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산성길9(벌객샘능선1, 2, 비와 찻잔 사이 / 양현경)

이름없는풀뿌리 2020. 11. 29. 07:38
요즈음 – 산성길9(벌객샘능선1, 2) 벌객샘능선1 능선의 굽이마다 붙여진 옛 이름에 까맣게 잊고 살던 기억들 되살아나 돌아와 눈감고 누워 그려보며 잠든다. 벌객샘능선2 산천은 돌아오고 옛성도 그대론데 가버린 人傑들은 불러도 대답 없어 밟았던 발자국 따라 거닐어나 볼 밖에 * 人傑들 : 나약한 主和派에 맞서 斥和를 주장하다가 차가운 심양 땅에서 오랑캐의 갖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죽어간 三學士인 洪翼漢과 자진하여 붙잡혀간 전도양양한 조선의 열혈 청년인 신진관료 尹集, 吳達濟를 말함. 1. 동문(左翼門) 물이야 낮은 데로 냅둬도 간다지만 맘대로 오며가는 人馬들 살펴보려 문지방 높게 하고서 지켰던 것일까? 2. 망월사 태조가 자리잡아 승군을 통괄하여 호란을 이겨낸 넋 편안히 잠드신 곳 달뜨는 망월봉 아래 부처님도 계시고... 3. 봉암성 이웃집 마실 가듯 걷기는 좋더라만 퇴락한 성벽 위에 외로운 야생화가 죽어간 병사들의 魂 닮아있어 쓸쓸해 4. 벌봉 하늘이 내려주신 기운이 서린 바위 괘씸한 홍타이지 天意를 깨트린 罪 지금은 나라는 물론 흔적조차 없더라 5. 가지울 새들이 마음 놓는 가지처럼 퍼진 산 사람들 숨기 좋은 뻗어나간 골짜기 보는 이 아무도 없어 무얼 하든 편한 곳 6. 법화사지 광교산 전투에서 죽었다는 양고리가 벌봉의 산자락에 넋을 둔 미스터리 浮屠는 봉인된 채로 기울어져 있었다. 7. 개구리바위 금물결 넘실대는 고골을 바라보며 기름진 산곡동의 농악을 들으면서 풍요를 지켜주려고 惡을 깔고 앉았다. 8. 새바위 울음을 꾹 참으며 천만년 石像인 채 날개는 가졌지만 不動의 딱지 달고 꿈일 뿐 날지 못함은 너나 나나 같구나 9. 막은데미고개 한양길 갈 길 먼데 앞길을 막고 있어 산 아래 산곡동에 하룻밤 유숙하며 주막에 노곤한 다리 쉬어주고 가리라 10. 사미고개 우시장 열리는 날 새벽밥 일찍 먹고 고개를 넘나드는 부산한 워낭소리에 소쩍새 울음 울다가 시나브로 멈추고 11. 객산(客山) 할멈이 떨어트렸건 길손이 묵어갔건 주변을 아우르는 탁 트인 조망만큼은 드높은 백두산만큼 거의 동급 이로세 12. 선법사마애불 溫祚의 전설 깃든 어용샘 곁에 두고 이승의 길을 찾아 佛心을 모아 새겨 千年여 歲月 지나도 求道중인 如來여! * 여래(Tathagata, 如來) 부처의 여러 칭호 가운데 하나이자 역사상 석가모니가 자신을 가리킬 때 가장 자주 사용. 가장 널리 채택되는 해석은 '그렇게(tathā 如) 간(gata 去) 이'라는 해석과 '그렇게(tathā 如) 도달한(āgata 來) 이'라는 해석이며, 양쪽 모두 역사상 석가모니가 과거 또는 미래에 깨달음 을 체험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내포. 후기 대승불교에서 여래는 모든 사람에게 내면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본질인 불성을 가리킴.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진여(眞如)와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됨.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된 상태로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궁극적 실재를 지칭하기도 한다. 13. 매봉 잡초에 묻혀있어 보이지 않을지라도 자리한 穴을 보니 남한산 氣 내려와 뭉치고 똬리 틀어서 건드리면 터질 듯 14. 샘재 새벽물 좋다하여 물동이 가득 담아 어둠 속 샛별보며 샘재를 넘나든 길 지금은 고속도로가 가로질러 지난다 15. 마방집 구유는 먼지쓰고 그림 속 들어간 말 시절은 變하는데 아직도 그대로인 백년의 손맛이 배인 된장찌게 봉놋방 * 구유 : 마소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 봉놋방 : 여러 나그네가 한데 모여 자는, 주막집의 가장 큰 방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2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요즈음 – 산성길8(벌객샘능선2) (1) 동문-망월사-봉암성-벌봉 (+55=55분(08:45-09:40), +1.9=1.9km) 벌객샘 1차종주(10/10)후 6주만(11/21)에 다시 동문 앞에 서다. 사실 이번 벌객샘 2차 종주에 나선 것은 6주의 계절 변화도 느낄 겸 아직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남한산 정상석, 11/7 광주향교길 종주시 법화사부도만 확인하고 사전조사 미흡으로 확인 못한 30m상단에 있다는 절터, 그리고 정확히 확인 못한 새바위, 개구리바위, 또한 전국에서 유일하게 마방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샘재 근처의 하남마방집을 탐방하기 위함이었다. 동문 옆 수문(水門)을 자세히 살펴보고 망월사에 오르며 살펴보니 숲은 이제 나뭇잎을 거의 떨구고 이제 초겨울로 들어가는 계절의 변화 실감. 이른 아침부터 망월사로 오르는 남녀 한 쌍. 일주문 비구니도 한낮 신자들을 맞이하기 위하여서인지 뒹구는 낙엽을 치우기 위하여 분무기를 돌리느라 바쁘시다. 그런데 일주문을 안쪽에서 보니 자항문(慈航門)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2018년 4월 장가계 여행시 천문산사에서 각해자항(覺海慈航)이란 현판을 보았다. 자항(慈航)이란 자비심을 싣고 가는 배 즉, 자비의 배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이 일주문을 나서면 자비로 중생을 제도하러 나선다는 뜻일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비구, 비구니는 산문을 나서라는 뜻일까? 대웅보전, 극락보전, 진신사리13층탑을 지나 산신각 뒤편 봉암성으로 오르는 오솔길도 낙엽에 푹 파묻혀 길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번보다 한 시간 늦은 산행이어서인지 드문드문 산객들이 보인다. 봉암성 폐허의 성벽 허물어져가는 여장에 뿌리내린 들국화들도 다 피우지 못하고 서리에 맞아 고스라 들고 강아지풀은 이제 막 이발한 아이처럼 다람쥐꼬리 같은 까까머리를 아침 햇살에 이슬을 머금고 반짝인다. 오늘도 한봉 가는 근처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남한산 정상석은 찾지 못했다. 대신 제일 높은 지대에서 청량산 수어장대를 바라보니 확연하고 그 아래 울창한 松林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 병자호란시 홍타이지가 여기쯤에서 노란 우산(黃傘)을 쓰고 행궁을 내려다보며 홍이포를 발사하라 命을 내린 것 같아 씁쓸하다. 사실 기록을 보면 후금보다도 우리가 먼저 紅夷砲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明에 사신으로 간 정두원이 돌아와 홍이포 기술을 가진 로드리게스 신부를 조정에 소개하며 홍이포 보유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누구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그 때 정두원의 건의로 홍이포를 우리가 먼저 확보했다면 병자호란의 양상은 사뭇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된다. 60만(50만이라고도 함)명이나 되는 백성이 노예로 끌려가고도 조선은 병자호란 100년 후 영조 때에야 홍이포 시제품을 만들었다니 이 쯤 되면 안보 불감증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2) 벌봉-13암문-가지울갈-법갈-법화사지-법갈-전망갈-상사갈-새바위-하사갈 (+77=137분(09:45-11:02), +1.8=3.7km) 한봉 갈림길에서 봉암성벽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무너져가는 성벽 끝 봉암신성 신축비문이 보인다. 광주유수겸 수어사 윤지선 지휘로 숙종12년(1686) 윤4/1부터 5/9까지 69일 만에 봉암성을 완성했다하니 대단한 축성술이다. 벌봉에서 송파, 검단산 방향 조망하고 13암문에서 지난 번 간 봉암성벽길을 버리고 객산 방향 정식 루트로 내려가니 골짜기가 가지처럼 많이 뻗어있다는 가지울로 내려가는 갈림길인데(09:50) 조금 내려가니 반가운 법화사지 갈림길이다(09:53) 오늘 산행 목적의 하나인 법화사지가 바로 200m 아래였던 것. 그러니까 지난 번 향교길 종주시 바로 이 근처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간 것. 급경사지의 바위 숲 뒤에 이렇게 드넓은 절터가 자리했을 줄이야. 양고리 이야기는 지난 번 자세히 소개했으므로 생략. 안내판을 읽으니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절인데 폐사와 중창이 반복된 듯하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부서진 기왓장과 백자 조각이 쉽게 눈에 띈다. 楚石에 올려놓고 증촬을 하고 그대로 둔다. 다음에 와서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와 토루와 토성이 반복되는 전망바위에서 상사창갈림목길을 조용히 걷다보니 갈라진이빨바위가 나타나고 이내 또 다시 지난 번 확인 못한 새바위 개구리바위 갈림길이 보인다. 확인해 보니 지난번 오른 바위는 개구리바위. 개구리바위에 올라 금암산을 바라기하고 지난 번 본 팥배나무를 확인해 보니 그 많던 빨간 열매는 새바위가 올라와 먹어버렸는지 몇 알만 대롱대롱. 뒤돌아서 후면을 바라보니 확연한 개구리형상에 안내판도 있다. 다시 내려와 반대편 길로 나아가니 새바위. 둘 다 확인하고 바람재가 끝나는 하사창갈림길 까지 낙엽을 밟으며 가다. (3) 하사창갈림길-막은데미고개-사미고개-객산(客山, 292m) (+58=195분(11:02-12:00), +2.6=6.3km) 이어지는 막은데미 고개로 내려가는 오솔길에 지난번엔 울창한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객산의 모습이 비친다. 객산 상단부에 푸른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금새 알아보겠다. 숲을 점령했던 등골나물이 하얀 씨방을 풀풀 날리는 登路를 따라가다. 철탑3개, 소봉 2개를 넘으니 하사창동과 하산곡동을 오가던 사미재(새미재, 삼외고개)인데 객산과 남한산의 능선중 제일 낮은 곳인 이곳은 고골 살던 사람들이 광주, 이천 우시장을 다니던 고개인 듯 옛길 흔적이 뚜렷. 사미고개를 올라서니 양지바른 남향받이 전주이씨묘원. 墓園에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조망하고 객산에 오르는 완만한 길을 걷다보니 쇠딱따구리의 나무구멍 파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드디어 숲 사이로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객산 정상. (4) 객산-선법사갈-마루공원갈-안샘재갈-바깥샘재갈-매봉앞-샘재-마방집 (+45=240분(12:00-12:45), +2.3=8.6km) 동산 같은 객산(292m)에 오늘은 몇 팀이 올라와 정담을 나누고 있다. 정상까지 울창한 소나무 가지 사이로 아리수와 연주봉, 금암, 이성산, 아차산, 불암산, 수락산, 예봉산, 검단산 조망. 해설판엔 객산의 유래에 대하여 『마귀할멈이 한양 남산을 만들려고 이천 도드람산을 치마에 담아 가다 여기에 떨어트려 생겼는데 객지에서 왔다하여 객산이 되었다』하여 살펴보니 이천의 도드람산(猪鳴山, 349m)과는 30여km, 남산(262m)과는 20여km 거리인데 마귀할멈의 보폭이 대단하다는 생각. 그것은 이 일대가 이천과 한양은 한 생활권이었고 잦은 교류의 중심점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사창동, 춘궁동 너머의 이성산도 여기서 보니 조막만하다. 객산 북사면도 급경사인데 마루공원 갈림길까지 새파란 솔잎이 건강미를 자랑하는 소나무 숲이 무성한데 어릴 적 이맘때 연료용으로 긁어모았던 솔가루가 수북. 선법사갈림길, 마루공원갈림길을 지나 안샘재갈림길, 바깥샘재갈림길이 끝나니 매봉 앞. 그런데 웬 산악자전거 팀 출현. 두꺼운 산악자전거가 登路를 뭉개는 모습 – 별로 좋지 않았다. 매봉의 잡목도 사위고 우람한 팥배나무는 빨간 열매 자랑. 그 잡목 사이 칡열매가 엄청나다. 야생의 이런 어마어마한 칡열매는 처음. 샘재로 내려와 중부고속도로 토끼굴을 빠져나오니 마방집. 1대가 1920년 마바릿집을 인수했다하니 4대, 100년 이상의 전통하는 우리나라 첫째 한정식집이란다. 마굿간이 있는 주막이라서 마방집으로 불렸다는데 설명문, 안내문 하나 없는 점은 아쉽고 옛집의 골격인데 전통자재로 보수한 게 아니고 현대 자재와의 혼합이라 아쉽다. 돌아와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그나마 간략 소개 있어 다행. 음식점을 넘어선 문화재로서의 정비와 구한말 마방집의 건축학적 보존등 관리 필요. 큰 애의 깜짝 출현과 식구들 전부 참석 마방집에서 생일상을 받다. 약8.6km, 4시간 소요, 무조건 천천히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2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동문(08:46, 벌봉1.9k), 아침의 수문 2) 망월사 갈림길(08:55, 장경사0.8km, 망월사0.3km) 3) 망월사 일주문을 안에서 본 “慈航門”(중생을 제도하려 떠남)이란 현판 4) 망월사(09:00-09:05) 5) 제3암문 앞(봉암성암문, 09:15. 망월사 0.3km, 벌봉0.9km) 6) 제3암문 뒤(봉암성암문, 09:17, 북문1.4k, 서문2.5k, 동문1.5k, 벌봉0.7k, 객산5.2k, 샘재7.5k) 7) 봉암성과 동장대지 8) 봉암성의 외로운 소나무와 강아지풀 9) 한봉 갈림길(09:23, 북문1.8km, 한봉1.4km, 노적봉6km, 벌봉0.2km, 객산4.8km, 샘재7.1km) 10) 남한산 가는 길의 황량한 성벽길 11) 남한산 갈림길(09:35, 벌봉0.2k, 북문1.7k, 한봉1.2k) 12) 남한산(09:40)에서 바라본 청량산과 뒤를 돌아 검단산, 용마산 13) 숙종12(1686년) 69일만에 봉암성 수축했다는 신축비 14) 벌봉(09:43, 512.2m)에서 청량산(497m)으로 홍이포를 쏘았다는 말씀 15) 벌봉에서 검담-용마 능선 조망 16) 벌봉에서 수어장대를 내려다 봄 17) 벌봉에서 송파 123층을 조망 18) 검단산(537.4m)과 벌봉(512.2m)에서 청량산(497m)으로 홍이포를 쏘았다는 말씀 19) 13암문(09:45, 벌봉약수터0.1k, 동장대0.7k, 고골(먹거리촌)2.0km, 객산4.5k, 샘재6.8k) 20) 가지울 갈림목(09:50, 가지울3.5k, 벌봉0.3k, 샘재6.8k) 21) 법화사 갈림길(09:53, 법화사지0.2k, 법화골2.2km, 벌봉0.5km, 객산4.3km, 샘재6.6km) 22) 법화사지(10:00-10:10, 법화골2.0km, 연자방아1.6k, 남한산성0.4k) 23) 법화사지 뒤편을 보호해주는 병풍암과 기도굴 24) 30m 하단부 부도탑 25)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기와조각과 백자조각을 초석 위에 놓고 증촬 26) 다시 법화사 갈림길(10:15, 법화사지0.2k,법화골2.2km,벌봉0.5km,객산4.3km,샘재6.6km) 27) 토성과 토루의 연속인 바람재(법화사지 갈림길-하사창동 갈림길) 구간 28) 전망바위 갈림길(10:25, 전망바위0.1km, 동수교3.0km, 벌봉0.9km, 객산3.6km, 샘재5.9km) 29) 상사창동 갈림길(10:32, 벌봉1.4km, 객산3.2km, 샘재5.5km) 30) 갈라진이빨바위 31) 개구리바위, 새바위 갈림길 32) 개구리바위(뾰족바위, 감투바위) 33) 개구리바위에서 연금이능선 조망, 금암산 줌업 34) 새바위 35) 새바위 아래(10:49, 남한산성1.5k, 객산3.0k, 샘재5.3k) 36) 지나는 드난이 37) 하사창동 갈림길(11:02, 남한산성2.2km, 객산2.4km, 샘재4.7km) 38) 막은데미고개 직전 숲 사이로 보이는 객산 실루엣 39) 막은데미고개(11:11, 남한산성2.6km, 객산1.9km, 샘재4.2km) 철탑3개, 소봉2개넘음 40) 막은데미고개에서 사미고개로 가는 오름길(철탑3개, 소봉2개 지남) 41) 사미고개(11:33, 벌봉3.2km,남한산성3.7km,골말1.2km,광덕사1.8km,객산0.8km,샘재3.1km) 42) 사미고개를 오르면 조망좋은 전주이씨 묘원 43) 객산(11:50-12:00, 292m, 남한산성4.5k, 샘재2.3k) 44) 객산(292m)에서 바라보는 북측 샘재 너머 아리수 45) 소나무가 울창한 서측 선법사 방향 소나무 가지 사이로 이성산성이 보인다. 46) 소나무 가지 사이로 금암산 줌업 47) 이천 도드람산()30km, 한양 남산(20km)에 얽힌 전설 48) 선법사 갈림길(12:07, 선법사0.7k, 남한산성4.8k, 객산0.3k, 샘재2.0k) 49) 검단산이 보이는 샘재가는 길에 솔가루가 수북히 쌓이고 향이 진동 50) 마루공원 갈림길(12:17, 마루공원0.9k, 등기소1.0k, 샘재1.4k) 건강한 소나무 숲 51) 거북바위 52) 안샘재 갈림길(12:23, 안샘재0.5k, 샘재1.1k) 53) 산불감시탑과 우측 검단산 조망 54) 바깥샘재 갈림길(12:30, 바깥샘재0.5k, 남한산성6.0k, 샘재0.8k) 55) 매봉앞 갈림길(12:35, 매봉0.1k, 남한산성6.4k, 샘재0.4k) 56) 매봉(쥐봉, 128m) 57) 매봉의 칡열매 58) 샘재(12:45) 59) 마방집 도착(13:00) 60) 1920년 마바릿집 인수, 2020년 현재 100년 이상 된 집, 4대 운영, 전통된장 유명 61) 개보수 많이 한 듯...(고증 필요) 62) 이외에도 옛 물건 다수 전시 63) 한정식(된장찌게) + 소장작구이, 가족이 모두 모여 생일상 받다.(13:00-14:00) 하남 김황식 세상사는 이야기 마방집 탐방기 마방집이 옛이야기를 들려주다 전 경기도 하남 시장 김황식, 오랜 세월 버텨낸 ‘마방집’의 역사를 묻다 뉴스테이지 승인 2011.05.27 18:50 오래된 것들에는 표정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세월을 거치는 동안 눈물도 웃음도 아픔도 담겨진다. 95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오랜 세월을 버텨낸 ‘마방집’ 또한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다. ‘마방집’의 사랑채에 앉아 있자니, 이곳을 거쳐 갔을 수많은 손님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마방집 구석구석 오랜 역사가 그대로 묻어납니다. 벌써 3대째입니다. 창업하신 분은 경자 하자를 쓰시는 저희 할아버지십니다. 그 이후로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맡아서 운영하시다가 제가 3대째로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3대째면 100년 가까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네. 제가 95년째입니다. 대한민국 식당에서 100년 가까이 된 집은 없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는 세 번째인가 그렇습니다만, 한정식집으로는 첫 번째가 맞습니다. 3대가 이어오는 전통 한정식집, 돈 주고도 못 사는 100년 전통의 가치입니다. 하남에서도 대단한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 주고도 못 사는 브랜드 일등 가치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3대를 이어온 장맛입니다. 30가마의 콩을 쓴다고 했는데 장독대를 보면 묵은 된장까지 있습니다. 100년 가까이 이어 오는 깊은 장맛을 볼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호랑이와 같이 무섭고 어머니는 봄볕처럼 온화한 분입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얼굴을 뵌 적이 없지만 부모님께서 운영해 온 모습을 쭉 보고 자랐습니다. 아버님은 작은 체구를 가진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십니다. 아버지는 호랑이라고 동네에서 불리실 정도로 무서운 분이셨지만 어머니는 그와 정반대로 부드럽고 온화한 분이셨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여기가 서울로 가는 마지막 지점에 위치한 것이 아닙니까? 한 4,50년 전 경부 고속도로가 나기 전까지 반드시 이곳을 통해서 서울로 갔습니다. 경기도에서는 서울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내가 고향이 여깁니다. 마방집에 앉아 있노라면 고향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마방집의 유래를 나도 잘 알지요. 여기 툇마루에 앉아서 마부들이 식사하는 것들, 버스가 지나다니던 것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정식으로 식당을 연 것은 95년이겠지만 예전의 그 역사까지 더한다면 쉼터로서의 이곳은 200년 가까이 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마방집은 제대로 연구해 본다면 향토 사료로도 쓸 수 있는 소중한 곳입니다. 마방집은 한국의 정치사 또한 살아 있는 곳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한 번씩 와서 식사했다는 것도 중요한 역사입니다.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과 중요 정치 인사들이 다녀간, 그야말로 산 역사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방을 이어오던 이야기를 좀 더 들려 달라. 예전에 이곳은 어땠나. 지금은 손님들이 차를 타고 많이 오시지만 예전에는 승용차가 드물었습니다. 대신 우마차와 화물트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예전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잖습니까. 화물트럭들이 서울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정기화물이라고 11톤 되는 큰 트럭입니다. 뒤에는 짐이 가득합니다. 오징어나 쌀, 고구마 같은 것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100여 미터 정도 도로를 따라서 트럭들이 쭉 서 있는데 통행금지가 지난 야심한 시각이니 짐을 지켜야 했습니다. 우리가 젊은 청년들을 고용해서 손전등을 들고 야방을 섰습니다. 짐을 누가 훔쳐가나 싶어서 말입니다. 마방집에서는 구전동화 같은 옛날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자면 반드시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과거 호남지방이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쪽 분들이 많이 올라오셔서 배가 고프니까 먹여만 주면 있겠다는 인부들을 많이 고용했었습니다. 그중에 약주를 정말 좋아하는 분이 계셔서 술에 취한 채 밤에 순찰을 돌다가 화물트럭 위에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겁니다. 새벽에 그대로 차가 출발해버렸는데 아무도 트럭 뒤에 사람이 누워 있다고는 생각도 못한 채 차가 서울로 향한 겁니다. 예전엔 광나루 다리를 통해서만 서울로 들어갔는데 광나루 다리를 지나면 헌병 초소가 있었습니다. 차가 지나가는데 짐 싣는 천막 위에 사람이 누워 있으니 헌병들이 차를 세운 겁니다. 저희 집에서 그 거리가 20여 킬로 정도 되는데 그때까지도 몰랐던 겁니다. 하마터면 굴러 떨어질 뻔했는데 무사히 거기까지 간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마방집의 이야기,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습니다. 역사가 길다보니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또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한 번은 손님이 고구마를 한 트럭을 싣고 중앙시장에 팔러 갔다가 이곳에 들렀습니다. 예전에는 고액권이 없었습니다. 그 판돈이 자루로 반 자루 정도는 되었습니다. 손님이 가고 나중에 보니까 자루가 하나 있어서 보니까 그게 바로 돈 자루인 겁니다. 혹시나 해서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 하루 지나서 그 주인이 사색이 돼서 오셨습니다. 그 돈이 그분 물건뿐 아니라 동네 분들 물건을 모두 모아 판 돈이어서 더욱 그랬습니다. 자루를 내어 드리니 거의 큰절을 하시면서 감격해 했습니다. 그 이후로 해마다 고구마를 두 가마씩 보내주셨습니다. 마방집이 주는 편안함, 근원은 무엇일까? 흔히 특별한 공간이라고 하면 자극적일지는 몰라도 금세 식상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희 집은 예전 농촌에서 먹던 음식을 기반으로 하고 이 안에서 보이는 것들은 우리가 예전부터 흔히 보던 정취들입니다. 그래서 무색무취와 같이 자연스러운 이곳을 손님들은 내 고향 집 같이 친근하며 정겨운 곳으로 느끼십니다. 전통적인 한옥구조가 고풍스럽습니다. 종종 외국 분들과 함께 오는데 외국 분들이 굉장히 인상 깊어 합니다. 특히 일본 분들이 이곳의 된장과 김치를 좋아하십니다. 마방집에서 주인이 가장 아끼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당연히 장독대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장맛 때문에 저희 집을 찾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아끼고 가장 정성을 다합니다. 저희 집에서 가장 많이 CCTV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좋은 국산 콩을 생산지에 직접 가서 구매를 한다는 것이 저희 집의 원칙입니다. 수입 콩은 빛깔이나 모양은 좋지만 삶아도 잘 무르지 않습니다. 저희는 그래서 콩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직접 구입하러 갑니다. 또 일반적으로 된장에서 간장을 뽑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간장 맛은 좋은데 된장 맛이 떨어지게 됩니다. 저희는 된장에서 간장을 안 뽑고 간장을 뽑기 위한 것은 따로 된장을 준비합니다. 깊은 재래식 된장의 맛이 나는 비결이 거기에 있습니다. 가장 인상에 남은 손님은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의자에 앉으시게 하려고 상을 세 단을 쌓아 높여 드렸습니다. 인상이 무섭고 접근하기 어렵겠다 생각했었는데 실물로 뵈니 이웃집 아저씨 같고 인자한 인상이셨습니다. 저희 음식을 굉장히 좋아하셨고 특히 된장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굉장한 대식가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도 오셨는데 거부감이 있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여러 사람 틈에 합석해 계시기에 자리를 옮겨 드릴까 물었더니 그냥 앉으시겠다고 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던 눈동자는 여전히 그대로 살아 계셨고 키는 작지만 소탈하셨습니다. 나가실 때는 저희가 민망할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특별한 인연의 손님이 있었습니까? 저희 집에 오신 분 중에서 암에 걸리셔서 중앙병원에 입원해계셨던 분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자손분이 오셨는데 저희는 처음에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가실 때 음식을 싸 달라고 하셔서 저희 음식은 싸 드리기가 어려워서 난감했는데 단골손님이라 어쩔 수 없이 싸 드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여쭤보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부친 되시는 분이 암에 걸려서 수술하셨는데 다른 음식은 구미가 안 당기는데 마방집의 된장찌개와 김치, 나물반찬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고. 그 이후 퇴원을 하시고도 4년 정도 저희 집을 다니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 집안이 현재 3대째 이어서 아들, 손자들까지 저희 집에 오고 있습니다. 3,4살 무렵 오던 손자들이 군대에 가고, 곧 결혼을 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곧 4대째 손님이 되는 겁니다. 저희 집에서는 그 집안 분들을 두고 ‘효자 집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뉴스테이지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한국의 老鋪]<3> 하남시 토속음식점 마방집 한국일보 입력 2003.10.07 00:00 주막에서 - 김용호 -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酒幕) 그 수 없이 많은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 만치 위엄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빗긴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에 닿은 그런 사발엔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엔. 시인 김용호는 시 '주막에서'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주막의 풍경을 그렇게 노래했다. 그 시인도 벌써 오래 전 주막의 운명처럼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경기 하남시 천현동의 마방(馬房)집은 주막의 정취를 자아내는 토속음식점이다. 아 니 이 땅의 마지막 주막이었다고 해도 틀림 없을 듯 싶다. 마방집은 하남시청 앞에서 지하차도를 지나 광주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80년 넘는 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여전히 그렇게 서 있다. 주막은 예전엔 술집과 식당과 여관을 겸한 길손의 쉼터였다. 마방집에서 숙박의 기능이 멈춘지는 오래다. 대신 구수하고 맛깔스러운 된장찌개가 곁들여진 한정식이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마방집의 어른 원연희(元蓮姬)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일흔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에게 살림을 물려받아 반세기 넘도록 장을 담그고 손님상을 차리던 원 할머니였다. 그 텅 빈 자리를 이승종(李昇鍾·46) 열종(烈鍾·44) 두종(斗鍾·39), 삼형제가 메우고 있다. 3대째 대물림이 이뤄진 것이다. "직업선택의 문제로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두 형님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죠. 무엇보다 가업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부담이 정말 컸거든요. 10여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형제들이 모여 가업을 잇기로 결정했고 지난해 어머님의 별세로 그런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됐습니다." 원 할머니의 막내아들 두종씨의 설명이다. 대물림의 과정에서 둘째 열종씨의 일본체험은 형제들의 의식을 바꾸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하기야 일본에는 100년 전통을 지닌 음식점들이 흔하다. 창업 600년을 훨씬 넘긴 만두전문업체까지 있다. "제가 형님들 보다 먼저 결혼을 했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은 마방집의 대를 잇는 게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4대째 대물림은 걱정 없을 것 같습니다." 원 할머니가 떠난 주방은 주방어머니로 불리는 최윤희씨가 지킨다. 주방식구들도 20년 가까이 마방집에서 일하고 있다. 모든 일을 믿고 맡기던 원 할머니의 따뜻한 정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를 이어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것도 마방집의 특징이다. 이 집에서 '효자 할아버지가족'이라고 부르는 단골손님이 있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정겨워 그런 별명을 붙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잊을 수 없는 손님이다. 김 전 대통령은 '마방집을 위하여'라는 휘호를 직접 써주기까지 했다. 2000년 경기도에 의해 '대물림 향토음식점'으로 지정된 마방집의 맛은 장에서 우러나온다. 집 뒤꼍 장독대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은 크고 작은 항아리가 200여 개 가득하다. 11월이면 메주가 처마 밑을 따라 주렁주렁 달린다. 그 모습이 장관이란다. 하기야 해마다 30가마 분량의 콩으로 메주를 쑤니 그럴 만도 하다. 원 할머니는 생전에 장독대 곁의 소나무에 신주항아리 2개를 매달아 놓고 장 담그기 전에 치성을 올렸다. 그 정성이 그대로 음식에 배어 있는 것이다. 된장찌개는 최소한 2년 이상 묵힌 된장을 알맞게 풀어 푹 끓인다. 여기에 두부 버섯 쇠고기 몇 점에 고추 마늘 파 등 갖은 양념을 보탠다. 된장찌개 한정식은 8,000원이다. 스무 가지가 넘는 나물반찬이 딸려 나온다.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불씨로 석쇠에 구어내는 소·돼지장작불고기 등은 따로 주문한다. 가마솥에 장작을 때 지어낸 밥맛도 그만이다. 밥 가마솥이 두 개인데 한 솥에서 150인분이 나온다. 말 이외에는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하남시 천현동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당연히 주막이 들어섰다. 장호원 이천 여주 광주 등에서 서울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은 마방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천호동으로 이어지는 산길에 도둑이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밤길은 가급적 피해야 했다. 원할머니의 시부모가 마방집을 인수한 때는 1920년께.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광복 전까지 마방집 앞에는 우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1960, 70년대 근대화의 물결은 우마차꾼을 밀어내고 화물차 운전기사를 마방집의 주요 고객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방집의 변화는 교통수단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날씨가 추어지면 아버님은 새벽 일찍 일어나 방마다 군불을 지피셨습니다. 아버님을 도와 소형화로에 불씨를 담아 트럭 운전석으로 나르곤 했죠. 엔진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을 겁니다." 두종씨의 유년시절에 우마차는 이미 교통수단의 지위를 상실했다. 숙박업의 중단은 하남이 시로 승격된 80년대 초였다. 서울로 들어가는 43번 국도가 새로 뚫렸고 자동차도 흔해졌다. 더구나 전국민의 발을 묶어놓았던 통금의 폐지는 저절로 숙박의 기능을 앗아갔다. 새 국도의 개통이 미친 영향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마방집 본채의 일부가 도로부지에 포함돼 헐렸다. 그 바람에 700여평에 달하던 마방집의 부지도 500여평으로 줄어들었다. "지금 남아 있는 마방집도 도로부지로 잡혀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헐려서 옮겨 지어야 할 겁니다." 두종씨의 말은 담담했다. 그 러면서도 원형을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 어감에 묻어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미식가 사로잡는 주막밥상 원형보존 하남시의 마방집은 주막(酒幕)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한정식 역시 주막밥상이 발전한 것이다. 주막은 원래 간판이 없다. 하지만 이름은 있다. 대개는 길손들이 그 집의 특징을 살려 이름을 지어 불렀다. 울안에 오동나무가 있으면 '어디매 오동나무집', 이런 식이었다. 하남의 마방집도 마구간이 딸려 있던 주막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우마차꾼은 물론이고 과거 보러 남쪽에서 말을 타고 올라오던 선비들도 묵어가곤 했다. 그 무렵 마구간을 갖춘 주막이나, 마소와 당나귀를 두고 삯짐을 실어 나르던 영업을 하던 곳은 모두 마방집으로 통했다. 마방집의 순 우리말은 마바릿집이다. 보다 큰 보편성을 획득한 한자어 마방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주막은 객주(客主)나 여각(旅閣)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객주와 여각이 경제사정이 넉넉한 상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한데 반해 주막은 보통사람이나 소상인들이 즐겨 찾았다. 이른바 사람냄새가 가득한 곳이 주막이었다. 민속연구자들은 주막의 효시를 신라시대 경주의 기생 천관(天官)의 술집에서 찾기도 한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金庾信)이 화랑시절 천관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주막은 17세기 후반 이후 사상(私商)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번창한다. 대처에는 객주, 포구에는 여각이 발달했고 시골에선 주막이 여숙의 영업을 했다. 장이 열리거나 역이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주막이 들어섰다. 주막은 숙박보다 음식점의 기능이 우위에 있었다. 숙박비는 보통 음식값에 포함됐다. 음식을 시켜 먹으면 숙박비를 별도로 받지 않은 것이다. 주막에는 길손을 위한 온돌방이 마련돼 있었다. 잠자리에 필요한 침구는 없었다. 방바닥에는 단지 거적이나 자리가 깔렸는데 그런 방을 봉놋방이라고 불렀다. o o o 비와 찻잔 사이 / 양현경 o o o 지금 창밖엔 비가 내리죠 그대와 난 또 이렇게 둘이고요 비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할말을 잃어 묵묵히 앉았네요 지금 창밖엔 낙엽이 져요 그대 모습은 낙엽속에 잠들고 비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할말을 잃어 묵묵히 앉았네요 그대 모습 낙엽속에 있고 내 모습은 찻잔속에 잠겼네 그대 모습 낙엽속에 낙엽속에 낙엽속에 잠겼어요 지금 창밖엔 비가 내리죠 그대와 난 또 이렇게 둘이고요 비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할말을 잃어 묵묵히 앉았네요 지금 창밖엔 낙엽이 져요 그대 모습은 낙엽속에 잠들고 비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할말을 잃어 묵묵히 앉았네요 그대 모습 낙엽속에 있고 내 모습은 찻잔속에 잠겼네 그대 모습 낙엽속에 낙엽속에 낙엽속에 잠겼어요 그대 모습 낙엽속에 있고 내 모습은 찻잔속에 잠겼네 그대 모습 낙엽속에 낙엽속에 낙엽속에 잠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