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sr]인류진화

한반도 인구 변화 정리

이름없는풀뿌리 2019. 3. 7. 10:45
한반도 인구 변화 정리 천봉학 / 2013.06.07. 1) 삼국, 고려 시대 浿水 : 처음 동쪽으로 흐르는 강 ⇒ 나중 서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옮겨져 왕건은 패서호족 금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국서에 고려 황제라 쓰여 있고 기록에 고려는 여러 제후를 두었으며 제후국 왕을 둔 황제국이다. 왕건의 아들인 정종 때 추가로 30만 광군을 뽑았다. <고려도경>에 고려 병력이 60만 이상. 금나라는 양쯔강 이북까지 차지했으니 농경과 유목의 혼합 형태로 고려와 제일 비슷한 형태. 금나라 전성기 위주로 4,5백만 정도에 병력은 60~100만 정도. 고구려는 보통 5만 명 단위 전쟁 동원. 고려는 걸핏하면 10만에서 20만 명 이상 동원. 강감찬 장군 동원 군대 20만 이상. 고려 성종이 동원한 군대 수십만 말기에 정세운이 홍건적 토벌에 동원한 군대 20만 이상. 금나라와 고려는 같은 민족인 데다가 통치방식도 비슷. 윤관 장군이 금나라의 전신인 완안부 여진을 17만 대군으로 정벌할 때 통역 대동. 신라 전성기 수도에 17만 호 이상.(17*7=119만) 고려 수도 13만 호 조선 수도 한양 8만 호 <삼국지> 동탁이 한나라 수도 洛陽에서 長安으로 옮길 때 따르는 자 수십만 명. 인구 5천만 한나라 수도 洛陽 인구 1백만 가량. 중세시대 비옥한 영토 프랑스는 한반도 2.5배 되는데 인구 1,6백만 명 정도. <도려도경> 고려 초기 영토 동서 2천 리(800k), 남북 1천 5백 리(600K) <조선 왕조 실록> 한성부 지리지 한성부에서 동래까지 870리(서울-부산 330k) 이성계가 고려군을 이끌고 공민왕 때 랴오뚱 반도의 랴오양(遼陽)과 선양을 수복하면서 백성들에게 '본디 이땅은 고려땅이다.' 고려는 걸핏하면 선양 일대가 고려땅이라고 주장. 2) 한양 인구 1428년 11만 1467년 38만 1946년 1,266,057 1956년 1,503,865 1966년 3,793,280 1976년 7,254,958 1986년 9,798,542 1996년 10,469,852 한성부가 계하기를, “병오년의 호적[版籍]이 지금에 이르러 드디어 경성(京城) 5부의 호수(戶數)가 1만 6천 9백 21호, 인구는 10만 3천 3백 28인이며, 관령(管領)이 46인을 이루었습니다. 성밖 10리의 지역에는 호수가 1천 6백 1호, 인구가 6천 44인, 관령이 15명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1428년)- 조선시대 전기의 한양인구가 10만 여명이라는 것은 위의 자료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수치가 아닙니다. 조선시대 후기의 한양인구는 대략 30만명 내외에서 가장 많을 때에는 35만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기록 그대로를 반영한 것이 아니며 전근대사회의 통계특성상 제외된 인구까지 추정해서 계산한 것입니다. 만일 조선시대 전기의 한양 성안 인구 10만 3천 3백 28인라는 숫자를 후기의 경우처럼 추정하면 대략 15~20만 정도가 나옵니다. 한양도성은 성곽 내부에 시가지가 들어차면 대략 20만 정도가 살 수 있는데 이것과도 비슷합니다. 성저십리라는 인구는 6천 44명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한양의 경우 그 이전에 도성바깥으로 시가지가 뻗어나간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신뢰성이 의문입니다. 한양의 성저십리는 그 면적이 대략 250㎢이며, 6천 44명이 실제 인구라고 한다면 전형적인 농촌지대의 인구밀도이기 때문에 다른 기록과 비교해서 정말로 실제 인구인지, 아니면 조사방법의 차이로 인해서 정확한 수치를 반영하지 못한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성부에서 화재를 방비하는 계목을 올리었다. “사복시(司僕寺)·내자시(內資寺)·군자감(軍資監)·제용감(濟用監)·풍저창 등 각사가 인가가 조밀하고 가까와서 화재가 염려되고, 또 행랑의 북쪽에 인가가 매우 가까이 붙었으므로, 아울러 모두 분간하여 헐어 버리고, 위의 집이 헐린 사람은 자원을 들어서 각 사람이 집을 다 지은 남은 땅과 성 안 각사(各司)·사원(寺院)의 채전(菜田)과 반송방(盤松坊)·반석방(盤石坊)· 마을 창고·남전(藍田)·청태전(靑苔田)의 채지(菜地)와 성 안의 사청(射廳)· 침장고(沈藏庫)의 채지(菜地)를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정현(柳廷顯)·박은이 아뢰기를, “마땅히 헐어야 할 집이 1천여 호로 계산되니, 백성이 반드시 살 곳을 잃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1415년)- 한성부에서 계하기를, “도성 안에 사람은 많고 땅은 비좁아서 대체로 집터를 받고자 하는 자는, 딴 사람이 일찍이 받은 땅을 혹 빈 터라 하며 혹 집 짓고 남은 땅이라 하여, 백단(百端)으로 다투어서 송사가 끊어지는 날이 없습니다. 동대문 쪽 수구문(水口門) 바깥에 있는 집 짓기에 적당한 곳을 남대문 바깥 반석방(盤石坊)·반송방(盤松坊)의 예(例)에 의거하여, 본부(本府)에서 호조와 함께 살펴, 한계와 동리 이름을 정해서 집 없는 사람에게 떼어 주기를 청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1424년)- 1392년에 조선이 건국합니다. 하지만 1394년에 한양으로 천도하고, 1399년에 개성으로 환도, 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옮기게 됩니다. 즉, 1415년은 실제 수도가 된지 불과 15년 정도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1399년에 개성으로 환도한 뒤에 한양은 쇠락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15년보다 더 짧은 기간에 시가지가 바깥으로 뻗어나간 것이 되죠. 그보다 1년전인 1414년에 시전행랑이 완성되는 시기이며, 1415년이라면 도성이 상당부분 완성된 시점입니다. 당시에는 성안에 약간의 빈터가 있지만 그래도 헐어야 할 집이 1천여 호가 되고, 1424년은 좀 더 밀집한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1415년에는 남대문 바깥, 1424년은 동대문 바깥으로 시가지가 확장됩니다. 성안[城內]의 큰 길 이외에 여리(閭里)의 각 길도 본래는 모두 평평하고 곧아서 차량(車兩)의 출입(出入)을 편리하게 하였었는데, 지금 무식(無識)한 사람들이 자기의 주거(住居)를 넓히려고 하여 길을 침로해 울타리를 만들어서 길이 좁고 구불구불해졌으며, 혹은 툭 튀어나오게 집을 짓고, 심한 자는 길을 막아서 다니기에 불편하고, 화기(火氣)가 두렵사오니, 비옵건대, 도로(道路)를 다시 살펴보아서 전과 같이 닦아 넓히소서. -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1407년)- 임금이 말하기를, “성안 도로의 넓고 좁음은, 조종께서 도읍을 세울 때에 이미 정한 것인데, 간특한 백성들이 길을 침범하여 집을 지으므로 연전에 화재가 있은 뒤에 다시 바루기는 하였으나 또 전처럼 침범한 집들이 간혹 있다 하니, 이제 길을 침범한 인가를 철거하자면 몇 집이나 헐어야 되겠는가.” 하니, 대언 등이 대답하기를, “거의 만여 호에 이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헐게 하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한지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고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1427년)- 뜯기는 집이 수만 호인데, 한성부(漢城府)가 기한을 엄격히 정하여 뜯으라고 독촉하므로, 혹 재목이나 기와를 실어갈 수 없어 버려둔 채 돌아보지 않았고, 사람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 길가에 둘러앉아 소리를 삼키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 11년(1505년)- 한양은 원래 개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도로가 비교적 곧은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한양으로 재천도 한 뒤에 불과 2년만에 처음의 도로가 많이 굽어질 정도로 건물이 매우 밀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27년에는 도로를 침범한 집들을 철거하기 위해 알아본 결과 무려 1만여호가 달하는 집들이 처음에 계획한 도로를 침범했으며 이것은 실제 도성 내부의 인구가 맨 처음의 기록으로 소개한 인구와 실제 인구가 전혀 달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연산군은 도성 바깥은 물론이고, 내부까지도 굉장히 많은 집들을 철거했습니다. 위의 기록에 성안에만 수만호가 철거되었다고 적혀 있는데, 과장된 표현일 수는 있으나 다른 기록에서도 절반이 철거되었다고 할 정도로 도성내부에는 많은 인구가 있었으며, 또한 철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이 폐위된 뒤 몇 년 만에 한양은 다시 인가가 밀집할 정도로 빠른 회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황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 이전의 왕조였던 고려의 수도인 개경은 조선이 건국하기 직전인 14세기 후반에도 10만호의 대도시였습니다. 그보다 좁은 면적을 가진 한양도성에 빠른 속도로 집들이 들어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서울의 오부(五府) 밖의 성저 십리(城底十里)는 본시 관장하는 곳이 없어서 권농관(勸農官)·이정(里正) 등이 일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시비(是非)의 분별도 하지 않고서 마음대로 본부(本府)에 장고(狀告)하여 대체(大體)에 어긋남이 있으니, 청컨대 각기 그 부근을 각 부(部)에 분속(分屬)시켜 항상 검찰(檢察)을 가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7년(1461년)- 위의 기록은 성저십리에 도성내부의 행정체계가 달랐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실제 성저십리에 대한 인구추정이 도성내부의 추정방식과 달랐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조금 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 근거는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호조(戶曹) 겸 판서(兼判書) 조석문(曺錫文)과 판서(判書) 이극증(李克增)이 와서 아뢰기를, “충청 좌도(忠淸左道)와 경상도(慶尙道)의 전세(田稅)를 금천참(金遷站)으로부터 조전(漕轉)하여 와서 용산강(龍山江)에 정박하는데, 〈용산강의〉 앞 여울[前灘]물이 얕아서 조선(漕船)이 쉽게 내려가지 못하고, 또 용산(龍山)은 거민(居民)이 매우 많아서 〈세곡을〉 뭍에 내릴 때에 무뢰(無賴)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아 도둑질을 합니다. 청컨대 금후로는 조선(漕船)을 노량(路梁)으로 옮겨 정박하게 하고, 또 금도군(禁盜軍)을 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5년(1474년)- 동지경연사 이양【조정의 권력을 독단하여 선량한 자를 배척하고 사악한 자들을 끌어들여 국사가 날로 그릇되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이 아뢰기를, “전일 행행하실 때, 한강(漢江)의 노변(路邊)을 보니, 인가는 점점 조밀해지고 길은 매우 협착하여 정로(正路)같지 않고 또 중국 사신이 지나면서 보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빈터를 주고 철거하게 하소서.” -조선왕조실록 명종 18년(1563년)- 성종 시절의 기록을 보면 용산에 거민이 매우 많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록이 상대적으로 더 풍족한 후기의 자료를 보면 용산은 도성 바깥의 대표적인 인구밀집지대였습니다. 전기에도 한강을 통한 경강상인이 매우 번성했고, 사람도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후기인 1563년의 기록에는 한강 부근의 인가가 늘어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15세기뿐만 아니라 16세기까지도 계속해서 증가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사람이 많이 살았던 정도가 아니라 도로가 좁아져서 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밀집되었습니다. 한강 부근이라고 한다면 성곽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는 곳은데도 이러한 밀집도를 보여준다는 것은 당시 한양의 성안과 바깥의 시가지 확장이 굉장히 컸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문적(文籍)을 모두 조사하여 경중(京中) 제사(諸司)의 서도(胥徒)·복례(僕隷)와 오부(五部)의 방리인(坊里人) 모두 7만 6천 36명을 부오(部伍)로 나누어서 제사(諸司)에 19려(旅)를 두고, 오부(五部)에 1백 30려를 두었는데, 2인을 정군(正軍)으로 삼고 3인을 여보(餘保)로 삼아 25인으로 대(隊)를 삼았으며, 대에는 정(正)이 있고, 5대를 여(旅)로 삼아, 여에는 수(帥)가 있고, 3려에 장(將) 1인을 두었으니, 장(將)이 무릇 40인이며, 장호(將號)를 이장(里將)이라 하고, 군호(軍號)를 잡색군(雜色軍)이라고 하여, 장(將)은 번(番)을 나누어 숙위(宿衛)하되, 매 20인씩 서로 교체하게 하고, 서반직(西班職)을 제수하여 종 4품에 이르러서 천전(遷轉)하게 하며, 여(旅)·수(帥)·대(隊)·정(正)은 정병(正兵)의 예(例)에 따라 사일(仕日)을 상고해서 품계(品階)를 더해 주고, 종 5품의 영직(影職)을 제수하게 하였는데, 그날로 이장(里將) 20인을 제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3년(1467년)- 이것은 서울에서 잡색군을 모은 내용입니다. 당시 서울에서만 7만 6천 36명을 모았습니다. 잡색군은 예비군같은 것이고,대부분의 성인남성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계산해서 5명당 1명이라고 한다면 38만여명의 인구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한양의 인구가 도성내부뿐만이 아니라 성저십리까지가 상당히 확장된 것을 보여주며, 그 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후 16세기에도 계속된 확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3) 삼국시대 고구려 전성기 22만 580호 120만 명 <삼국유사> 기이 멸망시 69만7천 호 350만 명 <구당서> 백제 전성기 15만23백호 80만 명<삼국유사> 기이 멸망시 76만 호 380만 명<구당서> 신라 전성기 경주 17만 호 90만 명 <삼국유사>기이 고려 12세기 210만 명 <선화봉사 고려도경> 조선초기 세종 22년 69만2475명 <조선왕조실록> 중종 1천만 명 정도 3) 삼국시대 전성기 인구 추정 고구려 9백만 백제 8백만 신라 7백만 고려 5백만 -----대륙 고려 조선초기 세종시 1백만 중종시 1천만 3) 한반도 전체인구 추정 3국시 30만 고려시 50만 조선초기 세종(1418년 32년 재위) 100만 조선 중종(1506년 38년 재위) 250만 명. 1600년 750만 명, 1753년 1천8백66만 명(백과) 1945년 해방당시 2천5백만 명 1950~55년 년 1% 증가 1955~60년 3남 2녀 5명 낳기에 년 3% 증가. 2008년 10월 7,382만(남4,977만,북2,405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