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김종서(성균관대)
국문요약
본고는 鄭道傳 시의 표현 양상과 문학적 풍격과 미적 인식을 살폈다. 시
의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외적 인상을 통합해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시도하였다. 삼봉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예를 겸비하였고, 성격이 호방하
며, 천부적 자질이 聰敏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아 議論이 정연하였다 한다. 삼봉의 학문은 圃隱 鄭夢周과 같이 성리학에
경도되어 있고, 문학은 陶隱 李崇仁과 유사하다고 평가된다.
삼봉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흥감을 중시한다. 그의 시는 대상의 합일
을 추구하거나 대상에 정감을 일체화하여 상상을 유도하는 기법을 사용한
다. 흔히 당시는 정감적이며 함축적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삼봉의 시는 상
상력을 통한 시적 정감의 내적 확충을 꾀하고 있어 미적 감흥을 주며 독자
를 감동시키고 있다. 삼봉은 자신의 정감을 대상의 행태를 통해 암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정이 융합되어 함축성이 강한 시를 만
들었다.
삼봉은 화자를 객관화하여 대상과 시적 화자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객관적 묘사 방식을 사용하여 정경의 교융을 이루었다. 삼봉은 감정이
고도로 정제되어 나온 당시의 기법을 주로 사용하여 시를 지었다. 당시의 의
경은 情景이 交融된 상태로 나타나는데 형상 속에 흥취라는 정감이 완전히
융합되어 있다. 이 의경은 형상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정감으로 형성된 경계로
말 밖의 뜻[言外之意]을 전달하는 효과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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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의 시는 다양한 함축의 방법을 사용하여 말은 쉬우나 뜻은 심원하고
문사는 평이하나 내용은 깊어 여운이 있다. 함축이란 겉으로 드러난 언어의
뜻을 좆는 게 아니라 언어가 내포한 속뜻과 암시하는 바를 살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감정의 발전 맥락 가운데서 가장 암시성 있는 부분을 제시할 뿐
인데 행간에 다양한 모습과 색채를 은근히 떠올리고 말 안의 감정을 풍부하
게 함으로써 시의 다의적 효과를 구성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룩한
삼봉의 한시는 고도의 상징과 비유로 응축되어 높은 문학성과 예술성을 성
취하게 되었다.
시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반영되어 풍격으로 나타난다. 삼봉
의 시는 高澹雄偉․豪逸奔放․凌厲하며, 문장은 通暢辯博하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제가의 평을 볼 때 삼봉의 시는 대체적으로 걸출하고 호탕한 그의
기질을 반영되어 호방한 풍격을 형성하고 있다. 삼봉의 시는 대상의 묘사와
정감이 일체화를 이루고 있고, 그의 시는 화자를 객체화하여 경물을 묘사하
고 흥취를 내재화하였으며 표현이 함축적이고 여운이 강하여 대체적으로
정감적이며 서정성이 강한 당시풍의 경향을 보인다. 이런 당풍의 경향은 고
려말 성리학을 수용했던 三隱과 조선초의 문인에게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하다.
<핵심어>
三峯, 鄭道傳, 情景交融, 豪放, 唐風, 含蓄, 言外之意, 興趣
1. 머리말
鄭道傳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에 나서 조선 태조 7년(1398)까지 살
다간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학자로 조선 개국공신이다. 자는 宗之, 호는
三峯, 시호는 文憲이며 본관은 奉化이다. 奉化戶長 公美의 고손자며, 刑部尙
書 云敬의 맏아들이다. 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端陽의
三峯이다. 다음은 권근이 쓴 삼봉 정도전 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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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은 포은ㆍ도은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강론하고 갈고 닦아 더욱 얻은
바 있었고, 항상 후진을 가르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
았다. 그 詩書를 강의함에 있어서는 알기 쉬운 말로써 지극한 이치를 형용
할 수 있어 배우는 자가 한 번 들으면 바로 義를 깨달았으며, 그 이단을 물
리침에 있어서는 그 글에 정통할 수 있어 먼저 자세히 설명하고서 마침내
그 그른 점을 배척하므로 듣는 자가 다 굴복하였다. 이 때문에 경서를 들고
종유하려는 자가 집안과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따라 배워서 顯官의 자리
에 오른 자도 어깨를 견주어 서게 되었고, 비록 武夫와 속된 선비라도 그
강설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불교의 무리들까지도 종
유하여 교화한 자가 있었다.
禮樂ㆍ制度ㆍ陰陽ㆍ兵曆에 이르기까지 정밀히 깨우치지 않은 것이 없어,
八陣을 祖로 삼아 36變의 譜를 만들고, 太乙(陣의 이름)을 요약하여 72局의
圖를 짓되, 간략하면서도 곡진하게 할 수 있어 세상의 이름난 장수와 술사
들이 모두 좋게 여겼지만 그러나 이는 모두 선생에게는 餘事였다. 선생은
절의가 심히 높고 학술이 가장 정밀하였다. 일찍이 바른 말로 재상을 거슬
려 남방으로 유배된 지 10년이 되었으나 그 뜻을 변하지 않았으며, 功利의
도당과 이단의 무리가 떼를 지어 업신여기고 무리를 지어 비방했지만 그 지
킴이 더욱 굳건하였으니, 선생이야말로 도를 믿음이 독실하여 현혹되지 않
는 분이라 이르겠다. 선생의 저술은 ?學者指南圖? 약간 편이 있어 의리의
정밀함이 일목요연하여 前賢이 發明하지 못한 바를 다 발명할 수 있었다.
?雜題? 약간 권은 身心ㆍ性命의 덕에 근본하고 부자ㆍ군신의 倫紀에서 밝
혀, 크게는 하늘과 땅 해와 달까지, 작게는 새와 짐승 풀과 나무까지도 이치
가 이르지 않은 것이 없고 말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국가 외교의 문장은 전아하여 체제를 얻었으며, 古律의 작품은 魏晉을
승습하고 盛唐을 따랐으며 理趣는 雅頌에서 나와, 질박하면서도 다듬어지
고 온화하면서도 담담하여 진실로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樂府小序
에 있어서도 번잡하고 어지러운 것을 깎아내고 음란하고 치우친 것을 제거
하여 오직 성정의 바름에서 감발된 것만을 기록했다.
아아, 선생의 문장은 다 名敎에 보탬이 있으며 空言 따위에 비할 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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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이는 그 도와 아울러 후세에 유전하여 썩지 않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비록 소국에 나서 그 문장이 중국 盛世의 典謨에 베풀어지지 못했으나, 일
찍이 使命을 받들고 京師에 조회하였는데 遼東의 바다에 배를 띄우고 齊魯
의 땅을 지나면서 지은 그 시와 문의 작품들이 모두 중국 문사가 가상히 여
기는 바 되었다. 이는 문장으로써 한 지방을 울릴 수 있어서 東方에 스며든
교화를 찬송하고 드날린 것이며, 東人으로 하여금 만세토록 노래하도록 하
여 태평성대와 治道의 융성함과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전해질 것도 역시 의
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1)
정도전은 그의 아버지 운경과 李穀의 교유가 인연이 되어 李穡의 문하에
서 수학하였다. 그는 鄭夢周․李崇仁․尹紹宗․朴宜中․河崙․權近․金九
容․金齊顔․朴尙衷․李存吾 등과 교유하였다. 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성리학과 문장에 능하여 우러나 말이 되고 문장이 된 것은 汪洋渾厚하고 博
大奇偉하여 옛날 사람의 풍도가 있으므로 여러 선생들이 모두 밀어올리고
1) 權近, <三峯集序>, “三峯與圃隱․陶隱尤相親善, 講論切磋, 益有所得, 常以訓
後進闢異端爲己任. 其講詩書, 能以近言形容至理, 學者一聞卽曉其義, 其闢異
端, 能通其書, 先說其詳, 乃斥其非, 聽者皆服. 是以, 執經從遊者, 塡隘門巷, 嘗
從學而登顯仕者, 比肩而立, 雖武夫俗士, 聞其講說, 舋舋不厭. 浮屠之徒, 亦有
從而化者焉. 至於禮樂制度陰陽兵曆, 靡不精曉, 祖八陣而成三十六變之譜, 約
太乙而作七十二局之圖, 能簡而盡, 世之名將術士皆善之, 然此皆先生之餘事也.
先生節義甚高, 學術最精. 嘗以直言忤宰相, 流南方者十年, 而其志不變, 功利之
徒, 異端之輩, 群欺衆詆, 而其守益堅, 先生可謂信道篤而不惑者也. 先生著述,
有學者指南圖若干篇, 義理之精, 瞭然在目, 能盡前賢所未發. 雜題若干卷, 本於
身心性命之德, 明於父子君臣之倫, 大而天地日月, 微而鳥獸草木, 理無不到, 言
無不精. 王國辭命之文, 典雅得體, 古律之作, 襲魏晉追盛唐, 而理趣出乎雅頌,
質而理, 溫而淡, 誠無愧乎古人. 樂府小序, 删繁亂削淫僻, 唯感發性情之正, 是
錄. 嗚呼, 先生之文, 皆有補於名敎, 非空言比也. 是其與道竝流後世而不朽無疑
矣. 雖生下國, 不得施其文於皇朝盛世之典, 嘗奉使朝于京師, 浮遼海過齊魯, 詩
文之作, 皆爲中國文士所嘉賞. 是能以文鳴於一方, 頌揚東漸之化, 俾東人歌於
萬世, 與聖代治道之盛, 同垂罔極, 亦無疑也.” 본고의 서문과 시의 번역 일부는
정도전, ?三峰集?, 민족문화추진회(1986) 신호열 선생님의 번역과 송준호 선생님
의 ?대동시선? 강독 내용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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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하였다.2)
恭愍王 9년(1362)에 進士試에 급제하여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禑王 1년
(1375)에 李仁任․慶復興 등의 親元排明政策에 반대하여 권신세력과 맞서다
가 전라도 羅州牧 會津縣 관하의 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이때에 농촌 현실
을 몸소 체험하면서 많은 시문을 지었는데 ?錦南雜詠?과 ?錦南雜題?이다.3)
우왕 3년(1377)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三角山 밑에 三峯齋를 짓고
복거하다가 부평․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하였고, 안으로는 문벌
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
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
을 깊게 만들었다.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
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삼봉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우왕 9년(1883)에 당시 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李成桂를 咸州 막사로 찾
아가서 인연을 맺었다. 우왕 11년(1385) 成均祭酒와 南陽府使를 역임하고 이
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大司成으로 승진하였다. 우왕 14년(1388) 6월에 이성
계가 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자 그는 密直副使로 승진하여 趙浚 등
과 함께 田制改革案을 적극 건의하였고, 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우왕 15년(1389) 11월에는 이성계․조준 등과 합의하
여 우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왕족 가운데서 恭讓王을 맞아
들였으며, 그 공으로 공신으로 봉해졌고 三司右使에 승진하였다.
공양왕 3년(1391) 三軍都總制府의 右軍總制使에 올라 병권을 장악하였다.
2) 鄭文炯, <重刊三峯集跋 丁未>(?三峯集? 권8, 附錄), “公高麗壬寅科進士. 少有
大志, 力學自強, 早遊牧隱李先生之門, 一時豪傑如圃隱鄭先生․陶隱李先生․
桐軒尹先生․貞齋朴先生․浩亭河先生․陽村權先生․惕若齋金先生․師友講
論, 所聞益廣, 所見益正, 發而爲言語文章者, 汪洋渾厚, 博大奇偉, 有古作者之
風, 諸先生咸推讓之.
3) 李㽥, <錦南雜題序>(?東文選? 권89), “去年夏, 先生以忠直, 言國家事, 見忤於
執政者, 流於湖之南. 予于時, 屢造其室焉, 先生賃一室, 左右圖書, 備寒暑, 以一
裘葛, 朝夕而蔬食, 談聖賢仁義道德之說, 以明天理人欲之辨, 南方學者, 多從之
遊, 講論之暇, 自著詩若文若干篇, 編爲成秩, 以見其志, 而目之曰錦南雜題, 其
文辭, 無愧乎古人, 而其短長句章, 亦臻雅野之態, 集衆家之長, 而成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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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대파인 李穡․禹玄寶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奉化로 유배되
었다. 공양왕 4년(1392) 4월에 이성계가 海州에서 사냥하던 중 낙마한 사건
을 계기로 그는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鄭夢周․金震陽 등의 탄핵을 받아 甫
州(醴泉)의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李芳遠 일파에 의하여 격살당
하여 유배에서 풀려나왔다. 같은 해 7월에 조준․南誾 등 50여명과 함께 이
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왕조 개창을 담당하였다.
태조 원년(1392) 조선왕조 개국후 개국일등공신으로 判義興三軍府事로 조
정의 모든 요직을 겸직 또는 역임하면서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고 새 나
라의 문물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태조 2년(1393) 門下侍郞贊成
事로서 東北面都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고, 태조 3년
(1394)에는 재정 및 지방 병권까지 장악하였고 한양천도를 계획, 실천하여
수도 경영에 주력하였다. 태조 5년(1396)에 이른바 表箋文 문제로 명나라가
이를 빌미로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태조 7년
(1397)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4)
정도전은 3차례에 걸쳐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의 시는 ‘高古簡潔’하다는 평
을 받았다.5) 우왕 10년(1884)에 典校副令으로서 聖節使 정몽주의 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6) 공양왕 2년(1390)에 政堂文學에 오르고, 명나라에
聖節使로 가서 尹彛․李初 등이 이성계를 무고한 사실을 변명하였다. 태조
4) 정도전의 이력은 한영우, ?정도전 사상의 연구(개정판)?, 서울대 출판부, 1986,
265~271쪽의 정도전 연보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정신문화연구원,
1991, 739~741쪽의 한영우 해설 및 ?한국문집총간 해제?1, 63~67쪽의 ‘三峯集’
부분을 참조하였다.
5) 李穡, <題鄭三峯金陵紀行詩文跋 乙丑>(?三峯集? 8권, 附錄), “三峯鄭宗之朝
金陵紀行詩文一帙, 錫命使張․周二詩爲首尾, 携以示老夫. 讀之琅然, 鋪張聖
天子仁文義武, 小邦志享禮朝如視掌. 其酬唱題詠, 又皆高古簡潔.”
6) 李穡, <鄭宗之詩文錄跋 甲子秋>(?三峯集? 8권, 附錄), “一朝以所作詩文來請
跋其尾, 予病且懶, 未卽塞責久矣. 今之奉表江南也, 將携以行。予略書宗之爲
人, 以告不知宗之者焉. 有文章有節義, 中原士大夫其敢少吾宗之乎? 洪武甲子
秋七月, 韓山牧隱李穡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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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1392) 겨울에 謝恩兼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7) 이 시기 遼東
의 바다를 건너고 齊魯의 땅을 지나면서 지은 그 시와 문의 작품들이 모두
중국 문사들의 칭송을 받았다.
국가 외교에 관한 삼봉의 문장은 전아하여 체제를 얻었으며, 古律의 작품
은 魏晉을 승습하고 시는 盛唐의 기풍을 따랐다. 시의 理趣는 雅頌에서 나
와, 질박하면서도 다듬어지고 온화하면서도 담담하여 옛사람에게 부끄러움
이 없었다. 樂府小序에 있어서도 번잡하고 어지러운 것을 깎아내고 음란하
고 치우친 것을 제거하여 오직 성정의 바름에서 감발된 것만을 기록했다고
하였다. 그의 문장은 다 유교의 교화에 보탬이 있으며 불가의 헛된 말에 비
할 바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문학관이 載道的 문학관에 기초를 두었
으며 天人의 도를 구현한 것이 이상적 문학이라는 평가된다.8)
그의 문집인 ?삼봉집?은 태조 6년(1397)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아들 津
에 의해서 ?錦南雜詠?․?錦南雜題?․?奉使錄2? 등의 원고를 2권으로 간행
된 일이 있다.9) 그 뒤 세조 11년(1465)에 그의 증손 文炯에 의해서 6책으로
안동에서 중간되었고, 다시 성종 18년(1486)에 8책으로 증보되었다.10) 그러나
지금 전하는 문집은 정조 15년(1791)에 왕명으로 재간한 것11)으로서, 구본에
7) 趙君啓, <題鄭三峯江之水詞後 癸酉>(?三峯集? 권8, 附錄), “惟吾三峯先生以
開國功臣之首, 位一品, 今玆奉使金陵也, 天子加禮焉. 其還也, 殿下遣重臣勞以
宮醞, 岳牧州郡, 瞻望餘光, 奔走下風, 惟恐或後, 其意氣之所加, 可謂大丈夫得
志當世者也.”
8) 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1978 110~114쪽 참조.
9) 鄭津, <三峯集跋>(?三峯集? 권8, 附錄), “家君作詩文, 率不起草, 口占而使人書
之. 書者或不能及. 旣又自以不滿其意而不收其稿. 是以, 著述雖多. 存者無幾.
津當侍側時則得錄之. 或幸爲人所藏不逸者有之. 今所刊詩文若干卷是也. 觀者
因其所存而識其議論製作之體, 則其他亦可以此而推之矣. 洪武三十年九月日,
男資憲大夫領原州牧使事兼管內勸農管學兵馬節制使津謹跋.”
10) 鄭文炯, <重刊三峯集跋 丁未>(?三峯集? 권8, 附錄), “三峯詩文集․經濟文
鑑․經國典․佛氏辨說․心氣理三篇, 我曾祖奉化伯公所著也.…諸篇舊有板本,
散落不完, 文炯去甲申冬, 濫蒙世祖大王恩遇, 特受慶尙道觀察使, 裒集諸篇爲
一帙, 刊于安東府. 厥後數十餘年間, 宦遊京外, 或採於州郡之樓題, 或得於僚友
之所藏, 次安邊樓韻以下詩賦百餘首曁經濟文鑑別集, 欲刊之者有年, 而丙午冬,
又爲江原道監司, 到界之日, 始命工續刊百二十餘張, 合置于安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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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락된 陣法과 시문을 수록하고, 정도전의 사실에 대한 기록을 보완하고 편
차를 다시 분류하여 14권 7책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權近의 서문과 申
叔舟의 후서가 들어 있으며, 시문은 成石璘이 精選하였고 權近이 批點을 찍
었다.12)
그의 시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근래 상당 부분 논의가 되었다.13) 정도
전 문학연구는 주로 사회학적 관점에서 시를 연구하거나, 정치적 입지를 해
석하는 논거로 연구되었다. 근래 정항표는 정도전 시문 중에서 순수한 인간
의 감정을 노래한 것과 악장을 통해 그의 문학의 순수 감정과 현실인식 간
의 갈등양상을 살피기도 하였다.14) 그간의 정도전 한시 연구는 작품론, 작가
론 사상사 등 여러 측면으로 이루어져 왔고, 또한 그의 작품 유형에 대해서
도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들도 모두 기본적으로는 작품 자체에
대한 개별적, 총체적 분석과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
다. 작품들에 대한 독자의 이해 노력이 그 작자의 창작노력보다 몇 배 더 필
요하다는 상식을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시의 바른 이해라는 것은 작가가 창작해 놓은 그대로의 작품의 내부구조
를 살려서 확인하고 그 속에 담긴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을 말한다. 본
고에서는 정도전의 ?三峯集?에 전하는 시문을 중심으로 ?東文選?, ?靑丘風
雅?, ?國朝詩刪?, ?箕雅?, ?小華詩評?, ?大東詩選? 등을 비교하여 삼봉의 문
학에 대한 태도와 표현양상을 살피고자 한다. 이런 선집들에 뽑힌 시들은 대
11) 正祖, ?弘齋全書? 권163, ?日得錄? 3, ‘文學’3, “鄭道傳,權近出處, 雖遜於冶
隱諸賢, 其文章經綸, 固一世之雄也. 鄭之三峯集, 歲久板刓, 幾乎不傳, 甚可惜
也. 如崔岦易集, 車天輅五山集, 皆命刊布, 以壽其傳, 况開國元勳之經濟文字乎!
出內府舊藏一本, 賷送嶺南觀察營, 俾卽校正開板, 仍爲印上, 藏之史庫.”
12) <삼봉집 해제>, ?三峯集?, 민족문화추진회, 1986, 1~22쪽 및 ?한국문집총간 해
제?1, 63~67쪽의 ‘三峯集’ 부분을 참조하였다.
13) 박성규, 「정도전 연구」, ?어문논집? 제22집,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연구회,
1982; 박희, 「三峯 文學硏究」, 세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이강렬, 「정도전
한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이정희, 「삼봉 정도전의 시문학 연
구」,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김종진, 「정도전 문학의 연구」, 고려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등이 있다.
14) 정항표, 「정도전 시의 이원적 성격」, ?한국한시작가연구? 2, 태학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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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인상비평의 혐의가 있지만 과거 비평가들의 우수한 감식안을 의지해야
하는 현재의 실정을 반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삼봉의 시는 함축적 표현이
뛰어나며 서정성이 강한 당시풍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15) 이런 당풍적 모습
은 고려말 성리학을 수용했던 三隱과 조선초의 문인에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하다.16)
본고에서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삼봉 시의 우수성이 함축적 표현미와
당풍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아울러 그의 시의 미적 특징과 풍격을
살피고자 한다. 당시풍의 시는 사물의 영상을 스케치하듯 影描的 표현기법
을 통해 논리적 서술이 아닌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그런 시는
시어와 시구를 조정하고 배치할 뿐만 아니라 그 사이사이의 어의를 생략하
고 함축하고 屈伸시켜 시어의 심기를 조절한다. 본고에서는 삼봉의 시에 나
타난 시어의 굴곡 신장에 대한 유기적 분석과 직관적 통합이라는 방법을 통
해 작품을 이해함을 전제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시의 바른 이해는 작가
가 창작해 놓은 그대로의 작품의 내부구조를 살려서 확인하고 그 속에 담긴
작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15) 이종묵, 「조선 전기 한시의 唐風과 宋風」(?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
사, 2002.433-466쪽 참고)에서 조선 전기 唐風의 특징과 미학을 논하면서 당풍은
기본적으로 시인의 흥감을 중시하고 직설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경험을 제시
하지 않고 시의 대상과 합일을 추구하거나 대상 속에 감정이 이입될 때가 많다
고 보았다. 또 당풍의 한시는 한 편의 그림으로 읽히기를 지향하여 경물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묘사된 경물을 통해 시인의 정감을 투영하여 독자를
흥기시킨다고 하였다.
16) 김종서, 「圃隱 鄭夢周 詩의 唐風的 性格」(?포은학연구?, 포은학회, 2009, 13
1~171쪽 참조)에서 정몽주의 시는 음영성이 강한 唐詩의 특성이 있고, 性理學뿐
만 아니라 문장 또한 唐詩의 高品에 해당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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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鄭道傳 시의 표현 양상과 풍격
가. 제가의 평
삼봉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예를 겸비하였고, 성격이 호방하며, 천부적
자질이 聰敏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아 議論
이 정연하였다 한다. 그가 지은 시문은 각종 형식의 詩를 비롯하여 賦․詞․
疏․箋․序․記․書 등 다양하다. 이들 시문들은 대부분 새 왕조 창업 이전
의 불우했던 시절에 쓴 것으로 그의 문학적 재질이 비범함을 보여준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牧隱 李穡은 ?三峯先生詩集?의 跋文을 쓰면서 말하기를,
“강론하여 밝힌 것은 圃隱과 비슷하고, 문장의 저술은 陶隱과 비슷하다.”고
하였다.17) 이는 삼봉의 학문이 포은과 같이 성리학에 경도되어 있고, 문학은
도은 이숭인과 유사함을 지적한 것이다.
삼봉의 문장은 당대 중국인까지도 성리학에 한결같이 뿌리를 두고 있다고
평가된다.18) 權近은 삼봉의 학문ㆍ사업ㆍ문장에 대하여 “性理에 대한 학문
과 정치에 대한 공은 이단을 배척하여 우리 도의 정대함을 밝혔고, 정의에
입각하여 일어나는 나라의 운을 도와서, 문장이 영원히 썩지 않고 감화가 끝
없이 흡족하였으니, 정말 국가의 중신이면서 후학의 스승이로다.”19)라고 하
였다. 權仲和는 삼봉의 시문에 대해 “삼봉 정군 종지는 총명한 자질로 道를
좋아하고, 德을 숭상하여 士林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도를 의논하고 異端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높은 안목으로 독특한 주장을 세워서 조금도 흔들리는
17) 卞季良, ?春亭集? 권5, <圃隱先生詩稿序>, “及其跋三峯先生詩集則有曰, 講
明則同圃隱, 著述則同陶隱.”
18) 高遜志, <跋鄭宗之文稿後 戊辰>(?三峯集? 권8, 附錄), “三韓鄭宗之氏由進士
起家, 仕其國爲胄子師, 以文學爲職業. 其友李公子安之朝正也, 携其所著文若
干篇, 俾予識之. … 觀於宗之之論著, 一本乎理而無所偏蔽, 夫豈易得哉?” 高遜
志는 당시 벼슬이 侍郞이었고 河南府 徐州人이다.
19) 權近, ?陽村集? 권23, <三峯先生眞讚>, “若夫性理之學, 經濟之功, 闢異端以
明吾道之正, 仗大義以佐興運之隆, 文垂不朽, 化洽無窮, 眞社稷之重臣, 而後學
之所宗也.”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03
일이 없으며, 著述에 있어서는 시원하고 순수하여 性理學에서 우러나왔
다.20)”라고 하였다. 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삼봉의 문장에 대해, “張大하나
檢束하지 못하다.”21)라고 평하였다.
그의 시문은 중국에서도 널리 칭송될 정도로 뛰어났으며 신숙주는 <三峯
集後序>에서 “시문은 진실로 여러 계통의 남은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속되지 아니하면서 담박하고 기상이 씩씩하면서도 걸출하게 빼어남[高
澹雄偉]’이 있고 문장은 ‘막힘없이 툭 트여 통하고 광범위하면서도 자세함[通
暢辯博]’이 있으니 또한 그 학문과 가슴 속에 품은 만 가지 것들 중에 하나를
연유하여 본 것일 뿐이거늘 하물며 앞 시대 儒者들과 이색․정몽주․권근
등 여러 분들이 모두 뒤따라가 감복한데 있어서랴!”22)라고 하였다.
徐居正은 ?東人詩話?에서 “도은 이숭인과 삼봉 정도전은 한 때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숭인의 시는 산뜻하면서 새롭고 고상하면서 옛 풍취가
있지만[淸新高古] 힘 있고 원숙한 맛[雄渾]이 없으며, 정도전의 시는 의기가
장하면서도 빼어나고 기세 좋게 달리면서 매임이 없지만[豪逸奔放], 시어를
연마한 맛[鍛鍊]이 적어 서로 고하가 있다. 그러나 목은은 매번 시를 평함에
있어서는 이도은을 앞세우고 정삼봉을 뒤로 하였다.23)”라고 하였다. 이색과
서거정의 평을 종합하면 이숭인의 시는 맑고 산뜻하며 기품이 있었으나 웅
혼장대한 맛은 부족하였고, 정도전의 시는 크게 빼어나 자유스럽고 호쾌한
점이 좋지만 단련이 부족하여 세련된 맛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문은 역성혁명을 수행한 인물답게 호방하면서도 날카로운 사회의
식이 번득이고 있어서 그의 사회의식을 관찰하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된다. 특
히 會津縣 居平部曲 유배시에 쓴 ?錦南雜詠?과 ?錦南雜題?, 그리고 유랑과
20) 權仲和, <鄭宗之詩文錄跋>(?三峯集? 8권, 附錄), “三峯鄭君宗之, 以聰明之資,
遵道尙德, 士林咸慕焉. 當論道, 攘斥異端, 高視特立, 無所屈撓, 其著述則泠然
粹然, 從容於性理之中.”
21) 成俔, ?慵齋叢話?, “三峯能張大而不檢.”
22) 申叔舟, <三峰集後序>, “詩文, 固緖餘耳. 然其詩之高澹雄偉, 文之通暢辯博,
亦可因以窺其學問胸次之萬一矣. 況先儒與牧隱․圃隱․陽村諸公, 皆所追服
乎?”
23) 徐居正, ?東人詩話? 卷上, “李陶隱鄭三峯, 齊名一時, 李淸新高古而乏雄渾,
鄭豪逸奔放而少鍛鍊, 互有上下. 然牧老每當題評, 先李而後鄭.”
204 韓國漢詩硏究 18
독서 생활을 하던 시기에 쓴 글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짙게 풍기고 있
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壺谷 南龍翼은 정도전의 시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기상이 있다[凌厲]’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제가의 평을 볼 때 삼봉
의 시는 대체적으로 호방하고 호탕한 그의 기질을 반영한 풍격을 갖추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후대의 선집이나 시화집에 수록된 삼봉의 시들에 대해 대체로 ‘거침없고
빼어나서 매인 데가 없다[豪逸不羈]’, ‘넉넉하면서도 화려하고 깨끗하면서도
무게가 있다[富麗溫重]’, ‘한가롭고 담박하여 맛이 있다[閑澹有味]’, ‘ 시 가운
데 그림이 들어있다[詩中有畵]’, ‘곱고 투명하며 거침이 없어 넉넉히 唐詩의
경지에 들어갔다[玲瓏圓轉 優入唐域]’라는 평어들이 보인다. 삼봉의 시를 분
석해보면 정감적이고 서정성이 강한 시들로, 그의 시는 대상의 묘사와 정감
이 일체화를 이루고 있고, 경물을 형상화하고 흥취를 내재화하였으며 표현
이 함축적이고 여운이 강하여 당풍적 경향이 짙다. 그의 호일분방한 기상이
시적 형상화에 반영되어 豪放한 풍격을 이루고 있다.
나. 대상의 일체화와 상상의 유도
삼봉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흥감을 중시한다. 그의 시는 대상의 합일
을 추구하거나 대상에 정감을 일체화하여 상상력을 유도하고 있다. 흔히 당
시는 정감적이며 함축적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시인의 자연스런 감정의 유
로가 중시되기에 주정적이며 소리시가 된다. 시상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
서 唐詩의 표현은 개인의 정감을 함축적으로 묘사해 내는 것에 장점이 있다.
당시는 함축을 통한 유원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시상이 상징적으로 해석되어
야 하며 유장한 여운을 갖고 있다. 당송시의 형상화 방법에 影描와 鋪陳의
차이가 있다.24) 당시는 比興에 기탁하여 興趣를 그려낸다. 그렇기 때문에 情
24) 申景濬, ?旅庵遺稿?, 卷八, <詩則>. “唐人喜述光景, 故其詩多影描, 宋人喜立
議論, 故其詩多鋪陳. 大抵述光景, 出於國風之餘, 而頗少眞厚之味, 立議論, 出
於兩雅之餘, 而全露勘斷之跡, 俱未始不出於三百篇之餘, 而其視三百篇, 亦遠
矣. 世之人, 皆以爲唐人以詩爲詩, 宋人以文爲詩, 唐固勝於宋, 宋固遜於唐. 此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05
과 景이 융화된 경계를 보이게 되며 한 폭의 풍경화를 보듯 생생하지만 그
속에 내적 정서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당시는 心象的이며 象徵的 요소
가 많아 상상력을 통한 시적 정감의 내적 확충을 기하고 있다. 시는 사실을
전달하거나 사람을 설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적 감흥을 주는 것이다. 반드
시 정감 속에 융해되어 정감화하여야 한다. 정감화 되지 않으면 사람을 감동
시킬 수 없는 것이다. 당시는 언어를 통한 전달에 있어서 比興의 기법과 影
描의 기법을 통해 정감을 재료로 하여 美感을 생산하고 있다.25)
안개 껴선 유난히도 간들대더니
비 맞고선 다시금 휘휘 늘어져
한도 없는 강남의 나무 중에서
봄바람아, 꼭 여기로 불어오느냐?
含烟偏裊裊帶雨更依依
無限江南樹東風特地吹
<詠柳>(?三峯集? 권1)
삼봉은 시적 화자를 여성화 하여, 여성화자가 겪을 수 있는 감정의 변화
를 상상을 통하여 표현해 내어 감정을 절실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이 시는
버드나무를 읊은 7수 중 첫째수로 버드나무의 자태와 바람을 상관시켜 봄날
의 청신한 상황을 그렸다. 이 시는 제재인 버드나무를 화자의 일부이면서 화
자를 못 견디게 하는 존재로 일체화시켰다. 철저하게 객체화한 시는 아니지
만 버드나무에 작자의 마음이나 심리를 투영시켜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고
인격성을 부여한 재치가 있는 작품이다. 버드나무를 의인화(여성화)하여 풍
류적인 소재로 썼다. “왜 나만 흔들어대요.”하는 버드나무의 하소연이 염정
풍으로 정감화 되어 나타난다.
기․승구는 버드나무의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냈다. 안개가 서린 듯 보얀
以唐詩多影描, 宋詩多鋪陳故也.”
25) 당송시에 관한 논의는 졸고, 「16세기 호남시단과 당풍」(성균관대 박사학위논
문, 2004) 10~16쪽을 참조하였다.
206 韓國漢詩硏究 18
채 하늘거린다고 하여 버드나무의 싹이 막 나기 시작한 여리고 앙징스런 모
습을, 비를 맞고 늘어진 모습을 통해 봄날 버드나무의 싱그러움을 나타냈다.
이 작품에는 ‘裊裊(간들거리다)’와 ‘依依(휘늘어지다)’ 같은 의태어형의 형용
서술어가 원용되어 영물의 표현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아울러 이런 표현은
버드나무를 여성화하여 읽히도록 유도하여 여인의 걸음걸이나 요염한 자태
의 몸짓을 연상시켜 귀여운 정감을 안배하고 있다.
이 작품의 표현적 묘체로써 정작 작품 자체를 잘 살려내고 있는 것은 결
구이다. 바람을 의인화하여 호격의 표현을 통해 정감화 하였다. 결구에서도
‘特地’가 詩眼字의 역할을 한다. 결구의 ‘特地’는 버드나무가 있는 이 곳, 요
기라는 공간으로 작자가 흥취를 가지고 장난스럽게 대꾸한 표현이다. ‘유별
나게’, ‘특별하게’, 더 적극적으로는 ‘꼭 여기로만’으로 읽어야 한다.26) 그래야
“여기로만 불어와 내 마음을 흔들어요?”하는 여성의 투정어린 하소연의 목소
리로 들리게 된다. 강남땅에는 봄을 맞아 수많은 나무들이 있지만은 오히려
이렇게 여기 이 버드나무에만, 즉 여성화자가 된 내게로만, 봄바람아 먼저
부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 시는 작가가 시적 제재인 버드나무와 감정의 일체화를 시도하고 있어
독자에게 희화적인 웃음 분위기를 띠게 한다. 버드나무를 어느 정도 의인화
하였고 의인화된 시적주체가 싱숭생숭하여 못 견디는 정감을 암시하고 있
다. 봄을 맞아 느끼는 감흥을 버드나무를 통해 형상화하여 봄에 대한 신명과
흥분을 드러내어 시인의 관심과 정감을 배가시켰다.
산새 소리 잦아들고 꽃도 다 져 펄펄 날아
손은 고향 못간 채로 봄만 벌써 다갔는데
느닷없는 남풍은 애틋한 정 남았는지
뜨락 풀에 불어와서 휘휘저어 놓는구나.
26) 이 작품은 바로 “버드나무는 안개를 머금고 비를 맞으며 늘어져 있는데, 강남
에 그 많은 다른 나무들은 다 놓아두고, 봄바람은 유별나게 여기(버드나무)에만
불어대는구나!”라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特地’는 반드시 ‘유별나게 여
기’로나 ‘특별하게 여기’로 풀어 번역을 해야 이 작품을 살려서 읽게 되는 것이
다.(송준호, ?우리 한시 살려 읽기?, 새문사, 2006, 223~224쪽)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07
山禽啼盡落花飛客子未歸春已歸
忽有南風情思在解吹庭草也依依
<四月初一日>(?三峯集? 권2)
이 시는 작자가나그네로 떠돌며 사월 초하루 날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시점에서 봄이 가는 안타까움과 고향을 그리는 심사를 잘 드러낸 시이다. 봄
바람을 의인화하여 대상을 정감화하였다. 고향을 지금 못가지만, 간다고 해
도 봄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현재 봄 속에 동화되
어 있지만 지금 만난 봄은 내 봄이 아니고 새 울고 꽃이 필 때 고향에서 누
려야 할 봄이 바로 내 봄이기 때문이다. 타향의 지금 봄은 나를 거부하고 나
를 외롭게 하며 슬프게 한다. 귀향의 시로 향수를 함축하고 있다. 봄에 고향
에 가고픈 마음은 풍경이 촉매제가 된다.
기․승구는 봄이 가는 풍광과 나그네 심사를 묘사하였다. 저무는 봄날의
모습을 제시했는데 새 소리도 그치고 산꽃들도 다 져서 펄펄 날리고 있다.
봄날을 즐거워하여 우짖던 산새들도 소리가 그쳐 이제는 더 울지 않고 만발
하던 꽃들도 떨어져 바람에 날린다. ‘客子’는 바로 시적 주체이면서 작가이며
시적 화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가는데 나그네로 떠도는
신세라 고향에 못간 채로 홀로 가는 봄 풍광을 바라보고만 있다.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봄이 다가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절로 고향 생각에
울적해 하는 작자의 심사를 잘 함축하였다.
전․결구는 다가올 여름의 풍광을 바라보며 봄바람에 감정을 이입하였다.
홀연히 불어오는 남풍도 가는 봄이 안타까웠는지 뜨락에 불어와 고운 풀을
헤쳐댄다. 남풍은 바로 작가와 일체화된 대상으로 의인화하였다. 고향에 가
지 못하는 내 마음의 불평을 바람의 행태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정이 융합되어 함축성이 강한 시가 되었다.
다. 객관적 묘사와 정경의 교융
묘사가 잘 된 시는 시인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최대한 정성을 다해 절실
208 韓國漢詩硏究 18
하게 그려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이 감정을 묘사한 언어를 보고 독자는 머리
속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그 떠오르는 영상이 바로 心象 즉 이미
지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바로 이런 감정이 고도로 정제되어 나온 것이다.
삼봉은 묘사를 통해 작자인 ‘나’를 객관화하여 대상과 시적 화자를 일정한 거
리를 유지하게 하는 형상화방식을 사용한다.27) 좋은 시는 가슴 속에 든 것을
쏟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절실한 언어로 정서를 최대한 정성을 들여
그려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함축이며 당시에서 가장 잘 구현되어 있다.
보슬비를 따라온 봄 천진교를 건너왔나?
태액지 못가에는 버들 빛이 새로우니.
사모 가득 꽂힌 꽃은 하사 잔치 받아서라
궁 위사도 돌아가는 취한 사람 검문 않네.
春隨細雨渡天津太液池邊柳色新
滿帽宮花霑錫宴金吾不問醉歸人
<癸酉正朝奉天殿口號>28)(?三峯集? 권2)
이 시는 조선 태조 2년(1393)에 삼봉이 門下侍郞贊成事의 직함으로 謝恩
兼正朝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봉천전(奉天殿)에서 황제를 뵙고 지은 작품으
로 응제시의 격식을 갖춘 절구이다.29) 태평자락한 형상을 읊으면서도 풍류
의 흥을 함축하고 있다.
27) 이종묵은 감정은 배제하고 풍경을 포치한 시를 가지고 정도전의 시와 이숭인
의 시를 대비적으로 살폈다. (?우리 한시를 읽다?, 돌베개, 2009, 155~168면 참조)
28) 제목이 ?大東詩選?에는 <正朝奉天門外口號>로, ?靑丘風雅?에는 <癸酉正旦
奉天門口號>로, ?國朝詩刪?에는 <癸酉正朝奉天門口號>로 되어 있다.
29) 口號라는 시형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음영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梁 簡文帝
의 <仰和衛尉新渝侯巡城口號>에서 유래하였는데, 唐代 이후에 시인들이 이를
습용하여 많은 작품들이 나왔으며, 송대宋代 이후 訟詩의 일종으로 쓰이기도 하
였다. ?宋史?, <樂志>에 “악공이 가사를 받으면 이어서 시 한 樂章으로 짓는 것
을 구호라고 이른다. 모두 제황의 미덕과 중국과 외국의 답하고 읊조리는 실정
을 기술한다.[樂工致辭, 繼以詩一章, 謂之口號. 皆述德美及中外答詠之情.]”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궁궐에서 임금의 덕을 기리는 응제시의 일종으로 쓰였다.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09
기․승구는 도치와 반문을 통해 봄이 오는 풍경을 묘사하여 봄날을 맞이
하는 궁궐의 상서롭고 경사스런 분위기를 나타냈다. 화려함과 엄중함을 갖
춘 응제 격식 보다는 아늑한 봄날의 형상을 통해 태평자락한 분위기를 연출
하여 상상의 여백을 주는 당시를 닮아가고 있다. 아마도 “봄기운이 가늘게
내리는 비를 따라 천진교를 건너왔는가 보지?”라고 물어 상상을 유도한다.
그 이유는 태액지 못가를 보니 제일 먼저 버드나무에 물이 올라 보는 사람
으로 하여금 청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봄기운 뿐 아니라 봄 비 속에 천진
교를 건너 천자께 하례하러 들어가는 엄숙한 모습을 그리지 않고 사절단의
모습도 봄 기운 속에 흐릿하게 감추었다. 이른 봄 제일 먼저 연초록 빛깔로
물드는 버드나무를 통해 새롭게 일어나는 명나라 조정의 화평자락을 기리는
마음을 투영시켰다. 許筠은 ?국조시산?에서 승구 뒤에 ‘넉넉하면서도 화려하
고 깨끗하면서도 무게가 있다[富麗溫重]’라고 評하였다.
전․결구는 명나라 황제의 잔치의 즐거움과 조선 사행을 특별히 대우한
모습을 나타내 응제시가 지니는 황제에 대한 성대한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
을 천진스런 작자의 행위를 객체화시켜 그려냈다. 삼구는 내려준 잔치를 통
해 어사화를 받은 영광을 노래하였다. 사모 가득한 어사화를 꽂은 모습을 통
해 황제가 내려주신 잔치의 은혜를 흠뻑 입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취하도
록 마시다가 밤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가는데도 야간 통행을 금지하고 집
행하는 왕실 호위군관인 執金吾 조차도 검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집에
는 결구의 아래에 “살펴보건대 이 사행에는 황제가 특례로 대우하고 통제하
지 않았으니, ‘금오도 돌아가는 취한 사람 검문 않네.(金吾不問醉歸人)’가 대
개 이를 이른 것이다.[按是行也, 帝遇之加禮, 不爲防限, ‘金吾不問醉歸人’, 蓋
謂此也.]”라고 되어 있다.
봄기운이 새로 시작되는 초하루의 모습이 화평자락하고 청신할 뿐 아니라,
하례식에 참여하여 조선 사행에 베푼 황제의 성대한 잔치를 암시하였고 특례
로 대우하고 금지하지 아니한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였고 은연중에 이번 사행
길의 당당함에 대한 삼봉 자신의 자부를 나타냈다. 그래서 洪萬宗은 ?小華詩
評?에서 ‘거침없고 빼어나서 매인 데가 없다[豪逸不羈]’라고 평하였다.
이 시는 정월 초하루 천자 앞이라는 시를 지은 시간과 공간의 상황을 적
210 韓國漢詩硏究 18
절히 대응시켜 나타냈다. 격식의 한계를 벗어난 듯하면서도 멋지게 즐긴 모
습을 술에 취해 돌아가는 자신의 거침없고 천진스런 행위를 타자화하여 그
려 천자의 넓은 포용력과 함께 태평성세의 잔치를 찬양하는 기능까지 함축
하고 있어 작가의 툭 트인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멀리 펼친 가을 구름 사방 산은 고요한데
낙엽이 져 소리 없고 땅은 온통 붉어 있어
시내 다리 말 세우고 돌아갈 길 묻노라니
몰랐구나, 이내 몸이 그림 속에 있었던 걸.
秋陰漠漠四山空落葉無聲滿地紅
立馬溪橋問歸路不知身在畵圖中
<訪金居士野居>30)(?三峯集? 권2)
이 시는 김거사의 시골집을 찾아갔다가 돌아가는 작자의 모습을 객관화하
여 그림처럼 묘사하면서 자신의 흥취를 함축시켜 표현하였다. 기․승구는
서경이요, 전구는 감추어진 김거사와 문답이요, 결구는 객관화한 자신의 독
백이다. 돌아갈 길을 묻는다는 것으로써 그림 속 선경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암시하여 김거사를 仙鄕의 주인으로 슬그머니 추대하여 신선으로 만들었고,
선경을 벗어나는 자신의 아쉬움을 은연중에 함축시키고 있다.
기․승구는 늦은 가을 구름이 끼어있고 저물어 가는 산에 낙엽이 진 경치
를 잘 형용하는데 기구는 멀리 보이는 광경이고, 승구는 가까이 보이는 풍광
이다. ‘漠漠’과 ‘空’을 통해 늦가을 저무는 하늘과 산의 풍광을 연상할 수 있
게 한다. 멀리 바라보니 가을 하늘 엷은 구름이 낮고도 넓게 드리웠고 해도
져 가는지 어둑어둑한데 둘러보는 주위의 온 산은 인적조차 없고 텅 비어
고요하다. 걸어가는 산길에는 나무 잎이 모두 떨어져 소리도 없는 채 땅 위
를 온통 붉게 덮고 있다. 청색, 백색, 홍색이 어우러진 색채가 마치 가을 산
수도를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기에 許筠은 ?국조시산?에서 ‘마치 그림
30) 제목이 ?國朝詩刪?에는 <訪金居士野>로 되어 있고, ‘秋陰’이, ?大東詩選?, ?國
朝詩刪?에는 ‘秋雲’으로, ‘溪橋’이 ?小華詩評?에는 ‘橋頭’로 되어 있다.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11
과 같다[如畵]’라고 評하였다.
전․결구는 이러한 풍광 속에 돌아가려 하는 작자의 심경을 나타냈다. ‘問
歸路’는 가장 시적인 표현으로 네 구절을 하나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가장 잘
집약되어 전환시킨 표현이라고 하겠다. 전구의 이 시어는 결구를 예비하고
있다. 말을 세우고서 시내 다리까지 배웅 나온 김거사에게 돌아갈 길을 묻는
다. 이는 바로 자신을 도화원 떠나면서 길을 묻는 어부로 만들거나, 신선세
계를 벗어나며 길을 묻는 나무꾼으로 설정하는 예비 동작이다. 그러므로 결
구에서 작자는 마치 그림 속 신선경에 남아있었다는 존재로 각성하게 함으
로써 놀라는 상태를 만들어 흥을 내재시켜 여운화하고 있다. 자신이 있었던
공간이 바로 그림 속 신선의 공간이었다는 감흥이다.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
던 공간인 김거사의 들집이 바로 신선의 공간이었고 김거사가 바로 신선이
었다고 기림으로써 상대의 인격 높이고 있다. 아울러 자신도 바로 신선세계
에 머물던 존재로 만들어 경물과 자아가 하나가 되어 物我一體의 경지에 들
어가 있다.
결구는 ‘不知’라는 타동사와 ‘身在畵圖中’이란 목적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금은 설명적이기는 하지만 리듬감이 매우 좋아 읊어보면 음성이 잘 굴러
내려가면서 풍경이 환하게 눈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기에 洪萬宗은 ?小華
詩評?에서 ‘시 가운데 그림이 들어있다[詩中有畵]’라고 평하였으며, 許筠은 ?국
조시산?에서 ‘곱고 투명하며 거침이 없어 넉넉히 唐詩의 경지에 들어갔다[玲
瓏圓轉 優入唐域]’라고 批하였다. ‘玲瓏圓轉’이란 허균의 평가는 소리와 리듬
이 살아 있고 경이 눈에 환히 들어오는 오묘한 경지에 있다는 것으로 시각
적, 청각적 이미지가 형상화되며 흥취가 내재되어 있어 자연스레 당시의 경
지와 닮아 있음을 평한 말일 것이다. 이는 곧 작자가 추구한 흥취라는 시의
정감이 그림 같은 형상 속에 완전히 융합되어 있어, 유한한 형상[景]속에 무
한한 정감을 조화시키며 통합시키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이 시가 표
면상 그림처럼 시각적 심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내면에는 흥취가 간직되
어 말 밖의 뜻[言外之意]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212 韓國漢詩硏究 18
라. 함축의 표현과 여운의 강화
함축이란 겉으로 드러난 언어의 뜻을 좆는 게 아니라 언어가 내포한 속뜻
과 암시하는 바를 살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다.31)
흔히 시인이 시를 짓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가
운데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룩한 삼
봉의 한시는 고도의 상징과 비유로 응축되어 높은 문학성과 예술성을 성취
하게 되었다.
표현된 어휘는 간략하나 뜻은 넉넉하여 무궁한 맛이 있는32) 것이 한시이
다. 한시는 감정 맥락의 연계성을 독자에게 대놓고 드러내어 보여주지 않는
다. 감정의 발전 맥락 가운데서 1단을 잘라내어 가장 암시성 있는 부분을 제
시할 뿐 기타의 것은 생략하고 독자 스스로 연상하여 보충하도록 남겨준다.
생략한 부분은 행간에 다양한 모습과 색채를 은근히 떠올리고 말 안의 감정
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시의 다의적 효과를 구성하게 한다.33) 시에서 함축은
길이의 단축이 아니라 비유를 통한 감추어 말하기에 가깝다. ‘시인의 언어’를
보는 게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허름한 집 삼봉아래 마련했지만
돌아옴은 솔 계수에 가을 와서네.
가난해서 병구완이 맞진 않지만
맘 고요해 근심일랑 잊을만해서
대 지키려 멀리 돌아 길을 내었고
산 좋아서 조그맣게 다락 세웠지.
이웃 스님 찾아와서 글을 묻기에
하루 종일 그래 서로 머물러 있네.
31)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한겨레출판, 2009, 92-93쪽
32) ?詩人玉屑?, 卷 10, <隨筆>, “語少意足, 有無窮之味.”
33) 시의 함축성에 대한 논의는 졸고 「玉峯 白光勳 詩의 含蓄的 性格」(?韓國漢
文學硏究? 35집, 한국한문학회, 2005.)을 참조하였다.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13
弊業三峯下歸來松桂秋
家貧妨養疾心靜足忘憂
護竹開迂徑憐山起小樓
隣僧來問字盡日爲相留
<山中>34)(?三峯集? 권2)
수련은 삼봉에 돌아온 기쁨을 나타냈다. 丹陽의 三峯 아래 草廬 三峯齋를
짓고 꾸려갈 가난한 살림살이지만은, 소나무와 계수나무에 가을이 되었기에
그게 좋아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弊業’ 어려운 삶이나 생활이나 허름한 집을
가리킨다. ‘松桂’는 고향의 숲이라는 관습 용어로 초탈한 세계를 의미하며,
숨어사는 사람의 고고한 인격성을 반영한 말이다. 은연중에 자신의 삶과 절
조에 대한 자부를 암시하였다. 이 연은 서술어를 생략하여 명사구만을 배치
하여 의미를 함축시키고 있다. 설명하는 말이 없이 소재를 배치만 함으로써
시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그림의 배치 수법을 시에 가져다 쓴 것으로 당시에
서 많이 보이는 수법이다. ‘弊業’, ‘三峯下’, ‘歸來’, ‘松桂秋’는 명사구로 서술어
가 없다. “궁한 삶은(허름한 집) 삼봉아래 꾸리겠지만(마련했지만), 돌아옴은
솔 계수에 가을 와서네.”라고 해석되어 ‘꾸리겠다(마련해놨다)’, ‘왔기 때문이
다’라는 서술어를 생략함으로써 시를 함축하고 있다. 작품 전체를 명사구의
시행들만으로 배열하여, 설명이 아닌 제시 형태로 구성함으로써 시적 함축
도를 극대화한다.35) 排置法은 그림에서 소재들을 적절하게 포치함으로써 조
34) ‘松桂’가 ?大東詩選?에는 ‘松逕’으로, ‘妨’이 ?靑丘風雅?에는 ‘防’으로 되어 있
다. ?삼봉집? 제목 주에 “按自榮州避寇還三峯舊居”라고 주가 붙어 있다. 이 시
는 공민왕 18년1369) 우왕 3년(1377)에 나주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고향 榮州에
있다가 三角山 밑에 草廬 三峯齋를 짓고 복거하였는데 우왕 6년(1380)에 영주로
부터 왜구를 피하여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와 산 속에 살면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마음을 읊은 <山中二首>중 두 번째 작품이다.
35) 劉若愚 저․이장우 역, ?中國詩學?, 동화출판공사, 1984, 71쪽 참조. 품사의 유
동성에 대해 “같은 낱말을 다른 품사로 사용할 때 더욱 큰 이점은 유사한 함축과
연상을 가진 다른 단어를 찾는 대신, 정확하게 그와 같은 함축과 연상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또한 명사를 동사처럼 사용함으로써 작자는 그 묘사를 더
욱 공고하게 할 수 있다 .… 이 점은 시인들로 하여금 최대로 가능한 한 간결하
214 韓國漢詩硏究 18
화로운 경계를 형성하며 공간과 여백이 주는 유현한 미감을 주는데 이 방법
을 시에서도 활용한 것이다.36)
함련은 자족적 삶의 단면을 제시하였다. 집이 가난한지라 병이 있는 몸을
정양할 재물이 없어서 그대로 방치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고요하여
근심은 잊을 만하다. 그런데 이 병은 실제 병이 아니다. 일종의 ‘稱病’으로
병을 핑계대어 속세의 번거로움을 벗어나 마음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관습적
행위이다. 진정한 만족이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자신을
달래는 달관된 심사를 엿볼 수 있다. 그러기에 허균(許筠)은 ?국조시산?에서
‘한가롭고 담박하여 맛이 있다[閑澹有味]’라고 평하였다.
경련은 자족적 공간의 묘사이다. 집 주위로 빙 둘러 울타리 삼아 심어둔
대나무를 아껴 보호하느라 베지를 않고 일부러 길은 저만치 돌려냈다. 산이
너무 좋고 사랑스러워 아끼느라 큰 집을 지어 풍과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고
다락은 자그마하게 세워두고 산을 정원으로 삼아 구경한다. 길을 멀리 낸 것
과 작은 다락을 세운 것은 세상의 잡된 일을 멀리한다는 뜻과 아울러 산에
숨어 살며 산수벽에 빠져 산을 즐기는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仁者樂
山]’의 의미를 담았다. 아담하면서도 정서적으로 안온한 공간과 산수에 대한
자부를 제시했다. 曺伸이 ?謏聞鎖錄?에서 이 구절을 ‘한가로워 즐길 만하다
[閒適]’라고 평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로 보인다.
미련은 자신의 한가로운 생활과 속되지 않은 삶을 말하고 아울러 자신의
경륜에 대한 자부를 함축하였다. 이러한 궁벽하고 한가로운 공간에 지내노
라니 찾아오는 이는 수레나 말을 탄 고관 귀족이 아니라 이웃 절에서 수행
하는 스님뿐이고 묻는 내용도 속된 것이 아니라 기벽한 말이나 모르는 문자
다. 담소에 취해서 해가 지도록 머물러 있다. ‘爲’는 ‘그래서, 때문에’라는 뜻
으로 머물러 있는 이유를 나타낸 표현이다. 양웅이 오래된 옛날의 문자와 기
벽한 글자를 많이 알았는데 劉棻이 양웅에게 가서 奇字를 배웠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의 경륜과 한가함을 양웅에게 견준 것이다.37)
게 쓸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모든 사소한 裝身具(수식어)를 배제함으로써 일반
적이고 보편적인 특질을 이루게 한다.”
36) 김종서, 「玉峯 白光勳 詩의 含蓄的 性格」, ?韓國漢文學硏究? 35집, 한국한문
학회, 2005, 192~193면 참조.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15
이 시에서 작가는 안분지족의 삶을 희구하여 한가롭고도 즐길만한 공간으
로 산중을 제시하였으며, 시어들의 배치와 정서가 독자들로 하여금 담담한
가운데 은근한 맛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기에 許筠은 ?국조시산?에서 ‘시상
이 그윽하다[思幽]’라고 批한 듯하다.
마을 안개 흐릿 낀 채 숲 나무들 높낮은데
발자취도 풀에 묻혀 길마저 헤맬 듯해
그대 집 다 가서도 오히려 몰랐더니
늙은 농부 돌아서며 다리 저편 가리키네.
墟烟暗淡樹高低草沒人蹤路欲迷
行近君家猶未識田翁背指小橋西
<訪金益之>(?三峯集? 권2)
이 시는 김익지를 방문하러 가면서 보이는 경관과 심사를 그림처럼 나타
내었다. 저녁연기속의 풍경 묘사를 통해 시상을 감추었다가 노인의 동작 묘
사를 통해 시상을 열어주는 당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승구는 김익지를 찾아가는 도중의 풍광이다. 오래되고 황폐한 터에는
희미하면서도 거무스레한 저녁 안개가 깔려 희미한 속에 높고 낮은 나무들
의 윤곽이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풀은 우거져 사람 다니던 자취를 덮고
있어 길마저 찾지 못해 헤매려고 한다. 저물 무렵 벗을 찾아가는 작자의 조
급하면서도 막막한 심사가 내재되어 있다.
전․결구는 당황하여 가까이 있는 김익지의 집을 찾지 못하다가 찾고 난
뒤의 반가운 심경을 늙은 농부의 행위를 통해 나타냈다. 길 가에 있는 그대
집을 지나쳐 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는데, 마침 지나던 늙은 농부가 있어 물
어보니 등을 돌려 작은 다리 저편을 가리킨다. 그제서야 그대 집인줄 알았다
37) ?三峯集?에는 앞구 뒤에 “살펴보건대 뒷사람의 평에 揚雄의 고사를 사용하였
다고 하였다.[按後人評曰用揚雄事]”로, ?靑丘風雅?에는 “양웅이 기벽한 글자를
잘 알았는데, 사람들이 많이들 술을 실고와 글자를 물었다.[楊雄識奇字, 人多載
酒問字.]”라고 주를 달았다.
216 韓國漢詩硏究 18
는 것이다. 시간의 경과를 함축시켜서 표현하였는데 기․승구에서 시상을
감추어 작자의 심사를 답답하게 만들었다가 결구에서 시상을 열어주어 반가
움의 흥감을 고양시키고 있다.
오랜 길손 아직도 갈옷 입은 채
북풍은 으슬으슬 쌀쌀하여라.
방울방울 찬이슬 맺혀오더니
난초 말라 고운 자태 시들어졌고
아득아득 고향산은 멀기만 하여
가고 가도 갈 길은 끝이 없는데
어떻게 이 세밑을 마무리 할꼬?
세밑에는 된서리도 많아질 텐데.
久客尙絺綌北風凄以凉
團團寒露至蘭枯謝幽芳
悠悠關山遠行行道路長
何以卒歲晩歲晩多繁霜
<感興>(?三峯集? 권1)
이 시는 <感興>이란 제목으로 된 첫 번째 작품으로 타향에서 나그네로
떠돌며 겨울을 맞이하며 겪는 서글픈 심사를 느껴지는 대로 적어 내려간 오
언고시이다. 중의적 표현을 통해 정서를 강화하였다. 한시에서 ‘興’이란 흔
히 말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기분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슬픈 정
서까지 포함한 것인데 여기서는 착잡하면서도 약간은 서글픈 기분을 표현
하였다.
1-2구는 나그네 생활이 길고 날씨도 차 고달픈 상황을 나타냈다. 오랜 나
그네 생활에 여름날 입었던 베옷을 여전히 걸치고 떠돈다고 하였으니 그 궁
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고, 게다가 겨울바람까지 불어와 차갑고도 쌀쌀하여
떠돌이 신세를 더욱 처량하게 한다. ‘凄以凉’이라는 표현은 날씨의 추운 상황
을 나타냈지만 아울러 나그네로 떠도는 심사의 처량한 감정을 내재시켰다.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17
3-4구는 겨울 오는 풍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團團’은 의태어로 찬이
슬이 방울방울 매우 많이 맺힌다는 것이지만 맺혀있는 심사를 상징하고 있
고, ‘寒露’는 찬이슬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여 寒露라는 시기임과 아울러 추운
계절임을 암시하였다. 난초는 시들어 그윽한 향기도 맡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여 계절이 지나감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5-6구는 바뀌는 계절에 향수를 담았다. 고향산은 아득히 멀리 있지만 고향
생각으로 바라보니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것 같아, 그래도 걷고 또 걸어 찾
아가고자 시도하지만 길은 멀기도 하다. 정감적 거리와 실제 거리의 차이를
절감하면서 느끼는 애수를 절실히 담아냈다.
7-8구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늙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아울러 나타냈다.
‘歲晩’은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밑’으로 추운 절기를 나타내며 아울러 ‘인생
의 만년’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繁霜’이라는 말도 된서리 내리는 고통스러
운 상황을 드러내는 말인데 ‘하얗게 센 귀밑털’을 가리키는 重意的 표현으로
정서를 강화하였다. 나그네로 객지에서 떠도는 신세이기에 세밑일수록 겨울
도 깊어져 된서리도 지금보다 많이 내려 힘들어질 거라는 표면상으로는 현
실의 상황을 걱정하였지만, 이면에는 자신의 나이도 한 해를 더 먹게 되어
귀밑털도 더욱 세지리라는 인생에 대한 회한의 정을 아울러 담아냈다.
含蓄의 묘는 비록 말로 다 표현했어도 담겨져 있는 뜻은 다하지 않는데
있어 시의 유원한 미감을 형성한다. 함축이 잘된 시는 언어가 간결하고 정련
되어 형상이 생동적이다. 독자로 하여금 겉을 보고 그 속을 알게 하고 털을
만져보고 그 뼈를 분별케 하고, 문장 속에서 한 가지 사실만을 보아도 글 밖
의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38) 삼봉의 시는 함축이 뛰어나 말은 쉬우나 뜻은
심원하고 문사는 평이하나 내용은 깊어 여운이 있다.
마. 호일분방한 기질의 시적 형상화
시는 그 사람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반영되어 풍격으로 나타난다. 신숙주
38) 劉知幾, ?史通? , <敍事>, “斯皆言近而旨遠, 辭淺而意深, 雖發語已殫, 而含意
未盡. 使夫讀者, 望表而知裏, 捫毛而辨骨, 睹一事於句中, 反三隅於宇外.”
218 韓國漢詩硏究 18
는 “삼봉의 시는 ‘속되지 아니하면서 담박하고 기상이 씩씩하면서도 걸출하
게 빼어남[高澹雄偉]’이 있고 문장은 ‘막힘없이 툭 트여 통하고 광범위하면서
도 자세함[通暢辯博]’이 있다.”라고 하였다. 徐居正은 이숭인의 시에 견주어
“정도전의 시는 의기가 장하면서도 빼어나고 기세 좋게 달리면서 매임이 없
다[豪逸奔放]”라고 하였다. 이는 정도전의 시는 이숭인의 시에 비해 크게 빼
어나 자유스럽고 호쾌한 점이 좋지만 단련이 부족하여 세련된 맛이 부족하
였던 것으로 평한 것이다. 또 ?太平閑話?에는 정도전, 이숭인, 권근의 평생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정도전이 말했다. “북방에 눈이 막 휘날릴 때 가죽옷을 입고 준마에 올라
타서 누런 사냥개를 끌고 푸른 사냥매를 팔뚝에 얹은 채 들판을 달리면서
사냥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소.”39)
정도전의 호방한 기질을 느끼게 한다. 南龍翼은 정도전의 시를 ‘힘차게 앞
으로 나아가는 기상이 있다[凌厲]’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제가의 평을 볼 때
삼봉 시의 풍격은 대체적으로 걸출하고 호탕한 그의 기질을 반영하여 호방
한 풍격을 형성하고 있을 알 수 있다.
새벽 해가 바다 솟아 붉게 물들며
외로운 이 섬 안을 곧장 비추니,
전부자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은
정녕코 이 해와 같았으리라!
거리로야 천년이나 떨어졌건만
오호라, 이 내 충심 감동케 해서
머리칼은 댓살같이 쭈볏이 솟고
늠름하게 영혼 바람 불어주누나!
曉日出海赤直照孤島中
39) “三峯曰, ‘朔雪初飛, 貂裘駿馬, 牽黃臂蒼, 馳獵平蕪, 此足樂也.” (이종묵, ?우
리 한시를 읽다?, 돌베개, 2009, 158면 참조)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19
夫子一片心正與此日同
相去曠千載嗚呼感予衷
毛髮竪如竹凜凜吹英風
<嗚呼島弔田橫>40)(?三峯集? 권1)
이 시는 우왕 10년(1384) 가을에 삼봉이 典校部令으로 聖節使 鄭夢周를
따라 명나라에 들어갔는데 이 때 嗚呼島41)를 지나며 田橫의 풍모를 상상하
며 지은 오언고시다. 嗚呼는 애달프게 한탄하는 소리요, 島는 전횡이 있던
섬이다. 곧 전횡의 죽음을 비장하게 여겨 애닲아 하였기에 ‘오호도’라고 불렀
다. 이숭인의 <嗚呼島>시가 서사적 표현에 집중되었는데 삼봉의 이 시는 호
탕한 기상이 잘 드러나 있어, 분위기를 파악하여 정감을 드러내는 당풍적 인
상이 강하다.
1-4구는 오호도에 뜨는 해를 보고 田橫의 기상을 나타냈다. 새벽 해가 바
40) ?三峯集?, ?東文選?에는 ‘予’가, ?大東詩選?, ?국조시산?에는 ‘余’로 되어 있다. ?三峯集?의 제목 아래에 “?봉사잡록(奉使雜錄)?에 실려있다. 갑자년 가을에 공
이 전교부령으로 성절사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에 들어갔다.(奉使雜錄 ○甲子秋
公以典校部令 從聖節使鄭夢周入明)”로 주가 달려 있다.
41) ?史記?, <田儋列傳>(전담은 田橫의 從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漢
高祖가 항우를 죽이고 천하를 통일하자 齊王 田橫은 따르는 무리[賓客] 5백여
명과 함께 동해 바다의 섬 속으로 망명하였다. 고조가 회유책으로 사람을 보내
어 전횡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전횡이 오면 왕이나 제후를 시켜주겠다.”고 하였
다. 전횡은 그의 빈객 두 사람과 함께 洛陽(한나라 초기 수도)으로 오다가 30리
떨어진 곳에서 그의 빈객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漢王(한고조)과 함께 왕이
라고 칭하다가 한왕은 천자가 되었고 나는 신하로서 그를 섬겨야 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또 폐하가 나를 보고싶어하는 것은 나의 얼굴을 보고자 한 것이니 지
금 내 머리를 베어 30리를 달려가면 썩지 않은 나의 얼굴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하고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고조는 빈객 두 사람을 도위(都尉)에 임명
하고 전횡을 왕자(王者)의 예로서 장사지내 주었다. 장례를 마치자 두 빈객 역시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고조는 애석해하며 사신을 보내 섬에 남아 있는
5백명의 부하들을 모두 불러들이게 했으나 전횡이 죽었다는 사신의 말을 들은
그들은 역시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 司馬遷은 <田儋列傳> 말미에서 “전횡은 지
조가 높은 사람이고, 빈객들도 의기를 사모하여 그를 따라 죽었다. 어찌 至賢이
아니겠는가?”하고 그들을 추앙하였다.
220 韓國漢詩硏究 18
다를 솟구쳐 나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곧바로 햇살이 바다에 뜬 외로
운 섬을 비춰 주는데 마치 전횡의 붉은 마음이 진실로 저 해와 같았을 것이
라고 상상한다. 전횡과 오백인 부하들의 기상이 마치 솟구치는 해에다 비유
하여 시상이 격렬하고 감개가 비장하다. 그러기에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기세가 세차고 빠르다[激烈]’라고 批하였다. ?三峯集?의 4구 뒤에 “살펴보니
뒷사람이 평하기를 ‘이 네 구는 침잠하면서도 웅장하며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아[沈雄磊落] 전횡의 정기가 위로 하늘에까지 솟구침을 상상해
볼 수 있다.[按後人評曰, ‘此四句, 沈雄磊落, 想見田橫精氣上徹霄漢.]’라고 하
였다.”라고 하였다.
5-8구는 작가의 감개를 나타냈다. 시대는 천년이나 먼 뒤에 났지만 작가의
가슴 속에는 감개가 일어 머리카락은 마치 댓살같이 솟구쳐 갓을 떠받게 되
는데 기막힌 감격이 일어나 전횡과 오백 의사의 모습을 상상하니 늠름하게
정기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이 시는 특히 李崇仁이
지은 같은 제목의 시와 우열을 다투는 명작으로 널리 알려졌다. 정도전이 이
시로 인하여 이숭인을 죽였다고 하는 詩禍 사건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42)
한편, 李穡은 이 시 앞의 네 구절을 평하여. “이 시는 비록 전횡을 논하였지
만 바로 자신의 뜻을 말했다고 여겨진다. 노부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宗之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43)라고 삼봉의 절개와 호탕한 기상을 허여하였다.
여기서는 세상에서 전하는 이숭인과의 알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삼봉
은 전횡의 고사를 통하여 침잠하면서도 웅장하며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
받지 않는 자신의 기상을 함축하였다.
42) 許筠, ?惺叟詩話?, “李陶隱嗚呼島詩, 牧隱推轂之, 以爲可肩盛唐. 由是不與三
峯相善, 仍致奇禍.”; 洪萬宗, ?小華詩評?, “李陶隱崇仁與三峯鄭道傳同師牧隱,
才名相捋, 然牧老每當題評, 先李而後鄭, 嘗稱陶隱曰 ‘此子文章, 求之中國, 不多
得也.’ 一日牧隱, 嗚呼島詩極口稱譽, 間數日, 三峯亦作嗚呼島詩, 謁牧老曰 ‘偶
得此詩於古人集中.’ 牧隱曰 ‘此眞佳作, 然君輩亦裕爲之, 至於陶隱詩, 不易得也.’
三峯自此積不平, 後爲柄臣, 令其私臣出宰陶隱所配邑杖殺之. 嗚呼島之詩, 蓋爲
禍崇.” 허균과 홍만종의 이 이야기는 徐居正의 ?東人詩話?를 인용한 것이다.
43) 李穡, <題鄭三峯金陵紀行詩文跋>(?三峯集? 권14, 부록), “曉日出海赤, 直照
孤島中. 夫子一片心, 正與此日同. 此雖論橫, 乃所以自道也. 老父之見如此, 宗
之以爲如何?”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21
그대 보지 못했는가?
가태부는 상수에다 글을 써서 던지었고,
이한림은 황학루서 취해 시를 지은 것을.
살아생전 불우쯤은 근심할게 무어 있나?
뛰어난 뜻 늠름하게 천추에 뻗쳤는데.
또한 보지 못했는가?
병든 이 몸 삼년이나 남쪽 땅에 묶였다가
돌아오며 또다시 금강 머리 이른 것을.
저 강물이 하염없이 흘러감을 다만 볼 뿐,
어찌 알랴? 세월 또한 멈춘 적이 없었던 걸.
이 몸 이미 가을 하늘 뜬 구름과 같은 신세
공명이며 부귀인들 다시 찾아 무엇 하랴?
오늘 느낌 옛 생각에 길게 한 번 탄식하니
노랫소리 격렬하고 우수수 바람 불며
어디선가 갈매기가 짝을 지어 날아오네.
君不見
價傅投書湘水流翰林醉賦黃鶴樓
生前轗軻不足憂逸氣凜凜橫千秋
又不見
病夫三年滯炎州歸來又到錦江頭
但見江水去悠悠那知歲月亦不留
此身已與秋雲浮
功名富貴復何求感今思古一長吁
歌聲激烈風颼颼忽有飛來雙白鷗
<題公州錦江樓>44)(?三峯集? 권1)
44) 제목이 ?大東詩選?, ?靑丘風雅?, ?國朝詩刪?에는 <公州錦江樓>로 되어 있다.
‘轗軻’가 ?국조시산?에는 ‘坎坷’로, 逸氣가 ?大東詩選?, ?國朝詩刪?, ?靑丘風雅?
에는 ‘逸氣’로, 又到가 ?大東詩選?에는 ‘已到’로, ‘激烈’이 ?東文選?에는 ‘激洌’로
되어 있다. 제목의 아래에 ?三峯集?에는 “丁巳七月, 公自貶所從便還三峯舊居,
222 韓國漢詩硏究 18
이 시는 禑王 1년(1375) 여름 삼봉이 司藝로 있었는데 李仁任․慶復興 등
의 親元排明政策에 반대하여 권신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관
하의 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가 우왕 3년(1377) 7월에 유배지로부터 從便하
여 三峯의 옛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24일에 이 금강루를 지나며 감회를 읊은
칠언고시이다. 1-4구는 예시이며 5-13구는 유배에서 돌아오며 느끼는 자신의
심사와 의지를 호탕하면서도 비장하게 그려냈다.
1-4구는 옛사람으로 남방으로 유배되었던 賈誼와 李白을 끌어와서 자신의
심사를 나타냈다. 위대한 인물들이 불우했는데 자신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불우해서 이 다락에서 시를 짓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리 불우해도 걱정을 하
지 않는 것은 이백과 가의가 현달하지 못했어도 그 기상이 당당하였는데 자
신도 또한 그러하고, 그들의 뛰어난 기상 지금까지 남아있으니 자신도 또한
그럴 것이기 때문이라는 함의가 있다. 가의와 이백이 비록 불우하여 좌천되
거나 남방으로 유배 가기는 하였지만 걱정할 것도 없는 것은 그들이 품은
기상과 재주는 긴 역사 속에서 진실된 평가를 받아 추앙 받고 있기 때문이
다.45) 작자 자신이 만난 불우한 상황도 두 사람과 같이 장차 역사 속에서 정
당한 판정을 받으리라는 뜻을 자부하고 있다.
二十四日宿是樓作.”으로 ?청구풍아?에는 “乙卯夏, 公爲司藝, 論時政得失, 宰相
惡之, 貶羅州會津縣. 丁卯秋, 從便還三峯舊居.”라고 주가 달려 있다.
45) 漢나라의 賈誼는 文帝 때 중용되었다가 대신들의 질투 때문에 長沙王의 太傅
로 좌천되어 가다 湘水에 <弔屈原賦>를 지어 던져, 그 물에 빠져 죽은 楚나라의
충신 屈原을 弔慰하고 인하여 자신을 비유하였다. 가의의 문장은 西漢의 제일로
일컬어진다. 唐나라 시인 李白이 安祿山 난리 때 永王 李璘(玄宗의 13자)의 水
軍에 참가했으나 난리가 평정된 뒤 영왕이 반역으로 몰리게 되어, 이백도 주륙
당하게 될 처지였는데 친구들의 주선으로 夜郞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백이
黃鶴樓에서 지은 시가 많지만 귀양 갈 때 郎中 史欽과 더불어 황학루 위에서 부
는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지은 시 <與史郎中欽, 聽黃鶴樓上吹笛.>가 유명한데
“귀양객이 한 번 되어 장사로 떠나는데, 서쪽 장안 바라봐도 집이라곤 전혀 없네.
황학루 위에 앉아 옥피리를 부노라니, 오월 맞은 강가 성에 <落梅花>곡 퍼져가
네.[一爲遷客去長沙 西望長安不見家 黃鶴樓中吹玉笛 江城五月落梅花]”라고 하
였다. 고금 시인들이 黃鶴樓에서 題詠한 시가 많기는 하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
을 남긴 사람은 崔顥와 李白이다. 이백은 詩仙이라 일컬어지며 詩聖이라고 불
리는 杜甫와 함께 역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23
5-8구는 자신의 상황과 세상사의 불평을 은근하게 드러내어 기롱하였다.
炎州는 삼봉이 귀양 갔던 나주 회진현을 지칭하는데, 은연중 자신의 정당성
과 충절을 굴원에 견준 것이다.46) 남방의 귀양살이에서 병든 몸으로 지내다
가 풀려나서 금강 머리에 이르게 된 상황을 말하였다. 유배지로부터 풀려나
三峯의 옛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24일에 이 누에 오른 것이다. 從便은 귀양
간 사람을 풀어주어 서울 밖의 어느 곳에서든지 편리한 데서 살게 하던 일
이니 완전히 복권된 상황은 아닌 것이다. 강물의 흐름만을 알고 세월 가는
것을 모르느냐는 자기 탄식이다. 저 물결이 흘러가듯 일은 반드시 바름으로
돌아가고 순리대로 귀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심사를 나타냈고 세월
도 또한 흘러가 버렸음을 생각하며 착잡한 감회에 젖었다. 7구 아래에 허균
은 ?국조시산?에서 ‘냉담한 말[冷語]’이라고 批하였으니 조롱하고 풍자하는
뜻이 있다. 못난 자들이 존귀해지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으며, 어진 이
들이 오히려 끌려 다니고 방정한 선비가 거꾸러지는 상서롭지 못한 시대에
작자 자신 홀로 이러한 허물 속에 던져졌다고 여겨 당대의 풍조를 기롱하고
비평하는 뜻을 담았다.
9-13구는 자신은 이미 마음을 비워 가을 하늘에 둥실 뜬구름과 같이 여기
니 부귀와 공명이 작자의 마음을 유혹할 것도 없다고 하여 명리에 초연히
할 뜻을 나타냈다. 자유로운 갈매기를 보고 지금의 상황이 억울하지만 그런
감정에 매달리지 않고 달관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매끈하게 전환하여 힘이 있다.[宛轉有力]”고 批하였으니 시상의 전환이 자연
스럽고 삼봉의 뜻이 크고 구애됨이 없음을 나타냈다. 이 금강루에 앉아서 오
늘의 감회와 옛날 고인의 심사를 생각하니 저절로 장탄식이 나오건만, 노래
소리 격렬하게 들려오고 바람도 스산하게 불어오며 또 갑자기 갈매기까지
짝을 지어 벗인 양 날아와 반겨준다고 하였다. 許筠은 ?국조시산?에서 “호탕
하여 즐길 만하다.[浩蕩可喜]”, “강맹하면서도 위풍이 있고 멋대로 즐기며 예
의를 돌보지 아니하는 기상이 있으니 압권이 될 만하다.[豪逸安肆足爲壓卷]”
46) ?楚辭?, 屈原의 <遠遊>에 “아름다운 남주여, 염제의 덕을 받았도다. 고운 계수
나무여, 겨울에도 무성하도다.[嘉南州之炎德兮, 麗桂樹之冬榮.]”이라 하였는데
굴원이 귀양 가게 되자 그 뒤로부터 南海의 주를 가리켜 炎州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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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批하였으니 조정의 참소와 비방을 멀리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좋은 때
를 기다리고자 하는 뜻이 있다. 나라에서는 작자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자
신은 답답하지만 하소연 할 데도 없다. 갈매기에게나 심사를 의탁할 뿐 스스
로 마음을 비워 혼탁한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뜻이 보인다. 그의 사람됨과
기상을 은연중에 엿볼 수 있다. 李㽥는 삼봉의 유배시절 지은 글인 ?錦南雜
題?에는 한 터럭만큼도 걱정하고 분하여 물리치거나 배척하는 말이 없고,
다만 忠信과 道義가 발휘되어 뚜렷하게 말 사이에 넘치니 참으로 輕重을 아
는 大丈夫라고 할 수 있으며, 남에게 옳다는 말을 듣지 못해도 민망해 하지
않는 사람47)이 삼봉이라고 기리고 있다.
이 시는 ‘尤’운으로 韻을 연속시킴 고시체로 ‘君不見’의 형식을 두 번 사용
하여 시상을 전환시키면서 독자의 首肯을 이끌어 내는 효과를 적절히 사용
하였다. 오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 공주 금강루에 올라, 그 동
안에 쌓이고 쌓였던 鬱懷를 풀어내 장중하고 호연한 기상이 돋보인다. 처음
에는 賈誼와 李白의 고사를 들어 불우하지만 역사에 이름이 남은 인물에 상
기시켜 자신의 뜻이 크고 재주가 높음을 자부하여 호탕한 시심을 대비적으
로 조명하였다. 다음에는 자신이 불우한 처지로 금강루에 오른 상황을 나타
냈다. 그 다음은 시대의 혼탁함과 당시 당국자의 바르지 못함을 기롱하면서
자신은 세상의 욕망에 구애됨이 없이 초연하다는 뜻을 나타냈다. 마지막으
로 구름과 바람과 갈매기를 벗하여, 남은 생애를 야인으로 욕심 없이 살리라
는,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면서 혼탁한 세상의 명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심
사를 역동적으로 잘 그려내 감정의 질량을 확대하였다. 이 시를 보면 허균이
?국조시산?에서 이 시 제목 아래에 “넘실넘실 흘러감이 마치 三峽의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滾滾如溯三峽波濤]”라고 批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47) 李㽥, <鄭三峯錦南雜題序 丙辰>(?三峯集? 제8권, 附錄), “(錦南雜題) 無一毫
憂憤擯黜之語, 而獨其忠信道義之發, 沛然溢乎言語間, 豈非眞知輕重大丈夫哉?
大抵得之則喜, 失之則慼, 人之常也. 先生則不然, 其所以見黜者莫非忠信之故,
而其所以自處者無非義理之安. 浮雲富貴, 土芥功名, 等視乎山林朝市, 一節乎
死生窮達, 若將朝聞夕死, 捨生取義之爲者, 非信道篤而自知明者, 其能之乎? 傳
所謂不見是而無悶, 其先生之謂與!”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25
3. 맺음말
본고는 鄭道傳 시의 표현 양상과 문학적 풍격과 미적 인식을 살폈다. 시의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외적 인상을 통합해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시도
하였다. 삼봉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예를 겸비하였고, 성격이 호방하며, 천
부적 자질이 聰敏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아
議論이 정연하였다 한다. 삼봉의 학문은 圃隱 鄭夢周과 같이 성리학에 경도
되어 있고, 문학은 陶隱 李崇仁과 유사하다고 평가된다. 그의 시는 ‘高澹雄偉’
하고, 문장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通暢辯博’하다고 평가된다.
삼봉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흥감을 중시한다. 그의 시는 대상의 합일
을 추구하거나 대상에 정감을 일체화하여 상상을 유도하는 기법을 사용한
다. 흔히 당시는 정감적이며 함축적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시상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唐詩의 표현은 개인의 정감을 함축적으로 묘사해 내는 것에
장점이 있는데 삼봉 시에도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봉의 시는 상
상력을 통한 시적 정감의 내적 확충을 꾀하고 있어, 사실을 전달하거나 사람
을 설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적 감흥을 주며 독자를 감동시키고 있다. 삼봉
은 자신의 정감을 대상의 행태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
정이 융합되어 함축성이 강한 시를 만들었다.
삼봉은 작자인 ‘나’를 객관화하여 대상과 시적 화자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
하게 하는 객관적 묘사 방식을 사용하여 정경의 교융을 이루었다. 묘사가 잘
된 시는 시인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최대한 정성을 다해 절실하게 그려 보
여준다. 삼봉은 감정이 고도로 정제되어 나온 당시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시
인이 감정을 묘사한 언어를 보고 독자는 머리속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되
는데 그 떠오르는 영상이 바로 心象 즉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情景
交融의 상태로 나타나는데 형상 속에 흥취라는 정감이 완전히 융합되어 있
는 상태를 말한다. 형상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정감으로 형성된 경계로 말 밖
의 뜻[言外之意]을 전달하는 효과를 준다.
삼봉의 시는 다양한 함축의 방법을 사용하여 말은 쉬우나 뜻은 심원하고
문사는 평이하나 내용은 깊어 여운이 있다. 함축이란 겉으로 드러난 언어의
226 韓國漢詩硏究 18
뜻을 좆는 게 아니라 언어가 내포한 속뜻과 암시하는 바를 살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다. 감정의 발전 맥락 가운데서 1단을
잘라내어 가장 암시성 있는 부분을 제시할 뿐 기타의 것은 생략하고 독자
스스로 연상하여 보충하도록 남겨준다. 생략한 부분은 행간에 다양한 모습
과 색채를 은근히 떠올리고 말 안의 감정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시의 다의적
효과를 구성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룩한 삼봉의 한시는 고도의 상징
과 비유로 응축되어 높은 문학성과 예술성을 성취하게 되었다.
시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반영되어 풍격으로 나타난다. 삼봉
의 시는 高澹雄偉․豪逸奔放․凌厲하며, 문장은 通暢辯博하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제가의 평을 볼 때 삼봉의 시는 대체적으로 걸출하고 호탕한 그의
기질을 반영되어 호방한 풍격을 형성하고 있다.
삼봉의 시는 대상의 묘사와 정감이 일체화를 이루고 있다. 그의 시는 화
자를 객체화하여 경물을 묘사하고 흥취를 내재화하였으며 표현이 함축적이
고 여운이 강하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정감적이며 서정성이 강한 당시풍
의 경향을 보인다. 이런 당풍적 경향은 고려말 성리학을 수용했던 三隱과 조
선초의 문인에게 어느 정도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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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10. 8. 20
심사완료일: 2010. 9. 20
게재확정일: 2010. 10. 10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229
The Expressive aspect and Aesthetic consciousness in Jeong
Do-jeon'(鄭道傳)s poetry
48)Kim, Jong-seo
This thesis surveyed the expressive aspect and sesthetic consciousness in Jeong
Do-jeon's poetry. It analyzed the poetic structure and synthesized external impression
so as to achieve overall understanding of Jeong's poetry. His poetry unified
the emotion and the depiction of the object. Also his poetry shaped the scenery
and internalized the taste. So the expression was implicative and suggestive. His
audacity reflected the poetic shape and accomplisted the broad scale poetic
character. Jeong's poetry was mostly lyrical and suggestive Dang style. This Dang
style was prevalent in SamEun(三隱) who accepted the Neo-Confucianism in late
Goryeo and the literati of early Joseon.
<Keywords >
SamBong(三峯), Jeong Do-jeon, Unifying the Scenery and Feeling, Audacity,
Dang Style, Suggestiveness.
* Lecturer, Copyrigh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E-mail : mooack@han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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