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길6 (벌객샘능선1, 20/10/10, 홍이포를 생각하며..., Can't Help Falling In Love)
이름없는풀뿌리2020. 10. 23. 22:34
요즈음 – 산성길6 (벌객샘능선1) –
능선의 굽이마다 붙여진 옛 이름에
까맣게 잊고 살던 기억들 되살아나
돌아와 눈감고 누워 그려보며 잠든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산성길6 (벌객샘능선1)
- 남한산성에서 객산까지 가며 홍이포를 생각하다 -
(1) 동문-망월사-봉암성-벌봉
(+60=60분(07:00-08:00), +1.9=1.9km)
지난주 무작정 나섰던
연금이(연주봉-금암산-이성산)능선에서 바라본 동쪽의
벌객샘(벌봉-객산-샘재)능선을 1주일 만에 나서다.
오늘은 또 自然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와 감동을 줄 것인지 두근거리기까지 하다.
동문은 예부터 많은 물류가 오간 부산한 출입구였다는데
이렇게 계단으로 높게 쌓아 사람만 드나들었고,
우마차는 실상 근처 11암문으로 통행했다고 한다.
그렇게 문지방 높은 동문은 그만큼 성루에 오르면 살펴보기가 용이했을 터.
11암문 옆에는 산성의 89여개 샘물, 45개 연못 등에서 나오는 물이
이 한곳으로만 나간다는 水門이 있다는 설명.
지도로 대략 확인한 이정표대로
아내가 동문까지 태워다 주어 망월사 방향으로 오른다.(07:00)
곧 이어 나타나는 장경사(0.8km)가는 갈림길(망월사0.3km)
담배풀이 길 가에 도열한 가파른 길을 오르니
일주문이 보이는데 기둥에 그려진 나한상이 노려보고 있다.
이성계가 창건한 망월사는 일제에 의해 대부분 소실되었고
높은 경사지의 축대만이 옛 것이고
인디라 간디 수상 협조로 스리랑카에서 모셨다는 진신사리탑이
대웅보전 옆에 경건함을 자랑한다.
대웅보전 뒤편 가파른 계단 쪽에 산신각 이정표가 보여 따라가니
호랑이를 쓰다듬고 계신 산신께서 인자한 미소로 복을 주신다.
합장하고 산신각 뒤편 희미한 오솔길의 가파름을 무릅쓰고 오르니
예상대로 아침햇살에 빛나는 제3암문(봉암성 암문)이다.
봉암성에 들어가 뒤돌아보니 저 멀리
동장대지가 동화 속 하늘 한복판에 걸려있는데
벌봉가는 길은 예전 그대로 무너져가는 성벽따라
산국들과 송장풀, 투구꽃, 자주쓴풀이 어우러지며
수목들이 아침햇살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워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사료에 의하면 청군이 망월봉(벌봉)에서
홍이포를 행궁으로 쏘아 혼비백산하였다는데
벌봉은 바위이어서 아닐 것이고 현재의 봉암성내
비교적 편평한 지대인 남한산이라 명명하는 근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2) 벌봉-13암문-법화사지갈-전망바위갈-상사창갈-새바위-하사창갈림길
(+60=120분(08:00-09:00), +1.4=3.3km)
벌봉-한봉 갈림길에서 지난번 못 찾은
남한산을 찾고자 벌봉로 직행하지 않고 한봉 쪽으로 갔지만
오늘도 찾지 못하고 외동장대터를 경유 벌봉에 올라
서측 송파 123층과 동측 하남 검단산을 조망한다.
전해오는 바에는 호란시 청군이 벌봉에 정기가 서려 있어 벌봉 바위를 깨트려
삼전도 항복을 받아냈다는데 그렇게 천륜을 어겨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은 지금 흔적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한 생각을 하며
위태위태한 성벽따라 13암문으로 내려 선다.
벌봉에서 이어진 황혜한 성벽이
13암문 성벽위에서 북쪽으로 이어져 따라가니
산국이 진한 향을 진동하며 아침햇살에 샛노랑을 더한다.
거기서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니 13암문에서 이어져온
객산가는 정식 산행루트와 조우한다.
이어서 청태종이 매부 양고리를 위하여 세웠다는
법화사지로 내려가는 갈림길인데
여기서 새바위, 개구리바위까지의 능선에는
방어용 군사시설인 토루와 토성이 연이어지는데
그 아기자기한 능선은 연중 바람이 쏠쏠 불어 바람재라고 한다고 한다.
법화사길림길에서 15분여 내려가니 전망바위 갈림길인데
전망바위에서 상산곡동을 내려다 보니 山谷이라 할만큼 계곡이 깊다.
이어서 상사창동, 하사창동 길림길이 연이어 나타나는데
산성 북문에서 사창동-춘장동-명일원-광진 전곶교(현 살곶이다리)로
각종 물류가 이동하던 중 물류를 보관하는 사창(司倉)이 있었던 곳이라 하며
갈라진이빨바위, 새바위, 개구리바위가 연이어 나타나는데
새바위라 생각된 바위에 올라 건너편 금암산을 조망하는데
지난번 금암산에서 보았던 팥배나무가 여기서도 빨간 열매를 자랑한다.
팥배나무는 정상을 좋아하나보다.
예전 청계산 석기봉, 광교산 형제봉, 덕유산 서봉에서도 보았던 기억.
그런데 내가 오른 전망바위는 새바위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엔 새바위, 개구리 바위를 다시 찾아 보리라.
(3) 새바위-하사창갈림길-막은데미고개-사미고개-객산(292m)
(+60=180분(09:00-10:00), +2.6=5.9km)
이어서 경사가 떨어지며 고개 하나가 나타났는데
산곡동에서 보았을 때 산이 앞을 막은 듯이 보여
막은데미 고개라 명명했다고 한다.
고개 직전 숲 사이로 보였던 객산이 곧 나타날 줄 알았는데
철탑3개, 소봉 3개를 넘어도 길은 끝이 없다.
그러더니 경사가 푹 떨어지며 또 고개가 나타나는데
하사창동과 하산곡동을 오가던 사미재(새미재, 삼외고개)이다.
객산과 남한산의 능선중 제일 낮은 곳이라 하며
고골살던 사람들이 광주, 이천 우시장을 다니던 고개라한다.
여기까지 혼자만의 산행이었는데
드디어 사미고개에서 산행 부부 출현.
그리고 연이어 50-60대 중년남등의 산행부대 조우.
호젓한 산길은 찾는다면 여기 벌객샘능선이 좋을 듯...
(4) 객산-선법사갈-마루공원갈-안샘재갈-바깥샘재갈-매봉앞-샘재
(+60=240분(10:00-11:00), +2.3=8.2km)
사미고개를 올라서니 남한산을 바라보며
남향의 구릉에 종중 묘원인 듯 묘지 출현.
묘지 옆으로 부드러운 오솔길을 오르니 드디어 동산 같은 객산(292m).
객산이 선법사 안내판에는 301m, 객산 정상엔 292m라 되어있는데 뭐가 맞을까?
그런 표고에 연연하지 말자하면서도 불일치가 뭔가 아쉽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망을 일별하니
연주봉, 금암, 이성산, 아차산, 불암산, 수락산, 예봉산, 검단산이 줄지어 있다.
해설판엔 객산의 유래에 대하여
마귀할멈이 한양 남산을 만들려고 이천 도드람산을 치마에 담아 가다
여기에 떨어트려 생겼는데 객지에서 왔다하여 객산이 되었다는 설과
산 아래에 사람들이 묵던 객사가 있어서 객산이라 했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두 가지 설에서 우리는 예전에 이곳은 한양과 광주 이천의 통교지로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점을 추측하여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골, 사창동, 춘장동이 곧 교산신도시 개발로 사라진다니
겨울이 오기 전 북문(전승문)에서 고골로 내려와 법화사지,
동사지, 선법사, 춘궁동 광주향교를 둘러보고 싶다.
그리고 고골, 사창동, 춘장동이 곧 교산신도시 개발로 사라진다니
겨울이 오기 전 북문(전승문)에서 고골로 내려와 법화사지,
동사지, 선법사, 춘궁동 광주향교를 둘러보고 싶다.
객산 북사면도 급경사인데 조금 견디니
우측으로 계속 예봉산-검단산-용마산 스카이라인이 보이며
새파란 솔잎이 건강미를 자랑하는 소나무 숲이 무성한
선법사갈림길, 마루공원갈림길을 지나
안샘재갈림길, 바깥샘재갈림길이 끝나니 매봉앞이다.
100m 앞의 매봉은 일명 쥐봉(128m)이라 부른다는데
너무 작아 쥐봉이라 하는 것 같은데
남한산 객산 줄기가 달리고 달리다 마지막 갈 곳이 없어
똘똘 뭉쳐있는 좋은 음택으로 보이는데
온통 잡목이 우거지고 거기에도 우람한 팥배나무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서 조망은 제로이다.
이어서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이 차폐막으로 차단된
오늘의 목적지 샘이 있는 고개 너머라는 샘재.
고속도로 차폐막과 옹졸한 등산로 입구로 실망.
남한산까지 가는 등로 입구인만큼 교산신도시 건설시
택지설계에 반영하여 고골-춘궁리-동사지 유적관이라도 포괄한
소공원이라도 조성하여 준다면 문화도 보존, 자연도 보존 다 좋을 듯...
약8km, 4시간 소요, 무조건 천천히
노랑색(연금이능선, 산성 - 연주봉 - 금암산 - 이성산성) 전주산행도
빨간색(벌객샘능선, 산성 - 벌봉 - 객산 – 샘재) 금주산행도
겸재의 송파진 그림 해설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33884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34166
(5) 후기
병자호란이라 부르는 淸의 조선침략 목적은
조선 병합이 아니고 명 정벌을 위한 후방 안정과
재정과 식량 조달 기지 확보 였을 것이라는 필자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자면 단번에 조선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 명 정벌에 전념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용된 것이 홍이포란 신무기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청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세자가 피한 강화도를 함락할 때에도 홍이포를 동원하였고
임금이 피한 남한산성은 워낙 견고하여 발도 들여놓지 못하자
남격대(검단산)와 망월봉(벌봉)에 홍이포를 끌고 올라와
청량산 아래 행궁과 고골의 사창(司倉)을 향하여 발사한 기록이 나온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일 신축 3번째기사 1637년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 虜汗合諸軍, 結陣于炭川, 號三十萬, 張黃傘, 登城東望月峯, 俯瞰城中。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3일 계축 2번째기사 1637년
성을 순시하다가 장졸을 위로하다
상이 세자와 성을 순시하다가 동성(東城)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려 장사(將士)들을 위로하였다. 또 남격대(南格臺)에 이르러
총융사(憁戎使) 구굉(具宏)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 장졸(將卒)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보내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두루 유시하게 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 上與世子巡城, 至東城下輿, 慰諭將士, 又至南格臺, 召摠戎使具宏勞問,
仍慰諭將卒。 且遣承旨, 遍諭守堞諸軍, 或有涕泣者。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갑자 1번째기사 1637년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甲子/賊放大砲於南格臺、望月峯下, 砲丸飛落行宮, 人皆辟易。
賊兵進逼南城, 我軍擊却之。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는
1779년(정조 3)에 서명응(徐命膺)이 수어사 재직 중에
왕명을 받고 착수하여 미완으로 그친 『남성지(南城志)』와 『여지승람(輿地勝覽)』 등
여러 사서와 지리지를 참고하고 수정·보완하여
1846년(헌종 12) 광주부윤 겸 수어사이던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읍지인 『남한지(南漢誌)』를 1862년에 필사한 중정본(重訂本)인데
남한산성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남한지』라고 하였으며,
‘남한(南漢)’이란 용어를 책머리에 써서 광주부를 대표하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러한 사찬(私撰) 읍지에 속하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이때의 상황이 더욱 생생히 그려져 있는데(최근 국역 완간됨)
일부를 발췌 소개하면
‘청인이 대포를 망월봉과 남성(南城) 맞은편 봉우리에 설치하고 쏘기 시작하였다.
적이 또 대포 10여대를 남격대 밖에 설치하였는데
포의 이름을 호준 또는 홍이포라 하였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하고
작은 것도 거위알만한데 수 십리나 날 수 있었다.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종일 그치지 않았다. 사창(司倉)에 떨어진 것은 기와집을
세겹이나 뚫고 땅속으로 한 자 남짓이나 박혔다.
(淸人設大砲於望月峰及南城對峰放之.... 敵又設大砲十餘於南隔臺外 砲名虎?
紅夷砲 丸大如沙碗小比鵝卵能飛數十里 每向行宮而放之終日不絶
落於司倉瓦家貫穿三重入地尺許連中)’
청나라 군대가 자리잡고 대포를 쏜 장소가
지금 외성 3곳이 있는 검단산, 한봉, 벌봉(蜂岩)이었던 것이다.
남한산성 성안에서 가장 높은 곳이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으로 483m임에 반하여 검단산 520m, 한봉 418m, 벌봉 515m이니
성밖 고봉 3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임금이 계신
행궁을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대니 그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군은 어떤 화기로 대적했던 것일까?
주력 무기는 화살, 칼, 창이었으며
포(砲)로는 천자총통(天字銃筒)으로 대항했는데
근래에 군사전문기관에서 복원하여 시험해 본 결과 500~600m 정도의
飛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검증되었다.
그러면 청나라 군대가 사용했던 홍이포(紅夷砲)란 어떤 대포였을까?
수원 화성 장안문에 전시된 홍이포 복제품
홍이란 서양 사람을 중국식으로 부르던 말이다. 글자대로 말하면 붉은 오랑캐인데
그 시절 해양강국 네덜란드 뱃사람은 흰 얼굴이 햇볕에 그을어 붉게 보였다.
지금도 백인의 탄 얼굴은 검지 않고 붉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리라.
홍이포는 이 사람들이 쓰는 서양식 화포였다.
천자총통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화력의 차이였던 것이다.
청나라도 명나라와 싸울 때 화력의 차이로 고전하였는데
어렵게 홍이포를 구해 무장했던 것이다.
후금(청)은 사실 그들의 시조 누르하치가
홍이포로 인하여 사망하기에 이르렀으므로 그 위력을 알고
획득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누르하치는 명을 공략하려고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요하를 건너 명 원숭환이 수비하는 영원성 공략에 나섰다.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인해전술로 성벽에 바짝 붙어 구멍을 내고 공격을 시도했지만
능수능란하게 홍이포를 쏘아대는 명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공격이 늦춰지면 보급선이 끊어질 우려가 있어 퇴각을 명령했다.
이때 누르하치는 명'군이 쏜 홍이포의 파편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심양으로 퇴각한 누르하치는 홍이포의 파편으로 인한 부상이 도졌기 때문인지,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홍타이지(청 태종)가 후금 2대 왕에 올랐다.
홍타이지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들판에서 조선 왕 인조를 무릎 꿇려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티다 항복하고 나와서
한겨울 혹한 속을 걸어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 앞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찧어야 했다.
홍타이지는 여진족의 ‘오랑캐 정신’에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부강시켰다.
적은 인구에 생산력도 보잘 것 없었으나 오랑캐 전략으로
날을 세운 여진족의 집요한 공세에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마저 무너졌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여진족은
1234년 금(金)나라가 몽골에 멸망한 이후 나라가 없는 상태였다.
원(元)과 명(明)의 통치 술책에 휘말려 소규모 부락단위로 찢어져,
수백년 동안 명‘과 조선의 변경을 약탈하거나 원조를 받으면서 살아왔던 여진족이
17세기가 열리자마자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17세기초 중국 명나라는 인구가 1억5,000만명에 달했고,
조선의 인구도 1,400만에 이르렀지만 여진의 인구는 40만~50만명에 불과했다.
척박한 땅에서 소수 민족이 만주를 통일하고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원을 석권하여 대륙을 차지했던 것은 기적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홍타이지가 후금의 새 왕이 되어 1627년 조선을 침공했을 때(정묘호란)만해도
후금군은 홍이포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이 형제국 협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퇴각한 것은 홍이포를 갖춘 명’군이 배후를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1629년 10월 후금은 명의 영토인 하북성 영평을 공격할 때
홍이포를 만드는 장인들을 포로로 압송했는데
서둘러 홍이포 기술 개발에 나선 결과 후금은
1631년 6월 만주에서 홍이포를 주조하게 되었다.
1631년 8월, 명'의 대릉하 공격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많은 홍이포를 가질 수 있었다.
난공불락이라던 명'의 대릉하는 홍이포 덕분에 후금군에게 함락되었다.
조선이 청에 항복한 이후도 청나라는 조선이 홍이포로 무장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또한 병자호란 후 청(淸)은 조선이 성(城)을 중수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는데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시는 이런 치욕이 없도록
남한산성 방어체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일이
산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세 봉우리에 외성을 쌓는 일이었다.
청나라의 간섭이 약화되자 숙종 12년(1686년) 봉암성을 쌓고
숙종 19년(1693년)에는 한봉성(漢峰城, 汗峰城)을 쌓았으며
숙종 45년(1719년)에는 신남성을 신축했고
이어서 영조29년(1753년)에는 신남성에 동돈대와 서돈대를 개축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홍이포에 대하여 정리하자면
1) 후금에 시달린 명과 조선사신 정두원 동시에 홍이포 도입 필요성 절감
2) 동양 최초 홍이포 도입은 1620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네덜란드 수장 함선에서 26문 건져 명에 인도되어 영원성에 배치.
3) 1626 청태조 누르하찌는 영원성 전투에서 홍이포 파편 맞아 사망
4) 1629년 10월 후금은 명의 영토인 하북성 영평을 공격할 때
홍이포를 만드는 장인들을 포로로 압송
5) 1631년 6월 만주에서 홍이포 주조
4) 1631년 8월, 명'의 대릉하 공격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많은 홍이포로 공격 함락.
5) 1631 원숭환에 항거 등주 가도의 반란군이 20여 문의 홍이포와
300여 문의 서양제 화포를 그대로 가지고 청군에 투항->조선 도입 단절됨
6) 1636 병자호란시 청보유 46문 중 34문 강화도, 남한산성 전투에 투입, 항복받음
7) 호란후 조선은 청의 견제로 홍이포 도입 무산되다가
8) 1731(영조7) 홍이포 2문 국산 시제품 제작 -> 대대적 생산 배치 기록은 없슴
9) 결론적으로 최초 명이 도입해서 청태조의 사망등 후금을 견제했으나
반란으로 기술이 청에 넘어가 조선도 항복, 명도 멸망한 대포전쟁이었슴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길공구님 홈페이지에서
청실록, 내국사원당, 만문노당, 이조실록, 승정원일기, 병자록. 산성일기, 심양장계 망라
https://blog.naver.com/gil092003/221167712845
□ 바다루님의 부흥네이버대표 역사까페 “양고리 열전”
https://cafe.naver.com/booheong/159031
1637년 1월 10일 두두의 홍이포 34문 남한산성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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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t Help Falling In Love / Brooklyn D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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