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기타05) 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해배(解配) 이후 조선 건국 시기를 중심으로 -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8. 12:20

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해배(解配) 이후 조선 건국 시기를 중심으로 -

 


1)文 喆 永**

 

❙국문초록❙
이 논문은 정도전의 시문을 유랑기·혁명기·창업기로 구분하여 파악함으로써, 여말선초에 있어 혁신
적인 대정치가이자 실천적이며 급진적인 이론가이기도 한 인간 정도전의 의식세계를 이해해 보고자 하였
다. 즉, 대정치가나 이론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정도전이 당시 사회상황과 개인적인 욕망과의 갈등 속
에서 그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면서 인간적인 성숙을 이루어 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유랑기(우왕 3년~9년)에서는 관조와 낯설음의 변주로 그의 내면세계를 파악하려 하였다.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터득한 “생전의 곤궁쯤이야 근심할 것도 못되며 이제 다시 공명이나 부귀를 구하지도 않겠다”
는 마음의 여유가 그의 관조적 내면세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면, 3년의 유배생활이라는 뻥 뚫린
삶의 공백 속에서 이제 막 만난 세상에 대한 낯설음이 격리되었던 삶과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의 내면세
계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재기와 모색의 시기(우왕 9년~14년)에서는 스스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선 정도전의 천심(天心)을 향
한 새로운 충정을 만날 수 있었다. 함주에서의 이성계와의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꿈꾸고,
주역을 읽는 가운데서도 혁명을 위한 천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낯설음과 관조가 아닌, 천심
을 향한 새로운 충정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우왕 14년) 이후 혁명기에서는 고립과 비상(飛翔)을 중심으로 그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려
하였다. 천심을 향한 혁명의 길을 걷는 동안 정몽주·이숭인을 비롯한 성균관 시절 이래의 절친한 교우
관계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러한 고립감 속에서도 천심을 향해 비상하려는 욕
구가 그의 내면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 건국 시기에는 그의 가슴벅참과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역성혁명의 최전선에 서서 새로운 왕조
창업이라는 한국 역사에 획을 긋는 大役事를 이룬 후, 잠시 숨을 고르는 듯 태조 2년 가을 임금을 모시고
長湍에서 배를 타고 맑은 하늘 아래노닐 때의 감회를 읊은 시의 결구인 “지금이 바로 조선나라 제2년일
세(此是朝鮮第二年)”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었듯, 내면에 품고 있는 혁명의 당위성에 대한 자신감과 새
왕조 개창에 대한 자부심이 그의 가슴벅참과 떨림 속에서 전해질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정도전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고 있는 새로운 희망과 고려말의 암울하고 옹색한 시대적 분위기를 떨쳐

 

* 이 논문은 2007년도 단국대학교 대학연구비의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 paulmoon@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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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의지를 ‘백성 편히 살리는 그 일’에 대한 천심에 대한 열정과 함께 읽을 수 있
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도전 자신의 내면세계 속에서 겪는 갈등과 좌절과 그 극복의 모습들은 그의 정치·경제·철
학 등에 관한 뛰어난 저작물에서는 오히려 사상(捨象)되어 버리기 쉽다는 전제하에서, 이 논문에서는 그
의 내면세계의 추이를 비교적 잘 보여 주고 있는 그의 시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사실
적인 시라 할지라도 일정한 추상성을 띠게 마련인 점에서 볼 때, 시문을 통한 정도전의 내면세계의 구체
적 형상화에는 일정한 한계가 남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의 남아 있는 시문이 각 시기별로
골고루 쓰여 있지는 않다는 점은 그의 내면세계의 추이를 파악하는 데 있어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이
러한 부분들을 추후에 보완할 수 있었으면 한다.
[주제어] 유랑기, 관조, 낯설음, 재기, 천심(天心), 충정, 혁명기, 고립, 비상(飛翔), 내면세계, 장단(長湍),
새왕조개창, 시문

 

❙목 차❙

Ⅰ. 머리말
Ⅱ. 유랑기(우왕 3년~ 9년):관조와 낯설음의 변주
Ⅲ. 재기와 모색의 시기(우왕 9년~ 14년):천심(天
心)을 향한 새로운 충정
Ⅳ. 위화도 회군(우왕14년) 이후 혁명기:고립과
비상(飛翔)
Ⅴ. 조선 건국 시기:가슴 벅참과 떨림
Ⅵ. 맺음말

 

Ⅰ. 머리말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까지 일컬어지고 있는 정도전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지금까지 활발하게 진행
되어 왔다. 조선왕조 건국에 있어서 정치적 주역을 담당한 대정치가인 동시에 고려의 사회질서와 이
념체계를 전반적으로 비판하여 조선왕조의 통치질서의 기본방향을 제시·설정한 뛰어난 이론가인 삼
봉 정도전(1342~1398)의 사상체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행해져 온 것은,1) 실상 조선왕조 개창의 역
사적 성격과 관련하여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력은 곧 조선왕
조 건국 주체세력의 사회개혁 이념과 건국 초기의 통치 질서의 기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정도전에 대한 기왕의 연구를 통하여 정도전의 많
은 부분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 정도전에 대한 체취는 사라지고

 


1) 李相佰, 1947, 「鄭道傳論」, ?韓國文化史硏究論攷?를 필두로 수 편의 論考가 나왔고, 韓永愚, 1973, ?鄭道傳思想의 硏
究?에서는 그의 사상을 구조적으로 체계화했으며, 그리고 1983년에 나온 같은 저자의 改訂版 ?鄭道傳思想의 硏究?
에서는 정도전의 신분 문제와 관련한 그의 생애 부분이 돋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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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과 역사의 경계 속에서 그런 부분은 주로 문학의 몫으로 돌려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도전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우리와 같은 심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우리 보통의 인간들과는 무관한 딱딱한 하나의 완성된 동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도전의 시문을 중심으로 그의 내면세계를 살펴 본
적이 있다.2) 그의 시문을 관계진출기, 유배·유랑기, 혁명기, 창업기로 구분하여, 당시 사회상황 속
에서 고민하는 정도전의 의식의 변화과정 혹은 내면적인 성숙과정을 살펴보려 하였다. 이렇게 시기
를 구분하여 그의 내면세계를 살핀 것은, 한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이 형성·변화·발전하는 데는 어
떤 결정적 계기가 주어져야한다는 생각에서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도전의 일평생 중 가장 큰 전환점
이라 볼 수 있는 10여 년에 걸친 유배와 유랑, 그리고 조선왕조 개창이라는 결정적 사건을 전후하여
그의 내면세계에 어떠한 변화와 발전이 나타나는지를 파악해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당
시 논문은 정도전의 내면세계 형성의 추이를 전반적으로 파악했던 까닭에, 결정적 계기 안에서의 정
도전의 내면세계의 핵심문제-예컨대 유배·유랑기의 정체성의 흔들림-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못
했고, 그의 내면세계의 심리까지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미완의 과제를 일차적으로 완결한다는 의미에서 몇 해 전에 우선 정도전의 청년
기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관계진출기와 유배기를 중심으로 하여 정체성의 형성과 위기 그리고 극복과
정을 집중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3) 특히 유배기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과 사회심리학을 원용하여 정
도전의 내면세계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따라서 해배(解配)이후부터 조선 건국 시기까지의 정도전의 의식세계를 파악하려는 본 논문은 정
도전의 시문을 중심으로 그의 내면세계를 살펴보기 위해 진행했던 앞선 연구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
다. 정도전의 관계진출기와 유배기를 중심으로 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본 정체성의 형성과 위기 그리
고 극복과정이 해배(解配) 이후 조선 건국시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어떠한 의식의 흐름을 보이고 있
는가를 좀 더 밀도 있게 살펴보려는 것이다. 유랑기와 혁명기, 그리고 창업기를 거치면서 당시 사회
상황 속에서 고민하는 정도전의 의식의 변화 과정 혹은 내면적인 성숙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Ⅱ. 유랑기(우왕 3년~ 9년):관조와 낯설음의 변주
공민왕대에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생활을 했던 정도전은 우왕 원년(1375) 외교문제를 둘러싼 갈등
으로 말미암아 전라도 나주의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당한 뒤에 이인임이

 

2) 文喆永, 「詩文을 통해 본 鄭道傳의 내면세계」, ?韓國學報? 42, 1986.
3) 문철영,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역사심리학적 고찰」,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경세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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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잡고 대원외교를 재개하려 하자 신흥유신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그 때문에 대거 유배 또
는 파직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4) 이 때 대원외교의 재개에 반대한 사람들은 임박(林樸)·박
상충·정도전·김구용·이숭인·권근·정몽주 등으로, 대부분 이색의 문인으로서 공민왕 16년 이후
성균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정도전은 우왕 원년 5월에 유배되어 우왕 3년(1377) 7월까지 2년
2개월 동안 거평부곡의 소재동(消災洞)에서 지내게 된다.
정도전의 유배 생활의 주된 정조는 고독이요, 비애요, 괴로움이었다. 유배지에서 쓴 「사이매문」(謝
魑魅文)이라는 글에는 그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느낀 정체성의 위기와 갈등, 그리고 극복이 잘 나타
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정도전은 유배 상황 속에서 버려지고 고립되어 있는 심사를, 흐리고 자
주 비가 오는 칙칙한 날씨와 흐린 하늘 그리고 어두운 들로 나타냈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쓸쓸하다”고 외로움을 고백했다. 산책을 나가도 쓸쓸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울적하다고 했고 이
런 혼란과 갈등 속에서 정도전의 자아는 분열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결벽증적으로 이전까지의 정체
성과 생활양식을 고집하던 자아와 그 자아를 극복하고자 하는 또 다른 자아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
게 된다. 그는 이런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을 도깨비로 형상화했다.
서술자 ‘선생’은 성가시게 구는 이매(사람을 홀려 해친다는 산도깨비)들을 성을 내며 쫓아낸다. 그
는 도깨비가 싫다. 떠드는 것도 싫고 상서롭지 못한 것도 싫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밖에 나가
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쓸쓸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울적할 뿐인데, 어찌 도깨비 따위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귀찮고 짜증날 뿐이었다.
이런 울적함, 짜증, 분노, 슬픔은 사실 유배 생활 가운데서 떨쳐버릴 수 없는 도깨비 같은 것이었
다. 손을 들어 쫓아내면 또 어디선가 나타나고, 잠깐 마음이 풀려서 한동안 잊고 있노라면 또 어디
선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도깨비들이 어느 날 깨끗하게 사라졌다가 선생의 꿈속에 떼로 나타나
이렇게 항변을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도 않고 기휘(忌諱)를 범하여 태평성세에서 쫓겨
났으니 가소롭지 않습니까? 그대는 또 힘써 배우고 뜻을 두터이 하며 바르게 행하고 곧게 나
가다가, 끝내는 화를 당하여 귀양을 왔는데도 스스로 밝혀야 할 길이 없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
합니까? … 우리들은 당신이 오는 것을 좋아하여 같이 놀아주거늘, 지금 동유가 아니라고 배척
하니 우리를 버리고서 그 누구와 벗을 한단 말입니까?5)
선생은 이 같은 도깨비들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그 뜻을 후하게 여겨 사과하는 글을
지어 사례한다. 깊은 뜻을 몰라주고 쫓아버리려 했던 것에 대한 사과이자 후의에 대한 감사였다. 실
로 울적함, 짜증, 분노, 슬픔처럼 유배 생활 가운데서 떨쳐버리려야 떨쳐버릴 수 없는 도깨비 같은

 

4) ?高麗史節要? 권30, 禑王 원년 4월; 5월.
5) ?三峰集������ 권4, 「謝魑魅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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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속한 것인 한 오히려 감사하면서 껴안을 일이다. 이것은 곧
내부에서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자아의 화해를 뜻하며, 분열된 자아의 통합을 통한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감사의 운문에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사람 하나 없이 홀로 거처함이여
그대 버리고 내 누구와 노닐리.
아침에 나가 놀고 저녁에 같이 있으며
노래 부르고 화답도 하고 세월을 보내네.
이미 시대와 어그러져 세상을 버림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
초야에서 덩실덩실 춤추며
애오라지 그대와 넉넉히 노닐리.6)

 

이것은 하나의 해탈처럼 보인다. 마치 처용이 역신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을 연상케 한
다. 역신 앞에서 춤을 추는 처용의 해결방식은 법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닌 제의적인 것이다.7)
정도전의 경우에도 유배지에서 겪었던 정체성의 위기와 갈등은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온전히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의 정도전의 해결방식 또한 법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닌 제의
적인 것이었으니, 「사이매문」(謝魑魅文)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춤추는 운문으로 맺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유배지-육체적·정신적 차원에서-라는 외계의 땅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다가 그 위기
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 형성의 길로 더덩실 나아가는 제의적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제의를 통해 그의 인식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상을 만들어 낸다. 한 개인은 제의라는
구조적 체계 안에서 자신의 위상을 인식하고, 그 위상 속에서 그 자신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지시적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제의는 어떤 상황 속에서 그 자체의 반성적성격을 드러내면서 자
율성을 구현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의의 의미적 효용성과 직결되는 것이다.8) 정도전은 이렇게 도깨
비와의 담론이라는 제의적 양식을 통해서 새삼 자신의 궁한 처지를 성찰하면서, 지식인의 삶에서 최
종적으로 부여잡아야 할 긍정 대상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토론과 각성의 구조를 통해 보여주
고 있는 것이다.

 

6) 같은 글.
7) 터너(Victor Turner)에 의하면 갈등의 해결은 법적해결, 정치적 해결, 그리고 제의적 해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법적
해결은 이성과 증거에 의해 이루어지며, 정치적 해결은 힘의 역학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해결은 현실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처용이 취할 수 있는 해결방식 역시 이러한 세 가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가 아내
를 침범한 역신을 관에 고발한다면 이는 법적 해결에 해당할 것이요, 그가 힘으로 그 역신을 물리친다면 이는 정치
적 해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 정치적 법적 해결은 그 해결 자체가 많은 상처를 남기므로 근원적 해결에
이르기 어렵다. 처용은 노래하고 춤추는 제3의 방법을 택함으로써, 이 상황의 극적인 갈등을 해결했다(송효섭, ?초
월의 기호학?, 소나무, 2002, pp.119~120 참조).
8) 송효섭, 위의 책, pp.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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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의 도시 후서를 읽음(讀東亭陶詩後序)」에서, 정도전이 도연명(陶淵明)을 평하는 시각도 이와
관련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정도전은 당시 난리가 계속되어 백성이 편안할 날이 없었으니 뜻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구하러 나섰어야 했는데도 도연명은 전원으로 돌아가 술에 의탁해서 세월을 보낸
것에 대해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현실 개혁 의지에 불타는 정도전으로서는 유배 이전에 이미 확고
히 했던 실천적 자세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하지만 궁벽진 산야(山野)에서 온갖 외로움과 갈등을 극
복해 나가면서 정도전은 비로소 도연명이 전원에서 즐겼던 유연한 즐거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도연명이 만종의 녹을 의롭지 않다 하고 전원을 달게 여긴 것은 춥고 배고픔을 즐거움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술에 의탁해서 끝내 그 지조를 지켰으니 취한 것이 곧 절개가 되었다.9)
이 같은 도연명에 대한 평은 정도전 자신의 내면 세계의 여유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이러한 여유는 현실 상황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데서 오는 소극적인 여유가 아니라,
‘취한 것이 곧 절개가 되었다’라는 평에 나타나 있듯 시련기를 겸허하게 극복하려는 데서 나온 적극
적 여유였던 것이다.
정도전은 우왕 3년 7월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곧바로 복직된 것이 아니라 그로부
터 또 7년 동안 영주와 삼봉·부평·김포 등지를 전전하였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유배되어 있을 때
보다 오히려 이 시기가 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왕 원년에 함께 유배되었던 동지들이 하나
둘씩 관직에 복귀하면서 정도전 자신은 심한 고립감에 시달렸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랑의 시기’였다.
그렇다면 유배 3년 동안 정체성의 갈등을 겪으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였던 정도전에게 있어
서 유배에서 풀려서 새롭게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유배에서 풀리긴
했지만 완전한 자유의 몸이 아니라 거주지의 제한이 따르고 관직에 복귀할 수 없었던 ‘유랑의 시기’
에 그의 의식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유배에서 풀린 직후 에 쓴 두 편의 시가
주목된다.
우왕 3년 7월 유배에서 풀린 정도전은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며
두 편의 시를 남겼다. 칠언고시 「공주 금강루에 제하다[題公州錦江樓]」와 칠언절구 「금강을 건너다
[渡錦江]」가 그것이다. ?삼봉집?의 추지(追識)에 따르면 정도전이 이 해 7월 24일에 금강루에서 자면
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A) 「공주 금강루에 제하다[題公州錦江樓]」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賈태부가 글을 써 湘水에 던지고,
李翰林이 취중에 황학루 시 지은 것을.

 

9) ?三峰集? 권4, 「讀東亭陶詩後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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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곤궁쯤이야 근심할 게 무엇 있나,
빼어난 뜻 늠름하게 千秋에 비끼었네.
또 보지 못했나 병든 이 몸 삼년을 남방에 갇혀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또 금강 머리에 온 것을.
………… (中略) …………
다만 강물이 유유히 흘러감을 볼 뿐,
세월도 머물러 주지 않음을 어찌 알리
이 몸은 저 구름마냥 둥둥 떴으니,
공명이나 부귀 다시 무얼 구하리요.10)
(B) 「금강을 건너다[渡錦江]」
한 이파리 조각배 중류에 떠 있는데,
남북을 오가자고 나루터에 모였구려.
해 저물고 길 멀어 어서어서 건너자니,
고개 돌려 갈매기를 보는 사람이 없네.11)

 

너무나 대조적이다. (A)는 적극적이고 격정적으로 시인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있는 반면, (B)는
시인 자신의 주관적인 모습이나 감정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객관적인 묘사만이 남아 있다. (A)에서
는 자신이 삼년을 남방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 돌아 오는 것을 중국 한나라의 가의와 당 나라의 이
백에 견주면서 빼어난 뜻 늠름하게 千秋에 비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금강에서 강물이 유유
히 흘러감을 보면서 지난 유배생활 동안 흘러간 세월을 반추하면서 3년 동안 자신 또한 저 구름마
냥 둥둥 떴으니 공명이나 부귀를 다시 구하겠는가 하고 다짐하고 있다.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터득된
삶의 적극적 여유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전의 곤궁쯤이야 근심할 것도 못 되며 이제 다시
공명이나 부귀를 구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의 여유는, 천추에 남을 만한 빼어난 뜻을 늠름하게 간직하
고 있는 적극적 여유로서 유배생활 동안 정체성의 갈등을 겪으면서 얻어진 것이다. 이제 삶을 관조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조적 삶의 자세와 시련을 극복하려는 적극적 여유는 비슷한 시기에 등암상인(等庵上人)
이 단속(斷俗)으로 돌아갊을 전송하며 쓴 시에서 보이는 ‘이별에 다달아도 서글프잖아/나도 이제 옷
을 털고 따라갈걸세’ 같은 시구에도 드러나고 있다.12) 지금까지 겪었던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쓴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자조적인 부분이 오히려 소극적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으로 옛 허물을 털어버리는 관조의 힘이 느껴진다.

 

10) ?三峯集? 卷1, 「題公州錦江樓」
11) ?三峯集? 卷2, 「渡錦江」
12) ?三峯集? 卷2, 「送等庵上人歸斷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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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존성찰 두 가지에 공력을 다 기울여,
책 속의 성현을 저버리지 않았노라.
삼십년 이래에 근고를 다한 업이
송정에 한 번 취해 허사가 되다니 원.13)
그러나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지은 시 (B)에서는 (A)와는 달리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 전혀 드러
나 있지 않다. 여기서 시인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만들어가는 참여자나 행위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관찰자로서만 나타나고, 그에게 있어 세상 또한 하나의 광경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나루터에서 바쁘
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고개 돌려 갈매기를 볼 틈도 없이 남북으로 움직이며 어서 어서 건너려는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만이 단지 사실화를 그리듯 형상화되어 있다. 유배에서 막 풀려난 세상은 자신
과 무관하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분주한지.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상이 한편으로는 낯설다. 3년 동안 남방
에 갇혀서 자신의 삶의 자리에는 그것이 큰 공백으로 남아있었지만, 세상은 그와 무관하게 공백없이
바쁘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한 이러한 낯설음은 자신의 유배생활 3년을 잃어
버린 3년의 공백기로 곱씹어보게 되고, 자신의 삶 가운데서 같은 시기에 씌어진 다음의 시에서 볼

수 있듯 뻥 뚤린 아픔으로 남게 된다.


삼년이라 창해(회진)의 이별이러니,
평원(원주)에서 같이 만나 한번 웃었오
풍진 속에 해조차 늦어 가는데
천지는 모두 길이 막혔소 그려
고된 글귀는 읽기가 어렵고
깊은 정은 말없이 절로 통하네.14)

 

김약재가 안동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 부치면서, 그는 먼저 유배생활 3년의 아픈 기억에서
부터 시작하고 있다. 유배에서 풀려난 세상의 낯설음은 풍진 속에 해조차 늦어가고, 천지는 모두 길
이 막힌 것처럼 보인다. 세상이 낯설면 낯선 만큼 유배 3년의 세상과 격리되었던 삶은 ‘잃어버린 3
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후 정도전은 영주와 삼봉을 오가며 지내다가 원주에서 교주도안렴사로 와 있던 하륜, 원주목사
설장수와 어울리며 몇 편의 시를 남겼다. 칠언율시의 「원성에서 김약재와 함께 안렴사 하공, 목사
설공을 보고 짓다[原城 同金若齋 見按廉使河公 牧使偰公賦之]」가 그 첫 번째 작품으로 우왕 3년 겨
울에 지은 것이다. 이 때는 김약재, 즉 김구용이 동석했다. 여기서도 잃어버린 3년이 강조되고 있다.

 

13) ?三峯集? 卷2, 「自嘲」
14) ?三峯集? 卷2, 「聞金若齋在安東 以詩寄之」
8
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 209 -

 

이별한지 삼 년이라 이제 만나니,
지난 일 유유하다 꿈속과 같네.
비난과 칭찬 그리고 시비 쌓였다 해도 몸은 아직 살아 있고,
슬픔과 기쁨이 출처는 다르지만 도는 도로 같다네.15)
이 시는 후인의 평에 “이 두 글귀는 사의가 웅혼하여 씹을 수록 남은 맛이 있음과 동시에 옛날
비웃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배 중에 그를 비난했던 쓰라린 막말들을 씻어 버렸다.”할 정도로 관조
의 힘이 있다. 어떠한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기쁨과 슬픔의 그 근원을 찾아가려는 살아있
는 에너지를 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월의 흐름, 곧 잃어버린 3년의 이미지 속에서 관조와 낯설
음이 변주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주 속에서 마음을 같이하는 동지에 대한 갈급함이 우왕 6년에
쓴 다음의 시에 나타나고 있다.

 

바라노니 님이여 이 잔을 마시오
내 마음이 달과 함께 조촐하다오
구름떼 날아들어 그늘이 지니
맑은 빛이 중도에서 먹히고 마네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 없으면
묻힌들 뉘라서 아깝다 하리.16)

 

정도전은 신유학 수용과 함께 신흥사대부로서 집합적 정체성을 함께 나누고 있던 동료 집단에 커
다란 동지애(同志愛)를 느끼고 있었다. 유배기에 포은(圃隱) 정몽주에게 붙이는 시에 나타나고 있는
‘마음을 함께 나누는 친구(同心友)’라는 고백과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서로 잊지 말자’라는
다짐 속에서,17) 정도전의 그러한 뜨거운 동지애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동지애는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맑은 빛이 구름떼에 먹히는 현실이 낯설다. 하지만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
(同心友)이 있다면 설사 묻힌다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배에서 풀려난
지 3년이 흐르면서 잃어버린 3년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주위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점차
약화되고 있다.
정도전은 우왕 3년(1377) 7월에 나주 거평부곡에서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다. 귀양이 풀린 것이 아
니라 거주지가 조금 편한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나주에서는 왜구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
는데, 고향인 영주에서도 왜구 때문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왜구를 피하여 단양, 제천, 안
동 등지로 피난길을 자주 떠났다. 이처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왜구 때문에 시달리기도 하고(「避

 

15) ?三峯集? 卷2, 「原城同金若齋見按廉使河公崙牧使偰公長壽賦之」
16) ?三峯集? 卷1, 「順興南亭 別河大司成還京」
17) ?三峰集? 권1, 「次韻寄鄭達可」
9
- 210 -

 

寇」), 초라한 초가에서 스스로 밭갈이 하면서 식량을 조달하기도 하고(「山中」), 그윽한 시골살이에
젖어들기도 하면서(「村居」) 그는 기다림을 배운다.

 


버려두었다해서 거듭 한탄마오
재목이 크면 용납하기 어렵느니라
또 (又)
나그네 거문고를 안고 앉아서
말없이 선뜻 타지를 않네
한 가락 아끼는 건 아니지만
지음이 어려울까 두려워서네
… (중략) …
감회 깊어 소리가 나질 않으니
급히 당기면 줄이 도로 끊어지는 걸18)

 

버려 두었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목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
다고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왜 행동으로 나서고 있지 않은
가. 한 가락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음을 알아줄 사람, 자신의 재목을 용납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세상의 낯설음을 관조하며 기다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감회가 깊어 소리가 나
지 않는 거문고로 비유하고 있다. 아무리 잃어버린 3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할지라도, 급히 당
기면 줄이 끊어진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줄 지음(知音)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 지음을 기다리며 웅장한 혁명사상을 구상하고 있었다. 세상의 낯
설음과 관조의 힘, 그리고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정도전의 의식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가
유배에서 풀린 지 약 3년 후 경신년 계동(季冬), 즉 우왕 6년 12월에 지은 「매천부」이다.

 

천기는 냉랭하고
마른 나무 바람에 우네.
삼봉자 나막신 신고 문을 나서니
사방이 아득하네.
… 중략 …
어허 인간세상 어디 있나
바람과 해 동떨어져 몇 겁이던가
인간의 열은 내 병이 될 수 없고
세속의 누로 내 진이 흔들리지 않는다.19)

 

18) ?三峯集? 卷1, 「效孟參謀」
10
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 211 -

 

천기는 냉랭하고 마른 나무 바람에 우는 시대상황 속에서 삼봉자 나막신 신고 문을 나서니 세상
은 사방이 아득할 정도로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낯설음과 동떨어짐이 나에게 병으로 작
용할 수 없다. 세속의 누로 내 진이 흔들리지 않는다. 내 안에 견고하게 나의 빼어난 뜻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후 수 년동안 그는 이 빼어난 뜻을 간직한 채 三角山.富平.金浦 등지를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
에 종사하였다. 물론 그가 어떤 처지에서 어떤 행동을 하건 사회가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않는 한 현
실의 벽은 어떤 형태로건 존재하는 것이니, 이때의 시련도 그는

 

5년에 세 번이나 집을 옮겼는데,
금년에 또 이사를 하게 되다니.
들은 넓고 모옥은 자그마하고,
산은 긴데 고목은 하 성글구나.
밭 가는 사람 서로 姓 물어 보고,
옛 친구는 편지조차 끊어 버리네.
천지가 능히 나를 용납해 주니,
표표히 가는 대로 맡겨나 두자.20)

 

라고 하여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 시에 붙여진 안설에 따르면, 임술년(우왕8년, 1382)에 정도전
이 삼각산 밑에 삼봉재(三峰齋)라는 오막살이 집을 짓고, 사방에서 모여든 제자들을 가르쳤다. 생계
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출신의 재상이 정도전을 미워하여 집을 헐어 버렸다. 할 수 없
이 그는 제자들을 이끌고 과거 동문인 부평부사(富平府使) 정의(鄭義)에게 의탁하여 부평부의 남촌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전임 재상 왕모(王某)라는 이가 별장을 만들기 위하여 정도전의
재옥을 헐어버렸으므로, 그는 다시 김포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맑은 빛이 구름떼에 먹히는
현실에서도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同心友)이 있다면 설사 묻힌다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던 정도전에게 있어서, 옛 친구들이 편지조차 끊어버리는 현실의 낯설음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
다. 이렇게 현실 정치의 각박함 속에서 편지를 끊어버리는 옛 친구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이제 인간에 대한 실망과 배신에 대한 절망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용납해주는 천지
안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자신의 길을 표표히 갈뿐이라는 관조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왕
9년(1383)에 그가 함주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모의하게 된 것은 이러한 현실의 낯설음과 관
조적 삶의 적극적 여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 ?三峯集? 卷1, 「梅川賦」
20) ?三峯集? 卷2, 「移家」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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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재기와 모색의 시기(우왕 9년~14년):천심(天心)을 향한 새로운 충정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유랑의 시기에 정도전은 절망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섰다.
그가 발견한 희망이란 다름 아니라 이성계(李成桂)였다. 정도전은 우왕 9년(1383) 가을과 이듬해 여
름 두 차례에 걸쳐 함주(咸州:지금의 함흥)의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당
시 이성계는 동북면 도지휘사로서 동북지방의 국토방위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가 당시 왜구토벌로
명성이 높은 무장 이성계를 찾아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혁명을 모의하기 위함이었다. 저무는
가을날 장군기를 따라 동주(東州)를 지나가면서, ‘호화스런 지난 일 어느 곳에 물을거나/찬 연기 시
든 풀 묵정벌에 얽혔구려’라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21).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장군기를 따
라 가는 군사처럼 전의를 다지고 있다. 유랑기 낯설음과 관조의 변주를 지나 이제 새로운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길을 표표히 갈 결심을 하고 있다.
우왕 9년(1383년) 가을에 咸州로 이성계를 찾아갔을 때, 정도전은 다음과 같은 詩를 지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靑山의 몇만 겹 속에 자라났던고.
잘 있거라 다음에 언제 서로 볼는지,
인간세상 굽어보면 묵은 자췬걸.22)

 

이 당시 이성계의 잘 훈련된 군사들을 둘러보고서 그를 靑山 속에서 자라난 우람한 소나무에 의
탁하여 노래한 것이니, 이것은 곧 정도전 스스로 자신의 文과 이성계의 武가 언제쯤이면 서로 합쳐
큰 일을 이룰 수 있을런지하는 바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咸州幕으로부터 金浦로 돌아왔
을 때 지은 「自詠」이라는 다섯 수의 詩에도 이성계의 군사를 보고 와서 품은 世道 만회의 뜻이 담
겨져 있다. 먼저 그는 첫 수에서,

경서를 궁구하여 우리 임금 바루고자,
어린 시절 익히어라 머리가 하얗도록.
盛代의 狂言은 끝내 쓰임이 없어,
남방으로 쫓겨나 친구들과 헤어졌네.23)
라고 하여, 어려서부터 머리가 하얗도록 경서를 궁구하지만 시대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 그것은

 


21) ?三峯集? 卷2, 「過古東州」
22) ?三峯集? 卷2, 「題咸營松樹」
23) ?三峯集? 卷2, 「自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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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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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用한 盛代의 狂言에 불과할 뿐이며, 자신의 유배도 결국 그로 인한 것이라고 파악한다. 이러한 파
악을 전제로 하여 둘째 수에서는 致君澤民에의 어려움과 儒生의 무력함을,24) 세째 수에서는 儒術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武에 관심을,25) 네째 수에서는 농사에 대한 관심과 세금의 막중함을 노래하고
나서,26) 이제 다섯째 수에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고금을 통털어 백 살 넘긴 사람 없네,
득실을 가지고서 정신을 허비마소.
다만 썩지 않는 斯文이 있다면,
후일에 당연히 姓이 鄭씨인 사람 나올 걸세.27)

 

이것은 곧 백 년도 못 되는 유한한 인간의 삶 속에서 부귀·功名 따위에 정신을 쏟는 부질없는
짓은 않겠으며, 오로지 萬古에 남을 빼어난 뜻을 간직하고 행동할 뿐이니, 그 뜻은 후일 당연히 자
신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과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성계와 마음을 합친 그는 이듬해
인 1384년(우왕 10) 봄에 김포로 다시 돌아 왔다가 그해 여름 다시 함주를 찾아갔다. 이 때 지은 다
음의 시가 주목된다.

 

호수 빛 하늘 그림자 아울러 가물가물
한 조각 외로운 성(城)이 석양을 띠었어라.
이 때를 당해 차마 옛 노래 듣는단 말인가,
함주는 본래 이 나라 중앙이라오.28)

 

여기서 옛 노래와 이 나라 중앙(中央)이 대비되고 있다. ‘함주는 본래 이 나라 중앙이라오(咸州原
是國中央)’이라는 시구를 통해 정도전의 꿈을 볼 수 있다. 함주가 어떻게 나라의 중앙이 될 수 잇을
것인가. 여기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에게 있어 함주, 여기야말로 이 나라
를 구하는 중심이 될 것이었다.
우왕 9년(1383),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온 뒤 정도전의 생애는 신명을 바쳐 개혁을 주도하는 혁명

 

24) 同上,
“致君無術澤民難 擬向汾陰講典墳
十載風塵多戰伐 靑衿零落散如雲.” 25) 同上,
“者知儒術拙身謀 兵略方師孫與吳
歲月如流功未立 素塵狀上廢陰符.” 26) 同上,
“書劒區區兩未成 問歸田舍事躬耕
不堪早溢年來甚 爭奈門前責地征.” 27) 同上.
28) ?三峯集? 卷2, 「又赴咸州幕都連浦途中」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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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서의 모험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43세가 되던 1384년(우왕 10) 그는 오랜만에 다시 벼슬길에 올
랐다. 이 해 7월 그는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성절사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의 서울
인 금릉에 다녀왔다. 우왕이 왕위에 오른 것을 승인받고 시호책봉을 요구하는 것이 사행의 목적이었
다. 이때 오호도(嗚呼島)를 지나면서 전횡(田橫)을 조문한다. 전횡은 스스로 왕이 되었다가 무리 5백
명을 거느리고 오호도로 도망왔다. 한고조가 사람을 시켜 부르자 낙양으로 오다가 30리를 앞에 두고
자결하였는데, 그러자 그 무리 5백 명도 다 따라서 자살하였다. 그런데 이 장소를 지나면서 정도전
은 ‘몇 천년이나 떨어졌지만/아아 나의 충정이 느껴지네/머리칼이 치솟아 대나무같아/으시시 영풍(英
風)이 불어오네’라고 하여,29) 전횡의 거사를 상기하면서 전율을 느끼고 있다. 머리칼이 치솟듯 혁명의
정기를 느끼면서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우왕 10년 가을경에 쓴 「매설헌도(梅雪軒圖)」에서도,

 

옛 동산 아득아득 예장 나무는 그늘지고
온 땅에 바람 차고 눈마저 깊이 쌓였네.
창 앞에 고이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온통 하얀 가지 위에서 천심(天心)이 보이누나.30)

 

라고 하여, 주역을 읽는 가운데서 혁명을 위한 천심(天心)을 본다. 이제는 더 이상 낯설음과 관조가
아닌, 천심(天心)을 향한 새로운 충정이 일고 있는 것이다.
명나라와의 외교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이듬해인 우왕 11년 4월에 성균좨주(成均祭酒, 종3
품)로 승진하여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유배 이후 꼭 10년 만에 성균관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때의 소회를 정도전은 「성균관에 들어가다[入成均館]」라는 시를 지어 피력하였다.

 


십 년이라 또 다시 여기를 오니,
오히려 문밖에서 머뭇거리네.
바로 곧 예전의 司藝지만,
지금은 새로 교관이 되었구나.31)

 

9년여에 걸친 야인 생활을 청산하고 중앙 정계에 다시 진출했을 때 처음에는 이처럼 문밖에서 머
뭇거릴 정도의 어색함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 양광안렴(楊廣按廉) 유정랑(庾正郞)을
전송하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당시의 사대부의 理想型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일찍이, 유자와 관리를 논한 학설에 이르기를, ‘도덕이 몸과 마음에 온축한 것을 유자라 이

 

29) ?三峯集? 卷1, 「嗚呼島弔田橫」
30) ?三峯集? 卷2, 「梅雪軒圖」
31) ?三峯集? 卷2, 「入成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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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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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교화를 정사에 베푸는 것을 관리라 이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 온축한 것이 바로 시용의
근본이 되는 것이며, 그 시용도 온축에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이고 보면, 유자와 관리는 한
사람이며 도덕과 교화는 두 가지 이치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세도가 낮아짐으로부터 도덕은
사장으로 변하고 교화는 법률로 바뀌어서, 유자와 관리가 갈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자는 관
리를 속되다 배척하고, 관리는 유자를 썩었다고 나무라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과 교화는 모
두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간혹 儒術로써 吏의 이치를 가식하는
자도 있으나 역시 자기 사욕만을 채우려는 데 불과할 뿐이다 … ?論語?에 이르기를, ‘배움이
넉넉하면 벼슬하고, 벼슬해서 여유가 있으면 배운다’고 하였으니, 이는 벼슬과 학문이 서로 필
수가 되는 것이다. 두 세분들은 그 재질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하여 힘써 매진한다면 뒷날에
성취되는 것이 참으로 쉽게 예측하지 못할 것이며, 또 이 세상으로 하여금 眞儒와 循吏가 여기
에 있지,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이다.32)
이에 의하면, 누구든지 능력있는 자가 독서와 학문을 업으로 하게 되면 士가 될 수 있는데, 일단
士로서 수업을 거친 사람이 아니면 官吏는 될 수 없다. 따라서 관리는 사에서 뽑혀야되며, 사는 장
차 관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것을 그는 ‘儒吏爲一’이라고 말한다. 즉 士官一致 또는 儒
吏一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왜 사관일치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유자라는 것은 도덕을 몸소 체득한
사람이요, 관리라는 것은 교화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도덕의 체득 없이 교화가 이루어 질 수
없으므로 도덕과 교화는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도덕의 주체자인 사가 교화의 주
체자인 관리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33)
그런데, 세도가 낮아짐으로부터 도덕이 사장으로 변하여, 사와 관이 갈라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즉, 무인난 후의 유학이 사장학으로 생존하면서부터 이러한 士官一致의 사대부상은 실현될 수 없었
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현실에의 실천이 도덕과 분리되지 않은 신유학을 새롭게 받아들이면
서, 신유학에서 새롭게 강조되고 있는 四書 중에서 특히 ?論語?의 ‘學而優則仕 仕而優則學’을 토대로
사와 리, 사와 학의 관계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가운데에서, 당시 元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자들을 통해서 주로 성균관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던 元의 實踐的인 신유학을 수
용하여, 한편으로는 佛敎와 또 한편으로는 무인난 후의 사장적 학풍과의 싸움 속에서 새롭게 성장하
고 집결해 가는 사대부 계층의 이념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념형은 결국 신유학적
이념을 체득한 ‘眞儒’이면서 그 이념을 현실에 실천할 수 있는 ‘循吏’인 것이다.
이러한 이념형의 실천을 위하여 정도전은 1387년(우왕 13) 자원하여 경기도 남양부사로 내려가 선
정을 베풀고 돌아왔다. 아마도 수령의 경험이 필요하고 또 외직을 거쳐야 중앙의 요직에 오르던 관
례를 따랐을 것이다. 그 뒤 수문하시중으로 승진한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올랐다. 이미
정도전과 의기가 투합된 이성계가 그의 출세를 밀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32) ?三峰集? 권3, 「送楊廣按廉庾正郞詩序」
33) 韓永愚, ?鄭道傳思想硏究?, p.12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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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위화도 회군(우왕 14년) 이후 혁명기:고립과 비상(飛翔)
우왕대에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이 권력을 과점하던 상태는 우왕 14년(1388) 최영
(崔瑩)과 이성계에 의해 종식되었고, 같은 해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잡으면서 새로운 국면
이 전개되었다.
회군 직후 조준에 의해 전제개혁이 추진되면서 신흥유신 내에서 그에 대한 찬반의 입장이 분명히
갈렸는데, 조준과 정도전이 전제개혁을 주장한 반면 이숭인과 권근은 이색의 주장에 동조하여 전제
개혁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두 사람은 개혁파의 공격을 받아 창왕 원년(1389) 10월에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조선건국에 이르기까지 소환과 파직, 유배를 거듭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정도전은 권근과 이웃에 살면서 도연명의 시를 함께 읽는 즐거움을 나누었다. 공양왕 2년에 지은 것
으로 추정되는 다음의 시에 그러한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좋은 벗이 이웃에 함께 살아서
골목이 이리저리 연접했다오.
찬 이슬에 젖으면서
등불 밝혀 밤에 모이네.
마주앉아 기문(奇文)을 감상하다가
이치의 극을 보면 말을 잊는다.
날로 달로 언제나 이와 같으니,
이 즐거움을 잊지 말자 맹세를 했네.34)

 

정도전의 일생에서 10대 후반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색이 원에서 연구하고 돌아와서 성균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학의 가르침을 그의 문생들과 함께
펴기 시작하자, 수 십 명에 불과하였던 관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때의 상황을 ?고려사? 편
자는, “이에 따라 배우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서로 더불어 관감(觀感)하니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
이 비로소 흥기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당시 성균관을 중심으로 흥기하는 정주성리학이라
는 새로운 유학(新儒學)에 대한 수업과 토론 과정을 통해 학자들이 서로 교감을 나눌 수 있었고, 그
에 따른 동료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다.
집단 형성이 낳는 결과 가운데 가장 현저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일어나
는 감정의 고양이나 강화다. 집단 속에서는 자신의 열정에 스스럼없이 몸을 내맡기고, 집단 속에 녹
아들어가 개체로서의 존재가 갖는 한계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타인들과 똑같은 감정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개인의 감정적 흥분은 상호 감응으로 점점 강해진다. 요컨대 감정의 전염

 

34) ?三峯集? 卷1, 「夜與可遠權近子能 讀陶詩賦 以效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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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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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35) 이런 감정의 전염의 모습이 ‘찬 이슬에 젖으면서/ 등불 밝혀 밤에 모이고/ 마주앉아 함께 기
문(奇文)을 감상하다가/이치의 극을 보면 말을 잊는’서로에 대한 ‘관감(觀感)’으로 나타나고 있다.36)
이러한 집단적 감정의 고양은 성균관 시절부터 이때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특히 이색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같은 세대의 학자들, 즉 정몽주·이숭인·하륜·박상충·김구용·박의중·권근·윤소종 등과
의 교유는 조선 건국 직전인 공양왕 3년까지, 거의 평생 동안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창왕 즉위년 10월에 쓴 「도은문집서」에서는 우리나라[吾東方] 학문의 계보를 을지문덕·최치원으
로부터 김부식·이규보를 거쳐 이제현·이곡·이인복 등으로 잇고, 그 뒤로는 이색이 중국에 유학하
여 성명도덕의 학설, 즉 성리학을 공부한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 다음 정몽주·이숭인·박상충·박의
중·김구용·권근·윤소종, 그리고 자신 등이 그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을 언급하였다. 즉, 이때까지
만 해도 정도전은 이숭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스승인 이색이나, 그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정몽주
등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판서 집에서 포은과 함께 시를 지
을 때의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듯,

 

정원은 깊고 깊어 나무 빛깔 은은하고
구름 속 해 보여라 비는 상기 부슬부슬
비파소리 둥둥둥 미인은 노래하니,
동이 술 넘실넘실 손은 아니 돌아가네.37)

 

결국 정도전이 개인적인 교유관계는 고려 말까지도 조준보다는 정몽주·이숭인·권근 등 젊은 시
절부터 학문적 교감을 나누어왔던 오랜 동료들에게 기울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38) 그러나 고려 말
에 정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면서 지금까지의 개인적인 친교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다. 왜
냐하면, 재기와 모색의 시기에 머리칼이 치솟듯 혁명의 정기를 느끼면서 결의를 다지고 있었고, 천
심(天心)을 향한 새로운 충정은 고립을 더 이상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천심(天
心)을 향한 혁명의 길을 걷는 동안 젊은 시절부터 이어졌던 절친한 교우관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
을 수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위화도 회군 직후 그는 꿈에서 도은 이숭인을 만난다. 꿈에 도은이 스스로 말하기를 항상 바다를
건널 때에는 꾸린 짐들이 물에 젖게 된다고 하는데, 초췌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그 꿈의
상황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35)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문명속의 불만?, 열린책들, 1997, pp.96~97.
36) 고려 후기 신유학의 수용과 함께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유학자 집단 속에서 형성되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서로의 ‘관감(觀感)’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서로의 ‘관감(觀感)’은 신유학 수용에 따른 집단적 정체성 형성의
결과이면서 또 한편으로 그러한 정체성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37) ?三峯集? 卷2, 「李判書席上 同圃隱賦詩」
38) 이익주, 「삼봉집 시문을 통해 본 고려말 정도전의 교우관계」,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경세원, 2004,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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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 밖에 떨어져 있는 벗님이,
밤이면 꿈에 보이네.
맥 빠진 노고의 기색
곤궁한 나그네의 몰골이로세.
… 중략 …
바다엔 물결도 거센 것이고
길도 간험한 곳 많을 터인데,
그대는 지금 날개도 없으면서
어찌하여 별안간 여기 있는가.
꿈이 깨자 더욱 더 측은하여
부지중 두 가닥 눈물이 줄줄 내리네.39)

 

꿈은 일종의 투사(投射), 즉 내면과정의 외면화이다.40)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너무나 독특하다. 그
리고 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꿈의 해석을 통해 그의 내면세계를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41). 여기에는 거센 바다와 험한 길의 이미지가 있고, 바다를 건널 때에
는 꾸린 짐들이 물에 젖게 되는 이미지가 있다. 밤마다 꿈에 보이는 곤궁한 나그네 몰골의 친구, 그
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또한 날개를 달아서 훨훨 비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타나는 친구의
모습은 날개도 없이 축 처지고 맥빠진 채, 마치 천형을 겪듯 ‘항상 바다를 건널 때에는 꾸린 짐들이
물에 젖게 된다’고 초췌하게 말하고 있다.
정도전은 대체로 호방한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42) 그러나 대인관계 특히 친구관계에 있
어서는 좀 더 까다로웠던 것 같다. 정도전의 시 「贈柏庭遊方」에 붙인 정몽주의 안설에 의하면,43) 삼
봉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느 누구든지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정몽주·이숭인을 비
롯한 성균관 시절부터 이때까지 이어지고 있던 이색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같은 세대의 학자들과의
친구관계는 정도전에게 있어서는 삶의 한 축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한 축을 버리고 다
시 새로운 한 축을 형성한다는 것은 혁명적 필요성의 차원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같이

 

39) ?三峯集? 卷1, 「夢陶隱自言 常渡海裝任 爲水所濡 盖有憔悴之色焉」
40) 프로이트, 「꿈-이론과 초심리학」, ?프로이트전집13?, 열린책들, 2000, p.226.
41) 라깡은 꿈들의 기표로서의 속성에 주목하여, 이것들은 우리가 풀어야 하는 텍스트임을 강조한다. 꿈을 문자로 구성
된 기표로 이해하고 그것들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브루스 핑크, ?에크리읽기?, pp.184~185, 도서출판b, 2007).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도전의 이 시 또한 우리가 풀어야 하는 텍스트이고 무자로 구성된 기표를 이해하고 그
것들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42) 예컨대 서거정의 ?태평한화?에 전하는 다음의 일화에서 그러한 성격을 볼 수 있다. 하루는 정도전이 이숭인·권근
과 더불어 각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
를 짓는 것을 평생의 즐거움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
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
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한다.
43) 정포은이 이 시편에 다음과 같이 제하였다. “삼봉이 누구에게나 허락이 적다(三峯於人少許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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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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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동심우(同心友)의 관계 형성은 정도전의 평소 대인관계 측면에서 볼 때 쉽지 않은 것이었다. 위
화도 회군 이후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혁명 동지들을 향한 절조를 노래한 시들은 있는 반면
정몽주나 이숭인을 향해 전심을 쏟았던 것과 같은 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위화도 회군 직후 꿈에서 초췌한 기색의 도은 이숭인을 만나고 그가 꿈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항상 바다를 건널 때에는 꾸린 짐들이 물에 젖게 된다고 하는 위와 같은 시를 남
긴 것은 이러한 대인관계의 전환기의 정도전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도은 이숭인을 비롯한 마음을 같이하는 동심우(同心友)들을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현실의 아
픔과 안타까움이 들어가 있다. ‘만나고 싶다’는 ‘소원 충동’은 본질적으로 무의식의 본능적 요구를
대변하는 것으로 전의식조직에서 하나의 꿈-소망(소원성취 환상)으로 형성된다.44) 이 과정 속에서 사
고는 이미지, 특히 시각적인 이미지-예를 들면 ‘꾸린 짐들이 물에 젖는다’-로 변형된다. 다시 말해,
마치 전반적으로 ‘재현가능성’이 그 과정을 지배하는 주요 요인이라도 되듯, 단어 표현들이 그에 상
응하는-예를 들면 ‘맥 빠진 노고의 기색, 곤궁한 나그네의 몰골, 거센 바다 물결, 간험한 길’- 사물
표현으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꿈이 이야기하는 것을 ‘꿈의 현재(顯在) 내용’이라 칭하고, 여러 연상을
쫓아서 도달할 수 있는 숨겨진 것을 ‘꿈의 잠재사상’이라고 부를 때,45) ‘만남’이 꿈의 현재적 내용임
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음’이 꿈의 잠재사상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것이 시각적으로는 ‘물에 젖은
짐’으로, 문자 구성의 기표로서는 ‘맥 빠진 노고의 기색, 곤궁한 나그네의 몰골, 거센 바다 물결, 간
험한 길’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그는 이미 앞으로 천심(天心)을 향한 혁명의 길을 걷
는 동안 젊은 시절부터 이어졌던 절친한 교우관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예감하
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젊은 시절부터 이어졌던 절친한 교우관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예감하였던
정도전의 갈등은 위화도 회군 이후 자신이 개혁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했을 때 보여주었던 서릿발 같
은 기상과 관련이 있다.

 

여보소 나무를 하려거든,
푸른 솔 가지는 찍지 마오.
소나무 높이 커 만 길이 되면,
넘어지는 큰 집을 받칠 수 있네.
여보소 나무를 하려거든,
가시덩굴 모조리 베어내야 하네.
가시덩굴 모조리 베어내는 날,
芝蘭은 그 얼마나 무성할는지.46)

 

44) 프로이트, 앞의 글, pp.232~233.
45) 프로이트, 서석연 역, ?정신분석학입문?, 범우사, 1992. p.125.
46) ?三峯集? 卷1, 「題樵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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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소나무에 의탁해 위기상황에 봉착한 사회를 떠받치려는 의지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 의지
의 실현을 위해 장차 가시덩굴(사회의 惡)을 모조리 벨 것을 기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개혁
을 위한 서릿발 같은 자세는 바로 다음해 都堂에 올린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글에서 그는 유종
(儒宗)이든 혹은 왕실과 연혼(連婚)관계에 있든 구애받지 않고, 그리고 선배이든 동료이든 斯文의 옛
誼와 故舊의 정에 좌우됨이 없이, 「춘추」의 난적을 주토하는 법을 규범으로 삼아 이색과 우현보 등
을 강력하게 탄핵하고 있으니, 곧 이미 현실개혁에 신명을 바친 이상 간당(奸黨)의 화를 두려워하여
침묵을 지켜 구차하게 화를 면하지는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보인다.47) 그리고 이러한 결연한 자세
로 인해 당시 정도전은 옛 동료들로부터도 원망을 받고 고립되어 있었으니, 「上恭讓王疏」에서는 이
러한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절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모두 자기자신은 사랑할 줄 알며, 그 처자의 생계를 위하
는 그런 마음이야 누가 없겠읍니까.......신이 비록 狂妄하오나 風病은 들지 않았는데 어찌 자신
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홀로 뭇 원망 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으니, 이 말이 나가면 화가
이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48)
즉, 자신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자신의 몸이 아까운 줄 알고 처자를 위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
제 뭇 원망 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으면서 화가 장차 닥칠 줄 뻔히 알면서도 현실개혁을 위해 이런
상소를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상 정도전이 이미 예견했듯이, 이 상소를 올린 후 몇 개월도 안 돼
서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를 하며」49) 동지의식을 느꼈던 정몽
주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고서 그는 다시 봉화·나주로 유배가게 된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似君이 이곳에 와 잠시 머물면서,

 

南方 數十州에 사랑을 남기었네.
謝眺의 높은 노래 산세가 아름답고,
庾公의 맑은 흥취 달빛이 흐르누나.
서울은 아스라이 흰 구름 북쪽인데,
성곽은 우뚝하다 푸른 바닷가로세.
謫客이 오르니 생각이 한없다오,
유량한 젓대소리 저 樓에서 들려오네.50)

 

47) ?三峯集? 卷3, 「上都堂書」
48) ?三峯集? 卷3, 「上恭讓王疏」
49) ?三峯集? 卷1, 「次韻寄鄭達可」
......共保見貞操 永矢莫相忘
50) ?三峯集? 卷2, 「光州節制樓板上次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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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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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착잡하게 읊고 있다. 정몽주·이숭인·권근 등 젊은 시절부터 학문적 교감을 나누어왔던 오랜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었고, 그들로부터 혈통이 불분명하고 家風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조정을 더럽히
고 있다는 공격을 받아 다시 귀양길에 올랐으니,51) 서울을 아스라이 바라보며 한없는 생각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는 ‘세상일은 때를 좇아 변해만 가고/인정도 물(物)
에 따라 움직인다’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52) 그리하여 다음해 봄에 귀양에서 풀려나 영주로 돌
아왔을 때, 그는 그 한없는 생각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

 

한 그루 梨花는 눈부시게 밝은데,
지저귀는 산새는 맑게 갠 볕을 희롱하네.
홀로 유폐되어 앉아 마음에 딴 생각 없으니,
뜰에 절로 돋아나는 풀을 한가로이 바라보네.53)

 

이제 그는 잡념을 떨쳐 버린 채 추운 겨울이 지나 만물이 소생하는 자연의 이치를 한가로이 관조
하면서, 겨울과 같은 혹독한 세파에 시달려온 자신의 마음을 自生하는 풀처럼 스스로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반대파의 역습을 격퇴시키고 이해 7월에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기에 이르렀으
니,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개혁의 경륜을 펴기 위해 함주에서 이성계를 만난 지 실로 9년 만에 신
명을 건 혁명운동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Ⅴ. 조선 건국 시기:가슴 벅참과 떨림
「신도가」를 비롯한 「정동방곡」, 「문덕곡」 등의 조선 건국 이후의 정도전의 악장시에는 창업의 쇠
망치 소리와 약동하는 힘으로 넘쳐 있다.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찬 그것은 고려말의 암울하고 옹색한
시대적 분위기를 떨쳐 버리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의지가 담긴,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찬미하는 시들
이다. 새 시대의 새로운 수도는,

 

제택(第宅)은 구름 위로 우뚝 솟고,
여염(閭閻)은 땅에 가득 서로 연달았네.
아침과 저녁에 연화(煙火) 잇달아,
한 시대는 번화롭고 태평하다오.54)

 

51) 韓永愚, 앞의 책, p.18.
52) ?三峯集? 卷2, 「次人送別詩韻」
53) ?三峯集? 卷2, 「山居春日卽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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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형상화되면서 이제 역년(歷年)은 천세기를 기약하고 있으니,55) 이것은 곧 새
로운 시대를 맞은 한 시대의 태평을 구가함과 동시에 정도전 자신의 고려말의 음울한 내면세계에서
벗어난 밝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밝은 마음은 곧 “남도라 넘실넘실 물이 흐르나/사방
의 나그네들 줄지어 오네/늙은이 쉬고 젊은 자 짐 지고/앞뒤로 호응하며 노래 부르네”라고 하여,56)
일반 평민들의 일상적인 삶에로 스며들고, 또한 어려운 일을 해 낸 창업 동지들의 절조에로 이어진
다. 조준(趙浚)에 대해, “그 임금을 섬김에는 절조가 확고하여/편하거나 험하거나 한결같았고/그 백성
을 사랑함에는 생육하려는 마음이/그 시정에 가득하였네.”라고 읊은 것이나,57) 김사형(金士衡)에 대해

 

다행하다 아름다운 모임을 만나,
나라 세운 공로에 참여했네.
… (中略) …
진실로 알고 말고 江海의 양은,
작은 行潦와는 같지 않다는 것을.
기대하노니 정조를 꼭 보전하여
늘그막에 좋게 상종하기를.58)

 

라고 노래함은, 그들이 정도전 자신과 함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뜻을 뭉쳐 아름다운
모임을 만들어 마침내 개국의 공을 이루었다는 찬양인 것이니, 이것은 곧 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새
왕조를 개창한 데 대한 정도전 스스로의 뿌듯함과 자부심이 그 속에 함께 담겨져 있는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태조 원년, 1392) 어휘표덕설을 지어 올리면서 새왕조 개창의 의미를 이렇게 음미
하고 있다.
하늘에 해가 떠올라 그 광명이 넓게 비쳐서 음예가 흩어지고 만상이 뚜렷해짐은, 곧 인군의
처음 정사가 맑고 밝아서 온갖 사악한 것은 다 없어지고 모든 법이 새로워지는 것이오며, 하늘
에 해가 떠오른 다음 그 밝음이 점점 더해짐은, 곧 인군이 처음 등극해서부터 천만대까지 전승
하는 것을 말합니다.59)
이러한 뿌듯함과 자부심은 태조 2년 가을 임금을 모시고 장단(長湍)에 노닐며 지은 다음 시에 단

 

54) ?三峯集? 卷1, 「諸坊碁布」
55) ?三峯集? 卷1, 「畿甸山河」
......德敎得兼形勢 歷年可卜千紀
56) ?三峯集? 卷1, 「南渡行人」
57) ?三峯集? 卷4, 「趙政丞浚眞贊」
58) ?三峯集? 卷1, 「次韻拜獻右侍中上洛伯座下」
59) ?三峯集? 卷3, 「撰進御諱表德說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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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가을 물 맑고 맑아 하늘 함께 짙푸른데,
우리 임금 여가를 내 누선에 오르셨네.
사공은 장단곡을 부르지 마소,
지금이 바로 조선나라 제 2년일세.60)

 

역성혁명의 최전선에 서서 새로운 왕조 창업이라는 한국 역사에 획을 긋는 大役事를 이룬 후, 잠
시 숨을 고르는 듯 태조 2년 가을 임금을 모시고 장단에서 배를 타고 맑은 하늘 아래노닐 때의 감
회를 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짤막한 시의 결구인 “지금이 바로 조선나라 제2년일세(此是朝鮮第二年)”이라는 구절에
는 정도전이 내면에 품고 있는 혁명의 당위성에 대한 자신감과 새 왕조 개창에 대한 자부심이 집약
되어 있다. 혁명과정에서의 격동과 불안과 위기의식 같은 모든 파도들이 이제 잠잠해진 고요함과 평
안함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유유하게 흐르고 있는 한 누선을 평온하게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전해
진다.
그러면서도 이 시는 그 평온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과거의 악몽을 떨쳐버리고 다시 두
주먹 불끈 쥐고 일어서면서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야”를 다짐하듯, 그리고 오늘 이러한 평화를 얻기
까지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수많았던 희생들의 어두운 그늘을 벗어 던지듯, 마음 속으로 되뇌이고 있
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고려는 없다. 이미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눈물이 있
었던가. 이제는 그 피눈물을 닦아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야 말로(此是) 새로운 시작인 조
선(朝鮮)이 어느덧 2년차(第二年)로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라고. 이처럼 짤막한 한편의 시를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정도전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고 있는 새로운 희망과 고려말의 암
울하고 옹색한 시대적 분위기를 떨쳐 버리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此是朝鮮第二年」이라는 구절에는 정도전이 내면에 품고 있는 혁명의 당위성에 대한 자신
감과 새 왕조 개창에 대한 자부심이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부심은,

 


경계를 바로잡아라, 신의 소견으로는
임금다와 즐겁게 천추를 누리시리다.
정치하는 요령은 예악에 있다 마다
안방에서 비롯하여 온 나라에 달하도다
우리 임금 법칙을 제정하여 남기시니
질서가 바로잡혀 평화롭고 즐겁구려

 

60) ?三峯集? 卷2, 「御駕遊長湍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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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악을 제정해라, 신의 소견으로는
공 이루고 다스려져 무극과 짝하리라.61)
경계를 바로 잡고 질서가 바로 잡혀 평화롭고 즐거운 시대가 열렸다는 찬양으로 이어지고, 안방에
서 시작하여 온 나라로 흐르는 예악의 정치를 통해 무극과 짝하리라는 축복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힘든 세월을 견뎌온 온 백성에게 ‘온몸에 함초롬히 젖은 우로의 은혜’처럼,62) 새 왕조의 혜택이 함초
롬히 젖어들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민심이 곧 천심이요, 이것이 곧 혁명 전후 주역을 통해 보았던
천심의 향방이기 때문이다.

 

밝은 창에 빛난 궤 비끼었으니
소진의 침범을 허하지 않네
조용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그야말로 천심이 보이고 말고.63)

 

이것이 곧 보위(寶位)를 바로잡는 길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성혁명의 당위성인 것이다.
주상전하는 천리와 인심에 순응하여 보위를 신속히 바로잡았으니, 인은 심덕의 온전한 것이
되고 사랑은 바로 인의 발임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바루어서 인을 체득하고, 사랑을
미루어서 인민에게 미쳤으니, 인의체가 서고, 인의 용이 행해진 것이다. 아! 위(位)를 보유하여
천만세에 길이 전하여질 것을 누가 믿지 않으랴.64)
하지만 이 당시 정도전이 품고 있는 밝은 마음은 새 왕조 창업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동분서주하
는 과정에서 느끼는 보람에서 오는 밝음인 것이지, 고려말 개인의 어두웠던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데
서 오는 밝음은 아닌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태조 2년 정도전이 금릉에 봉사(奉使)하여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돌아와서 창업동지들과 함께 대동강에서 뱃놀이했을 때 개연히 감회를 일으켜 아래의 「江之
水詞」를 지어 스스로 그 뜻을 나타내 보였는데,

 


환락이란 언제고 얼마 못 가서,
가슴 속에 남모르는 근심 품었네.
아, 盛年은 다시 오지 않음이여,
늙음이 이르거늘 다시 무얼 구하리.

 

61) ?三峯集? 卷2, 「文德曲」
62) ?三峯集? 卷2, 「新宮凉廳侍宴作」
63) ?三峯集? 卷1, 「次韻拜獻右侍中上洛伯金士衡座下」
64) ?三峯集? 卷13, ?朝鮮經國典?, 「正寶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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軒冕이란 어쩌다가 오는 것이요,
부귀는 구름처럼 둥둥 뜬 물건.
군자가 소중한 건 오직 義뿐,
천추 만대 이름이 남는 거라오.
술 한 잔 들어 서로 전하노니,
옛 어진 이 바라보며 닦아 나가자꾸나.65)

 

그는 자신이 갖은 고초 끝에 얻은 부귀와 영화를 충분히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자신
은 이 시에서 관직이나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면서 오직 義만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마음의 자
세를 옛 동지들에게 털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州郡을 다스리기 위해 지방으로 떠
나는 옛 동지들을 조준·김사형 등과 함께 이요정(二樂亭, 李和의 별장)에서 전송하는 과정에서도 나
타난다. 혁명을 위해 생사를 함께 했던 옛 동지들을 혁명의 성공 후 사방으로 떠나 보내면서 그는,
그런데도 제공(諸公)들은 국가가 초창기여서 모든 일이 한가롭지 못하다 하여 염려하고 애쓰
느라 이러한 좋은 광경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내가 또한 제공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왕실에
힘써서 백성을 안정시키고 공을 이룬 다음 벼슬을 사퇴하고 물러나 음식과 행장을 가지고 이
정자 위에 올라, 심지(心志)의 오락을 마음대로 하고 강산의 경개를 마음껏 즐기면 될 것이
다.66)
라고 하여, 혁명의 성공이 심지의 오락을 즐기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 아님을 간곡하게 나타내고 있
는 것이다. 고려말의 어두움을 겪었던 창업공신들로서는 신왕조 초창기에 그 기틀을 다지기 위해 자
신들의 개인적인 쾌락을 어느 정도 절제해야 했겠지만, 사실은 정당하게 즐거워해야 할 때도 그들이
체험하고 극복해야 했던 어두웠던 시절의 그늘이 아직도 그들의 내면에 내재해 있어 즐거움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으니, 우리는 그것을 정도전의 「청석동연음기(靑石洞宴飮記)」에
서 읽을 수 있다.
이 글에 의하면, 때는 한더위여서 불기운같이 맹렬한 날씨였고 당시 시중인 조준·김사형 등의 창
업공신들은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고 돌아오던 터였다. 그 길 도중에 이들은 피서를 위해 청석동 시
냇가에 막을 치고 음악과 함께 술잔을 돌리면서 흐뭇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준이 “즐
겁기는 즐거우나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자책 어린 질문을 던졌고 이에 제공들이 불안해하자 정
도전은 “이렇게 즐거워하는 이 자리는 답답한 기운을 풀고, 그 정지되고 멈춘 뜻을 인도하는 데에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여 제공의 동의를 받았다는 것이다.67)

 

65) ?三峯集? 卷2, 「江之水詞」
66) ?三峯集? 卷4, 「二樂亭記」
67) ?三峯集? 卷4, 「靑石洞宴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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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곧 이들 창업공신들에게 있어서는 그만큼 혁명 과정이 생사를 걸 정도로 치열했고, 그로
인해 혁명 성공 후에도 과도한 즐거움에 대해서는 우선 경계를 해야할 정도로 내면적으로 의식화되
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들의 집단심리는 자신들의 손으로 이루
어진 신왕조 개창에 대한 자부심과 기쁨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것이니, 그것은 곧 수성(守成)에 대한
근심과 직결되는 심리인 것이다. 정도전 자신이 ?조선경국전?을 찬진하면서 “이에서 창업하여 자손
에게 이어 줌이 어려움을 보여 충분한 준비로써 수성함을 오래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그 목적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음은,68) 건국 초기 정도전의 문물제도 정비작업이 이처럼 수성에 대한 근심과 직
결되는 심리에서 싹트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도 관찰사를 삼봉재에 초청하여
이렇게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임금님이 외방을 근심하시와
영호들만 골라서 임명하였오.
… 중략 …
무엇으로 성상의 덕을 펼건고
요령은 백성 편히 살리는 그 일.69)

 

Ⅵ. 맺음말
이상으로 우리는 정도전의 시문을 유랑기·혁명기·창업기로 구분하여 파악함으로써, 여말선초에
있어 혁신적인 대정치가이자 실천적이며 급진적인 이론가이기도 한 인간 정도전의 의식세계를 이해
해 보고자 하였다. 즉, 대정치가나 이론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정도전이 당시 사회상황과 개인
적인 욕망과의 갈등 속에서 그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면서 인간적인 성숙을 이루어 가는
가를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다.
유랑기(우왕 3년~9년)에서는 관조와 낯설음의 변주로 그의 내면세계를 파악하려 하였다. 유배생활
을 겪으면서 터득한 “생전의 곤궁쯤이야 근심할 것도 못되며 이제 다시 공명이나 부귀를 구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그의 관조적 내면세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면, 3년의 유배생활이라
는 뻥 뚫린 삶의 공백 속에서 이제 막 만난 세상에 대한 낯설음이 격리되었던 삶과 세월의 흐름 속
에서 그의 내면세계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재기와 모색의 시기(우왕 9년~14년)에서는 스스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선 정도전의 천심(天心)을

 

68) ?三峯集? 卷3, 「撰進朝鮮經國典箋」
69) ?三峯集? 卷2, 「邀諸道觀察使于三峯齋 尙州牧使亦在席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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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 227 -

 

향한 새로운 충정을 만날 수 있었다. 함주에서의 이성계와의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꿈꾸고, 주역을 읽는 가운데서도 혁명을 위한 천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낯설음과 관조
가 아닌, 천심을 향한 새로운 충정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우왕 14년) 이후 혁명기에서는 고립과 비상(飛翔)을 중심으로 그의 내면세계를 이해하
려 하였다. 천심을 향한 혁명의 길을 걷는 동안 정몽주·이숭인을 비롯한 성균관 시절 이래의 절친
한 교우관계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러한 고립감 속에서도 천심을 향해 비
상하려는 욕구가 그의 내면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 건국 시기에는 그의 가슴 벅참과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역성혁명의 최전선에 서서 새로운
왕조 창업이라는 한국 역사에 획을 긋는 大役事를 이룬 후, 잠시 숨을 고르는 듯 태조 2년 가을 임
금을 모시고 長湍에서 배를 타고 맑은 하늘 아래노닐 때의 감회를 읊은 시의 결구인 “지금이 바로
조선나라 제2년일세(此是朝鮮第二年)”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었듯, 내면에 품고 있는 혁명의 당위
성에 대한 자신감과 새 왕조 개창에 대한 자부심이 그의 가슴벅참과 떨림 속에서 전해질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정도전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고 있는 새로운 희망과 고려말의 암울하고
옹색한 시대적 분위기를 떨쳐 버리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의지를 ‘백성 편히 살리는 그 일’에 대한
천심에 대한 열정과 함께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도전 자신의 내면세계 속에서 겪는 갈등과 좌절과 그 극복의 모습들은 그의 정치·경
제·철학 등에 관한 뛰어난 저작물에서는 오히려 사상(捨象)되어 버리기 쉽다는 전제하에서, 이 논문
에서는 그의 내면세계의 추이를 비교적 잘 보여 주고 있는 그의 시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하지
만 아무리 사실적인 시라 할지라도 일정한 추상성을 띠게 마련인 점에서 볼 때, 시문을 통한 정도전
의 내면세계의 구체적 형상화에는 일정한 한계가 남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의 남아 있
는 시문이 각 시기별로 골고루 쓰여 있지는 않다는 점은 그의 내면세계의 추이를 파악하는 데 있어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부분들을 추후에 보완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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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08년 5월 30일에 투고되어
2008년 6월 18일에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2008년 7월 10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08년 7월 18일에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28

 

❙Abstract❙
The Study on a Consciousness of Jeong Do-jeon
- Focus on the Period of the Founding of Joseon Dynasty after Depurge -
70)Mun, Cheol-young*
In this paper, we try to understand the consciousness of Jeong Do-jeon who was an innovative
politician and a radical theorist in the late Koryeo Dynasty and the early Joseon Kingdom by
grasping and dividing the wandering age, the revolutionary age and the founding age about the poet
and literature of Jeong Do-jeon. We have searched how Jeong Do-jeon subjugated his desire in the
trouble between the social condition and the individual desire.
For example, Jeong Do-jeon leaded the revolutionary day of the storm and stress to the
foundation of Joseon Kingdom and composed a poem that gives a very good picture of what his life
was then. After the beginning of new dynasty was achieved through a coup d’etat, he boarded a
ship with a king and written a poetry under a clear sky. By the way he adopted an intensive
method in the last phrase and clause of this poem. It was a case for a merger of revolution and
the pride of the new dynasty that he born in the inside.
This poem depicted the convulsion and the anxiety of revolutionary process. Also, this expression‎
is not the end of calmness but the regeneration. In this manner, we understood the new hope and
volition that Jeong Do-jeon borne in mind with the beginning of new era through this
brief poem. Therefore, this paper importantly analyzed the contemporary writing that
revealed the inner world of Jeong Do-jeon. Because his writings including the politics,
the economy and the philosophy abstracted it.
[Key Words] Jeong Do-jeon’s poem, the foundation of Joseon Kingdom, innovative politician, radical
theorist, Jeong Do-jeon’s inside
* Professor, Dankook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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