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기념사에서 "광복군에는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어서 "통합된 광복군은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고,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했다. 김원봉은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고, 북한 정권의 요직을 역임했다. 더구나 "조국 해방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김일성으로부터 최고 훈장의 하나인 노력 훈장까지 받았다.
현충일은 6·25 때 북한군의 침략을 막다 희생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그런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6·25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6·25 때 침략자들 편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일제 때 광복군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말을 이어 붙였다. 해괴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김원봉이 공을 세웠다는 6·25로 국토가 결딴나고 우리 국민이 떼죽음을 당했다. 사회 주류 교체가 필생의 숙원이라는 문 대통령이 이제 6·25 남침의 역사마저 거꾸로 뒤집으려 한다. 그것도 다른 장소도 아닌 김원봉 같은 사람들로부터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친 국군들 앞에서였다. 대통령의 이념 성향이 어떤지는 대부분 알게 됐지만 대한민국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 있다.
문 대통령은 야당 대표 때 김원봉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독립 유공자 포상을 검토하자"고 했다. 그 뜻에 따라 보훈처는 서훈 작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자 대통령은 김원봉에게 '국군 뿌리'라는 공적까지 만들어 얹어 주려는 것인가. 지하의 영령들이 통곡할 일이다.
문 대통령은 "보수든 진보든 모든 애국을 존경한다"고 했다. 김원봉 찬양의 맥락에서 보면 북한의 '김씨 왕조 진보'도 '애국'의 범주에 드나. 문 대통령은 "이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국민을 이념에 따라 가르지 말고 통합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제발 그래 달라고 대통령에게 간청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는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했고, 5·18 기념사에선 5·18을 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은 "독재자의 후예"라고 했다. 국정 과제 1호로 내세운 적폐 청산은 숱한 비극을 내며 집권 2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적폐 수사를 이제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사회 원로의 건의에 대통령은 "국정 농단은 반헌법적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최근 두세 달 사이에만도 대통령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국민을 친일, 독재자 후예, 반헌법적이라고 몰면서 편 가르기를 해왔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국민을 편 가르고 갈등을 부채질하는 핵심에 문 대통령이 서 있다. 이랬던 대통령이 느닷없이 편 가르기를 말자고 한다. 유체 이탈, 내로남불
발언이 너무 많아 헤아리기도 힘들지만 이것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3·1절 100년 기념식에서 느닷없이 '빨갱이론'을 펼친 데 이어 현충일엔 김일성 훈장 받은 자를 국군의 뿌리로 칭송했다. 국군 통수권자가 현충일 날 호국 영령들 앞에서 이런 연설을 한다면 국군 장병들에게 어떻게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나라를 지키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럴 마음이 있기는 있나.
5년 시한부 정권이 국정 온갖 곳에 이념의 대못을 박아 대한민국의 진로를 돌이킬 수 없도록 영구히 뒤집으려 하고 있다
우리의 국가 위상은 도처에서 '코리아 패싱(건너뛰기)'을 당하는 지경까지 갔다. 한국 국회의원들이 일본에서 당한 푸대접이 기가 막혔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을 비롯한 3~6선(選) 고참 의원 5명이 갔는데 일본에선 달랑 초선 의원 한 명이 응대했다. 아베 총리는 시정연설에서 한국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 연설엔 '한국'이 딱 한 번 등장하는데, 북한 문제를 설명할 때였다. 50년간 거르지 않던 '한·일 경제인 회의'를 돌연 연기시킨 것도 일본이었다. 한국을 무시해도 되는 나라, 때려도 되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의 무례와 오만은 괘씸하지만 빌미를 준 것이 우리다. 이 지경까지 이른 외교 파탄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본뿐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일본 방문 길에 한국도 들러달라는 우리 요청을 거절했다. 화려한 밀월(蜜月) 퍼포먼스 속에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한국'은 없었다. 트럼프는 일본 군함에 올라 동해를 "일본해"라 불렀고, 한·미 동맹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는 얼마 전 한국을 지목해 "미국을 싫어하는 나라"라고 했었다. 정말로 미국 대통령 마음속에 한국의 이미지가 이렇게 각인돼 있다면 끔찍한 재앙에 다름없다. 북한에 매달리며 동맹과 우방을 홀대한 단세포 외교가 국가적 참사로 돌아왔다. 땅에 떨어진 국가 위상을 되돌리려면 오랜 노력과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나라 꼴이 이상하게 변해가는 현실을 보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국력은 하락세다. 경제 활력이 쪼그라들고 성장 동력은 위축됐으며 미래는 불투명하다. 외교·안보, 거시경제에서 산업·기술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좋은 것이 없다. 이렇게까지 온갖 부문이 일제히 내리막 친 적이 있었나 싶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이 모든 상황이 일시적 후퇴나 과도기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이 정권이 하고 있는 것은 '대못'을 박는 일이다. 국정 각 분야에 이념의 철심을 꽂아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원상 회복 못하게 만들려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꾸고 국가 진로를 비(非)가역적으로 뒤집겠다는 것이다.
2년 전 정부가 '마차가 말을 끄는' 소득 주도 성장론을 들고 나왔을 때 경제학자들은 경악했다. 수많은 역설이 나타나고 부작용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왜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유를 아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득 주도론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의 권력 이동을 위한 이념의 대못이었다. 노동 권력과 좌파 세력이 중심이 되는 경제 구조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민노총이 활개치고 참여연대가 득세하는 세상을 보고 있다. 노조원들이 경찰을 폭행하고 주총을 막고 건설 공사를 멈춰 세우는 민노총 천국이 펼쳐졌다. 이념으로 무장한 운동권 출신과 얼치기 전문가들이 경제 운영의 중심 세력이 됐다. 이것이 정권이 바라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국민 살림살이가 나빠지고 서민 경제가 무너졌으며 경제는 침체로 빠져들었다. 한번 무너진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다시 회복시키기란 쉽지 않다. 이 정권이 깊숙이 박은 반기업·노동 편향의 대못을 뽑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국가 백년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뒤집으려는 정권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탈원전 대못은 세계 최강이라던 한국의 원전 생태계를 붕괴시켰다. 원전 부품사들이 문을 닫고 핵심 인력들이 해외로 탈출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내년부터는 자력으로 원전을 짓지 못하는 나라로 전락할 것이라고 한다. 설사 다음 정권이 탈원전을 포기하더라도 원상 회복엔 긴 세월과 천문학적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5년 지나면 퇴장할 정부가 무슨 권리로 이런 자해극을 감행하는가.
문재인 정권은 스스로를 '혁명 정부'로 착각하고 있다. 촛불 혁명에 의해 혁명적 권한을 받은 듯 행세하고 있다. 그래서 국정 운영도, 적폐 청산도 혁명하듯 마구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촛불 민심이 들고 일어났던 것은 좌파 이념 혁명을 원했기 때문은 아니다. 국정의 혁명적 파괴를 바란 것도 아닐 것이다. 이 정권은 입만 열면 '촛불 정신'을 내세우면서 행동은 거꾸로 간다. 온 국민이 폐기를 요구한 국정 불통과 진영 가르기, 패거리 정치는 더 심해졌다. 그러면서 촛불 민심과 거리가 먼 엉뚱한 방향으로 나라를 몰아넣고 있다. 국민
뜻은 묻지도 않고 국정 곳곳에 이념의 대못을 박고 있다.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축적된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 그것을 한두 마디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무시당하고 쪼그라들고 쇠약한 나라를 만들자는 데 동의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누가 5년짜리 정권에 국가 운명을 마음대로 뒤집을 권한을 주었나. 누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라고 위임해주었단 말인가.
김원봉을 추켜세운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가 대한민국을 두 동강 냈다. 대통령은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참여한 것을 강조하면서 "통합된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몰랐을까. 조선의용대가 6·25 남침 때 동원된 북한 '인민군의 뿌리'라는 사실을.
조선의용대 후신인 조선의용군은 6·25 직전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전력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조선의용군 입북(入北)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 도발 결심과 전쟁 승리의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요인'이 됐다(장준익 '북한인민군대사' 470쪽).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은 무정을 비롯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 등 인민군 장성 50% 정도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안문석 '무정평전' 237쪽). 6·25 새벽 남침(南侵)한 연대 21곳 중 47%인 10곳이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 273쪽). 조금만 뒤져보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용대의 80% 이상이 조선의용군으로
조선의용대(대장 김원봉)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무한에서 창설됐다. 대원은 100명 안팎이었다. 중국 장제스 정부의 지원과 지휘를 받는 조선의용대는 전투 부대가 아니라 무장한 정치 선전대였다.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병력 80% 이상이 화북(華北)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했다. 김원봉이 장제스 정부 지원을 받는 데 반발한 반대 세력들이 뛰쳐나온 것이다. 김원봉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했다. 중국 공산당 근거지 연안으로 들어간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한다. 장정에 참여한 중국 공산당원이자 팔로군 포병 사령관 무정(武亭)이 사령관을 맡았다. 조선의용군은 독립운동 일환으로 항일 전쟁에 나섰다.
중국 공산당은 1945년 8월 11일 조선의용군을 만주에 진격시켰다.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하기 쉽고 100만명 넘는 만주의 조선인을 포섭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을 높이 샀다. 1945년 11월 만주에 진군한 조선의용군 2000명은 1, 3, 5, 7지대로 나눠 각지로 퍼졌다. 조선의용군은 현지 조선인 청년들을 충원하면서 인민해방군 제166사단과 제164사단, 독립 15사단으로 확대 개편됐다.
◇북 사단 10곳 중 세 곳이 조선의용군
중국 인민해방군 166사단(1만321명)과 164사단(1만821명)은 1949년 7월 북한으로 이동해 인민군 6사단과 5사단으로 개편됐다. 1950년 4월 독립 15사단(1만4000명)은 인민군 12사단으로 모습을 바꿨다(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351쪽). 육사 교장, 5군단장을 지낸 장준익씨는 개전 당시 인민군 보병 사단 10곳 중 3곳이 조선의용군(5만명)으로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춘 강군(强軍)이었다고 평가했다.
6·25전쟁 기획과 지휘는 김일성과 최용건이 이끄는 만주파가 주도했다. 조선의용군은 군단장부터 사병까지 숫자는 많았지만, 최고 지휘부엔 거의 진입하지 못했다. 김일성파의 견제 때문이었다. 1950년 10월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은 무정은 김일성으로부터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 끝에 숙청됐다. 조선의용군 출신 간부들도 1956년 연안파 숙청 때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조선의용군 출신이자 인민군으로 참전한 김중생씨는 '6·25전쟁 참전은 김일성의 무력 통일 전략에 이용당한 것으로 조선의용군의 불명예'였다고 썼다. 대통령은 6·25 호국 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에 무슨 생각으로 조선의용대를 불러냈을까.
김원봉 '北국방장관 역할' 기록 나와… "민족 지도자 김일성, 리승만 력도" 연설 1948년 '국가검열상(국방상)' 보도, 北노동신문 등에는 경력 확인안돼
1948년 북한 김일성 정부 수립 때 국가검열상에 올랐던 김원봉이 초대 국방상(국방부 장관) 역할도 맡았다는 기록이 13일 다수 발견됐다. 국방상은 군사행정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김원봉이 6·25 이전부터 남침 준비에 깊이 관여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1948년 9월 11일 발행된 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은 '북한이 9월 9일 초대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수상에 김일성을 만장일치로 추대하고 '조각(組閣) 명단'을 발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원봉의 직위를 '국가검열상(국방상)'으로 보도했다. 김원봉의 개인 비서였던 중국인 사마로는 자서전 '투쟁 18년'(1951)에서 "김약산(김원봉)은 북한 정부에서도 국무위원 겸 검열부장(중국의 군정부장, 군사행정을 전문적으로 관할함)이라는 자리를 얻었다"고 썼다. 1953년 작성된 미군 기밀문서도 '김원봉은 북한 정권 초반 국방상(Minister of National Defense)이었다'고 기록했다.
국사편찬위 관계자는 "국가검열상이 군부 업무에도 관여했던 건 사실"이라고 했다.
다만 노동신문과 조선중앙연감(1950) 등에서 김원봉의 '국방상' 경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김원봉이 임시정부 '군무(軍務)부장'을 맡았기 때문에 북한 정권에서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1948년 스스로 월북한 김원봉은 같은 해 초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됐고, 북 헌법 수립 과정에 참여했다. 북 제헌의회 멤버로 활동한 것이다. 그는 6·25가 한창이던 1952년 노동상으로 자리를 옮겨 전쟁 물자와 인력을 공급했다. 또 전쟁 전후 간첩을 교육해 남파하는 역할도 맡았다.
김원봉이 김일성과 스탈린을 '위대한 영도자'로 칭송하고 남한 정부와 미군을 비판한 발언도 다수 확인됐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김원봉은 "경애하는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수상의 주위에 더욱 굳게 단결하자"며 거듭 찬양했다. 이어 "위대한 쓰딸린 대원수가 령도하는 위대한 선진국가 쏘련의 진정한 원조를 받음으로써 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을 분쇄하자"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선 "조선 인민들을 자기들의 영구한 노예로 만들려는 미제와 리승만 력도들"이라고 했다.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는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직간접적인 '청와대 지시'에 따라 서훈까지 염두에 둔 '김원봉 복권(復權)'을 진행해왔다. 국방부는 지난 2017년 8월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운동사 발굴 및 활용'이라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독립군 관련 연구를 추진하고 김원봉의 이름을 '창군(創軍)' 역사에 포함하는 작업을 했다. 작년에 이미 이와 같은 작업을 마무리했고, 이제는 김원봉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창군 역사에 담는 일만 남았다.
보훈처는 작년부터 국민중심보훈혁신위원회를 중심으로 '김원봉 서훈 작전'을 세웠다. 이 위원회 인사들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과 본인들의 유대 관계를 과시하고, 일을 추진할 때 "청와대의 의중"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처는 이에 따라 김원봉 서훈과 관련된 법률 검토도 비밀리에 했고, 김원봉 관련 세미나까지 열었다.
정부가 이렇게까지 '김원봉 서훈'에 나선 이유는 김원봉에 대한 문 대통령의 각별한 '애정'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2015년 영화 '암살'을 관람한 뒤 페이스북에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 독립 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싶다"고 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그전부터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각종 역사 서적을 통해서 김원봉을 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국군의 뿌리'라는 자신의 현충일 추념사가 논란을 일으키자 "통합을 강조하고자 한 말이었는데 대체 왜 김원봉 서훈 논란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주변에 얘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청와대는 "김원봉 서훈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내
놨다. 그동안 '김원봉 서훈 작전'을 해 왔던 일선 부처들은 그 같은 청와대 반응에 의아해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발언 이후 '김원봉 서훈 대국민 서명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던 일부 독립운동 단체도 서명운동 계획을 철회했다. 정부 관계자는 "청와대 의중이라며 여러 일을 추진해왔는데 혼란스럽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아마 일시적 후퇴일 것"이라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13/20190613035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