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507)정도전 삼봉집 제14권 조선경국전 하(朝鮮經國典 下) /공전(工典) /금공ㆍ옥공ㆍ석공ㆍ목공ㆍ공피공ㆍ전식공[金玉石木攻皮塼埴等工]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8. 09:46

금공ㆍ옥공ㆍ석공ㆍ목공ㆍ공피공ㆍ전식공[金玉石木攻皮塼埴等工]

 

백공의 기술은 비록 비천한 것이라 하더라도 국가의 이용면에 있어서는 실로 긴요한 것이니, 모두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작은 것은 낱낱이 들어서 말할 수 없고 우선 그 중에서 큰 것만을 들어서 이야기하겠다.

병기 중에서 갑옷ㆍ투구ㆍ칼ㆍ창과 같은 것이나 기명(器皿) 중에서 솥ㆍ가마ㆍ정(鼎)과 같은 것은 만약 금공(金工)이 없다면 어떻게 쇠를 단련하여 그러한 물건을 만들 수 있겠는가? 부서(符瑞) 중에서 규(圭)ㆍ벽(璧)ㆍ완(琬)ㆍ염(琰)과 같은 것이나, 의복의 장식품 중에서 옥(玉)ㆍ패(珮)ㆍ경(瓊) 거(琚)와 같은 것은 만약 옥공(玉工)이 없다면 어떻게 조각하고 마탁하여 그러한 물건을 만들 수 있겠는가?

여기에 돌이 있는데 만약 돌을 다룰 줄 아는 석공(石工)이 없다면 어떻게 이 돌을 가지고 비갈(碑碣)을 세울 수 있겠으며, 어떻게 이 돌을 가지고 섬돌과 초석을 놓을 수 있겠는가? 저기에 나무가 있는데 만약 나무를 다룰 줄 아는 목공(木工)이 없다면 어떻게 저 나무를 가지고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배나 수레를 만들 수 있겠는가?

이것들뿐만이 아니다. 이 밖에 가죽 다루는 공장(工匠), 기와 굽는 공장, 실을 만드는 공장, 그림 그리는 공장 등도 모두 이용면에 있어서 절실한 것이니,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그러나 검약을 힘쓰고 사치를 경계하는 것이 바로 백공을 쓰는 근본이다. 검약하는 것은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는 도이고, 사치하는 것은 화란을 초래하는 단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전하는 천성이 검소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무릇 모든 공작(工作)에 관하여는 반드시 부득이한 경우에만 일을 시킨다. 그러므로 백공이 때를 맞추어 일을 하여 여러 공적이 모두 빛나게 되었다. 《서경》 하서(夏書) 윤정(胤正)에,

 

“공(工)이 예사(藝事)를 가지고 간(諫)하라.”

고 하였는데, 이 구절을 해석한 사람은,

 

“이치란 어디에나 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이란 미세하다고 해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인주로서는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이것을 겸하여 적는다.

육전(六典)이 지어진 지 이미 오래다. 《주례》 천관(天官) 대재(大宰)를 상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치전(治典)이니, 방국(邦國)을 다스리고 관부(官府)를 다스리며 만민(萬民)을 다스린다. 둘째는 교전(敎典)이니, 방국을 편안하게 하고 관부를 가르치며 만민을 교훈한다. 셋째는 예전(禮典)이니, 방국을 화평하게 하고 백관(百官)을 통합하여 만민을 화합하게 한다. 넷째는 정전(政典)이니, 방국을 평정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며 만민을 고르게 한다. 다섯째는 형전(刑典)이니, 방국을 힐문하고 백관을 형벌하며 만민을 규찰한다. 여섯째는 사전(事典)이니, 방국을 부유하게 하고 백관을 부리며 만민을 기른다.”

치(治)는 이(吏), 교(敎)는 호(戶), 정(政)은 병(兵), 사(事)는 공(工)인 것이다.

예부터 그 후로 천하 국가의 치란과 흥망은 뚜렷하게 상고할 수 있다. 치흥(治興)하게 된 것은 육전에 밝았기 때문이고, 난망(亂亡)하게 된 것은 육전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에는 정치 교화가 무너지고 기강이 퇴폐하여 이른바 육전이란 것은 이름만 있고 실속은 없었다. 뜻있는 인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한 지 이미 오랬다. 난세가 극도에 달하면 치세가 돌아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우리 전하는 천리와 인심에 순응하여 잔학함을 제거하고 구폐(舊弊)를 혁파해서 교화를 일신하였다. 때에 맞추어 실적을 심사하여 우매한 사람은 내쫓고 현명한 사람은 승진시키니, 치전이 밝아졌다. 요역(徭役)을 가벼이 하고 부세를 헐하게 하여 생민을 휴양시키니, 교전(敎典)이 밝아졌다. 거복(車服)에 문채를 두게 되고 상하에 구별을 두게 되었으니, 예전이 밝아졌다고 하겠다. 융병(戎兵)을 능히 힐문하여 적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였으니, 정전이 밝아졌다고 하겠다. 범죄를 다스림이 실정을 얻어서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어졌으니, 형전이 밝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백공을 다스려서 여러 공적이 빛나게 되었으니, 사전(事典)이 밝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판삼사사 봉화백(判三司事奉化伯) 신(臣) 정도전(鄭道傳)은 한 책을 지어서 이름을 《경국전(經國典)》이라 하고, 이것을 전하에게 바치자, 전하는 마음에 기뻐하여 이를 유사에게 주어 금궤(金匱)에 간직해 두게 하였으며, 신(臣) 총(摠)에게 명하여서 그 책의 끝에 서문을 쓰게 하였다.

 

 

신총은 생각하건대, 한 세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세대의 법제가 있는 법이다. 만약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마치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이룰 수가 있었겠는가?

지금 우리 전하는 적심(赤心)을 미루어서 재상에게 위임시키자, 삼사공(三司公 정도전을 가리킴)은 천인(天人)의 학문과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가지고 왕업을 도와서 성취시키고 웅건(雄健)한 문장을 가지고 능히 큰 법(法)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비단 전하가 을람(乙覽)하는 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손 만세의 귀감이 될 것이다. 아! 지극한 일이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형식적인 법문으로만 보아 버린다면, 책은 책대로 사람은 사람대로일 것이니, 치도(治道)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자사(子思)는 《중용(中庸)》을 지을 적에 구경(九經)을 논하기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하였다. 하나란 무엇인가? 즉 성(誠)을 말한 것이다. 신도 이 책에 있어서 역시 이것으로써 말하는 바이다.

 

 

홍무(洪武 명태조(明太祖)의 연호) 28년 을해년(895, 태조2) 3월 중순에 순충좌명개국공신 자헌대부 예문춘추관 태학사 동판도평의사사사 세자우빈객서원군(純忠佐命開國功臣資憲大夫藝文春秋館太學士同判都評議使司事世子右賓客西原君) 신(臣) 정총(鄭摠)은 삼가 서문을 씀.

 

[주]을람(乙覽) : 을야람(乙夜覽)의 약으로 왕이 책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을야(乙夜)는 오후 10시경. 왕은 정무를 마친 뒤 아직 취침하기 전에 글을 본다는 뜻에서 취해진 것이다.

 

 

金玉石木攻皮塼埴等工

百工之技。雖其卑且賤者。其於國家之用。實爲緊要。皆不可廢也。小者不可枚擧。姑擧其大者言之。兵器若介胄劍戟。器皿若錡釜鼎鐺。苟無金工。何以鍛鍊鎔範。以成其物。符瑞如圭璧琬琰。服飾如玉佩瓊琚。若無玉工。何以雕琢磨礱以成其器哉。有石於斯。若無攻石之工。何以樹碑碣。何以築砌礎哉。有木於彼。若無攻木之工。何以立宅舍。何以作舟車哉。不寧惟是。其佗攻皮之工。塼埴之工。絲枲之工。繪畫之工。皆切於用。不可缺焉。然務儉約而戒奢華。乃其本也。儉則治安之道。奢則禍敗之端。於斯二者。不可不論焉。我殿下天性儉素。愛民節用。凡諸工作。必出於不得已然後使之。故百工惟時而庶績咸煕矣。書曰。工執藝事。以諫。釋之者以爲理無往而不在。故言無微而可略。此實人主之所當知也。故臣倂書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