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한국 지폐에 도안된 그림 이야기(22/02/22, Sunny Mornings / Peder B. Helland)

이름없는풀뿌리 2022. 2. 22. 06:37
한국 지폐에 도안된 그림 이야기 1. 오만원권 [신사임당, 묵포도도, 16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31.5*21.7cm, 간송미술관] [어몽룡, 월매도, 비단에 먹, 119.2 × 53cm, 국립중앙박물관] [이정, 묵죽도, 비단에 수묵, 127.5×71.5㎝, 간송미술관] 2. 오천원권 [신사임당 초충도중, 16세기초, 32.8x28.0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3. 천원권 [정선, 溪上靜居圖, 1746, 40.1*25.6, 리움미술관] □ 이매창[李梅窓, 1529 ~ ?] (두산백과) 요약조선 중기의 화가로 신사임당의 맏딸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매창(梅窓)은 호이다. 조선 중기의 화가로 유명한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첫째 딸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는 손윗누이가 된다.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조말생(趙末生)의 4대손인 조건(趙鍵)의 아들이자 강절교위(康節校尉)ㆍ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등을 지낸 조대남(趙大男)과 결혼해서 조영(趙嶸) 등을 낳았다. 이매창은 신사임당이 26세 때인 1529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를 닮아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조선 중기 명필로 유명한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에게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특히 풀벌레 그림을 잘 그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에는 이매창이 그린 〈매화도(梅花圖)〉가 전해진다. 지본수목화(紙本水墨畵)로 30 × 20.5㎝의 크기인 이매창의 〈매화도〉는 동생인 옥산(玉山) 이우(李瑀)가 그린 〈국화도(菊花圖)〉와 함께 화첩으로 만들어져 보존되고 있으며, 이 화첩은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매창의 둘째아들인 조영도 글씨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그린 〈군산이우도(君山二友圖)〉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그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매창은 남편인 조대남과 함께 경기도 파주의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 매장되었다.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현재 이이와 신사임당을 비롯해 이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씨 부인의 합장묘, 이매창의 아들인 조영의 묘 등이 있다. 이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5호인 율곡선생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 어몽룡(魚夢龍, 1566년 ~ 1617?) 조선의 화가이다. 자는 견보, 호는 설곡, 본관은 함종이다. 매화를 그리는 데 특히 뛰어났으며, 그 중에서도 〈흑매도〉는 유명하였다. 황집중의 포도, 이 정의 죽과 더불어 ‘3절’로 불리었다. 그린 그림으로는 〈일지매〉, 〈월매도〉 등이 있다. □ 이정(李霆 , 1554년 ~ 1626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 세종의 현손으로 익주군(益州君) 이지(李枝)의 아들이다. 석양정(石陽正: 正이란 조선 때 비교적 가까운 왕손에게 준 작호로 정3품 堂下에 해당함) 에 봉해졌다. 뒤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되었다. 묵죽화에 있어서 그는 유덕장(柳德章)·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그는 묵죽화뿐 아니라 묵란·묵매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회복 후에는 더욱 힘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묵죽화들이 대개 수문(秀文)의 묵죽화와 같이 줄기가 가늘고 잎이 큰 특징을 보인다. 이에 반하여, 이정의 묵죽은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 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특히 굵은 통죽(筒竹)을 잘 그렸는데, 통죽의 굵은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즉, 통죽의 마디를 묘사함에 있어서 양쪽 끝이 두툼하게 강조된 호형선(弧形線)으로 마디의 하단부를 둘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약간의 간격을 떼고 아랫마디를 짙은 먹으로 시작해서 점차로 흐려지게 하였다. 이 기법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묵죽화가들에 의하여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는 「풍죽도」에서 대나무의 줄기와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대나무의 탄성(彈性)을 잘 나타내었다. 화면의 공간감(空間感)을 살리기 위해 짙은 먹과 흐린 먹의 구별이 뚜렷한 대나무들을 대조시켰다. 또한 묵죽화 또는 묵란화에서 그는 당시 유행하였던 절파 화풍(浙派畫風)의 영향을 받아 강한 농담의 대조를 사용한 토파를 묘사하였다. 같은 시대의 최립(崔岦)과 허균(許筠)은 그의 묵죽화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이정구(李廷龜)는 “소동파(蘇東坡)의 신기(神氣)와 문동(文同)의 사실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였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중국의 묵죽화는 송대(宋代)의 것보다 명대(明代)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는 소동파나 문동의 묵죽 양식도 하창(夏昶)이나 또는 그 뒤를 따른 주단(朱端) 등의 명대 화가들에 의하여 변형된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강한 필력과 잘 잡힌 구도를 보이는 이정의 작품들은 조선 묵죽화의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년작(記年作)으로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인 검은 비단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죽도(竹圖)」가 만력갑오(萬曆甲午), 즉 1594년에 해당하여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이다. 만년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죽도(雨竹圖)」가 있다. 여기에는 천계임술(天啓壬戌), 즉 1622년의 연대가 적혀 있다. 이밖에도 낙관이 있는 묵죽화는 많이 전한다. 이정이 인물화를 그렸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문월도(問月圖)」 두 폭(개인소장)이 알려져 있다. 이들 두 그림은 모두 절파 양식을 강하게 보이는 인물화이다. 신사임당의 맏딸 이매창은 이정의 월매도를 습작하며 그림을 익혔다고 알려져 있다. [좌측-매창/월매도 우측-어몽룡/월매도/1564~?.] □ 정선(鄭敾, 1676-1759)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아버지는 시익(時翊)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현 광주광역시)·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 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 청하현감을 지냈다. 또 자연·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30세 전후의 금강산 그림 등을 통하여 젊었을 때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40세 이전의 확실한 경력을 입증할 만한 작품이나 생활 기록 자료는 없다. 그가 중인(中人)들이 일하고 있었던 도화서 화원(圖畫署畫員)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원래 사대부 출신으로 신분상의 중인은 아니며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한 양반이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그림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막연한 중국의 자연을 소재로 하던 시나 문학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산수화의 화제(畫題)는 빛을 잃고, 대신 우리 자연으로 대치하게 되는 시기에 태어난 그는 마침 중국에서 밀려 들어오는 남종화법(南宗畫法)이나 오파(吳派)와 같은 새로운 산수화 기법에 접하게 되었다. 또 당시 유행하게 된 시서화 일체 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 사이에 참여하여 자신의 교양을 높이거나 창작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이병연(李秉淵) 같은 시인과의 교우를 통하여 자기 회화 세계에 대한 창의력을 넓히고 일상적 생활의 주제를 회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연을 다룬 그의 화제들은 당시 기행문의 소재였던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한 것들이다. 그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웠던 서울 장안의 사철의 경치들, 특히 인왕산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문인지우(文人知友)들과 관련되는 여러 곳의 명소나 특수한 고장들의 자연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사도(故事圖) 같은 중국적 소재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성리학자들의 고사도 제작에서 그의 관심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정선, 국보제216호, 仁王霽色圖,1751년(76세), 비단에 담채, 79.2×138.2cm]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畫法)이나 채색화(彩色畫)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삼성미술관(三星美術館) 소장의「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는 인왕산의 둥근 바위 봉우리 형태를 전연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었다. 즉, 바위의 중량감을 널찍한 쉬운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하여 표현한다[적묵법(積墨法)]. [정선, 通川門岩圖, 조선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131.6×53.4㎝,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의 「통천문암도(通川門巖圖)」에서는 동해안 바위 구조를 굵직한 수직선으로 처리하여 세밀한 붓놀림이나 채색·명암 등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두드러진 붓 쓰임의 한 예는 서울 근교나 해금강은 물론 우리 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묘사법이다.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린다. [국보 217호/ 금강전도金剛全圖, 산수화, 조선 영조, 호암미술관] 삼성미술관 소장의 1734년 작 「금강전도(金剛全圖)」(130.7×95㎝)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을 하나의 큰 원형 구도로 묶어서 그렸다. 이는 기법상 천하도(天下圖)라는 전통적인 지도 제작 기법에 근거하며, 금강내산을 한 떨기 연꽃 또는 한 묶음의 보석 다발로 보는 종래의 자연 묘사시에서 조형적 원리(造形的原理)를 따오는 기발한 착상이다. 우선, 원형을 대강 오른쪽의 골산(骨山: 금강내산의 화강암 바위로 된 삐쭉삐쭉한 모습)과 왼쪽의 토산(土山: 금강내산의 수림이 자라는 둥근 멧부리)으로 구분하되, 골산은 예리한 윤곽선으로, 토산은 그의 독특한 침엽수법(針葉樹法)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다. 그 다음 이 원형 외곽을 엷은 청색으로 둘러 여타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산 자체만을 돋보이게 한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원의 중심이 되는 만폭동(萬瀑洞)에 일단 모이게 하여 구도상의 중심을 이룬 다음, 화면의 앞쪽으로 흘러 장안사(長安寺) 비홍교(飛虹橋)를 지난다. 이 그림은 실제의 자연을 새로 해석하여 조형화한 좋은 예이며, 오른편 위쪽에 쓴 제시(題詩)의 내용과 형태가 일치한다. 정선의 회화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 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寫意畫: 묘사 대상의 생긴 모습을 창작가의 의도에 따라 느낌을 강조하여 그린 그림)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이러한 그의 창의력은 그가 즐겨하였다는 역(易)의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의 소재·기법 어느 것에나 구애됨이 없이 소화하였으며, 심지어 지두화(指頭畫)까지도 실험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가까운 교류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 등 중국 고전 문학과 사상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을 조형 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미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시화첩(詩畫帖) 같은 것은 선비들간에 시 짓고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 놀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실경 산수화를 다루는 경우에는 시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정선은 이미 말한 노론의 명문인 안동 김씨네와의 관계에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과 우수한 수장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창흡(金昌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파벌에만 치우치지 않은 매우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의 계속적인 승진은 영조가 세제로 있을 때 위솔이라는 직책으로 있었기 때문에 입은 배려로 생각된다. 이것이 노년에도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하겠다. 정선은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 화법(謙齋派畫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최북(崔北)·김응환(金應煥)·김홍도(金弘道)· 정수영(鄭遂榮)·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 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은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畫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또한 초년기의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화가로서의 생애를 전부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 [정선, 老子出關圖, 견본담채, 29.6x23.5cm, 대구 왜관수도원] [김홍도, 老子出關圖, 간송미술관] Sunny Mornings / Peder B. Helland