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선생 남매 분재기(栗谷先生男妹分財記)
종 목 : 보물 제477호
명 칭 : 율곡선생남매분재기(栗谷先生男妹分財記)
분 류 : 분재기
지정일 : 1968.12.19
소재지 : 서울 광진구 모진동 93 건국대학교박물관
시 대 : 조선 명종21년(1566)
소유자 : 건국대학교
이 문서는 부모가 죽은 뒤 유산을 율곡 이이(李珥)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합의하여 나누면서 작성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각종 제사와 수묘를 위한 토지와 노비를 배정하고,
나머지를 4남3녀와 서모(庶母:아버지의 첩)인 권씨에 배당한 토지와 노비 등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음, 끝에 문서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수결(지금의 서명)을 표시하였다.
이 문서는 이이의 개인사에 관한 사항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재산상속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재산상속에 관한 고문서(古文書)이다. 맨 첫줄에
「가정사십오년병인오월이십일동복화회■의
(嘉靖四十五年丙寅五月二十日同腹和會■議)」라고 써서
동복(同腹)들이 모여서 합의한 결과의 증서임을 나타냈다.
내용을 보면, 이원수(李元秀)의 자녀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남매들이 그 유산을 분배한 것인데,
먼저 선조의 기제(忌祭)와 수묘(守墓)를 위한 가옥(家屋)·토지(土地)·노비(奴婢)를 배정하고,
다음에 맏아들인 선(璿)(생원),
맏딸인 병절교위(秉節校尉) 조대용(趙大勇)의 처(妻),
2자(子)인 번(번).
2녀인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의 처(妻),
3자인 이(珥)(좌랑(佐郞)),
3녀인 고(故) 홍천우(洪天祐)의 처(妻),
4자인 위(瑋) 등 7남매와
서모(庶母)인 권씨(權氏) 등이 나누어 가지는 토지(논과 밭)·노비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끝에 다음과 같이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이름 아래에 수결(手決)을 붙였는데, 여자는 수결을 하지 않았다.
필집(筆執) 장형(長兄) 생원(生員) 이선(李璿) 수결(手決)
매부(妹夫) 병절교위(秉節校尉) 조대용(趙大勇) 수결(手決)
차제(次第) 유학(幼學) 이번(李번) 수결(手決)
차매부(次妹夫)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 수결(手決)
삼제(三弟) 이조좌랑(吏曹佐郞) 이이(李珥) 수결(手決)
삼매(三妹) 고(故)학생(學生) 홍천우(洪天祐)처(妻) 이씨(李氏) 사제(四弟)
유학(幼學)이위(李瑋) 수결(手決)
이 문서는 율곡(栗谷)이 41세 되던 해에 작성된 것으로
조선 전기의 재산상속의 실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이것은 율곡(栗谷) 선생에게 직접 관계되는 것이므로 더욱 귀중하다.
고(故) 이상백(李相佰) 박사(博士)의 소장이던 것이 현재의 장소로 이관된 것이다.(문화재청)
□ 율곡선생남매분재기 (栗谷先生男妹分財記)
가정(嘉靖) 45년(1566, 명종 21) 병인 5월 20일에
동복(同腹)이 화회(和會)에 동의함. 다음과 같이 입안함.
부모 쪽 전답과 노비의 몫을 나누므로
누락된 노비를 고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한 명을 상으로 준 뒤
장유(長幼)의 차서에 따라 『경국대전(經國大典)』대로 시행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거행해야 할 제사에 관한 일을
형제자매가 함께 의논하여 마련한 뒤에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1. 형제 중에 1인을 가려 유사(有司)로 삼고,
모든 제사를 종자(宗子)와 유사가 함께 의논하여 봉행하되,
종자의 집이 연고가 있으면 유사의 집에서 제사를 거행할 것.
1. 모든 기제사를 돌아가며 지내지 말고 모두 종자의 집에서 거행하되,
매년 자손들이 각각 쌀을 내어 제사를 돕는다.
친자녀(親子女)는 10말[斗]을 내고,
친손자녀는 5말을 내고,
친증손자녀(親曾孫子女)와 외손녀는 2말을 낼 것.
1. 모든 봉사 전답(奉祀田畓)의 소출(所出)과 노비(奴婢)의 신공(身貢) 및
제사를 돕는 쌀 등을 종자와 유사가 함께 감시하고 수합하여
종자의 집이나 유사의 집에 저장하고 다만 제사에만 사용할 것.
◇ 봉사조(奉祀條)
와가(瓦家) 1좌(坐).
파주(坡州) 율곡원(栗谷員)에 있는 난자답(難字畓) 84복(卜) 내 14복 8두락(斗落),
이천복(梨川伏)에 있는 염자전(染字田) 7복.
파주(坡州) 접노(接奴) 원동(元同) 양산(良産)의 4소생 노(奴) 말석(唜石) 을사생,
노(奴) 우산(禹山)의 3소생 노(奴) 우성(禹成) 병오생,
강릉 접비(接婢) 은종(銀鍾)의 1소생 비(婢) 내은금(內卩今) 임인생. 끝[印].
◇ 묘전(墓田)
파주 율곡원에 있는 난자답(難字畓) 84복 내 14복 8두락,
두문리원(斗文里員)에 있는 공자답(空字畓) 37복 내 18복 7두락,
전자전(傳字田) 6복, 공자전(空字田) 3복, 공자전(空字田) 19복,
전(田) 6복, 전 15복 내 10복. 끝[印].
◇ 묘지기[墓直]
파주 접노 원동(元同)의 2소생 노 청산(靑山) 을유생,
노 우산(禹山)의 5소생 노 사랑복(思郞福) 임술생,
홍원(洪原) 접비 막비(莫非)의 1소생 노 문손(文孫) 병인생,
동(同) 노 소생의 비 단춘(丹春) 을묘생, 3소생 비 단시(丹時) 임술생. 끝[印].
◇ 첫째 아들 생원(生員) 선(璿)의 몫
옛 양주(楊州) 답(畓) 동쪽[東邊] 10두락과 또 5두락,
텃밭[垈田] 북쪽[北邊] 일일경(一日耕).
신계(新溪) 접비(接婢) 율이(栗伊)의 끝 소생 노 금산(今山) 계사생,
비 말(末)▩..▩의 비 우음덕(于音德) 병신생,
서울 접비 성덕(成德)의 2소생 비 내은이[內卩伊] 정유생,
파주 접노(接奴) 우산(禹山)의 1소생 비 덕개(德介) 무술생,
영천(永川) 접비(接婢) 말미(末非)의 3소생 비 흔금(欣今) 정유생,
4소생 노 흔리금이(欣里金伊) 기축생,
용안(龍安) 접비 명시(名時)의 2소생 노 명복(命福) 갑진생,
신계(新溪) 접노 청산(靑山)의 5소생 노 홍손(洪孫) 병인생,
비 우음덕(于音德)의 1소생 노 은송(銀松) 임자생,
김제(金堤) 접비 옥배(玉杯)의 1소생 노 연세(連世) 신사생,
비 윤월(允月)의 1소생 비 반월(半月) 병오생,
동(同) 비의 1소생 비 두비(豆非) 을축생,
서울 접비 무치(無齒)의 2소생 비 업덕(業德) 임오생,
홍원(洪原) 접비 내은이[內卩伊]의 3소생 비 손비(孫非) 병자생,
함흥(咸興) 접노 눌질석(訥叱石) 양산(良産)의 1소생 비 금덕(今德) 갑인생,
경주(慶州) 접비 흔덕(欣德)의 1소생 비 흔진(欣進) 병진생. 끝[印].
◇ 첫째 딸 강절 교위(康節校尉) 조대남(趙大男)의 처 몫
파주(坡州) 율곡원(栗谷員)에 있는 욕자답(欲字畓) 16복과 또 12복 도합 10두락,
사자전(絲字田) 29복,
고양복(高陽伏)에 있는 불비답개자(佛非畓改字) 4복 6두락,
묵자반답(墨字反畓) 4두락.
파주(坡州) 접비(接婢) 사량지(思郞知) 1소생 노 풍년(豊年) 병오생,
서울 접노 돌손(乭孫)의 3소생 노 춘손(春孫) 임진생,
영천(永川) 접비 말비(末非)의 5소생 비 흔리덕(欣里德) 신묘생,
성천(成川) 접비 은금(銀今)의 4소생 비 월지(月之) 신묘생,
삭녕(朔寧) 접비 가리지(加里知)의 3소생 비 풍덕(豊德) 임진생,
홍원(洪原) 접비 만천(萬千)의 2소생 비 덕내(德內) 무술생,
노 막산(莫山)의 1소생 비 개똥[介屎] 을축생,
고원(高原) 접비 내은비(內卩非)의 1소생 비 옥덕(玉德) 임오생,
강릉(江陵) 접비 헌덕(獻德)의 4소생 노 수석(守石) 무인생,
고양(高陽) 접비 석덕(石德)의 3소생 노 금석(今石) 경오생,
교하(交河) 접비 효도개(孝道介) 4소생 노 돌석(乭石) 을축생,
강릉(江陵) 접비 감실(甘實)의 3소생 노 홍이(洪伊) 기유생,
천대(千代)의 1소생 노 우음산(于音山) 갑오생,
비 내은금[內卩今]의 1소생 비 귀수(龜守) 계해생,
용안(龍安) 접노 원손(元孫)의 1소생 비 명시(名時) 경진생,
동(同) 비 3소생 노 춘풍(春風) 계축생. 끝[印].
◇ 둘째 아들 유학(幼學) 번(璠)의 몫
파주 율곡원 난자답(難字畓) 84복 내 14복 8두락,
욕자전(欲字田) 8복,
난자전(難字田) 3복,
갓동(㖙同) 가경전(加耕田) 반일경(半日耕).
영천(永川) 접노 말산(唜山)의 1소생 노 말석(末石) 임진생,
비 말비(末非)의 2소생 비 흔월(欣月) 갑신생,
고양(高陽) 접비 석덕(石德) 5소생 비 분이(粉伊) 경진생,
홍원(洪原) 접비 만천(萬千) 4소생 노 우음금이(于音金伊) 을묘생,
비 손비(孫非)의 2소생 노 천손(千孫) 신해생,
고원(高原) 접비 내은비[內卩非]의 6소생 노 금수(今守) 갑오생,
비 분장(粉莊)의 2소생 노 세국(世國) 신축생,
비 내은종[內卩從]의 1소생 노 권춘(權春) 경신생,
함흥(咸興) 접비 중금(中今)의 끝 소생 노 납질돌이(訥叱乭伊) 【□□】생,
동(同) 3소생 노 【□□】생,
홍원(洪原) 접비 내은이[內卩伊]의 2소생 비 만천(萬千) 경오생,
강릉 접비 한종(閑從)의 1소생 비 대은금[大卩今] 【□□】생,
해주(海州) 접비 흔이(欣伊)의 7소생 비 말덕(唜德) 신묘생,
서울 접노 금이강(金伊江)의 1소생 노 원이(元伊) 정미생,
파주(坡州) 접비 우음지(于音非)의 1소생 노 섬동(暹同) 무술생,
비 사랑지(思郞知)의 4소생 비 금덕(金德) 경자생. 끝[印].
◇ 둘째 딸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의 처 몫
파주 율곡원 난자답 84복 내 14복 8두락,
욕자전(欲字田) 13복, 전(田) 1복.
삭녕(朔寧) 접노 가리지(加里知)의 2소생 노 강철(康哲) 무자생,
서울 접비 성덕(成德)의 3소생 비 내은개[內卩介] 신축생,
홍원(洪原) 접비 만천(萬千)의 1소생 노 억진(億眞) 계사생,
비 내은이[內卩伊] 5소생 노 막산(莫山) 병술생,
노 의상(義常)의 4소생 비 가지금(加知今) 갑자생,
고원(高原) 접비 분장(粉莊)의 3소생 비 내은종(內卩從) 계묘생,
노 덕근(德斤)의 1소생 노 덕수(德守) 병오생,
파주(坡州) 접노 알동(阿乙同)의 2소생 노 우산(禹山) 계유생,
성주(星州) 접노 석지(石只)의 1소생 노 인원(仁元) 【□□】생,
김제(金堤) 접비 보배(寶盃)의 2소생 비 무상(無常) 신묘생,
해주(海州) 접비 흔이(欣伊)의 3소생 노 잣금이(㗯金伊) 임신생,
신계(新溪) 접비 한금(漢今)의 1소생 노 귀천(貴千),
영천(永川) 접노 말산(唜山)의 2소생 비 만월(萬月) 병신생,
용안(龍安) 접비 명시(名時)의 1소생 비 분종(粉從) 신축생,
지평(砥平) 접노 희질구지(希叱仇之)의 1소생 노 희손(希孫) 정미생. 끝[印].
◇ 셋째 아들 좌랑(佐郞) 이(珥)의 몫
파주 율곡원 난자답 84복 내 14복 8두락,
손자전(孫字田) 5복,
복자전(覆字田) 12복,
욕자전(欲字田) 2복.
파주 접비 고읍지(古邑之)의 1소생 노 고읍동(古邑同) 계사생,
동(同) 비 2소생 비 고읍덕(古邑德) 기해생,
서울 접비 업덕(業德)의 1소생 노 수환(守環) 신축생,
삭녕(朔寧) 접노 일용(一龍)의 1소생 비 잇덕[芿叱德] 갑오생,
성주(星州) 접비 은금(銀今)의 2소생 비 월비(月非) 을유생,
신계(新溪) 접비 덕지(德之)의 3소생 노 유손(有孫) 임진생,
홍원(洪原) 접비 막비(莫非)의 5소생 비 내은비[內卩非] 을유생,
노 문손(文孫)의 1소생 노 옥지(玉只) 계묘생,
노 의상(義常)의 2소생 노 세국(世國) 계축생,
3소생 노 세번(世番) 기미생, 비 만천(萬千)의 1소생 비 금보똥[金保屎] 【□□】생,
함흥(咸興) 접노 눌질돌이(訥叱乭伊)의 2소생 비 금화(今花) 임술생,
영천(永川) 접비 말이(末伊)의 1소생 비 흔리(欣里) 신사생,
(江陵) 접비 말덕(末乙德)의 2소생 비 감실(甘實) 기묘생,
서울 접비 유운(柳雲)의 1소생 노 순환(順環) 병진생. 끝[印].
◇ 셋째 딸 고(故) 홍천우(洪天佑)의 처 몫
파주 율곡원 난자답 84복 내 14복 8두락과
또 답(畓) 20복 내 5복, 동쪽 4두락,
욕자전(欲字田) 27복.
고산(高山) 접노 억석(億石)의 1소생 노 고공(古公) 기해생,
2소생 노 입사리(入沙里) 계묘생,
영천 접비 흔리(欣里)의 2소생 노 희산(希山) 병오생,
노 말산(唜山)의 3소생 노 녹만(鹿滿) 정미생,
용안(龍安) 접비 영대(永代)의 1소생 비 천비(千非) 정미생,
홍원(洪原) 접비 손비(孫非)의 1소생 노 귀천(貴千) 병신생,
노 의상(義常)의 1소생 비 내은춘[內卩春] 을사생,
고원(高原) 접노 세국(世國)의 1소생 비 【□□】생,
김제(金堤) 접비 보배(寶盃)의 3소생 노 수지(守知) 갑오생,
용안(龍安) 접노 원손(元孫)의 2소생 비 영대(永代) 【□□】생,
서울 접비 유운(柳雲)의 3소생 노 명환(命環) 을축생,
나주(羅州) 접노 석지(石只)의 2소생 비 운대(雲代) 【□□】생,
지평(砥平) 접비 막비(莫非)의 1소생 노 귀만(貴萬) 【□□】생,
신계(新溪) 접비 덕지(德之)의 2소생 비 유금(有今) 【□□】생,
고양(高陽) 접비 분이(粉伊)의 1소생 노 황석(黃石) 【□□】생. 끝[印].
◇ 넷째 아들 유학(幼學) 위(瑋)의 몫
파주 율곡원 난자답 10복 8두락,
또 답(畓) 5복 4두락,
기자전(器字田) 8복,
욕자전(欲字田) 6복.
서울 접비 성덕(成德)의 3소생 노 복견(福堅) 임인생,
파주 접노 우산(禹山)의 2소생 비 중개(中介) 【□□】생,
강릉(江陵) 접비 소금(小今)의 1소생 노 황경(黃景) 【□□】생,
비 감실(甘實)의 4소생 비 【□□】생,
영천(永川) 접비 말이비(末伊非)의 7소생 노 흔리동(欣里同) 정유생,
9소생 노 희동(希同) 갑진생, 비 흔리(欣里)의 1소생 비 희비(希非) 갑진생,
홍원(洪原) 접비 내은이[內卩伊]의 1소생 노 손씨(孫氏) 병인생,
노 가지금이(加知金伊)의 2소생 노 도채(道采) 병인생,
동(同) 노 1소생 비 돌비(乭非) 【□□】생,
고원(高原) 접비 덕실(德實)의 1소생 노 개똥[介屎] 신묘생,
비 분장(粉莊)의 1소생 노 황남(黃男) 계사생,
비 철비(哲非)의 3소생 비 막덕(莫德) 갑자생,
노 금정(金丁)의 3소생 비 똥비[㖯非] 기묘생,
영천(永川) 접노 말이동(末伊同)의 1소생 노 대은동(大卩同) 병진생. 끝[印].
◇ 서모(庶母) 권(權)의 몫
파주 율곡원 난자전 4복,
욕자전(欲字田) 2복,
여주(驪州) 동면(東面) 대거리원(大去里員) 이자답(李字畓) 9복 12두락.
파주 접비 사량지(思郞知)의 2소생 노 풍산(豊山) 【□□】생,
3소생 비 풍비(豊非) 갑오생,
홍원(洪原) 접비 내은이[內卩伊]의 4소생 노 의상(義常) 임오생. 끝[印].
필집(筆執)
맏형[長兄] 생원(生員) 이선(李璿) [수결(手決)]
매부(妹夫) 강절 교위(康節校尉) 조대남(趙大男) [수결(手決)]
둘째 아우 유학(幼學) 이번(李璠) [수결(手決)]
둘째 매부(妹夫)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 [수결(手決)]
셋째 아우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이(李珥) [수결(手決)]
셋째 매부 고(故) 학생 홍천우(洪天佑)의 처 이씨(李氏)
넷째 아우 유학(幼學) 이위(李瑋) [수결(手決)]
이 사료는 1566년(명종 21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집안에서
작성한 분재기이다. 분재기란 재산 상속을 기록한 문서이다.
재산 상속 문서는 분배하는 방식에 따라
화회문기(和會文記)•분급문기(分給文記)•깃부문기[衿付文記]•
별급문기(別給文記)•허여문기(許與文記) 등 여러 종류로 나뉜다.
화회문기는 사후에 유서나 가족 간 합의에 의해 재산을 나눌 때 작성하는 것이고,
분급문기는 재주(財主) 생전에 재산을 나눌 때 작성하는 문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유산의 법정상속 비율을 정하고 문서 양식을 통일했으며,
토지와 집 및 노비를 상속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럴 경우 관청에 공증을 받게 했고, 문서에는 증인의 서명을 갖추게 했다.
또 작성일과 재산 분배 내용을 적고, 상속자들의 서명과 수결을 받고 있다.
마지막에는 필집(筆執)이라 하여 작성자를 명시했다.
이 문서의 크기는 가로 257㎝, 세로 48㎝로 현재 보물 제4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개 조선 시대에는 재산 분배를 위해 문서로 분재기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분재기는 아버지가 죽기 전 직접 재산을 분배해 준 문서인 분급문기(分給文記)와,
아버지가 죽은 후 형제들이 모여 재산을 분배하는 화회문기(和會文記)로 구분하였다.
이 분재기는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李元秀)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재산 분배 상황을 기록한 화회문기(和會文記)로,
이이를 비롯한 7남매와 서모인 권씨 등에게 배당한 토지와 노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문서의 맨 첫째 줄에 ‘가정 45년(1566) 병인 5월 20일
동복하회구의(嘉靖四十五年丙寅(1566)五月二十日同腹和會口議)’라고 써서
동복형제들이 1566년에 모여 합의한 결과임을 나타내고 있다.
재산의 분배 기준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거하여 정하였다.
재산 배정은 우선 선조들의 각종 제사와 수묘(守墓)를 위한 가옥•토지•노비를 배정하고,
이어서 맏아들인 생원 이선(李璿), 맏딸 병절 교위(秉節校尉) 조대용(趙大勇)의 처,
둘째 아들인 유학 이번(李璠), 둘째 딸인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의 처,
셋째 아들인 이조 좌랑 이이, 셋째 딸인 고(故) 학생 홍천우(洪天祐)의 처,
넷째 아들인 유학 이위(李瑋) 등 7남매와 서모인 권씨 등에게
남겨주는 토지와 노비를 적고 있다. 마지막 부문에는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오늘날의 서명인 수결(手決)을 표시하였고, 딸들은 사위가 대신 수결에 참여하였다.
이 문서는 율곡이 41세 되던 해에 작성된 것으로
조선 전기 재산 상속을 통한 사회 제도 및 경제 제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이 분재기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시집간 자매에게도
재산을 균등히 분배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어
조선 후기의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 체제에서 분배되던
재산 분배 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栗谷先生男妹分財記」
嘉靖四十五年丙寅五月二十日 同腹和會
【同】議
右立議段, 父母邊田民乙, 分衿爲昆, 漏落奴婢陳告者, 先賞一口後,
長幼次序, 以依大典施行爲乎事是置. 祭祀應行事件乙, 同議磨鍊後, 錄爲臥乎事.
一 擇兄弟一人爲有司, 凡祭祀乙, 宗子與有司, 同議奉行爲乎矣,
宗子家有故爲去等 有司家行祭事.
一 凡忌祭乙, 毋得輪行, 皆行于宗子家爲乎矣. 每年子孫等, 各出米助祭,
親子女則出十斗, 親孫子女則出五斗, 親曾孫子女及外孫子女則出二斗事.
一 凡奉祀田畓所出, 奴婢身貢及助祭之米等乙, 宗子與有司同監收合,
藏于宗子家或有司家, 只用于祭祀事.
奉祀條
瓦家一坐, 坡州栗谷員難字畓八十四卜內十四卜八斗落, 梨川伏染字田七卜,
坡州接奴元同良産四所生奴唜石年乙巳, 奴禹山三所生奴禹成年丙午,
江陵接婢銀鍾一所生婢內卩今年壬寅, 印.
墓田
坡州栗谷員難字畓八十四卜內十四卜八斗落, 斗文里員空字畓三十七卜內十八卜七斗落,
傳字田六卜, 空字田三卜, 空字田十九卜, 田六卜, 田十五卜內十卜, 印.
墓直
坡州接奴元同二所生奴靑山年乙酉, 奴禹山五所生奴思郞福年壬戌,
洪原接婢莫非一所生奴文孫年丙寅, 同奴二所生婢丹春年乙卯, 三所生婢丹時年壬戌, 印.
一子, 生員璿衿
古楊州畓東邊十斗落又五斗落, 垈田北邊一日耕, 新溪接婢栗伊末所生奴今山年癸巳,
婢末▩..▩婢于音德年丙申, 京中接婢成德二所生婢內卩伊年丁酉,
坡【州】接奴禹山一所生婢德介年戊戌, 永川接婢末非三所生婢欣今年丁亥,
四所生奴欣里金伊年己丑, 龍安接婢名時二所生奴命福年甲辰,
新溪接奴靑山五所生奴洪孫年丙寅, 婢于音德一所生奴銀松年壬子,
金堤接婢玉杯一所生奴連世年辛巳, 婢允月一所生婢半月年丙午,
同婢一所生婢豆非年乙丑, 京中接婢無齒二所生婢業德年壬午,
洪原接婢內卩伊三所生婢孫非年丙子, 咸興接奴訥叱石良産一所生婢今德年甲寅,
慶州接婢欣德一所生婢欣進年丙辰, 印.
一女 康節校尉趙大男妻衿
坡州栗谷員欲字畓十六卜又十二卜合十斗落, 絲字田二十九卜, 高陽伏佛非畓改字四卜六斗落,
墨字反畓四斗落, 坡州接婢思郞知一所生奴豊年年丙午, 京中接奴乭孫三所生奴春孫年壬辰,
永川接婢末非五所生婢欣里德年辛卯, 成川接婢銀今四所生婢月之年辛卯,
朔寧接婢加里知三所生婢豊德年壬辰, 洪原接婢萬千二所生婢德內年戊戌,
奴莫山一所生婢介屎年乙丑, 高原接婢內卩非一所生婢玉德年壬午,
江陵接婢獻德四所生奴守石年戊寅, 高陽接婢石德三所生奴今石年庚午,
交河接婢孝道介四所生奴乭石年乙丑, 江陵接婢甘實三所生奴洪伊年己酉,
千代一所生奴于音山年甲午, 婢內卩今一所生婢龜守年癸亥,
龍安接奴元孫一所生婢名時年庚辰, 同婢三所生奴春風年癸丑, 印.
二子 幼學璠衿
坡州栗谷員難字畓八十四卜內十四卜八斗落, 欲字田八卜, 難字田三卜㖙同加耕田半日耕,
永川接奴唜山一所生奴末石年壬辰, 婢末非二所生婢欣月年甲申,
高陽接婢石德五所生婢粉伊年庚辰, 洪原接婢萬千四所生奴于音金伊年乙卯,
婢孫非二所生奴千孫年辛亥, 高原接婢內卩非六所生奴今守年甲午,
婢粉莊二所生奴世國年辛丑, 婢內卩從一所生奴權春年庚申,
咸興接婢中今末所生奴訥叱乭伊年, 同奴三所生奴年, 洪原接婢內卩伊二所生婢萬千年庚午,
江陵接婢閑從一所生婢大卩今年, 海州接婢欣伊七所生婢唜德年辛卯,
京中接奴金伊江一所生奴元伊年丁未, 坡州接婢于音非一所生奴暹同年戊戌,
婢思郞知四所生婢金德年庚子, 印.
二女 忠義衛尹涉妻衿
坡州栗谷員難字畓八十四卜內十四卜八斗落, 欲字田十三卜田一卜,
朔寧接奴加里知二所生奴康哲年戊子, 京中接婢成德三所生婢內卩介年辛丑,
洪原接婢萬千一所生奴億眞年癸巳, 婢內卩伊五所生奴莫山年丙戌,
奴義常四所生婢加知今年甲子, 高原接婢粉莊三所生婢內卩從年癸卯,
奴德斤一所生奴德守年丙午, 坡州接奴阿乙同二所生奴禹山年癸酉,
星州接奴石只一所生奴仁元年, 金堤接婢寶盃二所生婢無常年辛卯,
海州接婢欣伊三所生奴㗯金伊年壬申, 新溪接婢漢今一所生奴貴千,
永川接奴唜山二所生婢萬月年丙申, 龍安接婢名時一所生婢粉從年辛丑,
砥平接奴希叱仇之一所生奴希孫年丁未, 印.
三子 佐郞珥衿
坡州栗谷員難字畓八十四卜內十四卜八斗落, 孫字田五卜, 覆字田十二卜, 欲字田二卜,
坡州接婢古邑之一所 生奴古邑同年癸巳, 同婢二所生婢古邑德年己亥,
京中接婢業德一所生奴守環年辛丑, 朔寧接奴一龍一所生婢芿叱德年甲午,
星州接婢銀今二所生婢月非年乙酉, 新溪接婢德之三所生奴有孫年壬辰,
洪原接婢莫非五所生婢內卩非年乙酉, 奴文孫一所生奴玉只年癸卯,
奴義常二所生奴世國年癸丑, 三所生奴世番年己未, 婢萬千一所生婢金保屎年,
咸興接奴訥叱乭伊二所生婢今花年壬戌, 永川接婢末伊一所生婢欣里年辛巳,
江陵接婢末乙德二所生婢甘實年己卯, 京中接婢柳雲一所生奴順環年丙辰, 印.
三女 故洪天佑妻衿
坡州栗谷員難字畓八十四卜內十四卜八斗落, 又畓二十卜內五卜, 東邊四斗落,
欲字田二十七卜, 高山接奴億石一所生奴古公年己亥, 二所生奴入沙里年癸卯,
永川接婢欣里二所生奴希山年丙午, 奴唜山三所生奴鹿滿年丁未,
龍安接婢永代一所生婢千非年丁未, 洪原接婢孫非一所生奴貴千年丙申,
奴義常一所生婢內卩春年乙巳, 高原接奴世國一所生婢年,
金堤接婢寶盃三所生奴守知年甲午,
龍安接奴元孫二所生婢永代年, 京中接婢柳雲三所生奴命環年乙丑,
羅州接奴石只二所生婢雲代年, 砥平接婢莫非一所生奴貴萬年,
新溪接婢德之二所生婢有今年, 高陽接婢粉伊一所生奴黃石年, 印.
四子 幼學瑋衿
坡州栗谷員難字畓十卜八斗落, 又畓五卜四斗落, 器字田八卜, 欲字田六卜,
京中接婢成德三所生奴福堅年壬寅, 坡州接奴禹山二所生婢中介年,
江陵接婢小今一所生奴黃景年, 婢甘實四所生婢年,
永川接婢末伊非七所生奴欣里同年丁酉,
九所生奴希同年甲辰, 婢欣里一所生婢希非年甲辰,
洪原接婢內卩伊一所生奴孫氏年丙寅,
奴加知金伊二所生奴道采年丙寅, 同奴一所生婢乭非年,
高原接婢德實一所生奴介屎年辛卯,
婢粉莊一所生奴黃男年癸巳, 婢哲非三所生婢莫德年甲子, 奴金丁三所生婢㖯非年己卯,
永川接奴末伊同一所生奴大卩同年丙辰, 印.
庶母權衿
坡州栗谷員難字田四卜, 欲字田二卜, 驪州東面大去里員李字畓九卜十二斗落,
坡州接婢思郞知二所生奴豊山年, 三所生婢豊非年甲午,
洪原接婢內卩伊四所生奴義常年壬午, 印.
筆執
長兄 生員 李璿 (手決)
妹夫 康節校尉 趙大男 (手決)
次弟 幼學 李璠 (手決)
次妹夫 忠義衛 尹涉 (手決)
三弟吏曹佐郞 李珥 (手決)
三妹故學生洪天佑妻 李 氏
四弟 幼學 李瑋 (手決)
□ 율곡선생은 가난뱅이가 아니라 부자였다.
2018-01-08 김현국
◇ 율곡은 정말 가난하게 살았을까?
율곡선생에 대한 현세의 평가는 청렴과 가난을 꼽는다.
훌륭한 정치가이며 학자이기에 그 청렴함과 가난은 더욱 빛났다.
이에 대해 학계와 연구가들은 아무런 의심도 회의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율곡은 사후 제자들이나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필요이상으로 신격화되었고
청렴함과 가난함으로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다.
후대의 기록에는 율곡은 식솔들과 형제들까지 먹여살리느라고
늘 가난했으며 굶주렸다고 한다. 율곡은 스스로도 가난하다고 했으며
당시의 문인,정치인들이 율곡의 가난함을 학자의 청렴함으로 칭송했다.
우선 율곡선생과 동시대에 살았으며 율곡을 직접 만나고 온
허봉(1551~1588의) 의 기록을 보자.
대체로 이숙헌이 이곳에 온 것은 본래 전원(田園)을 넓게 열고
종족(宗族)을 모두 모아서 같이 살고자 생각했던 것인데,
일은 뜻과 같지 않았고 집 일[家業]이 궁핍[伶仃]하여서 미음죽도 잇지를 못하였으니
참으로 연민(憐憫)할 만하였다. 지금 같은 때에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에게 궁벽한 산곡 속에서 먹는 것조차 가난하게 하였으니 세도(世道)는 알 만하였다.
또한 율곡 사후 인조 13년의 기록을 보자.
인조 13년 을해(1635,숭정 8) 5월13일 (임술)
오윤겸과 조익이, 문묘 종사 건에 관계하여 내린 답을 듣고 글을 올리다
집이 가난하여 형제가 모두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그의 처가는 재산이 조금 있어서 장인 노경린(盧景麟)이 서울에 집을 사 주어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의 가난함을 차마 못 보아서
곧바로 그 집을 팔아 무명을 사다 나누어 주어 끝내 한 고랑의 터전도 없게 되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나갈 수 없는 자는 모두 불러다
같이 살며 죽을 쑤어서 함께 먹었습니다.
(*주* 노경린은 율곡의 장인)
위의 기록말고도 율곡은 가난하고 청렴했다는 기록은 많다.
특별히 율곡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기록은 없으니 청렴했다고 할수 있다.
◇ 그런데 율곡은 과연 가난했을까?
기록에 나온 시기를 다른 문헌과 율곡의 유산분배 기록시기를 파악해보면
저 시절 율곡의 집안은 큰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율곡 집안에서 나눈 유산 분배 기록인 율곡선생남매분재기[栗谷先生男妹分財記]이다.
명종 21년인 1566년, 율곡의 31세때 율곡의 4형제와 집안의 재산을 분배한 기록이다.
율곡집안의 분배재산은 상당하다.
즉 토지와 노비가 상속 대상이었는데
토지는 田 135卜 1.25日耕, 畓 163卜108斗落
노비는 奴68, 婢51 총119人으로 상당한 부호 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신사임당이 용인이씨에게서 받은 田畓, 노비17명이 포함된다.
이씨분재기에 의하면 奴80, 婢92, 미상1 총173人으로
외조모 역시 상당한 부호 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이원수가 죽은 5년 후에 형제들이 모여 재산을 분해했는데
이를 화회(和會)라고 하며 이 기록은 여러 가문의 것이 전해지고 있다.
율곡집안의 유산분재기록은 조선 전기의 기록이라 상당히 중요한 가치가 있어
보물 4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첫째 아들 선(璿)에게 논 15마지기와 텃밭 1일경(日耕), 노비 16명을,
첫째 딸에게 논 32복(卜) 10마지기와 밭 29복, 노비 16명을,
둘째 아들 번(璠)에게 논 14복 8마지기와 밭 11복 반일경, 노비 16명을,
둘째 딸에게 논 14복 8마지기와 밭 14복, 노비 15명을 상속했다.
(참고자료 : 중원대 이상주 교수의 율곡남매분재기 번역)
율곡이 논 14복과 밭 19복을 물려받았으며
노비만 자그마치 15명이나 유산으로 상속받았다. 이 물려받은 노비 또한
10세부터 40세까지의 생산력이 높은 노비가 15명중 10명이나 되었다.
참고: 노비 15명을 집안에 두었다면 다른 모든 요소 배제하고
쌀소비량이 얼마인지 살펴보면 율곡 선생이 사망한 후 비슷한 시기인
1591년 오희문(吳希文)이 기록한 쇄미록[瑣尾錄]에 쌀 소비량이 나와 있는데
당시 성인남자 한 사람이 한끼에 쌀 7홉을 먹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으로는 조선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 : 1788∼1863)이 쓴
백과사전류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에 보면
성인남자는 쌀 7홉, 여자는 5홉, 아이는 2홉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당시 율곡의 노비들이 먹는 쌀을 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양이 필요했으며 그 시대에는 지금보다 한끼에 쌀을 약 3배먹었고
하루 두끼를 먹었다. 이는 대략 계산하여도 1년에 쌀 100가마가 필요하였다.
율곡남재분재기에 상속받은 노비들은 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노비인지
외거노비인지 나와 있지 않으나 만일 주인의 관직을 따라 가서
수발을 들 경우에는 월 쌀 5말, 베 반필을 받았다.
◇ 그럼 율곡의 사후 얼마나 과장되고 미화되었는지 살펴보자.
인조 13년의 오윤겸과 조익의 상소문에 올린 율곡에 대한 내용에는
“형제들의 가난함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라며
장인에게 물려받은 집을 팔아 형제들과 나누어 가졌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율곡의 형제들은 거의 똑같이 유산을 상속했으며
심지어 시집간 딸도 공평하게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자료출처 : 박도식 관동대 교수 논문 : 율곡남매 분재기 연구)
또한 허봉의 기록에는 집안이 궁핍하여 미음죽도 먹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또한 율곡의 청렴함을 강조하거나 당시 허봉을 만났을 때
율곡이 몸이 약해 앓고 있던 상황에서의 오해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당시 율곡이 만났을 때는 36세 때 인데 율곡이 땅과 논을 합쳐서
33복을 물려받은 시기는 31세 때로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 혹시 율곡은 5년 만에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다 날렸던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율곡은 형제들과 유산을 분배하던 해에
사간원 정원과 이조좌랑을 지냈다. 이조좌랑은 정5품인데 당시 정5품의 녹봉은
쌀 28석 (1석은 144kg) 보리 5석, 콩 10석, 면포 11필을 녹봉으로 받았다.
이 시기에 녹을 받지 않고 거부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 또한 율곡은 형제들을 함께 부양하기 위해 늘 가난했다는 말은 맞을까?
당시에는 벼슬을 하는 자식이 형제를 다 보살피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7명의 형제간은 율곡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물려받았으며
서모 또한 15복의 논과 밭을 물려받았다.
노비만 합쳐서 모두 119명을 형제들이 물려받은 집안이
모두 죽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 그렇다면 왜 율곡은 가난하고 청렴한 이미지만으로 남게 되었을까.
이것은 당대의 동인, 서인, 남인, 노론, 소론등 파벌과 당파싸움의 영향에 밀리지 않으려
제자들이나 후대에 의한 과장과 미화가 덧붙여진 결과이다.
또한 선비의 명예에 많은 재산은 어울리지 않기에
청렴함을 강조하고자 실제보다 크게 과장하였다.
(그런 이유로 임진강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며 평생을 막역지우로 지냈던
우계와 율곡의 친분이 제자들에 이르러서는 멱살잡이를 할 만큼
서로를 견제했던 기록들이 문헌에 나온다)
율곡을 억지 미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은 오히려 선생의 업적을 해치는 일이다.
율곡은 있는 그대로를 보아도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다.
글쓴이는 문헌연구를 통해서 율곡에 대한 일화들이나 기록들이
실제보다 미화되다 못해 신격화를 시키는 사례들을 보았고 바로잡기를 하여왔는데
기록에 의하면 율곡은 가난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었으며
화석정 정자를 보수하고 새로 지을 수 있는 부자였다.
율곡이 미음죽도 못 먹는다는 기록만으로 율곡의 가난함을 칭송하는 문헌을 쓰던
그 즈음에 율곡과 형제들은 7남매의 재산분배가 노비만 119명이며
논밭이 수 만평임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황해도 석담에도 학교인 은병정사를 지을 만큼 재산이 있었다.
이런 기록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오로지 율곡은 가난했다고만 하며
선비사상과 가난을 연결시키는 것은 후세의 연구자들이 사실을 왜곡하며
위인을 욕보이는 것이다. 이미 충분하게 알려진 자료들만 검토해도
확인되는 내용들을 연구하지도, 검증하지도 않고 율곡과 가난을 연결시켜
청렴함을 부각시키려는 사학자들과 연구자들은 큰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본 연구는 율곡의 화석정 정자 바로 아래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위인의 일화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던 평범한 촌사람의 연구이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파주를 사랑하고 율곡을 사랑하는 이들이
본 연구에 오류가 있음을 밝혀준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화석정 사람 김현국 –
□ [율곡선생남매분재기]연구 (박도식)
낙민 추천 0 조회 30 15.12.09
「율곡선생남매분재기」
이 사료는 1566년(명종 21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집안에서
작성한 분재기이다. 분재기란 재산 상속을 기록한 문서이다.
재산 상속 문서는 분배하는 방식에 따라 화회문기(和會文記)•분급문기(分給文記)•
깃부문기[衿付文記]•별급문기(別給文記)•허여문기(許與文記) 등 여러 종류로 나뉜다.
화회문기는 사후에 유서나 가족 간 합의에 의해 재산을 나눌 때 작성하는 것이고,
분급문기는 재주(財主) 생전에 재산을 나눌 때 작성하는 문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유산의 법정상속 비율을 정하고 문서 양식을 통일했으며,
토지와 집 및 노비를 상속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럴 경우 관청에 공증을 받게 했고,
문서에는 증인의 서명을 갖추게 했다. 또 작성일과 재산 분배 내용을 적고,
상속자들의 서명과 수결을 받고 있다. 마지막에는 필집(筆執)이라 하여 작성자를 명시했다.
이 문서의 크기는 가로 257㎝, 세로 48㎝로 현재 보물 제4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개 조선 시대에는 재산 분배를 위해 문서로 분재기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분재기는 아버지가 죽기 전 직접 재산을 분배해 준 문서인 분급문기(分給文記)와,
아버지가 죽은 후 형제들이 모여 재산을 분배하는 화회문기(和會文記)로 구분하였다.
이 분재기는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李元秀)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재산 분배 상황을 기록한 화회문기(和會文記)로, 이이를 비롯한
7남매와 서모인 권씨 등에게 배당한 토지와 노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문서의 맨 첫째 줄에 ‘가정 45년(1566) 병인 5월 20일
동복하회구의(嘉靖四十五年丙寅(1566)五月二十日同腹和會口議)’라고 써서
동복형제들이 1566년에 모여 합의한 결과임을 나타내고 있다.
재산의 분배 기준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거하여 정하였다.
재산 배정은 우선 선조들의 각종 제사와 수묘(守墓)를 위한 가옥•토지•노비를 배정하고,
이어서 맏아들인 생원 이선(李璿),
맏딸 병절 교위(秉節校尉) 조대용(趙大勇)의 처,
둘째 아들인 유학 이번(李璠),
둘째 딸인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의 처,
셋째 아들인 이조 좌랑 이이,
셋째 딸인 고(故) 학생 홍천우(洪天祐)의 처,
넷째 아들인 유학 이위(李瑋) 등 7남매와
서모인 권씨 등에게 남겨주는 토지와 노비를 적고 있다.
마지막 부문에는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오늘날의 서명인 수결(手決)을 표시하였고, 딸들은 사위가 대신 수결에 참여하였다.
이 문서는 율곡이 41세 되던 해에 작성된 것으로
조선 전기 재산 상속을 통한 사회 제도 및 경제 제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이 분재기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시집간 자매에게도 재산을 균등히 분배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어 조선 후기의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 체제에서 분배되던
재산 분배 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경향신문] 율곡 이이 7남매의 ‘분재기’
경향신문 2019. 5.4. 도재기 문화에디터
율곡 이이 비롯 4남3녀가 부모 타계 뒤 나눠가지며 작성한 ‘화회문기’…
‘남녀 차별’ 없이 출생순으로 ‘공평하게’ 땅·노비 배분 후 각자 서명
재산 배분 앞서 제사·묘 돌보는 ‘봉사조’ 등 공동재원 설정…
당시 가족제도·제사 관습·아들과 딸의 지위 등 사회상 읽을 수 있어
유산 다툼·효도계약서 오르내리는 지금과 달리
갈등 없이 돈독한 우애를 바탕으로 화목하게 합의된 기록에 새삼 ‘눈길’
450여년 전인 1566년 5월20일, 율곡 이이의 형제자매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셋째 아들인 이이를 비롯, 4남3녀 7남매다. 아들들은 본인이, 딸들은 남편이 대신 참석했다.
남편과 사별한 셋째 딸의 참석 여부는 불분명하다. 7남매가 어렵게 모인 것은
아버지(이원수·1501~1561), 어머니(신사임당·1504~1551)가 남긴 재산을 배분하기 위해서다.
이날 있었던 7남매의 유산분배 내용은 상세히 기록한 문서로 전해진다.
보물 제477호인 ‘율곡 이이 남매 화회문기(和會文記)’다.
건국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화회문기는 7남매와 더불어
서모(아버지의 첩) 권씨 몫도 기록, 모두 8명의 재산분배 결과를 담고 있다.
조선 중기의 대표학자인 율곡 이이(1536~1584)의 7남매는
어떤 유산을 어떻게 나눠가졌을까? 그들의 분배 방식·내용에 호기심이 솟는다.
사실 재산의 상속·분배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심의 대상이다.
사유재산제도가 정착된 이래 유구한 세월 동안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고,
때론 당대 사회경제의 영향을 받았다. 분배를 둘러싼 자식들 사이의 갈등의 역사도 깊다.
이미 고려시대에 자식들 간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
론 물신·배금주의가 지배적인 지금은 더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율곡 이이 남매 화회문기’는 분배 내용도 흥미롭고 중요하지만,
16세기 조선 중기 사회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한 문화재다.
재산상속과 상속재산의 분배는 한 사회의 거울이다. 상속·분배 과정을 보면 그 사회의
가족제도, 아들과 딸의 지위, 사회상, 나아가 당대 가치관까지 읽어낼 수 있어서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의 ‘단원 풍속도첩’(보물 제527호)
◇ 남녀 차별 없이 아들·딸 공평하게
부모 재산을 자식들이 분배한 내용을 기록한 옛 문서를 ‘분재기(分財記)’라 한다.
분재기는 상속·분배의 시점이나 방법, 관청의 개입 여부 등에 따라
여러 형식, 이름으로 나눠진다. 거칠게 요약하면, 부모 등 재산의 주인이
생전에 자식들에게 직접 분배한 분재기에는
‘분급문기(分給文記)’ ‘허여문기(許與文記)’ ‘깃부문기’ 등이 있다.
재산 주인이 축하·사례 등을 위해 특별 상속한 ‘별급(別給)문기’ 등도 있다.
부모가 타계한 뒤 자식들이 유산을 나눠가지며 작성한 문서로는 ‘화회문기’ 등이 있다.
이이 7남매 분재기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바로 ‘화회문기’다.
‘화의(和議)문기’라고도 하는 화회문기는 형제자매가 모여
화목하고 돈독한 우애 속에 서로 합의하에 분배한 내용을 기록했다.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문서로 작성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 말에는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54년에 윤광전이 아들 단학에게 노비를 재산으로 상속한 문서
‘윤단학 노비 허여문기 및 입안’(지정십사년 노비문서·보물 제483호)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분재기, 특히 후기 분재기는 많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희귀하다.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책, 분재기 같은 문서 등 대부분의 기록문화유산이 불탔기 때문이다.
이이 7남매의 분재기, 즉 화회문기는 가로 257㎝, 세로 48㎝의 한지에
분배 내용을 초서로 빼곡하게 적고 있다. 문서는 당시 화회문기 양식을 따랐다.
첫 문장에는 ‘1566년(명종 21년) 5월20일에 형제자매들이 모여 합의’했음을 밝힌다.
이어 <경국대전>(조선시대 기본 법전)을 근거로 분배함을 덧붙이고
조상 제사를 어떻게 모실지를 기록했다. 제사는
‘돌아가며 지내지 말고 맏아들의 집에서 지내되 형제 중의 한 명을 유사로 삼아
맏아들과 상의’토록 했다. 또 해마다 자녀·손자녀들이 쌀을 내놓아 제사를 돕도록 했다.
이어 개인별 배분에 앞서, 제사와 묘를 돌보는 데 필요한
‘봉사조(奉祀條)’ 등 공용재원을 설정했다.
논과 밭·노비로 구성된 공용재산은 오직 제사·묘 관리에만 사용할 것도 명시했다.
이이 7남매 분재기는 이어 맏아들-맏딸-둘째 아들-둘째 딸 등
출생 순서로 7남매와 서모 권씨가 나눠가진 재산을 구체적으로 적었다.
맏아들인 이선의 경우
옛 양주에 있는 논 15두락(마지기)과 밭,
서울과 파주·영천 등에 살고 있는 노비 총 16구(명) 등을 배분받았다
(노비는 재물로 여겨졌기에 문서에 ‘명(名)’ ‘인(人)’이 아니라 ‘구(口)’로 표현돼 있다).
맏딸 이씨(조대남의 처)는 논 10두락과 밭·노비 16명 등을,
차남인 이번은 논 8두락과 밭·노비 16명 등을,
차녀 이씨(윤섭의 처)는 논 8두락과 밭·노비 15명 등을 받았다.
삼남인 이이는 논 8두락과 밭·노비 15명 등을,
삼녀 이씨(고 홍천우의 처)는 논 12두락과 밭·노비 15명 등을,
사남은 논 12두락과 밭·노비 15명 등을 받았다.
서모 권씨 몫으로는 논 12두락과 밭·노비 3명이 배분됐다.
분재기의 끝에는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쓰고 각자 수결(手決·서명)을 했다.
다만 딸들은 남편이 수결하거나 남편이 없는 경우엔 수결 없이 이름만 적었다.
서모 권씨는 이름, 수결도 없다.
이이 7남매의 유산분배 내용을 보면, 통념과 달리
남녀 즉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분배했다는 것이 주목된다.
노비 숫자는 물론 논밭의 경우 비옥한 정도나 위치 등을 고려했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재산분배의 근거가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아들딸 구별 없이 유산의 균등한 분배를 규정한다. 실제 이이 남매의 분재기뿐 아니라
조선 성종 때인 1480년 상산 김씨 가문의 16대손인
김광려·광범 형제와 딸 김씨(한건의 처)가 작성한
‘김광려 3남매 화회문기’(보물 제1020호) 등 다른 분재기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적어도 유산분배에서는 남녀평등이 실현된 것이다.
1480년 작성된 ‘김광려 3남매 화회문기’(보물 제1020호)
◇ 핵심 재산은 땅, 그리고 119명의 노비
‘이이 남매 화회문기’ 등 조선 초중기 분재기들은
유산의 상속·분배에서 남녀 차별이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조선시대의 16세기 이전과 고려시대에는 남녀 차별이 적었다.
아들딸 구별 없이 공평분배했고, 제사도 돌아가며 지내기도 했다.
아들에게 재산이 많이 배분되자 딸이 소송을 제기해 이긴 사례도 있다.
땅과 노비 등을 상속받은 여성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주거나 팔 수도 있었다.
여성의 경제력 소유와 재산권 행사는 당시 여성의 지위를 드러낸다.
호주도 아들만이 아니라 부인, 딸이 되는 여성호주제가 가능했다.
1123년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온 서긍이 당시 문물과 풍속을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여성들은 이혼·재혼도 쉬웠다.
그러나 조선 중후기에 들면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체제가 다져진다.
이이 7남매의 분재기에서도 기존과 달리 제사를 맏아들 집에서만 지내도록 해
장자의 제사 독점이 나타난다. 17세기가 되면 장자의 제사 독점은 확고해지고
유산도 아들, 특히 장자 중심으로 배분된다.
유산분배에서 여성들의 배제, 이혼·재혼의 제한 등 남녀 차별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체제가 공고화되는 것이다. 사실 남존여비로 대표되는 남녀 차별은
수백, 수천년 이어져온 전통사상이 아니다.
그저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 유교적 지배질서 속에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굳어지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이 7남매 분재기를 통해 당시 가족제도나 제사 관습,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또 재산의 핵심이 논밭 같은 토지, 노비임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분재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는 땅, 그리고 인력인 노비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분재기에 기록된 노비의 숫자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이가 소유하게 된 15명 등 분배된 노비가 무려 119명에 이른다.
이들 노비는 파주는 물론 성주, 함흥, 영천, 강릉 등 전국에 흩어져 있다.
당시엔 노비들의 자식도 노비이므로 이이를 비롯한 남매들은
노년에 더 많은 노비를 소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정의 달, 5월이다 보니 이이 7남매의 분재기가 새삼 다시 읽힌다.
유산분배를 놓고 형제자매가 모여 화목하고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모습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선 부모와 자식 사이의 재산상속,
또 재산분배를 둘러싼 자식들 사이의 다툼이 심심찮게 뉴스가 되고 있다.
심지어 상속을 놓고 부모와 자식 사이엔 이른바 ‘효도계약서’가 언급된다.
자식들이 재산만 상속받고 늙은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니,
여러 부양조건을 단 ‘효도계약서’를 맺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대법원은 ‘부모를 잘 모시겠다는 조건으로 재산을 상속받은 자녀가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면 받은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부모는 어린 자식을 먹여 키우고, 성장한 자식은 늙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당연하다.
너무나 마땅히, 당연하게 여겨져 천륜(天倫)으로 불리던 부모·자식의 관계마저
이젠 ‘효도계약서’를 통한 계약관계로 전락하는 현실이 슬프고 안타깝다.
나아가 자식들끼리 유산분배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속재산은 자식들에게 ‘보약’이다.
부모들은 애써 모은 재산이 자식들에게 보약이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유산 다툼을
불러 오히려 ‘독약’이 되기도 한다. 이 시대 우리 사회, 가족상의 민낯이다.
지난해 이맘때, 가정의 달을 맞아 ‘도재기의 천년향기’에선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보물 1683-2호·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을 다뤘다.
하피첩은 다산이 강진 유배 중 아내가 보내온 낡은 노을빛 치마(하피)를 잘라
첩을 만든 뒤 자식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은 서첩이다.
다산은 하피첩에서 “나는 벼슬이 없으니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다”며
“대신 두 글자의 신령한 부적을 남기니 박하다고 여기지 말라”고 썼다.
다산이 재산 대신 자식들에게 물려준 두 글자는
‘一字曰勤, 一字曰儉’(일자왈근 일자왈검),
바로 근면과 검소를 뜻하는 ‘勤’(근)과 ‘儉’(검)자다.
다산은 “근면과 검소는 좋은 논밭보다 나아 한평생을 쓰고도 남는다”고 강조했다.
문득 물질적 재산인 ‘물고기’ 대신
무형의 ‘물고기 잡는 법’을 유산으로 남기는 게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 |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건국대박물관
경향신문 도재기 문화에디터 jae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