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길8(광주향교길1 ⑦동사지, 이성산일주, 동문지, Tu Ne Sais Pas Aimor)
이름없는풀뿌리2020. 11. 27. 04:07
요즈음 – 산성길8(광주향교길1 ⑦동사지, 이성산일주, 동문지) –- 동사지(桐寺址) -
한그루 梧桐도 없는 폐허의 옛 절터에
잘생긴 塔 둘만이 천년을 지킨 자리
지나는 드난이 하나 발자국을 남긴다.
* 드난이 : 남의 집에 드나들며 고용살이 하는 이(여기서는 “나 자신”)
- 이성산일주 -
가뭇한 흔적 있는 옛 성터 돌아보니
說話가 암시하듯 地名이 말해주듯
대번에 이 城 주인이 누군지를 알겠다.
* 가뭇하다 : 기억이 잘 나지 않고 가물가물하다.
- 동문지(東門址) -
검단의 日出 보며 아리수 日沒 보며
쌓은 성 문루 위에 다람쥐 한 마리가
時間을 입에 물고서 드나들고 있었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6) 동사지(桐寺址)-이성산성 한바퀴-이성산성입구
(+100=583분(14:40-16:20), +3.2=18.4km)
드넓은 桐寺址의 마당에
낙엽이 수북히 쌓여 뒹구는데 탐방객 하나 없다.
지난번 연금이 능선 종주시 桐寺址를 꼭 가 보리라 다짐했는데
그 때 기대했던 오동 숲은 물론 오동나무 한그루도 없다.
세워진 사찰도 동사(桐寺)가 아닌 다보사(多寶寺)이다.
보물급 문화재 3층석탑과 5층석탑 2기만이 그 이력을 말해주고 있다.
안내문에는 발굴지 규모로 보아 이 곳 동사가
신라 황룡사와 맞먹는 규모로 큰 사찰이었다 한다.
남한산성 북쪽 춘궁천 골짜기 고골지역에는
동, 서쪽 산줄기를 따라서 10여기의 절터 들이 발견되고 있다는데
특히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왕궁 터 또는 邑治였던 고골일대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말해준다 하겠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교산동 선법사(善法寺)와 춘궁동 동사(桐寺)를 꼽고 있다는데...
춘궁동 궁말에 자리한 옛 절 동사(桐寺)는
고려초(광종~경종)에 백제의 옛 절터에다 대규모로 증축한 절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려 초인 961~978년 사이
동쪽 객산 아래 선법사와 여기서 2km정도 거리의 서쪽 桐寺에서 동시에
역사에 남을 불사(佛事)가 이루어 졌다는데
고려 초 이곳 춘궁동, 교산동 지역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짐작해 보건데 이 시기와 관련되는 인물로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관여한
왕규(王規 ? ~ 945년)라는 호족과 관련이 있다 한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규는 이곳 광주(하남) 출신으로
그의 두 딸을 태조 왕건의 15, 16번 째 왕비로 출가시켰다.
16번째 왕비가 된 딸 소광주원부인은 아들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출산했고
왕규는 왕건의 최 측근 신하가 되어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고 한다.
왕건은 임종 시에 왕규에게 태자(혜종)를 보필할 것을 당부하고 눈을 감았고
이에 왕규는 태자를 보필하면서 자신의 또 다른 딸을
혜종의 제2부인으로 출가시킴으로써 2대에 걸쳐
3명의 딸들을 왕실에 출가 시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고 한다.
고려 초기 이 지역의 거대 사찰 천왕사에서
활발한 불교활동이 있었던 사실이 고려사 등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는데
아마도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였던 호족세력 왕규의 지원을 받아
이들 사찰에서 크고 작은 불사들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을까?
桐寺를 나와 외곽순환도로 아래 토끼굴을 지나니
휴일의 강태공들이 열 지어 앉은 고골낚시터.
이렇게 열 지어 앉아 낚시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일부러 고기를 풀어놓고 입장료를 받고 영업하는 낚시터가 아닌가 의심.
별로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고개를 외면하고
다시 만난 서하남로를 가로질러 정이 든 이성산성입구로 向.
오전 8시경 산성을 출발하여 이제 오후 3시.
탐방 7시간이 접어드니 피곤해야 할 텐데 전혀 피곤치 않다.
오히려 지난 번 향여고개에서 이성산 정상으로 갔다가
동문지로 바로 하산했던 아쉬움에
이성산성을 일주하겠다는 설렘에 발걸음이 가볍기까지 하다.
성벽을 겸하고 있는 제2저수지 발치에 다다라
왼편으로 방향을 잡고 숲 속 군데군데 성벽 흔적이 보이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 발아래 쏟아지는 낙엽이 마지막 가을을 장식하는데
안내판에서 보았던 서문지, 북분지는 흔적은 물론 안내문도 없고
외부를 감시했다는 이성산성에서 제일 큰 바위라는
신선바위 만이 덩그렇게 자리했다.
그래도 무분별한 복원보다는 옛 흔적이 얼핏 보이는 이런 이성산성이 좋다.
그렇게 노란 단풍 숲을 헤집고 나오니 8, 9각 건물지이다.
이성산성의 최고 조망처 동문지 상단에 다다라
멀리 아리수 너머 아차산 줄기, 그 아래 풍납, 천호동
그리고 예봉, 검단산을 조망하며 二聖山의 전설을 생각한다.
백제의 두 왕자 들이 살았다 하여 二聖山이라 했다는데
과연 2명의 백제 왕자는 누구였을까?
지난번 연금이 능선 종주 글에서
유리를 피하여 소서노를 모시고 남하한
온조와 비류가 아닐까 생각하였지만 나만의 추론일 뿐.
역사의 세월 속에 무너져 내린 산성은 말이 없다.
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던
하남위례성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설화이외의 아직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데...
백제는 BC18년에 건국하여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680년을 존속한 나라였다.
그 기간 중에 한성백제 시대가 493년으로 백제의 존속기간 중 무려 3/4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길고 긴 한성백제의 흔적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신라 1,000년의 도읍이었던 경주는 어느 곳을 파도
유물유적들이 발견되어 하나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성백제도 어딘가에 그 절반의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삼국사기에는 『溫祖가 漢水 남쪽을 돌아보고
漢山 아래 柵을 세워 慰禮城의 民戶를 옮겼다』라 하였으며,
다산 정약용(丁若鏞)선생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한강에 인접한 땅 광주고읍(지금의 하남 춘궁동) 지역을 위례성』이라고 주장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도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위례성을 하남지역으로 주장하고 있어 이곳 하남 고골지역이
한성백제의 옛 도읍 터 일 것이라는 짐작이 가게 한다.
그나마 인근에 있는 풍납토성(風納土城)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심증이 갈만한 유적들이 발굴되어
한성백제의 모습들이 보이는 듯 하였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이곳 고골지역에서 땅 속에 묻혀 잃어버린
500여년 백제가 찬란하게 솟아오르기를 기원 해 보지만
곧 개발될 교산신도시 공사로 영원히 사라질까 염려된다.
이성산성에는 모두 3개의 인공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 저수지는 1986년부터 20년간 11차례에 걸쳐 발굴하였는데
그 과정에 저수지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한다.
발굴 과정에 고구려의 자(木尺)와 장구의 몸통(腰鼓) 등이 나와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발견 되었으며,
특히 부러진 목간(木簡)에서 戊辰年이란 글자를 해독해 내었다고 한다.
戊辰年(608년)은 신라 진평왕 30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그동안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신라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참혹한 패배를 당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남 춘궁동 일대, 이성산성지역이 과연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맞는 것일까?
그 동안 백제의 고성(古城)으로 믿었던 이성산성은
신라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쌓은
한산성(漢山城)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아! 한성백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까지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 결과
백제의 흔적은 아무것도 발견 되지 않다고 하지만
필자는 『저수지는 신라와 고구려 유물이라 하여도
백제에만 있었던 8, 9, 12각 건물지들의 흔적으로 보아
백제의 토성 위에 신라가 석성으로 중수하고, 저수지를 파고
고구려와 몇 번 주인이 바뀌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고찰과
아직 아무런 발굴을 하지 않은 석성 이전의 토성 전체를 살펴보고
춘장, 춘궁, 궁말, 궁안, 이성등 설화를 주시하여야 한다고 본다.
삼국시대에는 영토싸움으로 한지역이 여러 번 주인이 바뀌길 반복했다.
그러한 점에 유의하여 종합적인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한성백제시대의 하남위례성에 대한
실체의 미스터리에 아쉬움을 안고 남문지 좌측 출입구를 따라 산성지를 나선다.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연 수로도 있고 샘도 있었다.
곳곳에 남아 있는 城 돌들이 마치 옥수수 알이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하다.
비스듬히 쌓아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으니
쉽게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성산성 아래 춘궁동(春宮洞)은 春長里의 春자와
궁말(宮마을)의 宮자를 붙여 이름 지어진 행정동명이란다.
춘장(春長)과 궁말 모두 백제 때의 궁궐이 있었던 마을이라 안내하고 있다.
향교가 자리한 교산동(校山洞) 마을은 춘궁동 내의 법정동으로
광주향교(廣州鄕校)의 校자와 객산(客山)의 山자를 따서 부쳐진 이름이라 한다.
(7) 산행후기
산행기를 쓰면서 필자의 글은 청색으로 표시하고
보조 자료들을 검은 글로 덧붙여 놓았다.
특히 조선왕조 실록 관련 자료를 많이 하였는데
실록의 서술을 읽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 그 생생함을 전해드리기 위함이다.
특히 淸측의 자료들을 잘 정리해 놓으신 길공구님의 자료를
허락없이 인용하였음을 용서해주시길 길공구님에게 요청드립니다.
또한 교산신도시 개발로 이곳 고골 일대의
지형이 많이 변화 될 것으로 예상되기에
담당 입안자들에게 몇 가지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1) 산성을 중심으로 연금이능선, 벌객샘능선 사이로
고골계곡에서 발원한 덕풍천, 법화천 사이사이 스민 설화와 전설들이 있습니다.
이제 곧 신도시 개발로 유서 깊은 이곳은 포클레인에 파 뒤집혀질 것이고
거기 건설될 아파트 숲에 매몰돼 버릴
능선과 촌락을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을 비롯한 지명과 흔적들을
잘 조사하고 연구하여 설계도에 반영하여 주십시오.
2) 아파트 숲에 곧 함몰될 이 고골 향교길 주변의
고골, 세미길, 상사창, 하사창, 궁안마을, 춘궁동, 춘장리,
연자방아, 항동, 황골, 읍치, 청풍루, 동경주, 마방...
이런 지명들이라도 동네 이름 등을 세밀히 조사하여
새 거리 이름에 반영하여주시고
포클레인으로 굴착하기 전에 철저하게
문화재 사전조사를 시행하여 유적공원이라도 만들어
고골의 유적관이라도 지어 보존하여 주길 요청드립니다.
고골 세미길, 법화사지와 양고리, 연자방아, 향교길, 광주향교,
선법사와 동사지에 관련된 왕유 이야기
그리고 이성산성과 궁안, 춘장에 얽힌 백제 이야기를
반추하면서 18km, 10시간여의 늦가을 탐방길이었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우주와 탱주가 새겨진 기단, 2단의 1층 탑신등 신라 석탑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 석탑
2) 겨울에도 춥게 원두막에 앉아 계신 山神
3) 황룡사급의 정면7칸, 측면6칸의 2층 금당을 가졌던 桐寺址에 자리한 황량한 多寶寺
4) 동사지 앞의 내부순환고속국도 너머 이성산
5) 춘궁동 동사지 이정목(14:25-14:40, 동사지0.3k, 이성산성1.1k)
6) 고골 저수지 낚시터
7) 이성산성 입구(14:56)
8) 이성산성 제2저수지(남문지, 15:05)
9) 남문지옆(15:10, 남문지0.2k, 이성산0.6k, 남한산성6.0k)
10) 남문지 갈림목(15:20, 동문지0.6k, 덕풍골3.1k, 동사지1.3k, 이성산0.2k, 남한산성5.6k)
11) 서문지 근처의 산성내 제일 큰 신선바위
12) 생강나무 단풍이 절정인 북문지 근처
13) 멀리 8, 9각건물지가 보이고...
14) 건물지(15:31, 동사지1.8k, 동문지0.1k, 덕풍골2.7k, 먹거리촌k, 이성산0.2k, 남한산성6.0k)
15) 광주시 향토사적1호
16) 동문지(15:33, 이성산0.3k, 남한산성5.9k, 남문지0.4k, 덕풍골2.6k)
17) 동문지 상단에서 검단산 방향 조망
18) 동문지 하단 보러 가는 오솔길
19) 기존 성벽에 덧붙혀 새로 일부 복원(현문식으로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렸다는 설명)
20) 桐寺에 있어야할 오동이 이성산에... (동사 터가 넓던데 이름에 걸맞게 오동을 심으면 좋을 듯...)
21) 동문지 안내판
22) 두 왕자의 설화, 둘레1.844km, 신라가 쌓은 것으로 설명?
23) 제2저수지원점회귀(15:46, 동문지0.4k,광주향교1.3k,동사지1.4k,덕풍골3.0k,남한산성6.2k)
24) 공원 입구(16:20)
25) 동사지에서 이성산성 까지 가는 길
26) 광주향교길 탐방루트(백색 루트)
(행궁-현절사-북문-연자방아-법화사지-덕풍천-선법사-광주향교-황골-동사지-이성산성 한바퀴)
□ 동사(桐寺)
동사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불확실하나 후기 신라말이나 고려초인데
출토된 기와에는 辛酉廣州桐寺, 興國三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 있었다.
신유는 961년(고려 4대 光宗 12년)이며
흥국은 송나라 태종의 연호인 太平興國이 분명하므로
태평흥국삼년은 978년(고려 5대 景宗 3년)이다.
따라서 961~978년 사이에는 적어도 이곳 동사에서 불사(佛事)가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태평2년 977년)에 2km여 떨어져 있는
(현재 이름) 선법사에서도 마애약사여래 중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고개 너머에 있던 거대사찰 천왕사에서도
활발한 불교활동이 있었던 사실이 고려사 등의 기록에 전해진다.
이곳 춘궁동, 항공, 교산동 덕풍동 지역에는 고려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인물이 있다. 그 이름 왕규(王規: ? ~ 945년).
왕규는 이곳 광주(하남) 출신으로 그의 두 딸을 왕건의 15, 16번 째 왕비로 출가시켰다.
16번째 왕비가 된 딸 소광주원부인은 아들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출산했고
왕규는 왕건의 최측근 신하가 되어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받고 왕건을 보필했다.
왕건은 임종 시에 출신 성분이 미약한 태자를 보필할 것을
왕규, 박술희에게 당부하고 눈을 감았다. 이에 왕규는 태자(혜종)을 보필하고
자신의 딸을 혜종의 제2부인으로 출가시킴으로써 2대에 걸쳐 3딸을 왕후가 되게 했다.
고려라는 국가는 태생이 호족연합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궁예를 호족들이 연합해 제거하고 세운 나라가 고려였기에
애초부터 왕건과 호족들은 그들 딸을 매개로 피를 나누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건과 결혼한 호족의 딸들이 29명이나 됐다.
왕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지역에 세워졌던 10여개의 절들은
호족세력 왕규의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불행히도 왕규는 혜종이 급사한 후 반대세력에게 죽임을 당하고
고려사 열전에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황을 비추어 보면 설득력은 없다.
하남 출신 왕규, 두 딸을 왕건 왕비로 출가,
3층 석탑, 5층 석탑의 규모로 볼 때
대단한 세력의 지원 없이는 세워질 수 없는 규모와 완성도를 겸하고 있다.
3층 석탑은 보물 13호, 5층 석탑은 보물 12호로 지정됐는데
1966년 해체 수리할 때 3층탑에서는 금동불 1구, 동상 1구,
납석으로 만든 작은 탑 29기, 납석으로 만든 좌불상 1구 등이 발견됐다.
이제 탑이 서 있는 뒤편 언덕길로 오른다.
고개를 넘어가면 10여기의 절터가 있는 항동, 교산동 지역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오늘은 고갯마루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금암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500m 쯤 오르면 고갯길 덜미재에 닿는다.
예전 이곳 항동에서 감북동으로 넘어 다니던 민초들의 고갯길이었다.
이 고개에서 좌측으로 길을 잡으면 금암산~ 남한산성에 이르고,
우측으로 길을 잡으면 이성산성 길이다. 우측으로 길을 잡는다.
능선길에서 옛무덤을 만난다. 적석분(積石墳)이다.
이미 도굴되었는지 돌로 쌓은 적석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안내문에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사이 무덤이라 한다.
약 29기가 주변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잠시 후 좌측으로 광암동 갈림길을 만난다.
광암동(廣岩洞), 넓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안내판 설명을 보니 이 지역에는 고인돌이 많아
평평하게 넓은 고인돌 뚜껑을 보고 광암이라 불렀기에 광암동이 됐다고 한다.
도로확장 공사를 하며 발견된 고인돌은 지금 하남시청 앞마당으로 이전됐다.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7] 하남 이성산성 桐寺터
아련한 ‘백제의 눈물’ 그 영혼은 어디 있나
기사입력 2013.03.11. 13:42:47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10293
□ 이성산성(二聖山城)
옛 광주(광주, 하남, 남한산성, 성남)지역의 역사지리를 정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헌종 때 홍경모 선생 저술) 잉적(賸蹟)조에
이성산성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500년 한성 백제의 숨결 담긴 이성산성
“온조고성이 서부면 금암산 북쪽 10여리에 있는데
우뚝한 흙산을 이성산성터라 하며 지금도 완연하다.
세상에 전하기를 온조 초에 대화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려고
성터를 둘러봤는데 지금 도척면이 그곳이다.
이성(二聖)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생긴 것 같다.
(溫祚故城在西部金岩山北十餘里 突起爲土山名二城山城址至今宛然
俗傳溫祚初欲定都於大華之南周度城址 今之都尺面是也 二聖命名似由於次)“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 13년을 보자.
『내가 어제 나가 한수 남쪽을 둘러보았더니 땅이 기름져,
그곳에 도읍해 영구히 안정된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7월에 한산 아래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 백성을 옮겼다.』
(予昨出巡觀漢水之南 土壤膏腴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이렇게 온조는 수도 위례성을 옮겼다.
옮긴 새 도읍(都邑)이 이른바 하남 위례성인데 삼국사기에는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결과 오랜 동안 위례성을 직산(稷山, 천안 북면 위례산 주변)으로 비정해 왔다.
고려사지리지,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성호사설, 연려실기술... 조선 중기까지 모든 책은
위례성의 위치를 충청도 직산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누대에 걸친 통설에 도전장을 낸 이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한강 인접한 땅의 남북(漢水逼近地 南北)’
즉 광주고읍(지금의 하남 춘궁동) 지역을 위례성이라 주장했다.
이 설은 해동역사를 지은 한치윤의 조카 한진서(韓鎭書)의
해동역사속(海東歷史續, 해동역사 부속 지리서)에서 지지를 받았고,
고산자 김정호, 천관우, 이병도, 일본인 금서룡(今西龍) 등 많은 학자들이
위례성을 하남지역으로 비정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심지어 윤병무 교수 같은 분은 위례성을 이성산성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하남 춘궁동, 이성산성 지역이 온조의 위례성이 맞는 것일까?
이제 이성산성과 동사(桐寺)터를 둘러보며 그 답을 찾으려 한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면 음식점 뒤로 이성산성 안내판이 서 있다.
사적 422호로 지정되었는데 길이는 1925m, 넓이는 4만7200평이라 한다.
넓이에 비해 길이가 짧은 것은 산을 둘러싸 축성한 것이 아니라
지대가 낮은 골짜기를 S자형으로 쌓은 포곡식(抱谷式) 산성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백제 위례성은 하남시 일대다.』라고 한
높이 4m는 되었을 온전한 성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성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성저(城底)부분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동문(東門)이 있었을 터에는 남아 있는 성을 근저로 해서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
그 곳에서는 한강과 하남이 손바닥처럼 보인다.
강 건너 넘어 올 적군을 언제라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이다.
동문의 안쪽으로는 높은 평탄지에 건물터가 나타난다.
8각형, 9각형, 12각형, 4각형 건물터가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다.
4각형 건물들은 산성을 방위하는 이들의 생활공간이나 저장공간, 강당 등으로 여겨지고
8각, 9각, 12각 건물은 제천(祭天)이나 신앙과 관련된 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이의 연구결과는 9각형은 천신(天神)에게
8각형은 지신(地神)에게 제사지내는 건물로 추측하고 있다.
음양오행 사상에서는 홀수를 양수(陽數), 짝수를 음수(陰數)로 구분하는데
9는 양수 중에서도 가장 높은 극양수(極陽數)이니 하늘이 되고,
8은 음수 중에서 가장 크니 땅을 상징하는 해석함도 합리성이 있다.
그런데 필자는 궁금증이 생긴다. 9각 건물을 어떻게 세웠을까 하는 점이다.
현대의 우리도 9각형을 그리라 하면 그릴 수가 없다.
구차하게 360도/9=40도 이렇게 계산하여 각도기로 40도씩을 나누어 그릴 수는 있겠지만
각도기가 없던 그 시절에는 어떻게 그렸을까?
1500년 전 그 시대 분들도 수학실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기분 나쁜 일이 하나 있다.
일본 구마모또현 야마가시(熊本縣 山鹿市)에는
이성산성과 유사한 기꾸찌성(鞠智城)이 있는데 8각형 건물 고루(鼓樓)도 있고
2008년 11월에는 12cm쯤 되는 백제계의 청동보살상이 출토되어 백제계의 성임이 입증됐다.
660년 백제가 망한 후 백제를 살리기 위해 백촌강에 왔던 군대가 참패한 후
신라와 당군의 칩입에 대비해 세운 백제계 성(城) 중 하나이다.
일본인들은 이성산성이 기꾸찌성의 영향을 받은 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9각형은 천신, 8각형은 지신에게 제사 지내 건물터에서 내려다보면 저수지가 보인다.
이성산성에는 모두 3개의 저수지가 있다.
1986년부터 20년간 11차에 걸친 발굴기간 동안에 저수지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옛터를 발굴한 보고서를 보면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등에서
역사의 키를 쥔 유물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많은 유물 중에는 부러진 채 발굴된 목간이 있다.
남은 글자에 손상이 심해 쉽게 읽히지 않는 목간(木簡)이지만
흥미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연구자들이 판독해 낸 글자를 소개하니
해독(解讀)에 도전해 보시기를.
전면: 戊辰年正月十二日朋南漢城道使(이하 缺失됨)
측면: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이하 결실됨)
후면: ○○蒲○○○○○○(이하 결실됨)
이 목간의 무진년을 608년(신라 진평왕30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신라는 진흥왕의 활약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608년)에 고구려가 침략해
수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는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이에 대한 복구작업을 명하는 기록이라는 연구결과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이성산성 발굴결과에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것은
백제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자(木尺), 고구려 길림성 집안(集安)오회분(五盔坟) 벽화에서 보이는
장구의 몸통(腰鼓)이 나와 고구려 계통의 유물은 확인됐으나 백제의 흔적은 없었다.
백제 고성(古城)으로 믿던 이성산성은 553년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쌓은 한산성(漢山城)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 한성백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성산 정상으로 오른다. 높이 208m이니 힘들 일은 없다.
이성산의 내력을 적어 놓았는데 백제의 두 왕자가 이 산에 살았기에
이성산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에서는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두 산줄기가 있다.
그 한 줄기가 바로 이성산성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이다.
연주봉옹성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북으로 달리면 금암산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향교고개를 넘으면 이성산성이다.
김정호 선생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금암산을 설명하면서
청량산(남한산성 수어장대) 한 지류에 용호동이 있고,
금암산(金岩山) 한 지류에는 원덕산(元德山)이 있으며
또 이성산이 있는데 백제의 성터가 있다고 했다(有二聖山有百濟城址).
고산자 선생도 남한산성에서 금암산 거쳐 이성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그 역사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줄기는 동장대 옆 벌봉에서 시작해 객산(客山)을 거쳐
고려초 마애불로 유명한 선법사로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이 두 산줄기 사이에 펼쳐진 들이 바로 춘궁동, 항동 지역으로 10여기(基)의 절터가 있다.
곳곳에 건물터 초석이 보여 옛부터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어 오던 지역이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 유적은 발굴된 것이 없다.
□ 고려 개국공신 왕규(王規)
초명은 왕승로(王承老), 자는 숙개(叔玠)이다.
태조의 종제인 왕만세(王萬歲)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왕충(王沖)이다.
부인은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딸이다.
벼슬은 의종 때 군기주부동정(軍器注簿同正)으로 시작하여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과 어사대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1170년(의종 24) 무신란이 일어나 문신이 무신에 의해서 도륙될 때,
마침 휴가를 받아 어머니를 보러 가게 되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뒤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정사에 전심을 기울였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일으킨 반무신란에 가담한
이지무의 아들 이세연(李世淵)과 관련된다고 하여 이의방(李義方) 등이 죽이려 하였으나,
이 때 과부가 된 정중부의 딸과 혼인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이의방이 죽자 1174년에 복직되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202년(신종 5) 어사대부(御史大夫), 1203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며,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平章事)에 이르러 병으로 사임하였다.
시호는 장경(莊敬)이다.
왕규는 고려 초기 광주(廣州)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왕씨 성을 하사받게 된다.
왕규는 고려 초기 사람. 태조를 섬겨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태조는 왕규의 두 딸을 맞아들여 하나는 제15비(妃), 하나는 제16비를 삼았다.
제16비가 아들 하나를 낳으니 광주원군이라 하였다.
945년 왕규는 야심이 있어서 혜종에게 무고하기를 요(窯)와 소(昭)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 하였으나
혜종은 거짓말임을 알고 더욱 동생들을 사랑하였다.
점복(占卜)에 밝은 최지몽(崔知夢)이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에 역적이 일어나겠다 하니
임금은 왕규가 자기 동생들을 해치려는 징조로 짐작하고
소(昭)와 자기의 맏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튼튼히 해 주었다.
왕규는 자기 딸이 낳은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밤중에 임금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심복을 몰래 들여보내 죽이려고 하였다.
임금은 마침 잠이 깨어 한주먹으로 이를 때려 죽인 후
사람을 불러 끌어내게 하였으나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하루는 임금이 몸이 편치 않아 신덕전(神德殿)에 있는데,
최지몽이 아뢰기를 장차 변이 있을 터이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임금은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겼다.
왕규는 밤에 심복들을 거느리고 와서 벽을 뚫고 들어갔으나
임금이 잠자리를 옮긴 것을 알고 너의 수작이 아니냐고 하였으나, 최지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임금 혜종은 이를 불문에 붙였다.
그 해에 혜종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요(堯)가 왕위에 오르니, 곧 정종(定宗)이다.
왕규는 재빨리 정종의 명령이라 사칭하고
왕실에 충성된 박술희(朴述熙:朴述希라고도 쓴다)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종은 전부터 왕규의 동태를 알고 있던 터이라 혜종의 병이 위독하자
서경(西京:평양)의 수비대장 왕식렴(王式廉:태조의 종제, 정종의 당숙)과 미리부터 연락을 해두었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開城)에 들어와 정종을 호위하니 왕규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에 왕식렴은 왕규를 붙잡아 갑곶(甲串)에 귀양보냈다가
사람을 보내 죽여버리고 그의 일당 3백여 명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진압해 즉위한 정종도 오래 가지 못하고
외척들에게 쫓겨 동생 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아들 경춘원군의 목숨을 유지케 하였다.
그러나 광종은 즉위 후 경춘원군을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이유로 전격 처형,
고려 초기의 왕권 불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혹자는 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지를 받든 왕규는
군사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의 보호를 받는 존재였으며,
그의 손자인 광주원군은 왕위 계승 서열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왕규는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본다. 오히려 이 사건을 왕위를 노린
정종과 광종의 음모로 보고 “왕규의 난”이 아닌 “왕식렴의 난”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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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 Ne Sais Pas Aimor 남의 속도 모르고 / T.S.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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