8구는 10자구법(十字句法)의 유수대(流水對)를 이룬다. 이러한 몇 가지 구법 상의 특징으로 인해, 마지막 두 구는 시 내용 전체를 회집(會集)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신장로(信長老)가 고인사(古印社) 주인의 명으로 와서 흰쌀을 주기에, 이별에 임하여 시를 주다」(信長老以古印社主命來惠白粲, 臨別贈詩)이다.
산촌(山村)에 가을 해 저물자
손님이 사립문 두드리네.
소매에서 편지 꺼내고
바랑에는 흰 쌀이 깨끗하네.
벗님의 마음은 은근한데
나는 객지 떠도는 신네.
한 끼 밥에 몸을 바칠 만하니
천금으로 갚아도 가벼울 테지.
山村秋日暮, 有客扣柴荊.
袖裏華牋出, 囊中白粲精.
殷勤故人意, 漂泊異鄕行.
一飯身堪殺, 千金報亦輕.39)
39) ꠓ三峰集ꠗ 卷之二, 「信長老以古印社主命來惠白粲, 臨別贈詩」(313쪽).
이 시의 창작 배경은 미상이다. 다만 정도전이 쌀을 받고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유배기를 버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도움이 필요하다. 벗과의 동지적 유대감도 힘이 되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당장 먹고 자고 입는 것 하나하나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절박한 문제일 터이다. ꠓ금남잡제ꠗ에 수록된 「소재동 기문」에서 정도전은 초가집을 조성하고 생활해나가는 데 있어서 거평부곡 주민들로부터 다양한 도움을 받은 사실을 기록해 둔 바 있다. 이 시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살펴볼 것은 「개경으로 돌아가는 이염사(李廉使) 사영(士穎)을 전송하며」(送李廉使士穎還京)이다.
객지 생활 삼 년에 이별이 익숙한데
봄바람에 또 짓네 송별의 시를.
꿈 혼은 그물이 촘촘한 줄 모르고
그대 따라 곧장 한강가로 가누나.
客裏三年慣別離, 春風又作送行詩.
魂夢不知羅網密, 隨君直到漢江湄.40)
40) ꠓ三峰集ꠗ 卷之二, 「送李廉使士穎還京」(306쪽).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는 것은 떠나는 자와 남아 있는 자의 대비이다. 1‧2구는 햇수로 3년째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개경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내는 심회를 말하고 있다. 특히 2구의 ‘又’라는 글자는 시인의 심리를 미묘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이별에 이미 익숙해졌지만, 또 다시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 봄바람이 부는 좋은 시절이건만 또 다시 이별해야 한다. 요컨대 시인은 이별을 통해, 자신의 변함없는 처지를 거듭 확인한다. ‘又’는 시인의 이런 심정을 잘 보여주는 글자이다. 시인은 유배지를 벗어날 수 없지만, 떠나는 자와 남아 있는 자의 대비 속에서, 자신도 따라서 귀경(歸京)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그래서 3‧4구에서와 같이 시인은 꿈속에서라도 귀경하려는 것이다. 특히 4구의 ‘直’(곧장)이라는 글자는 그런 시인의 마음을 반영한다.
이상으로 유배기의 교유 활동을 배경으로 창작된 시들을 살펴보았다. 그 시들을 통해 드러나는 정도전은, 급히 말을 몰며 설레는 마음으로 지인을 찾아가기도 했고, 깊은 예술적 교융 속에서 위안을 얻기도 했으며, 식량을 부조해준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도 했고, 유배지에서 맞은 이별을 통해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새삼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5. 결론
본고는 정도전 문학 연구의 진전을 위해 ‘연대기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하에, 정도전의 나주 유배기 시집 ꠓ금남잡영ꠗ 소재 시편을 탐구했다. 우선 본고는, 비록 자료적 제약이 없지 않지만, ꠓ삼봉집ꠗ을 통해 ꠓ금남잡영ꠗ을 재구성했다. 이로써 나주 유배기의 시 창작을 시집의 형태로 실체화할 수 있었다. 그 기초 조사를 발판으로 삼아, 본고는 ꠓ금남잡영ꠗ 소재 시편을 분석적으로 다루었다. 신진 사대부로서 처음 정치적 시련을 겪은 정도전의 심회가 어떻게 시적으로 표현되었는지에 본고는 각별히 유의했다. 정도전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유배객으로서 낯선 장소에 내던져진 신세였다. 따라서 극도의 절망감과 불안감이 ꠓ금남잡영ꠗ의 기저음(基底音)을 이룬다. 서로 대비되는 시적 상황이나 표현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구법(句法)은 이런 심리 상태를 구조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심지어는 물아분리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주 유배기의 정도전이 비탄에만 빠져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자신의 고통을 객관화하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왔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벗들과의 동지적 유대는 고통 속에서 신진 사류로서의 정신 자세를 가다듬고 미래를 기다리는 힘이 되어주었다. 이런 면면은 그의 사상적‧정치적 논설에서는 확인하기 힘들며, 시작품을 통해 섬세하게 접근해 들어갈 수 있다. 이 점에서 정도전에 대한 사상적‧역사적‧정치적‧철학적 접근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문학적 접근을 통해서만 가 닿을 수 있는 미묘한 영역이 있다 하겠다. 본고는 그 내밀한 지점에 닿아보고자 했다. ꠓ금남잡영ꠗ과 쌍을 이루는 것은 산문집 ꠓ금남잡제ꠗ이다. ꠓ금남잡제ꠗ는 ꠓ금남잡영ꠗ과 겹치면서도 또 그와 다른 내면세계 내지 정신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ꠓ금남잡제ꠗ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비로소 나주 유배기 정도전 문학세계의 전모가 온전히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ꠓ금남잡제ꠗ 연구가 본고의 후속 과제로 부과된다. 이렇게 해서 나주 유배기 문학에 대한 연구를 일단락 지은 뒤에, 정도전 문학에 대한 연대기적 연구를 꾸준히 해나간다면, 굴곡이 많은 삶을 산 정도전이 구축한 문학세계의 전모를 보다 더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투고일: 2013. 01. 24 심사일: 2013. 02. 27 게재확정일: 2013.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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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tudy on Geumnamjapyeong(錦南雜詠)
by Jeong, Do-Jeon(鄭道傳)
Kim, Dae-Joong*
I explore the poems included in Geumnamjapyeong(錦南雜詠) by Jeong, Do-Jeon(鄭道傳, 1342~1398). Geumnamjapyeong is a collection of poems written during the period of banishment in Naju(羅州). Chronological approach to Jeong's literary works is indispensable to develope the study on Jeong's literature. Jeong lived during the period of late Koryo and early Choseon, a period of political ferment. Therefore, with regard to the development of his oeuvre, it is significant to examine his works in a diachronical way, in keeping with ups and downs over the course of his life. That is why I pay attention to Geumnamjapyeong. It was the first political hardship for Jeong to be banished in Naju. This study is intended to investigate delicately the inner world of Naju period's Jeong. Though Geumnamjapyeong does not remain, it is possible to find some traces remained in Sambongjip(三峰集). For that reason, this study begins with the reconstruction of Geumnamjapyeong based on the clues that can be found in Sambongjip. And then I analyze the poems included in Geumnamjapyeong. The discussion of Jeong’s
* Senior Researcher of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Korea.
Key Words: Jeong, Do-Jeon(鄭道傳), Sambongj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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